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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5:25-28 / 야곱 모시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5:25-28 / 야곱 모시기

정인순 2019. 1. 30. 21:50

음성               동영상         Youtube


야곱 모시기



이근호
2019년 1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5:25-28

(45: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45:26)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45:28)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야곱의 본격적인 일대기에서 야곱은 빠지고 요셉의 일대기가 거의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셉의 야곱의 인생을 대신 다 살게 된 경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요셉의 일대기가 요셉 자신이 아니라 야곱을 겨냥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힘들게 고생하면서 그 고생한 이유가 타인의 인생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일대기로 편성되어 있는 바가 요셉의 일대기라면 야곱의 사적인 인생은 껍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알맹이는 요셉의 일대기로 채워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야곱의 인생을 장식하는 겁니까? 그것은 야곱에게 주신 그 언약이 야곱 개인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느냐를 통해서 언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현실이란 언약의 본질이 외부로 발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질’와 그 ‘본질’을 담는 당사자가 상호 다른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 핵심되는 요소입니다. 즉 비록 언약을 받은 인물이라도 그 인물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언약의 실체란 그 언약을 받은 인물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를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적 성격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다.

천국이 있던, 하나님이 계시던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세계라는 것은 본능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약이 지옥간다면 도저히 울화가 터져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향을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자기와 다른 타인에 의해서 살인충동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공격 대상이 되는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즉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 ‘다른 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자기 쪽으로 오게 합니다. 즉 아들인 요셉이 친히 아버지 야곱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자폐증적인 세계 전부의 철거를 요구하는 바가 됩니다. 인간은 살아오면서 자기를 중심에 두고 경계선을 형성하여 타인과 대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에게 적이지 아니지만 경계선 밖의 타인은 항상 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요셉은 바로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경계면을 의도적으로 공략합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그것은 야곱에게서 야곱이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이 지금 형성하고 있는 세계는 ‘요셉은 이미 죽었음’을 기정사실화 하고서 나름대로 꾸려나가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살아있다고 한다면, 요셉이 죽었다고 알고 있는 세계관에 ‘요셉의 생존사실’ 하나를 더 추가한다고 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몽땅 거덜내고 경계선 자체를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냥 이동시키면 아니됩니다. 경계선의 중첩됨이 나타나고 그 사이에 낯선 틈이 보여야 합니다. 즉 ‘죽었던 요셉에 의해서 새로 형성관 세계관’이 그 틈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요셉의 세계관이 야곱의 세계관을 몽땅 점령하고 접수하고 새로운 경계선으로 둘러쳐야 합니다.

그래야 ‘죽었던 자의 현실성’에 의해서 덮쳐지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떠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야곱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대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야곱의 그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을 방치한 채 요셉을 통해서 애굽나라에서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선뜻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식을 팔아먹는 애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한 애굽쪽에서 움직임을 통해서 야곱이 사랑하는 대상을 강제로 뺏아간다는 느낌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굽나라의 역할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15:13-14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언약이 없는 비-언약의 나라에 있어야 비로소 약속의 땅의 취지가 제대로 보인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눌려 앉아 산다고 해서 약속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이방나라에서 당했던 그 악몽같은 경험과 수모와 무시당함에 야곱도 참여해야 하는 겁니다.

비-언약의 요소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경로입니다. 이 비-언약적 요소로 인하여 성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적이란, 성도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 또한 하나님의 적의 일부인 것을 알려면 기존의 자아를 주께서는 버리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내가 미처 생각 못한 나가 비언약적인 세상에서 수모와 괴롭힘을 당하면서 감지됩니다. 우리 안야 요셉이 들어와야 합니다. 요셉이 야곱에게 수레를 보내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버팁니다. 소중하고 귀한 나를 절대로 못버리겠다고 버팁니다. 하지만 그런 고집 때문에 주님을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은, 자기 자신을 죽어도 포기못하는 우리의 심성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천국, 진정한 약속의 땅은 우리 자신이 주님을 포기한 세상과 한통속인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비-언약이 애굽나라는 사실은 우리가 겅계선을 치고 멀리한다고 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애굽나라에 들아와서 삽니다. 그리고 그곳의 힘과 유혹을 우리 자아로서는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경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최종적으로 포기하지 않은 성향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기를 종용하십니다.

