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1강-엡 2장 1(죄로 죽은자)19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상당히 짧은 문장이지요. 이 짧은 문장 안에 우리의 일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취업 문제라든지, 고부갈등문제, 사업문제, 국제정세문제, 교회문제, 이 모든 내용을 함축해서 담아놓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냥 산위에서 도 닦는 사람이 아니에요. 실제로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 이것이 인간을 보는 성령 받은 주의 종, 성령 받은 입장이 이겁니다. 너희는 죽었다. 죽은 자가 무슨 사업을 걱정하고, 죽은 자가 무슨 가정의 화평을 생각하고, 죽은 자가 무슨 취업을 생각하고 입시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을 하고.
이미 죽은 자가 무슨 교회 부흥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쓰고,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하고, 그런데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뭐냐 하면, 네가 누군지를 너 자신이 모르는 거예요. 사람이 성경을 보고 이해를 하고 해석을 한다는 것은 실은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가지고 성경을 우회해서 다시 자기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내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런데 성경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주 간편하게,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죽었다. 죽었는데 뭐로 죽었느냐? 허물과 죄로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었다가 결정을 내리고 판정한 앞에서, “하나님, 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어요?”라는 말을 아예 못 끄집어내게 봉쇄해버리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죽어서도 좋은 나라 가겠습니까, 라는 그 말, 그 언급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하여튼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들어요. 성경에서 죽었다 하면 죽은 것이지 왜, 구더기 꿈틀거리듯이 자꾸 꿈틀거리면서 자꾸 살 궁리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인생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렇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가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소유하고 가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용도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도록 드러내기 위한 용도일 뿐입니다. 고유한 나만의 것을 따로 챙길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주여, 저 어디에 쓸 거예요?” 그걸로 끝난 문제에요. “주께서 저 어디에 쓰실 겁니까?” 주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의 용도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죽이는데 쓸 것이고, 죽음을 보이는 용도로 쓸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죽은데서 다시 살아나는 용도로 쓸 것이다. 그렇게 언급합니다.
그래서 이 죽었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두면 안 되고 우리 주변이 우리를 죽일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꽉 차 있어야 돼요. 저는 그것을 초기조건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에 이 죽음이 인간보다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달랑 인간만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주변 환경자체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만든 환경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다시 살리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든 조건하에 인간은 그 조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용도로서 배치되어 있는 겁니다. 창세기 2장의 그 초기조건 속에서.
그래서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모든 현대인, 그 당시나 오늘날 현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그 초기조건으로 되돌리는 작용으로 말씀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처음자리로, 원래의 자리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은 지금의 현 자리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지 아니하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씀 자체가 허황되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숨쉬고, 기지개켜고, 걷고,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도대체 어느 대목을 봐서 내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인가? 사랑방에 가서 손님하고 이야기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는 이것도 죽은 모습이에요? 커피 들고 또 마시는 이것이? 이것도 죽은 목숨이에요? 이것도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그것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은근히 주의 말씀의 근거가 점점 없어 보여요. 이 성경말씀은 두꺼운데 이상하게 이 성경말씀이, 교회 처음 나올 때는 주의 말씀이라고 해서 신경 바짝 쓰다가 나중에 교회 나오는 것도, 물론 교회가 놀러 다니는 곳이니까 그러한데, 교회를 놀러 왔다갔다, 왔다갔다, 수십 년 하다보면 성경말씀이 와 닿지를 않는다니까요.
