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신명기 33:18-25 / 여타 지파들의 축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33:18-25 / 여타 지파들의 축복

정인순 2018. 4. 30. 08:36

 

음성 동영상 Youtube

 

 여타 지파들의 축복

 

이근호

2018년 4월 29일             본문 말씀: 신명기 33:18-25

(33: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33: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33:20)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33: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33: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33: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33: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
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33: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12라는 숫자는 많은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동일한 모습으로 현실에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하나의 이스라엘로 지칭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양성을 통해서 도리어 현실적으로 단 하나의 모습이 아님에도 하나로 다루어지는 신비로움을 하나님께서 펼치시기 위함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다양성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면 여기에 인위적인 억지가 가동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배제하고 인간들의 단합과 동의에 의해서 가시적인 단일체를 유지하겠다는 억지스러운 가짜 믿음과 경건이 동원됩니다. 사람이 타인과 연합한다는 했을 때, 과연 자신은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냐에 대한 정치적 협상안을 구상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도 곧장 그 관계는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힘의 세기에 따라 한시적으로 질서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힘이 있는 영웅 중심으로 우루루 모이다가 가치가 바닥을 드러내면 다른 쪽으로 우루루 몰려갑니다.

힘의 쏠림현상은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명분이 얼마나 고상하고 경건하냐는 최우선 문제가 아닙니다. 힘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관권입니다. 따라서 힘과 힘의 충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출렁대는 현실은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영원한 중심을 찾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은 12지파가 하나로 결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초에서 발산되는 기능이 오직 출처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는 죄를 의로 바꾸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같은 경우에, 안식일에 안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안식일 제정의 취지는 하나님께서 그날을 기뻐하시고 만족하신다는 겁니다. 창조에 대한 만족입니다.

마치 아파트 단지의 완공을 보면서 시공사는 사장과 사원들은 흐뭇한 심정으로 내려다보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작품에 흡족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만족에 참여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12지파 공동체가 되고 난 뒤에는, 그 어떤 지파들 간에 일곱째 되는 날에는 노동을 쉬고 제사해야 합니다.

이곳은 곧 일곱째 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일입니다.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각자 자기 일을 다양하게 해도 제 칠일에는 한 주간 살아온 모든 행함을 죄로 인정하고 자신을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이란 하나님만이 행하심만이 독보적으로 남겨져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복된 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창조하신 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홀로 다 해내셨기에 홀로 기쁘게 만족하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정신 하에 세상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각 기파마다 받았던 축복이란 자체적으로 안식과 결부된 뿌리와 비-안식과 결부된 인간의 행함의 조합이 성립됩니다. 어차피 구원이란 뿌리로 결정납니다. 마태복음 7:26-27에 보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외부로 드러난 인간의 행함은 그 사람의 뿌리의 속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지속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의 뿌리가 하나님의 안식과 상관없는 뿌리 위에 인생이 설정되고 있음을 보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뿌리와 원천이 그들의 행위로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의 취지에 부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불론 지파 같은 경우에, ‘의로운 제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스불론 지파만이 대표적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불론이 처해있는 입지를 통해서 ‘의로운 제사’의 가치가 부각되는 식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나타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갓 지파에 대해서는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민수기 32장에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성질이 급해서 자신들의 가축을 먹일 목초지를 선점하게 되는데 그 지역이 실은 약속의 땅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고서 모세가 대단히 화를 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개인들의 생존을 위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일한 근원과 뿌리를 보여주어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시되는 것이 ‘함께 싸움’입니다. 싸우게 되면 적이 드러날 것이고, 이스라엘 각 지파는 ‘공동의 적’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정체성도 동일하게 갖추어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4:5-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때는 각자 싸우지만 그런 그들의 행함으로 이스라엘이 만족스러운 결속을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산약 때가 되면 이 싸움을 온전하게 달성하신 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이 싸움을 통해서 성도의 적이 누구인지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영원한 뿌리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어떤 인생을 살든지 간에 동일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이 받은 동일한 선물이 각 인생의 다양함으로 현실화됩니다. 즉 그들이 어떤 죄,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마저 동일한 뿌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셨다는 겁니다. 비록 갓지파가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서 눈 앞에 목초지를 자신의 정착지로 삼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 하나님에 제공하신 분깃이라고 설명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결론은 늘 성도가 자기 행함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우리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82강-신 33장 18-25절(여타 지파의 축복)

