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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신명기 31:9-13 / 언약궤 앞에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31:9-13 / 언약궤 앞에서

정인순 2017. 12. 24. 17:07

 

 

언약궤 앞에서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신명기 31:9-13

(31:9)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31:10)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31: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31: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궤 앞에 소집시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의 경쟁이나 비교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세상살이가 피곤한 이유는 보는 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교와 대조와 경쟁을 입각해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들의 호응에 부응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잃은 자들은 숨어 지내고 싶어합니다. 자신을 비교하던 그 기준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자기를 보는 방식도 그런 식이 되어버렸고 남들을 볼 때도 자신을 시달리게 했던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뿌려집니다. 율법 조항에는 저주가 가져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점을 싫었던 겁니다. 즉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욕망을 인정해주는 그런 식을 찾고 싶었던 겁니다. 이방민족들의 신들이 그러합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호출해낼 수 있는 신이요, 자신의 행함만큼 보상을 제공해주는 신이 그런 식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가차없는 저주를 곁들이는 신입니다.

부담되기에 이런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정이 갈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이 트일 만하면 즉각적으로 다른 신을 받아들인 겁니다. 저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에 담아 전달하는 저주는 그 중심부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에서 그물을 던지듯이 계속 율법을 뻗어나가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율법 정신의 완성이란 곧 언약궤 정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란 피가 있는 곳입니다. 곧 죽음이 있는 곳이요 이 죽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방식으로 한 곳에 당도해 계십니다.

이 말은 곧 중심지가 따로 있으며 그 중심지에서 방사구조로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병행해서 뻗어나간 저주는 곧 그 저주를 받아야 이유까지 같이 제공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피해를 받은 쪽에서의 용서가 아니라 관계는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용서란 제대로 된 용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요구할 쪽도 용서를 요구할 권리가 없고, 용서해주는 쪽도 용서를 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생길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주변의 남들이 힘들어야 합니다. 특히 율법 속건제에서 피해를 입힌 자는 피해 본 자에게 덤으로 20%를 더 쳐주어야 보상이 끝납니다. 이는 말로만 용서가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용서가 되려면 피해본 자의 분량만큼 피해입힌 자의 것을 뜯어가서 메워야 합니다.

이것이 원활하지 아니하면 ‘용서’가 성립되지 않고 저주와 분노가 가해자에게 도달되게 됩니다. 언약궤의 흘려진 피란 곧 모든 이스라엘을 향하여, “과연 이 피해를 보상해 줄 자가 있는가 보자”라는 선언입니다. 아무도 책임질 자가 없기에 이스라엘은 저주받아 멸망당해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율법은, 벌써 보상이 다 치러진 상태에서 새로운 의미로 완성됩니다. 갈라디아서 3:23-24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내게 하므로서 더 이상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으로서 죄인’이라는 취지가 결코 ‘율법을 어기므로 내가 죄인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는 내가 법을 어기면 죄인이었지만 제대로 율법을 알고부터는 ‘나는 죄가 시킨 대로 따랐을 뿐인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겁니다.

따라서 죄의 지배를 받기에 죄인이었다면 그 죄인을 만약을 의롭게 한다면 이는 곧 ‘죄’ 그 자체를 ‘의’로 인정하겠다는 식이 되기에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죄인인 줄 알았다면 더 이상 자신이 의인되겠다는 의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구원도 포기하고 천국행도 포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일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언약궤 앞에 집결시키듯이 신약에서 구원될 자는 예수님 노선으로 들어서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고 가신 그 경로 안에는 모든 저주의 맞바람은 앞장 서신 예수님 다 홀로 맞게 되고 처리가 됩니다.

이런 상태가 곧 ‘예수 안’에 있는 상황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성사되는 상황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속건제의 원칙도 완성됩니다. 값없는 말로만 하는 용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값을 예수님의 피로서 결재 완료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이미 다 용서된 상태가 됩니다.

