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창세기 48:1-7 / 언약의 아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8:1-7 / 언약의 아들

정인순 2019. 3. 27. 21:48

음성          동영상       Youtube


언약의 아들 


이근호
2019년 3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48:1-7


(48:1)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48:2)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48:6)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48:7)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내가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 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무턱대고 살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알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모르고 살면 세월만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소용없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곧 죽어가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에 대한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밝혀줄 증거들이 야곱 인생 막판 터져 나왔음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번창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며 이러합니다. 자식을 많이 놓으면 자동적으로 번창할 것이고 그 번창한 자식들이 힘이 합치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생각은 다릅니다. 자식과 땅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해하는 바와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상호 경쟁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들의 안일한 생각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부모가 있어 자식이 자동적으로 생겨난다고 여기는 것은 언약의 개입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천국의 자식은 그런 식으로 번창하거나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인간이 간절이 찾고 탐색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심모한 진리를 알았다 하지라도 그것을 보관하는 인간의 마음이 이미 엉망이라서 멋대로 그 뜻을 망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실천은 인간들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이루어집니다. 인간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는데 있어 인간들의 부모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야곱에게 약속한 자식은 야곱에게 있어 ‘죽은 자식’이라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 뒤에 비로소 나타납니다. 야곱은 자신이 죽은 줄로 알았던 그 요셉이 애굽으로 낳은 자식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존재를 중요시합니다.

결코 요셉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 간주하기에 이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야곱이 받은 언약에 의해서 새로 생겨난 자식으로 봅니다. 보이지 않는 언약이 인간을 덮이게 되면 그 인간은 ‘없음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있음’을 부정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즉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식의 자식은 천국에서 받지 아니합니다. 그 예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스마엘은 천국의 사람이 아니라 지옥의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이삭은 천국의 사람이 되는데 이 이삭을 낳은 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에 의해서만 천국갈 사람이 생겨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26-2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머니’의 기능은 ‘자식 생산’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어머니가 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자녀를 생산하는 기능이 하늘에서 주신 언약으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는 곧 땅에서 육에 속한 어머니들이 자식을 낳는 것과 차별화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없는 자식만을 가지고 천국 가는 자식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12아들이 있고 이들이 부인을 만나 놓고 놓고 놓으면 약속대로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는 그런 결과를 두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어느 인간이 되었던 단 한 명의 천국갈 자식을 인간들은 낳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이 언약의 개입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애굽에서 나온 두 자식,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이라는 부인의 죽음을 거론합니다. 그 부인이 두 번째 자식이 낳으면서 죽어가는 자신의 슬픈 상황을 담아 자식 이름을 ‘슬픔의 아들’로 지으려고 했습니다.(창 35:18) 그런데 옆에 있던 야곱이 말립니다.

새로 태어난 자식 이름이 잘못 지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짓는 것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야곱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된 자식이라면 자기 부인 라헬이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죽음의 자식’ 혹은 ‘없음의 자식’의 방식이 아니라는 언약의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외에는 다른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던 시절에 태어났던 그 자식 둘과 나머지 자식이 구별하는 겁니다. 죽은 자식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자식들’이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태어난 자식이 ‘언약의 자식 생산’의 모델로 보는 겁니다.

일체 인간의 육의 자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언약에 준해서는 ‘없든 데서 생겨난 자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육의 생식 능력이 전혀 포함되지 않아야 천국가는 백성인 겁니다.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야곱은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이 낳은 자신의 자식 등급으로 끌어올립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항은 손자 둘을 자식 반열에 올리는 아니라 죽었던 자식인 요셉을 ‘없는 야곱의 동급’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자신의 언약적 분신으로 요셉을 올려세우므로서 요셉에게 줄 땅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없는 존재’로서 ‘언약의 있음’으의 자리를 홀로 차지해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분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 내에 언약의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없음의 자리, 죽음의 자리가 중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자손은 비로소 ‘잉태치 못한 자식으로 하늘의 별만큼 채워지는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신약 때,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자리인 주의 자리에 앉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진리를 발견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우리 자체를 아예 만들어버리는 식으로 천국백성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3강-창 48장 1-7절(언약의 아들)

1903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7페이지입니다.

