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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6:8-9 / 야곱의 식솔들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6:8-9 / 야곱의 식솔들

정인순 2019. 2. 13. 21:42

음성      동영상       Youtube

야곱의 식솔들


이근호
2019년 2월 1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6:8-9

(46:8)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46: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사람은 하루 아침에 자기의 자아성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이 있고 출생지가 있고 바로 이런 곳에서 살았던 체험과 기억이 자아성을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지난 날 동안 형성된 자아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향을 떠난다는 말은 자기 인생에 불연속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 됩니다.

지난 과거가 지긋지긋하고 새 삶을 싶을 때, 과감하게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어지간하면 인간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설사 떠난다 할지라도 늘 고향을 잊지 못하고 다시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고대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떠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연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짐단이라면 그들의 근원이 그들이 생각한 고향일까요?

아닙니다. 언약이 성취된 바로 그곳이 언약 안의 백성들의 본래의 고향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땅에서 태어난 자들에게 있어 그 고향은 어디 있는지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엉터리 상상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이지 않고 망상으로 꾸며낼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 인간들이 그려내는 천국이 망상에 불과하냐 하며는, 자기 자아성의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 언약에 의해 많이 생산된 자손 70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명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라는 어른이 엄연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살아있다는 말은 곧 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이고, 언약이 실효성을 발휘하며 살아 있을 경우에만 그들은 자신들이 ‘복의 백성’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재고해야 합니다. 왜 요셉이 야곱이 사는 가나안 땅으로 합류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왜 집안의 어른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직접 받은 야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는 곧 자신의 ‘중심축’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야곱언약의 실체는 살아있는 야곱이 아니라 야곱가정에서 죽은 자로서 애굽으로 가게 된 요셉에게 있게 된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함께 하사,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갈 것이다”는 약속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입니다.(창 46:4) 야곱 가정의 애굽행은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 노선에 합류하는 겁니다. 그래서 각자 자아성을 갖춘 70명이라도 한결같이 요셉의 자리에 합류해야 하는 겁니다.

이들 집단은 곧 그 자체가 ‘예언’이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이용한다든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움직임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이 되는 겁니다. 70명 전체의 하나의 요셉의 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먼저 요셉의 몸이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인하여 예언이 되고 계시가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70명 모두가 하나하나 요셉의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들은 자기 고향에 머물고 있으면 아니됩니다. 그들은 요셉으로 인해 생겨난 그 언약의 자리에 헤쳐 모여야 합니다. 합류해야 합니다. 제2, 제3의 요셉이 되는 겁니다. 각가 요셉으로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요셉은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식솔들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자기를 자기답게 했던 바로 그 자아성을 떠나는 겁니다. 언약으로 인해 성공한 그 요셉의 자리에 합류된다는 것은 곧 과거의 자신의 삶은 사실상 죽은 자로서의 삶인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 자신이 살았을 때 이해했던 ‘약속의 땅’은 참된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애굽을 경유해서 ‘출-애굽’의 방식으로서 약속의 땅에 입성해야 본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 경유’하기입니다. 출-애굽이 가능한 폭발력은 바로 요셉에 합류하는 가운데 벌써 자기 자신의 과거와 결별한 힘에서 나옵니다.

요셉을 몰랐던 자아성을 죽은 자아성으로 보는 겁니다. 신약적으로 말씀드려서, 십자가를 모르는 때를 죽은 자아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무죄함과 의인됨’을 선언받게 됩니다. “죄가 없다”는 판결을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받게 될 때의 희열을 아십니까? 이러한 희열은 자기가 단독으로 살 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만남의 현장에서나 주어지는 겁니다.

마치 야곱의 식솔들이 요셉을 만나게 되면, 요셉 덕분에 온갖 좋은 혜택을 공유하게 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언약의 최종성은 곧 새언약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어진 겁니다. 곧 용서하심과 의롭게 하심의 성취성과 만나므로서 지난 과거의 굴곡 많았던 인생이란 실은 다 정지상태에 불과한 겁니다.

높은 건물의 전망대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면, 모든 것들은 다 정숙하고 멈춰있는 양상입니다. 이처럼 만남이 가장 중요합니다. 미리 주님을 만났던 인물 가운데 스데반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 중에 요셉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행 7:13-15) 스데반의 집사의 설교는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곧 방언이요 계시입니다.

