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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태복음 5장 1-3절 / 이스라엘팔복교회설교 (2018030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태복음

마태복음 5장 1-3절 / 이스라엘팔복교회설교 (20180304)

정인순 2018. 3. 10. 22:16

 

 이스라엘팔복교회설교 (20180304 이 근호목사)

마태복음 5장 1-3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언급할 때 심령과 관련시켰습니다. 기존에 있는 심령 가지고서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것이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 심령이 어떠해야 되는가?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고 했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그 모델은 바로 예수님 본인이 되는 거예요. 심령이 가난한 그 분이 이 죄 많은 세상에 어떤 자국을 남기고 갔는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엑스레이로 마음을 찍는다고 해서 그 흔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줄줄 흘리는 거예요. 실제적인 흔적들을. 이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 흔적들을 따라서, 그 흔적들의 자국,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흘릴 수 있는 자국을 남기신 거예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그 남김이, 본문 4절부터 나오는 대로,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계속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연속성, 그런 식의 의미가 이 지상에 남겨지는 거지요.

그러면 4절의 애통이라는 것을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끄집어내려면 이 세상이 애통케 하는 주체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환경 역할을 해야 되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본인이 심령이 가난하기로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상황이 그 사람을 심령이 가난하도록 생산해내는 그런 세상 속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 자세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절에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는 것과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한 대목에 있어서, 앞에 3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리고 10절에서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자, 박해를 받는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 말이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이제부터는 마음을 낮춰야지.’ 이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혼자 도 닦는다고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변에서 박해를 해줘야 돼요. 주변에서 핍박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얼마나 그것이 싫은 상황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상황이지요.

자진해서 힘들게 살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자진해서 심령이 가난하고 싶더라도 자진해서 심령이 가난하게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사탄이 도와줘야 돼요. 죄 많은 세상이 도와줘야 됩니다. 사탄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절대로 심령은 가난해 질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혼자 도 닦아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우기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예수님이 가신 흔적이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그 예수님이 가신 흔적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은 그 결과물이 나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생산이지요, 생산. 모든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세상이라는 그 팩토리, 공장속에서 예수님같이 접촉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사탄마저, 이 세상이 죄가 가득한 그것마저 생산해내야 될 것을 생산해내는 설비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동차공장이 되는 겁니다.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라고 되어 있어요.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가는데, 천국에 가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도 닦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옆에서 도와줘야 된다. 죄많은 세상, 사탄이 도와줘야 돼요. 악마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심령이 가난해질 수가 없는데, 그러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자리에서 무엇의 자리로 이동하느냐 할 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 자리에서 주님으로 가는 길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심령이 가난해져서 천국 가야지, 라는 시도는 처음부터 막혀 있는 거예요. 길이 막혀 있는 겁니다. 불가능한 거예요. 자리가 인간을 만들어내거든요. 예수님이 자리에서 비로소 팔복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11절에 ‘나로 말미암아’ 네가 남들에게 핍박받는다고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고, 네 자리에서 백날 핍박받아도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교만인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핍박을 받아서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져서 구원받겠다는 노림수가 있는 이상은 그것은 그대로 본인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이 그의 것이 될 수가 없어요. ‘나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주님이 받았던 핍박과 같은 접촉점과 체험이 공히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갈라디아서 3장 1절과 관련해서 이렇게 의미 지을 수 있습니다.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할 때 예수님과 너희의 관계를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십자가가 보인다고 이야기해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십자가가 보인다, 하는 이 이야기는 사실은 약간 길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주변이 좀 산만하지만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십자가가 안 보이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했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냐? 이미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숨 쉬고 있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말이지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는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너희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감춰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너희는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지금 하늘에 있다. 지금 카메라 들고 촬영하고 있고 저렇게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 이야기하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방금 전에 이야기한 차단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 쪽에서 바라보는 것을 시선이라 하고, 나의 의미를 담아서 ‘이것은 내게 필요하다’ 해서 보는 것을 응시라고 하는 겁니다. 응시를 내 쪽에서 하면서, 성지순례하면서 은혜를 받겠다고 꿇어앉아 있는 것, 그것은 내 쪽에서의 응시고 시선이에요.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보면 이것은 죽은 자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이미 차단되어 있어요. 그러면 응시는 뭐냐? 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안목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거지요. 이게 십자가의 응시가 되는 거지요. 십자가의 응시가 되게 되면 자리가 바뀌는 겁니다. 내가 있기에 내가 보는 응시와 시선에서 주님 보시기에 바라보는 응시와 시선이 있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 자리가 이미 죽음의 자리기 때문에 모든 종교적인 행태나, 예배나, 선교나, 헌금이나, 성지순례나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려요.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모든 행함조차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해도 죽는자의 행함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아까 본 골로새서 3장 3절과 연계해서 보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인 것을 매일같이 행위를 통해서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라 하는 것은 뭐냐? 이미 가치평가가 끝났어요. 어떤 행동을 해도 이것은 저주고, 심판이고, 죽음이라는 것으로 가치평가가 끝난 상태에서 성도의 자유라 하는 것, 이 몸을 가지고 하는 것은 뭐냐? 이미 가치평가가 끝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자유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어요, 거부하겠어요? 거부하지요. 거부한 것을 이미 아는 여유 속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 바로 자유지요. 주께서 거부하시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이처럼 편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 행동은 주께서 거부하는 것을 이미 가치평가가 끝난 상태에서 마음껏, 주께서 거부할 그 행동을 마음껏 즐기는 거예요.

왜냐? 우리에게서는 그것밖에는 나올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의 응시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한다는 말은 주의 성령이 주신 십자가 안에서 가치 평가가 끝난 상태에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는 상태에서 하는 이 모든 행함은 의미 없다고 하는 그 행동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모든 종교적 인물들과 세상 사람들, 사탄의 앞잡이들이 하는 주장에 의해서 우리는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비난을 당하는, 외로움을 당하는 입장에 있을 때 우리의 자리는 주와 함께 있는 자리고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주의 마음으로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결론은 간단해요. 즐기자. 쉽게 말해서 막살자. 어떤 나의 행동도 주께서 이미 거부하기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이미 그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무서워할 필요 없고, 죄책감 느낄 필요 없고. 죄의식은 계속 나오되 죄책감은 전혀 가질 필요 없는. 왜? 어떤 스스로의 책임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으니까.

가치평가 끝났습니다. “네 구원에 전혀 소용없었다. 그것은 교만이야. 너의 어떤 것도 교만이야.”라고 가치평가가 이미 확정된 입장에서는 우린 마음껏 평생 교만한 일을 해야 돼요. 성지순례 해야 돼요. 이 교만한 일을 하고 온갖 근사한 짓들을 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의 시선, 다른 말로 골로새서의 말씀대로 이미 죽은 자의 생명이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주여, 이런 죄 때문에 돌아가셨군요.”라고 하면서 더욱더 감사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세상과 절연된 상태, 끊어진 상태에서 느긋하게 그들이 하는 행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주께 범사에 모든 일에, 나의 모든 일을 무가치 하게 만드신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바라볼 때 산상설교가 모두 완성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리바꿈이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가는 것을 거부하시고 성령께서 주님의 자리에 친히 선물로 넣어주시니 우리는 비로소 가치 평가가 끝난 상태에서 우리가 하는 짓들이 얼마나 죄고, 거부할 만하고, 자만심과 교만과 자의식과 자기자랑뿐인 것을 항상 느끼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