창 48:1-7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야곱이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말이 많습니다. 그냥 곱게 자기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다 가니 너는 네 인생 살아라. 나는 내 인생 살고 너는 너대로 가거라.” 이렇게 하면 될 터인데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이것은 야곱의 인생이 야곱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구원받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작동하는 원리를 지금 야곱은 죽어가면서도 요셉에게 발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 내용이 언약에 대한 내용입니다. 언약의 본질에 관해서 자기가 죽어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을 때 이야기를 하지 왜 죽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생각을 할 텐데 야곱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사느냐 죽으냐’ 하는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쉽게 말해서 먼저 죽으나 나중 죽으나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원리에 의해서 죽었느냐, 어떤 원리에 의해서 살았느냐, 그 원리가 동일하다면 살아도 그 원리 안에 있고 죽어도 그 원리 안에 있는 겁니다. 언약의 원리 안에 있으면 언약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나 현재 언약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전부 다 한 가족들입니다. 이 사실을 죽어가면서 언급을 하는 이유는 야곱자기의 미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죽어가는 야곱과 살아 있는 자기자손들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내가 죽는다고 해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나이 많은 사람은 죽어서 떠나고 젊은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

상식적으로 하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이 드는데 내가 죽었다, 내가 살았다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누구에 의해서 나는 살고 있느냐, 어떤 원리에 의해서 살고 있느냐, 죽으나 사나 그 원리를 내비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안중요하고,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안중요하고, 살아 있는데 어떤 원리 때문에 살아 있고, 죽어가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죽어가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살고 있는 그 원리가 무엇이냐를 야곱은 지금 살아 있는 자식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노동자가 나이 많아서 직장에서 은퇴한다 할지라도 공장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노동자가 은퇴하면서도 공장을 걱정하고 공장을 생각하는 것처럼 내 한 몸 죽는 것, 개인이 죽는 것보다도 나하고 내 자식들과 엮여 있는 그 원리가 야곱이 그동안 평생 일했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원리가 중요하지 내가 은퇴하는 그것을 가지고 애달아하거나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죽어가면서 말이 많은 거예요. 마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그 언약의 원칙을 죽어가는 그 시점이 가장 확실한 내용을 보이는 기회처럼 여기고 죽어가면서 되게 분주해요. 바빠요.

본인이 죽어가면서도 챙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원리를 보다 더 명백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을 안 하거든요. 살아 있는 것을 마치 당연시 여긴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그동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어떤 권리인양, 당연한 권리처럼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를 보여준 거예요. 그리고 보여준 그것, 내가 죽는 그것까지도 보여줄 그 언약의 내용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다 필요한 하나님의 조치가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처럼.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 관통하는 원리 같은 것은 알고나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원리에 대해서 야곱은 확정된 구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원리는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언약에 의하면 이미 언약적으로만 진행된다는 확정된 진리, 확정된 원리로서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언약이 확정된다면 개인적으로 소소하고 나는 인생성공 했니, 실패 했니, 라고 따질 가치조차 없는 거예요. 인간은 평가대상도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잘했다, 못했다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원리에 대해서 네가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만 보시는 거예요.

세상이 이미 확정된 원리대로 움직인다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논리적으로 봐서는 세상 원리,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일관되게 관통해서 흐르는 그 확정된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세상 밖에 나가서 있는 사람만 그것을 알 수가 있지요.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은 부분을 만져서는 모르고 코끼리 바깥에서 코끼리 전체의 윤곽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코끼리의 덩치는 이렇다.”고 전체를 설명할 수 있듯이 이 세상 밖에 있는 안목을 가져야 이 세상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정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확정된 진리를 품고 그 안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은 매사가 안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안정되어 있다는 말은 자기의 행동에 따라서 울고불고 하지 않는 인생을 산다는 겁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울고불고 할 때는 확정된 진리를 가지고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좀 잘했다 싶으면 웃고 못했다 싶으면 울고, 그렇잖아요.

확정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것이 옳은 것인지도 몰라요.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타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들이. 이 버스의 종점이 어디인지는 버스 바깥에서 봐야 알 수가 있거든요. 바깥에서 보는 안목을 야곱이 가졌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죽을 때 죽더라도, 사람이 실패할 때 하더라도 이 세상 확정된 원리는 알고 죽어야 되거든요.

사실은 아무리 부지런히 알아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모르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제가 늘, 오늘도 만났지만 늘 만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그걸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끌다가 어떻게 끝장나는지 그 일관된 원리를 아십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아, 저 사람은 그것 모르고 살아가는구나.’ 그 정도는 성도라면 판정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순간순간의, 손해를 봤다든지 이익을 봤다든지, 거기에 울고불고 매달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는 죽음으로 가는 시간만 자꾸 낭비되는 거예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산 것도 아니지요. 엉망진창이지요. 사람들이 세상을 알기 위해서 자꾸 성경정보나 지식이나 유명한 누구의 교훈 같은 것이나 자꾸 끌어 모으는데 백날 끌어 모아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인이 망가졌는데.