방언이란 사도행전 2:17에 나오는 본질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 방언으로 인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즉 스데반 집사에게 있어 하나님의 계시란 이 땅의 인생을 ‘죽어 있는 세월’이라는 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살려면 필히 십자가 용서하심을 경유해야 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야곱언약에 속한 식솔들도 필히 요셉의 자리를 경유해야 하는 겁니다. 이 성취성이 세상에서는 ‘낯선 죽음’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제대로 약속의 땅의 의미를 알고 본격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출애굽을 낳는 힘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신의 가치나 잘남으로 인해 늘 불안에 쫓기는 삶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7강-창 46장 8-9절(야곱의 식솔)

1902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6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73페이지입니다.

창 46:8-9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27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르우벤과 그 가족들, 시므온과 그 가족들, 그리고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갓과 아셀, 요셉, 베냐민, 단과 납달리, 이런 순서로 가족들이 애굽으로 갔다기 보다는 애굽에 집합한 자들을 나열했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은 레아에게서 낳은 자식들이고, 갓과 아셀은 실바에게서 낳은 자식들이고, 요셉과 베냐민은 라헬에게서 낳은 자식들이고,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낳은 순서로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이 명단이 70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75명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요셉의 손자를 사도행전은 집어넣어서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의 손자는 빼버리고 아들만 집어넣어서 7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이 70명이 애굽으로 갔다는데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자기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정말 무모한 짓입니다.

왜 고향 떠나는 것이 힘드냐 하면, 고향에서 살아가면서 늘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그 땅에 사는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겁니다. 자기가 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지나온 사건을 무효로 돌릴 때나 가능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 잘못 살았다.’라고 할 경우에는 그 장소를 떠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네로 아들 하나를 둔 부부가 이사를 갔다. 그 동네가 좋은 동네여서 잘 살았는데 어느 날 사고로 아들이 죽었다. 그러면 그 부모입장에서 더 이상 그 동네에 안 삽니다. 아들이 태어나서 커왔던 그 사건과 과거의 기억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가슴을 후비기 때문에 그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곳을 떠나지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면, ‘망했다. 나 제 2의 인생을 살 거야. 지금같이 안살거야. 나는 과거를 부정할거야. 나는 과거의 그 인생은 무효로 돌리고 새 인생 살 거야.’라는 결단이 설 경우에만 이사를 가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이사 간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지금 야곱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언약의 조상 아버지 야곱이 죽으면 그 후손들이 “아버지 죽었으니 우리가 이 땅을 더 이상 고집할 필요 없다. 여유 있는 다른 곳으로, 가뭄 들지 않은 다른 나라에 가서 풍성하게 살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엄연히 지금 눈 부릅뜨고 살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자식이 움직인다? 옛날의 종족관계에서는 그것은 성립이 안 되지요.

종족의 우두머리가 살아 있는데 어디서 함부로 부모의 곁을, 그 종족의 곁을 자기 맘대로 빠져나갑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 70명이 애굽으로 갔다는 그 의미를 굉장히 중요시해야 돼요. 어떻게 봐야 되느냐?

애굽에서 다시 튀어나올 때 그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폭발력이 뭐냐?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였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갈 수밖에 없는, 이 땅에 두 발을, 그 뿌리를 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집단에 한해서만 애굽이라는 세상 권세에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지금 가는 것이 출애굽의 전조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이것은 무엇을 응축하느냐 하면, 다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나올 때에 과감하게 올 수 있는 폭발력을 거기에 장착한 것과 같은 겁니다. 그 힘이 무슨 힘이냐? 바로 죽음의 힘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산된 아들들이에요.

이것을 알기 쉽게 하면 뭐냐? 이 사람들이 예언이 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예언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그들 삶 자체가 하나님의 장래의 계획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계시가 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야곱이 내려갈 때 야곱이 가지 아니하고 누가 내려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 예언자체가 되게 한번 만들어볼까, 이거예요. 세상 어느 인간은 예언을 좋아합니다. 예언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아가는데 앞일을 잘 몰라서 앞으로 잘 될까 못될까 염려될 때는 점치듯이 예언을 듣기를 원해요. 노스트라다무스라든지 정감록이라든지 그런 예언을 찾는 것은 지금 내가 나 사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예언을 차용하고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있는 하나님이 도대체 그 70명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돼요. 그들은 장차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 그 원칙은 바뀌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원칙고수주의자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있고 70명과 함께 있다는 말은, 이제는 야곱의 식솔 70명은 하나님의 원칙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운명을 가진 자들로 이동하게 되었다, 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기 70명이 아버지와 함께 내려갔다는데 우리가 이것도 쉽게 생각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마음을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70명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어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아버지 앞에 굽실거리고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지만 자기만의 계획, 자기만의 인생관, 이것은 그 누구한테도 절대로 놓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 파일럿 될래. 이것은 본인의사에요. 누가 말릴 수가 없어요. 내 뜻이라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요?