즉 피해받은 당사자가 피해값을 대신 치러주신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성도는 더 이상 이 공로에다 보탤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언약궤 기능이 신약에 와서 십자가입니다. 성령께서 늘 성도에게 반복적으로 주목시키는 것이 십자가 기능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신만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촉구받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본인이 더 살고 싶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본인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부목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 부러진 뼈들 상호 연결시켜주는 보철 작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귀하게 보시는 것은 성도의 존재가 아니라 부목의 존재입니다. 성도에게 그 어떤 일이 벌어지도록 하더라도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이어진 관계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성공이나 살아남아 있음보다도 더 자랑스러운 것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앞장 세워 자랑하고 성도의 모든 삶은 그 뒤로 빠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스로 자기 판단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65강-신 31장 9 – 13절(언약궤 앞에서)171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1장 9 –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공통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하나의 방식을,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개성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타고난 자기의 성격도 있고 DNA도 다른데 성경말씀에 보게 되면 일체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고, 고려 대상도 안돼요.

무조건 이 경로, 이 노선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열 두 제자와 예수님 사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앞서간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나를 따라와라”하는 것은 “너희는 내 뒤에서 오라”는 뜻이거든요.

앞서 간다는 말은 주님께서 가신 그것이 주님의 개성이 아니에요. 주님의 나름대로의 특징도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이라면 먼저 반드시 주님가신 그 길을 뒤 따라 가야합니다. 그 뒤 따라 간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걸어 갈 때 선생님이 그러시잖아요. “참새, 짹짹”, “오리, 꽥꽥” 먼저 선창을 선생님이 하고 뒤에 소리 내면서 따라 가는 거예요. 노선과 경로를 정하는 겁니다. 노선과 경로를 정하는데 그 노선과 경로를 정함으로써 다수가 하나로 집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수가 하나로 집결.

본인의 성격이라든지, 성질, 가정환경 일체 이런 거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개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율법의 능력을 일체 고려하지 않아요. “나는 이 만큼 지켰습니다. 나는 요 만큼 지켰습니다.”를 보지 않고 마지막 시대, 이 신약 시대가 되면 율법 말고 다른 원칙을 적용시켜 버립니다.

“너는 누구의 뒤를 따랐느냐?”이것만 묻습니다. 좀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누구의 노선에 들어서 있느냐?”를 물어요. 이걸 제가 아침에 분명히 이야기 했지만 이게 법과는 상관없고 법 말고 다른 원칙에 의해서 제공 된 겁니다. 법 말고 다른 원칙에 의해서.

“목사님, 법 말고 다른 원칙이라도 그것도 법이지 않습니까?”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앞장 서는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때에 구원에 부합된 합당한 원리 원칙은 맞바람을 본인이 혼자 다 커버하는 거예요. 내 뒤에 서라는 겁니다. 내 뒤에. 뒤에 서면 앞에서는 맞바람을 다 받아요. 여러분들은 그 프로그램을 잘 안보지만 저는 요새 자주 봅니다. ‘엄마 까투리’라고 그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데, 엄마 까투리가 커요. 그리고 아기 까투리는 뒤에 따라 다닙니다. 모든 숲속의 위험한 일은 엄마가 다 감당을 해요. 자식들에게 위험한 것을.

