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강-신 33장 26-29절(사랑의 중심처)201805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26-29절입니다. 구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 말씀을 전달하면서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십니다. 만족해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이 도중에 취소되거나 실패로 끝날 일이 없다는 그 사실이 또한 오늘날 그 당시에 모세의 마음을 통해서는 상당히 즐거운 거예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세요. 내가 그리워한 약속의 땅인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것, 가지 않는다는 그 자체도 자기에게 짜증나는 일이 아니고 슬픈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중심이 아니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에서는 그게 되는데 본인이 죽더라도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 분, 바로 그 하나님을 모세 본인이 지금 믿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즐겁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을 누가 방해하느냐, 눈에 보이는 내 존재가, 내가 감지된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즐거움을 지금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나’라는 이 덩치가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예수님이 주시는 그 기쁨을 내 선에서 가로막고 있는 그런 실정에 있어요.
그런 것은 기도 해보면 알죠. 감사로 감사와 감사가 이어져야 하는 기도가 원망과 불평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떼를 쓰죠. 뭐 더 달라고. ‘주신 것에 대해서 황공합니다.’라고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은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 결핍의 장소는 어디냐 하면 내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내가 중심인데 왜 내가 만족스럽게 내 원대로 안 해주냐고 불평들을 하거든요. 조폭영화 같은 것을 보면 한국영화에 그런 영화들이 많이 있는데 영화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정권 잡은 자들이 독재자가 모아놓은 불법자금, 정치자금, 아니면 기업 총수들이 마련해주는 비자금 같은 것들, 왜 이것이 빠져나와 가지고 그것을 은행에 못 넣으니까 수표형태로 가방채로, 가방은 작지만 그 안에 20억, 100억 들어 있는 그것이 어떻게 잘못 되어 가지고 아주 못사는 서민들에게 넘어 왔을 때 그걸 횡재라고 부릅니다.
신고할 필요가 없죠. 그걸 우리는 굴러들어 왔다고 하는데 횡재한 거예요. 이거는 뭐 주인이 없는 돈이니까 도박자금 몰래 숨겨 놨는데 과수원 파 보니까 이런 게 나왔다는 말이 있잖아요. 횡재라는 거, 그 횡재라는 기쁨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생활 못합니다.
‘뭐, 이런 게 다 들어왔어?’ 신앙도 횡재고 소망도 횡재고, 사랑도 횡재예요. 세상에 이런 게 다 들어오다니. 이건 자기가 노력해서 들어 온 게 아니잖아요. 떼써서 얻어 챙긴 것도 아니고 기도 열심히 해서 얻은 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냥 굴러들어 온 거예요. 뭐가? 복음이.
복음이 그렇게 들어 온 거예요. 횡재라는 느낌이로 들어 온 겁니다. 그리고 복음이라는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늙어 죽고, 불행하고, 지옥가고, 저주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된 그 원인 자체를 말소시킨 내용이 들어와 있어요.
나로 하여금 이 땅에 병들어 죽던, 늙어 죽던, 곱게 죽던, 어쨌든 간에 이 육신 때문에 무거운 육신의 고통, 어떻게 처리를 할 수 없는 고통, 내 몸이지만 내가 짐이 되는 그 무거운 인생 짐을 야기 시킨 그 원인을 원천적으로 이걸 제거해 버렸어요. 그렇게 원천적으로 제거해 버리니까 우리의 겉 사람은 당연히 이걸 벗어야 되고 속사람은 새롭게 새롭게 생겨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동물의 왕국을 보게 되면 뭐 느끼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옷을 입은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요. 옷을 입은 동물은 인간밖에 없어요. 다른 동물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그것은 옷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만 계약해서 세상을 새롭게 하겠다는 겁니다.
여기보세요. 우리 교회 옷 안 입었잖아요. 부끄럽습니까? 이렇게 옷이라는 것은 위선과 조작과 인위적인 거, 바리새인 적인 어떤 자기 의로움, 자기 애씀과 자기 잘난 거, 자기 모아 놓은 거, 자기 일기장, 이런 것들이 옷으로 커튼으로 가려놨지만 전부다 때가 묻습니다.
