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길
이근호 2019년 3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47:7-10
(47:7)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47: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47: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사람끼리 대화할 때, 각자 자신이 현재 세상을 보는 안목을 전제로 해서 묻기도 하고 답변하기도 합니다. 바로왕은 편하게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연세가 얼마입니까?” 그것은 곧 바로 자신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나는 이 땅 안에 거주지를 잡고 거기에 흘러간 세월의 기간으로 나이를 염두에 둔 질문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답변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보낸 세월의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마땅함을 전제로 해서 답변합니다. 사라지기 위해 소요된 시간을 답변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바로왕과는 야곱이 달리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서로가 속해 있는 세상 자체가 다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두 개의 상반된 세상이 동시에 같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본질적으로 소개하자면 이러합니다. 하나는 ‘언약이 없는 세상관’이요 다른 하나는 ‘언약이 있음을 아는 세상관’입니다.
야곱이 사라져가는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기존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관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는 겁니다. 같이 할 수 없고 합류할 수 없는 그런 세계가 바로 애굽나라의 생리라는 겁니다. 반면에 야곱을 비롯해서 언약에 의해 등장된 자기네 식솔들은 애굽나라와는 차이나는 속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겁니다.
이 애굽나라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입니다. 사라져서는 아니되는 존재인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자기 거처를 만들고, 비록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손들이 차지할 그 땅에 대해서는 영원히 집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고향’이라고 부릅니다.
고향은 이 눈에 보이는 땅의 일부입니다. 이 땅 말고 달리 고향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리 말합니다. 그 추가가 히브리서 11:13-14에 나옵니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본향이란 흔히 말하는 개인적으로 죽어서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언약에 의해 변화를 된 사람들에게만 인식이 되는 본향입니다. 개인의 장래의 운명이 우선이 아니라 언약의 실재가 우선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사람 사이에 차이난다가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나라자체가 차이나는 겁니다.
왜 이렇게 언급해야 하느냐 하며는 사적인 자질이나 능력이나 우수함의 비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나라 자체의 차이남입니다. ‘나는 이런 존재다’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나라가 이러하다’고 소개하기 위해 각자의 나라에서 출발한 겁니다.
각 나라마다 원리가 따로 구분됩니다. 세상 나라의 원리는 선과 악으로 미래를 결정짓는 나라입니다. 개인적으로 착하면 좋은 세상 가고, 개인적으로 악하면 나쁘고 고생이 심한 나라에 간다는 것이 이 세상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투자와 관심을 가지고 인격 도야에 매진했느냐에 관심 갖게 됩니다.
즉 자신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려고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것이 이 눈에 보이는 비-언약적 세상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언약적 세계는 예수님 해주기 나름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공적과 공로만이 부각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손댈 것이 없게 하는 원리가 천국의 원리입니다. 언약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그냥 언약의 능력으로만 변화되는데 그 변화의 과정은 선악의 원리에서의 벗어남입니다. 아예 자기 자신의 미래는 자기가 손쓸 수도 없이 망가졌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자기가 손대어서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음을 압니다. 낯선 나라, 언약의 나라, 새로운 나라의 원리는 이 세상 말고 따로 다른 나라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이런 나라의 원리로서 자기 인생을 보게 되면 이런 안목이 적용됩니다. 시편 39:5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자신이 여기 있다고 우겨도 주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요 없어져가는 존재’인 겁니다. 허망한 유령 같은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일체에 미련같은 것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벌벌 떨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을 계속 ‘있어야 하고 이 땅을 붙들고 어쨌든 살아남아야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길’이란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을 말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개인적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국가의 이름입니다. 애곱이라는 나라 안에서 장차 새로운 국가가 생산되고 잉태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둘이 됩니다.
요한복음 18:36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 세상의 대표자에게 대꾸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애굽나라 안에 ‘없던 나라’ 이스라엘이 새롭게 생기게 하시는 이유는, 악마가 노리는 표적으로서 등장시켜서 악마의 실존을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마치 ‘물가의 악어’가 호시탐탐 철모르고 물가로 나오는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이 세상은 짐승이 살고 있는 바다에 접해있습니다.
