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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80316b약2장5절(임플란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서 자아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자아의식과 말씀이 만났을 때에 왜 우리가 말씀보고 그냥 실천에 옮기면 되거든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주셨다. 지키라고 준 거다. 그러면 지키라고 준 거면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 공식이 너무 간단하지요. 골치 아픈 거 하나도 없다 말이지요. 중간에 십자가가 끼어 들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 주셨다. 십자가 믿으면 되잖아요. 부활 주셨다. 부활 믿으면 되고, 재림 믿으면 되고. 뭐든지 싹싹 빨아들이면 되는데.
문제는 빨아들이는 그 본부, 그 바탕 자아의식에 대해서 왜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문제 삼아야 되느냐 하면, 자아의식이 변한다. 변한다를 다른 말로 합시다. 흐름으로 되어있어요. 인간은 자아가 하는 것이 수시로 바뀌어져요. 대표적인 것이 무슨 현상이냐 하면 치매현상. 60,70대까지 잘 믿었는데 잘 지키고 난 뒤에는 치매현상이 걸렸을 때에 목사님이 묻습니다. 사도신경 해보세요. 예수님 아십니까? 찬송가 불러보세요. 하나도 못해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예수님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상상이 안 되지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장기기억만 기억해요. 치매는 장기기억. 단기기억은 안돼요. 장기기억, 돌아가신 남편 생각한다든지 맨날 그런 것만 생각하거든요. 그건 바로 시냅스라 하는 두뇌세포와 두뇌세포의 연결고리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원활하게 안 나와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정보 전달이 안 돼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야고보서2장5절을 다시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라고 했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행함의 바탕에서 나옵니다. 그냥 믿음을 주지는 않아요. 실컷 막 살게 만들어요. 실컷 막 살게 해놓고 “아니지. 그치? 아니잖아. 그거.” “그런데 제가 했잖아요. 제가. 제가 했다니까요. 남이 아니고 내가 기도했어요. 내가. 그러니 나를 구원해주세요.” 하면 “그래, 니가 문제다.” 이 말이지요. 너가 문제.
이 자의식을 지금부터 말씀드릴건데요. 상당히 난해해요. 왜 난해하냐 하면 난해한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4장 같은 데 보면 이스라엘을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했어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이스라엘은 남자는 40만 명입니다. 단 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뭘로 봅니까? 이걸 하나로 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집단주체라고 아예 용어상 그렇게 제가 붙일 수가 있는데. 집단주체에요. 집단주체.
하나로 본다고요. 하나로 보면 이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여러 사람이 있으면 이게 하나가 되려면 개개인을 무시하고 개인, 개인 연결고리가 있을 게 아닙니까. 연결고리가 동일한 연결고리로 연결 질 때 이걸 하나로 붙여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로. 부부가 두 명이에요. 두 명인데, 하나로 보는 것은 연결고리가 하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창세기2장에 나오지요. 부부가 아담이 말하기를 저 여자하고 나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한 몸이라고 이야기했지요. 한 몸. 둘이 아무리 붙어봐야 한 몸이 안 됩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핑계대지요. 저 여자가 하면서 핑계대지요.
그러면 이게 뭐냐,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하나 됨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에베소서4장에 보면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인간을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은 놔두고 우리는 이기주의에요. 죽을 때까지 이기주의 됩시다. 되는데, 뭘 보이느냐 하면 요 중간에 그걸 관계를 이어가요.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뭐냐 하면 이걸 의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지금 그 의가 사람들은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개인주의로 시작하니까 의를 소유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행위로 내가 챙겼다는 거예요. 의를 챙겼으니까 이제부터는 의의 종이니까 나에게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죄가 나오지 말고 의만 나오게 해야 된다. 그걸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을 주셨고 전에는 성령 없을 때는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을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들이여, 열심히 충성, 봉사해서 성화의 삶을 삽시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나도 거룩하니 거룩하게 삽시다. 논조가 이런 논조에요.
