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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베소서 1:21-23 /교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1:21-23 /교회

정인순 2019. 1. 15. 15:28

음성              동영상        Youtube


에베소서 1:21-23    교회


이근호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를 ‘힘의 충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이 자기 환경을 조절하고 개선하고 관리하고 감안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을 일체 악한 일이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힘입니다.


인간의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마저 하나님의 허락과 조정이 아니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주님의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받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힘은, 지금껏 인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힘과 비교되면서 실시됩니다.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실력 되는 대로 살아가라고 독려해왔습니다.


희망을 가져도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 미끼가 되어 계속 지연되는 천국을 따라잡는 식으로 헛되게 세월을 보내게 했습니다.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이 실효성 있다고 제촉했습니다.


악마가 이런 식으로 인간을 모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모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소용없는 존재로 선전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만 없다면 이 세상에서 악마와 경쟁한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악마가 유포하고 인간 속에 집어넣어준 심보는 그 누구도 자력으로 그 원칙을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존 인간 세계에 퍼져있는 그 의식과 반대로 나아가십니다. “죽는 것이 곧 제대로 사는 것이다”고 알려주십니다.


죽음에 굴복하는 것이 죽음을 이기는 절차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생존은 실은 주님의 능력 안에서 화제거리도 아닙니다. 주님을 만들어내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의 집단’ 곧 교회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시고, 계속 교회 되게 하시는 주님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1에 보면,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놓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리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이근호
2019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20-23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능력을 주신다는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님이나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능력과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식으로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그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덤에 갇혀 있을 때에 주어진 능력입니다.

즉 죽은 자를 부활로 이끈 능력이 오늘날 ‘교회로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보여줄 능력은 그 전에 ‘죽은 죄’ 혹은 ‘무덤에 있는 것이 합당한 자’라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진해서 무덤에 들어가려고 할 자가 없겠지요. 그래서 교회의 능력은 자칭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을 ‘죽은 자’로 규정하시는 작업부터 시작하십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공격했던 그 배경에는, 자신들이 사리분별이 가능한 건전의 의식을 지닌 인간이라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상에서는 자기 구원을 자기 행함으로 달성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나옵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살고 나의 즐거울거리는 내가 정하고 내가 만든다”는 원칙이 가동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신을 가치있게 봐버리면 그 인간상은 고정이 되면 사물처럼, 물체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즉 ‘파괴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못 버린다’라는 의지력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힘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을 죽게 하려고 덤비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18-19에서 교회를 제시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이 제시한 교회 원칙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필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버린 것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에 자신이 합세할 수 있는 그 어떤 여지도 예수님쪽으로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물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세상이 제시한 인간 기준에 부합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능력은 이런 것 뿐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은 자로 다루심을 아는 능력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성도는 존재로 보지 않고 ‘능력’으로 보시는 겁니다.

지옥/천국을 가름하는 ‘기준으로서의 능력’을 성도를 통해서 뽑아내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아를 자기 몸에서 분리해 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심한 변비에 걸린 것처럼 배설이 불발로 끝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뛰어듭니다. 자신의 몸이 본인이 다룰 자격이 없음을 알고 주님이 자기 몸을 통해서 두 종류의 자아를 뽑아내십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의미를 두는 자식은 압살롬과 솔로몬입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나라를 힘으로 장악하고자 아버지에게 대든 자식입니다. 그러나 솔로몸 자식은 그 존재 자체가 아버지의 다윗의 범죄함을 보여줍니다.

