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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0:14-21 / 쟁탈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0:14-21 / 쟁탈전

정인순 2017. 12. 20. 21:25

 

 

쟁탈전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30:14-21

(30:14)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30: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30: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30:17)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30:18)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30:19)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30:20)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30: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자식이 너무 많이 생겨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언약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 주어진 언약은 ‘복의 근원’ 뿐만 아니라 ‘저주의 근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언약의 이런 내막을 나타내기 위해 언약의 가정에서 항시 극히 대조가 되는 두 명의 자식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과 이스마엘이요 이삭에게서는 야곱과 에서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체계를 이어가려면 야곱에게도 달랑 두 명의 자식만이 있다면 문제가 간소해질 것같습니다. 어느 한 자식이 복의 자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저주의 자식이 될터이니 말입니다. 이삭의 맏이 에서가 저주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복의 자식으로 결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곧 ‘나는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의 의식에서만 나옵니다. 복과 저주, 그 외에 그 어떤 중간지역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복입니다. 따라서 야곱을 복의 근원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야곱만이 복의 근원것이 합당하고 나는 복의 근원이 안 되어야 합니다”라는 고백이 선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자신을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 자진해서 인정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저주 받는데 자신을 양도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항상 자기 것을 지키는 것으로 자아성을 갖추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합환채 빅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마음 두고 살기에 누구도 라헬도 진정으로 남편 야곱을 사랑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라헬은 그동안 자신이 지켜왔던 품목 가운데 없던 새로운 것이 자기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주저않고 남편과 그 새로운 것을 교환해버립니다. 그만큼 라헬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야곱이 지닌 언약적 위상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의 근원’입니다. 하늘에게 천사들이 왕래하는 사다리가 야곱을 겨냥합니다. 누구든지 야곱을 건드리면 저주받습니다. 이 정도의 존재가 라헬의 남편 야곱입니다. 하지만 라헬은 거기에 최종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언니 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언약을 실체를 구현한 가정이 전혀 언약과 상관없는 두 여인이 설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창세기 24:60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집가는 누이 동생에게 오빠 라반은 하나님의 예언을 담습니다. 인류의 원수를 제거하는 메시야와 관련된 일이 시집가는 동생 리브가의 일생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그 사실이 역사 위에 취소됨이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 작업에서 남자는 빠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식이 낳지만 야곱을 의견이나 뜻을 드러내는 자식이 아니라 도리어 남편 야곱의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두 여인의 양보없는 투쟁 의지가 담긴 자식들이 출생합니다. 즉 태어난 자식들 속속 그 속에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 ‘언약의 여자’라는 특권의 위치에 두고 싸우는 양상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도, 애굽의 바로왕은 애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랄 왕 아비멜렉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언약의 가족이 가는 곳에 당사자들은 가만 있더라도 주변에서 불길한 징조에 휩싸입니다. 이것은 언약 구현이 결코 언약을 받은 당사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변에서 더 호들갑을 떨면서 범상치 않는 언약의 기운을 감잡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약의 가정에 무슨 일들이 언약으로 인해 벌어집니까? 야곱이 혼인해서 거주한 지역은 ‘리브가 친정’입니다. 이삭은 5촌 사이인 리브가와 혼인하고, 야곱은 외4촌간이 두 여인과 혼인합니다.

