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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5강 /사무엘상 15: 27 / 하나님의 변동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45강 /사무엘상 15: 27 / 하나님의 변동

정인순 2018. 12. 27. 23:12



음성1             


동영상1            



녹취:이미아


하나님의 변동 (삼상 15장 24-35절)

 

대전- 45강

 

이근호

 

2018년 12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24-35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 15: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삼상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삼상 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삼상 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5:32) 사무엘이 가로되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삼상 15: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삼상 15: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삼상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울의 말이 천상유수처럼 굉장히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사울이 신앙인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높이여기고. 여기에는 말씀이라고 적혀있죠. 자기보다 말씀을 더 높이 여긴다, 자기보다 더 가치 있게 본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서 낮추어보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두 가지가 지금 사울의 입에서 나옵니다.

 

신앙입니까? 이거 신앙이에요?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보다 더 높게 여겼다. 이 두 가지만 해도 한국교회에서는 신앙이라고 쳐주잖아요.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은 첫 번째 이 하나님이 가짜라는 겁니다. 두 번째 이 하나님도 가짜가 됩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오늘 첫 강 사무엘상 강의가 어려운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라는 이 질문이 성립되는 곳에 진짜 하나님이 있어요. 이 질문이 성립이 되는 곳에.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하나님이 이미 계신 것을 안다면 진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라는 의문을 던지겠습니까? 안 던지겠습니까? 안 던지죠. 그렇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진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질문을 안 던진다 이 말이죠. 집에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밥상차려 주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니 같이 생긴 아주머니! 진짜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쪽 어머니를 어머니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이죠.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보다 더 높였다. 지금 강의에서 이걸 막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보다 더 높고, 자기는 거기에 종속되어 있고, 모든 만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근데 이 하나님이 가짜일 줄이야 상상도 못하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그렇게 하는 사울 본인은 이런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를 진짜 신앙인으로, 진짜 인간으로, 자기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중에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것이 가짜라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제가 아까 물었습니다. 일단 정답에서 진짜 하나님은 없다가 돼요. 없고, 진짜 하나님이 없다면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고 인간은 누가 만들었느냐? 이렇게 문제가 나오겠죠.

 

자, 일단 하나님은 없고요. 두 번째는 뭐냐 진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질문을 할 때 그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실패하는 현장에 나타나요. 실패하는 현장. 인간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 됨이 거짓임을 드러내게 하는 기능으로서의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쉬운 예를 들면 아들과 엄마가 살고 있는데 서로 저녁식사를 합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님! 어머님은 진짜 어머님이 아닌 것 같아요?” 드라마에 그런 것이 있어요. 딸이 “어머님!” 하니까, “내가 니 어머니 아니야. 니 고모야.”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를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인데.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저녁에 하는 일일MBC드라마. 회장부인이라는 사람이 “유경아! 나 니 진짜 엄마 아니야.”라고 하죠.

 

진짜 엄마가, 진짜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는 것을 들통 내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진짜 하나님이 하셔요. 진짜 하나님이 나서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사무엘상에서 진짜 하나님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누가 하겠어요? 사무엘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로 하여금 니가 평소에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거짓된 엉터리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짜 하나님이 그 현장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가 없으면 여전히 하나님은 없다가 돼요. 가짜를 가짜로 들추어내는 그 작용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은 나타나시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정도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 라고, 여기에 자꾸 집착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이 좋아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포기를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이 들통 났잖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들뿐인데, 아들은 예수님뿐이죠. 나머지기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인간한테는 상당히 거북스러운 거예요. “내가 가짜라는 말이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묻죠. “그럼 니 진짜인줄 알고 있었어?” 가짜냐, 진짜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 서있을 때 그렇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중요해요.

 

십자가 앞에 설 때 인간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이 등장하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도 십자가이야기를 자주는 안 하지만 더러는 하죠.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는 하고 있잖아요. 그럴 때 딱 뛰어들어서 물어보세요. “당신이 왜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까? 나는 당신 같은 훌륭한 신앙인을 처음 보는데 당신은 왜 죄인이라고 합니까?”라고 하면, 저쪽에서 할 말이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그것도 가짜에요. 그것도 구라 떨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자기를, 그것을 자기 단도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괜찮은 자기로 챙기는데 스물네 시간을 소비해도 다 모자라요. 그것을 자기정당성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옳다고 하는, 정당하다고 하는 그것을 위해서 전적으로 다 갖다가 쏟아 붓는 겁니다.

