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공은주 안양20180608a약2장14절(구성)-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이 굉장히 쉬워 보이지요. 쉬워 보이는 이게 이제 함정이 되는 겁니다.
쉬워 보인다면 이건 구원이 안 된 사람이에요. 윤리, 도덕으로 빠져 나갈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본문이 윤리 도덕으로. 쉽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것을 행하면 되지요.” 라는 그것이 쉬운 거예요. 이건 평소에 내가 뭐를 행하면 그 행한 것으로 천국 간다. 이게 평소 하던 것이 되어서 쉬운 거예요. 제가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된다는 말은 뭐를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게 오늘 강의의 핵심 포인트인데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무엇을? 무엇 행함? 무엇 실천? 무얼 건넴? 성경에서 기본은 믿음의 모든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 믿음 발휘하라고 성경 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야고보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은사를 받아서 야고보서를 썼거든요. 야고보서라는 계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이 계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야고보서를 준 겁니다.
그리고서는 실컷 야고보서를 읽고 난 뒤에 “그래, 내가 행하면 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말로만 행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실천을 가미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내 믿음은 가짜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이다.” 라고 자기 쪽으로 회수를 해버려요.
실천 또는 행함인데. 행함은 방향성을 가집니다. 인간의 실천 행함은 방향성을 가진다는 거예요. 방향성. 만약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방향성이 10개라도 20개, 100개라도 될 수가 있어요. 집에서 설거지할 때의 방향성, 여행 갔을 때의 방향성, 그리고 교회 갔을 때의 나의 실천 방향성, 전부 다 이게 다르다 말이죠. 수영장 갔을 때의 방향성, 내 방향 수천가지 수백 가지 방향성을 내 중심된 나에서 계속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 살 때의 나의 방향성, 콩나물 살 때 기도하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콩나물 살 때에 헐값에 맛있는 콩나물을 구입하게 되면 오늘 저녁식사는 굉장히 맛나겠다. 라는 내 쪽으로 방향성을 가집니다.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방향성으로 가야 될 텐데 인간이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실천한 방향성은 이렇게 가다가 도중에 유턴 해가지고 그 방향성이 나의 실익, 나의 이익으로 되돌아가버려요. “나, 잘났지요? 나, 행함 있는 믿음이니까 진짜 믿음 맞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를 증거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방향성이 어디에 도달하지 못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서 나온 행함이라면 그냥 예수님 쪽으로 가야 돼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한다면 오늘 강의는 사실 이해 다한 거예요. 이 두 개의 차이점을 봅시다.
행함. 행함으로 행하자. 행함으로 행하자와 믿음으로 행하자의 차이점은? 행함으로 행하자 하면 방향성이 나에게로 가요. 내가 행함의 주체기 때문에 나에게로 옵니다. 어? 어려운 사람이 있네. 형제가 헐벗었네. 형제가 헐벗고 배고프네. 그럼 누가 도와주나? 내가 도와줘야지. 내가 도와준다. 나에게서 뭐가 나왔습니까? 행함 나왔지요. 나 행함, 나 실천이지요. 행함이 나왔지요. 저 쪽 상대방에게 행함으로 전달된 겁니다. 나의 행함이 저쪽 행함으로 결심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믿음이 필요치 않지요. 믿음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믿음이 가미되게 되면 나에게서 비록 행함이 나왔더라도 믿음의 실천 방향이 나를 제키고 나를 빼먹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가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증거 돼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그냥 행함으로 행하라면 믿음이라는 게 필요 없는데 믿음을 보이기 위한 행함이라면, 내가 나를 믿습니까? 내가 나를 믿어서 구원 받습니까? 구원이란 말이 나오거든요. 그럼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 강의에 어려운 점이 또 나오는데,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미리 말씀드릴게요.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과 귀신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바로 실체는 있는데 이 땅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림자 없는 실체. 희한하지요?
