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총회
이근호
2018년 4월 1일
본문 말씀: 신명기 33:4-6
(33: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33: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모세는 지금 각 지파를 향해 축복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자기 가정이 과연 하나님에게 축복받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모델을 찾게 됩니다. ‘∼ 했더니만 복이 들어왔다’는 사례를 찾고자 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을 이해 못한 겁니다.
복은 없습니다. 저주밖에 없습니다. 복이란 반드시 저주가 먼저 형성된 바로 그 현장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복을 받게 된 성도는 필히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게 되는 경유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를 깨우치게 되는 인생 여정을 밟게 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은 마땅히 복받을 민족이라고 우겼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이스라엘 본인들이 범죄하고 죄를 지어도 성전이 있는 한 결국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네 민족을 구원해내고야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선지서를 몽땅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병뚜껑도 아구가 딱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다 쏟아지게 됩니다. 세상을 설명하는 것도 아구가 다 맞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받은 자로서 지금 죽어도 천국간다고 우길 수 있는 모델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부활로 설명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십자가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이유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눈이 어두워서 당연히 복받을 자라고 여긴 바로 그 사실입니다. 성전 있기에 언젠가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여겼던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붕괴를 예고하셨습니다.
곧 그들의 복 받을 모델의 붕괴를 언급하신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게 되신 것입니다. 과연 인간들이 자기에게 복이 들어올 모델을 구축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왜 인간은 자신이 저주받아야 될 존재이지 결코 복받아야 될 존재가 아닌 것을 왜 모를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괴물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예수님만이 계약자라는 사실을 자꾸만 저지하고 감추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이런 괴물성을 노출시키십니다. 그 과정을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내리는 자율적인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는 자율적이지 못하는 일반 사물과 자신을 비교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단순한 사물이나 기계에 불과합니다. 옷이란 인간의 신체를 가리기 위함입니다. 신체보다 옷이 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신체가 가리고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언급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또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자율적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 속의 욕정이나 욕망은 인간이 자제할 수가 없습니다. 통제 불가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축복이 될까요? 이는 그 배후에 사건을 고려해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5:22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비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겁니다.
자,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야곱이 내린 조치가 창세기 49:4에 나옵니다.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즉 르우벤의 그런 성격은 모두 야곱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게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속성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적인 성향’입니다.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겁니다. 즉 ‘주관→객관→지배’로 이어집니다. 상대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결국에는 나의 정복대상자로서 거기에 있는 식으로 파악합니다.
반면에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적’ 요소가 나옵니다. 이는 ‘야곱을 용서하신 그 성질’입니다. 복이란 이 두 가지 요소를 한 세트로 결합되는 양상으로 발휘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부에 인간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왕’이 들어있는 겁니다. 이 왕의 거처는 전에 괴물이 있는 거처입니다.
인간들은 마음껏 자신이 마치 복받을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설쳐대면서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질합니다. 모든 행위를 자기에게 집결시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헹가래칩니다. 자기에게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보람이란 자신이 잘나는 왕이라는 점을 확인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저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왕이 계셔서 어떤 식으로 해결하시느냐를 앞으로 여정 속에서 보여주게 됩니다. 서모와 통간한 르우벤이지만 모세는 그에게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고 축복합니다.
이는 르우벤의 행함을 통해서 복의 우세를 계속 알리고자 합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은 복이라는 성과를 위해 저주받아 마땅함을 나타내는 과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르우벤이 저질은 일은 야곱 속성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함께 계시는 왕께서는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주시게 됩니다.
대신 12지파는 혹독한 저주성을 돌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왕의 일방적인 인도하심이 이 복을 성사시킬 겁니다. 복음이란 죄인+왕의 희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주님의 손길 안에서 주님만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