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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신명기 31:5-8 / 붙여주시는 인생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31:5-8 / 붙여주시는 인생

정인순 2017. 12. 17. 19:36

 

 

붙여주시는 인생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신명기 31:5-8

(31:5)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붙이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31: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붙여주시는 방식’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나아가서는 결코 약속의 땅에 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붙이시는’ 방식 없는 자들은 이미 그 방향이 엉뚱한 곳, 곧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독자적으로 현실을 뚫어서 ‘약속의 떵’에 도달할 수도 없고 거기서 살 수도 없습니다. 비록 거리상 몇 km가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거리도 아닙니다. 1m 앞두고도 들어갈 수 없게 하십니다. 이처럼 천국이나 약속의 땅은, 인간들의 소원이 얼마나 강렬한다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시느냐 하는 여부가 중요합니다.

참으로 동행하신다면 ‘붙여주시는 방식’이 결코 생략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붙이시는 방식’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재 자신의 인생이 자기를 위하여 위해서 주어진 ‘나의 인생’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당하는 인간들은 ‘주님의 인생’을 생중계하고 더빙하는 성우나 해설사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즉 남들 보기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마치 남은 일인 것처럼 보일 겁니다. 물론 지옥가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생들은 자신의 과거 업보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여기서 열심히 선을 쌓는데 열심을 냅니다. 왜냐하면 본인 인생이기에 본인 아니면 책임질 자가 따로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붙이시매 전쟁’을 위하여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자아의 내용이 매일같이 삭감당합니다. 그 예가 사무엘상 17:45-47에 나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방민족과 붙이시는 것은 단순히 두 세력을 힘과 힘으로 맞닥트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진 힘도 빼게 만듭니다. 즉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붙이시는 전쟁이 적을 향한 전쟁이 아니라 내부전쟁의 여파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전쟁을 하시는 그 내막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서 증거하게끔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들판의 민들레를 보세요. 온 우주와 맞서 싸웁니다. 누가 그렇게 하실까요? 참새를 보세요. 누가 친히 기르십니까? 이 악한 세력이 장악하는 우주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키울 것은 키우십니다.

민들레를 위함이 아니라 참새를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골로새서 1:16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나 여호수아가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들은 증거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신약 때는 ‘눈이 보이는 예수님’이지만 구약에는 왜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십니까? 그것은 그 내용이 그만큼 심화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육체는 보여주기 위한 신체가 아닙니다. 도리어 보기에 오히려 더 못 믿게 되는 몸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대단한 메시야가 아닌 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과 같이 다니는 것이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남자만 해도 5000명이 되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어라’고 제자들에게 명령 하십니다.

무슨 수로 양식을 제공합니까?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게 실패가 아닌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모든 일이 자기네들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인 것을 재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네 인생이 나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입니다.

그런 주님이 결국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이 지상에서 사라지십니다. 이렇게 되니 그 어느 누구도 예수 믿고 같이 따라 죽을 위인이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동행이 단순히 이 지상에서 자리 잡기 위한 동행이 아니었던 겁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면서 깜짝깜짝 간 떨어지게 만든 상황들을 계속 유발시키신 이유가 자기 백성이 인정하지 않는 죄를 인정케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이해되는 방식의 인생을 영글어 나가면서 그것을 ‘자기를 위한 인생’이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인생이라고 간주하시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죽어 마땅한 인생’으로 이해하고 그 인생을 동행하시는 주님께 맡기는 인생이기를 원하십니다.

약속의 장소란 바로 그런 자들의 세계입니다. 곧 ‘피의 블랙홀’ 안에 기거하는 인생일 경우에만 천국에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크게 실망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은 그 인생을 자기를 위한 인생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붙여주시는 상황이 그 어떤 상황이라도 세상적인 평가에 휘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그 상황은 곧 ‘죄’가 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힘과 힘으로 맞서는 것 같이 오해되는 구약적 상황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죄와 의의 마주함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피 안에만 있습니다. 피의 블랙홀 속에서 우리네 인생도 녹아져야 합니다. 감사와 고마움이란 이처럼 자율성에서 수동성으로 돌아서는 그 길목에서 터져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을 내 인생으로 간주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4강-신 31장 5 – 8절(붙여주시는 인생)171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1장 5 – 8절입니다. 구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붙이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너희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화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일을 벌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하나님만을 위한 일이고 여기서 우리는 그냥 들러리로 가담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해석은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을 해야 돼요. 성경 보면서 나 좋으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거는 반칙입니다. 물론 인간은 종교적이기 때문에 성경 보고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시작을 하더라도 ‘이게 나를 위한 나의 일이 아니 구나’라고 감을 잡아야 되고 그 폭을 좀 넓게 갖고 갑시다. ‘내 인생 자체가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 구나’라고 인생의 폭을 넓게 가지고 가야 돼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살날이 남아 있잖아요. 남아 있는 거 그 부분마저 내가 조치할 일이 아닌 거예요. 주를 위해서 일어나야 될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내 인생을 생각하고 자꾸 내 인생을 생각하면 이게 문제가 직선적 구조가 돼요. 내가 어릴 때 있었고, 20대, 30대, 40대, 50대..이렇게 직선적 구조가 되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직선적 구조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순회하는 구조로 이야기 합니다. 뭔가 중심이 있고, 소용돌이가 있고, 그 소용돌이를 계속해서 뺑뺑이 도는 거예요.