법이 뭐냐 하면 법은 우리를 비켜서 주어지는 법은 없어요. 법은 누가 커버하느냐 하면 앞장서신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만족스러운 법들은 예수님이 다 커버해서 수용하고 있고 뒤에 노선에 들어 간 사람들은 커버된 예수님 뒤에 숨으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신약에서 ‘예수 안’또는‘인 그리스도’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 안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그러면 구약 때부터 이런 기쁜 소식을 미리 주면 되는데 왜 신약 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그것은 구약 때는 법을 먼저 주시는 거예요. 법을 주시는 것은 이 세상에 이미 모든 것이 죽음으로 전환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죽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거기에 계속해서 법을 주시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서 줄 것 같으면요, 그 법에다가 위반 사항을 언급하지 않아야 되죠. 사람을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한다면 “숙제를 하게 되면 내가 시계 사 줄게.”이 정도만 하면 되는데 “숙제 안하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이렇게 벌칙 조항까지 줘버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자식 입장에서 자칫하면 자식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사랑이 아니죠. 이거는 하나의 거래가 되고, 교환이 되고, 이거는 처음부터 ‘네가 자식이냐 아니냐를 한번 자식 되었다고 나는 봐주는 거 없다.’가 되는 거죠. 매번 법을 내릴 때 마다 자식이냐 아니냐를, 또 법을 주게 되면 자식이냐 아니냐를 그 때마다 결정해버리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건 사랑이 아니죠. 계속해서 혼쭐을 내는 거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하고는 상대하기 싫죠. 그래서 그 법이 무조건 인간사랑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긴 겁니다.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도와주는 신, 그런 신을 이방 민족들이 믿었기 때문에 많이 받아들인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벌칙 조항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 일방적이란 말이죠. 너무나 일방적이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벌칙 조항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꾸준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이유가 9절에 보면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그 다음이 중요한데, “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 앞에 율법으로 일단 모으고 그 다음에 율법 안에는 저주 조항이 있고 그 저주 조항을 가지고 하나님은 어느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언약궤 위에 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언약궤가 뭐냐 하면 피를 묻히는 장소예요.

피를 묻혀서 용서해 주는 그 기구가 언약궤입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우리의 상식에서 위배되는 불편한 설명을 제가 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용서 할 때는 저 사람에게 잘못했을 경우에 내가 잘못을 참회할 때 용서를 하고, 용서를 해 줄까 말까는 저 사람이 결정을 하는 겁니다. 이 용서라 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관계죠.

그리고 그 용서를 할 때는 그냥 용서하면 안 되고, 맨 입으로 하면 안 되고,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TV를 깼으면 TV값이 100만원이라면 법적으로 하면 20%를 더 추가해야 되요. 100만원짜리 TV 깼으면 120만원을 줘야 합니다. 법적으로. 20%를 추가해서. 이게 속건제입니다.

그래서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용서라 하는 것은 말로 때울 수 있는 용서가 아닌 거죠. 그 20%를 추가해서 준다는 말은 저쪽에서 상처 입은 것을 네 것에서 떼서 거기에 마저 메우겠다는 것입니다. 용서라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주고받는 실체가 있어야 되요. 주고받는 실체.

사람에게 잘못을 했을 때는 용서를 하고 20%를 추가하라는 율법을 준 것은 네가 율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율법의 십계명이 들어 있는 언약궤의 기능이 사방팔방으로 거미줄 망처럼 쫘악 이렇게 확산 됩니다. 쫘악 퍼지거든요. 여러분들이 물을 쏟게 되면 물이 사방팔방으로 퍼지잖아요. 언약궤가 상자 같은데 그 상자안의 내용을 부어버리면 그 부어 버린 것이 율법이 되어서 스물스물 모든 이스라엘 진영에다가 다 퍼졌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스파이더맨에서 그 스파이더 거미줄 나오잖아요. 거미줄 뿌리는 거, 투망하듯이, 어떤 중심부에서 그물을 던지면 그 그물에 걸린 사람은 스물스물 어디로 끌려와야 하냐면 언약궤 있는 곳으로 와야 되요. 이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뭐라 하냐면 율법은 믿음을 위한 몽학 선생이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법을 줘서 법의 위반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믿게 하게 하는 그러한 선행되는 절차가 율법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잘 설명해야 될 이야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면 율법을 통해서 자기 죄라는 것을 알 경우에 그 사람이 과연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그 다음에 필히 등장해요. ‘율법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걸 알았기 때문에 저 믿는 자 맞지요?’라고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맞지만 율법과 믿음 사이에 이게 끊어져 있어요. 율법에 선행해서 그 다음에 믿음이 주어지는 건 맞지만 자동적으로 주어지진 않아요.