진정 ‘다윗언약’에 부합되는 사람은 압살롬도 아니요 다윗도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즉 자식이 아버지를 변화시키는 겁니다. 첫째 아담에 속한 우리 자신들을 그 아담의 자존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담들 손에 죽으시므로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보게 하십니다. ‘죽었다가 아버지의 능력으로 사신 분’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면서 버티는 능력만 있었으면 기대하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함께 여지없이 베드로처럼 배신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구멍 속에 있습니다. 빈 무덤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일개 개인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천국의 오른편에 닿아있습니다. 마치 아파트 안에 어린아이를 위하여 인디언 텐트를 쳐놓으면, 밤에 아아들이 잠자면서 인디어 텐트의 천장만 보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세상 사람 보기에 ‘목수의 아들’로 봤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상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 안을 하나님께서 빈 무덤으로 만드십니다. 그 무덤이 곧 성도의 집입니다. 즉 성도 중심부 구멍이 나 있는 식입니다. 그 속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일에 대해 모든 것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이기에 자기에게로 되돌아올 의미나 보람이나 가치는 필요치 않습니다. 욕심부려서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많은 실적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세상 형편은 마태복음 24:40-41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즉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주도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지옥 출신자’에 불과하기에 누가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요 만남입니다. 이처럼 교회란 자기 행함을 일체 자랑치 못하는 원리가 흐릅니다. 비록 성도들 각자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세상의 온갖 크고 넓은 것들이 다 거기에 담기게 됩니다. 작은 것 안에 우주보다 더 큰 것이 담긴 격입니다.

그 구멍에서 나온 능력이 날마다 성도의 자기됨을 삭제시키고 죄라고 몰아붙이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부합되는 능력이란 이처럼 ‘죄 속에서 구원’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이를 말해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를 늘 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면서 그 속에서 지옥과 천국의 기준을 제시하는 버스 안내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강-엡 1장 20-23(교회)190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9-23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20-23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서 능력을 주시는 그 아버지라는 분, 하늘의 그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20절에서 ‘그 능력’에서 ‘그’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했다고 했는데 또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22절에 보면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되어 있으니까 역시 교회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교회가 없다는 이야기지요. 사도바울은 교회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보이지 않는 형식으로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뭐가 나타나 있느냐?

20절에 보면,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분 안에서 작용하는 능력이 이 세상에 펼쳐지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 활동하는 힘은 뭐냐 하면, 죽은 예수님을 하늘로 올려 세우시는 그 능력으로 활동하는 중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사, 21절에 “모든 정사와 권세와” 모든 정사와 권세라 하면 여러분이 북한 핵문제를 여기에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정권교체 다 집어넣으면 돼요. 트럼프 대통령 집어넣으면 돼요.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 그리고 이 권세와 능력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악마도 포함됩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인 악마, 악마도 이 권세와 능력에 포함됩니다. 그것을 요리조리 조종하고 계시는 능력이 지금 교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데 그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능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되었다, 괜찮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만 일하는 교회이어야만 참된 교회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든 뭐든 인간 눈에 어떤 단체가 보인다는 것은, 이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는 반작용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인간이, 이 땅의 죄인이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 간 것은 피로 말미암아, 그 피, blood, 인간이 죽을 때 쏟아져 나오는 그것, 인간이 죽을 때 쏟아져 나오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그 피를 대체할 수 있는 체제와 조직이 과연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는 서기 2백년이나 3백년이니 2천 백년이나 상관없이 계속 가거든요. 이 피 안에서는 역사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교회역사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 겁니다.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는데 교회 역사가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무 보탬이 안 되겠지요.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는다는 말은, 그동안 이 피라는 것이 선지국처럼 “아줌마, 국밥 한그릇 주소.” 이렇게 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고 부딪힘에서 오는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이 어디서 부딪히는가? 유대사회라는 역사, 이 종교적인 유대나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상, 그 체제 내에 주께서 오셔서 거기에서 부딪혀서 장렬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장렬하게 돌아가시면서 남긴 것이 내 살과 내 피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했어요.