보내주신 쪽으로 즐거이, 모든 것에 미련두지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나를 지키고자 시도한 모든 요건을 과감히 버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5강-창 45장 25-28절(야곱모시기)

1901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장 25-28절입니다. 구약성경 73페이지입니다.

창 45:25-28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야곱에게 실망을 시킨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애굽의 양식을 파는 총리라는 작자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돈 받았으면 양식 주고 집에 보내면 될 텐데 사람을 닦달해서 간첩으로 뒤집어 씌워서 남의 사생활까지 들쑤셔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베냐민, 죽은 요셉을 대신하여 모든 사랑을 얹어주던 그 베냐민 까지 납치토록 한 것에 대해서, 자기에게서 빼앗기도록 한 것에 대해서 무슨 나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참 양식이 없어서 애굽나라에 갔지 애굽나라에 대한 어떤 선호도 없었어요. 그리고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아버지입장에서는 자꾸 위반하는 태도를 보인 거예요. 요셉의 형들도 어쩔 수 없었지요.

그걸 알고 요셉이 중간에 개입을 했기 때문에 자기들도 아버지의 명을 들으려고 어지간히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원활하게 야곱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도록 요셉이 개입을 해서 야곱이 갖고 있는 자기세계를 요셉이 공격하는 형식을 띄었습니다. 자기폐쇄에 잡혀 있는 아버지 야곱의 그 세계가 무너지게 한 거예요.

창세기 37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야곱에 대한 족보 이야기가 이러하니라, 해서 야곱의 족보에 대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 뒤에 바로 나오는 것이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 창세기 45장 마지막에 와서야 드디어 야곱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 인생이 구원되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야곱 본인이 본인에게 한 것이 없다는 것이 완전히 드러났어요. 야곱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야 될 텐데 주인공이 야곱 본인이 아니에요. 야곱의 인생을 장식하는 그 주인공이 야곱 본인이 아니라 요셉이 야곱의 인생을 대행했다, 또는 대신 살았다는 식으로 창세기가 37장에서 45장까지 계속 끌어오고 있습니다.

생선을 사든지 무슨 물건을 사든지 안에 상표 보고 샀는데 엉뚱한 물건이 들은 것과 똑같은 형식이에요. 나 야곱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야곱이 자랑질을 내놔야 될 텐데 야곱은 자기인생에서 들러리가 되고 말았어요. 아무 주인공 노릇한 것이 없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는 것은 야곱이 아니고 요셉이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창세기 같은 경우에 더러더러 하나님이 나옵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요소를 찾아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봐야 돼요.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오늘날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요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와 같은 뜻이거든요.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인생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내 인생에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그 작업에 놀랍게도 하나님이 친히 손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보여주면 하나님 믿을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 신앙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고집대로 내 인생에 충실하고 내 인생 가꾸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 그걸 다 무용지물로 만드는, 그런 노력이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손길이 바로 우리 인생에 개입한 하나님의 선한 손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야곱이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의 그 절차가 21세기의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의 그 구원의 절차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게 되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수레를 보냈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인데요. 요셉이 아버지 있는 집에 오지를 않아요. 요셉이 아버지가 있는 자기 고향에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아버지의 살던 토박이, 그 고향을 몽땅 들어내게 만들어버려요.

아버지가 다 버리고 요셉에게 오게 하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갖고 있는, 내면화되어 있는 가장 근원적인 본성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나와 다르면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나와 다르면 죽인다.

죽인다고 해서 꼭 칼 들고 죽이는 것도 아니고 ‘나와 다르면 좀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의식이 발생됩니다. 이게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그 벌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형이 동생을 죽였으니까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나님께서 형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히려 죽인 형을 살려줘요.

