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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신명기 33:1-3 / 하나님의 수중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33:1-3 / 하나님의 수중

정인순 2018. 3. 25. 15:47

 

음성           동영상

 

 하나님의 수중

 

이근호
2018년 3월 25일                     

 

본문 말씀: 신명기 33:1-3

(33: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33: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3: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나눈다는 것이 창세기 2장 에덴의 원리에 따르면 좀 이상해보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먹는 즉시로 아담과 하와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고 9백살 이상 살았고, 그 후에도 오늘 본문의 경우처럼 계속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습니다.

뭔가 미진한 것이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죽음’이라는 뜻이 인간들이 죽는다고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입장에서 자기 목숨 끊어짐으로 ‘죽음’의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하고 최종 상대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것이 있습니다. 악마입니다.

따라서 악마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악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면서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는 확정지어집니다. 이 의미 확장에 하나님 자신이 뛰어드십니다. 인간은 배제됩니다. 하나님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의 최종 의미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기능으로 완결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죽습니다.

아벨이 죽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결부된 채 일어나는 죽음 사건 속에서 죽음의 내막이 밝혀집니다. 죽음, 혹은 죽음의 힘 자체에서 이겨내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자꾸만 죽음을 기피하고 싶어합니다.

마치 살아 있을 동안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최종 의미가 다 밝혀져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아는 그것으로 자신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갔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배제하는데 악마는 자꾸만 인간을 앞장 세웁니다. 자신은 인간 뒤에 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죽음 의미가 드러내실 때까지, 다시 말해서 인간 뒤에 인간을 주정하는 그 세력자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추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수중’을 곧 ‘율법의 수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겠다는 겁니다. 그 결과는 여차하면 ‘죽음’입니다. 신명기 19:11-12에서는 ‘살인자는 죽여라’입니다. 신명기 17:5에서는 죄를 지은 남자와 여자를 죽여라입니다.

신명기 10:11-12, 혹은 신명기 13:8-10에서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민족은 모조리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정없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아이, 어른 할 것없이, 남 여 가리지 않고 싸그리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8:20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은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5:32에는 안식일날 나무하는 자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0:16에는 점령지에서 호흡있는 것들은 다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1:20에는 술에 잠긴 자식은 동네 어른들 손에 죽임을 당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2:24-25에서는 통간하는 남녀를 같이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4:7에서는 사람을 유괴하는 자는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외 무당이나 점쟁이를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말하는 자나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다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통 “죽여라, 죽여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에 쫓기듯이, 안 죽을 일을 할려고 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계에 직면합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자와 이해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구약에서는 “죽여라”이지만 신약에서는 “죽었다“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뭘해도 죽은 겁니다. 착해도 죽었고 안 착해도 죽은 겁니다.

이것은 곧 ‘완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완료가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가 온 우주에 다 적용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이 ‘완료’를 강력하게 반발하는 세력이 작동하는 것이 감지됩니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이 ‘완료성’를 보지 못하고 활동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고유한 ‘자기 의로움’을 챙겨주려고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만을 위한 자기 의를 따로 챙기고 싶은 이유는, 그것으로 자기가 얻고 싶은 행운이나 축복을 당당하게 받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의도 없는 주제에 복이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뭔가 움직이고 한 게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따로 요구하고 싶어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기에게 격려가 된다고 느낍니다. 사는 보람을 이런 식으로 가질려고 합니다. 벌써 악마의 품성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정도로 선한 것을 많이 마련해야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나타난 ‘다 이루심’은 예수 안, 혹은 성령 안, 혹은 십자가 안으로 묘사됩니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아의 폭이 좁습니다. 하나의 경계선으로 존재합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점으로 서 작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원(始原)적이요 근원적입니다. 욥기 38:26-27에 보면,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없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만드는 단어나 의미는 모두 본인의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상관없음에도 비가 주룩주룩 쏟아질 때에 인간은 시원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서 나온 가치가 의미가 무심(無心)한 빗줄기 안에서 모조리 씻겨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나름대로의 세상 미련도 같이 씻겨지고 앙금도 씻겨져야 합니다. 비는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의 말을 듣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움직이는 “다 이루심”이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자신의 노동의 성과를 찾아서 울고 불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77강-신 33장 1-3절(하나님의 수중)201803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16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이면 되잖아요. 왜 자꾸 질질 끌고 다니십니까?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했으면 ‘끝’하고 죽이시면 되는데 본문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이스라엘을 죽이신다고 하면서 계속 끌고 가세요.