당구공이 열 개가 모였을 때 치면 각자 흩어지듯이 인간 70명이 모이면 각자 흩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하나로 모은다는 자체가 글쎄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모아지지가 않습니다. 식구가 많다고 해서 단합 잘된다고 해서, 뜻이 잘 모인다고 해서 마음이 하나라고 쉽게 단정 지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각자 놀아요. 따로 놉니다. 식구 열 명이 있어도 각자 방이 따로 있듯이 인간은 각자 자기 세계가 따로 형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들이 하나같이 되지를 않습니다. 안되는데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요셉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집합하는 거예요. “회쳐 모여!”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요셉이 있는 곳으로 전부 다 집합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두에 서서 야곱 70명이 요셉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야곱이 살아 있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요. 저쪽 애굽에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족을 구성하는 중심축이 졸지에 두 개가 되었어요. 살아 있는 아버지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죽었다고 알 고 있는, 살았다는 소문은 있지만 확실치는 않는 요셉이 중심축이 되느냐, 이 두 개의 중심축이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가자’ 해서 이들이 아버지의 명대로 이들이 가는데 아버지의 명대로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요셉의 말보다 눈앞에 있는 아버지의 말이, 그 영이 더 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들은 결국은 뭐냐? 마음이 하나 되었다, 뜻이 하나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야곱의 뜻 안에 그들이 뭉쳐져 있는 거예요.

야곱의 뜻 안에 뭉쳐져 있는데 이들이 야곱의 뜻에 의해서 뭉쳐진 이것을 파기시키고 새로운 중심축에 흩어져서 다시 재결합이 될 입장에 있는 겁니다. 지금껏 이 70명은 누구의 명령을 듣고 살았느냐 하면, 연세가 제일 많은 아버지 야곱의 명을 듣고 산거예요. 그걸 하루아침에 다 버려야 된다는 것은, 아, 이것은, 하루아침에 “너 인생 잘못 살았어. 네가 중심을 엉뚱하게 잡고 산거야.”라고 그걸 버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형성된 내 기억을 이제는 포기해야 될 시점에 있어서, 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말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걸 신약에 가져와 봅시다. 신약으로 가져오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동안 내가 인생 그냥 허투루 살았습니까? 아무것도 참조로 하지 않고, 누구한테 말도 듣지 않고 혼자 잘나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굴 의지하고 싶고, 기대고 싶고, 그리고 나에게 기대를 걸고 나에게 희망을 거는 어떤 대상이 있어요. 나보다 선행되는 어떤 대상이 있다고요. 그게 일단 부모님이에요. 부모님이 나를 키워줬으니까.

그런데 부모님의 영을 어기고, 부모님의 기대치를 어기고, “아버지가 이제 더 이상 저에게 할 이야기는 없네요. 난 독자적으로 아버지를 떠나서 살겠습니다.” 할 때는 “그러면 너는 앞으로 뭐로 살 건데?”라는 새로운 중심을 언급을 해줘야 되거든요.

“네가 내 눈치를 보면서 내 양육을 받은 대로, 내 교육을 받은 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아버지와 결별입니다.” 할 때는 도대체 무슨 세력이, 무슨 힘이 그동안 끈끈하게 맺어왔던 부모와 나 사이를 엉터리라고 완전히 차단시키고 아버지의 자리에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이 들어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뭘 끄집어낼 수 있느냐 하면, 무죄한 자, 죄가 없는 자만이 천국 간다는 그것을 끄집어내야 돼요. 여러분, 죄가 없는 자의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눈만 뜨면 짓는 것이 죄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죄 없다고 이야기해 줘요. 죄 없으니까 징벌도 없고, 지옥도 없고, 지옥도 없고, 벌도 없고, 저주도 없는 거예요. 질책도 없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 주는 그 희열과 기쁨, 세상에 복음으로 산다는 기쁨이 뭐겠어요? 이 기쁨이잖아요. “죄 없대. 나보고 죄가 없대. 지은 것은 분명히 많은데 죄가 없대. 저주도 없대. 곧 죽어도 천국에 간대.” 그 희열은 지금껏 무엇을 놓으라는 말이냐 하면, 윤리도덕을 놓으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윤리 도덕은 우리를 양육해 왔거든요. 이 세상에서 양육과 더불어 발목을 잡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이러면 벌 받지. 그런데 내가 나름 이렇게 살면 복 받지.’ 벌 받지, 복 받지, 복 받지, 벌 받지, 인과응보적인. 우리는 거기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고 이게 남이 아니라 내가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그래서 힘들게 산거예요. 여러분, 인간은 어디에 쫓깁니까?

