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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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0:22-24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30: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30: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라헬이 본인이 유일한 야곱의 본처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자식을 낳고 그 이름을 라헬 본인이 짓는데, ‘요셉’이라는 이름은 그 요셉 당사자를 위한 이름이 아니라 뒤에 등장될 자식을 겨냥하고 암시하면서 지은 이름입니다. 이는 곧 자신이 본처에 합당한 조치를 하나님께서 해주셨다는 마음이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자식 가지기’에 정작 야곱 본인은 빠져 있고 오로지 하나님과 여인들 사이에만 상관하게 됩니다. 언약에 있어서 자식이란 언약의 제공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인간이 원하고 기대한다고 해서 ‘언약적 자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적 자식’이란 그냥 일반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특별한 인물을 통해서 ‘축복’ 아니면 ‘저주’이란 종결적 운명이 결정되게 됩니다. 따라서 이 특수한 위상을 갖고 있는 자식이기에 하나님의 특이성 있는 그 자식 생산에 관여하게 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 ‘언약의 자식’이 원형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자식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빼앗아버립니다.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린 자식’이 됩니다. 바로 이런 기능을 함유하고 있어야지만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도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림의 기능을 보여주게 되는 바로 그 기능이 유일한 구원자의 징표가 됩니다. 즉 이 세상으로부터 누구든지 잃어버림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되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부터 잃어버림이란 이 세상이의 사람이 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 그 자체를 ‘의미 있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 의미가 충족되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충족된 의미’를 찾고자 시도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만족스럽다고 여기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충족도는 떨어집니다. 그러면 또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기 딴에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순간, 악마는 마음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더 완전한 의로움이 더 남아 있는데?. 더 철저하고 더 희생적으로, 더 힘들고 어렵게 선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마저 정복해보지 않으련? 그러면 선한 행위에 있어 너는 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을텐데…”라고 말입니다.
더 낮아지고 더 희생적으로 살고 더 남을 위해 헌신을 해봤자 막상 그 현장에서 새로이 밝혀지는 것은 지금보다 더 자신을 괴롭게 해서 더 착해보이는 방식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미흡함은 애초부터 자신을 ‘의미있는 존재’로 간주할 때부터 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어 라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의미 있는 야곱의 본처’로 자처합니다. 형에서 이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자신의 권리라고 봅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30:6-8에 나옵니다. ‘단’ 즉 ‘억울함을 풀었다’는 이름이나 ‘납달리’ 즉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자식이 이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녀는 전혀 야곱의 본처 자리에서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아내이니 필히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손’을 자신의 몸에다 갖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그녀는, 언약의 아내에서 ‘의미’를 갖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무의미’에서 비로소 ‘의미’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라헬은 ‘의미’의 여인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무의미한’ 여인이어야 했던 겁니다.
그 사실은 마지막 자식을 낳으면서 알게 됩니다. 창세기 35:18-20에 보면, 라헬은 마지막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베노니’ 즉 라헬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해 자신이 죽어야 될 자라는 신세를 원망합니다. 마지막 자식 이름을 ‘슬픔의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바로 ‘언약의 자식’으로 인해 자신을 죽는 바로 그 관계가 진정한 이 땅에 하나님께서 남기고자 하는 ‘축복의 자식’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오른손의 자식’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만이 진정한 축복의 자식으로 자부했던 그 자부심은 라헬을 통해서 낳게 된 두 자식에 의해서 현실화됩니다. 하나는, 라헬의 자식이 여타의 자식을 지도자 입장에서 통합하는 위상을 갖는다는 겁니다. 둘째는, 그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 그 라헬의 자식은 본인이 ‘잃어버림’을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첫 번째 사례는, 마지막 낳은 자식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경로 속에서 ‘라헬의 묘소’가 관여한다는 사례입니다. 사무엘상 10:2에 보면,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고 되어 있습니다.