살려줘서 네가 동생을 죽인다는 그 차원이 어떤 차원이냐 하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내 손에 죽어줘야 된다는 본성을 가인이 계속 살아서 남의 동네에 가서 경험케 하는 그것이 징벌이에요. 가인이 징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정녕 하나님처럼 된다는 그것이 그냥 하나님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쪽을 공격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본성을 내뿜으면서 내가 신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예를 들게 되면, 만약에 택시를 타고 가다가 버스하고 접촉사고가 일어났을 때 내가 택시에 탔었다면 사건의 경위에 상관없이 나는 택시편을 들어요. 왜? 내가 택시에 탔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택시하고 접촉사고 난다면 사건의 경위와 관계없이 내가 있는 자리의 버스 기사의 편을 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자기를 독보적으로 여기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입니다. 자, 구원은 뭐냐 하면, 뭘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내 본성이 까발려지는 것이 구원이에요. 내가 미처 몰랐던 내 본성은 뭐냐? 이것은 내가 원치 않는 악마의 속성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낼 때 그게 구원의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떠나야 된다는 겁니다. 어디서 떠나야 되는가? 내가 나에게서 떠나야 된다는 그것이 구원이고 내가 나에게서 빠져나와야 된다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이 차이를 느끼고 차별을 느낀다는 것은 일단은 자기는 아군편이에요. 그리고 상대는 적입니다.

상대방이 차이가 느껴진다는 자체가 나의 적이 되고 적은 공격대상이 돼요. 그런데 어떤 인간도 나와 다른 그것이 나의 적이라는 것은 아는데요, 우리 몸의 생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면역체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적이라는 사실, 내가 나의 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걸 어떻게 알까요? 무슨 수로 압니까? 기도 빡세게 한다고, 철야한다고 알 수 있어요? 자기강화에 나설 뿐이지요. 그래서 나와 차이나는 그 사이에 경계가 쳐 있어요. 이 경계자체가 하나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의 적은 내 경계밖에, 그 안에는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데요. 경계가 중첩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찾아올 때 발견해요.

내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적인 동시에 저쪽에서 볼 때 내가 적이 된다는 사실, 나의 경계선은 하나인데 단선으로 보이지만 이게 중첩되어 있고 복선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경계자체가, 남하고 차이나고 나만이 독보적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적임을 확인해준다는 그 사실을, 그 경계선이 중첩이 된 그 틈이 벌어지게 만들어요.

그 벌어진 틈 사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나는 내 자리를 꿈쩍도 하지 않고, 나는 너보고 나에게 오라는 이러한 고집 같은 것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의 하나님이잖아. 사랑의 하나님이면 사랑 값을 해봐라. 날 데리러 와서 나를 구원해주면 당신 믿을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자리는 꿈쩍도 안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 흘렸다. ‘아, 고맙네. 믿어줄게.’ 이것은 자기 자신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난 내 자리에 있겠다는 거예요. 나보고 다른 데로 가라고 하지 말고 천국을 간다면 천국을 내 앞에 내놓고, 축복을 주려면 축복을 내 앞에 내놔라 그 말이지요. ‘내가 왜 이 귀한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한테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이 귀한존재를 내가 쓰레기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버티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은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의 그 자리, 아버지의 그 자리를 몽땅 다 철거하고 이 아들자리로 오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수레를 보내서 요청하는 거예요. 그 자리는 환상입니다. 허구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백날 하나님의 구원 기다려봐야 하나님의 구원은 오지 않는다는 그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애굽나라는 야곱에게는 실망스러운 나라고 가뭄 들어서 구차 없이 양식 사러 갔기는 했지만 애굽나라가 하는 행정적 처리에 대해서는 불만이 가득한 거예요. 양식만 있다면 두 번 다시 돌아보기 싫은 적의 나라에요. 그런데 그 적의 나라에서 자기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적의 나라로 들어오라?