그것은 인간이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 안 해요. 인간의 죽음도 하나님의 일의 일부이지만 정작 인간의 하나님이 상대 하려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의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 버려요.

스스로 완성시켜 나가는데 자꾸 간섭하고 끼어드는 게 있어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그대로 살면 돼요. 그런데 이 끼어든 작자가 있습니다. 악마입니다. 그 끼어든 악마를 빼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래서 “네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할 때에 사람 입장에서는 “죽이신다고요? 그럼 죽이세요. 그러면 일 끝났지요?”

이렇게 인간 죽음이 죽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인간 죽음이 죽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의 내막 속에는 죽음을 해체해 보면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죽는 죽음의 경우에만 모든 비밀과 진실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는 그 죽음하나를 위해서 인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자신조차도 죽음 안에 뛰어 들고 거기에 뛰어 들어야 하나님의 일을 근원적으로 훼방한 악마의 정체가 노출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창세기 3장으로 끝나야 될 문제를 창세기 4장, 5장, 6장...계속 있잖아요. 이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배후에 뭔가의 수중에 있다는, 오늘 제목이 수중인데요, 뭔가 손 안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장 같은 경우에 형제간을 낳게 해놓고 가인이 동생을 죽입니다. 죽일 때 분명히 거기에는 아벨의 죽음이 있죠. 아벨의 죽음이 있는데 아벨의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아벨은 죽어야 하는 가. 아벨이 죽어야 되는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 결탁되었고, 하나님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죽어요. 아벨의 죽음은.

아벨의 죽음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 지상에서는 죽어 마땅한 짓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미움 받아도 마땅한 존재가 돼요. 그리고 예수님이 말합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미운 게 아니야. 나 예수가 밉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어도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을 손에 잡고 있는 그 악마라는 작자는 줄창, 줄곧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의 광채를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주변에서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고자 그렇게 했고, 인간은 쉽게 거기에 동조를 하고, 동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는 너희들을 사랑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지금가지는 너희들이 악마의 수중에 있었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3절에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수중에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매” 이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와 악마의 수중에 있을 때와의 차이점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산시켜 내야 돼요. 드러내야 돼요. 오늘날 성도의 가는 길, 성도의 길이죠.

“내가 세상 사람일 때의 사고방식과 주님의 손에 있을 때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달랐단다.”라고 그걸 나타내면 되죠. 그러면 거기에서 다른 점을 뭐라고 쉽게 하느냐 하면 평가 기준에 대한 변동, 세상을 보는 평가 안목에 변경상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전에는 세상을 내가 이런 이런 식으로 봤는데 지금은 주님 손 안에서 세상을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라고 세상을 달리 보는 겁니다. 세상을 달리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달리 볼 줄 알아야 되겠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달리보기 위해서 여기 본문 2절 끝에 보면 “그 손에는 뭐 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했어요. 그 손에는 ( ) 같은 율법이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뭐 같은 율법이 뭐냐 하면 ‘불’같은 율법을, 하나님의 법을 지어 줍니다.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 본인도 지켜야 될 법입니다. 하나님 본인도 지켜야 돼요. 예수님도 율법을 지켜야 돼요. 하나님이 율법을 만들었지만 만드신 본인도 율법대로 살아야 돼요. 그런데 그 율법이 불같은 율법이에요. 죽음을 초래하고, 저주를 초래하고, 심판을 초래하고, 예수님도 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습니다.

그 불같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자기 백성을 그 수중에 집어넣고 말았어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이 말을 우리가 쉽게 아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표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과연 내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지 없는지를 뭘로 판단을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그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수중을 신약으로 이렇게 변경시켜 보겠습니다. 변경시켜 보면 하나님의 수중이 신약에서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 예수 안이라고 하니까 또 이게 굉장히 와 닿지를 않지요? 그래서 바꿉니다. 십자가 안으로 바꾸겠습니다. 어차피 같은 말이니까.

‘예수 안’과 같은 말이 ‘성령 안’ 그리고 같은 말이 ‘십자가 안’이 같은 말이에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을 제가 했더라도 ‘그게 뭐야?’ 이럴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고린도 후서 3장에 보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을 우리말로 한글로 두자로 이야기 했어요. ‘자유’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유. “성령이 있는 사람은 자유하게 되나니.” 그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전에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고, 왜 자유스럽지 못했냐 하면 율법의 정죄함 속에 대상이 되기 때문에 자유롭지를 못했어요. 율법의 정죄함.