바다에 있던 악마의 세상의 속한 짐승들이 벌써 육지로 올라와서는 땅의 전체를 접수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짐승으로 점령된 육지의 나라에 악마의 표적이 될만한 인물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3-5)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나라입니다. 애굽이 대표하는 세상나라와 차별화 시켜서 영원한 언약의 나라를 만드는 그 씨앗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끄신 언약의 힘에 의해서 벌써 실시되고 있었던 겁니다. 전혀 각자의 작동하는 ‘각 나라의 원리’가 다릅니다. 언약의 완성으로 인해 천국은 그 모든 죄가 말소된 죄인들만 갑니다.
악마는 바로 이들 아들들을 노리고 그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오늘날도 달려듭니다. 우리는 그 차이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물과 새로운 땅, 곧 지상의 하늘나라의 경계선’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악마의 원리와 차별나는 방식으로 구원되었기에 악마의 표적이 되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0강-창 47장 7-10절(나그네길)1903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74페이지입니다.
창 47:7-10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는데 항상 누구에게 물을 때는 평소에 자기가 살아온 삶의 방식의 범주 안에서,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상대방에게 질문하게 되어 있어요. 바로는 자기가 이 땅에서 이런 기간 동안 살고 있습니다. 강조점이, 이 땅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것에 강조점을 두고 나이가 얼마냐고 물은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당신도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살아왔습니까, 라고 했을 때 야곱은 떠나는 식으로 답변을 해요.
“내가 나그네 생활을 한지 130년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기에 정착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하느냐? “내가 130년 나그네 생활을 했는데 우리 조상의 나그네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짧은 겁니다.”라고 해요. 당신은 이 땅에 주저앉고, 이 땅과 더불어 껴안고 기거하는 것으로, 거기에 강조점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데 야곱은 떠나는 쪽으로 강조점을 둡니다.
어느 땅에 정착하더라도 나그네 삶은 달라질 것이 없다. “어느 땅에 가더라도. 나그네에 있어서 ‘이곳이 내 땅’이라는 개념은 우리 조상, 우리 종족에게는 용납되지 못합니다.”라는 식으로 답변을 합니다. 바로는 왜 연세라는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눈에 보이는 그 땅, 그 세계, 그 현실 외에는 다른 현실, 다른 땅, 다른 세계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자기가 죽는다면 자기후손이 그 땅에 살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나그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이 곳이라면 나그네라는 말이 필요치 않지요. 나 다른 곳에 살 거예요, 라는 뜻이에요. 다른 곳에 살 것이라면 야곱의 입장에서는 현실이 두 개가 됩니다. 세상이 두 개가 돼요. 두 개의 세계관, 양쪽의 세계관을 야곱은 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경험하고 있지만 최종적으로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자기의 영원한 본향, 고향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세계는 손 털고 빠이빠이 해야 될 세상이라는 말이지요. 야곱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야곱의 인생 경험이 특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함께 있는 사람.
야곱이 약속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약속이 야곱을 소지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되면 약속에 소지된 사람, 약속에 포함된 사람은 소속의 문제에요. 구원이라는 문제가 내가 사적으로 얼마나 훌륭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이 세상에 두 개의 이질적인, 서로 대치가 되고 흡수통합이 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지금 이 현실 속에 같이 나란히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닙니다. 세계가 두 개가 들어와 있어요. 잘 들으셔야 돼요. 두 개의 세계가 들어왔다는 말은, 이 세상의 원리는 따로 있고 같이 들어와 있는 그 다른 세계의 원리도 따로 있어요. 그렇다면 내가 잘났고, 내가 훌륭하고, 내가 성실하다, 가 아니라 내게 속한 그 원리와 원칙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내가 훌륭하다, 가 아니라 내가 속한 나라가 돌아가는 원리와 원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잘되고, 교회 키우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보이는 것이니까. 그것 말고, 교회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원칙에 준해서 나는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쪽 세계의 원리원칙이 나를 그렇게 몰아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쪽 원칙에 의하면 나는 구차 없이 내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땅을 떠나야 될 나그네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자,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이 땅을 떠나야 되는 나그네. 목적지는 딴 곳에 있으니까 출발지가 여기 있더라도 도착지점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떠나야 된다는 말은 뭘 떠난다는 말이냐?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에 의하면 기존의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원칙과는 빠이빠이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기존의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그게 바로 선악체제입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받는다는 그 원리로부터 탈피되어야 돼요. 윤리도덕으로부터 탈피되어야 된다고요. 이 땅에서 내가 사적으로 나의 의, 나의 거룩, 깨끗하게 산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가야 될 세상의 원리하고는 대치되는 거예요. 더구나 이 세상에서는 개인의 역량에 의해서 개인의 미래가 결정되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잘났나에 따라서 거기의 성과급으로 우리의 운명과 미래가 보장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세상의 모든 자연스러운 자연종교와 그리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죄악된 것이지만, 자연스러운 인간의 품성이고 양심이에요.