사적인 암나귀를 잃어버린 사울이란 청년은 그 암나귀가 인도자가 되어 사무엘 선지자, 곧 ‘하나님편’에 서 있는 사람을 만나고 라헬의 묘소에서 암나귀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는 잃어버린 지도자를 새로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곧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특별히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았기에 도리어 잃어버림(죽음) 자식으로 아버지에게 각인됩니다. 하지만 그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은 나머지 모든 형제들을 살리면서 언약 혜택 제공자 기능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18은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죽임을 당한’ 자식들은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세상 권력에 살해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표하는 표현이 바로 ‘라헬의 자식’입니다. 즉 예수님마저 라헬의 자식로 구성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준비했다가 언약을 통해서 제공된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의미가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12지파, 각 지파마다 12,000명으로 구성되어 총 144,000이란 언약을 부각하는 숫자의 천국 백성의 집단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마음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라헬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0강-창 30장 22-24절(요셉의 출생)1712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22-24절입니다. 구약성경 44페이지입니다. 창 30:22-24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딱 두 분입니다. 하나님과 라헬. 여기서 야곱이 빠져 있고 물론 그의 자식 요셉도 빠져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줬건만 실제로 야곱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이 지상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은 야곱이 아니고 라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라헬, 남자는 빠지고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그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생각해 두신 언약의 자식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때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도 이 지상에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여자가 두 명이라는 겁니다. 왜 두 명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개의 속성을 내뱉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저주도 함께 내뱉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이 이 지상에 도달하게 되면 필히 결과적으로 두 개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다 줘야 돼요.
하나는 저주고 하나는 축복, 두 개의 결과를 반드시 남겨야 됩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야곱에게 준 축복이 곧 에서에게는 저주가 된다는 사실, 한쪽에 축복을 주면 자동적으로 나머지는 저주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러한 약속을 남편 되는 야곱에게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두 여인,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의 자식을 자신이 가지겠다는 염원이 얼마나 강렬하겠습니까?
자기 할아버지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할아버지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할아버지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하나님이 대놓고 확정한 원리거든요. 이것은 창세전부터 숨겨져 있는 원리인데 그 많은 사람가운데 내가 낳은 자식한테 하나님이 약속한 복의 근원이 태어난다는 것은 보통 자부심이 아니지요.
그런데 라헬은 그 자부심이 자신만만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라헬의 시녀 빌하에서 나온 자식들 이름을 보게 되면 그 당당함이 보입니다. 30장 5, 6절에 보면,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비록 하녀가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이름 짓는 것은 라헬 본인이 이름을 짓는 겁니다. 하녀도 자기에게 종속되는 거예요. 이름을 짓는데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하면서 단이라는 이름을 자기가 붙이지요. 이런 식으로 자식을 얻었다고 바라보는 것은 평소에 라헬이 언니 레아에 대해서 어떠한 위상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나를 제치고 왜 야곱의 본처가 아닌 너에게 자식이 나오는가? 그것은 내가 보기에 엄연한 가짜라고 본 겁니다. 축복의 자녀는 하나밖에 없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자식들이 너무 많다고요. 그래서 자식들이 많지만 라헬은 어떤 자신감 같은 것, 확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언니가 백날 자식 낳아봤자 내가 낳은 자식,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름 붙인 자식이 복의 자식이다, 라고 ‘억울함을 풀었다.’고 한 겁니다. 억울함을 풀었다는 말은, 언니가 낳은 것이 진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보기에 하나님이 자식을 낳게 했으니까 내 위상이 언니 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대해서 억울함이, 분노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또 자식을 낳고서 라헬이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넘볼 것을 넘봐라, 이런 식이에요. 남편의 사랑을 받는 내가 본처지 덤으로 온 것이 어디 자식 낳았다고 행세하려고 하느냐, 하면서 내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한 확신은 오늘 본문에 보면 절정을 이룹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잉태케 해서 아들을 낳았잖아요. 아들을 낳았는데 라헬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요셉이라 하는 것은, 이 자식 말고 또 최종적으로 뭐가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요셉을 겨냥한 자식이 아니고 요셉 그 다음의 자식이 현재 있는 모든 열 한 명의 자식을 통합할 수 있는 복의 자녀가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뭐냐? 요셉은 요셉으로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미완이고 이것은 열린 구조가 돼요. 폐쇄구조가 아니고. 요셉을 통해서 슬슬 풀리는구먼, 요셉 + a(알파), 요셉 +1, 그 미지의 1이 모든 것을 마감하는 겁니다.
마감한다는 말은, 그 마지막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이 앞에 나온 모든 열 한 자식을 통할해서,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정말 복의 자식으로서 등극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라헬은 유보적인 이름을 붙였어요. 그 자식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 다음의 이름의 징후를 암시하는 이름을 줘버립니다.