주님께서 우리를 정죄하는 것과 율법이 정죄하는 것은 달라요. 율법이 정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율법을 못 지키느냐는 것으로 정죄하고 성령의 정죄함은 아까 우리 집사님이 기도한데로 왜 다 이룬 것을 못 믿느냐 하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 하면 주님이 다 이루심을 미리 봐야 할 우리가, 성도가, 자신이 꾸역꾸역 뭔가 이루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미완성으로 보는 그 기준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이 성질을 못 고치죠. 뭐 교회 왔을 때는 다 이루었다 들어 놓고는 또 가면서는 ‘완벽해야 돼. 완벽해야 돼.’ 얼마나 완벽했으면 머리가 아파서 교회를 못 나오겠어요.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히 했으면. 본인이 본인을 용서가 안돼요. 완벽함을 추구할 때 생기는 생리적 현상을 제가 나름대로 뽑아 봤어요. 빠른 심장박동, 진땀, 피부의 온도 저하, 소름 돋음, 창백한 안색, 격심한 불안, 숨 조이는 간절함, 그 다음에 흥분, 전율, 침 흘림, 수줍음.

본인이 느긋하지가 못하니까 본인의 육신이 그것에 대해서 적절한 표현과 반응을 막 나타내는 겁니다. 창백한 안색. 불안 증세. 병원만 돈 벌죠. 그 다음에 이런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잘 될 때, 자기 뜻대로 잘 되는 것도 문제예요, 자기 뜻대로 잘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 흥분, 전율, 기쁨, 희열의 절정, 이런 것들이죠. 조울증이죠. 좋았다가 나빴다가. 오락가락하는 거죠.

주님께서 이걸 아십니다. 아시면서 내 놓은 대책이 있어요. 율법 없이는 복음이 없거든요. 구약에는 율법의 수중 안에 있고, 신약에는 십자가 수중 안에 있어요. 율법의 수중 안에 있을 때 이러한 빠른 심장박동, 진땀, 피부의 온도 저하와 같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이렇게 처리합니다. 처리 방법을 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19:11-12에서는 ‘살인자는 죽여라’입니다. 신명기 17:5에서는 죄를 지은 남자와 여자를 죽여라입니다.

신명기 10:11-12, 혹은 신명기 13:8-10에서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민족은 모조리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정없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남 여 가리지 않고 싸그리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8:20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은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5:32에는 안식일 날 나무하는 자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0:16에는 점령지에서 호흡 있는 것들은 다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1:20에는 술에 잠긴 자식은 동네 어른들 손에 죽임을 당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2:24-25에서는 통간하는 남녀를 같이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4:7에서는 사람을 유괴하는 자는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외 무당이나 점쟁이를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말하는 자나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다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통 “죽여라, 죽여라”입니다.

신약에서는 “죽었다”입니다. 죽이라는 것은 미완료예요. ‘안식을 못 지키면 죽는 수가 있네. 자식 술 먹는 거 안 말리면 내가 자식을 죽게 할 수가 있네.’ 아직도 미완료예요. 다 이루었다 아닙니다. 초조해요. 이 말은 ‘잘만 하면 율법 저촉 안 받아서 저주 안 받을 수도 있겠네.’가 계속 미진하게 남아있어요.

그런데 신약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이미 죽었는데, 모든 사태가 종결 되었어요. 손 털고 마무리 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 보기에는 이미 결론지어졌습니다. 탕!탕!탕! 너는 죽었고. 죽은 놈한테 뭘 맡겨요? 이미 죽었는데. 끝나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옛날에 있던 마귀가, 이 세상을 쥐고 있는 마귀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마귀의 승리는 “다 이루었다”를 안 믿게 만들면 승리예요. 다 이루었다는 다가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인간에게 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기 의로움입니다. 자기 의.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가치가 있고 의미가 남아 있다고 계속해서 독려하고 격려하고 배려해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서, 아까 주일 낮에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움직이는 십자가라 하는데 움직이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이 두 개가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라는 그 십자가가 마귀는 그 십자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이제 네가 원하는 만큼 너의 가치나 인품이 개선될 여지가 있는데 그걸 왜 지레 포기하느냐고 자꾸 마귀가 이걸 부추깁니다. “저 사람보다 인간 말종 이라는 말 듣기 싫지? 그러면 저 사람보다 착해지기 위해서 술도 끊고, 담배 끊고 하면 더 착해져.” 자꾸 마귀가 우리 자신에게 부추기는 거예요.