그런데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원리나 원칙과 공통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은 옳다, 이것은 진리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반진리고 옳지 않아요. 거짓이에요. 어떻게 그걸 장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마지막 완성이 뭐냐 하면, 십자가기 때문에, 인간에게 버림받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는 버림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안 맞다는 거예요. 사고방식이 예수님사고방식과 인간의 사고방식이 공통점이 전혀 없어요. 안 맞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의 사고방식과 성도가 아닌 사람의 사고방식이 전혀 안 맞는 겁니다. 신자인 남편과 불신자인 아내와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신자인 아내와 불신자인 남편과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의외로 잘 맞아서 산다는 것은 좀 수상해요. 분명히 원리상 안 맞아야 되는데. 너무 양보를 많이 했는가. 내가 훌륭하고 너는 못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번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해요. 나는 훌륭하고 나는 잘났는데 너는 못났다, 가 아니고, 너는 잘났고 나는 못났다는 식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나를 둘러싼 원리원칙에서 차이난다는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얼마나 위대하고 우수하냐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원리원칙이 너는 다른 나라에 속하고 나는 이 나라에 속했다. 내가 이 나라에 속했으면 너는 필히 다른 나라에 속한 거예요. 두 개의 상반된 나라가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열심히 노력합시다, 하는 것은 전혀 지금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충고에요.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나라에서는 자기가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는 거예요. 담배피우다가 담배 끊으면 그것은 성과를 얻은 것이고, 술 먹다가 술 안 먹으면 성과를 얻은 것이고, 마약 하다 끊으면 성과를 얻은 거예요. 그만큼 우수하고 훌륭하고 자질이 개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언약의 나라에서는 사적인 성과라든지, 사적인 인품의 성장 같은 것은 일체 용납을 안 해요.
교회를 한 40년 다녔다, 50년 다녔다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제가 묻고 싶습니다. 40년 다녀서 어떤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내가 40년 전에는 아주 개판같이 살았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인품처럼 성숙되고 성화되었습니다, 라는 답변이 서슴없이 나와요. 개인이야기로 마감이 되더라는 말이지요.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고백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반대입니다. “전에는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나 자체로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나를 개선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세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원리원칙에 의해서 저는 구원되었습니다. 주님의 공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옛 술은 옛 부대에 담아야 되지요.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돼요. 술 자체가 달라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술 자체가 다르다는 말은 무슨 뜻으로 한 것이냐 하면, “너희들은 의인이나 잘해라. 기도하고 금식하고 의인놀이 잘해라. 내가 온 것은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라는 주님의 원칙은 일관됩니다.
변함이 없어요. 관심사를 나의 우수함에다 두시면 그것은 여전히 기존세계에서 못 빠져 나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적으로 내가 너보다 질적으로 났다는 이러한 배틀, 시합이나 하려 한다면 그것은 의식자체가 지금 기존의 세계에 그대로 속했다는 의식밖에 안돼요. 내가, 가 아니라 너는 무슨 원리 안에 들어있고, 나는 무슨 원리 안에 들어 있느냐를 물어야 돼요.
왜? 두 개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이러한 야곱의 특수성은 언약의 족장들의 특징 중 하나인데 나그네길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름의 변천과정이라고 보시면 돼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길, 그 길이 언약에 의해서 주도당한, 언약에 의해서 이끌림 당하는 특수한 길입니다.
그냥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이사 열 두 번 간다고 나그네길이라는 그런 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돌아다니다 어느 땅에 정착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이 땅에는 있을 곳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나그네길. 야곱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길, 그게 나그네길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뭐냐? 개인적 이름이에요.
왜냐하면 야곱은 형을 붙잡고 사기를 쳤으니까 너는 형을 속이는 자, 또는 남들을 속이는 자라가 해서 개인적 이름이 야곱인데 이스라엘은 국가적 이름입니다.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게 되면, 개인은 기껏해야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개인집안, 우리나라로 보면 같은 성씨라고 보면 되지요. 하나의 집안을 이루지요.
