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3강 / 사무엘상15: 17 (이스라엘의 영) / 181030 본문
녹취:이미아 이스라엘의 영 (삼상 15장17-22절) 대전- 43강
이근호 2018년 10월 30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17-22절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장 1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기 왕이 등장하죠. 현대에는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왕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죠. 눈에 보이는 왕의 모습이나 백성의 모습이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별반 차이를 못 느낍니다. 지금 한국은 대통령이 자꾸 바뀌잖아요. 다음 차기대통령, 다음 차기대통령, 대통령이 바뀌기 때문에 어떤 특정인간에게 특정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현대에서는.
“정치 잘하면 우리가 이쁘게 보고 정치 못하면 집회해서라도 우리가 끌어내릴 거야.” 이렇게 되는 게 오늘날의 지도자의 삶인데, 여기서 왕이 나오니까 우리한테는 괜히 낯선 겁니다. “왕? 뭐지? 당신은 누구야? 나와의 차이점이 뭐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스라엘은 독자적 자기영역, 자기집단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게. 자기들끼리 이게 좀 쉽겠네요. 자기들끼리. 자기들끼리 뭉쳐서 사는 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고유한 세계의 형식을 염두 해두고 구원을 받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를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셨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어떤 집단화가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무슨 원칙이냐 하면, 이게 언약원칙이에요. 언약원칙.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용으로 하는 주는 것이 아니고 집단용으로 주는 겁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용도로 주는 구원이 없어요. 집단구원에 포함이 되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집단구원에. 아파트분양 받을 때에, 분양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50층짜리 아파트가 다 내 거 입니까? 뭐 돈 주고 사지 않는 이상에는. 그게 아니고 그 아파트에 산다는 말은 그 큰 아파트단지 가운데 하나의 하우스의 호실에 살죠. 전체에 소속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전체에 소속.
하나님이 말 건네는 집단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게 나만 생각하잖아요. 어떤 집단 생각 안 하고 나만 생각한다고요. 나하고 하나님하고 일대일로, 늘 일대일로 생각해요. 일대일로.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뜻과 계시를 준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고유한 세계의 형식을 계속 만들어나가시는 거예요. 나를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특정집단을 만들어나가요. 특정집단을.
물방울하고 구름하고 차이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방울은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죠. 새벽에 나가면 잎새에 영롱하게 맺혀있는 물방울 하나 있잖아요. 그걸 보고 누가 안개라고 합니까? 그냥 물방울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방울이나 안개처럼 집단적인 수증기 떼를 형성하고 그러한 무리를 짓는다면, 평소에 나는 이렇게 이쁜 물방울이 될 거야, 라는 생각이 한심스럽고 어리석고 부끄러워야 됩니다.
우리 집단 사이에는 너, 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요. 이 고유한 집단, 이것이 현대판 이스라엘인데, 현대판 이스라엘에 있어서 너, 나의 차이를, 그거는 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성도들끼리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그것을 견주면 안 돼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오는데, 자기는 눈이고 어떤 사람이 귀라면 눈과 귀는 분명히 다르죠.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더 낫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눈은 그 눈 자체에 가치는 없어요. 귀는 그 귀 자체에 가치는 없습니다. 나는 가치가 없어요. 그래서 고유한 세계에 존재하는 형식은 뭐냐 하면 ‘나는 없어졌다’입니다. ‘나는 없다.’ 내가 없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면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없으니까. 내가 없는데 나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그럼 내가 없는데 내가 여기 있다면 그건 내 솜씨가 아니죠. 내 작품이 아니죠.
바로 하나님께서 두루두루 여러 사람을 통해서 어릴 때는 키워냈고, 지금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이 고유한 세계의 형식에 대표자가 있을 게 아니냐 이 말이죠. 대표자. 자, 이게 집단이다. 그럼 집단만 있으면 엉망이죠. 그래서 이 집단을 대표하는데, 이 집단을 위한 대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전달받기 위한 하나의 전령 또는 반장 그 정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대로 순종하는 대표자 역할을 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을 가지고 바로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왕.