누구하나 붙들고 “인간 만들어 주옵소서.” 죽은 놈이 죽은 놈 붙들고 인간 만들어 달라는 말이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수십 번 들은 이야기가 저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 많아요. 십자가 마을에 보면. “목사님, 복음을 알고 나서 부터는 이 세상에 재미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재미있는 게 없다는 것은 목표할 만한 꺼리가 없다는 거예요. 목표.

‘나는 저 사람 닮아야지. 저 사람 목표로 해야지.’하는 꺼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죠.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드론 띄워 놓고 보는 거예요. 드론 띄워 놓고 쭉 보란 말이죠. 전부다 시체예요. 문재인 시체, 이명박 시체, 시체가 시체를 구속하고. 전부다 시체라니까요. “아니, 심장이 뛰는데 왜 시체입니까?” 그 까부는 게 죽음의 의미라니까요.

설교 다시 할게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 해서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끝이 있어요, 계속 질질 죽음을 질질 끌어간다고요. 끌고 가게 되면 네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뭘 하더라도 이미 마귀에 수중 안에 있으면 이건 죽은 거예요.

마귀가 자꾸 우리에게 뭐라고 격려하느냐 하면 “훌륭할 수 있어. 착해질 수 있어. 저번에 너 보너스 받았잖아. 그게 네가 십일조 하고 하나님 말씀 잘 지키기 때문에 보상으로 네가 복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너 보상 좋지? 좋으니까 앞으로 더 착해야 돼. 성경 더 보고. 기도 오래 하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이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너는 훌륭한 사람 될 수 있어.”라고 계속해서 구약적 존재로 막아 놓고 가둬놔 버려요. 미완료상태로 막아 놓는 거예요. 십자가에서는 다 이루었고 죽었는데.

“네가 너의 가치를 무시하면 누가 너의 가치를 인정해 주겠느냐?”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구약 속에서도 이러한 신약의 요소를 주께서는 이미 거기에 심어 놓았습니다. 그 중에 욥기 인데 욥의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욥기 38장236~27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여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욥아” 하나님이 마지막아 욥에게 나타나가지고 황무한 사람 없는 땅, 중요한 건 사람이 없는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단어 하나하나에 다 노림수가 있어요. 인간은 단어 하나를 써도 노림수가 있는데 그걸 의미라고 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먼저 있고, 단어를 붙일 때는 본인의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지나가는 고양이도 고양이라고 말을 하고 개도 이렇게 이름을 붙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거예요. 원초적이죠, 시온적이고, 기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람이 없는 땅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네가 거기에 비라는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그런 자격자가 될 수 있느냐? 네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건다든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는 저 사람이 나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뭔가 그것 때문에 누구 이름을 부르거든요.

내가 없는데,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일에 ‘누구’라는 단어를 붙일 일이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인간이 없는 상태로 시온적인, 원초적인 상태로, ‘아르케’라 하는데, 그 근원적인 상태로 돌아갑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타나셔서 하는 말이 “사람 없는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그러면 이 말씀을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서는 실습을 할 수밖에 없어요. 실습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비가 죽죽 오는 밤에 잠시 창문을 열어놔요. 비가 죽 오게 되면 비는 모든 것을 씻겨 내려가게 합니다.

뭐가 씻겨 내려가는가. 미련과 앙금이 다 씻겨 내려가요. 비가 오는 것은 무심하게 와요. 마음이 없이. 무심하게. 좋았던 사람도 빗소리는 추적추적, 슬퍼하던 사람도 빗소리는 추적추적. “비야, 오지 마라”한다고 내 말 듣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추적추적. “비야, 더 와라”한다고 해서 비가 더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추적추적. 나와 아무 상관없는 현상. 비오는 현상. 장마가 내리는 현상입니다. 이게 바로 시온적이에요.

우리는 그 비속에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앙금과 의미와 가치와 미련은 다 무심하게 내리는 비안에서 다 씻어 내려가야 됩니다. 이게 잘 안되거든. 오천 원이나 오천 오백 원 주시고 목욕탕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가지고 때 다 씻고 난 뒤에 탱크 물 시원하게 내리는 곳에 가가지고 그 때 쫘악 온 몸에 받아야 되요. 물론 남탕에 가면 그 순간이 오줌 누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표가 안 나니까. 들켰다 싶으면 한 번 더 누르면 됩니다.