이 피와 살은 부딪힘에서 오는 거예요. 멀쩡한 교회조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점잖은게 문제에요. 고통을 안당하려는 것이 문제에요. 고생을 안 하려는 것이 문제고. 사람들은 자꾸 사람을 닮으려고, 세상을 닮으려고 합니다. 그런 성질이 있어요. 자꾸만 세상을 닮아가요. 세상이 나를 보기에 어떻게 보겠느냐? 그게 주된 관심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 닮으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닮아서 피를 흘렸습니까? 세상을 닮으려고 애써서 살을 찢겼습니까? 안 닮아서 피 흘렸고, 안 닮아서 찢긴 거예요. 세상을 안 닮은 겁니다. 어떻게 안 닮을 수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어떻게 안 닮을 수가 있는가를. 내가 가는 인생하고 네가 가는 인생하고 어떻게 안 같을 수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재벌입니까? 사도바울의 한 달 소득이 천만 원 넘었어요?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을 고발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가 한 때의 사건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이 세상 마감할 때까지. 요즘은 교회 가는 것도 남 흉내 내는 거예요. 남들 가니까 가는 거예요. 남 닮으려고 교회 가는 겁니다.

아버지 가니까 자식은 당연히 따라가야 용돈이라도 좀 주는 줄 알고요. 언제 여러분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너는 세상을 닮지 말라고 교육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양육한 적이 있어요? 세상 가는 길의 반대 길로 가라. 그게 주님의 가르침 아닙니까? 세상은 넓은 길로 가려고 하고 주님은 좁은 길에서 기다리고.

그런데 세상은 점점 더 세상다워져요. 이 세상에서 세상을 닮지 않은 사람은 사람취급도 안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가 말하는 성도의 의미는 딴 게 아니고 지옥과 천국의 기준점으로 성도를 내세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떻게 지옥출신자가 천국백성이 되느냐? 지옥출신이 어떻게 천국백성이 되느냐?

어떻게 나사렛사람이 메시아가 되느냐와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지옥에서 태어나 지옥의 사고방식으로 지옥에서 교육받아서 모든 생각하는 것이 지옥가기에 딱 적합한 인간이 갑자기 어느 날 그 입에서 천국이야기가 나온다는 이것은 미친 사람이거나 돌았거나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약 잘못 먹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획기적이어야 됩니다.

제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촌에서 올라와서 촌에 있는 식구들 먹여 살리겠다고 고등학교나 혹은 중학교도 못 다니고 초등학교 겨우 나와서 버스 안내양하는 사람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 대구에도 있었는데, 빵모자 하나 쓰고 버스 차장을 하는 거예요. 그 여자차장들이 굉장히 냉정해요. “탈사람 없어요? 오라이!”

교회가 하는 일이란 바로 그렇게 차장역할을 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의 기준으로 사는 거예요. “천국 갈사람, 없어요? 그럼 오라이!” 갈 길이 달랐다 안 합니까? 노선이 다르잖아요. 오라이, 오라이, all right! 모든 것이 오케이다 그 말이지요. 손님 없어도 아무 일 없어요. 교인 없어도 아무 일 없어요.

목사들이 교인은 없고 안 오면 정신적으로 주눅 들기 쉬운데 중요한 것은 본인이 차장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복음 잘못 전해서 만원버스 되었다는데 전부 다 지옥으로 안내하는 그런 역할을 하면 안 되잖아요. 이것은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교회라 하는 것은 보이는 것 붙잡고 “교회지요?”라고 묻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서 능력이 나와야 돼요. 그 능력은 무슨 능력이냐?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아버지의 능력입니다. 그 오른편에 앉히시는 능력. 오른편이라 하는 것은 최종지점이지요. 완료된 지점. 따라서 지옥에서 살던 성질밖에 모르는 인간, 지옥사람이지요. 이 사람을 천국에 보내려면 그 사람을 일단 죽은 자로 바꿔지고 그 죽은 자로 바꿔놓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은 자라고 인식시키는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계시의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나는 살아도 산 자가 아니고 기껏 사는 것이 지옥에서 살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왜냐? 출신자체가 지옥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피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옥에서 만든 교회가 있어요. 지옥 표 교회.