201804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18-25절입니다. 구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열국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는 찬송을 부를 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두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차지할 지로다,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기 열두지파를 보면서 간편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설날 때에 강정 만들잖아요. 엿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하나하나 다 부스러지는데 엿이 들어가면 거기를 블록처럼 딱 딱 끊어 버리면 맛있는 강정이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보면서, 여러분, 이스라엘의 12지파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열두 지파였어요.

두 사람도 하나 되기 힘든 마당에 열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엿을 강정에 썼으면, 어떤 엿이 들어갔으면 열둘이 하나가 되겠습니까? 안되죠.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은 ‘나’를 포기 할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아도 안 되고, 두 사람이 맷돌 갈아도 안 되고 부부가 평생을 살아도 그게 안돼요. 너 따로 나 따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 대해서는 열두 지파가 하나가 되었다 하는 것은 임시적인 겁니다. 계속 가는 것이 아니고 임시적인 거예요.

그래서 열두 지파에 대해서 이런 복을 받을 때에 이런 복을 스불론은 이렇게 받고, 갓은 이렇게 받고, 단은 이런 복을 받고 할 때에 다른 지파에서 이런 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내게 있는 엿이, 내게 있는 주님 주신 축복의 엿이 저쪽에는 저렇게 다양하게 들어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되지 갑자기 남의 떡이 더 보인다고 그 쪽을 더 탐을 내고 질투하고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너의 인생을 살던 내 인생을 살던 어차피 사다리타기예요.

어떻게 내려왔던 간에 밑에는 천국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도로 살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세리로 살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창기로 살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지파에게 복을 주시면서 열두 지파를 하나 되게 하는 본드 있죠? 그 결합시키는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또는 어떤 자리에서는 나와 똑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작용해서 그들도 결국에는 천국에서 한 백성으로 되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 본문들이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스불론지파 안에서는 어떤 식의 엿이 들어 있고 갓지파에는 어떤 엿이 들어 있느냐하는 그것만 찾아내면 되죠. 그것만 찾아 낼 때에 그것을 종합해 보면 인간이 아무리 다양해도 다양한 것을 한 천국 백성으로, 한 백성으로 묶어 내는 주님의 다양한 기능을 인간들은 모든 것을 알아 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모든 것을 알아야 되는데 이 모든 걸 알 필요가 없어요. 필요가 없고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이 되게 되면 동일한 원리 원칙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둑을 두는 기원에 가게 되면 바둑판이 한 판이 아니에요. 바둑판이 큰 곳을 가면 한 50군데, 50개가 쭉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그 바둑판의 치수와 모양새와 그 연도를 생각하면 다 달라요. 바둑알도 어떤 때는 깨진 것도 있고 새로 산 것도 있고 깨진 바둑판, 좋은 바둑판 이렇게 다 있더라도 바둑판과 바둑알이 다 다르지만 바둑의 룰은 동일합니다. 바둑의 룰은. 그 원칙은 같아요.

너 하나 놓고 나 하나 놓고, 집수 계산해서 누가 이기느냐 이렇게 하는데 바둑 장기 알도 마찬가지예요. 장기 알 다 달라도 장기 룰은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걸 인간적인 지혜나 인간적은 노력으로써는 내게 맞추려고 애를 쓴다니까요. 내게 맞추려고.

