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주향
시간의 중첩 (마 24장 32절-39절) 대전- 98강
이근호
2018년 3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32-39
(마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장 32절 부터입니다. 요번에 제가 이스라엘을 갔다 왔잖아요. 거기에 실린 동영상에 보면 성전 건설 현장에 관한 만화 영화를 올려놓았어요. 네모로 다듬은 석재를 A지점에서 건설 현장인 B지점까지 어떻게 옮겼나 하면 원형의 나무틀을 만들고 가운데를 네모로 파서 안에 석재를 집어넣고 고정한 뒤 원형의 틀을 옮겨 가지요. 이것을 보고 제가 느낀 점은 석재가 우리라면 우리는 스스로 천국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형의 틀이 우리를 감싸 버리면 이것이 예수 안 또한 십자가 안, 성령 안 같이 주님은 아버지를 아시잖아요. 그래서 강도와 세리를 자기 품 안에 품어버리십니다.
강도와 세리와 창기를 담아서 주님이 불러 천국가면 저절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저절로 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와 세상 사람의 차이점은 나를 주목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고 끝까지 나를 주목해요. 나 외에 다른 대상을 주목할 수 없어요.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나에요. 그러나 성도는 날 출발해서 주님이 하신 일어 꽂혀 버립니다. 주님이 하신 일에 꽂혀 버리면 주님 안에 놓여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요. 군대에 가면 나는 악랄한 자가 됩니다. 악랄한 자부터 시작해야 되요. 그 악랄한 자를 주께서 군대에 보내서 거기서도 구원하시는 구나!를 느끼는 겁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끝나면 곤란하고 나로부터 출발하되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나는 착해졌다? 악랄하다? 여전히 악랄하다. 나는 여전히 못돼 먹었는데 주님이 하셨다고 이것이 아까 말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해서 본인의 이야기를 본인이 하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셨다. 어디서?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이게 굉장히 함축된 말인데 어려워요.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는데 하늘이 아니고 땅에 와서 스스로 창조해요. 땅에 와서 자기 이야기를 본인이 하니까 인간은 이미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성도인데 그렇지 않으니까 자기 생각만 하겠지요.
자기 생각만 하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 가지이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가를 자꾸 생각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건 뭐냐하면 사단의 마음이 있어서 나는 나를 스스로 창조한다고 하나님을 흉내 내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지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등.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1 쯤 되면 “엄마!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께요!”하면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래퍼 될래요. 하지요.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대요. 또 너는 뭐할래? 베이스 기타리스트 된다고 하지요. 희망 사항이 다 그런 거에요. 베이스 기타하는 게 희망 사항이 됩니까? 연극배우 할래!
이런 즉흥적인 것, 또 너는 뭐할래? 게임해서 게임 왕이 돼서 프로 게이머 할래!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입력된 것 중 납득이 되는 것들의 조합이에요. 자기가 납득된 것이 뭐냐하면 만약 아이가 12살이라면 1살부터 11살까지 경험했던 것이 평가 기준이 되요. 새로운 경험이 왔을 때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11살 까지 살아온 구축된 모든 것들이 기준이 되서 다음 경험을 좋다! 나는 받아들인다 안 받아 들인다를 자체적인 방어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요. 인간은. 만약 아이가 17살이라면 1살부터 16살까지이고 20살이라면 1살부터 19살까지겠지요.
그런데 12살 때 그 부모가 이혼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그 때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계속 남아 있는 거에요. 지금 61세라면 59세까지, 그래서 인간이 보는 세계관은 믿을 게 못되요. 그냥 독선적이에요. 자기가 살던 동네에 자기가 생각했던 그 인식에 맞춰서 전부 결정하는 겁니다. 만약에 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하면 그 딸이 남편을 고를 때는 누구 같은 남자? 내가 좋아했던 아빠 같은 남편이면 OK!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선택 기준, 결정 기준, 판단 기준이 일방적이다. 오직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일방적이에요. 너무나 개인적 사견이에요. 이것은 절대로 일반화 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인간들에게 납득되고 설득시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본인 이야기를 해 버려요. 그래서 아무도 못 알아듣지요. 그러라고 하신 이야기에요. 아무도 못 알아들도록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왜그러냐 하면 너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나이가 40세라면 1살부터 39살까지의 일방적으로 구축된 독선적인 자기주장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뭐냐 요한복음 6장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가 믿음이어야 되요.