때가 묻게 되면 인간은 수시로 옷을 벗을 생각은 안 하고 자기가 입은 옷 관리에 매진하게 돼요. 그 옷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내 보일라고. 기왕이면 윤기 나게, 반짝 반짝 빛나게. ‘주님이여, 나 이정도로 살았습니다, 제 인생은 이정도면 괜찮지요? 값나가지요?’
바리새인이 세리보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걸치고 있는 옷을 자랑하는데 그 옷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은 스스로 폐쇄성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옷 관리하는데 평생을 다 보냅니다.
그러면 가족도, 내 아내도 옷처럼 여겨지고, 내 자식도 나의 제2의 옷처럼 간주되고, 우리 부모도 마찬가지고, 다른 가족도 나한테 그렇게 생각하고 “너의 행동이 밖에 나가서 이상하게 하면 이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자기 명예에 입각해서 자식을 구박하고 “아버지, 나는 가수가 되려고 합니다.”하면 “네가 집안을 말아 먹는구나” 이런 거 있잖아요. “저 연극 하려고 합니다.”하면 “너 나가 죽어라. 우리 집안에 연극은 어림없다. 네 머리가지고 서울 의대도 갈수 있는데 네가 미쳤나?” 이런 식으로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갖고 있던 옷 관리와 관련되어 있어요.
자, 이 옷을 입게 되면 오늘 본문 28절과 어긋나게 되는 겁니다. 28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옷을 이렇게 벗겨 버리고, 커튼을 이렇게 벗겨 버리면 우리가 내가 관리하는 옷, 옷이 곧 제2의 나의 천성이고 제2의 나의 모습인데 그걸 주께서 찢어 버립니다.
찢어 버렸다 칩시다. 그러면 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이 들통 나겠지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이 들통 납니다. 아까 모든 동물은 옷을 안 입는다고 했어요. 인간들은 옷을 입어요. 그런데 옷은, 본인의 옷은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입어요. 그런데 옷을 입는 순간 본인이 이 세상의 중심도 아니면서 중심처럼 행세하는 위선자가 되어 버립니다.
관심사가 자기 단도리에 급급하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는데 내 교회 있어버리면 내 교회 관리한다고 온 신경을 거기에 다 쏟아요. 하나님이 마치 내 교회 위주로 돌아가는 것처럼 착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걸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포기한 거예요.
모세가 뭘 보고 모세 자신의 명예를 포기했는가. 사실 명예라 하는 것은 자존심이거든요. 명예라는 게. 자존심은 자기 존재에서 나오는 건데, 자기 존재를 포기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오늘 제목이 여기에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처소를 준비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 26절에 보면 야곱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여수룬’이라고 하거든요. 전에 설명 했습니다만 다시 설명하면 여수룬은 야곱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여수룬은 야곱이 되고자 하는 최종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여수룬이라는 별칭으로 이야기 했는데 그 여수룬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것은 어떤 경우이냐 하면 유리공방에서 불에 녹은 원재료를 장인이 긴 빨대로 훅 불지요. 그러면 그 빨래 끝에 유리제품이 동그랗게 내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훅 불어버리면 동그랗게 내려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의 최종 상태,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의 특징은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어요. 제가 저번 울산 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사랑은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랑 자체가 완제품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끝나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다가 설 때는 믿지 말고 사랑해야 해요. 왜냐 하면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에. 믿게 되게 되면 믿는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 믿느냐, 안 믿느냐’를 계속 측정을 해야 하는 부담을 느낍니다. 2시부터 3시까지 믿다가 3시부터 5시까지 안 믿고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소망도 마찬가지고.
주님 좋아하다가, 주님 바라보다가, 또 안 바라볼 때, 자기 이빨 아파서 치과를 소망하고 주님을 소망 안 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 소망은 늘 수시로 생각이 안 날 때가 오히려 더 많지요.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은 끊어지지 않음을 확인 해 주는 거예요.