내가 예수 믿은 대로 해야 한다고 하게 되면 모델이 예수님에게 모델을 찾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을 모델로 삼을 수가 있어요. 제가 광주 강의 가면서 일본에서 곧 오실 임청일 장로님이 미리 당겨서 왔어요. 6월달 말 되면 철수 한답니다. 장로님과 식사하고 하면서 장로님이 저한테 상당히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목사님처럼 못사니까 신자 아닌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요.

제가 주님의 십자가를 훼방질 하는 느낌이 들어요. 근데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만들지를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되어야 돼’라는 설계도 도면을 먼저 작성하고 그것에 열심히 맞춰 살다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필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적인 조립품이 인간이거든요. 이스라엘도 조립품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내용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고 느긋하게 두지 않고 계속 굴립니다. 계속 일하게 해요. 그런데 ‘저 사람은 하루 열 시간하고 나는 두 시간 하는데’라고 부러워하거나 탐을 내지 마세요. 어느 가정이든 문제없는 가정 없고 고생 안하는 가정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고생시키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연합체가 깨어지도록, 그걸 내부 균열이라고 하는데, 내부 균열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내부 균열이 일어난 이유는 당연하죠. 인간은 자기중심이니까, 자기가 최고니까 옆 사람에게 지기 싫으니까 내부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가정에서도 내부 균열이 일어나죠.

그 내부 균열이 일어 날 때 그걸 보면서 “우리 가정은 평안하다”라고 해버리면 본인이 그 사람의 모델이 되어 버려요. “나처럼 해봐라. 요렇게.” 이렇게 되어 버린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점을 오늘 본문에서는 전부다 묵살하십니다. 너의 인생에 대해서 남의 인생을 모델로 삼지도 말고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렇게 인생을 억지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이 요청하는 대로 억지로 인생을 조작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데 성도가 되었으면 전부다 하나의 본드로 하나의 엿으로 전부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불론, 갓 그리고 갓 뒤에 납달리 나오고 아셀 나오고 이러면 사람들 또 골치 아파요. 우리 조상도 외우기 힘든데 남의 조상까지 외우려고 하니까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지파 이름은 그 이스라엘 땅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서쪽으로 지중해와 이렇게 붙어 있거든요.

지중해 가까운 쪽이 아셀이고 그보다 가까운 쪽이 스불론이고 제일 안쪽에 있는 것이 납달리 이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단은 제일 북쪽에 있는 게 단이고 갓은 제일 동쪽에 요단강 건너서 있는 것이 갓이에요. 그런데 각자 지역대로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거예요. 자리를.

그걸 옛날 토속적 언어로 자부동이 다르다고 하는데, 얼마 전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오랜만에 들어가지고. 자부동이 일본말로 방석이거든요. 깔고 앉는 자부동이 달라요. 어떤 사람은 초록색, 어떤 사람은 노란색, 어떤 사람은 빨간색...

자부동이 다르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깔고 앉아 있는 방석의 속성을 그 사람의 평생을 통해서 안에 다 담아줘야 해요. 담아줘야 합니다. 여러분 다 알다시피 마태복음 7장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기초를 보신다는 겁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이 다르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이 기초라 하는 것은 땅을 파 봐야 알아요. 그냥 봐서는 모른단 말이죠. 둘 다 양옥집이다. 그러나 그 밑에 보니까 한쪽은 모래 위에 한쪽은 반석위에 이렇게 다르다면 그쪽은 마지막 때에 속성을 노골화 시킬 때에 무너지고 한쪽은 든든하게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지표면 위에 드러난 것 가지고 비교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열두 지파의 각 지파는 자기의 근원, 자기의 뿌리, 자기의 원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이런 뿌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나에게 이런 삶을 살게 했습니다.”라고 뿌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그 뿌리에 대해서.

그런데 뿌리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주님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 뿌리를 이야기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 기의 행함을 다 걷어 내야합니다. 삽으로 파서 자기 바깥에 나와 있는 것을 다 파헤쳐야 합니다. 다 파헤칠 때 그 파헤치면서 행하는 행함들이 각지파마다 오늘 다 다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의 축복도 그 내용이 다 다른 겁니다.