괜찮은 왕에 우리가 들어가자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괜찮은 왕을 우리가 판단해서 또 개인적인 자기의 목표를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안에서 개인은 또 살아있는 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니까요. 오히려 왕에 의해서 유발된, 왕에 의해서 만들어진, 왕의 통치에 포로 잡힌 자, 왕의 능력에 의해서 강권적으로 붙잡혀 이 집단에 들어온 자,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가치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 이곳(고유한 세계의 형식)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가 아니라 중간에 중보로 왕이 엄연히 존재하는 그런 집단.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에요.
현대의 개인주의의 주체사상하고 전혀 다릅니다. 현대의 개인의 주체의식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나의 몸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라는 것. 이스라엘의 몸은 이거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제로라는 것.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죽은 자의 집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집단이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살았죠. 애굽에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저주를 행사할 때, 그때 살아남은 것이 이상합니까? 죽은 자가 이상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 다수에요? 살아남은 게 좀 이상하죠. 왜냐하면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의 역할이 뭐냐 하면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 하나님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그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져야 될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에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가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걸 그냥 돋보이면 안 되고, 살았다고 하는 인간은 그냥 산 게 아니고 죽었다는 것을 표하는 사건들이 온 애굽 나라에 다 퍼져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우면 쉽게 가겠습니다. 방주 만들 때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잖아요. 홍수가 났을 그때 살아있는 게 이상합니까? 죽는 게 이상합니까? 어느 게 정상이에요. 홍수는 죽으라고 주는 홍수에요. 죽음의 천사가 오면 죽으라고 오는 천사에요. 살아있다는 것은 “어!? 의외인데? 주여. 내가 왜 살아있습니까?”라고, 우리가 반문해야 될 입장이에요.
이게 신약 때 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다는 말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이제는 지상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있잖아요. 살아있다, 죽어있다, 그러면 성도한테 해당이 안 됩니다. 성도의 존재는 제로(0)기 때문에. 뭐 살아있어야, “아이고 무서워라. 살아봐야지.”라고 하는데, 이미 이 세상과 주님의 세계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주어졌기 때문에, 언약은 노아방주 같은 것이고 어린양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언약의 집단입니다. 언약의 집단. 전도라는 것은 사람 모으는 것이 전도가 아니고, 패 까는 거예요. 당신은 언약 사람 맞습니까? 라고 패를 까보는 거예요. 그게 전도에요. 이게 전도지, 사람 쓰레기 모아서 뭐 할 건데요? 쓰레기 모으면 더 골치 아프죠. 개인을 모으면 안 돼요. 개인을 제로로 만들어야 돼요.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는 뭐냐,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세상적으로 없는 존재고, 언약이 있음에 내가 있는 존재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살게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집단. 이게 바로 현대판 이스라엘입니다. 현대판 이스라엘은 현대판 나를 대신해야 돼요. 현대판 나를.
그래서 현대판 이스라엘에서, 이 말을 제가 어렵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보다 더 어렵게 이야기했죠.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못하고 하늘나라에 가지 못해요(마10:37). 그럼 이 세상의 특징은, 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예수님께서 전도했으니까, 이 세상에서의 천국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천국은 없는 거예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한 천국은 없어요. 그럼 내가 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내가 가는 나라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애굽 사람들 가운데서 맏이는, 살 맏이가 없는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없다. 다른 말로 애굽 나라에서 살 맏이는 없다. 그런데 언약이 주어졌어요. 언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약속, 약속이 주어졌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되면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어? 살았네!” 이래야 된다 이 말이죠.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산거예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지금 이 세상에 내가 있다. 내가 죽어간다. 안타깝다. 이 ‘나’라는 것이 1이 되버리면, 이 1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1과 견주하고 비교해가지고 사는 게 힘들어요. “저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아프구나. 저 사람은 잘 사는데 나는 못사는구나.” 이런다고요. 매일의 하루의 일이, 비교하고 견주는 일을 온종일 해요. 꿈속에서도 해요. 꿈속에서도. 그럼 견준다는 말은 곧 뭐로 이어집니까? 다툼으로 이어지고 시기와 질투로 이어지고 그거는 육의 열매라고 하죠.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육의 열매. 온유와 자비가 아니고. 온유와 자비는 자기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에게 나오는 성향들을 말합니다.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라고 하는 것은, 그 속성은 나의 속성이 아니고 나를 십자가에 죽게 하고 나를 대신해서 사는 예수님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에요.