성경말씀은 허황되고, 이것은 개무시해도 괜찮은 말씀이고, 실제로 우리 삶에 와 닿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문제거든요. 서울대 어떻게 들어가느냐, 또는 취업문제라든지 그런 것이 심각한 문제고,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이게 더 와 닿는 거예요. 성경말씀이 와 닿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 할 때, ‘사도바울이 미쳤나?’ 일방적으로 사람을 매도한다는 느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그런 시비조로 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이 구절을 언제까지 계속 봐야 되느냐 하는 울화, 분통, 분노 같은 것이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교회에서 성경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같이 재미있고 놉시다. 게나 먹으러 가고, 그런 것 있잖아요. 같이 놀러가고. 좀 착한 일 하고 싶으면 바자회 열고, 고아원 방문하면 되고. 사랑의 열매 뱃지 달고 돈 몇 푼이나 쥐어주면 되고, 착하게 살았다는 뿌듯함, 이런 것 채워주면 그게 교회 아니겠어요?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 했을 때 이 죽었음을 강력하게 우리 내부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직 안 죽었다는 거예요. 앞으로 잘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앞으로 말씀 지키고 잘 하면 되니까 죽었다고 하지 말고 죽을 뻔 했다고 ‘뻔’이라는 글자 하나 더 넣자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중세 때 사람들은 수도원을 만들었어요. 자기들 눈에 보기에도 세상이 참 추접하고 더럽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깨끗한 나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 싶어서 가정을 떠나고, 직업도 떠나고, 다 떠나서 도 닦는 식으로 수도원, 수녀원을 만들었어요. 솔직하게 말해서 살기 힘들어서 편한 방법으로 살아보겠다는 요령을 부린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빌미로 해서 자기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한 것인지 분간은 안 되지만 그러한 수도원들을 만들고 그 수도원경내에서 성스러운 의례, 의식을 행해요. 성수를 뿌린다든지.
그러면 종교부지가 뭐가 되느냐 하면, 제의적축복에 의해서 신성한 공간으로 탈바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에는 수도사, 또는 수녀들끼리만, 우리끼리만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수도원 주변에 있는 부락이라든지 주민이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간다는 거예요. 놀랍게도 먹혀 들어가는 거예요.
이 지옥 같은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인간의 힘으로, 행함으로 만들어낸다는 거기에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인간들이 발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야, 교회는 저래야 돼.’ 베네딕토수도원에 있는 규칙들을 보세요. 이렇게 살아야 인간답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항목들이 죽 나와 있어요.
병든 자 돌보고, 어려운 사람 돌보고, 도와주고, 길가는 나그네를 도와주고. 성경구절 그런 것 뽑으면 수백 군데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지켜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스러운 공간을 지켜주게 되면 죄 많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처벌이나 형벌 같은 재앙들이 이 쪽 경내, 수도원경내에는 미처 도달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은근히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성스러움의 실험실이에요. 그 수도원이 모델이 되어서 그것이 개혁주의교회가 된 거예요. 안 죽습니다, 그들은. 미쳤다고 죽어요? 살아서 얼마나 내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내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 질 하고 싶은 거예요. “주님, 나에게 이런 거룩한 잠재력이 있는 것을 몰랐지요?” 자랑 질하고 싶은 거예요.
교회 장사하는 법은 간단해요. 인간 속에 있는 영적경험을 끄집어내서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겁니다. “하나님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육적인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바르게 살고 윤리도덕으로 살면 여러분은 육의 존재에서 혼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고 혼에서 영으로 점프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복 받을 겁니다.”
그걸 상품으로 제시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아의 종교적 구현체입니다. 구성체지요. 특히 이런 교회의 존재가 왜 이게 죄가 되고 허물이 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죽은 자에게, 인간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장소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일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그 죽음 안에 모든 희망과 꿈과 비전을 거기에 다 없애야 되는데. 그게 사도바울이 예수님께 받았던 말씀이에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고, 살았어도 이미 죽은 것이고. 그래야 돼요. 그게 본래의 자리에요. 그런데 본래의 자리에 가지 않고 지금 있는 자리를 긍정하려고 하는 거예요. 있는 자리에서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장례식장에 가보세요. 목사들이 얼마나 구라를 떱니까? 그 인간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하늘나라 처소에 들어간다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그 유족들 위로한답시고.