그러면 그렇게 거룩하겠다는 챙기겠다는 마지막 챙김에 끝은 어디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했던 짓을 똑같은 짓을 해요. 그런 주장을 한국교회가 하는 이유가 뭘 모르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신학을 몰라서 그래요. 그들이 신학을 알게 되면 요번에 내가 이스라엘을 가서 누굴 만났느냐 하면 랍비를 만났어요. 랍비가 강의하는데 뛰어 들어갔어요. 그 정말 주님의 은혜 같아요. 랍비의 강의를 3일을 앞두고 차마 예의상 녹음하기가 중간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녹음하기가 이건 무리한 거거든요. 또 영어가 안 되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수업 방해되기 때문에 그냥 들었어요. 랍비의 사상을 들었습니다. 아~ 귀한 걸 들었어요. 실제로 랍비가 어떤 수작을 하는지를 들었어요.
랍비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했어요. 누가 들어도 하자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하나님과 인간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관계를 딱 설정했어요. 하나님과 자기의 말씀. 뭐가 빠졌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하나님의 개입이 빠졌다고 하세요. 예수님은 허다한 상식적인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중간 카바 들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목적이 있고 목적은 말씀을 줘서 그들이 영광 돌려서 옛날에는 실패했지만, 아담은 실패했지만, 두 번 다시 이스라엘을 만듬으로서 두 번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본 겁니다. 이건 제 이야기 아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야기한 이야기니까 제가 그대로 적겠습니다. 제가 지어냈다고 하지 마세요. 그대로 적겠습니다. 유대인의 3대 원칙이 있어요. 가서 알았어요. 가서 들어서 알았어요. 유대교의 제3법칙이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다.’ 이게 유대교의 3대 원칙입니다.
이건 유대인을 강의하는 터널에서 강의하는 그들에게서 나왔어요. 랍비 이야기에서 나온 게 아니고 종합해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이야기를 듣고 같이 동승했던 그 목사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 이 사상이 틀렸다. 틀렸고 성경대로 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세 번째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다. 이게 맞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개념. 유대인에서 나온 거예요. 유대인에서. 여기에 있는 인간 개념. 유대인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이미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이 인간의 자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유대인을 통해서 다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성경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여기에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사이에 중간에 인트셉트 끼어들게 하신 분이 계세요.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걸 빼버렸어요. 이걸 인간 예수로 본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설정된 구조에 그냥 예수님께 숟가락 하나로 얹은 것으로 봐요. 재벌이 있는데 재벌2세 하나 더 안 것으로 본 겁니다. 이 구조는 변화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유대교의 구조하고 똑같은 구조가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택함 받았으니까.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택함을 받았으니까 의미가 있다. 이리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사명감을 갖고 있어요. 존재 자체가 사명이라니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렇게 유대인들이 고난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들은 그것을 이사야53장의 완성으로 봅니다. 이사야53장 다 아시지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유대인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이방민족이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 자손의 언약의 완성으로 봐요.