사람은 자기 자신이 망가졌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이 오게 되면 자기 안에도 좋은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집에 냉장고가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친척들이 오면서 싱싱한 산 낙지, 굴비 생 것, 그런 것들을 가져왔을 때 한 이틀 지나면 냉장고에서 썩은 냄새나지요. 인간자체가 고장 난 냉장고 같아서 아무리 좋은 것 집어넣어도 성경말씀 달달 외워도 안에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소용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이 많은 이유는 야곱의 개인적인 체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 바깥에서 보는 안목이 이미 야곱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봐야 돼요.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은 무엇인가? 언약은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세상 만들기 전에, 이 세상이 없던 데서 있음 이전에, 이 세상이 없었을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야곱 안에 이미 들어와 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쏙 집어넣은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는 버스 바깥에서 봐야 하듯이 세상이 어디로 끝장나는지는 세상 바깥에서 세상 전체를 일관되게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만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어서 이렇게 진행되고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그 바깥이 뭐냐?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언약이란 뭐냐?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누가 짰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짜신 거예요. 성령은 그걸 전달하셨고요. 그 언약에 의하면 세상 다 살지 않더라도, 야곱은 지금 137세지만 137세까지 살아도 그 언약이 137년보다 길어요. 야곱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주신 창세전의 정보가 야곱이 137년을 살든, 7천년을 살든 7만년을 살든 상관없이 아무리 많은 긴 세월이 있다 할지라도 언약은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

이미 결정 난 원리에 준해서, 거기에 따라서 세상은 움직이고 세상은 진행되는 겁니다. 우리가 몇 년 살았다고 세상을 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니까 세상은 언약대로 움직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야곱은 죽어가면서도 언약을 토해내고 있는 겁니다.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을 알려줄 때 언약의 내용을 왜 자식 되는 요셉에게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때, 여기서 우리는 언약에 준해서 자식을 생각해야 돼요. 언약에 준해서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언약에 준하지 않고, 언약에 의하지 않고 세상적인, 육적으로 자식을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부모에 의해서 낳아진다, 부모에 의해서 태어난다. 우리가 알기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래서 부모 돌아가더라도 자식은 남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하면 그 상식은 잘못된 거예요. 부모가 언약을 알고 있으면 자식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찾아내는 것이 아니에요. 진리는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그 때 그 때 만들어져 나오는 겁니다.

자식은 내가 낳는 것이 아니고, 내 육체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에요. 내 안에 있는 언약이 없는 자식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네 상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얼른 수긍하기 힘든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부모 있으면 자식 낳겠지.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로 끝나요. 부모가 자식 낳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세상 자식은 부모가 있으면 자식을 낳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이고요, 영적인 것, 언약적인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식을 낳을 때는 아버지 있기에 자식을 낳는다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자식이 낳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 언약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냐 하면,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어머니에요.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자식 낳으라고 아들 낳고 그 아들도 언약자식이라서 천국 간다.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는 속아 넘어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개척교회 했던 젊은 목사와 사모가 있다고 한다면 일단은 교인수가 하나도 없더라도 자식을 낳으면 교인수가 늘어나지 않겠느냐? 어떤 목사는 자식을 열두 명 낳은 목사도 있거든요. 구미에. 아직도 구미에 사는 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그 교회는 열두 명 일단 먹고 들어가는 거예요. 자식을 열두 명 낳았으니까.

그런데 열 두 명 가운데 성도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열두 명을 목사부부가 낳았다고 해서 성도나 백성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나 백성은 부모가 낳지를 못해요. 왜? 잉태치 못한 거니까. 잉태치 못해야 된다는 것이 언약 안에 들어 있어요.

부모가 성도라고 자식이 성도되는 것 아니에요. 부모가 진짜 성도라면 나는 어떤 노력을 해도 내가 성도인 자식을 낳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돼요. 그게 언약의 확정된 원리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언약의 자식이다. 왜? 내가 낳았으니까’ 라는 생각은 정말 야곱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터무니없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아버지 신앙 좋았으니까 요셉도 신앙 좋겠지. 그런 식은 성경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법칙이에요.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성도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성도는 아브라함이 낳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 이삭이거든요.

그러면 부모가 이삭을 낳았다고 우길 수가 있잖아요. 그걸 끊어주기 위해서 이삭에게는 죽음이라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나를 죽임으로서 나는 네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 모리아산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는 사건이에요. 이삭이라는 자식이 있더라도 거기서 육적인 아브라함의 손을 떼야 되는 겁니다.