이 컵에 그림자 있잖아요. 그림자가 있으면 실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실체는 있는데 그림자가 전혀 없다. 어머, 무서워라! 어떨 때 그런가 하면 유령. 유령은 있는데 그림자는 보이지를 않지요. 여호괴담. 복도에 탁탁! 귀신이면 그림자가 없어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의 그림자가 몇 센티 되던가요? 마귀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은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 계시면 마귀도 있지요. 귀신도 있고 마귀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림자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는 있는데. 그래서 그림자 없는 실체를 인간 속에 집어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 인간들이 결정해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 문을 누가 열었습니까? 옥문을. 천사가 열어주지요. 성경에는 이렇게 그림자 없는 실체, 유령 같은 영적 존재가 계속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면서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림자 있는 나를 믿는 것에서 더 능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 백날 나는 왜 이리 완벽해. 이런 거 있잖아요. 거울 보면서 매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은 뭐를 누락시키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집어넣은 믿음이라는 그 관계성을 전부 다 훼방하고 있고 인간이 자기 존재 때문에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집에 와서 “설거지 누가했지?” 딸이 있다가 “엄마, 내가 했어요.” 전혀 믿음 아니지요. 같은 아담이 같은 아담에게. 성경에서는 이 아담이라는 이것이 아담에서 아담에게.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아담에서 아담에게. 같은 아담이 아담에게서 하는 이것은 전혀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미흡한 겁니다.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오늘 아침에 십자가마을에 딱 들어가니까 누가 질문 하나 던져놨지요. 질문을 했어요.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92페이지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피와 그 차이 남에 연관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답변을 제가 해놨어요. 나중에 시간 있거든 답변해 놓은 거 보세요. 그 답변이 이리 되어있어요. 인간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었다. 에덴동산에. 인간은 인간을 위한 에덴동산 같으면 인간에게 해로운 선악과를 아예 심지를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한다면 죽음이라는 그 부정적 이상한 유해물체를 심어놓지를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아담이 따먹었다 쳐도 그 손상된 선악과 파내고 새롭게 선악과를 심던지 아니면 아예 선악과를 안 심던지 해서 어쨌든 인간이 범죄 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배려를 다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까지 못 따먹게 만든 추방되었다는 것은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어요.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뭐냐 하면, 마지막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에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든 선악과나무든 무슨 나무든 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방해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방해물이 뭐냐는 선악과를 심어놓고 파악을 해주시는 겁니다. 선악과 심어놓고 아담이 따먹으라고 먼저 하지를 않았어요. 여기에 부추긴 자가 있지요. 처음에 부추긴 악마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뱀이라는 것. 그런데 그 뱀을 뒤에서 조종해서 따먹어라. 따먹어라. 했다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뭘 예상했느냐 하면 선악과에 대해서 반발하는 영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전쟁에서 패배해서 지상의 인간들까지 이미 이것이 전투의 자리가, 장소가 확대되었다는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이 요한계시록12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미가엘을 천사를 이기지 못해서 추방되어서 지상에 어디까지 확대되었느냐 하면 인간의 사는 동네까지 확대되었잖아요.
그러면 승리했다는 표시가 하늘에서 확대됐기 때문에 하늘에서 결정된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이 지상에서 마귀한테 이겼다는 것을 지상에서 찾아야 돼요. 지상에서 찾을 뿐만이 아니고 지상에서 찾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악마가 무엇을 중점으로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꼬셔왔는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만을 알지 다른 것으로는 몰라요. 교회 갔다고 몰라요. 십자가 복음만큼만 제발 입 다물어라. 그 말은 십자가 피만큼 만이 구원되지 그 외에는 구원의 길을 준적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알고 있어요.
이 악마는 교회를 앞장세워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십자가 대신 교회부흥, 이거 대신 니 몸 건강, 계속해서 우리에게 십자가 대신 니 행복, 이리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과 연결된 아담은 이들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모형. 이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의 모형.
저는 성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추적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예수님의 위치, 추적기. 여러분, 주머니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의 추적기 있나. 이건 무지 무지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바로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아담이 다른 아담에게 전달하는 그 전달 실천 속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 미국에 있느냐, 한국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니 실천력 속에 주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 말을 바꿀게요.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주님이 나보고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실천에 어떤 행위에 나서게 하는 그 사건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질문에 바꿔야 돼요.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지 말고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바꿔야 돼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이었어요.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자기 고향을 생각했던가요? 만약에 스데반집사가 고향이 평양이라면 얻어맞으면서도 ‘아, 이제 내가 평양냉면 못 먹는구나!’ 걱정했겠습니까? 스데반집사의 고향은 따로 있어요. 얻어맞고 죽게 되니까 거긴 바로 주와 함께 있었던 주님이 서서 스데반집사를 기다렸잖아요. 스데반집사를 죽게 하는 그 사건, 주님의 실천인데, 실천성, 그 사건 속에 스데반집사에 주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7장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성령 충만’이라 합니다.