요한복음에서는 모든 성경을 누구를 증거 한다? 예수님을 증거 하잖아요. 요한복음5장39절.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가 독진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과 세상의 비밀에 대해서 천기누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난다는 것은 우리 유대인들만 알고 있으니까 성경은 유대인을 경유해야 비로소 그들은 증거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 유대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닌 엉터리이지요.” 하지만, 지금 모든 개신교가 이 생각을 갖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있고,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 만들었고, 나는 누굴 위해서 있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그런데 아~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아~ 우리가 영광 돌리는데 뭔가 모자라는 게 있었던 기라. 모자라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을 제대로 못 지키니까 예수님께서 모델로 삼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델로 삼는 종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천주교라 합니다. 천주교하고 개신교하고 달라요. 천주교는 예수님이 모델이에요. 천주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 하는 이유가 그런 취지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나, 하나님께 영광 어떻게 돌리지? 어? 예수님. 나를 본 받으라. 예수님처럼 살면 되는구나! 자, 그렇게 될 때, 자기의 하자가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자기의 하자는 보이지 않아요. 모자람이 보이지요. 바탕은 괜찮은데 부족해요. 부족한 것을 누구를 모델삼아서 예수님을 모델삼아서 마저 채우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된다는 것이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천주교의 교리에요. 그러면 그게 천주교의 교리라면 개신교의 교리는 뭡니까? 여러분, 묻고 싶지요. 개신교의 교리는 루터의 교리하고 캘빈 교리가 달라요. 개신교의 처음 출발할 때 루터, 캘빈 두 사람이 있었거든요. 투톱인데. 루터가 16년 앞섰어요. 루터의 교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천주교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잖아요. 루터의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교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우리도 제사장이고 우리도 직접 성령 오게 되면 신자가 된다. 이게 루터입니다. 루터교리의 한계가 뭐냐 하면 구원론이라는 거예요. 교회로 구원받지 못하고 직접 성령 받으면 구원된다. 자, 목적하는 바가 뭐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되느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지요. 그러면 캘빈은 뭐냐, 루터의 사상을 일부 가져와요. 후배니까. 배웠으니까. 가지고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렇게 구원 받은 사람끼리 모인 것이 옳은 교회가 되어버려요. 캘빈은 뭐냐 하면 오늘 중요한 거 많이 합니다. 결론은 교회론입니다. 똑같아요. 교회 없으면 구원 없는 게 이 캘빈주의에요. 한국 교회는 캘빈주의입니다. 루터주의 아니에요. 캘빈주의에요.
성만찬식을 목사 말고 사찰집사가 하면 안돼요. 목사가 해야 돼요. 루터는 만인 목사설이에요. 캘빈은 아니에요. 목사는 따로 있는 거예요. 문제는 어느 것이 옳으냐인데, 어느 것이 옳으냐는요, 어느 것이 숫자가 많으냐에 결정되는 겁니다. 숫자 많은 데가 많은 사람이 숫자 많은 데가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많이 모였을 것이 아니냐, 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진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보낸 것이 진리에 가깝고, 교인이 두세 명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안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성경에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제일 적다고 했어요. 그리고 누가복음 보면 적은자여, 무서워 말라. 하늘나라는 너희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7장에 유명한 게 있지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작은 숫자가 생명의 길이라고 우겼던 교회가 숫자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자기는 생명의 길이라고 우기지요. 숫자 적은 것으로 구원 받는 거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구원 자체가 문제가 돼요. 구원론 자체가.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창세기3장을 보자 이 말이죠. 생명나무 차단시켜 났지요. 그것도 지켰습니다. 천사로. 화염검으로 지켰지요.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무슨 뜻입니까? 생명나무 쪽에서 가면 가고 안 오면 못 오는 거지. 못 온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쳐다보는 것도 니 주제에 안 맞다는 거예요. 쳐다보는 것조차도. 나오고 나서.
그런데 마귀가 아담을 속였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신이에요. 신 같으면 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걸 구약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거죠. 우상숭배. 이제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문제고. 여러분들이 이제는 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그 유대인 랍비가 말하기를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또 하필 희한하게 우리는 정치를 몰라요. 유대인 아닌 걸 알잖아요. 동양 사람이니까. 세 사람 들어갔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독교는 굉장히 과격하다 했어요. 굉장히 과격한 것을 믿는다.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연속으로 되어야 하는데 끊어진 것을 믿어버리면 연속이 안 되잖아.” 하는 걱정스럽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단계, 단계 안 끊어져야 하는데 뚝 끊어진 것을 어떻게 인간 능력으로 띄어 넘을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기독교는 과격하다. 나쁘게 말해서 논리가 중간에 일관성이 없다. 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유대교는 복음을 몰라서 그래요. 유대 랍비가. 일관성은 사다리를 우리 쪽에서 만드는 일관성은 하나님께서는 차버립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세기28장에서는 야곱에게 외치는 일관성은 우리 일관성이 아니고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일관성이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그걸 아까 했던 관계라고 하는 거예요. 관계. 그게 하나님의 의에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의를 만드는 게 아니고 지상에 와서 아버지하고 그 일을 만들어버려요. 지상에 와야 지상의 같은 죄인들 속에 죄인으로 취급받으면서 의가 되어야 그 의는 죄와 죽음과 심판과 저주와 율법을 이길 수 있는 효과 있는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끼리 하나님이 노는 의가 아니라 지상에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 지옥가도 효과 발휘하는 의. 그 의는 아담은 의인이 무제상태거든요. 무제상태는 언제든지 다시 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에요.