그 죽은 자 위로해서 뭐 할 건데요? 죽은 자 왜 위로해야 되는데요? 위로받을 자격이나 됩니까, 인간들이. 우리는 젊은 청춘에서 뭘 봐야 되느냐 하면, 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돼요. 젊은 청춘에서. 네가 까불어봐야 나중에 침대에 누워가지고 바짝 창백한 다리나 내놓고 있어야 됩니다.
요양병원에 가 보세요. 노인들 환자복 걷어 올리고 창백한 다리 내놓고 있다고요. 바짝 말랐어요. 메말랐어요. 촉촉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탱탱한 것도 없어요. 그나마도 다리라도 올려놓고 있지 조금만 더 있으면 움직이는 것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지금 사도는 인간의 용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네가 얼마나 뛰어나냐를 격려하고 독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데 참 힘들지? 하나님께서 도와줄 거야.” 그런 낌새조차 주지 않아요, 그런 낌새조차. 너희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이 무엇과 지금 경쟁하고 있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과 경쟁을 해요. 건물들, 나무, 해, 달, 별, 다 눈에 보입니다. 사람도 눈에 보이고.
눈에 보이는데 이런 말씀에 대해서 콧방귀뀌고 안 돌아보는 이유는 이 말씀이 안보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냥 문자로 되어 있고 안보이거든요. 사람은 보이는 위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보게 되면 그 보는 것이 이미지로 두뇌 속에 담기게 돼요. 그래서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늘 이동하면서 하루 일과가 돌아갑니다.
눈 떴다. 뭐가 보이는가? 시계가 보이지요. 몇 시 되었나, 봤지요. 보고 난 뒤에 화장실 다녀가지요. 화장실 눈에 보이지요. 문이 보이지요. 문 열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지요. 그 때부터 가정주부는 아침 하는데 부엌이 보이고 부엌에 가지요. 부엌이 보이고, 거기에 바가지가 보이고, 쿠쿠가 보이잖아요. 전부다 보이는데서 보이는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건너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거기에 집어넣습니까? 개입시킵니까?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도 내가 왜 죽었는지 증명하는 하루가 되자는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까?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라고요. ‘힘들지만, 감기 걸렸지만 뭐라도 먹고 힘을 내야 또 살지.’ 맨 날 마지막 동사는 ‘살지’입니다. ‘오늘도 어떻게 살아볼까? 오늘 반찬 좀 해서 가까이 사는 자식들한테 갖다 줄까. 먹어야 또 사니까.’
전부 다 사는 이야기에요. 왜 사는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부모는 저 멀리 치웠기 때문에 안보이잖아요. 내가 살아 있기에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사람과 관계하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보고 일상으로 보는 겁니다. 거기 죽음이라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어요? 모르지요. 죽는다는 것을 항상 우리는 빼놓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죽었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처음 조건에서는 이 말씀이 눈에 보이는 조건이었습니다. 선악과라는 것이 아담의 눈에 보였어요. 그리고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들렸습니다. 보고 들린 거예요. 그런데 그 보고 들리는 말씀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독자적으로 살다보니까 이제는 저쪽에서 무엇이 주어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내가 소유해야 되고, 더 끌어 모아야 되느냐?
모든 것이 나 살기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모든 시발점을, 출발점을 나부터 출발하다 보니까 내가 죽었다는 소리는 항상 뒷전으로 물리쳐야 되는 그런 본성으로 살게 된 겁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숟가락으로 내 알맹이를 몽땅 다 빼내는 것 같다고. 아, 세상에. 숟가락으로 내 알맹이를 다 빼내는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숟가락으로 내 자아를 다 빼내는 것 같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말씀의 역할, 그게 구원 작업이잖아요. 구원 작업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동안 지켜야 될 것이 나한테 있다고 하는 그것, 그 지켜야 될 것을 나에게 있다고 여기기에 나는 자꾸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성경말씀과 대비되면서 살았다고 우긴 거예요. 그래서 네가 살지 않고 죽었다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내가 살았다고 오해케 하는 요소를 숟가락으로 빼내는 겁니다.