지옥에서 만든 교회, 지옥에서 만든 기독교가 있어요. 지옥에서 만든 교단이 있고 지옥에서 만든 예수가 있고, 지옥에서 만든 삼위일체, 다 있어요. 지옥에서 만든 거룩, 지옥에서 만든 선교도 하고 있고. 지옥에서 만든 지옥 표 교회의 특징이 뭐냐? 여러분이 노력하면 구원받습니다. 애쓰면 구원받습니다. 나 따라오면 구원해줍니다.

성경 통째로 꿰뚫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지옥 표 교회입니다. 그런 차에 타고 ‘오라이!’하고 있어요. 거기가 취향에 맞으면 가야지요.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경건과 내 양보와 내 낮아짐으로 천당 간다면 그런 교회 가세요. 그러나 천국 가는 성도는 마땅히 내 힘으로 천당 간다는 그것으로 시작점은 그렇게 해요.

시작점은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성령을 받으면 내가 시도하는 구원이 좌절되었음을 압니다. 그 좌절되었음을 아는 상태가 구원의 목적에 도달한 상태에요. 아, 나는 구원이 안 돼, 하는 순간 비로소 구원에 도착한 거예요. 수요일 설교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 빼고 자기들만의 가정, 집안을 꾸리고 그것으로 야곱언약의 집안에 합한다고 시도했던 그 형들의 노력이 요셉으로 인하여 수시로 좌절됩니다.

그 좌절되는 순간, 좌절되었음이 이미 확정되는 순간, 이미 그들은 요셉의 품 안에서 구원이 된 순간이에요.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모든 것을 좌절시키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그게 능력이에요. 어느 인간이 자기구원을 포기합니까? 어느 인간이, 자기천국행을 포기할 인간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자기포기가 되더라 이 말이지요.

이번 수련회, 여러분도 소감을 적어주기도 했는데, 이번 수련회 다 끝나고 난 뒤에 제가 생각해 봤어요. 수련회의 핵심적요지가 뭐냐? 대체 어떤 것이 중요했느냐?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기를 인간으로 본다는 거예요. 아~! 여러분, 인간이 자기를 인간으로 간주하면 그것은 사물이 돼요. 물체가 된다고요.

사물로서는 어떠한 능력이 안 나와요. 왜? 사물이 살아있기 때문에. 죽어야 나오는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이거든요. 그런데 살아 있는 인간이 목사 되어서 교회를 하면 그 교회는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자기교회자랑, 자기목사자랑밖에 안 해요. 왜? 하나의 존재기 때문에, 그것은 사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존재에서는 존재가 멀쩡히 살아 있으면 존재이고 싶어 하는 능력만 나오지 그 존재를 죽였다가 살리는 능력은 그 존재자체에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구원의 논리, 나는 …… 구원되었다, 할 때는 어떤 대목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해야지’ 이렇게 구원을 시작했다가 언제부터인가 그게 주님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바뀌는 대목이 있어야 돼요. 바뀌는 대목.

나는 교회 나왔다, 뭘 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기도해서 구원받았다, 하다가 어느 날 보면 그게, 내가 구원하고자 시도하는 그 자체가 주님한테 피라는 것, 그 피를 흘리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사실, 나 때문에 주께서 피를 흘렸고,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욕망 때문에, 내가 내 가정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내 욕망이 뭐로 바뀌는가? 예수님의 피로 바뀌어져야 돼요. 오죽 못났으면 피를 흘렸겠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지옥다웠으면 피를 흘렸겠습니까? 피는 지옥 간 사람에게만 유효해요. 중립지역에서, ‘천당 갈까, 지옥 갈까?’ 이래가지고는 피가 유효하지 않아요. 나같이 지옥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 거기에서 비로소 예수님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그 피에서 나오는 능력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능력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보통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그날 밤에 재깍재깍 동영상이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 지영씨가 인천에 자기가 맡은 공사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그날 못하고 그날 새벽 한시나 두시에 늦게 왔어요. 그래서 못 올렸지요. 그 다음날 강의도 계속 지연되는 거예요.