자꾸 쫓기는데요. 꿈에서도 쫓기고, 도망치는데 도대체 누가 쫓아오고, 왜 우리는 도망을 치듯이 벌벌 떨면서 쫓기듯이 살아가고,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그런 식으로 흘려보내야 됩니까? 공포 속에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무엇에 후달리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자기의 입니다. 그리고 자기의가 있어야 되는데 살다보니 이게 흠집이 나고, 그것이 나의 괜찮아야 되는 인생이 스크래치가 나고, 완전히 구멍이 뻥뻥 뚫리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영 마음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이 누더기를 들고 이것을 나라고 보기에는 아, 진짜 짜증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 들고 교회 온다고요. 기도해서 땜질하고, 헌금해서 땜질하고, 봉사해서 땜질하고, 그래서 “하나님, 이러면 넣어주겠습니까? 이러면 복을 많이 주시고 벌은 적게 주시겠습니까? 이러면 내 자식이 잘되겠습니까?” 맨 날 자기가 잘한 것을 들고 오는데, 그러다 실수 한 번 하면 그것도 다 날라 가버리고.

주님께서 이 70명을 야곱과 살던 시절을 청산케 합니다. “그동안 너희 아버지의 명을 들었지. 너희 아버지는 지금 아버지 되기를 포기했어. 이 가정의 중심축, 아버지라는 권위를 아버지가 스스로 포기했어. 왜? 하나님께서 요셉 만나라고 애굽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출애굽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서 애굽으로 들어가는 것도 출애굽 못지않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죽어야 가능해요. 내가 살았던, 나를 나 되게 했던 모든 것, 지금의 나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주께서 “청산하라, 그것은 엉터리다. 이제는 새롭게 교체되어야 돼.” 그러려면 너는 이곳을 떠나서, 네가 나의 살던 고향인 그곳을 떠나서 누구를 만나야 돼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거예요. 내가 꾸역꾸역 내 인생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 롯데타워전망대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전망대에 올라가기 전에 본 서울 시내 차들이 얼마나 분주한지요. 8차선, 10차선 도로에 차가 가득 몰려서 한시도 정숙할 때가 없어요. 요란스러워요.

그런데 555미터 높이라는 롯데타워에 올라가서 보니까 모든 것이 스톱되어 있어요. 위에서 보니까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요하고 동결되어 있어요. 얼음이죠, 얼음. 전부 얼음으로 되어 있어요. 강물도 흐르지 않습니다. 전부 다 동결되어 있어요. 심지어 구름마저, 산마저. 사람은 아예 안보이고요.

밑에 보이는 롯데월드가 왜 그리 조용해 보이는지. 아직 개장을 안 한 시간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여튼 조용했어요. 전부 다 고요했고, 조용했고, 산이고 들이고 조용했습니다. 이게 뭐냐? 우리는 롯데타워전망대에서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언약의 백성을 누구와 만나게 함으로서 내가 분주하고 요란스럽고 변화무쌍하다고 여겼던 내 인생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 정숙하다는 것,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을 만남을 통해서 되돌아보게 되면 그것은 전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은 인생을 되풀이했을 뿐이지 제자리 뛰기 한 거예요. 백날 뛰어봐야 의미 없어요. 혼자 분주했고, 혼자 고민했고, 혼자 염려했습니다. 혼자 공포에 쫓기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언약의 완성은 요셉이다. 야곱에서 시작한 그 언약은 이제 이 시대 요셉에서 마무리 되는 겁니다. 요셉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만남의 현장에서 다시 자기 과거의 인생을 보기를 원합니다.

돌아보게 되면, 그것은 나라는 인생, 개인적인 인생이 아니고 70명 전부가 70명의 요셉이 되도록 주께서 언약을 이끄신 거예요. 전부 다 70명의 요셉이 되도록. 오늘날 예수 십자가 안에서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전부 다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분신이 되도록 우리 인생을 이끌어온 겁니다.