숟가락으로 빼내는 것이 잘 실감이 안 난다면 전복 하나 잡숴보세요. 딱 들어붙은 전복. 전복 알맹이는 숟가락 가지고 떼 내야 잘 떨어지거든요. 매일같이 나, 자아라는 알맹이를 외부에서, 말씀으로서 빼는 작업을 당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하나의 용도가 되기 때문에. 주의 말씀만이 현실인 것을 알리기 위한 용도로서 우리는 배치된 상태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 이어갑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제가 말 하든 말든 관계없이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꽉 차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뒷전입니다. 말씀 해봐야 잔소리에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대로 한다고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말씀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부동산입니다. 건물이에요. 다 눈에 보이는 것들, 등기부등본입니다.
이것이 말씀보다 더 중요해요. 교인숫자입니다. 헌금통계입니다. 한주에 얼마가 나오는가?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은 옆에 있는 집사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앞에 있는 목사가 나보고 뭐라고 질타하는지, 대인관계,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게 전부에요.
만약에 어느 총각이 보기에 자기 맘에 드는 아가씨가 그 교회 나왔다. 이러면 누가 말려도 새벽기도 나옵니다. 그 아가씨가 새벽기도 나오는 조건하에. 그 아가씨가 성가대하면 성가대합니다. 주일학교 교사하면 교사합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다른데 시집간다는 소리 들으면 그 교회는 바이바이, 합니다.
인간은 대인관계뿐이에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타인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 자아, 전복 같은 자아를 주께서는 말씀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어디서 살아있는 척을 하느냐?”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자아를 남겨두느냐? 자아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아가 있어줘야 죄와 허물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인간보다 죄와 허물이 우선되는 거예요. 죄와 허물, 죽음, 사망, 부활, 전부 다 예수님과 관련된 요소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인간은 후차적으로 피조된 거예요. 만들어진 겁니다. 예수그리스를 위하여 통일되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진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오잖아요. 세상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요.
그래서 자아의 경쟁자는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나간다면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을 죽여야 속이 풀려요. 하나님을 죽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틀어막든지, 하나님 말씀이 없는 곳으로 내빼든지. “제발 나만의 일상에 그냥 살도록 놔둬요 주님. 날 건드리지 말고, 잔소리 좀 하지 말고, 나는 내 식대로 살 테니까 옆에서 자꾸 치대지 말고, 쳐들어오지 말고, 나 재미있게 살도록 좀 놔둬요.”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교회 나오시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말씀은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우리에게 제시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1장 15절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 보이는 것부터 출발하거든요.
안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이동시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 눈에 안보입니다. 죄? 눈에 안보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이 딱 하나 나오네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다 죽는다. 인간은 다 죽는다. 좀 추가한다면 인간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늙어죽는다.
인간은 침대에 누워서 죽는다. 인간은 살 빠져서 죽는다. 인간은 그 피부가 다 바짝 말라죽는다. 눈에 보이잖아요. 그걸 백날 뭘 붙이고 해도 원인은 네 욕심이 원인이에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죽는다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우리가 욕심을 내는 것도 필연적이고 죄를 짓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죄 짓지 말라가 아니라 죄를 지어라. 욕심을 내지 말라가 아니라 욕심을 내라.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것이 기쁜 소식이에요. 욕심내는 용도로 만들었고 죄 짓는 용도로 만들어졌고 그 결과로 죽어 마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 죄와 그 허물의 표적은 뭐냐? 하나님 죽이자, 입니다. 하나님을 없애버리자. 나라는 그 출발점부터 끝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넘어뜨리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죽이고 자기가 만든 하나님, 자기해석이라 했지요, 내가 누군지를,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내가 얼마나 정당하고 의로운 존재인가를 부추겨주고 옹호해줄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삼위일체라는 이름을 붙이든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든 성령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그 명칭이나 호칭은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죽일거냐, 살릴거냐의 그것으로 판단되는 겁니다. 나를 죽이시는 것이 하나님 일에 정당하다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고 나를 살리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와도, 만 명이 와서 이야기해도 그것은 악마입니다. 그것은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거고요, 악마의 일은 우리 자신을 세우는 거예요. 우리를 격려하고 독려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부여하는 하는 하나님이 그게 악마에요.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잘 풀릴 거야. 네가 나중에 훌륭하게 될 거야.’ 그렇게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의 요령이 발생되고 행함이 주어집니다.