그래서 그 성품은 내가 나서서 내 성품이라고 자랑질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나서면 자랑하고 안하고가 아니고 1이 되버리니까. 내가 여기에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으로 내가 있다고 하는 이런 것은 성경에 그런 구원받은 사람은 없어요. 언약은 없어요. 언약은 개인이 없어요. 언약의 개인은 누가 대신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모든 개인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고, 왕을 우리 주님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을 그냥 우리 왕이시여! 왕이시고, 그럼 왕의 자식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 집단 전체가 세자들이죠. 세자. 전부 다 세자들입니다. 왕족들이라고 합니다. 왕에 의해서 발생된 집단. 그래서 내가 노력한 신분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부여된 신분을 갖고 있어요.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너희들 참 좋겠다.” 이러고 있다고요.
우리는 우리 꼬라지를 아주 우습게 모독하고 있는데, 천사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네가 모르고 있다.” 너희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죠.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교회 가서 또 비교하게 돼요. 그러면 안 되고, 내가 잘 되는 것이니까. 나는 이 세상에 없는데 주님이 있기에, 주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내가 잠시 이 땅에 있어주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주님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위한, 따로 나 자신을, 독자적인 1, 원one, 나를 위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항상 말씀의 내용은 뭐냐, “너 주님한테 뭘 받았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귀의 역할이야? 눈의 역할이야?” 항상 부여받은 것을 이야기해야지, 자기가 노력한 것을 이야기하면 안 돼요. 부여받은 것을 이야기해야 돼요.
미장원 갔는데, 어떤 사람 머리가 잘 나와서 미장원실력인줄 알았는데, 내가 가니까 머리가 잘 안 나오더라. 그럼 그 사람은 머리가 잘 안 나옴을 부여받은 거예요. 나는 머리 못 나옴을 부여받은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은 하늘나라는 다른 하나가, 다수가 나에게 제공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사람 천명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도 나의 영혼을 못 살립니다. 애굽 사람 천명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도 어린양의 피 한 방울보다 효력이, 효과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 나가서는 “이번에 애 수능인데 기도해주이소.” 이게 갓바위지 그게 교회겠어요? 갓바위 아세요? 전국적으로 유명하죠. 요새 갓바위 난리도 아닙니다. 2킬로미터 가는데 두 시간이 걸려요. 팔공산 그 앞에 다 막힙니다. 차가 얼마나 많은지. 부산에서 단체로 와서 평일이고 관계없어요. 다들 갓바위에 올라갑니다.
천국이 없으니까, 답답하니까 천국을 대신하려고 자기가 이 땅에서 조작해낼 수밖에 없어요. 그 천국은 제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여기 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천국이에요. 내가 들어가는 나라에요. 거기에 내가 들어가는 나라, 나라는 1이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말이죠. 이래 이야기하니까 갓바위나 교회나 똑같죠. 똑같아요. 무엇 때문에 그 비싼 돈을 헌금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 노림수를 가지고 헌금하잖아요. 노림수를 가지고.
내가 헌금했는데 남이 잘 됐다, 그러면 그거 미치는 겁니다. 돈 낸 내가 잘 될 때 헌금한 보람을 느끼잖아요. 항상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런 이스라엘은 성립이 안 돼요. 나를 죽여서 생긴 게 이스라엘이에요. 나를 죽여서. 나를 죽였기 때문에. 나를 죽이고 그 다음에 내가 천국백성, 이스라엘에 들어가는 것을 아서라 마라라 스톱시키고, 그 가운데 뭘 집어넣느냐 하면 어린양이라는 약속을 집어넣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살아있음에 그 효과로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죠. 사마리아 여인이 그냥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보통여자에요. 보통여자인데 그 여자가 물 길러 왔어요. 물 길러 간 게 뭐 나쁜 짓입니까? 물 길러 온 게 나쁜 짓은 아닌데, 그 여자가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면, 물 길러 온 그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물 길러 온 것으로. 왜냐하면 물 길러 왔다, 갔다, 갔다 왔다가 하면서, 계속 1로부터 시작해서 1로, 물 길러 온 나라는 한 명으로 물 길어서 또 집에 간다 이 말이죠.
이 한명, 1에게 남자가 몇 명이었어요? 다섯 명 그쳤고, 이제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까지 해서 몇 명입니까? 여섯 번째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쇄적 일처다부제라고 합니다.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고, 계속 바꾸는 거예요. 여러 명 거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죠. 계속 바꾸는 거예요. 뭘 바꿔요? 나라는 1이 있음에, 내 1에 걸 맞는, 1에 만족스러운 상태에 맞는 1을 플러스시켜서 그렇게 사는 겁니다.