그런데 리브가에게는 심오한 언약적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언약적 내용은 리브가의 고향을 배경으로 언약 작업이 수행됩니다. 그 내용은 극히 세속적이고 비-언약적 바닥을 다 드러내보이는 작업입니다. 즉 언약 수행에 있어 아무리 자식을 낳더라도 그 어느 자식도 하나님의 복의 근원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자의 움직임이 전혀 언약적이지 않고 저주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과연 야곱의 어떤 면이 복의 구원에 부합되는 요소일까요? 그것은 야곱을 소외시키고 활발하게 자식 갖기에 열중하는 두 여자의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두 여인의 생각이나 활동은 전혀 언약달성과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사적인 사랑을 영원히 자기 소유화하기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를 위하여 자기 지킬 것을 사수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언약이 생각하지 않고 이들 두 여인의 움직임을 본다면 전혀 탓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일생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남편되는 야곱이 언약을 심기 위한 ‘복의 근원’이라는 점에 이 두 여인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나 그 결과로 태어난 자식들에게 ‘언약적 평가’가 떨어집니다. 자식이 없어 문제가 아니라 자식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언약적으로 문제를 유발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21절에 나오는 ‘디나’라는 레아의 딸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역시 12아들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디나’라는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비-언약적 내부성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34장에서, 이 막내 누이동생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자, 사적 정의감을 언약의 핵심이라고 오해해서 분노한 12 오빠들이 세겜의 모든 남자를 다 죽여버립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으로 공격의 표적이 되는 위기를 자체하게 됩니다. 과연 언약은 그렇게 해서 복을 이룰까요? 아닙니다. 12아들 중에 요셉에게 하나님이 꿈을 꾸면서 요셉은 본인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나머지 형들과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자가 되고, 이로서 야곱은 그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어긋맞게 축복하므로서 언약에 의한 복의 근원은 요셉으로 모아집니다.

이처럼 희생하는 자가 복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는 제자들 간의 쟁탈전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복을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9강-창 30장 14-21절(쟁탈전)1712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14-21절입니다. 구약성경 43페이지입니다.
 
창 30:14-21
 
“맥추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자식들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진짜 자식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삭. 그리고 이삭에게 진짜 자식은 야곱, 축복된 자식은 야곱밖에 없습니다. 에서까지 합하면 둘 밖에 없어요. 둘 중 하나는 가짜고 하나만 진짜, 둘 중 하나는 저주받을 자고 하나는 복 받을 자.

어떤 특정 가정에서 자식을 둘 낳고 둘이 같은 미래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 창세기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보통 축복과 저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를 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 기준을 이미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두 자로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그냥 말로만, 보이지 않는 말로만 온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뤄지는 특정인물이 있어요. 그 사람을 언약의 사람이라고 하고 또는 복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고, 이삭이었고, 그리고 밤에 잠을 잘 때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서 천사들이 왕래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둘 있었지요.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이삭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 자, 둘 낳고 축복이냐 저주냐. 항목은 달랑 두 개밖에 없어요. 축복이냐 저주냐.

축복이냐 저주냐 각 항목마다 대조가 되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지만 축복 저주가 서로 대조가 되고 비교가 크게 되니까 그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서는 셋도 필요 없고 넷도 필요 없어요. 달랑 두 명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창세기 27장 29절에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게 저주하면 저주가 주어지고 네게 복을 내리면 복을 받는다고 했을 때에 이 특권의 자리에 있는 야곱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가 있어요. “네가 뭔데 너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느냐. 네가 우리하고 차이가 뭔데? 어떻게 나의 운명이 너에게 종속될 수 있느냐? 그 근거를 대라.”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상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자신을 축복하는 이것은 사람들의 당연한 본성이거든요. 자기를 제쳐두고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축복한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축복은 네가 가져가라 너와 나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다면 네가 축복 가져가라. 내가 저주 가져갈게.” 그런 뜻이거든요.

이걸 누가 자진해서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야곱이 아니라면 이것은 곧 내가 야곱을 멀리해도 저주받고, 야곱을 축복해도 저주받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마는 겁니다. 강도가 와서 “네가 돈을 내놓을래, 목숨 내놓을래?” 하는 말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돈은 건드리지 말고 내 목숨은 가져가라, 이렇게 하면 목숨 잃고 난 뒤에 돈도 강도가 다 가져가잖아요.

강도가 하는 말이 목숨 내놓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돈 내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내리고 야곱을 저주하면 저주를 내린다는 그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복의 사람으로 정한 이상, 결정된 그 순간 야곱 외의 모든 사람은 어떤 결정을 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저주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결정 난 사항을 가지고 역사를 질질 끌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저주받을 사람들의 이유를 대는데 그들은 자기운명을 책임질 수 없는 일에 책임져야 될 과제를 주면서 그들을 채용한 셈이 되어버려요.

말이 복잡하지요. 운명을 결정할 때, ‘복 받을 자냐, 저주받을 자냐,’ 할 때 이미 야곱을 복으로 결정했으면 이것은 그 순간 자동적으로 야곱 외 모든 인간………, 모든 인간이라고 해 봐야 거기에 형 에서 밖에 더 있겠어요? 형 에서는 이미 저주받도록 결정된 거예요.