 

전에 대전모임에 오신 사람 중에서 누가 오셨느냐 하면은 지방교회 사람들이 오신 적이 있어요. 한 몇 개월 다녔는데. 지방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방금 제가 한 이야기에 해당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지방교회. 워치만 니 하는 쪽에. 하나님은 관심이 없어요. 나 구원받겠다는 거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 올인 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것.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왜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느냐를, 스스로 이게 반칙이 아닌가, 스스로 이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를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여력이 전혀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짓도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감히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사무엘상 본문에서 등장인물이 누굽니까? 사울과 또 한 사람은 사무엘이죠. 사울과 사무엘이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서, 지금 두 명이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죠. 성도는 예수님과 둘이 해야 해요. 그러면 사울은 가짜고 사무엘은 진짜죠. 진짜와 가짜가 만날 때 여기서 누가 등장한다? 진짜 하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등장해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가짜를 가짜라 하고 진짜를 진짜라고 하신다. 그렇게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울과 사무엘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 사무엘상이야기가 성경이 기록된 것은 오늘날 우리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니가 사울처럼 당한 경우를 니도 당해봤냐?”라고 우리보고 묻는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우쌰우쌰 하는 대로 따라가 줬기 때문에, “너 신앙 아니야.”라고 누구한테 지적받은 적이 있습니까? 많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왜 등장시키느냐 하면은, 이 같은 경우가 우리에게 일어났는가를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한테 지적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한테 지적을 받아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이 물음은 “예수님한테 지적받은 경우가 있느냐?” 하고 동일한 물음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사울을 지적하죠. 지금은 누가 누구를 지적한다고요? 예수님이 우리를 지적하죠.

 

지적할 때, 하나님의 존재인정,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높이는, 아주 겸손해 보이는 이 모습, 그런 것들이죠. 하나님의 존재인정을 좀 더 세분화시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번째 같은 경우, 하나님을 자기보다 높인다는 것은, 낮추고 또 낮추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그럼 교회가 하는 일은 뭡니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거. 이게 교회에서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닙니까?

 

이거 말고 딴 거 있습니까? 늘 기존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어떻습니까? 이거 말고 딴 거 있어요? 없어 보이죠. 이 전체가 가짜라는 것을 교회가 해야 되는 겁니다. 이 전체가 가짜라는 것을. 삼위일체 인정하고 낮추는 이것을 이단이라고 교회가 지적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이걸 지적할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괜찮은 신앙인이 등장해야 됩니까? 누가 등장해야 돼요? 바로 십자가가 등장해야 돼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등장해야 돼요.

 

자, 그러면 이걸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뭐라고요? 이게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뭐다? 십자가다. 그럼 십자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경건해 보이는 것을 가짜라고 할 수 있느냐,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35절 마지막을 읽어보세요.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자, 끝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후회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거예요. 자, 제가 질문을 하면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했죠. 두 번째는 하나님은 높이고 자기는 낮춘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 속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오죠.

 

왜?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철두철미하고 실수가 없기 때문에. 실수 안 하신 분이 후회한다는 말은, “아하! 내가 일을 잘못했구나. 내가 이것도 모르고, 내가 미리 알지 못했네.” 이럴 때 후회가 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은, “사울 니가 그렇게 나올 줄은 사전에 꿈도 못 꿨다.”라고 할 때에는 후회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하나님의 후회라는 이 요소가,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와 하나님은 높으시니까 나는 낮춰야 된다는 이러한 공식에 이 후회가 들어갈 자리가 있어요? 없어요? 들어갈 자리가 없죠. 대단한 분인데 후회를 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거죠. 앞뒤가 안 맞죠. 창세기 6장 5절부터 6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과 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기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고’ 이렇게 하셨는데, 마치 인간에게 잔뜩 기대를 했다가 인간이 기대를 저버리니까, “아이고,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는 모습이 나타나죠. 하나님이 굉장히 허술하신 분이시네요. 하나님에게 굉장히 허술한 면이 있네요. 전지전능하시고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해놓고는 뭔가 하는 일에, 계획에 자꾸 빵꾸가 나는 느낌이 들고 허점을 보이는 느낌이 들죠.