율법을 위반했을 때 사람들이 뭐라 하냐면 ‘나는 율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그런 말을 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율법을 위반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그 의도가 뭘까요? 나는 죄인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 뒤에 나한테 넘어오는 영생이라는 거, 천국이라는 것을 자기가 획득하겠다는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꼼수죠. 꼼수입니다.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위한하게 될 때 한걸음 더 나아가야 되요. 내가 처음에는 율법을 위반했는데 나중에 율법을 제대로 알고 보니까 내가 율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가지고 위반하도록 부추긴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악마가 주인이 되어 버리면 만약에 내가 그런 식으로 율법을 통해서 믿음을 얻어 버리면 누가 구원을 받는 게 되느냐 하면 악마가 구원을 받아 버리고 죄가 의로 통하게 되고 죄가 의와 일치되어 버려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따라서 자기 속의 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보면서 위반하게 했다는 말은, 나에 대한 용서라 하는 것은 내 죄에 대해서 용서가 없는 한 역시 죄 안에 있는 나도,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나에게도 용서가 없고 악마한테 용서가 있을 리가 없죠. 지옥 가려고 악마를 만났는데.

지옥을 만들려고 악마가 있는데, 악마에게 용서가 없다면 나 역시 용서가 없는 거예요. 용서가 없는 자가 용서를 바란다는 것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겁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아직도 정리 못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세일하듯이 복음을 바겐세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언약궤 안으로 불러 모은 것은 언약궤 안에서 새로운 인물이 튀어 나옵니다. 언약궤 안에서. 언약궤가 하나님의 피로써 용서한다 할 때 그 피를 흘려야 될 그 인물이 언약궤 중심에서 새롭게 드러나 버려요. 드러나 버리면 안일하게 생각한 사람은 ‘저분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어요. 저분 때문에. 이것도 잘못입니다. 저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하면 안돼요. ‘저분이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해야 돼요. 저분이 나 때문에.

그러면 나의 어떤 면 때문에 피해를 입었느냐. 내가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구원 받겠다고, 주님 앞에 용서 받겠다고, ‘살려 주세요’하면서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살겠다고 하는 그 집착 때문에 피해를 보신 분이 저분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분 앞에서 ‘살려 주세요’하는 말은 이제는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천국가게 해주세요. 살려주세요.’ 심지어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도 우리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신약의 이야기입니다. 구약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신약은 어렵습니다.