그런데 이 라헬이 이런 식으로 형을 의식해서 경쟁한다는 것, 마치 이것은 뭘 닮았는가 하면, 남편 야곱이 형 에서와 싸웠던 그 모양새를 그대로 빼다 박았습니다. 야곱은 침묵하고 있고 두 여자가 ‘에서냐, 야곱이냐? 야곱이냐. 에서냐?’ 하는, 속여서라도 빼앗는 하나님의 축복이 미완의,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한 그 조치를 누가 대신하는가?
레아와 라헬, 라헬과 레아, 두 여자를 통해서 더 심화된, 더 깊이 있는 야곱의 언약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요셉 그 다음의 +1, 그 1로 마감이 된다면 그 자식을 미리 당겨서 우리가 볼 필요가 있어요.
이것을 왜 볼 필요가 있느냐 하면, 창세기 30장을 보게 되면, 아직까지 중간과정이기 때문에, 마감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자식들이 있게 되면 그 자식들이 다 복인 줄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창세기 35장 18절, 여러 번 봤습니다만 또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마지막에 라헬이 남편이 사랑하는, 누가 뭐래도 남편의 본처가 되는 자기가 아기를 낳으면서 죽게 됩니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그런데 그 죽는 계기, 이유가 뭐냐 하면, 마지막 자식을 낳기 때문에 죽었어요. 그러면 자식과 어미를 바꿔치기하는 셈이 되어버린 겁니다. 어미의 모든 심정이 마지막 자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라헬이……, 이제부터 어려운데요.
라헬이 진짜 자기 자신이 뭘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은, 뭘 얻고자 하는 것으로 대신해서 다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있어요. 내가 얻은 것에서 충족된다면 바로 그것이 알지도 못했는데 뭔가 내가 잃어버린 구석이 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여러분이 안다 치고 그냥 막 들어가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의미를 갖고자 하는데 그 의미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내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내 의미가 내 마음에 만족스러워야 되고 충족되어야 되거든요. 새로운 것을 내가 얻을 때, 쉽게 말해서 자식이지요, 자식을 얻을 때 만족한다면 그것이 곧 자기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존재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22장 2절을 먼저 말씀드리고 다시 창세기 35장을 말씀드릴게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주어졌습니다. 이삭이 주어지면서 아브라함은 비로소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이름에 맞는 의미가 충족됩니다. 그런데 본인이 추구하고 싶은 것이 있을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께서 라헬에게 자식을 줌으로 말미암아 의미는 하늘에 있는 그 의미의 창고에서 지상으로 제공되어야 되는 입장이에요.
그러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욕구는 무의미한 겁니다. 라헬은 무의미와 의미사이에서 진정한 의미는, 인간의 육적인 무의미에서 어떻게 얻을 수가 있고 어떻게 넘어설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 경계선을 타고 저쪽 의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언약적여자로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육에서 영을 뽑아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육에서 영이 나온다는 말, 영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거잖아요. 육은 의미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육은 저주받아야 되니까. 언약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허무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받아준다는 의미가 우리에게 새롭게 발생되는 그것이 언약이 일부러 찾아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언약백성들, 야곱이나, 라헬이나, 아브라함, 이삭의 경우에는 자기가 무의미한데 그 무의미함을 충족시킬 그 의미가 뭔가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그리움이라는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거든요. 문제는 뭘 잃어버렸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뭘 잃어버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자꾸 ‘이걸까? 이걸까?’ 자꾸 자리바꿈을 해요. ‘골프 한번 쳐볼까? 꺾꽂이나 해볼까? 교회를 한번 다녀볼까? 예수를 한 번 믿어볼까? 십자가 피를 한 번 믿어볼까?’ 어떤 학자가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평생을 싸대고 다닌다는 거예요.
이거 하면 내 의미가 충족되겠지, 라고 해보면 얼마 안가서 그게 허무로 마감됩니다. 내가 대전강의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 이야기를 했는데 조성진이가 쇼팽콩쿨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하게 되었지요. 또 선우예권이라고 콩쿨에서 몇 번씩 우승한 청년이 있는데 왜 콩쿨에 나가느냐고 하니까 생계형 콩쿨이라고, 그것 아니면 밥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상금 타서 먹고 살려고 피아노 친다는 거예요.
콩쿨에서 우승했다. 참 기쁘지요.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세계에서 최고로 잘 치니까. 하지만 그게 다냐 그 말이지요. 그게 얼마 가지를 않아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갈수록 인간이 점점 더 마귀 들려 가는 겁니다. 점점 더 미쳐가는 거예요. 이게 다라고 생각해서 막상 원하는 것을 충족했는데, 그 지점에 갔는데 그 지점에 가니까 마귀가 또 약을 올리는 거예요.