성령을 요한복음14장에서는 이걸 두 자로 이렇게 해요. 처소에요. 처소.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성령이 그냥 개인적으로 만나 버리면 처소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고. 집사님은 집사님 집에 가고 나는 내 집에 가면 되니까요. 처소가 새롭게 형성이 안돼요.
그런데 성령은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니 소속과 니 장소가 현재 니는 아무리 나대보고 도망쳐 봐도 니가 이미 옴팍 뒤집어씌운 처소는 거기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을 통보하고 일러주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소유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는 그 성령이 제시한 처소 안에 소유 당했어요. 그런데 그 처소는 성령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있어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요한복음14장에 계속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성령은 처소라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원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 받았거든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예수님은 꾸준히 어떻게 살으셨냐, 내가 아버지 안에,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신 방식으로 예수님은 움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계신 곳을 하늘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게 일어나는 그것이 곧 내 안에서 아버지가 하신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은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누가복음에 보면 17장2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너희들이 하나님나라 가기 위해서 징후를 자꾸 찾는데,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눈 떠봐라. 바로 너희 안에 있잖아. 니가 지금 마주보고 있잖아. 너희와 더불어 함께 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을 아버지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언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이 사건으로 실천되는 그 현장만 아버지도 거기 있고 아들도 거기에 있고 성령도 거기에 있고 성도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언약사건입니다.
언약 사건은 성령께서 그 자리를 초대하지 않는 한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없어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언약에 유월절이 있었어요. 언약 사건은. 어린양의 피, 그 죽음을 경계로 해석했기 때문에 니가 죽지 아니하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요. 산채로 목숨 바치려고 했던 베드로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혼자 그 장한 베드로 떼어놓고 그냥 혼자 가셔요.
저나 여러분이 어릴 때 엄마한테 제일 섭섭했던 게 뭐냐 하면 엄마가 시장가서 어린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제일 섭섭했던 것이 평소에 장볼 때 늘 같이 가다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니, 딴 데 가지마라. 여기 있으레이. 딴 데 볼 일 보고 올게. 딴 데 가지 말고. 엄마 후딱 볼일 보고 올게.” 해가지고 엄마가 자기 옷 보러 양품점에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거기 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혼자서. 줄곧 같이 오다가 고 시간만큼은 서있어요. 한 10초 가격만 볼 줄 알았는데. 1분 지나고 2분 지나고 여자 옷 사는 게 어디 그렇게 간단합니까. 슬슬 짜증나고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그 때, 엄마 금방 나오잖아. 바로. 금방 안 나왔는데. 금방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녀교육 할 때, 예상 못한 괜찮은 옷이 있을 때, 잠시 애 보류해 놓고 잠시 가는데 있지요. 그 애들이 얼마나 어릴 때 섭섭하겠습니까. 트라우마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이 서른 넘어도, 장가가도 트라우마 있어요. 엄마 그 때 나를 버렸다. 모든 인간은 주님한테 트라우마가 있어야 돼요. 나를 버린 분이에요. 주님이 나를 버린 분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를 찾아온 사랑하는 분부터 시작하면 이건 완전히 100% 개판이에요. 이건 엉터리에요.
베드로를 버렸듯이 가룟유다를 내쳤듯이 일단은 주님은 우리를 내침을 우리가 용납해야 됩니다. 나를 내쳤던 분이에요. 내치지 않고 해버리면 우리는 사랑이란 망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마지막에 그런 대목 했거든요. 미워하는 법을 모르면 사랑하는 법도 모른다고요.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미워하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말이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100% 그건 사기입니다. 사랑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는 거예요. 미워해도 되는데 사랑할 때 이게 진정 사랑 아니겠어요?
미워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믿음의 주체로서 행함으로 건너올 때 이게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그 행함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우리의 행함의 방향성이 내 쪽으로 쏠리지 않습니다. 도로 유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내쳐도 할 말 없어요. 왜? 우리는 언약 밖에서 놀던 그러한 엉터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모르고 자기 살 궁리만 생각하고 자기 구원받을 궁리만 생각했어요.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언약한 그대로 언약을 회수하거든요. 저보고 볼펜주세요. 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던 볼펜을 던질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볼펜을 던져 놓고 제 볼펜 주세요. 하면 제가 던진 볼펜을 여러분이 찾아줄 거예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언약을 던져 놓고, 애들 문방구에서 파는 거 있잖아요. 훅 불면 펴져서 도루룩 감기는 게 있잖아요. 자기가 던져 놓고 던진 콩고물에 묻힌 사람들만 데리고 오는 방식. 그런데 이건 뭐냐, 꿀이 달렸어. 언약 안에 꿀이 있어가지고 꿀을 다 알아보는 언약 회수할 때는 그런 사람만 회수하는 거예요.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분류를 이야기해요. 분류.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도할 때 상대방을 꼭 미워하세요. 꼭 미워하세요.