이야기가 굉장히 길어졌는데 여기 19절에 보면 “그들이 열국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라고 했죠. 의로운 제사. 의로운 제사가 스불론 지파만 드리는 게 아니에요. 12지파 다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 스불론 지파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그 뿌리, 본인이 제사 드리는 그 행함이 아니고, 그 뿌리는 의로운 제사라는 점에 대해서 “그 뿌리에 대한 그 의로운 제사를 네가 스불론에 가서 확인해 주면 된다. 스불론 지파가 그 땅을 무사히 통치하고 있거든 그것은 그 밑바닥에 의로운 제사가 계속 가동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았다”라고 보면 돼요.

그러면 그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가 성도가 되고 성령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 뿌리가 되셔서 의로운 제사를 계속 드리고 있는 기능을, 스불론 기능을 예수님이 그것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성도로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루하루 살 때 무엇을 보면 되느냐 하면 스불론 지파에게 가동되는 그 뿌리, 그 보일러실, 의로운 제사라는 이름의 보일러가 가동 되는 것을 우리가 늘 느끼면서 살게 되면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축복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축복.

그러니까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행한 것 재껴버리고 ‘이런 행함이 유발된 그 뿌리에 예수님은 나와 함께 있어서 어떤 기능을 지금도 발휘하고 있는 가’하는 그것을 다양하게 파악하는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그걸 쉬운 말로, 정말 쉬운지는 모르겠지만, ‘축복은 관계성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관계성이 되려면 혼자 사는 게 아니죠. 개인은 혼자가 아닙니다. 개인은 혼자서 개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개인인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짝을 이루는 어떤 뿌리가 되시는 분과 관계성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운 제사는 끝도 없고 한이 없다는 거죠.

주님의 의로운 제사가 줄곧 간다면 우리는 줄곧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성막 해설에서 나와 있는데 그날 여기에 더 어려운 대목이 있으니까 이 어려운 대목을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세상 종교에 대해서 알아야 되니까 세상 종교를 공부해 보면 그들은 어떤 게 있느냐 하면 계속해서 그때그때 마다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복음에 보면 제사는 단 한번으로 끝났어요. 단 한번으로.

그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세례라고 해요. 세례의 특징은 단일성에 있습니다. 한번으로 끝나버렸어요. 이게 참 이상하죠. 한번으로 끝나게 되면 그 한번 됨, 우리의 뿌리의 제사가, 스불론의 축복이죠, 의로운 제사가 단 한번으로 끝났다는 말은 앞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행동 어떤 더러운 짓, 뭘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 한 번의 제사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그렇게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모델을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찾거든요. 뿌리에서 찾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찾게 되어 있어요. 아담의 죄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남이 모델이에요. 내가 딛고 있는 이 뿌리인 예수님이 모델이 아니고 남이 모델이라니까요. 물론 세상 살면서 성령 받아서 예수님이 모델인 것은 알지요. 알지만 이상하게 그건 자주, 아주 자주 잊어버려요.

자주 잊어버리고 갑자기 잘 사는 동창 만나면 갑자기 풀이 죽고 또 못사는 망한 소식 들으면 갑자기 기분이 업 되어 가지고 좋아하거든요. 프로야구라는 게 한국에 있는데 프로야구 20년 내내 거의 꼴찌 수준으로 돌았던 팀이 한화라는 팀이에요. 요즘 너무 잘 나가요. 그리고 줄곧 일등만 하는 팀이 있습니다. 이건 다른 팀도 알아서 저 팀은 무조건 일등이라고 하는 팀이 있어요. 그게 삼성 라이온즈예요. 삼성 사자. 지금 꼴찌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하루하루가 기분 나빠요. 기분이 나빠요. 요즘 대구 사람들 다 기분이 나빠요.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그런데 한화 저쪽 대전 팀은 공장이 다 돌아갈걸요. 이기기 때문에.