인천 동암에 금성아파트가 있는데, 재개발을 하는데 그 터가 조선시대 때 고관대작들이 살던 터였어요. 그 때 그 주변 사람들이 무릎을 쳤습니다. 왜 이 동네에서 서울대학 많이 들어가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거예요. 터가 좋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터가 좋아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에요.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나를 없애는 구원이 아니고 나를 계속 살려내는 구원, 그 구원과 결합된 예수, 삼위일체, 하나님, 그거 다 악마가 만들어낸 거예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재주와 실력이 우리한테 있느냐?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원래의 자리에서 이미 떠난 입장이기 때문에 떠난 입장에서 우리가 백날 질질 끌고 가도 나를 떼놓고 갈 수는 없어요. 나를 계속 끌고 가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그 다음에 “살리셨도다.” 되어 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생애는 한 번은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망하지 아니하면 두 번 사는 것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이 생애 눈에 보이는 것이 문제라 했지요. 눈에 보이는 생애는 일단 망하는 쪽으로 갑시다. 일단 합의 봅시다. 일단 이 생애는 망합시다. 왜냐하면 다시 살리심에 맡깁시다. 일본말 할 줄도 모르지만,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만, 이 생애에 쇼부 걸지 맙시다. 이 생애에 승부 걸지 맙시다.
그러면 이 생애에 승부를 걸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라는 것은 주님의 유발된 사건에 이 말씀을 통해서 와 닿아야 돼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와 허물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죄와 허물을, 그 나쁜 것을 없애지 않고 왜 살려야 되는가?
그게 원초적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 있던 환경이 그런 환경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 환경으로 가지 아니하면 거기서 다시 가는 길이 나오지를 않아요. 내가 살아서 가는 길은 없어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포기 먹는 그 자리가 새로운 길이 나오는 출발지점이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 이런 과정을 예수님께서 이미 실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그 당시 잘난 바리새인들, 착하고 괜찮은 사람들, 소문난 사람들 많았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인정했지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우수하고 월등하고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해도 천국 못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죄인들,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의도적으로, 주님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니까, 그들을 의도적으로 뽑아 세운 이유가 뭐냐? 그들은 일종의 이동하는 무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안에 저주 들어 있어요. 세리, 창기, 도둑, 강도. 그리고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 귀신들린 여인, 간통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 날 때부터 소경된 자, 문둥병자,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인간의 진짜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예수님 당시에 마치 가루 뿌리듯이, 중간 중간 지뢰설치 하듯이 뿌려놓은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저 사람이 너보다 더 죄 많은 줄 아느냐?”라는 토를 다시면서 계속 뿌려놓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그 사람들을 얼마나 개무시했습니까? 인간도 아니라고. 저건 반드시 지옥 간다고. 백부장, 이방인들. 이방인들이 지옥 가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 백부장이 천국 간다면 너희가 어떻게 할래?
백부장이 천국 가는 것은요, 이 생애에서 자기인생을 망치는 겁니다. 이방인으로서. 망친 것을 수용하는 겁니다. 망친 것을 수용하는데 예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가운데서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철저한 용도가 돼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자아를 예수님 앞에 인수인계한 겁니다.