‘더 나가야지? 아니야, 이 정도는 되어야지? 더! 더! 착한 일을 더 해야지.’ 착한 일을 하니까 ‘더 해야지.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 너보다 착한 사람 많아. 더 당겨. 이쪽으로 다 당겨. 더 완벽하게 착해야지. 더욱 완벽하게.’ 허무입니다. 의미 없어요.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마귀가 ‘더 어렵게 순종해야지. 너 편하게 순종했잖아. 그래서는 안 돼. 더 혹독하게 너 자신을 때려서 순종해야지. 더 순종해.’
얼마나 평생을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까? 언약상황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충족된 의미는 땅에서 아브라함이 찾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인데 그 받았던 것의 내력을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어떻게? 잃어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의미는 하나님마저 이 땅에서는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고 잃어버린 그것이 의미인 겁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얻고자 하는데 허무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살 수 없는 곳에서 계속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래요. 떠나야 될 이곳을 마치 고향인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저도 가끔 꿈에서는 고향생각이 돼요. 고향이라고 해 봐야 여기 대구 땅을 생각하는 것인데 어릴 때 살던 곳, 대구의 성서라는 곳만 꿈에 나와도 생생해요. 들판이 있고 철쭉꽃이 있고. 그게 어릴 적 성서입니다. 비포장도로에 소달구지 외로이 가고 있고. 어쩌다 지프, 그냥 찝차, 아니면 낍차, 그거 지나가면 먼지 팍 일어나고.
어릴 때의 그곳에 가게 되면 후딱 집으로 가고 싶어요. 왜? 고향에서 너무 멀어졌으니까. 고향에서 멀어지면 불안해요. 애가 깨면 제일 먼저 누구 찾는가? 엄마부터 먼저 찾아요. 애 재워놓고……, 이러니까 꼭 해본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재워놓고 tv보고 있으면 응애, 하는 소리 들리면 엄마가 후딱 가봐야 돼요.
인간은 뭔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있다가 자궁에서부터 갈라진 그 지점, 갈라지면서 다시 엄마의 품을 그리워해요. 영원한 엄마의 품.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고 하는 거거든요. 원래 나왔던 곳이 원래 우리의 의미인데 이 지상에서는 아무리 비슷한 것들을 찾고 대체해봐야 의미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것을 해도 마귀가 집어넣어준, 마귀하고 사는데 적절하지요. 마귀하고 같이 지옥 불에 가는데 아주 적절하지요. 신과 함께, 염라대왕에게 일곱 번 재판받는데 아주 적절해요. 이 땅에 주어진 것, 골프치고, 고급 아파트 사고, 고급 차 사고……, 전부 다 이 지상이 발목 잡는데 적절해요.
교회 키우고, 부흥시키고, 선교사 보내고, 강의 한다고 돌아다니고, 이름 좀 나고, 신학박사가 되고, 이 전부가 다 마귀가 제공하는 우리의 의미라고 거짓말로 집어넣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언약 속에는 우리가 집어넣은 그것, 들고 날고, 그것과 함께 이 땅에 머무르고자 하는 내가, 주님이 집어넣어준 그 의미의 자식과 함께 아비가 되는 내가 함께 죽는 그것, 그것만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준 우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살고자 하게 되면 해답 없어요. 이 땅에서 죽고자 하면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라헬은 아직 그것을 모르거든요. 라헬이 자식을 낳게 되면 내가 충족되니까 이 무의미한 내가, 자식이 없다고 설움 받는 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나는 그 언약의 야곱의 본체이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그 라헬이 창세기 35장 18절에서 자식과 맞바꿔 가면서 죽어버립니다.
그 때 라헬은, ‘나는 끝까지 의미 없는 여자냐.’ 해서 자식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어요. ‘슬픔의 자식’ 나는 슬픈 여자, 너는 슬픔에서 나온, 진정한 내 진짜 의미는 너다. 자식이 인간의 의미거든요. 자식을 통해서 영생의 맛을 보기 때문에. 내가 죽어도 자식이 잘되면 내가 못되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자식이 자기를 대변해주고, 자기의 무의미를 대변해주는 유일한 의미로서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앞장세우거든요. 라헬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본처답게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라헬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왔어요.