자, 이 여자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집에 물 길러 왔다는 사실과 그 여자의 과거와 현재는 남자가 여러 명이 된다는 그 두 가지 사실. 그리고 그 사람은 평소에 바로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렸다는 사실. 뭐 그런 요소가 들어있죠. 이런 요소들을 플러스 시키면 천당 갑니까? 천국 갑니까? 영생 얻습니까? 아니죠. 그럼 이런 요소들을 그만두면 천국 갑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 사람에 있어서 뭐를, 1이 있는 한 뭐를 그만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를 어떻게 개선하고, 바꿔치기하고, 노력하고, 그 교회 목사가 시키는 대로 백날 해봐야 그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미 내가 버티고 있는 한, 내가 버티고 있는 한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 한분을 쳐다보게 돼요. 한분을. 여기는 연쇄적으로 여섯 번째 남자를 바꿨지만. 그 남자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든 관계없이 한분에 의해서 부여받은 게 있어요. 아까 아파트 분양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에 의해서 분양받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여자 안에 우물이 생겼습니다. 어떤 우물이냐, 본인이 움직이는 우물이에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가 흘러나올 때, 그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가 뭐 병원에 가서 안을 수술했습니까? 그런 거 없죠. 예수님께서 부여한 거잖아요. 분양한 거. 저는 그것을 ‘이스라엘 영’이라고 하고 싶은데요. 이스라엘 영.
이스라엘 영이 이스라엘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영. 보통 이스라엘 영은 우리가 아는 성령입니다. 왜 성령을 이스라엘 영이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 해버리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받아 챙기는 것으로 이해하잖아요. 집단 대, 이제는 너라는 개인은 집어치우고 이제는 집단의 일부야. 그리고 집단의 영향과 책임과 결과는 개인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에요. 집단을 집단 되게 하시는 영의 소관이기 때문에. 영의 소관.
첫 번째 시간 제목을 이스라엘 영이라고 합시다. 이스라엘 영에 있어서, 물론 이사야나 예언서에 예언되어 있고 신약에 와서는 이스라엘 영을 부어줍니다. 부어주는데, 이사야 61장 1절에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그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성신을 부어줄 때, 그 성신을 부어주는 것이, 구약에 보면 성신을 부여받은 사람을 제가 이스라엘 영이라고 했지만 남은 자 라고 했어요. 남은 자. 남은 자에게 내가 성신을 부여한다.
그럼 남은 자라는 의미가 뭐냐, 이게 집단개념이에요. 집단개념. 남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뭔가 외부에서 칼질을 한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피자를 사왔는데 막내 동생이 아직 학교에서 안 왔다. 그럼 형제간에 모여서 먹되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다 먹지 말고 남겨두라고 하죠. 그럼 남겨두려면 칼질을 해야 돼요. 칼질해서 조각을 남겨두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때에 남은 자,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뭐냐, 무슨 취지냐 하면 남은 자의 그러한 취지가 이스라엘에 담겨야 진짜 하나님의 최종적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잘라내시고 남겨두시는 그 일관된 취지가, 그 원칙이 담겨져 있는 사람이 남은 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추수할 때가 됐다고 하거든요. 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이 말은, 추수할 것도 항상 외부적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자기가 가라지라고 손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쳐줘야 되는 거예요. “아, 이거는 가라지고, 아, 이거는 알곡이네. 가라지는 안 돼! 알곡은 거두는 것!” 뭔가 외부에서 거두어주고 추수된 사람은 거두어지는 거예요. 거두어지면서 인식 자체를 천국에 합당한 인식으로 바꾸어야 되는 겁니다. 천국에 합당한 인식으로.