 

그러면 보통 하나님을 믿을 때는 절대 신뢰하지 않습니까? 하자가 없고 오류가 없음을 믿고 절대적으로 당신에게 기대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뭐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근데 후회하시는 하나님한테 맡겼다가는 같이 거덜 날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허술한 하나님에게 제대로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겠어요?

 

자, 여러분이 이야기해보세요. 하나님의 후회하신다는 그 취지가 뭘까요? 자,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하니까, 그럼 무슨 하나님을 믿는 셈이 돼요? 후회하시는 하나님, 어설픈 하나님을 믿는다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바로 하나님의 후회 같은 요소를 담아낼 수가 없어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분을 상품화시켜가지고 무조건 믿고 기대면 천당 간다는 이런 식의, 그걸 상품화시키고 그걸 전파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하나님 가운데 숭숭숭~ 구멍이 났다는 이 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이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후회하심의 취지가 뭐냐, 이 시점에서 너무 뜸들이지 말고 직접 말씀드려야겠죠. ‘모든 것과의 연관성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일부러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의 연관성이에요. 모든 것과의 연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는 추이나 사태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모습을 조정해나가시는 분이시다.’라는 이 말입니다. 조정해나가시는 분.

 

골목식당에 나오는 백종원 셰프가 있죠. 그 사람이 처음에 나올 때 설탕을 막 뿌렸거든요. 맛있게 하려면 설탕을 뿌려라! 그전까지는 설탕은 몸에 해롭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설탕을 막 부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이 밥이나 죽이나 막 아무데나 설탕을 뿌렸습니까? 아니면 상황 봐서 집어넣었습니까? 상황 봐서 집어넣었죠. 추이에 따라 집어넣었죠.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정된 하나님은 그냥 믿기만 하고 겸손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죠. 근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터져 나오는 죄악과 더불어 변동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 겁니다. 알리안츠보험에서 나오는 상품 중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있어요. 변액 상품이 있죠. 다른 데도 다 있지만.

 

변액 상품이 뭐냐 하면 고정금리가 아니라 주식이나 투자로 인해 이윤을 많이 주고 적게 주는, 말하자면 변액이죠. 변액. 변액이 뭡니까? 액수가 변한다는 뜻이잖아요. 액수가 변한다. 자, 과외를 할 때 “우리 애를 받아주면 한 달에 50만원을 줄게.” 이렇게 계약하는 가정도 있지만, “애가 성적이 오르면 10만원을 더 줄게. 근데 성적이 내려가면 10만원은 뺀다. 콜call?” 이런 게 있다고요.

 

하나님이 유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을 생각할 때 인간보다 월등히 우월적인 존재로 고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알아요. 인간의 고정화된 신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 돼요. 나는 부족하지만 주께서 안정되게 해주시면 내가 언제든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럴 때 하나님 좋아라고 섬기는 거예요? 누구 좋아라고 섬기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은 손해 안 보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하죠.

 

다시 말해서 “나는 결코 어떤 경우도 가짜가 안 될래.”라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할 때는 모자란 나보다, 부족한 나보다, 연약한 나보다, 나약한 나보다, 한계성 있는 나보다, 그보다 월등히 대조되고 차이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설정해놓고 그걸 상품화로 날려버린 거예요. 바겐세일 하듯이 그것도 바겐세일해서 마구 날려서, “믿고 의지하면 여러분의 장래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믿고 의지하세요.”라고 할 때에, 그게 바로 사무엘상에서 가짜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같이 변화하는 겁니다. 유도리(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처리)라고 하죠. 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자, 인간은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또는 누굴 대하면서 항상 인간은 뭘 갖고 나오느냐 하면은 목표를 가지고 신에게 나와요. 또 타인에게 나옵니다.

 

지금 사울왕의 목표가 있어요. 사울 왕이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은 아말렉과 싸우죠. 그럼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저쪽은 아말렉 왕이 누구냐 하면 아각이에요. 아각이라는 이름이 32절에 나옵니다. 아각이 나오죠. 그러면 저쪽의 왕, 아각은 아말렉의 왕입니다. 이쪽은 누가 왕입니까? 사울 왕이죠. 사울이 사적인 목표, 의도가 있었어요.