옛날 찬송가 172장에 절에 보면 가사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되신 사랑의 언약”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어길 수 있사오랴?”라고 묻고 있습니다. 참되신 사랑의 언약은 저쪽에 일방적이기 때문에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라고 요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완제품, 최종적인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돼요. 아~~요거 재미있어요. 주님을 사랑 안하는 겁니다. ‘흥, 치, 뿡’인데 ‘나 주님 사랑 안 해.’하면서 삐져 보는 거예요.
왜냐면 내가 만약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붙들려고 한다면 내 쪽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사랑이 끊어 질 거니까 요건 100% 가짜잖아요. 어길 수 없는 사랑이라면 어겨 보는 거예요. 오늘 좋은 비법 하나 알려 드렸지요? 참으로 어길 수 없는 사랑이에요.
내가 지금 상상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꾸 우리는 조작을 해요. 우리는 자꾸 상상을 하는데 정말 나 죽고 나면 그것도 허공에 다 날아가 버리잖아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유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 보는 겁니다.
수시로. 안 하는 방법은 ‘미워! 미워! 미워!’ 지요. 주님을 미워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을 미워하는 게 잘 안돼요. 잘 안돼요. 불신자들은 저절로 되더니만. 우리는 몸이 아프고 그러면 주님을 미워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막 미워한다고요. 이게 시원찮아요. 재미가 없어요. 주님을 미워 한다는 것이. 아, 이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니라, 주님을 미워하는 게 불가능해요. 주님을 미워하는 게. 그리고 주님을 미워하게 되면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시느냐 하면 “네가 나를 미워한들, 싫어한들, 네가 구원 받는 것의 중심은 너와 나의 계약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계약 상대자가 따로 있는 거예요. 중심점, 구심점이 따로 있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내 헌금이나 기도 때문에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체가 헌금이에요.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헌금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도로 우리에게 하는 것이 헌금이에요.
주님이 헌금해서 만들어진 생산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헌금에 대한 고백이란 말이죠.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헌금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주의 뜻입니다.
‘이거 내면 내가 어떻게 사노! 이거 내면 나는 못산다.’ 이게 아니고 어떻게 살고 뭘 먹든지 간에 주께서 매일 같이 살리고 있는 거죠. 이거는 우리로 하여금 중심점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면 중심점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느냐.
행복이라는 것이 주어집니다. 여기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자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너의 인생을 네가 알아서 손 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너는 어떤 부담도, 어떤 어려움도 너에게는 일어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가 되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중심처소를 만드신다. 그 처소를 만드셔서 여수룬, 다시 말해서 사랑을 품은 사랑을 머금은 최종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작품을 이 땅에 중심 처를 통해서 만들어 내신다.
그 만들어 내시는 방법은 이 땅을 불행하게 만들고 비극적으로 만드는 그 원인 발생 자체를 소거시켜 버려요. 제거 한 거예요. 그럼 제거 했고 제거 하면서 중심에서 의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때 뭐라 하느냐 바로 불법자금 들어 올 때처럼 횡재라는 방식으로 들어 왔다고 그렇게 이야기 했죠.
그 횡재라는 방식으로 들어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하면 우리 쪽에서 일부러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해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주의 능력으로 사랑의 능력으로 전부다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환란과 핍박과 곤고로 인해서 자꾸 흔들리게 흔들기 작전에 나서는 거예요.
자꾸 흔드시면서 아직도 내 중심이냐 아니면 내 중심을 포기했느냐를 자꾸 자기 자신에게서 확인 시키는 겁니다. 지금 거기까지 이야기 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행복하다 감사하다 이렇게 끝나면 되는데 그러면 뭔가 누락된 게 빠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27절에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거기까지는 됐는데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적이 나옵니다. 적이 나와요.
왜 이런 전쟁이라는 방식을 구태여 없애지 않고 우리 곁에서 발생시키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전쟁을 했는데 영적 전쟁을 했지요. 북한하고 뭐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영적 전쟁을 했어요. 그 영적 전쟁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내세운 게 있습니다.