그런데 의가 되어버리면 예수임이 완성한 의이기 때문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의를 취소할 임플란트 오늘 제목이지요. 임플란트를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우리에게. 그게 한탄스러워 해야 될까요? 감사해야 될까요? 감사해야 돼요. 로마서 8장 이런데 보면 어떤 권세자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환란, 곤고, 핍박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뭐가 나오지요? 광야기 때문에. 원망 나오지요.
쉽게 말해서 어떤 원망을 해도 니가 원망한다 할지라도 너을 취소하거나 용서에서 의에서 탈락시키거나 취소하지 않겠다. 왜? 그리스도가 심어져, 씌워져 있기 때문에. 나는 너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보고 하거든요. 그래서 로마서8장 앞부분에 보면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인데. 자, 이렇습니다. 진도 나가겠습니다.
제가 3가지 항구를 들을 테니까 셋 중에 여러분이 적당한 거 골라보세요. 여러분이 맞는 거 골라보세요. 첫째 1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둘째 2번, 나는 이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세 번째 3번, 나는 죽고 싶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이것은 도피주의에요. 기도주의 기도원에 사는 사람들, 세상 더러워 못살겠다. 기사(?)에 들어가자.
세상이 믿음이 좋아도 안 알아주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조차도 안 알아주는데 “그래, 너가 안 알아주는 내가 나를 차버리지.” 하고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거. 이게 정신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배짱 편합니다. 신문 끊어버리고 TV없애버리고 애들 학교에 안 보내고, 애들 학교에 안 보내면 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오는 게 있어요. 또. 가정에서 가르치는 게 또 있어요. 희한하게 정보들 많아요. 거기서 검정고시해가지고 바로 빠른 시간 내에 대학입학 자격 따는 거 있거든요. TV에서 영재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가끔 나와요. 학교에서는 도저히 애를 우리의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돼가지고 집에서 가르쳐가지고 자격증 몇 개 따고 초등학교 때 영어 도사고 그런 게 있어요.
그런 분위기로 넘어가는 그런 교단들이 또 있어요. 세상은 썩었다. 쿰란공동체 비슷하게 해가지고. 세상의 교회는 다 썩었다. 목사들은 전부 다 전통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직접 성령 받아서 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제도, 교회를 버리고 우리끼리 공동체 생활하는 것이 옳다. 1번 쪽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 외에는 과학이고 뭐고 모르겠다. 하는 쪽이에요.
그 다음에 2번 이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이건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어떤 거대한 목표를 해가지고 레이스 경쟁을 시키는 거예요. 교회에서. 헌신 경쟁, 낮아진 경쟁, 내려놓기 또 내려놓기 지하2층인데 또 더 내려놔. 지하3층, 6층까지 내려놔요. 내려놓기, 내려놓기, 책의 제목이 내려놓기, 또 내려놓기. 그 다음 편에 또 내려놓기. 내려놓을 게 왜 그리 많은지 몰라.