진짜 믿음은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 안에 밀어 넣었습니다라는 예수님의 행함이 내용으로 되는 것만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당신은 교회에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주님께서 가게 하셨습니다. 항상 자기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는 거에요. 자식이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어떻게 낳았습니까? 주께서 주셨습니다. 항상 믿음의 내용이 수동적으로 되는 겁니다. 이번에 또 잘하셨는데 어떻게 공부를 잘 하십니까? 주께서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 위주가 되면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설교 준비한다고 책 많이 읽었습니다~ 기도도 빡세게 하고~이렇게 되면 한참 뒤엔 얼마나 오류인가를 알겠지요. 지난 설교 때도 그런 이야기 했다고 한소리 들었는데 뭐냐하면 남자가 수염을 기른다. 그게 싫다. 그런데 미국의 이상현 목사님은 빼고 피부가 약하다 하니까 빼고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왜 그리 싫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탈랜트 중에 수염을 기른 것이 얼마나 꼴보기 싫던지 거기까지만 해야 되는데 열이 받아서 오십도 안 된 사람이 인생 뭘 안다고 수염 길러서 도인처럼 길게 해가지고 하느냐라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 놀라 개인 적인 제 사견이라고 붙였습니다만은
60세가 돼서 보니까 50때가 시근(철)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내가 나중에 70세가 되어 보면 50때 시근 없다던 그 60때도 시근 없는 것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이런 것은 일방적인 사견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일반화 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한 거에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50이 됐든 60이 됐든 70이 됐든 예수님의 이야기는 영원해요.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 끼리 만나야 돼요. 일시적인 것은 영원을 담을 수도 없고 영원은 일시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건 뭐냐하면 우리가 평생 살아도 시근 없는 인간이다. 나 밖에 모릅니다.
32절을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이렇게 해 놓고 본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자기 이야길 한다고 했지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할 때 제자들은 또 오해한 거에요. 자기들이 무화과나무인 줄 알았어요. 자기들이 무화과나무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도 아니에요. 이 대목을 모든 주석과 설교와 목사들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봐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하니 마지막 때가 온다고 뭘 생각하냐 하면 제 3 성전을 건축하고 핵폭탄 떨어지면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이니까 이스라엘이 드디어 이스라엘답게 되려고 전쟁이 벌어지면 그 때가 마지막 때라고 7년 환란이니 해가며 돈 보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요.
이 본문을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이다 하는데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이야기 속에 무화과나무가 하나의 소재로 들어있는 거에요. 소재로 들어갔다는 말은 여기서 이건 누굽니까? 저건 누굽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어떤 농부가 땅을 팠는데 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덮어 놓고 자기만 알고 그 땅을 사서 기뻐했다. 이 농부는 누굽니까? 보물은 누굽니까? 라고 묻는데 그렇게 풀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한 것이지 농부는 여러분입니다라고 하면 일관성이 없어요. 그 때는 그런데 다른데 가면 딴 소리를 해야 되요. 거지말로.
666은 악마의 숫자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성전 지으려고 모은 금의 무게가 666달란트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마귀의 전당인가? 멋있게 숫자풀이를 해야 사람들이 교회와서 진리가 여기 신천지에 있구나!하고 돈내지요. 신천지가 이 짓해서 크게 세워진 겁니다. 신천지나 기존 교회나 똑같아요. 평소에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천지도 기존 교회에서 나온 거라 야! 저기에 아이디어를 조금만 보태면 멋진 교단 하나 만들어 지겠다해서 나온 게 신천지이고 이만희가 만든 것이고 어떤 대비책을 우리에게 준 게 아닙니다. 대비책은 없어요. 없어야 되요. 대비책 세우지 마세요.