그게 데살로니가 5장 16절에서부터 18절까지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사도바울이 전쟁을 했는데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 뜻이 위배되는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거는 적들이 나에게 심어 준 거죠. 그러면 “항상 기뻐하라”가 아니라 기뻐할 것만 기뻐하라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기뻐할 때는 마음만 기뻐하자고 마음먹는다고 기뻐하는 게 아니에요. 몸의 컨디션도 어느 정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몸의 컨디션이 절대적입니다.
기뻐하고 싶어도 이가 아프다든지 뭔가 습기가 차버리면 기뻐할 수가 없어요. 신체적으로도 기뻐할 수가 없고. 그 다음이 뭐냐 하면 제일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은 은근히 기대하는 게 있어요. 뭔가 내일되면 어떤 일이 있어야 되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참 좋겠다는 뭔가 기대하는 게 있어요. 송대관 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쨍하고 볕 들 날’ 이라고 했거든요.
쨍하고 볕 들 날을 인간은 항상 조작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다니까요. 그거 될 때까지 조마조마 한 거예요. 그거 되면 기쁘고 그거 안 되면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원인이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대적을 쫓아내실 때 야곱에서 여수룬으로 전환시키면서 전쟁을 통해서 전환이 되는데 영원한 처소가 하나로 완성될 때까지는 야곱은 전쟁에 시달려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그 전쟁을 할 때 어떤 양상 어떤 성격으로 전쟁을 하느냐 하면 제가 몇 년 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제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리된 게 있어요. 인생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가?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만 아시면 인생에 대해서 다 아시는 거예요. 뭐냐 하면 깠느냐 까였느냐의 싸움입니다. 찾느냐 차였느냐의 싸움입니다.
나는 이게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집에 불나도 괜찮아요. 이혼 당해도 괜찮아요. 누구하고 헤어져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하나 안하나 그게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항상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은 빈자리가 아닙니다. 같이 살다가 헤어 질 수도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있다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문제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찼느냐 네가 나를 찼느냐의 싸움이라니까요.
완전히 감정싸움이에요. 돈이 몇 푼이 이익이고 가 문제가 아니고 더러운 돈 안 받아도 좋아요. 내가 차야 돼. 까이면 안 돼. 내가 까야 돼요. 아주 단순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네가 까인 게 아니고 네 쪽에서 깠다고 이야기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겁내느냐 하면 여수룬이 되지 못하고 아직은 야곱이기 때문에 살면서 저쪽에서 까일까봐 저쪽에 아부하고 타협하고 협상하는 쪽으로 나가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람이 깠으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게 인간이라는 짐승입니다.
자기가 찼으면 죽음도 감수하는 게 인간이에요. 아주 대단한 고집이에요. 다 실패하고 다 뭉개져도 마지막 남은 하나,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결정 했다’라는 거, 내 인생은 내가 결정했다는 거, 이거 하나 달랑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까였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의미예요.
십자가 하면, 믿으라 하면, 뭐 좋은 거라고 다 믿습니다. 다 믿는데 문제는 십자가를 믿을 때 본인이 원해서 결정해서 믿는다는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십자가 믿고 지옥가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까인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려요.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내치게 되어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 올 때는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핍박 받는 모습으로 오세요. 주님이 올 때는 “네가 나를 찼잖아”라는 우리의 본색을 그대로 노출 시키면서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네가 까지 않으면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는 그런 못된 악마적인 속성을 지닌 너에게 내가 까였어. 그런데 까인 것을 무릅쓰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구원받고 난 뒤에 나를 계속 차라는 거예요.
사장 통에 엄마하고 어린 딸하고 가게 되면 엄마가 우연찮게 길을 잘못 들어서 장난감 가게 쪽으로 지나가는 수가 있어요. 엄마는 아무 생각 안하고. 지금도 기억나는데 어른들 말하는 가운데 무심코 이야기 하다가 ‘엄마 까투리’라는 말이 튀어 나오면 그거 원래 잘 안보여 주는 건데 우리 손녀가 나랑 같이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엄마 까투리’ 틀어 달라고 떼를 쓰는데 인간은 자기 원하는 것만 노리고 있었구나 하는 거죠.