이거 해서 거룩. 전에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문둥병을 물을 갖다 줬는데 수녀가 그 물을 마셨다고. 누가 더 센가 보자. 발 씻으라고 문둥병자에게 줬는데 그 물을 수녀가 먹었으니까 갖다 준 신부가 믿음이 좋은 게 아니고 수녀가 더 세다는 거. 그걸 계속 고안해 내요. 둘 다 비슷한데 이쪽은 뭔가 초보와 노련미가 있어요. 오래한 숙달된 선수들이 있고 초보자들은 초보자 대우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그게 단계가 죽 있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 때에 7단계 있었어요. 제일 윗 단계가 사두개인 단계 그 다음 단계가 바리새인단계해서 제일 밑에 단계는 백정들, 쌍놈들, 천한 것들, 세리와 창기가 제일 밑에 단계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고 세례요한은 제일 윗 단계에 있는 사람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니들이 구원받아? 이 돌멩이가 구원받겠다. 완전히 억제시켜놨지요. 이 둘 중에 하나 고르라면 우리의 상식 같으면 착해야 영광 돌리지. 하는 유대인처럼 그렇게 되고,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도 둘 다 뭐가 살아있어요? 여기는 둘 다 자아가 있어요.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이런 식이에요. 자아가 있으면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론 위주에요. 구원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길에서 막 묻지요. 구원론 위주로 말합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구원론 아니에요. 뭐냐 하면 예수님 증거 하는 겁니다. 구원은 관심이 없어요. 구원론에 관심 있다는 것은 자기가 안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 위주로 삽시다.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왜 상기 시키느냐 하면, 3번째 정답 나오면 이 자아가지고 3번 되려고 하기 때문에 3번은 이 자아를 가지고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자아는 1번 아니면, 2번입니다.
낮추고 또 낮추던지 안 그러면 지 맘대로 살려고 하는 “그래, 나 개판이다. 구원받았다.” 이리 하던지 간에 하여튼 자아의 어떤 즐거움, 자아의 어떤 쾌락, 자아의 자유에 대한 만끽함, 그게 즐거워서 이렇게 나오는데, 사도행전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쟁론한 게 있어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이 주의입니다. 일종의 이게 뭐냐 하면 불교에요.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이런 논쟁을 했거든요. 내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거예요.
그런데 3번은 건방지게 내가 왜 나를 처리합니까? 만드신 분이 주님인데. 밥을 먹었다. 주께서 주신 거예요. 숨을 쉬었다. 주께서 주신 겁니다. 염색 안하는 것도 주께서 주신 거거든요. 밀가루에다가 전을 지질 때 칙~ 하잖아요. 안에 내용은 안 보이고 계란 노란 거로 한다고 완전히 주님 거품으로 주님 은혜로 범벅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따로 끄집어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죄인이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 사이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의로운 관계를 집어넣었지요. 의로 성립되려면 우리는 계속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죄인 되어야 돼요. 죄가 뿜어져 나와야 돼요. 썩어빠질 육신이지만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주님께서는. 다 필요해요. 썩어빠질 육신이지만. 자살하지 마세요. 다 필요해서 계속 가게 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중풍병자를 가지고 자기는 병 낫고 온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뭐라고 이용했습니까? 그 소원대로 안 해줘요. 뭐 합니까? 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처음부터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으려고 생각하고 온 게 아니고 병이나 나으려고 왔는데 우리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1번, 2번이에요. 이 자아가 어떤 식이 평범할 것인가를 왔는데 주께서는 우리에게 의인되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내가 알아서 의인되고 싶었는데 주님께서는 아예 의인되게 했다니까요. 멀쓱하지요. 이건 예상 밖의 보너스인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대신 니는 철저히 죄인 되어야 돼. 알겠지?” 그거야 우리는 주특기가 그거니까. 우리는 고민 안 해도 돼요. 죄 짓는 거는. 생존만 참고. 사는 게 남는 거고. 남한테 요만큼 빼앗기기 싫고. 이거는 평생을 다해도 우리는 그 솜씨에 대해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1번, 2번 이 자의식이 예수님한테는 자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럼 자의식이 없으면 그럼 밥 먹는 건 누가 했느냐, 자의식, 자아가 아니고 주체입니다. 자아, 주체가 한 말인데 번역하면 둘 다 나에요. 나. 영어로 하면 셀프고 서브젝트에요. 둘 다 나라고요. 그럼 우리는 다중인격자인가? 우리는 가시나무에요? 내안에 내가 너무 많고 그런 거예요? 갈라디아서2장20절,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 살아가는데 우리보고 그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매일같이 그렇게 용도가 우리가 그런 용도로 되게 하는 거예요. 용도가.