그런데 참석 안하신 입장에서는, 이제 오후쯤 되어서 봐야지, 하는데 올라오지를 않아요. 대전에서 수련회 하고 있는데 참석 안하신 분들은 수련회 없어요. 없는 거예요. 말씀이 그리운 사람은 애간장이 다 탔을 겁니다. 수요일에 올라오겠지. 안 올라왔어요. 목요일에 올라오겠지. 안 올라왔어요. 주께서 최 지영씨를 그렇게 사용하신 거예요. 금요일이 되어도 동영상이 올라오지를 않았어요. 토요일이 되어서야 올라왔어요.

그게 바로 우리 예상과 우리 뜻을 뭉개는 주의 능력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나한테 귀한 말씀을 주셔야 됩니다, 가 아니라 토요일에 올라오는 그 타이밍에 나의 타이밍, 나의 시간은 아주 개무시당해야 돼요. 우리는 늘 개무시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서 불만을 일으키지요.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축복이라 하는 것은 내 몸에서 내 자아가 배설되는 겁니다. 빠져나와야 돼요. 변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요. “(변비 때문에 하늘이) 이 그레이색이야” 하잖아요. 이거 욕하는 것 아닙니다. 광고에 나와요. “빨리 나와!” 하는 거죠. 안 나옵니다. 도대체 아무리 힘을 줘도 내 몸에서 내가 안 빠져나와요.

내 힘으로 나를 뺄 수가 없습니다. 산모가 아기 낳을 때 아기가 10개월쯤 엄마하고 친하게 지냈잖아요. 나와야 돼요. 나와야 엄마가 살아요. 애가 안 나오는 거예요. 유도분만이라고 하지요. 그처럼 힘들어요. 내 몸이 내 주인이 아닌데 악마가 집어넣어놓은, 악마가 만들어놓은 나라는 것이 떡, 내 몸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걸 빼야 되는데 이게 빠지지를 않네요.

이것은 어떤 인간도 그럴 능력이 없어요. 자기가 알아서 빠지면 주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마귀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이 교회라 하는 것, 교회에 대해서 마태복음 16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배신자위에만 세워지는 교회. 이게 교회입니다. 배신자, 내 속에서 나를 못 빼내요.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베드로가 배신자가 돼요. 가장 위대한 배신자, 최초의 배신자가 되어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는 뭐냐 하면, 내 쪽에서 구원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주께서 다 빼앗아갔기 때문에 반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제 2, 제3의 베드로에요. 내가 할 수 있는 희생과 봉사를 해서 주님과 함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데 주께서 하시는 모든 그 경로가, 천국 간다는 그 경로가 나를 자꾸 제켜놓은 경로에요. 같이 가면 좋은데 같이 못 가게 만드는 경로로 빠져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해서 아내가 “이럴 것 같으면 우리 헤어져.” 하고 삐져서 집을 나가서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간다고 해봅시다.

남편은 뒤늦게 후회가 되어서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하고 막 따라가잖아요. 자, 아내는 택시를 타고 빨리 가려고 하고, 남편은 그 택시를 따라가 봤자 자기가 우사인볼트도 아니고 결국 못 따라가거든요. 그게 베드로와 예수님 꼴이에요. 주님은 혼자 가버렸는데 베드로는 뒤따라가다가 ‘이쯤에서 좀 쉬어갈까? 아이고, 못 따라가겠다.’

원래 따라오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갈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가. 지옥출신이 어디 천국에 갑니까? 주제파악도 안돼요. 그 나라 왜가요? 예수님 나라에, 하나님만 살고 천사들만 사는 그 나라에 왜 갑니까? 못가요. 어딜 건방을 떨고 있어요? 갈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 한다고 가는 줄 알아요? 못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두 번 다시 당신을 믿으면 나는 개다, 그런 뜻이지요. 베드로는 나의 나다움을 자기가 포기하지 못한 겁니다. 나의 나다움을. 나의 나다움을, 나도 한 고집하고, 나도 한 자존심하고, 나도 인간입니다, 라고 자기가 인간인줄 착각하는 그 고집을 포기를 못해요.