이 땅, 무의미한 세계에서 진정한, 유일한 의미자로 무의미한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죽임을 당하는, 잃어버림을 당하는 그것이 언약이 이 땅에 나타난 모습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과연 언약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어떤 명제,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공식대로 앞으로 진척이 되느냐, 그걸 따져봐야 되겠지요.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라헬의 자식이 나머지 열 자식을 다 통합시키는 지도자적인, 왕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야 되고요. 두 번째, 그 약속의 의미는 이 땅에서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하면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야 됩니다. 누구 자식이? 라헬이 자식이. 또 하나는, 그 자식은 이 땅에 누굴 대신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잃어버림을 당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일이 사무엘상 10장 2절에 나옵니다. 이것은 대전강의에서 한 내용인데요. 잠간 언급하게 되면, 자기 집안 나귀 하나 잃어버려서 멋도 모르고 계속 암나귀만 찾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는데 그 암나귀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서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라헬의 묘가 있는 곳까지 옵니다.
대전강의에서 이 대목은 빠트렸어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무엘상 10장 2절에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그 뒤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요. 토털 다섯 명의 남자를 만납니다. 두 명의 남자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암나귀를 찾았다는 말은, 사울은 지금 암나귀를 잃어버린 상태에요. 오늘 설교식으로 한다면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의미는, 나는 의미 있다고 시작한 우리를 주께서는 무의미로 바꾸고 나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 무의미로 바꾸고 무의미로 바꾼 상태에서 하늘이 주신 의미를 집어넣게 되면 그 잃어버림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정립하게 되는데 그것은 처음 육의 의미는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언약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언약이 안에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이 있는 새로운 의미의 전달자, 운반책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거예요.
육은 무의미하면서도 자기를 의미 있다고 우깁니다. 나는 축구를 해볼까, 마지막으로 기타를 치고, 브루스를 한 번 밟아보고, 바이올린도 해볼까, 하는 식으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맨 그거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60넘어도 어떻게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느냐. 여행도 가보고, 베를린에 가서 음악회도 가보고, 친척이야기지만 그런 사람이 있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본인이, 나는 의미 없으면 죽겠다는 말이에요. 자살하겠다. 자살하기 이 전에 의미를 찾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언약을 만나게 되면, ‘내가 원래부터 의미가 없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자기 본래의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치고 그 다음에 주께서 의미를 주게 되면 이제는 그 의미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저 예루살렘에, 거기에 있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 어머니가 있어요. 여러분, 어머니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 어머니라는 말은 아무 속성이 없는 것을 어머니라고 합니다. 아무속성이 없는 것을 어머니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것을 관여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모든 것을 관여한다는 말을 하늘의 어머니가 지상과 관련지어진 어머니라고 표현되는 겁니다.
어머니라고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은 껍데기뿐이고 실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대로 한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하늘을 쳐다볼 때 하늘에서 그런 조치가 이어진 그 출입구를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라헬의 묘실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암나귀를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렸는데 두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나귀는 찾았다. 네 소기의 목적은 얻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그냥 무의미에서 무의미로 떠나버리지요. ‘사울아, 암나귀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서 너를 이곳까지 인도한 것이 있’는데 그 뒤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납니다.
그것은 축복의 제물을 사울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왕 됨을 회복시키는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드디어 왕을 찾은 거예요. 사울은 나귀 찾았고 이스라엘은 왕을 찾은 겁니다.
그런데 그 왕은 잃어버림을 기초로 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울이라는 제일 별 볼일 없는 지파, 사사기에서 다 몰살당하는 바람에 숫자가 제일 적고 별 볼일 없는 잃어버린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원하는 왕을 제공하되 하나님의 왕 됨을 고스란히 담아서 아무것도 아닌 사울을 통해서 만나게 합니다. 그것이 라헬의 묘실입니다.
이 근거를 이정도로 해서는 ‘이것은 미흡하네.’ 이렇게 되겠지요. 시편 105편 17절에 보면 라헬의 첫 번째 아들, 본처 자신의 첫 번째 아들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요셉이 국무총리 되기 전에 어떠한 잃어버림의 과정을 겪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쇠사슬에 상했다는 거지요.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이렇게 해서 그로 하여금 야곱의 집의 주관자로 삼았다고 되어 있어요.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리고, 요셉은 죽어버린 아들이 됩니다. 그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인데. 얼마나 사랑했으면 다른 열 자식에게는 안 입히는 유일한 채색옷을 요셉의 옷이라고 입혀버립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라헬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 자식이 있음으로서 사랑했던 그 여자에 대한 잃어버린 사랑을 계속해서 듬뿍 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요셉의 두 아들까지 축복해서 계속해서 요셉을 지도자로 만들잖아요. 그래서 잃어버림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잃어버린 자로, 아버지가 자기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 때 그게 바로 이 땅에 구체화된 언약의 의미에요.