그냥 가라하면 가는 거에요. 못 되먹었은 것을 알고 무슨 대비책이 있어요. 대비책이란 지금 말고 더 나아진 나를 자꾸 상정하기 때문이고 어떤 희망이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상태가 싫다는 뜻이고 그것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는 뜻이고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을 끊어버렸다는 뜻이고 결국 미래에 괜찮은 내가 있다는 말은 지금은 감사를 못하겠고 내 뜻대로 해주면 그때는 감사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래하는 셈이 되버려요. 이렇게 어떤 목적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지름길이에요. 목적이 안 생길 수가 없지요. 사람은 목적 때문에 사는 데,
그렇더라도 목적이 생기거든 또 실망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하고 항상 성경은 완벽해라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 하지요.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뭐냐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지요. 무화과나무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깝지요. 이건 뭐냐하면 성전이 붕괴되는 거에요. 무너지죠. 본문 35절을 보면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되어 있고 33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2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요. 예수님은 성전 속에 들어가요. 성전이 무너지면 누구도 무너지는 거에요? 예수님이 무너지는 거에요. 이 말은 예수님이 성전 무너지라고 예수님을 포함해서 잡아당기는 겁니다. 제가 삼손 이야기 했지요. 삼손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는 살고 블레셋을 죽이는 게 아니에요. 너 죽고 나 죽자 해서 기둥에 자기를 묶고 자폭했지요. 자폭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무화과나무가 연하여지고 여름 되는 것도 예수님을 위한 소품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무대에 세팅된 것들이에요. 그 중에 제자들도 있는 거에요.
모든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나팔 소리 전부 예수님 자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소품들로 있고 그때그때 마다 등장해야 되고 씬1, 씬2 할 때 마다 등장 인물 바뀌고 배경도 달라지잖아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면 아이들이 인형극을 하지요. 요들레이요~인형극을 하는데 제일 막내인 꼬마가 배경을 딱딱 바꿉니다. 목소리가 큰 양치는 소년의 소리가 왕자에게도 들리고 소녀에게도 들리고 하면서 배경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이 하신 일의 코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때마다 착착 등장하는 겁니다. 회전 초밥집의 접시들처럼 그때그때 마다 맞춰서 자신의 코스를 밟아서 세상을 무너뜨리신다.
그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자폭이니까 예수님도 죽고 세상도 죽고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는 거에요. 그것이 다 이루리라 35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다 죽고 난 뒤에도 주의 말씀은 살아남는다는 말이죠.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시간 자체는 없습니다. 1. 시간은 없다 2. 현재는 없다 같은 말인데 현대 물리학에도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현대 물리학에는 현재의 우주가 다가 아니고 현제의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우주가 있어야 설명 되요. 다중 우주론이라고 하는데 왜 다른 우주가 있어야 하냐하면 그래야 중력에 대한 문제가 풀립니다.
그러면 현제의 우주가 시간이 현제에서 미래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잖아요. 이것을 시간의 비 대칭성이라하고 물리학자들이 말하길 모든 것엔 대칭이 있는데 딱 하나 시간만은 대칭이 없어요. 흘러가면 그만이다 말이죠. 모든 것은 반 쪼개면 다 대칭이 되는데 시간은 대칭이 없어요. 시간의 비 대칭성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현제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지금 사건, 지우개를 떨어뜨렸다. 이건 과거잖아요. 과거지만 다른 우주에선 5일 후에 일어날 사건이에요. 다른 우주에선 여기서의 과거가 미래가 되고 동일한 사건이지만 어느 우주냐에 따라서 그 사건의 시간은 따로 따로 정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보다 우선되는 것이 물리학에선 빛의 속도이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변함이 없어요. 빛의 속도 때문에 뭐가 달라지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달라요.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면 시간과 공간은 달라진다. 달라진다는 말은 인간의 자의식, 인간의 자기 시간관념도 없어진다. 시간은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의 기억 속에서, 두뇌 정보에서만 시간은 흐른다. 쉽게 이야기해서 살아 있을 때는 시간을 느껴요. 그런데 치매에 걸린다든지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 장기 기억만 남아요. 그 말은 현재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에요.
현재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현재는 장기 기억 속에서 과거가 되어 버려요. 그때의 내가, 내가 되는 겁니다. 혹시 꿈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몇 살 때의 모습이던가요? 거의 현재의 모습은 안 나타나지요. 자기가 가장 예뻤을 때, 어렸을 때, 꿈속에선 피곤 한 줄도 몰라요. 젊을 때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그때 그 모습을 안 잊어버리려고 평소에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쁘고 하고 싶은 것 다했던 것, 아프지도 않고 산으로 강으로 뛰어 다녔던 그 모습을, 꿈속에선 피곤 한 줄도 몰라요.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해요. 왜냐하면 꿈은 하나의 이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요소만 모아서 세팅해 놓은거에요.