그러면 용도 되기 위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육이 나와서 육이 바로 나의 실수요, 실패인 것을 본인이 절감할 때,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입니다. 범사에 감사한 거예요. 물을 마시는데 또 기도하고 감사해야 될 텐데 그냥 마셔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구원해주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소한 일에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죠.
주님은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예수님만 증거 돼요. 이쪽은 누구 증거 되느냐 하면 나하고 대질돼요. 항상 우리 인생이 스트레스 받는 것은 대질하는 사회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비교 당하고 대질하기를 요청하는 겁니다. 비교하고 대질 요청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들은 미투 당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미투 당하지는 않아요. 얼마나 못났으면. 얼마나 돈도 없고 그렇고, 그렇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니 있었나 할 정도로 모르고, 좀 떠야 미투 하던지 유투를 하던지 투 넥스트를 하던지 투 넥스트는 다음에는 니다. 하는 그런 운동이 또 있어요.
평생을 남자라고 살았는데 돈이 있나, 유명해지려고 했는데 유명해지지도 않고 승진도 안 되고 미투 할 것도 없어. 여자도 건드려야 건드릴 맛이 나지 건드릴 가락지도 없고. 모든 게 대질이 되고 비교되고 올라가면 흔들어서 지 올라가고. 지 올라가면 또 흔들고. 또 흔들어버리고.
그게 뭐냐, 대질되고 비교될 때 그것은 비교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자아를 더욱 더 강화시키고, 여기는 억지와 억지니까 암에 걸리고, 이것 때문에 또 암에 걸렸다는 것은 나오면 안 되지만, 하여튼 스트레스 받고 암 걸리고, 개도요, 개도 스트레스 받으면 암 걸린다는 것을 드라마보고 처음 알았어요. <키스 할까요>보니까 감우성의 개가 암 걸려서 죽는 게 나오데요. 개도 암 걸리는구나. 심지어 개도 우울증 걸리는구나. 인간 곁에 있는 개가 잘못이에요. 인간 곁에 괜히 붙어있어 가지고 오염 돼서 그런 거예요. 원래 개는 오뉴월 개팔자가 진짜 개 팔자에요.
그렇다면 왜 이걸 제가 3가지를 비교하느냐 하면 이걸 둘로 줄이면 내 중심에서 세상이 나오느냐, 아니면 예수님 중심에서 세상이 나오느냐, 이걸 분간해야 돼요. 예수님 중심에서 예수님만 단독자거든요. 많이 나올 때 이게 다양이 되고 파생이 되고 다수가 돼요. 그런데 다수끼리 비교하면 안돼요. 똑같은 인간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잘났던 못났던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의를 줘버립니다.
의를 줘버리면 졸지에 이 사람은 의사고, 이 사람은 판사인데, 더 잘났다고 하는데 갑자기 둘 다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둘 다 갑자기 죄인 되기 위해서 판사 되었고, 죄인 되기 위해서 의사된 거예요. 그래서 의사되어서 못난 이야기하고 판사 되어서 못난 이야기해요. 둘 다 못난 이야기밖에 안 나오겠지만.
그럴 때 그들의 만남에서 누구와 함께 있어요? 두 세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마태복음19장, 20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만약에 이렇게 되지 않고 내 중심으로 되게 되면 내 교회 잘되는 것이 하늘나라 확장이고 주께 영광이라는 그러한 사기에 홈빡 넘어가는 거예요.
저도 우리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습니다만, 우리교회가 교인들이 우리교회를 쳐다본다면 그건 법당에 온 거예요. 절에 온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약간의 불편을 했어요. “목사님, 이스라엘 가기 전까지는 성지순례 그렇게 욕하다가 갔다 오고 난 뒤에는 왜 성지라는 말을 쓰면서 옹호를 합니까?” 하는데 그 분은 뭐냐 하면 무시해야 되는데 왜 의미를 둡니까, 이런 뜻이에요.