 

뭐냐 하면 저 아말렉을 자기가 지배하겠다, 접수하겠다는 사적인 욕망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목표를 세웠느냐 하면은 아말렉을 접수하게 되면 사울은 점점 더 왕의 지위가 공고히 되고, 자기의 권력이 더 세지는 거예요. 수제비하기 위해서 밀가루 반죽한 것에 또 다른 반죽을 치대버리면 그야말로 더 커지잖아요. 권력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권력도. 내 소유에 저 타인의 소유까지 겹쳐버리면 내 소유는 커지고 확장이 되겠죠.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들이 제일 바라는 기적중의 하나가 옆에 있는 교회 목사가 말썽피워서 나오고 난 뒤에 그 교인들이 우르르 자기교회로 다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거는 뭐 전도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있는데 왔다 이 말이죠. 저쪽에서 십일조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그거 계산한다고 바쁘죠. 십일조 한 사람이 몇 명이냐? 푼돈 말고. 한주에 와서 5천원 내는 사람 말고. 정기적으로 십일조, 목돈 내는 사람. 그게 제일 관심사에요. 그거뿐이라니까요.

 

이게 목표가 돼요. 사무엘상 15장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에게 아각 왕이 갖고 있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유혹이 돼요. 유혹. 여러분 유혹이 없는데 목표가 세워질까요? 아니 목표를 세울 때, “나는 물에 빠져 죽을래.” 이것을 목표로 세우는 사람은 없잖아요.

 

겨울철 날씨가 춥다. 백화점 앞을 쓱 지나가다보니까, 세상에! 내가 입었으면 평생에 더는 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딱 맞춤. 그것만 입으면 내 목숨이 달아나도 소원이 없는 그런 옷이 있다 이 말이죠. 살짝 가격표를 보죠. 3,750,000원. 주인이 다가오죠. 어떻게 내가 이 물건을 놓고 발길을 돌려야 점잖은 손님이라는 티가 나겠는가, 지금 그거 고민하고 있어요. 3,750,000원짜리를 어떻게 구입합니까? 대출해도 안 되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 새벽기도 나갑니다. 특히 송구영신예배 때 새벽기도 하잖아요. 기도 백날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다른 기도는 다 헛방, 헛다리 기도에요. 진짜 기도는 그 백화점의 옷이 내 옷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유혹이 뭐로 이어집니까? 목표가 되죠.

 

또 동창회를 나갔는데 자식 자랑을 합니다. 걔가 이번에는 수능 전교 석차에서 1등급이 됐답니다. 자기 아이는 5등급이에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난 뒤에 송구영신 예배할 때 헌금봉투 들고 교회에 내든지 하잖아요. 할 때, “소원을 말하세요.”라고 하잖아요. 보통 해 뜰 때, 달 뜰 때 소원을 빌듯이 송구영신예배 때 소원빌라고 돈 갖고 가죠. 완전히 교회가 무당이에요. 올 때, 그 소원이 뭐가 되겠어요? 이 1등급은 욕심이고, 1등급은 SKY캐슬이나 하는 거고, 나는 5등급이니까 4등급 해달라고 이 목표를 잡을 때, 이 목표는 어디서 오는 거다? 유혹에서 오는 겁니다. 유혹에서.

 

그럼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미 유혹이 맺어졌다는 자체가,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지만, 그런 사울 왕 자체는 뭐냐 하면 가짜 인간이 조작해낸 가짜가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바꾸라고, 그게 아니라고 신학 공부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적으로 뭘 부수느냐 하면은 32절을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무엘이 가로되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절 끝을 제가 읽습니다.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울의 유혹을 찍어 빠개버린 거예요. 롯데백화점 물건 봤잖아요. 물건 봤거든요. 그날 저녁에 롯데백화점 불나버려요. 불내버립니다. 여러분, 아들과 아들친구의 차이점이 뭡니까? 부모로서, 또는 엄마로서 차이점이 뭡니까? 이거는 엄청난 차이점이죠. 친하게 지내니까 아들친구에게 라면 맛있게 끓여주고 다 좋아요. 어디까지나 아들친구하고 아들하고는, 아들친구는 남남이죠. 근데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룰 때에 천국이 누구의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럼 천국에 들어가려면 누구처럼 되어야 해요? 제대로 아버지를 알고 제대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이 말입니다. 만드는데, 문제는 천국 갈 이 아들이 그동안 세상에서 누굴 만났어요? 친구, 프렌드friend죠. 이 프렌드가 있어요. 친구들이 있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후회라고 했는데, 이걸로 바꿔버릴까요? 찍어 쪼개버림으로. 아들 친구를 찍어 쪼개버리는 거예요.