남편한테 전도할 때 남편을 밉지 않거든 전도하지 마세요. ‘아이고, 인간아! 예수도 안 믿는 게 인간인가.’ 우리 아까 권사님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는 안 믿는 게 무슨 인간입니까? 주님 안목에서 미워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게 복음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빛이 나요. 복음이 빛이 나요.
그냥 생뚱맞게 이만한 다이아 적어도 10억내지 20억되는 다이아를 가지고 만약에 아주 못한 어떤 시어머니가 무슨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자기 가보 10억 되는 다이아를 며느리 불러가지고 “자, 나는 다됐다. 니 해라.” 하면 그 며느리가 ‘아이고, 또 유리조각 잘라가지고 참 끝까지 나를 속이는구먼.’ 이리 생각하지. 그걸 다이아몬드로 생각하겠어요? 항상 복음은 예상 밖의 기쁨을 줘야 되지 예상한 기쁨은요, 이건 시큰둥하고 시시해요. 매일같이 예상 밖의 복음이 와야 되지 미리 예측한 복음은 그건 우리의 오만원짜리보다 더 못합니다. 오만원짜리보다.
세상 천하를 얻고도 목숨(복음)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할 비중 그러니까 단층에서 지붕으로 여겨놓고 십자가 복음을 논했을 때 이게 복음 때문에 시국 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권사님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 좋은 게 없다고요. 복음 알고. 이 기회에 권사님 믿음 혼자 다 좋은 줄 아는데, 이 때 순간뿐이에요. 내일 되면 또 몰라요. 복음 알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어떤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미국에가 봐도 재미가 없고, 태국에가 봐도 재미가 없고, 초등학교 동창생 만나도 재미가 없고. 경중이라 하지요. 가벼움과 무거움.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놀러가고 하게 하시는가. 경중할 수 있는 체험을 주시는 겁니다. 계속 체험하세요. 앞으로도 제주도도 체험하고. 이 십자가 복음 다시 말해서 나한테 돌아오지 않게 되게 되면 나는 사람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져요. 왜냐 하면 내가 십자가 여기에 두지 말고 없어질 사라질 지구 속에다가 내가 거기다가 집어넣었다. 껍데기 같은 나를 거기다가 집어넣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다. 이럴 줄 알았지요. 그게 아닙니다.
그냥 벼 껍데기 있잖아요. 바람 불면 무게 없이 날아가는 것. 그쪽 편에 나를 달아야 된다 말이죠. 망하라고 복음 주신 거예요. 모든 세상의 기도가 다 엉터리고 전도, 헌금, 예배, 성경공부, 다 엉터리인 이유가 이거 해도 안 망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의도가 그 모든 주님의 복음이 엉터리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문제가 있어요. 문제 있으면 어떻게 돼요? 안 망해야 돼요? 망해야 돼요? 망해야 돼요. 이왕 망한 거 쫄딱 망해야 되지요. 쫄딱. 재산도 한 70억 있다가 50억밖에 없는 거 쫄딱 망한 거예요. 애들도 좀 산다는데 자식이 잘 돼도 그것도 의미 없고, 의미 없으면 그건 망한 거죠. 나도 내 실천력, 내 행함도 의미 없고 이럴 때 믿음을 보여주는 행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안 망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마귀노릇해요. “주여, 오늘도 망하게 하옵소서. 이왕 망하면 제대로 망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그것이 응답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날 하루는 룰루랄라입니다. 기분 좋아요. 이제는 라이트가도 괜찮고 이왕 망하는데 골프 쳐도 괜찮고 노래방가도 괜찮고 이왕 망하는데 자기관리 자기절제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뭔가 안 돼! 안 돼! 이건 뭐예요? 갑자기 자기 더러운 자기 본색을 또 노출시킨 거예요. 안 돼! 안 돼! 뭘 안돼요? 사람이 자기 처소가 이미 이동을 했다 말이죠. 자기 처소가. 그리스도 안에 했으면 우리가 처소를 할 때 우리 힘으로 옮겨지지 않았잖아요. 그럼 성령께서 우리를 확인시킨다. 니 처소는 그 쪽이 아니고 이쪽이라면 성령 말을 들어야 돼요.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다. 한 번 적어볼게요.