이 말은 내 의식 안에 장기 기억 속에 지금은 볼 품 없지만 내가 나에게 인정받는 그 모습을 안 놓치려고 꾸준하게 있는 겁니다. 그것을 향수라고 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향수에 뒤 돌아보며 살아요. 내가 옛날에, 옛날에 이런 것을 계속 이야기 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왕년에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 왕년에 못 한건 이야기 안하고 잘한 것만 이야기 하고 그때 이웃집 아가씨가 예뻤고 지금은 늙어 죽었는데(웃음) 그때 세팅된 관계들 있잖아요. 용돈 주던 친척들, 꿈속에 나타나요. 나타나서 옛날에 내게 이득이 되었던, 편안하고 모든 근심 걱정이 해소된 상태. 그 행복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향수가 삶에 생기를 줍니다. 힘을 불어 넣어 줘요. 힘들어도 그 때를 생각하면 다시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언젠간 멋진 날이 오겠지! 그러나 인간에겐 과거 밖에 없다. 왜 기억에서 나오는 거니까, 시간은 우리 안에 들어오면 기억이 되요. 그러면 기억 되지 않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시간은 기억됨으로 시간으로 의식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미래를 주어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2018년도가 예를 들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연도가 2135년이라고 한다면 그 중간의 사이는 완전히 무시해요. 왜냐하면 미래를 미리 알았으니까. 현재 다음에 미래가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위에 미래가 있어요. 함께 공유한다니까요.
제가 2135년을 이야기한 이유는 그 때 어떤 혜성이 나타나서 지구와 부딪치고 피할 길이 없다고 얼마 전에 나사에서 발표했어요. 우리에겐 해당 사항 없어요. 죽고 없을 테니까.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현재에 미래를 얹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이기에 사실은 없는 건데 미래가 우리를 누르니까 주의 나라가 되요. 그래서 성도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다시 말해서 미래의 일을 현재 우리가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배제해버리고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때가 되면 내가 다시 와서 멸망시킨다. 그 이야기는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어 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현재를 만드신 분이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이유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래적인 일을 이야기 하시니까 예수님의 이야기와 포기 되지 않는 내 의식과는 연결 고리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주님께서 나를 소품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일을 벌이시는 거에요. 이게 로마서 14장7-8절에 나옵니다.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예수님이 하는 고백을 성령 받은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할 때 너희가 관여하고 변경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해야 될 나의 일이다라고 일방적인 선포를 해버리지요. 그것을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입장과 똑같이 이야기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야! 내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어도 주께서 죽을 타이밍이 돼서 죽으라고 한 주님의 일의 일환으로 과정으로서 나를 죽게 하는 거야! 로마서 14장에서와 같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주의 일을 발산하고 있다. 주의 증인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지요. 성령 받은 전제로 하겠지요. 로마서 14장 6절 끝에 보면 감사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감사하느니라 해놓고 감사한 이유를 죽 이야기 하는 거에요. 내가 필요한 게 있는데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감사가 아니에요. 필요한 것을 줬든 필요한 것을 안 줬든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의 기준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난 겁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다 감사한 것이고 주께 필요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난 사건.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주께서 필요해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잃어버린 것도,
아까워라, 아까운데 누가 다시 찾아 줬다. 아이고! 기쁘다. 여기서 뭐가 생각나냐 하면 잃어버린 양이 생각나지요. 어떤 피아니스트가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걸핏하면 가방을 잃어버려요. 하도 복잡해서 팬들이 와서 싸인 해달라고 해서 하고 나면 가방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아주 잃어버린 적은 없어요. 5일 만에 찾는 거에요. 뭐든지 잃어버렸다가 한번 찾아보세요. 갑자기 없던 감사도 확 나온다니까요. 정말 사소한 것. 정말 사소한 단추 하나라도 정들었던 단추 잃어버리면 그 정 때문에 꼭 찾아야 되요. 못 찾으면 일이 안 되요. 잃어버리기 전에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회수하도록 늘 이렇게 주안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는 방식을 우리에게 사용하십니다. 본문36절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여기에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이전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누구의 지시를 받냐하면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은 누구의 지시를 받냐하면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요. 예수님이 모르신다고 한 것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런 고백을 하도록 조치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하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땅에서 이루어져야 되요.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철저하게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냐하면 철저하게 순종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미리 다 알면 안되요. 철저하게 순종해야 되요. 땅은 인간의 세상이거든요. 인간의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있는 예수님이지만 아버지의 성령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따라 꾸준히 땅에 자신의 주 되신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미리 알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게 되지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기 전에 미리 다 안다고 하면 “나는 죽어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날 껄!