 

근데 이게 왜 사무엘 쪽에서 이렇게 하느냐 하면은, 이걸 사울은 합니까? 못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에서. 못했죠. 못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다 죽이라고 했는데, 사무엘상 15장 8절에서 9절을 보세요. 8절,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절,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남기고”

왜 남깁니까? 접수거든요. 접수. 접수다 이 말이죠. 목회자 떠난 이웃교회 교인들이거든요. 오지 마세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각양 좋은 거예요. 특히 십일조 하면 가장 좋은 양입니다. 이걸 왜 찍어 쪼개버립니까? 왜? 유혹이라는 하는 것은 그동안 목표였던 것입니다. 목표. 그동안 목표였거든요. 난 그렇게 됐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목표였다 이 말이죠.

 

인간이 가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표가 매일같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등장한 그 목표는 어디서 왔느냐, 유혹을 받아서 그래요. 유혹을 받아서 목표로 전환된 겁니다. 유혹이 목표로 전환된 거예요. 아침에 눈떠서 그게 없으면 하루생활 권태로워서 못합니다. 심심해서 못해요. “사는 게, 이게 뭐 사는 것도 아니고.” 이래 되는 거예요. 반드시 갖고 싶다,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겁니까? 이래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유동적인 하나님이에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하나님의 후회할 짓거리만 해요. 후회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내가 니 꼬라지 보니 후회 안 할 수가 없다.” 날마다 후회할 짓거리만 나타나요.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나 위주기 때문에. 나 위주거든요.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기쁨이라는 이것은 입에 발린 거짓말입니다.

 

아들과 아들친구를 다시 봅시다. 왜 아들은 엄마가 친구를 내쫓기 전에 왜 못 쫓아냅니까?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친구한 거예요. 이용가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목자하고 양치기 소년의 차이점이 뭡니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가 있죠. 크리스마스 때 나오는 대목. 광야에 천사가 와서..., 목자하고 양치기 소년의 차이점은 목자는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소식을 듣고 가봤습니다. 이거는 자기를 잃어버렸어요. 지금 양을 쳐야 된다는 자기 본연의 임무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천사가 와서 전한 소식에 비하면.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두는 유명한 이야기를 아시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물동이를 버려뒀다니까요. 그날 저녁 밥은 다했어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려뒀다는 것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라는 인생에서, 내가 어떻게 물 길어서 밥 먹고 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이제 내 안에 쑥 들어오게 되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 까짓것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사는 게.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활이 있는데 죽는 게 왜 무섭습니까? 그렇죠. 부활이 있는데. 부활이 없으면 죽는 것이 무서워요. 근데 부활은 뭡니까? 뭘 해야 부활이 돼요? 죽어야 부활이 되잖아요. 왜 축구 전반전도 안 뛰고 포기합니까? 전반전이 십자가라면 후반전은 부활이다 이 말이죠. 전반전 십자가 뛰어줘야 뒤에 부활이 되잖아요.

 

교회교인들이 믿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나는 믿기지가 않아요. 믿는다고 해놓고는 살라고 아주 악을 쓰고 사니까. 특히 연세 많은 70넘은 사람들은 그냥 악으로 살아요. 옛날 놀던 가락, 고집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자식들이 집안 어른 모시기기 그렇게 힘든 겁니다. 그 고집 때문에. 곧 죽어도 자기는 어른이라는 겁니다. 곧 죽어도. 며느리한테 모든 것을 수발 다 받으면서도 자기는 곧 죽어도 시어머니 노릇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이고, 시어머니 노릇 가관이에요. 가관. 옛날에 어른 행세하는 가락이 있어가지고, 그거는 장기기억이라 오래가요.