~~가 아니고 ~~다. 사람은 이상한 버릇이 있어가지고 뭐가 아니고 하면 이걸 자꾸 끊어내려고 생각하는데 이걸 둘 플러스 시켜줘야 이고의 의미가 생겨요. ~~아니고가 ~~이고의 의미가 생생히 살아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고에 들어가면 안돼요. 뭐 아니고부터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이고가 신이난다니까요. 신바람. 신바람 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에서 있어야 돼요. 아니고에.
아니고에 서있으면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요 본문 말씀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다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 전제입니다. 이건 뭐 나한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이러면 성경은 매직으로 시커멓게 도배를 해버려야 돼요.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아니고에 있는 우리보고 니가 왜 아닌가를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증인으로 방향성이 나한테 꽂히는 게 아니고 주님에게로 꽂히는 주의 믿음의 증인으로서의 행함을 보이는 겁니다.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하게 되면 뭐를 빠뜨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오면 안 된다 했어요. 믿음이란 것을 놓치면 안돼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 하는 것은 믿음의 원천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 요단강에서 성령 받고 살았다. 성령 받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부지런떨었는데 그 부지런떨음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게 아니고 아버지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아버지와 나와 함께 있어서 하는 일이 뭐냐,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 그런데 언약에 사람들이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언약과 언약바깥에는 죽음이 끼어있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베드로처럼, 내치고 난 뒤에 죽고 난 뒤에 다시 베드로를 영원히 내쳤습니까? 성령이 왔습니까? 베드로에게. 성령이 왔잖아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니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이 초청하겠다는 거죠. 그걸 저는 처소라고 이야기했지요.
처소에는 아버지계시고 아들 계시고 성령 계시고 베드로 있고. 베드로면 성도도 있고.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었던 언약의 완성태입니다. 언약의 완성 상태. 언약의 완성형식이 된다 말이죠. 그것이 딱 왔을 때 그게 언약이다 말이죠. 언약이 왔을 때, 주님께서 뭐냐, 뭐 아니고 뭐 니까 우리는 어디에 끼어들면 돼요? 뭐 아니고에 끼어들면 돼요. 뭐 아니고에.
부자가 천국가기가 힘든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 그럼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야 돼요? 구원받은 자리에 가면 안 되고 부자 못돼서 환장한 자리에 가야 한다고요. 그게 가난한 사람이 더 심하지요. 장애자들 가난한 사람들, 부자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다. 그들은 구원되지를 못해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가난한 이유 때문에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팔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주님이 주신 그 낙타는 어떤 누구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베드로도 통과하지 못하거든요. 통과 못하는 자리에서 성령이 와서 통과했다는 말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낙타를 죽였다는 결론밖에 안나요. 죽여 버린 거예요. 죽을 때 착한 사람을 죽여 버리면 주의 일에 실패에요. 죽는 이유가 있어요. 나쁘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죽을 만해서 죽인 거예요. 진작에 망해야 되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차피 늙어 죽어가는 입장에서는 왜 망하느냐 하는 것을 미련두지 말고 나중에 또 죽어버리면 더 이상 나쁜 짓 못하니까 살아있는 내내 이 짓해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짓이 어떤 짓이냐 하면 바로 말로 때우는 짓을 한 거예요. 야고보서2장14절 이 말씀이.
야고보서2장14절의 말씀이 절대로 우리를 비켜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도 나를 지적하는 참 좋은 말씀이에요. 딱 우리에요. 10년간 고아원에서 남 봉사했다. 그 다음날 또 이게 우리에요. 20년간 어려운 사람 돌봤다. 그 다음날 보면 또 내 모습이 어떠냐, 또 말로 때워요. 옛날에 많이 해줬잖아. 옛날에. 옛날에 많이 해줬잖아! 더는 못해준다. 이리 되지요. 더는 못해주지요.