제가 성지라는 말을 쓰고 거기에 대한 유적지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우리는 있잖아요. 우리 자아는 있잖아요. 그러니까 의미 없는 것을 의미부여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참에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께서는 내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의 뜻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데 그건 이론이 되고 실제로 이 지상에서는 그걸 누가 이렇게 걸림돌 역할을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주의 뜻대로 되되 저 사람 말고 나한테는 이익이 되는 식으로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는 생각이 우리 이 욕망을 우리가 감당이 안돼요. 절제가 안 된다니까요. 이게 마음으로 될 것 같으면요, 우리가 마음으로 다 되지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몸이에요. 주님이 복음 전하라고 주신 몸인데 이걸 왜 부정합니까? 죄 지어야지요. 맞잖아요. 내가 내 자의식 같으면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주님이 주인공이라면 죄 지으라고 있는 몸인데 죄를 지어야지요. 그런데 죄 지을 때 일부러 지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이 계속 오게 되면 먹는 거 입는 것도 감사하지 못한 것도 죄가 돼요. 돈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돼요. 성경을 자꾸 보도록 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만하면 남들과 대질해서 낫다고 했는데 마침 성경을 보게 되면 아~ 주님 앞에 대질할 때에 우리가 남 쳐다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2장5절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오류를 찾으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다시 한 번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했는데 그 뒤에다 내가 일부러 하나 넣을게요. 이 말이 기분 좋으냐, 이 말이 기분 좋을까요?
짜증나지요. 한 마디로. 좋은 말도 한 두 번이고. 다 아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런 생각이 들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그리고 이 말씀 보면서 이렇게 합니다. “그래, 우리보고 믿음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있는 돈 다 날리고 부도나게 해서 가난하게 만들었습니까? 주여!” 이런 원망 같은 게 나오지요. 이거 없어도 믿을 건데, 괜히 가난하게 믿었지 않습니까?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오류가 우리에게 나온다는 것을 니가 우리 자신을 인정해서 그 죄를 자아 속에다가 결합을 해서 이 죄인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좀 더 진도를 나아가볼게요. 그럼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된다고 했는데, 아까 한 거 다시 해볼게요. 이스라엘은 아들입니다. 요건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되지요. 그럼 인간들 인간들 사이에 주님의 의가 들어간다고 제가 신약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구약적으로 뭐라고 하냐, 여기에 언약이 들어가요. 언약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워요. 언약이 들어가면 이 두 사람이 언약을 외우면 되잖아요. 십계명 외우면 되잖아요. 외운다고 언약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십계명을 위반해 줘야 돼요. 이게 어려워요. 언약의 완성은 십계명이 아니고 십계명+제사법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법에서 뭐가 나와요? 피가 나와요.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양푼에 피를 담아서 율법 전하고 피를 다 뿌립니다.
율법 없이 피를 뿌리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피가 하나의 주술적인 미신이 돼버려요. 십자가 피 믿고 천당 가는 게 돼요. 아니에요. 율법주고 피를 뿌립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정보를 획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이 피가 요청하는, 피가 요구하는, 죄인으로서 부여받은 요청받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지만, 고귀해요. 십자기 피만을 감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예수님 자랑이 아니고 세상자랑하기 바쁘지만,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피로 십자가의 그 귀한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생명나무 생명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이렇게 여기에 언약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직접 개입하면 되지 다른 사람은 왜 붙이는가, 그것은요, 인간은 혼자서 도 닦으면 자기를 몰라요. 자기 자신이 훌륭해 보이지요. 이렇게 마지막 때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잖아요. 모여서 생속 다 내놓으면 “아휴~ 말씀 때문에 가기는 가야 되는데, 최집사 때문에 꼬라지 보기 싫어서 내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보겠다.” 이런 경우 안 생기겠어요? 생깁니다.