주께서 그 베드로를 교회의 뿌리가 되게 하는 겁니다. 교회의 뿌리게 되게 되면 그에게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바로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요. 천국의 열쇠는 교회가 무너질 때 그 때 발견되는 거예요. 교회가 망했을 때, 무너질 때. 보이는 교회가 무너져야 비로소 능력으로서의 교회임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배신자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이 원리,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했던 그 집단, 배신자의 집단이 곧 교회라는 모순되는 논리가 사실은 구약부터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런 예가 나오지요. 다윗 왕이 있는데 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의 정권이 부러워서 배신하지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 때 그 아버지 다윗이 군말하지 않고 도망가기 급급해요. 군말 없이 그 예루살렘 모든 권력을 말끔하게 다 내어줍니다. 오히려 부하들이 의아해할 정도입니다. “다윗임금님, 아직도 백성들은 당신 편이 많은데 왜 박수칠 때 떠나십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다윗은 시편 51편을 통해서 내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왕은 다윗 내가 아니고 내 자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에요.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그 말은, 자식이 아버지의 그 뿌리를 뽑고 치지 아니한 아버지는 자손으로 오는 메시아로 인하여 구원될 수 없다는 그 원칙, 원리를 알게 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윗에게는 압살롬이라는 아들도 있지만 다윗이 중요하게 보는 아들이 있어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과 압살롬의 차이점은, 압살롬은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에요. 이것은 다윗 본인의 본성, 내가 인간이다, 나도 존엄성과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그 속성을 가진 다윗이에요. 다윗에서 다윗 닮은 자식이 나온 것이 압살롬이에요.

그런데 그 다윗과 마주쳤던 우리아라는 가련한 이방장군, 그 장군의 아들이 솔로몬이에요. 비록 밧세바라는 우리아의 아내와 다윗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기는 낳지만 다윗은, 이 자식은 새로운 나를 위한 자식이지 기존의 나의 자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기존의 힘으로 통치하는 이 다윗, 나도 인간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사람의 가치부터 출발 하련다, 이 가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천당 가지, 라는 이런 사고방식을 뿌리 채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자백했던 그 현장에서 나온 자식, 그게 십자가에서 나온 자식이에요. 그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과 압살롬을 대비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예수를 볼 때 어떻게 봅니까? 나도 인간이다. 인간인데 고생스러우니까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보십니까?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름을 밝힐 때부터 그 의도는 완전히 배격당합니다.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가 있는 곳에서만 비로소 없던 백성, 없던 교회가 나와요. 죄가 있는 곳에서만. 그 죄라는 것이 뭘까요? 그 죄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람들이 학대하고, 배척하고, 밀쳐버릴 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하고 의논해서 나 구원시켜 주세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나 죽어서 좋은데, 천당 가렵니다. 그러니까 날 사랑해주시면 나도 주께 보답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태어나서 지옥으로 가야 마땅해요. 그게 당연한 것이고. 더도 덜도 말고 딱 지옥이에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세나 사고방식이. 그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바뀌지 않아요. 이 성질, 지옥 갈 이 사고방식, 이 성질머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손이 우리를 치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으로 오신 두 번째 아담이 아담 속에 있는 자기백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아담에 속했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처럼 다윗은 다윗의 그 아들 압살롬을 통해서 다윗은 군말하지 않고 그 모든 권력을 양도해버립니다.

부하들이 붙어서 싸우자고 하는데 오히려 아낌없이 그렇게 합니다. 이런 전쟁은 내 계획이 아니고 다윗언약,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역사가 있는 겁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는 내가 한 가운데 있다는, 내가 중심에 있다는 그 중심을 완전히 도려내고 구멍으로 만들어버려요. 나를 없이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중심부에 주인공으로 등장할 인물은 두면 안돼요. 그걸 비워놔야 돼요. 그게 성전의 원리고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이 땅에서 사람에 의해서 버림받고, 사람에 의해서 추방당하고 그냥 피만 남기고 사라진 분이거든요. 십자가사건만 남기고 사라진 분이거든요.