그러한 인생을 가지고 사도행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런 인생을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걸 2장에서 방언이라고 했어요. 방언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한 단어로서는 표현되지 않는 내용을 함유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에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방언을 톡, 깨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성된 최종적 내용이, 프로젝트가, 기획이 거기에 담겨 있어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해서 방언의 방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한 내용이 14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라고 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죽 나열합니다.

우리가 그냥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집사가 설교했다,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했구나, 라고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서 분명히 오순절에 성령이 왔어요. 성령과 더불어서 그 다음부터 성도가 내뱉는 설교는 전부 다 방언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려서 그 사실이 사도행전 2장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여기서 ‘모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모두’지요.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걸 함축하면 이것이 방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방언이라는 방식이 예언이고, 꿈이고, 환상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 지상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 그것을 스데반 집사가 설교합니다. 그러면 설교를 잘했나, 못했나, 하는데 스데반집사의 설교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집사의 이 방언적설교, 성령에 의한 설교가 스데반집사를 어디로 이끌었느냐 하면, 사도행전 끝에 보면, 스데반집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70명, 여기서는 75명이죠, 이 70명이 요셉이 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확정된 언약에 의해서 죽어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살아라, 가 아니라 이제는 네가 그냥 숨 끊어져 죽는 것 말고, 그 말씀 때문에 죽을 입장에 놓인 존재가 너라는 이야기에요. 이 야곱의 70명은.

보통 사람들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 믿는 것이 살아 있는 나를 더 살게 하려고 믿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야곱은 구태여 애굽으로 내려갈 필요 없어요. 야곱의 언약의 완성은 야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이라고, 여기 다 되었으니 여기서 계속 삽시다, 가 아니라 반드시 경유를 해야 될 것이 뭐냐? 애굽을 거쳐서 다시 약속의 땅에 와야 돼요.

이것은 오늘날 죽고자 하는 자만이 죽기 전에 예상했던 그 천국이 아니라 죽음과 더불어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전에 약속의 땅에서 보이지 않은 약속의 땅에 그들이 참여하는 겁니다. 예언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의 방언에 의해서 충분하게, 죽어도 기쁠 수 있는 희열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언약 안에서는 너는 더 이상 네가 아니라 요셉이다. 요셉은 뭐냐 하면, 이미 언약의 완성자에요. 다시 말해서 무죄한 상태입니다. 죄가 없는 상태에요. 죄를 아예 안 묻습니다. 이미 요셉은 하나님의 의인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지금 총집합하는 거예요. 빨리 요셉을 만나서 요셉 자리가 네 자리가 되어라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껏 야곱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넣어줬으니까 주의 약속대로 실현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누락된 식으로 약속의 땅, 거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우기는 그 인간자체가 요셉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다 헛방이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헛꿈 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요셉이 야곱의 가정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없는 자식이에요.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있어요. 형들은 알지요. 요셉의 피가 아니고 짐승의 피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요셉은 분명히 요셉의 피로 알고 있고, 그리고 그 요셉과 70명은 누구의 영을 따라서 살아가느냐, 누구의 정신구조에 갇혀서 살아가느냐?

야곱의 정신구조에 갇혀 있어요. 그러면, 야곱의 입장에서 요셉은 죽은 자라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했든 간에 야곱은 항상 요셉을 죽은 자로 치고 그 다음에 남아 있는 70명을 자기가 건사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죽었던 요셉이 살아있다고 했을 때에 이것은 뭐냐?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이……, 지난 시간에 했지만 참 어려워요.

요셉이 살아있으면 야곱이 약속의 땅에 있잖아요. 그러면 누가 와야 되느냐 하면, 요셉이 “아버지, 제가 살아있었고 성공도 했습니다. 제가 합류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야곱의 70명이 몽땅 어디로 이사 가느냐 하면,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가요.