그러나 아무리 집안을 이루어도 단독적으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없습니다. 기존의 국가 안에서 자기 집안의 숫자가 늘어나는 그것은 가능할지라도 내 집안 따로 국가가 되어버리면 그 집안의 어른이 나중에 영원한, 새로운 국가의 시조가 되어버려요. 새로운 국가의 시조는 그 개인의 이름이 나라이름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야곱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자격으로, 한 집안의 자격으로 애굽나라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애굽이라는 나라 전체를 상대로 해서 그것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나라가 그 안에서 배태되고 새롭게 잉태되는 계기를 야곱언약을 통해서 개시가 된 겁니다. 이제부터 좀 논리가 복잡할 거예요.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에 그 사이에서 하나의 개인이 바뀌었다고 보지 마시고 그 바뀌는 과정 속에서, 나그네 길 속에서 언약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속으로 맞춰보세요. 제 처가의 아는 목사님인데 자기의 후손들 그리고 집안의 애들이 너무나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추석날 모여서 제사는 안하지만 시험을 쳤어요.
시험문제가 뭐냐 하면, 솔로몬의 아버지는 누구냐?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이름은 뭐냐? 이런 문제들을 냈어요. 솔로몬의 아버지 이름은 다윗이에요. 여러분이 다 알고 있기에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이에요. 애들이 교회는 다니니까 아는 것을 적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애한테 이렇게 문제를 낸다고 봅시다. 스페인의 축구리그에서 FC바르셀로나팀에서 뛰고 있는 메시라는 선수의 국적은 어디입니까? 애들은 대번에 알아요. 아르헨티나. 스페인의 레알마드리드팀에서 유벤투스로 이전한 선수 이름은? 호날두. 메시나 호날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거든요.
메시와 호날두라는 두 이름과 다윗과 이삭의 두 이름 사이의 차이점이 뭐냐는 거예요. 그것은 한쪽은 언약이 있고 다른 한쪽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쪽은 끝까지 나그네 길을 가든 어디에 정착하든, 토박이가 되든 끝까지 내 인생에요. 나로 시작해서 나로 계속 가는 인생이에요. 그런데 언약이 있는 인물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자기 몸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 몸으로 변천되는 효력, 효과, 힘을 언약으로부터 부여받는 사람이에요. 나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나그네길이라 했는데 그 나그네 길에 대해서 시편 39편 5절에서 아주 단출하게, 아주 멋지게 이렇게 표현했어요.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인생은 허망한 겁니다.
있었나? 삭제되고 제거되고 없어지는 겁니다. 인생은 없어지는 것. 다시 말해서 나그네는 긴 꼬리, 그림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인생. 이게 바로 언약 안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고백이에요. 인생은 살았는데 그 넓은 인생 손바닥으로 쥐어보니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이.
50년 살아보니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고, 백년을 살았는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어요. 죽을 때 결국 자기 본색대로 아무것도 없음, 하고 죽어버리는 거지요. 주께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인 모든 죽음이 그렇지 않느냐, 하지만 언약이 있는 사람은 그걸 사전에 미리 안다는 거예요.
나는 없는 존재라는 것,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나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거든요. 잠시 있었다, 에 비중두지 말고 결국은 잠시 있더라도 그것은 전의 이야기고, 결론은 뭐냐? 이 땅에 없는 존재로서 소멸되는 거예요. 일종의 유령 같은 겁니다. 언약 아래서만 그래요. 언약아래서 너는 유령 같은 존재고 없는 존재라고 할 때 그렇게 해서 나는 없어진다는 것을 너무 애달아하거나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렇게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언약은 그 현장에 남잖아요. 그게 언약의 나라에요. 내가 없어지고 주의 이름의 대체로서 그 나라에 사는 것,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언약의 이름으로, 언약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도 반드시, 필히, 그 언약에 매인바 되어서 그 나라에 합세해야 되는 존재가 성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미리 죽기 전부터, 나그네 인생부터 펄펄 언약의 냄새와 향기를 온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언약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라는 그 말입니다. 호날두만 생각하고 메시만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언약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모르지요. 그러니까 맨날 축구나 야구만 보고, 그저 재미있는 것 즐기면서 그냥 자기 딴에 나그네 삶을 사는데 그런 나그네삶이 아니고 나그네삶이라는 것은 본인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눈에 확실하게 들어오는 것들과 차이나는 것, 차별되는 요소를 자기 안에 인식해야 되지요.