신약이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한 예를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대목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해설과 더불어서 새롭게 제가 이야기 하면 “구하라 그리하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 될 것이요 찾으라 아무것도 얻을 게 없을 것이다”그런 내용이에요. 구해봐라. 아무것도 얻을 게 없을 것이다. 문이 있어야 두드리지, 도대체 문이 어디 있는데요? 이게 얼마나 추상적인 말이에요. 두드리라 했는데 문을 어디다가 대구시 동부 지묘동에라도 만들어 놓고, 아니면 서울에 광화문 앞에 문이 있고 그걸 두드리든지 종을 치든지 해야 되는데 “두드리라”“어디를요?” “문을”“도대체 문이 어디 있는데요?”“그러니까 바보지.”이 말입니다. 문이 어디 있는데요? 문 있으면 진짜 드릴이라도 가져다가 뚫고 싶어요. 문이 어디 있어요? 문이 없는데. “찾으라 구하라” 이 말은 애초부터 너는 구하거나 찾을 그런 실체는 너에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이 말을 신약에서 해석하려면 여기에다가 누구를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가 구하면 뭐든지 얻을 것이고 예수님이 두드리면 그것이 곧 문이 될 것이고 예수님이 찾으면 우리가 찾지 못한 것을 비로소 예상도 못한 찾음을, 그것을 그리스도가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좋겠다. 그리스도만 갖고 우리는 그냥 맹탕이고, 아무것도 없고. 그게 뭐 그리 신납니까?”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아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얻은 것을 얻고, 찾은 것을 찾고, 예수님이 열리게 하신 것을 우리의 문으로 해서 들어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을 경유해야 되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럼 예수 그리스도 안을 경유하지 뭐.”이렇게 나오고 저는 말하죠. “그걸 산 채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던질 때는 죽으라고 말씀을 던지는 거예요.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너의 속에 죄가 자꾸 우리를 부추기는 겁니다. “네가 구원 받으려면, 네가 악착같이 살아 있어야 네가 구원 받는 거야.”라고 나라는 것과 하나님을 자꾸 일대 일로 연결을 시키고 대응을 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 해주면 네가 잘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다 그 앞에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으라고 있는 세상이에요. 심지어 예수님마저 이 땅에 와서 죽으셨어요. 제가 거짓말 하는 겁니까? 예수님마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 동방박사이야기에서 끝 부분이 아주 즐겁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환상이 현실이 되어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현실 속에서 소동이 벌어지는 거. 불과 2시간 지났기 때문에 안 잊어버렸겠지요?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같은 현실인데 서로가 해석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해석이 안 되는데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그 뒷부분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동방박사가 왔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 빼돌렸어요.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그 말은 뭐냐, 동방박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한 헤롯과 그 일당이 동방박사를 체포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동방박사가 품고 온, 동방박사를 예루살렘에 보낸 그 환상이라는 이름의 현실에 대해서 기존의 현실 세력에서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헤롯왕이 갖는 거예요. 저거 체포하면 죽인다는 우리는 그 만한 능력이 있고, 이성적 판단 있고, 그만한 실력이 있고, 힘이 있다고 그들은 환상이 된 현실을 기존의 현실과 같은 부류로 본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빼돌렸습니다. 그것도 천사가 와서 다른 길로 가게 했어요. 그러면 그들은 기존의 현실이, 현실이라고 우겼던 현실을 놓쳐 버린 겁니다. 단절이죠. 같이 세상을 살고, 같이 대구 땅을 살고, 같이 부산 서울 살면서도, 같이 미국에 살면서도, 같은 교회 다니는데, 옆 사람이 옆 사람을 이해 못해요.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예수 안에 살고, 하나는 예수 밖에 산다고요. 한쪽은 목욕탕에 자기 딸 죽었다고 통곡하고, 한쪽은 자기 딸 죽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게 달라요. 물론 그런 사람 있을까 싶지만, 없다 치더라도.

현실 해석이 달라요, 현실 해석이. 성령을 왜 괜히 받았겠습니까? 영적 인간과 육의 인간을 왜 나누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성령 없는 것은 육이고, 성령 있는 사람은 영이고. 왜 인간을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을 두 조각 낸 이유가 뭡니까?

이 사람이 성령 세례 받은 것은 그 사람의 노력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헌금도, 전도도, 선교도 아니에요. 그냥 성령이 왔을 뿐이에요. 성령이.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온 게 아니고, 별이 그들을 몰아넣었어요. 그리고 마음속에 샛별이 일어 난거예요.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한쪽은 “이 일은 제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죠.”라고 하며 사는 사람과 “이거는 내 일이다” 하고 우기고 단독적으로 사는 사람과 서로 완전히 이해가 안 되죠.

동방박사가 딴 길로 가고 난 뒤에 화가 난 헤롯은 베들레헴 아이들 두 살 아래는 다 죽였습니다. 그게 현실이 할 수 있는 전부예요. 현실이. 그 죽였던 힘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이로써 세상이 보여줄 것은 다 보여 줬어요. 죽었던 이주일은 맨날 하는 소리가 “뭐, 또 보여 드릴까요?”하면서 맨날 보여 줄 것 보여 드리겠다고 하는데, 세상이 다 보여 줄 것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된 자는 죽여 버린다.”이게 세상이 보여줄 것 다 보여 준거예요.