궁중족발 혹시 아십니까? 궁중족발 이야기. 9년동안 그 자리에서 궁중족발을 했어요. 어떤 부부가. 건물 빌려서 세를 얼마줬냐 하면 삼백만원 내고 있었습니다. 건물주가 이제 바뀌었어요. 가게가 요지 건물이거든요. 몫이 좋은 가게에요. 자기가 뭐 하고 싶어요. 그런데 궁중족발이 9년을 하다보니까 유명 맛 집이 되었어요. 손님들이 많고 몫도 좋고 주차하기도 좋아가지고 주인이 탐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탐이 나겠지요. 집세를 약간 올렸어요. 약간. 삼백만원에서 천이백만원으로 올렸어요. 약간 올렸습니다. 궁중족발 주인이 부부가 돌아버렸어요. 재판 걸었습니다. 5년 이상 됐기 때문에 임차대보호가 안돼요. 그리고 계약을 새로 하면 돼요. 그 주인은 간단히 생각하면 돼요. 전 주인에게 삼백만원 줬잖아요. 천이백만원 주면 돼요. 주든지 나가던지 하면 돼요. 일이 깔끔하게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주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돈으로 보이는 천이백만원 생각을 안하고 “니, 나 억지로 무조건 내쫓으려고 이 만큼 4배나 오렸지? 이 동네 천이백만원 올린 데가 어디 있느냐?”이리 나온 겁니다. 그런 소리는 그 궁중족발 그 사람의 욕심이에요. 9년동안 했던 은혜를 다 까먹은 겁니다. 시민단체에서 데모했어요. 9년 족발편을 들었습니다. 집달리 와가지고 졌기 때문에 가게 내놔야 됩니다. 시민단체 믿고 버틴 거예요. 세상이 한국이 이게 지옥인지 뭐야 이게? 하고 버텼습니다. 주인이 집달리를 해가지고 지게차가지고 밀었어요. 벽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문에도 대문짝으로 났어요. 가진 자의 건물주의 횡포. 이리 또 나왔어요.
집주인이 점점 약이 올랐습니다. 집주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족발의 값을 누가 정합니까? 주인이 정하지요. 그러면 이 집의 주인이 누굽니까? 나지요. 그러면 가게 세는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지요. 뭐가 나쁜데요? 뭐가 나쁜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궁중족발 천번 백번 나빠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자기 받은 은혜 다 모르고 시민단체해가지고 버티려는 겁니다. 주인이 천이백이던지 일억이천 달라 해도 주든지 나가던지 해야 돼요.
한국사회가 이렇게 각박해가지고...., 무슨 이 세상에서 무슨 인정을 원합니까?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이 세상에서 무슨. 초코파이입니까? 인정 원하게. 이 세상이 인정으로 살겠다 하면요,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닌 게 돼버려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그동안 그럼 목사님 우리는 편하게 삽니까? 좋은 불신자 만나서 편하게 사신 거예요. 지금. 주의 은혜인줄 알아야지요. 좀 잘해주면 그 은혜 다 잊어버리고 그만큼 대우 받을 만해서 받는다 하는데, 궁중족발 그 사람이 뭐를 놓쳤는가, 자기가 망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놓쳐버린 거예요. 망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내가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그 폭만큼이나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사람이에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마음을 낮추지 않는데 무슨 은혜와 자비를 알겠어요.
내가 어려운 사람을 헐벗었을 때 그냥 있지 않고 도와줬고, 배고플 때 도와줬으니까 내 자식이 잘되고 내가 이렇게 편하구나! 지금 이따위 소리를 하는 것은 지금 행함의 방향성이 완전히 지옥으로 엉터리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믿음 아닙니다. 그건 불신앙이지요.
그 다음에 19절 봅시다. 지금까지 쉬운 거고 어려운거 해봅시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감당이 되니까 어려운 거 합니다. 자, 어렵게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믿음이 원천이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아들인데, 하늘나라 계셨다 말이죠. 그냥 하늘나라 계시면 되지요. 왜 이 땅에 오십니까? 이 땅에 왜 와요? 이 땅이 지옥인데.
이미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잖아요. 그럼 추방했다 하면 추방한 동시에 그 땅 무슨 땅이 되느냐 하면 저주가 확산돼요. 뭐가 어려운가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확산되는 원리가 이렇게 같이 연결되게 되어있어요. 저주 있는 곳에 인간이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가 유발되는 어떤 장소든 저주가 유발되게 되어있어요.
전에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지중해 모습을 보면 파란 지중해에 하얀 성들의 건축물이 아름답지요. 포카리스웨트 아닙니까. 따다다다다~~ 그 노래 나오는 거. 달려가면서 나오지요. 참 아름답지요. 이 아름다운 곳에 내가 아름다우니까 구경가보잖아요. 지중해 버려났습니다. 왜? 내가 끼어들어가서. 풍경 다 버려났어요. 특히 여기 술꾼들 들어와 가지고 지중해 본다고 해서 술 먹고 개판치고 완전히 좋은 지중해에 내가 끼어들어서 버려놓는 거예요. 왜 풍경에서 본인을 뺍니까?