결정되었으면 에서는 뭘 해야 되느냐? 이런 면을 보입니다. 형인 에서입장에서 동생 야곱이 만약에 복의 결정이라면 야곱을 축복한다는 말은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나는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라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야곱을 축복을 해야 되는데, 그러한 책임을 져야 되는데, 어느 인간치고 ‘나 저주받아야 돼’라는 숙제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미쳤나? 네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나한테는 내가 중요해.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복 받아야 돼.’라고 나올 것이 뻔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결과적으로 야곱을 축복 못했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이 합당한 조치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사전에 결정해 놓아버렸어요. 그것이 언약의 개입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야곱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야곱은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복의 사람으로 결정 났느냐. 그런데 그 점은 야곱 본인도 궁금해요.

왜냐하면 야곱 본인이 뭔가 한 게 없기 때문에. 복 받을 짓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복을 받은 거예요. 오늘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일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남들로부터,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욕 얻어먹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천국 가는데 뭘 한 게 없다는 겁니다. 한 게 없는데 주께서 복의 사람으로 결정을 해버린 거예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도 그런 게 많은데요. 언약은 받은 사람들인 아브라함과 이삭도 본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처한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애굽 땅에 내려갔을 때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바로 왕에게 줬는데 바로 왕이 그날 밤에 혼쭐이 났어요.

아브라함이 뭘 생각해야 되느냐?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잘난 것이 없는데, 나는 비겁하게 밥이나 먹고 살고 그저 목숨이나 부지하려고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였잖아요. 그렇다면 참 비겁한 자인데, 그래서 벌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되는데 왜 저쪽이 받느냐 이 말이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운반체 속에 들어 있는 언약과 관련해서 저쪽에 벌을 내린 거예요. 아브라함 본인이 복의 근원이 아닌 거예요. 다만 복의 근원이 자기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그것뿐이에요.

전에 오뚜기의 예를 들었잖아요. 오뚜기를 보면 까불거리면서 좌우로 흔들어요. 그 안에 보면 쇳조각이 들어 있다니까요. 지가 잘나서 원위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천국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죄짓고 아무리 기울어도 안에 언약이 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기결정, 하나님의 자기증명이라는 말이지요.

이만큼 끝까지 책임지고 효력 있는 유일한 일이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을 준 그 사람을 통해서 외부로 알려주는 겁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린다고 하는데 그 바로왕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저 “이분 참 예쁜데 이분과 어떻게 되십니까?” “제 누이동생입니다.” “아, 그러면 누이동생 제 아내로 주시면 제가 당신에게 후한 상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했지 ‘보자, 당신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바로가 그런 것 생각 안했거든요.

그런데 그 아내를 건드렸다고 대국의 바로 왕이 화를 입은 것은 아브라함 속에 진짜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이 들어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이삭도 마찬가지에요. 이삭도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을 만났을 때 자기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아비멜렉쪽에서 오히려 더 두려워하면서 이삭에게 잘해줬습니다.

그 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아주 잘해줬어요. 아비멜렉 온 집안 여자들의 태가 다 닫혀서 임신을 못하게 되니까.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는 곳에 화를, 저주를 내려서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왜 그걸 숨겼습니까?” 저쪽에서 알아보고 겁을 집어먹고 복의 근원을 잘해주는 겁니다. 이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복의 근원의 과제고 과업이라는 말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달랑 자식이 두 사람 같으면 간단해요. 우리가 만약 그런 취지의 일관성 있는 소설을 써나간다면,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못생긴 레아가 있었는데 그 아내도 자식을 낳았고, 또 하나는 레아의 동생, 아주 예쁜 라헬도 자식을 낳았습니다.”

독자들은 이미 다 알지요. “누가 하나님의 복의 근원되겠습니까?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의 자식은 복의 근원이고 레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식으로서 나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면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의 경우, 야곱의 경우가 딱딱 구조가 맞아떨어지잖아요.