그 합당한 인식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을 주께서 용납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고, 주께서는 내 위에 뭐가 오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덮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집단 위에 빠개지겠죠.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겠죠. “교회 출석 한번 안 하면 천국계단 하나 빠진다.” 그럼 그 다음 주일에 교회 두 번 참석하면 계단 보강할 수 있습니다. 천국계단이라는 게 없어요. 왜? 천국계단이 있으면 내가 노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 적어볼게요.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에 정착한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에, 그걸 자기의 고정영토로 해서 거기에 정착해요. 안동댐에 가보게 되면 안동댐은 골짜기, 골짜기들이 있잖아요. 그럼 안동댐이 있을 때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는데, 조금 들어가 보면 안동댐 골짜기가 있고 살림집이 있고 민가가 있어요. 그럼 민가가 산에 있는데, 민가는 꼭대기에 안 짓거든요. 민가는 이쯤, 중간에 오순도순 씨족끼리 모여 있잖아요. 그럼 왜 이 사람들은 이 위, 꼭대기지점에 안가고 여기에 있느냐, 한도에요. 한도로 옹기종기 정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하고 가깝고 그리고 경치 좋은 곳, 산소쓰기 좋은 곳.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에 정착하는 겁니다. 학생들보고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 안 하죠. 이게 역량이 다르거든요. 자기의 한도가 1등 할 수 있는, 수학을 90점까지 올릴 수 있는 애는 90점까지 바짝 붙이고, 수학을 20점까지 못하는 애는 자기 아버지가 뭐.. 자기 아버지가 교무과장 쯤 돼야 1등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날 해봐야 90점이 안 돼요. 기껏 잠시 노력하면 25점까지는 될 거예요. 25점.
그래서 학교의 교육은, 갑자기 학교교육이야기가 나왔는데, 학교의 교육은 몽땅 90점이 되는 것이 아니고, 25점에 자족할 수 있는 취미를 길러주는 거예요. 자기 분수를 알아서 각자 나중에 성인이 될 때, 내가 할 수 있는 역량껏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게, 그게 학교교육의 목표잖아요. 모두가 판사가 되고 모두가 의사가 될 수는 없어요.
용접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농사짓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대목, 소목, 중간목 다 있어야 되잖아요. 인물이 이쁘장하면 뭐 연예인이 되고 배우 되어야 되죠. 그리고 노래도 음치가 되어가지고서는 맨날 자기 마누라한테 자기 버스킹(길거리 라이브)한다고 할 때, 그 인간 미친 인간이죠.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해요.
이게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서는 내가 수학 백점을 맞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집단이 용서를 안 해줘요. 그 집단이 용서를 안 해줘요. 드라마에 보면 대기업의 사원해가지고 멋있게 슈트빨 딱 챙겨가지고, 작업복 안 입고, 깨끗한 환경에서 여름 되면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고, 겨울 되면 뜨뜻한 그 인텔리전트한 그 빌딩에서, 입구현관부터 깨끗하게 청소된 그런 회사에 누가 안 가고 싶어요?
그러나 공대 나와 보세요. 어디 가는 줄 아세요? 들어가면서부터 오염물질로 가득 찬 곳이에요. 그리고 공기도 안 좋을뿐더러, 현장에 가보세요. 지지직~~하는 금속 갈아내는 그 작업이, 손님이나 구경하는 사람은 그거 한 1~2분 견디면 바깥에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청각, 그리고 후각 다 나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장장한테 불평하고, 환경 좀 개선해달라고 하면 대번에 하는 소리가 그거에요. “공부 좀 잘하지 왜?”
제가 대학졸업하고 포항공단에 있었어요. 포항공단.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하청, 하청, 하청을 주는 공단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하청 주는 중소기업의 근로조건하고, 그 이십 몇 층 되는, 십 몇 층이 되는 포항공단 본사를 가끔 한번 보세요. 구내식당 자체부터가 달라요. 하청 주는 데는 꿀꿀이죽보다 더 못해요. 저도 도저히 못 먹겠어요. 먹을 수가 없어요. 이 중소기업 자체의 식당에서 이거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요.
근데 거기 고참들은 잘도 먹어요. 하도 먹어서. 못 먹습니다. 그런데 포항제철 구내식당은요, 복지비 팍팍 나와서 반찬 좋아요. 여기는 식물성 반찬 두 가지하고, 밥도 전기밥솥으로 해서 맛도 하나도 없어요. 국도 멀건 국. 그게 끝이에요. 실화입니다. 이제는 말한다. 애들 유치원 식단에 비하면 그거는 너무 고급식단이에요.