왜냐하면 인간은 모델이 남이 모델 되는 것은 저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게 뭐 하나라도 쥐고 있어야 사는데 힘이 나고 용기가 난다는 그런 식으로 힘 모으는 식으로 가인의 속성을 짊어 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뿌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거든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안식일을 줘버립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이냐 하면 잘 들으셔야 해요. 안식일은 주님이 기뻐하는 날이에요. 참 중요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날인데 주님이 기뻐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이 죽었을 때 주님이 기뻐해요.

그러면 7일 날에 제사가 있어가지고 제사에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으면서 자기 백성을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은 세상은 너의 행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서 그래서 나는 기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실컷 일 시켜놓고 일 시킨 사람들 다 불러 모아서, “그래 한번 봐, 네가 열심히 일했지? 그런데 이런 안식에 천국이라는 구원이라는 결과는 너의 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쁘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가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일을 하는지와는 관계없이 안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게 안식일입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거든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 아니에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로 그거예요.

그렇다면 안식일에 뭐 해야 하느냐 하면 일, 월, 화, 수, 목, 금까지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해요. 열심히 일하고 그 다음에 토요일에 와서 그들은 “일 해보니까 완전히 개판 이었습니다. 우리의 본성 다 드러났습니다. 나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 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기쁨으로 기쁘게 주님의 어린양 앞에 자살하는 날입니다. 번개탄 같은 거 피울 필요 없어요. 이미 확정 되었어요. 안 죽어도 돼요. 이미 죽은 걸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앞에 나아가서, 요새 같으면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죽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미하는 날. 그게 바로 축복입니다. 그 관계성이 축복이에요. 그래서 19절 끝에 보면 “바다에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이것은 스불론이 뭐 했다고 이런 혜택을 받겠습니까? 스불론을 유지하고 있는 그 뿌리 되시는 분이 준비된 굉장히 다양한 축복을 지금 그 스불론이라는 지파를 통해서 이런 다양성을 살짝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20절에 보면 갓 지파, 갓 지파는 성질이 급합니다. 누구처럼...성질이 급해가지고 20절에 보면 “그가 자기를 위하여 기업을 먼저 얻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게 민수기 32장에 보게 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답사를 해보면 아는데, 말이 광야지 사막이에요.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을 이집트를 건너서 사막을 통과하다보니까 수많은 가축들을 먹일 풀과 물이 귀했던 거예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암몬땅, 그 땅을 보니까 없는 곳을 통과하다가 갑자기 아주 푸르른 초목이 나오니까 이 갓 지파에서 아주 환장을 한 겁니다.

‘살았다. 우리는 이제 생존한다. 살았다.’하면서. 거기는 물도 있어요. 오아시스 정도가 아니고 물이 많아요. ‘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성질 급해가지고 안 들어간다고 한 거예요.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는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이게 민수기 32장 1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가축들 돌볼 곳이 신경 쓰이다가 갑자기 좋은 토지가 나오니까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먼저 그곳을 선점 해버렸어요. 그런데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듣고 민수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화가 났어요.

뿌리를 생각해야 하고 열두 지파를 하나의 엿으로 하나의 뭉치로 결합시킨 그 결합성을 완전히 모독해 버리고 개인적으로 개인 생으로 돌아 선거예요. 나만 살면 된다는 거예요. ‘다른 열한 지파 죽든 말든 내 가족 잘 되면 되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모세가 화가 난거예요.

그래서 잔소리를 해대는데 그 잔소리가 민수기 32장 6절부터 해서 잔소리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 잔소리 내용이 뭐냐 하면 전체의 하나가 되지 못하면 너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너 말고 너보다 큰 범위의 전체.