아이가 모르고 가고 있는데 가다보니 장난감 가게여서 아이가 엄마 무릎을 차면서 사달라고 떼를 씁니다. 좋은 거 사달라고. 그래야 자기가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거죠. 자기가 중심일 때 자기가 행복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평생을 두고두고 구원받은 자가 주님 앞에서 벌이고 있는 남아 있는 전쟁입니다. 이거는 이미 구원받고 난 다음에 벌이는 전쟁이에요.
저는 그것을 성령 받은 불신자라고 합니다. 성령 받았는데 하는 행세는 불신자예요. ‘이거는 왜 이렇게 되어서 나는 남들처럼 그게 없습니까? 왜 내 인생은 저 인간처럼 행복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남북통일 되니까 기대감에 확 목표가 올라가면서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휴전선에 땅 사놓을 걸.’ 새로운 환경의 여건이 왔을 때 인간은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을 도대체 절제를 못하고 주체를 못해요.
뭔가 내가 미쳐있어요. 주님으로 행복하지 않아요. 주님으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항상 감사하지 않아요. 항상 범사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평덩어리로 있는 거예요.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찾는데 그래서 차다 보니까 주님도 차여서 저쪽으로 가 있습니다. 차는 그 상처가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과 못 자국, 그 피 흘리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사랑이요? 이념 아닙니다. 사랑은 관념 아닙니다. 십자가 피라는 고통이에요. 그 고통의 실체인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예요. 복음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예요. 예수 죽으신 거 외에는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는 “너는 십자가 안에 있는 자”라고 했어요. 부활 안에 있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십자가를 부활로 바꾸는 것은 본인이 살고 싶어 하는 기대감 때문이거든요.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거 자체가 십자가 자체를 피와 살을 횡재라고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남 까는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가 까인 분이 오히려 나를 용서했다는, 죄를 사했다는, 원천적으로 우리의 비극과 지옥 가야한다는 이미 확정 된 운명을 변계 시킨 것은, 원천, 원인부터 조정이 되었기 때문에 달리 내가 지옥 가려 하니까 내가 죄 지었으니까 가려 하는데 네가 언제 죄를 지었느냐는 겁니다.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죄 지었는데’
그 원천자체가 말소되었어요. 그걸 고린도 전서 2장에서는 그 등기를 원본을 주님께서 찢어 버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피로 찢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사랑의 일방성, 일방적으로 주시는 그 사랑의 횡재를 모르고 우리는 성령을 받아 놓고도 천하의 불신자로 살아가는데 물론 그것까지 주께서 그렇게 전쟁을 벌이게 합니다.
세상하고 전쟁한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도 세상의 일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해야 하는데 김정은하고 회담한다고 좋아하는 거 보세요. 그거 보고 기뻐하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뭐 때문에 기뻐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우리가 억눌려 있던 것이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기대하는 게, 뭘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뭐 탁하고 하나 터지니까 그거 좋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교회 이렇게 있지만 우리교회 넓히고 교인 많이 들어와 보세요. 갑자기 교인들이 싱글벙글하죠. 갑자기 부도나고 그러면 또 짜증내고. 그러니까 이게 성령 받은 불신자예요. 교회이름을 불신자 교회라고 바꿔야겠어요.
얼마나 우리가 평소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감사하라는 그 말과 동떨어진 곳에 살기 때문에 주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합격자에게 주어지는 그 전쟁이라는 실습을 하게 함으로써 예수님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더욱더 돈독하게 하는 그 과정이 우리에게 한 평생 남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횡재요 행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까는 재미로 살아가는 곧 죽어도 못 먹어도 자존심은 남아가지고 자기 옷 관리하면서 잘난 체 하는 재미로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참 말도 안 되는 불신자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각할 때 마다 횡재라고 느껴지는 이 은혜가 또한 횡재임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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