언약의 의미는 그거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 가는 곳에 따라서 같이 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언약적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보내시고 아들 따라 같이 죽는 자만이 하늘에 도착한다는 그 복음의 원리가 구약 때부터 라헬이 죽음으로서 아들 베냐민을 낳는, 그래서 그 이름이 바뀌어서 의미를 새롭게 추가함으로 언약의 완성으로 마감되어 버리거든요.
자식 경쟁은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결정적인 증거로 두 개가 준비되어 있는데요. 마태복음 2장 18절에 보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해서 애곡한다는 말은 무슨 사건이냐? 아기예수님을 놓치고 난 뒤에 헤롯이 베들레헴에 군대를 보내서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어요.
그럴 때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죽은 자식의 그 의미, 그걸 뭐라고 하느냐? 야곱의 공동체에요. 야곱의 공동체를 보고 누가 우느냐? 야곱의 본처인 라헬이 통곡합니다. 야곱의 자식으로 보지 않아요. 라헬의 자식으로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다녀간 곳에는 예수님 때문에 울어야 될 사람들도 같이 생기는데 그들이 유일한 교회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천국백성이라는 뜻이에요.
레아의 자식이 아닙니다. 라헬의 자식이에요. 야곱을 대신하는 것은 라헬이고 라헬은 우는 여인, 운다는 그것, 왜 우는가? 우는 이유가 있어요. 이 땅에 사랑하는 자기의미를 잃어버렸으니까. 유일한 의미, 그렇게 찾고자 하는 의미인데 하늘에서 주신 의미가 이 지상에서 배척받고, 모멸당하고, 경멸당할 때, 귀한 것이 허접스럽게 취급받는 그 아픔.
저게 의미인데 세상 사람은 그걸 모르고, 저걸 그냥 던져버리고 그 대신 돈이나, 자기자식이나, 부귀영화나, 자기위신이나, 체면이나, 품위나, 자기 착함이나 그런 것이나 챙기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버리고서. 그 때 그 예수님의 아픔에 같이 동참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라헬의 일부로서 가담이 되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라헬이 낳은 자식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통합된 언약적인 백성은 어디에 나오는가? 마지막에 고난 받는 모습으로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지요. 5절부터 보면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그래서 열두지파 다 곱하면 14만 4천입니다. 이 여러 지파의 출발점은 어디냐?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요. 어린 양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 자신이 라헬의 자식으로서, 이스라엘로서, 유일한 의미자, 이 땅에서 유일하게 죽어도 다시 부활되는, 영생을 얻는 유일한 의미자가 예수님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라헬은 자기가 본처라고 본인이 알든 말든, 물론 라헬은 언니한테 지기 싫지요, 하지만 그것마저 충실하게 이용해서, 진짜 네가 낳은 그 자식이 언약의 축복된 그 기능을 야곱 그 시대에 충실하게 보여줍니다. 라헬이 낳은 그 자식인 요셉이 창세기 끝날 때까지 죽은 라헬을 대신해서 그 잃어버린 언약의 정신을 다 보여주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요셉을 사랑했는데 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버린 것처럼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버렸어요. 요셉의 채색옷에 피가 묻어 있었으니까요. 당시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없어서 유전자감식을 못했어요. 사람 피인지 짐승의 피인지. 어쨌든 피가 묻어 있었으니까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은 없는 겁니다. 잃어버린 겁니다.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것이 홀로, 혼자서, 유일하게 본인이 일 다 했어요. 누가 도와준 사람도 없었어요. 그저 요셉과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이 응해서, 요셉은 고생해도 주의 말씀대로 고생해야 되고, 쇠사슬에 묶여도 주의 말씀대로 묶이고, 그렇게 해놓고 혜택은 나중에 누가 입는가?
혜택은 나머지 모든 열 두 지파 형제들이 입으니까 하나가 축복받아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영향력의 구심점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동일한 언약의 기능, 언약의 법칙과 방식과 원리를 그대로 적용받을 때 바로 그것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열 두 지파, 14만 4천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잘되는 것이 의미 있는 줄 알고, 내가 남들 앞에 부러움을 사는 것이 의미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피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이,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영원한 하늘의 의미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것을 주 앞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