따로 나라는 것이 없어요. 옛날 내가 있던 나를 주님이 가져가버리고 그 주님의 나가 확장된 것이 자기 자신이에요. 까라 하면 까는 거지요 뭐. 가라 하면 가고. 바로 이런 자가 어디 가느냐? 천국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라의 본 자손은 다 쫓겨나오고. 예수님과 연관되고 관련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적용시키게 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 때 ……, 설교 처음부터 다시 가봅시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온갖 직업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터키, 그리스, 로마, 많이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날 때에 ‘저 사람은 몇 가지 조언만 하면 잘 될 거야.’ 이런 것이 없고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압축을 시켜 놓아버려요.
내가 만난 어떤 사람도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다. 따라서 이미 죽었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손질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는 죽어야 잠재되어 있던 죄와 허물이 발휘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렁물렁한 땅을 군홧발로 밟고 지나간다고 봅시다. 그러면 발자국이 깊게 파이겠지요.
우리가 진흙인데 주님이 우리를 밟아버렸어요. 그러면 내 몸에 주님의 발자국이 밟히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비가 온다고 합시다. 그 빗물이 발자국의 깊이만큼 고이겠지요. 그게 주님이 옴으로서 내가 있던 그 자리에서 죄와 허물이 살아나는 거예요. 빗물처럼. 우리는 빗물을 담는 그릇이에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백 살 사나 오십을 사나 관계없이 한평생 이 생애는 어차피 이것은 망해야 되는 겁니다. 조져야 돼요. 이것은 꾸겨버려야 돼요. 꾸겨야 삽니다. 무슨 교회를 다니고 뭐가 어떻고, 그 옛날 미친 수도원의 수녀들, 신부들 흉내나 내고 있고요. 성화, 거룩, 흉내 냅니까? 자기가 자기를 살려보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아는요, 더 단단해져서 외부에서 숟가락 들어오면 숟가락 차버립니다. 주께서 매일같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줬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안보이거든요. 안보이니까 이게 하나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사건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적인 끝과 공적인 끝, 그 지평선 너머에서 사건이 날라 오게 되어 있어요.
개인적인 죽음도 끝이 아니에요. 공적인 여러 사람이 죽는 것도 끝이 아니에요. 끝의 끝, 그 지평선 너머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서 사건이 날라 옵니다. 다니엘 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벨사살 왕이 까불고 파티하고 있는데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는데 잘린 손가락이 돌아다니면서 글씨를 쓰고 있는 거예요. 혼이 나갔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나는 안다고 까불대지만 그것은 끝의 범위 안에 있어요. 끝이 되지 못한 한계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종말이 된 종말에서 날라 오는 그 별빛 같은 사건들이 쏟아지게 되면, 인간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해요.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살아 있지? 아, 살려주니까 살아있구나. 그런데 날 위해서 살려줘? 아니. 죄와 허물로 네가 죽었고 다시 산다는 그 내용, 진리내용, 문장내용, 말씀내용을 살리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를 계속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살리기 위한 거예요. 왜? 태초에는 성경말씀밖에 없으니까. 태초에는 말씀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후차적인 문제에요. 그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일단 죽어도요 말씀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살리셨도다, 하는 이 말이 빈말이 아니에요. 살리셨도다, 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단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야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 일단 죽어야 돼요.