 

목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어요. 자기의 구세주,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만나는 것을 생각해서 자기 양 보는 이런 문제는 중요하지도 않은 거예요. 그런데 양치기 소년은 뭐였습니까? 뭐가 중요했어요?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사기 쳤죠. 나중에 진짜 나타날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만 챙기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인들이 목자입니까? 아니면 양치기 소년입니까? 전부 다 양치기 소년들이에요. 거짓말쟁이들이에요. 믿음도 거짓말, 모든 것도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노래 겨울수련회 교재에 올려놨죠. 조항조가 불렀던 것이거든요. 가사를 개사해보세요. 모든 것이 거짓말이에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자, 진도 나겠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쳤죠. 지금 사울은 아각이 갖고 있는 것이 부럽잖아요. 그럼 아각을 쳤다는 말은 누굴 쳤다는 말입니까? 사울을 쳐버린 거예요. “왜 니는 친구 먹어서는 안 될 그것들에 왜 미련을 두고 집착을 했느냐?”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바꿔서 순환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십자가 은혜가 오게 되면 내가 가져야 될 자가 아니라 내가 없어져야 될 자라는 것을 아는 객체가 될 때에, 우리는 현재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아는 거예요. 이 은혜의 집단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그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누구이어야 하면 바로 왕이어야 하고, 그게 누구여야 하느냐, 사울이어야 하죠.

 

근데 사울은 이걸 못하고 있죠. 나라가 자기 것이라는 거예요. 마치 교회가 목사 본인 것이라는 것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주님을 증거 해야 될 목사가 교회부흥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이거 가짜죠. 교회 불이 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가 나오죠. 왜 일곱 교회냐 하면은 일곱 교회가 돌아가면서 가짜인 것을 보여주니까 일곱 교회에요. 일곱 교회는 사실 필요치 않아요. 하나의 교회뿐이에요.

 

왜냐하면 일곱 교회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겁니다. 오른손으로. 이번에 수련회 할 때 제가 오른손을 강조할 거예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아가서 2장 6절에 나와요.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안아주는 포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 포즈 한번 경험해야 되는데.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감아주거든요. 아가에 나오는 그 남녀, 남자가 솔로몬이 아니냐 하는 그런 설은 많아요. 그 남녀가 나올 때 그 포즈 하나하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왕의 교체에 나섭니다. 교체에 나서려면, 왜 교체에 나서는지 이유가 드러나야 되잖아요. 따라서 사울이 있던 자리가 하나님의 뭐로 채워지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후회하심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유동적이에요. 변액보험이라고 하죠. 하나님께서는 이 연관성, 세상 모든 것이 연관성이라고 할 때에 하나의 일일로 들어가는 거예요.

 

후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같이 고통 받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는 죄 때문에, 자기는 초월적 위치에 있지 않고 니가 나쁜 짓하면 내가 고스란히 당하는 그런 입장에서 이 세상 형성에 같이 관여가 되어 있는 거예요. 오늘도 마찬가지에요. 주님께서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안 아프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가 당하는 고통에 함께 있어요. 성도가 당하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시고. 주님을 너무 높은데서 찾지 마세요.

 

인간의 욕심 때문에 다치고 있는 사람을 보자 이 말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 나의 욕심 때문에 누가 다치죠? 내가 다치죠. 바로 내가 다칩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내가 다쳐요. 이게 성도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 아니면 내 욕심 때문에 남이 다치지만 성도는 내 욕심 때문에 주님이 간수하는 ‘나’는 ‘나의 나’와 ‘주님의 나’가 있거든요. 주님은 이걸 구분하려고 하는데 나의 나가 자꾸 방해하고 훼방질 놓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상 15장 한번 봅시다. 26절 봅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애초부터 왕이 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왕이 되게 하고 난 뒤에 비키세요! 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내가 내 편리를 위해서 만든 하나님이잖아요.