따라서 교회가 교회되려면 교회 안의 중심부는 비어있어야 돼요. 텅텅 비어야 돼요. 그 자리에 누가 차고 들어가면 안돼요. 부동산 목돈내고, 부동산 헌금내고 한 그 장로가 그 교회의 중심부에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교회역사가 중심부에 있으면 안돼요. 대한예수교 괄호열고, 합동측 , 괄호 닫고, 그게 중심부에 있으면 안돼요.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 되고 사물은 거기서 아무런 능력이 안 나옵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만 추구할 뿐이에요. 있는 교단 키우자. 이런 것밖에 안돼요. 여러분이 정말 성도라면 여러분 성도 중심이 비어있어야 돼요. 존재는 사라지고 능력으로서만 존재하는 사람이어야 돼요. 그런데 그 능력이 내 가운데가 텅텅 비어 있는 능력이에요.

마태복음 16장 그 말씀 다시 보면, 베드로로 하여금 배신하게 해놓고 그 베드로로 하여금 교회의 반석이 되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부여하는 것은, 남들 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베드로가 다 했다고 하는데 베드로와요한은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낫게 해놓고는 꼭 붙이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안했습니다. 제발 좀 믿어주세요. 제가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목격자일 뿐입니다.” 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 같으면 이렇게 했을 거예요. “주님, 왜 앉은뱅이를 나를 통해서 낫게 했습니까? 아 정말 짜증납니다.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주님, 왜 저를 천국에 보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자꾸 오해하잖아요. ‘네가 목사 되어서 천국 갔다고. 네가 성경공부해서 천국 갔다고. 네가 교회봉사해서 천국 갔다고.’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잖아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그런 짜증 괜찮은 짜증입니다. 그런 짜증은 괜찮은 짜증이에요. 예수님 올 때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봤어요. 그냥 목수의 아들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한테는 하나님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같이 중첩되어 엎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쉬운 예는 있어요. 요즘 가정에서 애 키울 때 집안에 인디언텐트를 쳐놓잖아요. 집에서 야외의 캠핑을 체험하라는 거지요. 그러면 그 애가 텐트 안에서 잠을 잘 때에 그 천정이 뭐로 보이겠습니까? 인디언텐트로 보이겠지요. 아파트는 안보이겠지요. 성도가 뭐냐, 교회가 뭐냐?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오른편이, 인디언텐트라는 오른편이 같이 있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그러면 성도는 잠을 자든 교회를 오든 항상 보는 것은 뭐냐?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보이는 거예요. 고딕형 예배당 꼭대기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의 오른편이 보이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였습니다. 짱돌 막 날라 왔어요.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 죽여서 입 막으면 복음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막 집어던져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서 정신이 혼미합니다. 곧 죽습니다. 곧 죽는데 그 때 스데반 집사 눈이 열리면서 뭘 봤느냐? 하나님 오른편에 서 있는 예수님이 서서 자기를 반기는 것을 봤어요.

스데반집사는 예수님한테 대화를 시도합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걸 보고 돌 던지던 유대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저 인간 뭘 저리 씨부렸쌌노! 하도 얻어맞다보니 정신이 혼미해져서 맛이 갔구나.”

세상에서 보고 있는 인간의 몸짓이고 동작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것으로 세상은 예수님한테 돌을 던지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죽은 자를 부활의 능력으로 살렸습니다.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고 성도되게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모르는 우리 내부에 그 인디언텐트가 있는 겁니다. 주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게 감사와 기쁨이 되는 겁니다. 능력이라 해서 교회부흥하고 돈이나 잘 벌고, 그것이 능력이 아니에요. 능력은, 내 존재와 내 능력을 분리시켜서 그 속에서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가를 순간순간 보여주는 것이 능력입니다.