죽는 것이 다시 태어나는 장소에요. 그러면 우리가 죽기를 기다려야 되느냐? 기다릴 필요 없어요. 지금 벌써 실시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다시 읽어봅시다. 너무 중요해서요.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저희 시체라 하는 것은 두 증인의 시체입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애굽은 이집트고 소돔은 그 위에 있고 십자가는 이스라엘에 있어요. 지명이 다 다릅니다. 장소가 다 달라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살잖아요. 눈에 보이는 현실 같으면 애굽은 저 밑에, 그리고 소돔은 저쪽 사해바다, 이쪽은 십자가, 대절버스 타도 한참 걸려요. 십자가에서 사해까지 한 네 시간 걸릴걸요. 그 정도 차이가 나요. 그런데 같은 장소라는 거예요. 이 말은 미세먼지 피하려고 캐나다로 이민가든, 저 뉴질랜드로 가든 어디에 가도 그것은 주의 사건이 임하면 그것이 바로 네가 죽은 사건이요 동시에 네가 다시 산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주님의 십자가사건화 된 인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움직이는 세리고 움직이는 창기에요. 이미 자아는 전복 알 빼내듯이 다 빼버렸어요. 내장까지 다 빼버렸어요. 그게 바로 거듭남의 현상이에요. 우리는 자아알맹이 뺏길 때 발악을 합니다. 평생을 그 자존심 지키려고, 그 의미와 가치 지키려고, 심지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그거 지키려고 살아왔어요.
왜? 우리 기억 속에는 내가 살아온 것 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고 내가 없으면 이 교회,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일단 내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국가가 있고 나를 필요로 해서 교회가 있다고 여기잖아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러나 그게 다 속 알맹이가 잘못되어서 그래요. 알맹이를 주께서 말씀으로 빼냅니다. 어떻게 빼는가? “너는 속은 죽었어. 너를 텅텅 빈 무덤으로 만들어버려라. 거기는 너가 없어.” 그냥 무덤이에요. 그냥 무덤. 주님과 함께 죽었던 그 무덤,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빈 무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려라 그 말이지요.
살아온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태초에 무엇이 있었고 마지막에 뭐가 있는가를, 알파요 오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알파요 오메가요소를 집대성해서 우리 안에 담아준 거예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우리가 평소에 잘하는 것 하면 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죄와 허물을 보여주는 겁니다. “목사님, 설교 하고 난 뒤에, ‘바르게 삽시다. 이제는 착하게 삽시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지요.’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와야지 왜 죄와 허물을 보여주자고” 하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은 공정하지 않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아는 공정은 뭐냐? 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공정은 뭐냐 하면, 내 노력여하에 따라서, 내가 얼마나 자기를 낮추느냐 그 여하에 따라서, 내가 뭘 믿느냐에 따라서, 믿으면 합격이고 못 믿으면 불합격이라는 것, 우리가 아는 공정은 이겁니다. 내가 착하게 살면 하늘나라 상급 받는다.
이게 우리가 아는, 자아가 아직도 안 죽고, 버티고 있고, 악마가 계속 우리에게 세뇌를 주고, 계속해서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큐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계속 암시하고 훈련시키는 것, 네가 훌륭해야 하나님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합류하는 거예요. 십자가사건에 합류하는 거예요. 집결하는 거예요. 모든 성도는. 그럴 때 거기는 내가 생각하는 공정함은 날라 가버려요. 일방적으로 주님의 예정하심에 의해서, 합격될 자는 합격되고, 지옥 갈 자는 지옥 되고,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사랑받고,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쟤는 왜 천국에 안보내줍니까?” 혹은 “쟤는 왜 지옥에 안보내줍니까?” 하지 마세요. 그들은 하나의 용도입니다. 천국은 이런 세계이고 지옥은 이런 사람이 간다는 용도로서 그냥 만들어진 거예요. 용도로서 만들어진 거니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입장이나 자격이 안 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끼어들면 숟가락 가지고 우리 자아 빼내버려요.
천국의 조건에 맞춰야 되고 지옥의 조건에 맞춰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살다보니까 나한테 이야기합니다. “천국 보내주면 믿을게요. 지옥 보여주면 믿을게요.” 그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천국과 지옥을 구성하는 재료는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네가 죄와 허물이 있다는 자체는 우리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우리는 살아났다는 사실, 재료는 다 갖고 있어요. 이 재료, 살아난 자는 천국이고, 성령을 받지 못해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그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 악마가 발목을 잡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행복한 것이 천국의 행복인 줄 착각했습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그 자체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자체로서 우리는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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