얼마나 알기 쉽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30장에 보면 자식이 많아도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처치곤란이라. 자, 열두 명, 앞으로 다 하면 열 두 명이 되는데 이 열두 명이 너무 많아요. 오늘 본문에서 여섯 아들을 낳았다고 했는데 레아자식만 따져서 여섯이고 여종 실바의 자식 둘까지 합하면 레아 쪽에 붙어 있는 자식은 여덟 명이에요.

8대 4로 갈라지는 겁니다. 8대 4로 갈리니까 이걸 둘로 나눈다는 것, 성급하게 언약도 모르면서 결론 대충 잡아서 나눌 수는 없거든요. 이 나누는 작업을 우리는 누구 손에 맡겨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누는 작업에서 진짜 아들은 어디 있느냐?

제가 지난 시간에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아무도 없느냐 하면, 지금 자식 낳는데 야곱이 전혀 개입하지를 못합니다. 야곱은 완전히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식 하나 태를 열 때마다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부각하려고 하느냐 하면, 남자 야곱은 아예 안중에도 없고, 여자 둘의 심보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에 있어서 남자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지상의 복의 근원, 언약을 여기에 장착시키는 데는 남자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증거가 어디 나오는가 하면, 창세기 25장 1절에 보면, 사라가 죽고 난 뒤에 나이 백세가 넘은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요.

남자는 이렇습니다. 자식을 몇 명 낳았나 하면, 자식을 여섯 명 낳았어요. 그런데 2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사라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여섯을 낳든 66명을 낳든 관계없어요.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에요. 이삭에게 모든 재산을 다 남겼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남자 쪽에서 낳은 자식은 소용없는 거예요. 언약의 주인공은 남자 맞아요. 하지만 그 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는 남자는 소외되고 그 남자와 혼인한 여자 쪽에서 언약의 실제 내용이 구성요소로서 다 채워지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에서 사탄을 이기는, 뱀의 후손을 짓밟는 메시아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의 이름은 하와, 생명입니다. 남자 이름은 흙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야 언약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있어서 새로운 자식 하나 등장합니다. 다섯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잇사갈이라 했어요. 값을 치렀다는 이름의 잇사갈을 낳습니다. 다섯 번째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을 낳기 전의 내력이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 내력은,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여자 쪽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으니까 여자 쪽에서 정리가 되어야 되는데, 라헬이 자식이 없으니 약속의 자녀 만들기 위해서 자기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줘버렸어요. 시녀를 남편에게 줬다 할 때 시녀의 자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녀는 그냥 애 낳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어이, 내 남편과 동침해라.”라고 명령하는 자는 본부인들이거든요.

시녀가 개입되지 않아야 될 그 자리에 본 부인들이 시녀 같은 발상을 가지고 기어이 언약의 자식을 낳겠다, 했으니까 결국 이 자식은 본 부인이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사고방식이 시녀라도 좋다. 그저 남편의 사랑만 차지할 수 있다면. 그러한 비언약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열 두 자식은 말짱 소용없는 겁니다.

어느 자식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식이냐? 그것은 따질 수 없어요. 몽땅 다 아니에요. 왜냐하면 여자 둘 다가 아니기 때문에. 둘 다 자격이 없어요. 그러면 자격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 일단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쪽은 동생 라헬 쪽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15절에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남편을 틀어쥐고 있는 거예요. 남편사랑을 다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레아의 첫 번째 아들인 르우벤이 합환채를 구해 왔어요.

합환채가 뭐냐? 그 당시 근동에서 ‘사랑의 사과’로 유명한데 일종의 최음제입니다. 성욕증강제, 비아그라같은 야생열매가 합환채에요. 붉은 꽃으로 피었다가 나중에 꽃이 지고나면 노란 열매를 맺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사랑의 열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르우벤이 구해서 레아에게 준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라헬이 탐을 낸 겁니다. 자기는 남편을 갖고 있고 언니는 최음제, 정력에 좋은 야생약재를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딜이 일어나요. 라헬이 그것을 달라고 하는 순간 라헬은 지금 전혀 복의 근원적 입장, 축복과 저주의 근원적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레아도 마찬가지지만 라헬은 지금 남편을 틀어쥐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남편 것이 아니고 남편이 자기 것이 되는 거예요. 평소에 자기 것들을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을 체크해 보세요. 자기가 지키는 것을 체크해서 전부 다 합산을 해보세요.