여러분이 아직도 평온한 가운데 따뜻한 가운데 세상 살아 갈 때에 그것은 여러분 순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음에 마귀로부터 공격 받을 순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기표 26번, 27번.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가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주위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제일 가까운 가족부터 오해와 곡해의 덤터기로써 비난을 받습니다. “왜 아버님은 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가족 화합을 이루겠습니까?”화합해가지고 뭐 할 건데요? 언약궤 앞에 화합해야지 자기 개성들 끼리 화합합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해자로 만들어 세우고 그 피해자 앞에서 더 이상 내 구원을 주장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겁니다. 특히 그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는 우리가 용서를 요구할 입장이 되지를 못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피해자 입장에서의 주님께서 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용서’입니다. 용서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주는 게 아니고 피해자의 피해 받은 입장에서 용서를 해 버리죠.

그렇게 용서를 할 때, 인간 대 인간에서는 보상을 해줘야 되지만, 아까 이야기 했다시피, 주님의 피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피 값을 이미 모든 것을 결제 완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용서도 같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용서 받은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가 주님한테 피해구나, 피해를 입히는 짓이 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 관계에서는 완전한 용서는 없어요. 항상 뒤끝 있습니다. 어느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날 두고 간 사람은 용서를 하되, 날 버리고 간 사람은 용서가 안 된다’라는 아주 심오한 가사가 있어요.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날 두고 간 사람은 용서를 할 수 있는데, 날 버리고 간 사람은 용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김창완이 부른 ‘청춘’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게 나옵니다.

날 두고 간 사람이 용서가 되는 건 뭐냐 하면 다시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팔짱끼고 봐준다는 그런 이야기고, 그런데 날 버리고 간 인간은 와도 같이 안살아 준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의 용서가 아니고 그냥 자기 세력 싸움이고 ‘나한테 꿇어’하는 뜻이에요. 용서가 아니고.

용서가 되려면 값을 다 치룬 상태에서 용서가 돼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고 없는 상태에서 용서를 받았으면 그 용서 받은 값을 하지 마세요. 주님 앞에. 그건 주님의 용서에 대한 모독입니다. “용서 받았으니까 제가 뭘 해드릴까요?”“하지마! 너는 살면 살수록 나한테 피해를 입히거든.”사람이 살던 가락이 있다고요. 가락이 있는데, 아이고, 오랜만에 와가지고 한 백일 간 있겠다고 하는데 남에게는 있음 자체가, 살던 가락이 있는데 그 가락이 다 깨져요.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다고요. 아무리 이뻐도, 이쁜 건 맞지만, 자꾸 시계를 보게 되고 날짜를 보게 되고, 참다 참다 터뜨리게 되고.

뭐 남자가 그립고, 여자가 그립다고요? 혼자 사는 것이 제일로 편하다고 우리 어머님은 매일같이 이야기 합니다. 문제는 혼자 사는 데 그냥 혼자 삽니까? 누가 옆에서 군불 때 줘야 돼요. 피해를 보면서. 자기는 편하죠. 혼자 사니까. 그런데 밥은 누가 하고, 전기세는 누가 내고. 이처럼 산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 지금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필요하기에 우리가 사는 겁니다. 내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앞에서 꼭 필요하기에 죽지도 못해요, 자살도 안 돼요. 네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살려 주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부목이라 하는데 부목이라 하는 것은 다리 불어 졌을 때 옆에 대는 거 있잖아요. 옆에 대는 나무가 불어 진 뼈보다 더 중요해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그게 딱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붙어 살아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산다는 것이 혼자서 그냥 착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착함마저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몰랐습니다. 하물며 주님은 어떠했겠습니까? 주께서 살려 주시는 것은 주님의 복음과 용서를 전파하라고 주는 것인 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