눈에 보이는 세상과 차별되는 것, 차이나는 것. 당신은 어느 정도 오래 살았습니까, 라고 출생부터 묻는 것을 가지고 야곱은 자기가 사라지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답변합니다. “나는 결국 나그네로 사라질걸요? 나는 사라집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당신이 보기에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나그네로 간주합니다.”
인식 자체가 틀리지요. 태어남에 의미를 두는 것과 자기가 홀연히 없어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과의 차이, 답변의 차이입니다. 인식의 차이에요. 세상 살아가는 사고방식의차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 스데반의 모습과 사도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들은 이 땅을 그냥 떠나기 위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미련두지 않고 애착두지 않았어요.
그러면 여기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언약적 원리로 둘러싸였다면 그것이 실생활에서 삶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야 됩니다. 사람이 뭔가 무서워하고, 벌벌 떨고, 겁을 내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요? 정답을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래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안했다는 말은 내가 내 당도리를 하려고 하는 것, 내가 이 땅에서 뭔가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러나 언약은 우리를 나그네로 만드는 것이지 정착하라고 부추기지를 않았잖아요. 우리가 죽어도 손해날 것이 없다는 것을 언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이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주께서 나의 날을 손바닥만큼 되게 하시고. 손바닥을 모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지금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좀 자기 인생이 뜻대로 안되고, 기대한대로 안되었다고 벌벌 떨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유령이 어느 축구팀 응원하는 것 봤어요? 유령이 이번에 대통령이 꼭 누가 되어야 된다고 그거 우기겠습니까? 어차피 떠나야 될 남의 세계인데요. “이번에 그 사람이 대통령 안 되면 나 자살할거야.” 유령이 그런 발언 하겠어요?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되지요. 도피주의 아닙니다. 이것은 확신입니다. 도피주의가 아니고 제대로 안다는 뜻이에요.
언약 안에서 세상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엉터리인지 제대로 안다는 뜻입니다. 정리하게 되면 야곱은 결국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의 이름이 되거든요. 그러면 야곱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전부 다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인데 왜 이렇게 70명을 데려와서 애굽에서 살게 하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물가에 있는 악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보세요. 미국 마이애미의 호수나 바닷가에 악어가 많답니다. 호주도 그렇고요. 호주의 바닷가에 오랜만에 바캉스를 가서 오후가 되어서 낮잠을 잔다고 부모들은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애들이 악어가 우글거리는 물가에 갔을 때 부모는 물가에 악어가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물가라 하는 것은 이쪽은 육지고 저쪽은 바다에요. 바다 쪽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악어가 뭔가 먹잇감을 노리는 거지요. 이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2장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봤던 그 환상, 예언에 의하면 이 육지에 국가가 있고 그 육지와의 경계선에 바다가 있는데 그 바다에 네 마리의 짐승이 있는 거예요.
마치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오고 난 뒤에 이방민족이 뱅 둘러서 셰퍼드가 노리고 있는 것처럼 물가에 있는 악어가 육지의 자기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저주받은 나라, 뱀의 나라는 저쪽에 뭔가 노리는 것이 있어줘야 뱀의 자기정체가 폭로가 돼요. 육지에 먹잇감이 없으면 육지에 있는 사람은 자기정체를 몰라요.
그런데 육지에 뭔가 하나 악마의 공격의 표적이 되는 것이 등장한다면 그 표적을 노리는 순간 악마는 자기존재를 노출시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작전인데 그게 뭐냐 하면,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물가의 악어가 노리는 것은 육지에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요한계시록 12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1절에,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고 여자가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4절에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이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왔어요. 그러면 육지는 더 이상 육지가 아니고 바다천지가 되는 겁니다. 육지이야기는 결국 바다이야기에요.