그게 여러분의 자아입니다. 내 자아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들어 있는 거예요. 내가 지키고 싶을 때 이것은 저주 쪽이에요. 남을 축복하려면 내가 지키는 것을 포기를 해줘야 합니다. 희생이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벌써,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생명, 목숨, 피로 값 주고 샀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하실 거예요.

어느 인간도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지키기 위한 리스트들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그동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그걸 포기해요? 남 좋으라고?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라헬과 레아의 입장은 언약을 모르는 세상입장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평소 살아가는 일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언약이 없다면 이들이 욕 얻어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남편의 자식을 낳고 싶어요. 그래야 자기자식이 되니까. 내 자식 얻겠다는 그게 뭐 탓할 일이고 지적받을 짓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하면, 우리는 언약이 없이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태어난 대로 사는 거예요. 열심히 수고해서 내 것 만들고 그 내 것을 꾸준히 지키고. 인생 그게 다 아닙니까? 그게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사는 의미고 보람 아니에요? 그것을 탓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언약이 없다면 방금 제가 한 말이 일리가 있는데 문제는 언약이 와버리면 너를 포기하고, 그분을 위해서 너를 희생하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분 앞에서 너는 저주받아도 마땅하다고 고백하라는 거예요. 이것을 지금 어느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어요? 그 요구에 동의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라헬과 레아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일상을 생생하게 그대로 대표적으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요. 첫 번째는 자식이지요. 그리고 재산.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명예, 학벌, 그리고 아는 친구들, 통장, 부동산, 차, 이런 것들. 내가 꾸준히 나답게 품위를 유지하게 만드는 요소들, 그것 지키면 나의 품위도 지켜지는 것들, 그게 우리 일상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일상을 언약이 아니면 누가 시비 걸겠습니까? 지금 이 두 여인은 자기 남편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감안하지 못하고 있어요. 자기 남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 것을 전혀 고려 안합니다. 그저 남편 중에서 내 자식 만들고 남편 사랑 계속해서 내가 독차지 하는 것, 관심사는 그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하는 말이 맞다면, 언약의 구성요소에서 그 두 여인과 열 두 자식은 전부 다 빠져야 돼요.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쉬웠어요. 이삭. 야곱이냐, 에서냐? 아주 쉬웠습니다. 야곱. 장자의 명분이니까. 그런데 열 두 명중에 누구냐? 난감한 거예요. 여기서 열 두 명 다 빠져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가? 이 점이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하면, 원래 이삭은 왜 5촌하고 결혼했어요?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간이지만 사실은 5촌간입니다. 그리고 야곱과 이 두 여자사이는 사실은 외사촌간이에요. 레아와 라헬의 아버지 라반이 야곱의 외삼촌이거든요. 외삼촌 딸들이니 외사촌이 됩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리브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참 성경이 이래서 상당히 복잡한데요. 창세기 24장에 보면, 이삭의 배필감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종이 찾아갈 때 리브가의 오빠 라반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60절에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하나님이 예고하신, 예언한 언약의 내용을 라반이 자기 누이동생 리브가에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리브가라는 이 여자는 벌써 그 안에 뭐가 내장되어 들어오는가 하면,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연다,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이, 너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긴다는 그 내용이 줄기차게 리브가의 운명 속에 삽입되어 들어오는 겁니다.

진짜 언약의 실내용을 어떻게 이루느냐? 그것은 그 뒤에 야곱이 여자를 얻을 때 이 리브가의 친정 고향에서 활동을 해줘서 진짜 약속된, 야곱의 대를 이를 진짜 약속된 복의 근원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약속구성에 리브가의 친정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 친정에 가니까 거기에 두 여인이 있었고 그 두 여자의 이름은 라헬이었고 레아였어요. 그 두 여성과 결혼했으면 일이 순조롭게 잘 된 것이 아니냐? 메시아가 여기 있고 그 메시아를 내가 소유해서 가져오면 메시아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제가 분명히 복의 근원 이야기를 했지요.