모든 것이, 그냥 이걸 맡긴다고 하거든요, 그 무심하게 나와 이득관계, 이해 관계없이 쏟아지는 빗물.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고” 북한의 김정은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도 무심하게 주시고, 모든 것이 무심하게 돌아가는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와 관련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들이받고, 쥐어뜯고, 난리도 아니고, 울었다가, 진땀났다가, 피부온도 저하 되었다가, 심장박동 빨라졌다가...

아무 상관없는데, 무슨 비가 심장박동이라는 것이 어디 있고, 창백한 비가 어디 있습니까? 비가 그렇게 무심하게 내리듯이 왜 우리는 그렇게 무심하게 못 삽니까? 얼마나 욕심이 많아요. 어느 정도 욕심이 많아야 우리가 무심해 질 수 있어요? 욕심을 버리고.

재미나는 영화가 있어요. 제목 자체가 재미나요. 뭐냐 하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에 보면 노인은 한명도 안 나와요. 그게, 이 영화의 주제가 뭐냐 하면 사이코패스하고 또 한 정신병자가 나오는데, 둘 다 정신병자인데 종류가 달라요. 둘 다 미친놈이에요. 미친놈이 미친놈을 벌하고 쫓아가고, 미친놈끼리 싸우는 그런 영화예요.

하나는 저격수고 하나는 갱단원인데 저격수가 돈 떼먹고 도망치니까 갱단원이 자기 돈 내 놓으라고 싸우는 거예요. 여기에 이 영화의 주제가 뭐냐 하면 거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노인까지는 아니고 약간 나이 많은 보안관이 등장하는데 보안관이 아무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지식과 노하우에 의해서 아무리 해도 둘 다 미쳤거든요. 둘 다 미친 인간들에게는 기존의 전에 써먹던 범인 체포 작전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거, 이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노인은 이제 한물갔다는 거예요. 왜? 세상은 미처 돌아가기 때문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식이 딸이나 아들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정상인지 정상 아닌지 잘 몰라요. 근데 아이가 둘이 있다하면 둘 다 미처 돌아갑니다. 이제 부모 말 안 듣습니다. 중2, 중1, 이제는 더 내려가서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말 안 듣습니다. 세상은 미처 돌아갑니다.

가락이 있어서 거기에 흠뻑 취해서 그 일제시대 때에 노래 있잖아요. 그 일제시대 때에 불렀던 노래들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을 저밉니까? 근데 요새 노래는 고등래퍼 뭐 이런 거 들어보면 래퍼는 래퍼인데 이거는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음악이에요? 미처 돌아가요. 자기 한풀이가 되가지고 가락도 질척대니까 싫다는 거예요. 가사만 그냥 맹탕으로 들이미는 거,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게 래퍼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래퍼인데 어른들이 하는 거는 어른 래퍼, 고등학교 나와서 하는 거는 고등 래퍼. 기성 세대가 보면 기가 차요. 도대체 어디까지 미처 가는지. 어디까지. 그런데 조금 더 있으면 그것도 덜 미친 거예요. 또 있을 거예요. 또 몇 년 뒤에 가면 더 미친 게 또 나올 거예요.

미완료 때문에 악마가 계속 부추깁니다. “너, 한 못 풀었잖아. 너, 한 아직도 못 풀었잖아. 너 한 더 풀어야지. 그래서 되겠어? 네가 왜 한을 못 풀었느냐, 착함이 덜해서 그래. 교회를 못 섬겨서, 선교를 안 해서 그래. 하나님을 못 섬겨서 그래. 더 섬기고 더 완벽해봐. 그러면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 보상해 준다고. 믿어!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믿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게 바로 악마의 수중을 우리가 경과해야 돼요.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십자가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뭐 이론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악마에 메어있는 몸이 되게 하셔서 우리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을 빠져나오게 하셨구나.’하게 하는 거. 그게 진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십자가,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의 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완전히 납작하게 돼요. 납작한 경계선이 되는 겁니다. 광주 강의에서는 그걸 와플이라고 했는데 와플은 두께가 없어요. 거기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아의 폭이 없어요.

그냥 경계선이에요. 이쪽 아니면 저주, 이쪽 아니면 복이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폭이 없어요. 아브라함은 납작하게 되어 버렸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그냥 선이에요. 선. 따라서 우리가 증거 하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의 수중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 수중에 있음을 방해하는 세력이 우리의 폭을 넓히려 하고 우리의 가치를 확장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주여, 날마다 응축하게 하시고 납작하게 하셔서 그냥 주님의 십자가의 기준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