바다이야기, 짐승이야기가 되는데 육지가 완전히 짐승에 의해서 포위되었으면 악마의 세계인데 그러면 땅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땅이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언약의 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여자가 아들을 낳아요. 그 아들에 의해서 영원한 짐승과 대적이 되고 뱀과 대치가 되는 영원한 나라, 천국이지요, 그 천국이 아들을 통해서 만들어지니까 뱀이 그걸 알고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2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헤롯이 감을 잡은 거예요. 오늘 올린 글에도 그런 것이 있지만, 인간이 창세기 3장에서 갓난애라도, 어린아이라도 뭔가 눈이 밝아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가 절대화된다는 기회가 왔을 때는 애가 자기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된다는 것에 예민한 감각이 있어요.
그냥 보통사람에게는 악마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중심주의의 어떤 복음이 등장하게 되면 악마가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표적이니까. 그래서 이 애굽이라는 나라에 점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돼요. 이것은 애굽이라는 나라가 결국은 악마의 대변자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처리하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5절을 계속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러니까 천국에서 지옥을 다스린다 그 말입니다. 지금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우선 있다고 우기는 나라, 눈에 보이는 우기는 나라가 자기세계인줄 알아요. 그런데 그 세계에 뭔가 다녀가신 분이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로 다녀가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미친 사람 하나 또 왔다 갔다.’ 하지만 악마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나라를 작살내고 멸망시킬 그 주인공이 다녀간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그 다녀가신 아들의 나라에 속하지 않기를 당도리 하는 겁니다. 절대로 십자가복음을 믿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테니까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다른 나라가 있다는 그런 주장은 늘어놓지 마라.’ 그런 식으로 악마가 인간 속에서 양심적으로, 선과 악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네가 선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악하면 나중에 죽어서 지옥가고 벌 받는다. 그런 식으로 가르쳐 왔던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를 않아요. 예수님은 다른 원칙이 있다 했지요. 오늘 설교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잖아요. 값없는 자기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그런 식으로 자기나라를 만들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누가 와서 자기희생의 공로로 구원받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자기 미래는 자기가 개척하고 자기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자기 장래가 정해진다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립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가 꾸려나갈 때 점점 더 자기 자신이 자기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 굳어져 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그 당시에 유대사회의 세상권세를 대표하는 사람이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빌라도가 먼저 물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너를 고소했는데 네가 동의하느냐고. 그 때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나라가 두 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자기가 있는 나라는 눈에 예수님의 나라는 아무리 훑어봐도 안보여요. 보이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뭘 봐야 믿든지 말든지 하는데 안 보이는데 무슨 수로 믿습니까?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이 시도해서, 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구원받을 인간의 본성과 그 모든 시도를 다 꺾어버리고 언약의 고집대로 일방적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떠나야 될 사람,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네가 여기에 있어도 이 나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나라에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 일생을 살게 만드는 겁니다.
야곱이 현재 130년이지만 야곱은 147세에 죽습니다. 아직 17년 남았어요. 언약의 사람으로서 할 일이 많습니다. 호날두나 메시같은 사람과 달라요. 언약이 없는 사람과 다릅니다. 이삭이나 다윗은 언약이 있어요. 그리고 모든 성도는 성령을 받아서 새언약이 그 속에 있습니다. 주도권이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인 십자가가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다뤄지는 거예요. 남의 나라에서.
이미 이 나라에 속하면서 남의 나라에서 그렇게 증거 하면서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가고 사라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그쪽 세계의 원리가 일체 우리한테 저촉이 안돼요. 우리한테 결국 들어가지를 못해요. 저쪽 세계에서는 모든 행한 것이 다 그대로 살아 있는데 우리는 이 땅에 행한 모든 죄가 말소가 돼요. 예수님의 피로.
등기소 어느 직원도 등기를 이렇게 하는 직원은 없습니다. “전과 말소되었네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등기소나 법원서기 봤습니까? 이런 혜택을 받아놓고 왜 벌벌 떱니까? 마치 이 세상은 남에게 인정받아야 더 살아가는 것처럼 왜 그런 본성을 갖고 있어요? 내 인생은 이제는 끝났어요. 언약의 인생입니다.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의 운명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제는 내가 잘났다, 가 아니라 주님만 증거 되는 그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죽어서 다시 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확연하게 확실히 있음을 저희들이 감지하게 해주옵소서. 주께서 왜 이 땅을 다녀가셨는지, 그 뒤로 왜 계속 영향을 입히는지, 주님이 하신 일의 결과물로 우리가 왜 태어나야 했는지. 이제는 언약을 위해서 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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