이 세상의 집단은 인간이 안 되고 싶어도 사회가 그 인간을 인간 만들어버려요. “너는 이 자리야! 까불지 마! 너는 이 성적가지고 이거밖에 못해! 까불지 마!” 그렇게 사회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주체, 다른 말로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남들이 그걸 호명해줘요. “어이, 김대리! 김과장!” 호명하잖아요. 퇴직하면 김대리가 아니고 전김대리가 돼버려요. 이건 끝난 거예요. 사회가 나를 뭐라고 불러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정해주는 주체가 되고, 나는 거기에 얽매여서, 그리고 나와 더불어서 가족은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 전체가, 이걸 가지고 비-언약이에요. 비-언약. 죽어있기에 살고자 하는 거예요. 24시간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죽어있기에 이 죽음을 탈피해보려고 하루 온종일 그것만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 이게 비-언약입니다. 비-언약인데, 이걸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요 그런 것들은 누가 구한다고 했습니까?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분양받은 게 없어요. 내가 나를 살리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못 살려요. 그러나 언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안 죽여도 주님께서는 이 1이라는 것을 늘 삭제하는 겁니다. 1의 자리는 건방지게 우리가 붙일 수 없는 거고. 지금 1은 독점적으로 예수님만이 1이에요. 예수님의 가지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이에요. 이게. 실제상황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왜 삽니까? 성도는 혹시 내 주위에 언약적으로 대화가 되는 같은 언약맨을 찾기 위해서 성도는 살아갑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유는. 같은 형제자매가 없는 줄 아는데 혹시 계십니까? 라고. 그걸 찾는 겁니다. 나처럼 끊임없이 생수가 나오는 이러한 기능을 분양받은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한 아파트의 주민입니다. 물탱크에서 동일한 물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다 찾다가 없다면 그럼 좀 외롭죠. 외롭지만, 너무 외롭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외로워도 주님 생각하게 되면 외롭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주님은 외로울 정도가 아니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남은 자로 만드는데, 남은 자라고 할 때는 칼질을 해서 제거를 해줘야 해요.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사울 왕을 책망하죠. 사울의 부하를 책망합니까? 사울 왕을 책망합니까? 사울 왕을 책망하죠. 백성들을 책망합니까? 사울 왕을 책망합니까? 사울 왕을 책망하죠. 왜냐하면 이게 언약적 구조가 그래요. 하나님의 뜻을 총책임자에게 묻는 거예요.
왕이 잘 되면 다른 사람은 왕 덕분에 저절로 잘 되는 거예요. 왕이 잘 되면 저절로 잘 되는 겁니다. 이거 민주주의 아닙니다. 왕이 제대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사는 거예요. 그 중보자리, 왕 자리가 계속 교체해나갑니다. 나가면서, 백성들을 남은 자, 남은 자, 남은 자로 피자 잘라내듯이 잘라내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누구만 남느냐 하면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왕 되신 분만 외부에서 따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요. 뭘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에 영을 부여하면서. 곧 예수님 자신의 성령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 영이라고 하니까 생소하죠. 자, 그 대목을 보충하기 위해서 누가 요한복음 1장을 한번 찾아봅시다. 1장 47절, 48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아멘.
이게 예수님의 전도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전도방법은 구원해달라고 손든 사람은 안 찾아갑니다. 이미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규정을 지어요. 나는 특정 나만의 이름이 있고 부모로부터 지은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이름을 무시해버리고 이스라엘로 다가와 버려요. 요한복은 1장 51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야곱의 사다리이야기죠.
그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야곱을 쪼개면 옹기종기 집단이 거기에 있어요. 마치 석류 같아요. 석류가 벌어지면 빨간 알맹이가 있듯이, 주님 안이 벌어지면 주님 새끼 알 까듯이 거기에 다 모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확인해줄 뿐이에요. 나다나엘이 성격이 좋아서 간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간사하지 않다고 하면 간사하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남보다 얼마나 더 우수한 성격이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치고 간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 다 순수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규정을 해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꾸 규정을 1이라는 나로 간주해서 규정하지 마세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 했잖아요. 자기를 질책하지 말라고요. 사람은 타인을 의식해서 살아가잖아요. 타인을 의식해서 살아가면 안 돼요. 타인을 의식해서 살아가면 이거는 비-언약이라니까요. 애굽이, 다 죽은 인간이 죽은 인간끼리 견주는 것밖에는 안 돼요. 어린양의 피를 발랐으면 그거는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런 언약적인 요소들을 집어넣어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돼요. 언약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서.