하나님께서 아담 보내면서 저주도 함께 유발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할 때에 원칙대로 해요. 죄가 있는 곳에 저주 있고, 저주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안에 분명히 수상한 독소들이 들어있다. 암세포 들어있다.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방귀 냄새나는데 아무도 안 꿨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분명히 뀐 사람이 있어요. 이 세상이 저주스럽다. 집사님 때문에 저주 받아요? 이 세상이. 집사님 때문에 날씨 더워요? 다함께. 애브리 바디. 다함께 전부 다 원인제공자가 되는 겁니다.
<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란 영화가 있거든요. 소설로도 나오고.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고 거기에 탑승한 전체가 범인이에요. 이 세상은 새끼가 새끼치고 새끼가 새끼쳐가지고 전부 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유발자를 계속 양산했던 겁니다. 아파트 저녁 때 되면 촘촘히 불을 켜잖아요. 단지 아파트 보면 전부 다 하하 웃고 해요. TV보고 웃고 있지만, 하여튼 웃고 있다 말이죠.
제가 서울 올라올 때 그 집들이 많은데 내 집이 하나도 없어요. 미치겠어요. 남들은 그렇게 행복한데 꼭 성냥팔이 소녀 느낌 있잖아요. 자기는 추운데 한데 가있고 저쪽에서는 따뜻한 벽난로가에 케이크 자르고 있고 성탄절 노래 부르고 있고. 내가 성냥팔이 소녀 보면서 창문열고 좀 도와주지.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커서는 그 집 말고 같은 거지 동네 같이 살면 행복할 건데 괜히 그런데 와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가요. 왜 거기 갔느냐 말이죠. 성냥 팔러 갔지만.
이미 유발된 요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담에서 아담으로 건너오는 거예요. 같이 망하는데. 망했다는 기준점이 없어요. 분명히 세상사는 것은 빡빡한데 왜 빡빡한지, 언제까지 빡빡한지, 언제까지 힘들게 해야 되는지, 사는 게 언제까지 이렇게 공포스러워야 하는지. 글쎄 여자 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남자 분들이 50대되게 되면 아~ 진짜 이건 사는 게 불안해요. 사는 게. 자영업자 10명중에서 1년 내에 망하는 사람이 8명이 문을 닫아요. 1년 내에. 3년 내에는 다 망하고. 평균 들어갈 때 자본금이 1억6천에서 8천봅니다. 월세 얼마냐,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백만원 번다고요. 자영업을 하고 난 뒤에는 백만원짜리도 좋으니까 제발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와서 해요. 나와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평소에 뭘 하면서도 공포스러워요. 직장생활 할 때는 6시 되면 퇴근이잖아요. 개인 사업하면 밤12시가 퇴근이에요. 출근시간이 배가 늘어났어요. 지난 대구강의 할 때 교재에 보면 이 내용이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경쟁체제잖아요. 저주인데 덜 저주받기 위해서 내가 받을 저주를 남한테 인수인계해버립니다. 조저버리는 거예요. 남이 죽어야 누가 산다? 내가 산다. 아담을 죽여야 아담 내가 살아요. 이건 잘 살아도 공포스러워요.
내가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봉투 던졌다. 일반인이 그랬다면 이건 입건도 안 됩니다. 이건 사건 처리도 안돼요. 돈1억 가지고 매수할 필요도 없어요. 미안합니데이,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이게 잘살기 때문에 한진그룹이기 때문에 구속판정이 난리 나는 거예요. 굉장히 불공평해요. 이 세상은. 지가 하면 죄가 아니고 남이 하면 나쁜 놈이 되고. 이 잘사는 것들아. 판사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이건 문제거리도 안 되는 거예요.