이것은 야곱으로서는 상당히 믿기 힘든 겁니다. 야곱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하고 아는 관계라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생 내내 자기에게 하나님의 약속, 구원을 약속했거든요. 언약을 줬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는 뭐냐? 이 세상의 중심이에요. 하나님이 일하는 중심, 사다리의 꿈을 꿨고 내가 다시 오면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할 정도로 천사가 자기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봤어요.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워서 자기는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복을 소유한 겁니다. 복을 소유한 이 마당에서 소유가 아니라 그 소유마저도 그것을 포기하고 네 자리, 네가 알고 있던 그 자폐적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요청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성에 있어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야곱이 있는 땅은 뭐냐? 대대로 막벨라굴이고 이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관된 하나님의 약속된 땅이에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나버리면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가는 셈이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로서는 자기가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요셉이 성공했으면 요셉이 나에게 오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이잖아요.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저쪽에서 합류를 해줘야지요. 성공했거든, 아버지를 진정 도와주려면 아들이 와야지요. 그런데 아들은 오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이 믿는 게 문제에요, 굳게 믿는 그 땅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고 아예 짐 싸들고 다 애굽으로 가자고 하니 지금 야곱은 계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과 어디에서 매치가 되는 것인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지, 내가 양식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폐기처분하는 불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얼마나 복잡한 계산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애굽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약속된 나라는 아니에요. 약속된 나라는 아닌데 문제는 야곱이 몰랐던 것은, 약속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점유한다고 해서 약속을 아는 것이 아니고 약속 밖으로 나가야 약속의 가치에 비로소 눈뜨게 되어 있어요. 약속 밖에 나가야.

애굽은 약속의 나라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약속의 나라가 아닌 곳에 나가봐야 이 약속된 나라가 당연히 나에게 주어져야 될 나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나라에 내가 들어갈 잽도 못 된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새롭게 알아야 돼요. 그렇게 되면 야곱에서부터 야곱이 드디어 분리가 됩니다. 나에게서 나가 떨어져 나가게 돼요.

지키려는 나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나라는 사실로 달라지게 된다고요. 구원이 뭔데요? 바로 그게 구원이에요. “천국 주세요. 천당 보내주세요. 복 주세요.”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해야 되지요. ‘저에게 올 천국의 자리도 남아 있어요?’ 이게 이방인들이 생각해야 될 구원의 자리입니다.

로마서11장에서 개 같은 이방인들은 구원의 자리가 없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니까 거기에 티오가 났고 그 티오가 난 것을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이는 식으로 그래서 그들이 구원된 거예요. 하나님은 천국의 자리를 남발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귀한 자리인데요? 지나 개나 원한다고 다 주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는 지정되어 있어요. 지정석이에요. 예약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가는 거예요. 따라서 거기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수모당한 그 수모를 당하는 같은 체험을 공히 해줘야 돼요. 죄도 없으신 분이 이 땅에 와서 죄인으로 수모를 당했던 그 수모, 그 모욕감, 배척받음, 주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당할 이유도 없어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생할 분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주님이여, 그 고생, 그 수모, 그 배척은 제가 마땅히 받는다 할지라도 내가 내 자리를 떠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이런 행운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지요.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구원하려고 개입했다는 증거를 대야?

그게 딴 게 아니에요. 나의 성공은 없다는 거예요. 나의 성공은 없다. 일찌감치 나는 성공할 이유도 없고 성공할 대상도 아니고 자격도 없다.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때 그 사람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철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성적으로 성경공부해서 될 문제가 아닌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선악과를 먹은 이상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한테 그렇게 아까운 거예요.

남은 천국 가는데 자기는 지옥가게 되면 화가 나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나에게 아깝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내가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지옥가게 되면 큰 손해라고 여기는 거예요. 이런 마음가짐, 누가 뭐래도 나는 무조건 손들고 천당 가야 돼, 이런 마음가짐에서 본인이 어떻게 떠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기꺼이 그걸 포기할 수 있겠어요? 포기 못하지요. 포기 못하니까 구원 안 되는 거지요. 구원될 수가 없지요.

맨 날 교회만 다녔지요. 구원은 상관도 없이 교회만 그저 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냥 나를 낚싯대로 건지면 되는데 왜 이 세상이라는 그러한 환경 속에 놓이게 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미워합니까? 지옥 같은 세상이지요.

그런데 그 지옥 같은 세상이라고 우리가 폄하하고 질타하고 공격하는데 그 세상 속에서 우리보고 도로 오라고 부르짖는 초청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깨끗하고 훌륭하고 천국 갈 사람이기 때문에 너와 상관하지 않겠다, 이렇게 우리가 버티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버티는 것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폐증현상이에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너희를 산제사로 드리라고 할 때, 이 세대와 나를 경계선으로 치지요. 그러나 경계선을 치고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해서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한다면 차라리 우리의 경계를 옮겨버려야 돼요.