더구나 능력은 책보고 신학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 능력이냐? 뭘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겁니다. 알 것만 알고 모를 것은 몰라도 괜찮아, 라는 능력이에요. 할 것만 하고 안할 것은 안하면 되지, 라는 능력. 하늘의 별을 따서 뭘 할 거예요? 달 뒷면에 착륙선 보내서 뭘 할 겁니까? 그게 구원이에요?

마태복음 24장 40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후딱 tv를 잠간 보는데, 뭐 별로 안 봅니다만, 80넘은 할머니 다섯 명이 앉아서 냉이를 다듬고 있어요.

그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이 마태복음 24장 40절입니다. 80먹은 두 여자가 냉이를 다듬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달 뒷면에 착륙선을 보냈는데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대선에 나가는데 하나는 대선에 나가라는 사람이 있고 또는 대선에 나가지 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 기준이에요. 이미 그 기준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에 이미 그 사람은 능력이 임한 사람이고 천국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더 알고자 하는 것, 더 멋있게 하려는 것, 더 괜찮게 사는 것, 전부 다 욕심입니다. 욕심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사물화 될 때, 세상을 닮으려고 할 때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집에 보면 보통 믹서기 있잖아요. 믹서기에 넣을 때 빨간색 채소, 녹색채소, 하얀 배, 각각의 색, 각각의 개성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갈아버리면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다 날라 가버립니다. 혼합된 색깔로 나오지요. 교회, 장로, 집사, 전도사, 권사, 사찰집사, 평신도, 교회라는 믹서기, 그 능력에 집어넣으면 전부 다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가 되고 각기 자기의 아는 바대로 자기의 할 수 있는 대로만 내놓을 뿐이에요. 그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죄용서의 능력이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평생 논리가 내가 잘났다는 논리로 왔다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어요. 주께서 저로 하여금 이미 최종목적에 도달케 하셨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에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능력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덤 속에 있습니다. 왜? 주님의 빈 무덤이 있으니까. 교회는 무덤이요 우리 집도, 우리 아파트도 무덤이고, 우리 빌라도 무덤이고, 여러분이 어디에 가도, 여러분이 직장도 여러분이 무덤이라고 생각하세요. 무덤에서 보여줄 것은 죽음도 구애받지 않고 나댈 수 있는 그 자유로움, 그것이 우리의 “오라이!” 이 시대 천국(지옥)버스의 차장입니다.

이 환경을 초월해서 어차피 어떤 환경이든, 넓은 아파트 장만하나, 좁은 지하방에 사나 그것은 하나의 무덤에 불과하거든요. 주께서 빠져나온 무덤에 지금 우리가 못 빠져나오고 머뭇거리고 잠간 있을 뿐이지 조금 있으면 주께서 우리를 데려가실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할 때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야기를 한 것이 있어요. 천국이 아름답다, 좋다, 신난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딱 물 한 컵으로 천국을 다 묘사해버립니다. 물 한 컵도 없는 지옥과 물이 넘치는 천국. 물 한 컵으로도 얼마든지 여러분을 천국을 기뻐할 수 있고 지옥에 대해서 안타깝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물 한 컵을 보더라도. 갑자기 물이 먹고 싶네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제는 존재는 믹서기에 갈아버리고 늘 갈아버린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그 능력, 이미 도달한 자의 여유, 그 능력, 예수님의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만물을 주관하는 그 능력, 그 능력을 23절에 보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 부분 안에, 작은 것 안에 전체가 다 담겨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몸은 작지만 이 작음 안에 구멍이 나서 그 구멍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작은 몸뚱이에 모든 비밀이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 다 배울 수도 없지만, 또 다 할 수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지만, 주께서 능력 주시는 대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구멍 난 사람의, 우리와 동일한 같은 성도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신자들에 불과한 것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주님의 영원한 배신자 될 수밖에 없고, 내 욕심 채울 수밖에 없는 입장을 주께서 익히 아시고 배신자이기에 주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던 능력이 함께 있기를 원하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