 

근데 주님께서 비키세요! 나를 치워버리는 가운데서 뒤돌아보면 진짜 하나님은 내가 눌러앉아있었고 숨 막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서 그걸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중요해요? 주님이 중요해요?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은 짧은 순간이지만, 나보다 저 중요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의 인생은 한없이 가벼워지죠. 한없이, 새털보다 더 가벼워지죠. 한없이 가벼워져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요. 내가 이렇게 자유로워도 되나? 나쁜 짓만 했는데 내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어?

 

사람이 자기 죄를 알게 되면요 못할 일이 없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집에 있는데 채권자,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남편은 겁나서 도망가고 아내가 마중을 나옵니다. 남편은 뭐 부동산중개한다고 하고 아내는 노래 가수한다고 다 말아먹고 있거든요. ‘차달래 부인의 사랑’이라는 드라마입니다. 다 보시네요. 자, 이렇게 빚쟁이들이 왔을 때에 왜 남편이 도망을 갑니까? 감당이 안 되니까 아내한테 맡기고 가잖아요. 만약에 남편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면 빚쟁이가 천명이 와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알면 무서울 게 없어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죄를 알게 되면 살고 싶은 의욕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두려울 게 없잖아요.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관계없어요. “괜찮아! 뭐 그럴 때도 있어.” 그런 식으로 넘어가버리죠. 사람이 언제 무서운가 하면은 자기가 의롭다고 여길 때, 모든 것이 악마의 시험이고 공포가 찾아옵니다. 자기가 잘났다, 정당하다, 의롭다고 할 때에. 나는 다치면 안 돼, 다치면 안 돼, 그럴 때 공포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교인들한테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악마의 표적이 되게 만들어요. 그리고 목사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믿음 좋습니다. 시험해보세요.” 근데 시험해보면 큰일 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시험할 꺼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시험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이 시험은 악마의 시험이에요. 그래서 좀 나아진들 그거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을 폐위시키죠. 그럼 우리가 사울 왕이라면 신약적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옳소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옳소이다. 주께서는 의인으로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내가 건방떨면서 내가 왕이라고 착각했었습니다. 주님의 후회하심을 이제야 감각으로 느껴지니, 세상에 주님을 만난 이 기쁨과 자유를 제가 어떤 것으로 되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뿐이에요.

 

성경은 답변이 굉장히 쉽습니다. 성경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문제는 이게 몇 초 안 간다는 것이 문제죠. 이게 몇 초 가지를 않아요. 몇 초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기는 이게 변액이라는 게, 매일같이 찾아와서 어느 정도 나는 복음 안다고 하는 나를 다시 주저앉히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하나님을 또 다시 소개하고 또 다시 알려주는, 진짜 주님께서는 하루를 48시간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느껴지고 알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 혼자 바빠요.

 

우리는 내 욕심 챙기고, 백화점 옷 못 사가지고, “내가 이래 살아서 뭐 하노? 일 한번 저질러 볼까?”이런 것만 있잖아요. 나를 꾸미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데 온 정신을 거기다가 다 소모시키는데요, 그게 바로 사울이었다. 사울은 지옥 간다가 아니라, 우리나 사울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근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셔가지고, 요새 말로 예수님을 보내셔가지고, 주님께서 니 자신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까지 주님 자신의 몫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27-28절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27절,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절,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왕의 이웃이 누구겠습니까? 다윗이죠. 다윗. 다윗에게 주는 거예요.

 

줄 때, 곱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아주 난폭한 일을 의도적으로 일으켰죠. 난폭한 일을. 이거는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니한테 왕위를 물려준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서 주시는 거예요. 강제로 빼앗아서 주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과 인간의 우정이라든지 사랑이라는 것은 믿지 마세요.

 

오늘 첫째 시간의 결론은 뭐냐,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잘해줄게. 내가 니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아느냐? 진짜 나 너 때문에 산다.”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그거 전부 다 믿지 마세요. 믿은 적 없죠. 이게 뭐냐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지는 거. 인간의 관계는 찢어지는 겁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부부가 믿어서 문제가 아닙니까? 안 믿으면 부부생활 좋은데. 너무 상대를 다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사랑을 너무 이상화시키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은 이 땅에서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데,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한테 무슨 사랑을 기대해요? 내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기를 기대합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주께서 찢어주시고 다시 죄인과 의인을 합치하시는 이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간다는 이것이 이 첫째 강의의 내용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