그걸 사회적에서는 이걸 법적으로 부부라고 묶어놨기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그나마도 애가 생기면 남편은 뒷전이고 애한테 올인하지요. 남편은 돈이나 벌어가지고 와라. 내가 애한테 전부를 다 바치기 때문에 애 때문에 살아요. 애 결혼식 할 때 손잡고 갈 남자있고. 남자들은요, 여러분, 남자를 잘 몰라요. 지 기분 내는 게 삶의 목적이에요. 기분 내는 거. 그래서 남자들 약사, 남자들 의사, 남자들 변호사는 본업이 놀러가는 거예요. 남자들 교사. 지금 여자 교사는 자식 때문에 다니고, 남자는 지 놀러 다니기 위해서, 취미생활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약사는 항상 여자만 일해요. 남자는 골프 치러 가요. 남자는 노는 게 삐까 삐까 자기 과시하는 게 삶의 목적입니다. 지 과시하는 거. 지 잘난체하는 거요. 여자의 삶의 목적은 그 자슥 때문에 살아요. 자슥 때문에. 딴 거 다 건드려도 되는데 내 자식 건드리면 남편이고 부부고 없어요. 내 자식 건드리면 부모라도 용서가 안돼요. 그러면 그 자식한테 존경 받는가, 존경 안 받아요. 자식은 엄마를 이용하지요. 욕하던 말든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대상이 없으면 자기를 모르게 돼있어요. 내가 혼자서 백날 연구해도 몰라요.
상대방에게 내가 던지고 튕겨 나온 공을 주워 담을 때 그게 나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자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남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아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게 나에요. 그래서 인간은 확인차원에서 만나기 싫더라도 만날 수밖에 없고 만약에 확인할 게 없잖아요. 자살합니다. 우울증 걸려요.
부부가 서로 싸웠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렇게 나가서 죽으라고 욕하던 아내, 우울증 걸립니다. 좋으나 미우나 그저 바깥어른이 있는 게 낫다고.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남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서. 내가 사랑하는 만큼 저쪽에서 사랑해주길 기대하면서 상대방에게 밥도 해주고 설거지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다 해줘요.
자식한테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니가 나의 기쁨이기 때문에 니가 나의 소원대로 해주면 더는 소원 없다. 그걸 기대하면서 자식하주고 자식은 그걸 이용하고. 그걸 얍삽하게 이용하지요. 이 말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혼자라는 게 없어요. 그건 사탄이 거짓말 친 거예요. 인간은 집단 속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이 맞아요. 너희는 아들이에요. 인간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 속에서 내가 아우라, 분위기에 섞여서 그 중에 하나로서 대충 묻어가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왜? 그게 무화과나무고 자기를 가리는 주특기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의견이 달라도 공통점은 치마 입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가죽옷을 입혀줬는데 가죽옷은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의미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지, 구원의 의미는 없어요. 예수님의 의미는 반드시 우리를 뭐로 만든다? 죄인으로 만들지요. 니가 만든 치마 그 현장에다가 가죽옷을 입혀 놓음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너희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계속 하나님 쪽에서 확정 시켜 버리는 거예요.
뭐 가죽옷을 했는데 피가 흐르고. 그 피 이야기 안 나와요. 피는 창세기4장에 나오지. 창세기3장에서는 안 나옵니다. 가죽옷을 할 때 그건 어린양의 피고. 어린양의 피가 안 나와요. 자꾸 그렇게 오버할 필요 없어요. 사람을 그렇게 구원해 주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주님의 과제지 우리의 과제가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싫어하면 말고지. 지가 목회 성공하려고 한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얼마 전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주께서 확정을 이렇게 쉽게 준다는 그 자체가 확정을 시켜준 그 자체가 이미 아담과 하와는 구원받은 겁니다. 왜? 내가 그걸로 죄인이 확정됐기 때문에. 확정됐다는 말은 주님께서 자기 일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고, 무슨 짓을 해도 예수 안에서 의인되고. 이제 우리 남은 것은 주께서 활용하도록 맡기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구절이지만 성경 보면서 전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의 일을 내 일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