그 소용돌이 중앙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중간에 이렇게 뺑뺑이 돌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말려 들어가면, 블랙홀에 말려 들어가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고, 안 말려 들어가고 계속 있으면 그 사람은 본인을 위하여 본인이 살아 있는 샘이 되어서 그 사람은 저주의 사람이 되죠. 그래서 방금 한 것은 신약이고, 여기 구약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언약이 중심에 있고 그 주위에서는 뺑뺑이 도는 겁니다. 언약에서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라 하는 것은 그 근처를 지나가는 물질, 질량이 있는 것들은 강한 중력이 다 잡아 당겨서, 마치 괴물이 굴 파놓고 지나가는 사람 다 잡아 당겨서 자기 속으로 다 끌어당기듯이 그리스도 안으로 다 끌어당기는 그런 힘 같은 거 그 블랙홀 같은 힘이 구약에서는 언약 중심으로 가고 신약에서는 예수님 중심으로 최종 완료가 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면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뭐 칠십을 살았다, 팔십을 살았다는 것은 의미 없고, 어디 안에서 블랙홀 안에서 그 구멍 안에서 칠십을 살았느냐, 아니면 그 구멍 밖에서 칠십을 살았느냐로 되는 겁니다. 인생 오래 산다 해서 철드는 거 아니거든요.



젊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젊어도 내가 주님을 위한 인생이라는 것을 그 관계성을 알고, 나이 구십이 되어도 혼자인 사람은 단독적으로 놀아요. 따로 놀아요. ‘내 인생은 왜 이러나.’자꾸 자기 인생 따로 챙기는 버릇으로 그렇게 나옵니다.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에 대해서 굉장히 미워했는데, 할아버지 하는 일이 미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다 미운데, 그 중에 미운 짓 하나가 뭐냐 하면 식구들이 비빔밥하면 다 같이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꼭 상을 따로 챙기게 합니다. 따로. 철저한 유교 집안이니까 어린이기 때문에 숟가락 같이 못 넣고 따로 챙겨가지고 할아버지는 따로 비빔밥 잡수고 나머지는 전부다 숟가락 넣어가지고 먹으니 다른 식구들은 얼마나 맛있는 지요. 당신 침, 내 침 섞여가지고 절로 감미료가 되어서 얼마나 맛있는지. 할아버지는 점잖게 혼자 드시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적으로 다루실 때는 한 통속으로 다룹니다. 개개인의 재주 같은 건 부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여기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모세에게 이야기 하고, 하나는 여호수아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이 내용을 적절하게 알려면 성우들이 하는 더빙을 생각하면 구약은 다 풀립니다. 신약도 다 풀려요. 더빙이 뭐냐 하면 화면은 말 없는 화면만 보여주고 그 화면에 대해서 성우가 목소리로 그 동작 따라서 대사를 보고 그 대사를 하는 거예요. 어린아이 나오면 여자 어른이 어린아이 목소리를 하면서 더빙을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와 모세는 주님이 동작을 하고 그 쪽은 해설사예요. 그냥 더빙하는 겁니다. 우리내 인생이 그래요. 일은 주님이 벌여놓고 뒤 늦게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작하시는 분은 신체가 신체성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이런 신체가 없어요. 왜냐면 신체는 마지막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응집이 되어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신체를 처음부터 안보여 주느냐 하면 마지막 때에 보여주는 그것은 같이 살자고 하는 육신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희생 제물로 보여 줄 육신, 다시 말해서 “태어났냐? 그럼 죽어야 돼.”죽음을 발산하는 육신이기 때문에 목표하는 게 죽어서 사라지는 육신이기 때문에 그게 최종적인 겁니다.