우리의 경계 자체의 이동이 우리의 불가능한 자리의 이동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않을 자에는 어떤 경계가 있기 마련인데 이 경계를 우리는 세상을 포기함으로서 내가 있는 자리가, 택시가 되든지 버스가 되든지 내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라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이게 오해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그 자리를 그대로 딱 들어서 우리가 싫어하는 세상 한가운데 집어넣어 보세요. 집어넣어 보면 세상은 나의 적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주님의 적, 하나님의 적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도 없다가 막상 거기에 가게 되면 바로 구원받겠다는 나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적이 된다는 새로운 경계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고집불통이거든요. 나 하나 안 놓겠다고 그렇게 고집 부렸거든요. 나 구원해달라고 그렇게 애썼고. 보통 똥고집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말씀하면 순종해서 구원받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러한 논리에 뭐가 빠졌냐 하면, 주님의 희생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말했고, “너 날 믿느냐?” “믿습니다.” “어이고, 착하구나. 천당 가자.” “아멘”

뭐가 복잡할 것이 있어요. 아주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희생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 희생이 누굴 위한 희생이냐는 말이지요. 저 지옥 가는 사람을 위한 희생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세대 사람들을 위한 희생이에요? 바로 구원받겠다고 닦달 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희생한 거예요.

그 주님의 희생과, 구원받겠다는 나의 욕망과 한 번 연결시켜 보세요.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아직도 못 떠나고 있는지를. 그래서 오늘 본문을 풀려면 뭘 풀어야 되느냐? 애굽이 무엇이냐? 애굽이 왜 있느냐를 풀어줘야 이 본문이 풀려요.

애굽은 창세기 15장 13절에서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너 자신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했어요.

여기 이방나라로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한테는 이방나라인데 야곱에게는 애굽나라에요. 애굽나라는 큰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양식을 갖고 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나라에 야곱은 자기의 70명을 끌고 거기에 가야 돼요. 거기서 가서 뭐하느냐 하면, 괴로움을 당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힘없는 자가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되는 거예요. 힘없는 자가 당하는 수모를. 그리고 이 애굽에 대해서는 이사야 19장 18절에 보면, 이걸 가지고 장망성이라 합니다. 곧 멸망해야 될 도시에요. 멸망하는 도시에 왜 우리가, 성도가 거기서 살아야 됩니까? 네가 한통속이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나는 더러운 인간들하고 안 논다 할 때는 굉장히 고상해보이고 거룩해 보이지요? 그런데 막상 애굽에서 한 번 살아보세요. 애굽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한 번 살아보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산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될 거예요.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애굽에서 살아보면 힘 있는 것이 얼마나 내가 선망하고 있다는, 내 본능 자체가 힘이 있고 돈이 있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고, 출세하는 것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애굽에서 살면서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겠다고요? 천만에요.

사람이 성공하는데 미쳤다고 빠져나옵니까? 잘되는데, 만사가 형통한데 왜 빠져나옵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유혹이 아니에요. 유혹이란 이길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일 수밖에 없어요. 자진해서 내가 천국성도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멀리서 보게 되면, 마치 상상해서 보게 되면 세상과 나는 달라 보이지만 막상 이 세상 속에서 살아보게 되면 우리가 남에게 미운 소리 듣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에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갔던 그 경로를 앞서서 이스라엘 야곱의 자손들이 예수님과 공통체험을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았는데 그걸 가지고 뭐냐? 구원의 경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구원의 과정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 2절부터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연단과 환란 없는 소망은 가짜소망입니다. 소망은 어디 있느냐? 환란 속에, 모든 소망이 거기서 끊어질 때 비로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러한 나라가 나타나는 겁니다.

세상에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될 때 비로소 환하게 웃으면서 나타나는 그 세계, 이것은 내 목숨, 내 건강,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는 나라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소유가 아니라 떠남이에요. 소유의 즐거움이 아니고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아주 가볍게, 속히, 흔쾌히 떠날 수 있도록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계가 미리 장만되었다는 그 기쁨, 그 기쁨이 바로 성도에게 유일한 소망이고 다른 소망은 다 가짜입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다 할 때는 보이는 소망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혹독하게 우리가 거기서 실망해야 되고, 거기서 좌절해야 되고, 내 꿈이 뭉개져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지키고 싶었던 나의 세계가 거덜 나야 돼요. 이 세상에서.