본인이 미리 알아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히브리서에서의 통곡이란 게 필요치 않아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이 연기한 것 밖에 안되요. 철저하게 순종 모드로 가야 되요. 예수님은. 아버지만 아시고 나는 모른다는 모드로 가야 되요. 왜냐하면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우리에게 왜 기쁘냐 하면 천국이 하늘에 있어 우리가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몸소 땅에 내려와야 천국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동쪽으로 가는 곳을 막아 놓으셨잖아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 에덴동산 동쪽으로 가는 곳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하나? 생명나무가 친히 땅으로 방문을 해줘야 됩니다. 죽음 밖에 없는 곳에 생명나무가 터야 되요. 생명나무가 트려면 죽음마저 하나님의 뜻인 언약대로 죽어줘야 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자기 몸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죽음 안에서만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영생과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있는 자리에서만 영생이 주어져요.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서만 영생이 주어져요. 그래서 영생을 줄 때 하늘을 쳐다보라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내 죽음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죽음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알려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그 현실을 우리에게 확인 시켜 주는 식으로 십자가 안에 있음을, 죽음 안에 들어 있음을 예수님 안에 들어 있음을 확인케 하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천국의 삶을 매일 같이 경험하게 되요. 천국의 삶이 뭐냐? 첫 째 시간에 이야기 했어요. 1. 자기 생각 안하기, 자기를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치매 걸려도 안되요. 자기 기억이 있어서 안되요. 자기 생각을 안 하게 되면 그동안 가리웠던 주님이 나타납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커튼을 두 개를 예를 들었는데 예수님이 배후에 계시는데 앞에 우리 생각이 있어 맨날 우리 생각만 하거든요. 거기엔 나의 일대기, 나의, 기억이거든요. 기억속에 내가 15살 때, 20살 때, 30살 때, 맨 날 이걸 우려먹고 이러고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이게 뭉개져요. 커텐이 주저 안습니다. 커텐이 찢어지는 거에요. 장막이 찢어지는 거지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주님께서 우리 뒤에 턱하니 서 있는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에서는 문 밖에 서 있다고 해요. 괜히 우리는 혼자 안달나서 초조해 했고 희비가 교차하는 온갖 곡절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하나의 무늬라고 했지요.
얼룩만 남기고 평생 동안 발광을 해도 죽을 타이밍에 죽고 살 타이밍에 사는 건데 쓸데없이 앞에서, 왜냐하면 남들이 이걸 주시하니까 남을 의식해서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자랑질하려고 자기 증인되려고 같이 열불내고 협상하고 아부하고 하는 거에요. 우리는 천사로부터 미투 당해야 되요. 전수조사 받아야 되요. 이런 것이 전부 무너지게 되면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 때문에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일평생이 연쇄 고리처럼 쫙 꿰어져 졌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한순간 한순간이 사랑, 사랑, 사랑으로 꿰어져 있어요.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남부끄럽다고 하잖아요.
로마서 1장에 제가 좋아하는 귀절이 있어요.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복음을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을 가죽옷으로 입히셨잖아요. 이제는 아담처럼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복음이 있는데 세리와 창기가 강도라도 구원시켜 주시는데 복음을 생각 안하고 자체적으로 부끄럽게 여겨 버리면 누구의 가치가 모독 받는 겁니까? 복음의 가치가 모독 받는 거에요. 나 때문에 예수님의 가치가 박살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있는데 그 소중함은 생각 안하고 내 것 자랑할 것 없다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자기가 밉다고 한다면 그는 누굴 위해 사는 것이 되냐? 백날 해도 인간 안 되거든요. 그런데 고맙게도 날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시고) 커텐처럼 나중엔 퇴색되요. 본문에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고 한 것은 제발 아무도 몰라라에요. 아무것도 알 필요 없어요. 내일 일은 내일 알아서 하실 거니까. 내일일은 몰라야 되요. 알면 마귀에게 시험 들어요. 내일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자기 성경보고 기도하고 나쁜 짓 안하고 이런 것이 뭐냐하면 내일엔 잘 될 나를 자꾸 상상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내가 알고 싶어 해요. 그것은 하나의 탐욕이고 욕심입니다. 본문37-38절을 봅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복음엔 사고 팔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가 성경을 덮어 버리면 이것이 현실의 전부입니다. 인간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가 현실이에요. 더도 덜도 말고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거기에 주님은 인자의 때를 보태버립니다.