그리고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을 용납 안 하듯이,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더 못살게 굴면 안 돼요. 내가 나를 자꾸 폄하하고 탓하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여자 중학생이 평소에 체육선생을 그렇게 흠모를 했어요. 그렇게 흠모를 해서 언제 체육선생님한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되는데, 고백을 해야 되는데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기가 흠모하는 체육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는 거예요. 불러있으니까 이제는 고백해야지 하고, ‘선생님 저는 선생님하고 결혼할 거예요. 선생님을 그동안 흠모했습니다.’라고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선생님이 먼저 말해요. “내가 너를 쭉 지켜봤거든.” 그 소리를 듣고 막 감격해가지고 이 여자중학생이 ‘드디어 내 마음을 선생님이 알아주는구나.’하고 굉장히 좋아했답니다. 근데 “니 투포환선수해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냐 하면 노사연이야기입니다. ‘만남’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노사연. 그 이야기를 듣고 상처받아서 공부 안하고 엇나갔어요. 너무 상처받아서. 자기는 너무 순수했는데, 선생님은 덩치를 본 거예요. “투포환선수 백옥자 있지? 백옥자 선수처럼 너도 성공할 수 있다.” 지금은 가수해서 나름대로 애굽에서 성공했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속인 거예요. 인간은 바랄 수 있는 것은 행할 수 있어요. 그러나 바라는 것을 바라지 못해요. 내가 바라는 것은 일방적인 내 생각이지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은 내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나한테 사기 친 겁니다. 그동안 모아놓았던 나의 욕망이, 나의 욕심이 조작해놓은 거예요. “나 이거 원하고 있어. 나 이거 기도제목 삼을 거야.” 항상 1에서 출발해서 1로 가거든요. 이스라엘 집단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오늘 본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질책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던가요? 아말렉을 다 작살내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왜 다 죽이라고 했는데 이거는 살찐 것이다, 이거는 귀한 것이다, 라고 해서 왜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바로 출애굽 할 때 그 유월절의 그 원칙을 일방적으로 위반해버리는 겁니다. 자, 사울이 왜 그렇게 위반을 하고 싶어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연락을 해야 될 연락책인데 하나님한테 이걸 아주 끊어버렸어요.
전쟁에 승리한 것은 고맙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아말렉을 이기게 해 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부터는 이거는 분명히 우리보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전쟁했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백성들도 은근히 그걸 원한 것 같고. 그래서 사울이 “여러분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좋지 않은 것은 죽이되, 괜찮고 쓸 만한 것은 남겨두어서 여러분 것으로 하세요. 이것은 내가 알아서 왕의 재량으로 합니다.” 이러니까 백성들이 좋다고 왕 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사무엘이 기겁을 하고 온 거예요. “내가 받은 계시하고 당신이 받은 이 계시하고 왜 다르냐?” 이 말입니다. “당신 잘렸어.” 잘리면 그거는 뭐냐 하면 빈터가 되겠죠. 빈터. 구멍나버리겠죠.
자, 다시 봅시다. 하나님은 뭘 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원해요. 이스라엘을 원하는데 이스라엘이 갑자기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언약의 이스라엘이 아니고, 개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이방나라처럼 괜찮은 어떤 나라가 되겠다고 왕 하나가 방향틀을 엉뚱한 것으로 몰아세우니까, 백성들은 그걸 아주 좋게 여긴 거예요. 왜? 잘해주니까.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렇게 조작해내면서 부추겨주니까, 뭐 할렐루야 했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마땅히 드리겠다고 하면서 하나님 핑계대고 챙길 것은 다 챙겨버려요.
하나님께서 재물을 안 줘서가 아니라 천국에 부합되는 인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돼요. 따르면 지시에 방해가 되는 것이 뭔가를 파악해야 됩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나라는 1, 나로부터 출발한 나의 존재를 자꾸 의식하게 되면, 아까 중학생의 노사연처럼 자기가 자기를 계속 속이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나한테 만족스러운 그 꺼리를 어디서 찾겠어요? 주의 뜻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부러운 것들에서 욕망을 가져와가지고, “나 이것처럼 될래. 나 저것처럼 될래.” 이렇게 하잖아요.