중보기도해서 온 가족 구원시키고, 자식들이 어쩌고 하는 그러한 꼼수나 그런 쓸데없는 나의 기대 그 모든 것조차도 그것은 기존의 나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그것은 구원의 과정에 안 들어가려고 발 빼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모든 준비는 애굽에서 다 했어요. 그냥 빈 몸으로 오라는 그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약속의 땅에, 가나안 땅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야곱을 애굽으로,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으로 도로 부르는 이유가 뭐냐? 애굽에 가서 다시 들어갈 때 처음 나왔던 나는 날라 가버리고 애굽에서 새롭게 구성된 나가 거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은 땅과 땅, 내 육과 육의 차이가 아니라 전혀 알 수 없었던 새롭게 등장한 차이와 이 지상의 육의 차이, 육과 영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기예수로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그 호세아예언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예언이 있느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는 그 예언을 마태복음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의 가정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고,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지 않고 애굽에서 거꾸로 내 아들을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게 했다는 거예요. 거꾸로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가 바로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없는 거지요. 왜? 불러내는 과정 속에서 내가 예측하지 못하고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세계, 기대치 않는 세계가 바로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기대한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대했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이 아니에요.

내가 가고자 한 나라기 때문에 천국이 아닌 거예요. 천국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 적이 없습니다. 네가 어느 것을 선택할래, 한 적이 없어요. 친히 우리에게 와서 주께서 우리를 초대해버려요. 내 인생이 꼬이게 만들어버려요. 내 인생에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만들어버리지요. 내 뜻대로 안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게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27절에 보면,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여기에 수레만 달랑 왔어요. 초대했는데 수레만 달랑 온 거예요. 아버지 것을 다 실어서 오란 말이지요. 아버지의 몸을 싣고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수레는 소유용이 아니고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 용이에요. 아버지의 자리에 미련두지 말고, 포기하고, 이 수레에 타서 수레가 이끄는 그 곳, 수레를 보낸 곳으로 가자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수레를 보낸 거예요. 성령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눌러앉도록 만든 수레가 아니에요.

성령을 보내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그쪽에서 온 수레여야 돼요. 우리가 제작한 수레는 안돼요. 우리가 여기서 구원받는 조건이라고 만들어낸 그것 안 됩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기존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한 모든 조건을 전부 다 떨쳐버리는 거예요. 그걸 놓아 버려라 그 말이지요. 기도했고, 헌금했고, 십일조 했고, 봉사했고, 예배 참석했고, 성경 공부했고, 선교헌금 냈고, 충성했고, 이 모든 요건들이 절대로 구원의 요건이 될 수 없다는 것, 성령이 옴으로서 비로소 그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내 행함으로 준비한 모든 것은 다 헛짓이었다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그냥 교회 오는 것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동네 노래방에 온 거예요 결국. 요셉이 보낸 수레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영이에요. 성령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 땅에 곱게 왔다가 왕자처럼 살다가 가신 분입니까?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전히 개무시당하신 분 아닙니까?

이야기를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은 자에요. 그러면 야곱에게서 요셉이 죽으면 야곱에게는 인생이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내 아들 요셉은 죽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사는 방식들을 동원시켜서 야곱은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무슨 소식이 들려왔느냐 하면, 요셉이 살아 있다는 요소가 가미되었을 경우에 지금 내가 요셉이 죽었다는 삶의 구성방식에다 플러스 요셉이 살았다는 것을 보탤 수가 없어요. 이게 결합이 안 된다고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미 옛날사람으로 죽었다. 예수님은 죽었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 라고 했던 어떤 사람에게 무슨 소식이 들려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지금 빈무덤에서 살아 계시다고 된다면 기존에 살던 방식대로 거기에 지식 하나 추가해서 예수님 부활하셨네요, 고맙습니다, 이걸로 추가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죽었을 때는 야곱이라는 본인이라도 살아야 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거에요, 요셉이 살아있다면 전에 네가 혼자 살던 그 방식은 전부 다 거덜 나라 그 말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에요. 예수님이 살아있다면 그동안 내 자존심과 내 가치와 내 인생의 의미를 빛내기 위해서 살았던, 내 인생이 이 땅에서 성공했다고 남에게 자랑질하려고 살았던 이 모든 것은 거덜 내라 그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교회가 부흥을 원한다면 그 교회는 뭐가 빠진 교회냐 하면,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빼고 운영하는 교회에요. 만약에 어떤 교회가, 그런 교회가 없지만 어떤 교회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교회라면 교회 불나도 괜찮아요. 왜? 불이 나도 예수님은 살아 있잖아요. 그걸로 족하잖아요. 됐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그분이 초청장을 보냈는데!