그런데 성도는 인자의 때를 염두에 두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성도이고 불신자는 그런 것 없이 인자의 때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거에요. 주일 낮에도 이야기 했지만 불신자의 특징은 폼재기하는 거에요. 이것을 두자로 하면 허세, 특히 남자들의 허세를 보면 폼에 죽고 폼에 살아요. 노아의 방주가 왜 있냐 하면 두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와 언약이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 날은 새 언약. 성도는 왜 있느냐?
바로 예수님의 새 언약을 고려하지 않는 이 세상 전체가 불바다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너나 나나 똑같은데 우린 한 가지는 더 안다! 인자가 타이밍 맞춰 오신다는 것. 안일하고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자. 현재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인구가 75억이에요. 자원이 부족합니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쓰는 인구는 너무 많아요. 다른 방법은 뭐니까? 다른 행성을 찾는 화성도 마음에 안차서 프록시마 b 라는 행성이 있는데 거리가 빛의 속도로는 2년 반이 걸리는데 로켓 개발하면 20년 만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 프록시마 b는 태양계에서 제일 가까운 행성이자 적색왜성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에서 발견된 외계 행성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외계 행성이다.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을 돌고 있다. 크기는 지구의 1.3배 정도로 지구와 유사하고 지표면은 단단한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으로부터 4.24광년(약 40조 1104km) 떨어져 있다. 태양의 12% 정도 크기인 프록시마 켄타우리의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에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는 적절한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그곳에 가 본 들 똑같은 인간들 같이 가는데 자원이 부족해서 불행한 게 아닙니다. 상대방 때문에 불행하고 상대방은 나 때문에 불행하고 상대방도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는 진정 내 모습을 못 찾아서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야 된다는 고집이 있잖아요. 고집덩어리 이게 문제에요. 본래의 내 자리를 못 찾았기 때문에 가짜인 나를 나라고 우기면서 나만 남고 나머지는 다 죽어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화성에 가서 산들 어디에 가서 산들 어디가도 마찬가지에요. 이번 이스라엘을 제 아내하고 이상윤 목사님하고 같이 갔거든요.
가면서 제 아내가 걱정한 게 있어요. 멀리 있을 때는 복음으로 형제이고 친구라 했잖아요. 그런데 멀리 있을 때는 반갑습니다. 복음 안에서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했는데 10일 동안 같이 동거동락을 하면 과연 계속 좋을까? 우려했는데 감사하게도 처음 만날 때 보다 더 좋아졌어요. 서로 살아 온 환경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구석이 있어요. 그렇게 맞추는데 신혼부부는 3-4년 걸립니다. 그렇게 맞춰지면 다행이고 20년해도 안되면 졸혼 해야 되는가 참다 참다 자식 결혼시켜 다 보내고 갈라서는 겁니다. 도저히 안돼요. 안되는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나는 문제없어요?
내가 상대방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 안다고 내가 고쳐집니까? 절대 안 고쳐져요. 그러면 왜 삽니까? 아까 말했듯이 주께서 붙여 주셨기에, 둘 다 못난 것 붙여줘서 나중에 천국에서는 그 인간하고 살지 말고 주님과 살라고 한 평생 신물 나도록 경험해서 천국의 기쁨이 배가 되게 주여! 천국 어서 보내 주시옵소서! 이 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왕 태어난 것, 못 믿는 건 할 수 없고 죽을 다음 생에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실컷 온갖 서러운 경험 다해요. 그러면 주님은 네가 문제야! 그 문제 있는 것 까지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후딱 만나고 싶습니다. 미움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아직도 무너져가는 커텐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자기 이야기를 우리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행에 옮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이미 주와 함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