메시아를 축복하려면 반드시 우리는 내가 저주받아 마땅함, 그것이 여기서 일깨워져야 돼요. 언약이 구성되려면 언약의 내용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들어서면 그 주변에 바로 왕이든 아비멜렉이든 언약 때문에 저쪽에서 저주를 받고 화를 입어야 돼요. 그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데 평범한 일상생활이 난데없는 혼란과 재앙을 당해야 돼요.

언약에서 보는 죄의 평가를 받아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리브가의 고향 친정마을의 두 여인 레아와 라헬은 야곱, 언약의 주체자가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전혀 언약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세속적인, 세속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사고방식, 그런 세속적이고 비언약적인 사람인 것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여인은 언약이고 뭐고 간에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사랑이라는 것, 그 사랑에 철저하게 마음이 놀아나야 돼요. 그렇다면 그 열 두 아들은 바탕이 어디냐? 열 두 아들의 바탕은 철저하게 저주스럽고 세속적인, 언약에서 배격당해도 마땅한 죄의 바탕이고 그 열매가 열 두 아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래 지정해놓은 괜찮은 아들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아들은 한 아들도 없어요. 문제는 그 경로를 밟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시녀의 자식이 아니면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고요. 야곱이라는 인간의 껍질이 벗겨져야 그 안에 중첩되어 있는 진짜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에 출몰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나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자진해서 저주 쪽에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이런 짓들을 하게 되면 좀 봐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꼼수를 쓰는 경우는 있지만 그런 꼼수는 소용없어요.

이 열 두 아들이 자식이 아니라면, 그러면 그 속에 분명히 자식이 하나 있을 것인데 그 자식은 과연 누구입니까? 열 두 아들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고 하나님의 더 진척된 언약작업이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진척된 언약작업에 있어서 열 두 자식들은 어느 하나도 언약의 자식에 어울릴만한 자식은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비언약적인, 저주받을 자식들이라는 것을 티낼 수 있는 요소, 레아가 낳은 마지막 자식이 있어요. 그것은 아들이 아니고 딸입니다.

21절에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는데 이 딸 때문에 열 두 아들과 아버지와 엄마 모두에게 위기가 초래됩니다. 창세기 34장의 이야기입니다. 히위족속중의 세겜 추장에게 디나가 강간당하고 난 뒤에 열 두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힘을 발휘해서 다 죽여 버리는 그런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되시는 언약은 희생 없이는 다가설 수 없는데, 그들은 힘을 동원해서 ‘우리는 언약의 민족이고 언약의 집안’이라는 것을 힘으로 지키려는 세속적 발상을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추가적인 것이 오지 아니하면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아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레아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는데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어요. 합환채. 비아그라가 등장하니까 그것은 내게 없었던 거거든요. 탐이 나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것을 탐을 냄으로서 빅딜, 교환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관심사는 결국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도 내 것을 지키겠다는 사랑이 더 우선되고 중요하다는 노골적인 자신의 본성이 다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한다고요? 합환채와 빅딜 했는데? “내 남편 네가 가져가라. 오늘밤 너와 동침해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야곱도 라헬도 서로 사랑했다고 하나 그 두 정실부인의 내막을 통해서 너무나도 언약과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만 지키려고 하고, 희생이라 하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는 너무나 육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폭로시키는 내용, 소위 언약의 가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이렇게 이기주의적으로 뒤범벅이 된 그 가정입니다.

그러니 진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런 가정을 하나님의 천국으로, 축복된 가정으로 변화할 때 이 가운데 어느 자식이 희생하느냐? 그 희생된 자식이 바로 야곱의 뒤를 이은 축복의 약속된 야곱의, 언약의 후계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두 아들에게 어긋맞게 축복하면서 창세기는 끝납니다. 열 두 명중에 언약의 자식이 아무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해서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과 엄마 아빠를 살리는 희생의 모습이, 지금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방문하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구약적형식으로, 창세기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언약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누가 더 높으냐’ 하면서 경쟁할 때, 누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까를 두고 경쟁할 때 예수님이 핵심적으로 한 말이 있어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고 주를 위해서 희생하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길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그 고백이 나오는 것은 주님의 성령의 기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이 왔기에 그 근원으로 말미암아 이미 축복과 저주가 확정되는 그 귀중한 기준이 왔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야곱처럼 그 축복의 기준이 우리 안에 들어 있어, 이제부터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밖으로 발설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