사람이 뭔가 이 세상에 믿을 것이 나밖에 없다면 그 인생 자체가 뭐냐 하면, 오직 나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무슨 일도 다 할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안 지키면 아무도 날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나를 위해서 살 때 나처럼 귀하게 살아있는 것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살아계셔 버리면, 그러면 예수님 앞에 나는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경계선 안과 주님의 경계선 안에서 대치관계가 되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수레를, 성령을 보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네가 언제까지 내 적이 될래, 라는 메시지를 실어서 보낸 거예요.

우리는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느냐 하면, 주님 보고 오래요. 내가 공들인 내 인생이니까 편들어주고 후원해 달라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 성공 못했으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나를 삐까삐까, 우대해 달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적이 천국에 간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옛날 전설에 보면 곰이 사람 되었다는 것이 단군신화에 나오지요. 안 믿지만 재미로 전설이니 믿자. 사슴이 여자가 되었다. 안 믿지만 전설이니까. 그런데 야곱이 야곱으로 변했다. 이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야곱은 어디로 갔느냐? 야곱 1이 야곱 2로 변했다는 거예요.

야곱은 자기의 자리에서 야곱 되었는데 그 자리를 자진해서 철거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오라고 할 때 그 자기 자리를 버리고 아들에 합류합니다. 그곳이 어디냐? 자기가 기피했던 그 애굽나라였어요. 저주받은 도성,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비언약적도성, 저주의 대상이라고 여겼던 그 애굽에서 그렇게 싫어하고 죄밖에 없다는 그 애굽에서 주님이 거기서 부르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죄악 된 도시에 들어가야 됩니다.

왜? 거기는 잘난 내 맛에 살지 못하게 만드는 도시기 때문에. 나 잘나서 천당 간다는 것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도시기 때문에. 너도 애굽사람과 똑같다는 것,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우리는 기존의 내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버릴 수가 있어요. 바꿔치기 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나와 타인의 경계선 그 자체가 이제는 땅에서 하늘로, 초월로서 이동시켜야 돼요. 주님 계신 그 세계, 그 세계는 생명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이미 죽었고,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이미 죽었고, 우리는 생명이 없어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렇게 알자가 아니라, 기쁘십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한 이야기가 정말 기쁘십니까, 정말 감사가 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이 한꺼번에 다 날라 간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홀가분하지 않습니까? 중요하지도 않는 문제가지고, 사소한 문제가지고 평생을 목매면서 울고 불고를 매일 반복했던 그 인생이 이제는 살아계셔서 우리를 초청하는 그 분 나라, 갈 나라가 있다는 것,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저질스럽게 살든, 이 땅에서 어떻게 망가져서 살아도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이게 복음입니다. 집구석이 어떻게 되든지, 교회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나라꼴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드루킹이 어떻든 감옥에 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미투가 어떻고 관계가 없어요. 종을 편안히 이제 놓아주는군요. 복음의 능력은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는 거예요.

다만 좀 욕심이 있다면, 욕심이지요, 욕심이 있다면 이제는 그만 좀 데려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소관입니다. 네가 아직 나의 적인 것을 정신을 못 차렸다. 고생 더 해야 된다면 침대에 누워서 고생해야지요. 창세기에서 주님의 흔적은 일체의 나의 성공을 폐기시켜주는 그것이 주께서 손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자리로 하나님께서 옮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갈 곳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초청의 수레는 와 있습니다. 주께서 겪었던 그 경로가 담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주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