내가 육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올시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낳은 자식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육의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약속이 낳은 자식이 이삭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에게도 요셉은 약속이 낳은 자식이어야 돼요. 약속이 낳은 자식이라는 것을 야곱은 어떤 식으로 죽어가면서 설명하느냐?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이것은 창세기 35장 16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라헬이 벧엘에서 에브랏까지 가다가 갑자기 난산이 되었어요.

17절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라헬이 아들을 낳고서 갑자기 죽어버려요.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자기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니까, 그래서 슬프니까 ‘베노니’라고 했는데 남편이 그 이름을 바꿔요. 하나님의 아들로 바꾼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육의 자식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개입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야곱이 죽어가면서 왜 요셉보고 하느냐? 요셉이 낳은 자식이 있어요. 오늘 본문 5절에 나옵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야곱 자기거래요.

사실은 손자인데 손자로 보지 않고 내가 낳은 아들로 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이 낳은 아들입니까? 아니잖아요. 요셉이 애굽에 가서 낳은 자식이라는 말이지요. 애굽의 여자를 만나서 낳은 자식이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이 두 자녀거든요.

그럴 때 야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셉이 두 자식을 가질 그 때 야곱에게 요셉은 이미 죽은 자식이에요. 지금 야곱이 요셉을 만나고 난 뒤에 살았다는 것을 알았지 그 전에는 야곱에게 요셉은 계속해서 죽은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이라고요. 없는 자식인데 와서 만나니까 두 손자가 생긴 거예요.

보통 우리가 보면 요셉이 애굽에서 낳았다고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관된, 관통하는 언약의 자식으로 보는 겁니다. 야곱자신에게 주어진 언약이 자식을 만들 때는 육으로 통하지 않고 반드시 어떤 경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경과가 뭐냐? 반드시 없는데서, 죽은데서 태어난 자식일 경우에만 언약이 개입한 흔적과 증거를 가진 자식이라고 보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야곱이 죽어가면서도 말이 많은 이유는 언약에 대해서 지금 벌어진 상황에 견주어서 이 모든 상황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맞다면 이것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언약이 낳은 자식이에요.

창세전의 계획이 낳은 자식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의 계획이 낳은 자식은 인간이 갖고 있던 내 자식이라는 것과 라이벌 관계, 경쟁관계에 있어요. 아브라함의 약속, 땅과 씨거든요. 자손이거든요. 땅과 자손에 대해서 언약이 진행하면서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내 방식대로 경쟁을 하고 있는 추이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자식입니다, 한다면 야곱입장에서 그것은 애굽식이라는 거예요. 애굽 여자와 결혼해서 둘을 낳았으니까 요셉은 생각하기를 ‘아버지에게 손자들입니다.’라고 할 때 야곱은 그 두 손자를 손자로 보지 않고 아들로 보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이 만나게 된 그 두 손자 말고 그 이후에 요셉이 애굽의 부인 사이에서 낳은 형제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들까지도 과연 야곱이 자기 아들로 간주하겠느냐,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것은 또 아니라는 거예요.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은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고 여겼을 때 생긴 자식이고 그 뒤에 동생들이 줄줄이 나온다면 그것은 야곱이 이미 요셉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생겨난 자식들이기에 언약적인 의미를 담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게 6절에 나옵니다. “이들 후의” ‘이들’이라는 것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 야곱의 두 손자를 말합니다.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형들의 명의 하에. 여기서 형들이라는 것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에요. 야곱이 무엇과 무엇을 차별화시키느냐 하면, 야곱이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몰랐을 때 낳았던 요셉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들과 야곱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나온 손자들과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차별화는, 야곱으로서는, 요셉의 엄마가 누구냐가 중요하다가 본 거예요. 요셉의 엄마가 누구냐 하면 라헬이에요. 그래서 라헬을 끄집어낸 겁니다. 내 아내 라헬이 난산하면서 죽은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에 의해서 필히 일어나야 할 일로 보는 거예요. 왜? 천국의 백성의 엄마는 이 땅에 없어야 되니까.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했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 때에 누가 제일 방해가 되느냐 하면, 세상적인 엄마가 자기자식 낳는 그 사실이 하나님이 천국 보내기 위한 백성 만드는 것, 자식 만드는 것에 가장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거예요. 3대째 목사가정이면 신자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러면서도 3대째 목사가정이니까 남들보다 어떤 어드벤티지가 있는 것으로, 천당 가는데 어떤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것으로 착각들을 하는 겁니다. 그게 오히려 방해가 되는데요.