요새 TV채널을 보면 방송채널보다 홈쇼핑채널이 굉장히 많죠. 7번은 KBS2방송, 9번은 KBS1방송, 중간에 뭐가 있습니까? 8번이 있잖아요. 8번은 롯데홈쇼핑입니다. 그냥 안 가요. 8번 거쳐서 가게 만들어요. 8번 거쳐서. 8번 거쳐서 딱 가는데, 하필이면 거기서 어떤 여행상품을 방송한다. 보는 순간, “갈까? 가버릴까?” 이래 되겠죠. 갑자기 나를 위한 나가 돼버려요.
따라서 이스라엘 영이 내 개인적으로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런 나를 가만두지 않겠죠. “이게 가만 보니까 아직까지 별로 걱정거리가 없구나? 집안의 우환이 없어가지고 자꾸 상상하지? 사고 한번 만들어줘? 놀러갈 생각 확 빠지게 만들어줘?” 그동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살아오게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집단을 만드는데 내가 기여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살아오게 한 것이에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데 전부 다 왕 되신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이렇게 이스라엘이 됐잖아요. 그 희생을 깜빡깜빡 자꾸 잊어버리는 거예요. 뭐 자식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금방 버리고. 뭐 불평불만하고. 하나님을 손톱으로 할퀴려고 덤벼들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대들기나 하고. 이런 것. 이스라엘 나라가 이스라엘 맞는데, 계속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울을 잘라버려요. 사울 없는 이스라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사울 없는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중간에 하나 텅 비었다. 텅 빈터가 있다. 텅 빈터인데 바깥에는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하죠. 안에는 텅 비어있는데 작대기로 구름 같은 것을 자꾸 모아가지고 나중에는 천원이라고 주잖아요. 텅 비어있는데 우리는 사는 것.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보이지 않는 분의 덕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에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분이 우선이겠어요? 거울 앞에 보이는 내가 우선이겠습니까? 거울 앞에 보이는 나는 결과에요.
보이지 않는 분의 결과물이 거울 앞에 비치는 내 모습이라 이 말이죠.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사는 겁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이 관계가 뭐냐 하면 이 관계가 언약관계입니다. 나는 나를 믿지 않고 언약을 믿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별로 어렵지 않죠. 굉장히 논리가 간단하죠.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라고 물음표를 하죠. 순종이 뭐보다 낫습니까?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자, 사울이 전쟁할 때에 제사 안 드렸습니까? 제사 드렸잖아요. 제사 드렸다고요. 사울이 제사를 드릴 때에 진정한 제사 같으면 뭐가 없어져야 해요? 제사 드린 자기 자신은 제사의 효과 앞에 자기결정 같은 이것은 스스로 무시당해야 돼요.
제사가 1이라면 사울은 제로가 되어야 해요. 나는 제사 앞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해요. 주님을 생각하는 순간 독자적인 나는 없어요. “주님이 계심으로서 오늘도 나는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하루 일과가 교통사고 나지 않고 아무 탈 없이 집에 도착했다. 주님이 계시매 오늘 아침새벽에 눈을 떠서 건강하게 다시 일터로 나가게 됐다.” 항상 비어있는, 보이지 않는 주님 덕분으로 할 것 같으면 나를 항상 1이 아니라 제로로 가야 돼요.
그럼 제로로 가게 되면 내가 분명히 있기는 있어요. 주님 때문에 있잖아요. 그럼 여기 나는 1이라고 했습니까? 제로라고 했습니까? 제로죠. 근데 버스를 타거나 길에서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은 백발백중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뭘 주장하느냐 하면 1을 주장하죠. 1을. “나는 이렇게 했어.”라고 이야기하죠. “나는 내 자식 이렇게 잘 키웠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항상 출발점이 뭡니까? 대화의 출발점이 나 I, 또는 우리 We, 자꾸 이렇게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가 됐다. 아침에 식당에서 커피 한잔 먹을 때 보면 항상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해놓고 내이야기부터 하는 거예요. 내이야기부터. 그럼 제로인 이쪽은 뭐냐 하면 그냥 싱긋이 웃죠. 왜 웃느냐 하면 ‘나도 한참 잘 나갈 때는 나도 그렇게 살았어.’ 속으로 그렇게 해가지고 개무시 하고 그냥 넘어가고, 우리는 10분 쉬면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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