아담에서 아담으로 나가는 겁니다. 뭐가 없느냐, 기준이 없어요. 세상사는 기준이 없으니까 만들어야 돼요. 누가 만드는가, 내 잘났다가 기준 되는 거예요. 내 잘났다가 기준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은 이겁니다. 만남. 하늘나라에 그냥 계시는 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죄인을 만나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혼자 도 닦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혼자 도 닦으면 안 됩니다. 기도원에 혼자 도 닦지 마세요. 주님께서 반드시 만나게 해줘요. 나보다 잘사는 친척을 만난다. 갑자기 어느 날 와가지고 “니, 나 모르겠나?” “모르겠는데요.” “나, 니 할머니다.” 할머니가 “내가 자식이 없었는데 니를 10년동안 찾았는데 이제 찾아서 반갑다.” “그런데 할머니 저에게 나타났습니까? 뒤늦게.” “내가 니한테 줄려고 내 양자로 삼고 이거 50억밖에 안되지만, 니 나중에 나 죽고 난 뒤에 니해라.” 이런 사람 만나면 괜찮아요. 만나도.
오늘 본문에 보면 헐벗고 배고픈 사람을 만나요. 이건 내가 선택했다? 내가 선택 안했다? 그냥 출현된 거예요. 출현. 그냥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본성이 뭡니까? 안 본 걸로 치지요. 저쪽이 죽어야 내가 살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사람만 나는 이용가치가 있어서 원하는 거예요. 실력이 없으면 나를 뜯어먹을 인간이에요. 내가 어디 뭐 LA갈비입니까? 통닭입니까? 6촌 8촌이 와가지고 좀 맞벌이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뜯어먹으려고 와요.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많이 벌면 뜯는 사람도 많다.
아파트 좀 산다하면 와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말하는 뽐새가 수상해. “아이고, 아이가 넷인데, 공납금을 못내 가지고.”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느냐 말이에요. 나한테. 그것도 오랜만에 와가지고. 잘풀리는 집이 얼마나 한다고 그거 사와가지고 화장지 좀 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구구절절 아가 사고 쳐서 요번에 합의보라 하는데 합의 보려면..., 그것도 촌의 사촌의 8촌 생전에 보지도 않고 이판인데, 잘산다는 소문을 듣고 와가지고 맞벌이하게 되면 더 많이 와요. 또. 꿀 있는데 날 파리 들끓듯이 맞벌이하면 꼭 내민다니까요. 좀 살자는 이런 식으로. 만남이에요. 우리의 반응은? 정신 차리자!입니다.
이럴 때 냉정해야 돼요. 왜냐하면 한 번 물리면 그쪽의 밥이 돼요.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 잘 알잖아요. 그 알기 위해서 이만한 나이 먹었잖아요. 인간이란 진심은 없고 상대방을 이용가치로 보는 인간들밖에 없다는 것을 나이 50쯤 먹어야 정신 차리지요. 명분이란 것은 그건 구실에 불과합니다. 내 이익이 없는 명분은 명분도 아니에요. 철두철미하게 우리는 그것 때문에 젊을 때 얼마나 속아 넘어갔고 보증 섰다가 다 날리고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습니까?
특히 주위에 보면 교회 보증. 교회에 돈을 얼마나 갖다 바쳤어요. 목사 말 듣고. 두 번 다시 안하겠지요. 만남이다 말이죠. 만남. 이단 목사가 되던, 3단 목사가 되던 만남이에요. 만남. 뭐 배우라고? 너 믿음 없지? 니 믿음 없는 거야. 니는 니밖에 몰라. 아담이 아담에게. 새로운 아담 없어요. 내가 주인공이에요. 아담이 아담에게. 그거 지적하면서 집사님이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한테 믿음 없는 거예요.
믿음 있다고 했지만, 막상 난데없는 엉뚱한 인간이 쳐들어오면 졸지에 믿음 없어요. 아재요, 평양냉면 사줄테니 그냥 가세요. 우리도 지금 이거 한다고 대출 많이 냈는데 돈 못 갚습니다. 보기에는 번듯하게 보이지만, 이거 3분의 2가 대출입니다. 안됩니다. 가세요. 허풍이지만, 팍 쳐야지 우이 하겠어요? 안 그러면 무는데 어이 하겠어요. 물어요. 무는 정도가 아니고 옆집으로 이사 갈 수도 있어요. 문제는.
내 조카인데 서울에 취직해서 집 얻을 때까지만 옆에 있게 해 달라. 집을 언제 얻는데? 서울 집이 얼마나 비싼데. 언제까지 있게 합니까. 와가지고 형수님 해가지고 지 방 주니까 또 친구들 몰고 오지. 이건 골칫거리다. 이게. 아~ 참, 우리 살아온 것이 그거 무서워서 오늘도 맘 편하게 잠 못 잡니다. 벌벌 떱니다. 언제 그런 난데없는 만남의 사건이 있을지. 그럼 이것을 이 믿음 없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10분 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