제 말이 굉장히 어렵습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을 받으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요. 그러면 누가 우리를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만들었잖아요. 아버지가 우리를 낳았다고요. 아버지가 우리를 낳는데 누가 방해를 놓느냐 하면, 육적인 아버지가 그 사실을 자꾸 흐릿하게 만들고 훼방한다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야곱은 손자 둘을 아들 반열에 올렸다고. 아닙니다. 손자 둘을 아들 반열에 올린 것이 아니고 요셉을 아버지인 자기와 등급을 같이 한 거예요. 야곱 옆에 두 번째 야곱이 요셉이 되는 거예요. 왜? 요셉은 죽었으니까. 야곱은 아버지고 요셉은 아들인데 놀랍게도 야곱은 그 아들 되는 요셉을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자리를 대체할 죽음의 야곱으로서 자기죽고 난 그 자리에 요셉을 얹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셉의 땅은 없어요. 요셉지파는 없는 거예요. 계속 죽어 있는 것이 열 두 지파가 야곱언약에 의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엔진처럼 가동되어야 되기에. 죽음이, 없음이 있음을 살리는 그 언약의 원칙이 계속 유지되려면 요셉이라는 인간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존재해야 되는 겁니다.

손자를 아들 반열에 올리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자기와 동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요셉에게서 나온 자식 둘은 자동적으로 요셉처럼 야곱의 자기 아들 반열이 되는 거예요. 왜? 등급이 하나씩 높아졌으니까. 손자는 아들로, 아들은 아버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이 땅에 오신 아들을 주의 자리로 등급을 올리기 위한, 신약시대에 하나님 우편에 동급으로 앉는다는 그 언약의 진실이 구약을 통해서 미리 우리에게 예고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낳은 자식은 천국에 못가요. 하나님이 낳은 자식만이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들이 결국은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나님자리에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신이,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성도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그 주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언약은, 그 모든 내용은 마지막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내용이 낱낱이 노출됩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아버지 따로 있고, 아들 따로 있고, 그렇게 간격이 벌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아버지 자리에, 하나님이 있던 오른편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언약을 다 이룬다는 조건에 준해야 그게 가능한 거예요.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은 아담의 아들이에요. 흙의 아들이에요. 육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육의 아들로 살기 때문에 육의 아들의 원칙은 누굴 낳고, 낳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생기고 또 그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만, 이 세상이 이렇게 번성하고 부모자식관계가 형성된다고 우리는 철석같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가 혹시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성도라면 자식에게 어떤 이득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 말씀한대로 아브라함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맞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육의 자식 외에는 낳을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의 자식은 어떻게 나오는가? 엄마가 없어야 돼요. 이 땅에는 어머니가 없어야 되지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어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지 이 땅에 없어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없는 우리를 만들어서 데려가는 거예요.

성도는 뭐냐? 오늘 제 설교의 결론은 뭐냐? 성도는 없었는데 주님이 언약으로 만들어낸 것이 성도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인간이 망가졌는데 정보를 찾아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어떤 성경지식이나 십자가, 이런 것을 끌어 모아서 성도되는 것이 아니에요.

친히 주께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만들어내는데 없는 분, 다른 말로 죽은 분, 다른 말로 없는 분, 죽어 없어진 분이 우리를 만드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언약이 우리를, 아들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거예요. 성령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언약을 이루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우리는 새로 지음 받은 아들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세상 아들과 차별화가 되어야겠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열 두 아들 가운데 엄마가 죽은 경우가 누구냐? 라헬이에요. 라헬이 자식이 둘 있어요. 요셉과 베냐민인데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언약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서 이삭처럼 죽은자 역할을 했는가? 그것은 요셉이거든요.

그러면 요셉은 언약 안에서 죽은 자가 된다면 언약은 이 땅에서 구체적인 언약의 자식을 낳거든요. 언약이, 네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번창 한다고 할 때 새끼 낳는다고, 육이 육을 낳는다고 번창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계속 하늘의 별만큼 생성해 낼 때 그게 바로 번창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지요.

그 원리가, 중심이 있기 때문에 요셉의 자리가 한 자리인데 둘이 들어가는 겁니다. 요셉은 없음으로서 작동하고 그 안에 그 없음의 결과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두 자리를 차지함으로서 그 두 지파로 인하여 열 두 지파가 열세지파화 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엔진부분, 언약의 중심부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터전, 야곱언약의 완성으로서 그것을 야곱은 요셉에게 죽기 전에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시키는 대로 한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없었던 우리가 새로 지음 받았기에 이제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확정된 진리로 통한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자기 인생에 자기가 손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