이 말은 뭐냐? 죽임을 당한 요셉이 죽은 자로서 새롭게 개척한, 새롭게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마련된 그 자리에 나머지 야곱과 70명은 합류해야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보니까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그 당시에 우리가 야곱의 입장이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의 고향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어려워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신약보다는 쉬워요. 왜냐? 보따리 들고 아버지 따라서 내려가면 되니까. 사부작사부작 내려가면 되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판단력 가지고 십자가를 믿어라?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내가 있는 그 자리에 꽂아놓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교회 만들고 십자가를 꽂아놓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교회는 십자가를 꽂아놓지 말고 십자가를 뽑아서 교회 없는 곳으로 가야 돼요. 그게 십자가의 가는 길이에요. 내가 세운 교회에 십자가를 꽂아놓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없는 교회가 십자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야곱도 하나님과 함께 했으니까,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아야 비로소 내가 있음, 내가 있다는 것을 철회해야 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내 쪽에서 스스로 포기 먹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쫓기게 되어 있어요. 죄와 자기의와 그리고 무시무시한 정죄감에 우리는 어쩔 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내가 살아 있기에. 우리가 두렵고 무서운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미 너 용서했다는 그 말은 ‘신난다.’가 아닙니다. ‘아, 옛날 벌벌 떨던 나를 하나님께서 뭔가 경유해서 죽게 하셨구나.’

그렇다면 내가 경유한 그 자리에 합류가 되어야 돼요. 이 자리에서 무죄하다, 기쁘다, 가 아니라 어느 자리에서 무죄하냐. 내가 잘나서 무죄합니까? 주님의 십자가피와 함께 있을 때 무죄하잖아요. 혼자 단돈으로 무죄한 것이 아니고 그 피 때문에 죄가 없는 거예요. 피가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피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요셉의 완성은 어디 있느냐? 애굽 한복판에 있어요. 애굽에서 제일 좋은 땅에. 애굽 한 복판에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한복판에 있으면서 이 세상사람 아니게 할 때만 우리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옛날 우리가 십자가를 몰랐을 때, 지금 본문 식으로 하면, 야곱이 요셉을 몰랐을 때 그 때 우리가 살았던 그 모습이나, 우리가 지옥 간다고 여기는 그 사람들 사고방식이나 똑같고, 생활방식도 똑같아요.

그들은 초월적인, 최종적인 희열이 없어요. 돈 좀 벌면 좋다고 난리고, ‘자식 좀 잘 되었으면 좋겠다.’ 해서 자식 좀 잘되면 좋다고 난리고, 아프다고 하면 걱정되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하나님, 뭐가 잘못되었는데 자식을 힘들게 합니까?” 갑자기 또 뭐가 잘못되었는데, 라고 하면서 죄의식, “회개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 테니까 제 자식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또 이렇게 있지도 않은 자기의 원리원칙을 자기가 만들어 내네!

본인이 본인한테 후달립니다. 왜냐?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야곱의 품속에서, 다시 말해서 그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이고 복이고 그것 쥐고 그것 쪽에서 내 사람이다, 하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어요.

나를 없애는 자리 거기서 본래의 나를 만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주님의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말고 따로 내 것 만들어놓고 내가 이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부질없는 짓거리를 해온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이들이 이사를 갑니다. 그러면 이들이 있는 이 야곱의 자리, 야곱의 명에 의해서 그들이 움직인다면 이미 이 자리는 야곱의 자리가 아니고 요셉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한테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아버지 나 살아 있습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합시다. 요셉을 예수님으로 보고 아버지를 성령으로 본다면, 성령이 우리한테 이야기하기를, “지금 네가 안 죽어도 이미 네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다. 왜? 만남이 이루어지니까. 재림이 이루어지고, 천국에서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니까.” 만남이 중요하거든요. 만남이 되게 되면 뒤돌아보면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움직여도 움직인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그냥 죽은 채로 있던 거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과거에 살았던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작은 일에 죄의식을 갖고 그 죄의 무게에 힘들어 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옛날이야기로, 내가 십자가를 만나기 전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진짜 그 따위 식으로, 나를 아주 망치면서, 내가 스스로 나를 지옥에 쑤셔 넣으면서 부질없고 헛되고 헛된, 악마에게 농락당한, 정말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한 생각은 용서, 무죄의 희열을 통해서 주께서 나를 지금 찾고 있고, 이끌고 있다는 이 짜릿한 느낌, 그 느낌 속에서 해소되어야 됩니다. 이미 부르고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 만나라고, 그분 만나면 인생 성공이라고,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 만났으면 그보다 더 큰 성공은 없다고, 그게 바로 천국의 입성이라고 우리에게 오늘도 본문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서 야곱이 움직일 수 없는 힘든 것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마음 합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마음이 오셔서 살아온 것은 다르지만 같이 주님 만나는, 용서받았다는, 무죄한 상태인 것을 한 마음으로서 서로 교제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