신약에 이게 나와요. 신약의 에베소서 4장 4절에 보면 나옵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하나의 부르심이고,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왜 하나, 하나라고 하느냐 하면 교인이 10명이라고 10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우리교회만 해도 각자 다 다른데요? 예, 달라요. 다른데 뿌리를 보라니까요, 뿌리. 그 뿌리와 나 사이에는 우리 행동은 죄고요, 그 뿌리는 죄를 의로운 제사로, 의로 바꾸어 주거든요. 그런 장치, 그런 트랜스, 그런 변압기가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변압기가 성도에게는 다 있어요.

그 성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라는 겁니다. 선물. 선물을 준거예요. 그래서 이 민수기 32장에 의해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자기를 위해서 먼저 기업을 택했는데 그거는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물의 법으로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 설명하는 제가 더 어렵지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좀 어렵긴 어려워요. 그런데 간단해요. 뭐냐 하면 주께서는 인간의 행함에 의해 그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 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뿌리를, 그 밑에 반석이라는 뿌리, 반석이라는 것을 기초로 딱 깔아버려요. 깔아버리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던, 성질이 급해서 “이것은 내 땅이다”라고 선점을 했던 간에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여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21절에 보면 “그가 자기를 위해서 먼저 택했지만 그 법 세운 자의,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분깃으로 선물로 예비 된 것이다”라고 간주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나쁜 짓 하니까 “구원 받기 위해서 내가 시킨 일이다”라고 간주해 주는 거예요.

오늘 너무 터무니없습니까? 여러분? 너무 터무니없죠. 왜 이게 터무니없느냐 하면 나쁜 짓 하라고 한 게 아니고 계속해서 너의 기초에 피가 흐른다는 거, 너의 죄 때문에 흘리신 피가 흐른다는 거, 그 피로 인하여 결과를 이런 식의로 재해석 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겁니다.

너의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니까 너의 행동도 필히 해야만 하는 행동이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잖아요. 그 사람이 강도짓해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 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너는 어느 날 남의 집에 가서 그 주인 죽이고 돈 훔치는 짓을 너는 필히 했어야 했다는 겁니다.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너의 그 짓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행동을 넘어선다는 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법을 그 사람을 통해서 천국 보내면서 발산 시키는 겁니다.

여러분 기분 좋으라고 지금 이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22절 봅시다. “단은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새끼라” 그들이 그렇게 용감하지 않아요. 그런데 용감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들의 기초가. 그러니까 주님이 용감한 거예요.

그 다음에 납달리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그들은 납달리는 은혜가 족하지 않았어요. 복이 가득하지도 않고. 나중에 다 쫓겨 나갑니다. 하지만 이것이 완성되는 뿌리가 완성되는 기초가 완성되는 십자가 이후에 모든 성도들은 모두 소급해서 이야기합니다.

“주여, 제게 은혜가 족합니다. 이렇게 나쁜 짓 하고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데 그거조차도 그 죄도 의라고 바꾸어 주시는 그 복이, 주여, 우리가 정말 남다릅니다.” ‘그래서 납달리인가?’ 이건 개그입니다.(^^) 정말 납달리 할 때 남다름을 생각하시면 돼요. 정말 남다른 사람들이에요. 이게 최종적인 겁니다.

아셀은 기쁨인데 “아셀은 더한 여러 가지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러나 본인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멸망당했거든요. 하지만 신약에 와서 우리는 아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초되는 주님에 의해서 그 다음 25절에 보면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너의 구원받은 그 구원의 문을 주님께서 열고 들어가게 하신 그 구원의 문을 악마가 아무리 너를 꼬이고 협박을 해도 그 문은 견고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예수님 하신 일의 다양함, 이것을 열두 지파를 통해서 다양하게 스펙트럼처럼 보여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받은 복을 우리가 언제 받았습니까. 받은 복 없다고 징징거리고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짜증부터 부리는 우리, 그게 이미 세상이 모델이 되어서 생긴 현상인줄 알고 그 죄마저 주님께서 허락하신 죄인 것을 깨닫는 더 큰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