그 전에는 주께서 동행하는 육신, 하나님이 동행하는 육신은 보여주지 않고 더빙하는 육신들을 파견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 더빙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모세고, 두 번째 사람은 여호수아인 거예요. 그래서 영화관에서 더빙하는 성우 붙들고 구원해 달라고 하면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예요. 성우는 그냥 화면보고 설명할 뿐이지 모세와 여호수아는 구원해 주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행하면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의지하지 않도록 그런 상황으로 계속 인도하시는 겁니다.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여기에 5절에 보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의지하는 방법으로 “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붙이시리니”라고 여기 붙인다는 말이 나오는데, 붙인다는 말은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뭐 하나 밀어 붙여 가지고 “자 붙어! 붙어!”라는 그 붙이시는 거, 그걸 의미하거든요. 이래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같이 붙이신다는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6절에 보면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소년 다윗, 어린아이인 다윗이 어른 골리앗을 쳐부수는 그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다는 이 말은 그냥 상황적으로 “너는 적이고 나는 아군이고 우리 둘이 붙자”라고 흔히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붙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블랙홀,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선두에서 하시는 그 모든 과정에 필히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거가 뭐냐, 붙이시는 식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 사람은 지금 천국 제대로 정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믿음 좋기 위해서, 자기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붙이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의 예가 방금 이야기한 소년 다윗과 블레셋의 전쟁이야기입니다. 여기 47절에 보면 소년 다윗이 하는 말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진영을 붙여 주면서도 뭐를 빼느냐 하면 칼과 창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그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내부에 있는 자아 내부에 있는 자아의 내용을 삭감하는 식으로, 예산 삭감하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으로 소용없는 짓으로 만드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가지는 칼과 힘, 내가 가진 권력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엉뚱한 길로, 넓은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붙여주는 이 전쟁은 사실은 감사해하고 고마워해야 되는 겁니다.



제가 감사와 고마움을 반복하는데 언제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느냐 하면 자율성에서 수동성으로 바뀌는 길목에서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요. 자율성으로 신나게 가죠. 아주 신나게. 그러다가 뻥! 하고 타이어 펑크 나면 내 자율성에 한계를 느낍니다. ‘어떡해, 어떡해,...’ 동부화재에 전화를 해야 할지. 갑자기 자율성에서 타율성으로 바뀌는 겁니다.  ‘어찌 할꼬, 내 인생 어떡하지...’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내 인생’이 붙어요. 원래 내 인생은 없는데. 어느새 정신 딴 데 팔면 또 생기는 게 뭐냐 하면 ‘내 인생 내가 다뤄야지. 내 인생 내가 관리해야지.’라고 또 옛날 버릇이 그래도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붙여주는 전쟁이 없으면 우리는 게걸음처럼 조금만 한눈팔아도 자꾸 엉뚱한 곳으로 계속해서 미끄러져 가죠.



‘이제는 혼자서 살 수 있다. 혼자서 살 수 있다.’혼자서 살아 보세요. 그러면 혼자서 사는 사람들 모두 다 가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상영된다고 했어요. 예고편이 늘어나서 내용이 점점 더 깊어지는데 그 15분쯤 되는 예고편을 본적이 있어요. 제목이 ‘신과 함께’라고 되어 있어요. 보니까 토족적인 우리의 종교를 세계화 해가지고 수백억 재산을 투자해서 만들었다 하는데 그 내용을 쭉 보니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의 행함에 대해서 자칭 의인이라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죄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엄중하게 염라대왕이 우리를 심판할 때 죄를 묻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호사가 있어서 저 사람은 희생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옥 불을 받으면 안 되고 천국 가야 된다고 변호를 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는 개인플레이 하지 말고 우리는 서로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면서 바르게 사는 것이 우리 한국 민족의 정서에 맞는 종교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화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항상 우리의 본성상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드는 속성은 그 영화가 다 보여 주는 거예요.



제가 아침에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남들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저 어떻습니까?’라고 날마다 자기 채점에 나서는 그 심리, 심보를 그대로 다 보여줘요. 그러니 교회 다니면서 이 성경을 아무리 봐도 소용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챙기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뺑뺑 돌고 있어요. 그래서 나온 요령이 뭐냐 하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실 때 사람들의 요령이 뭐냐 하면, 너무 다가서지도 말고 너무 떨어지지도 말고. 이걸 네 자로 균형감각 이라고 합니다. 이게 요령이 되어 버린 겁니다. 요령껏 신앙 생활하러 온 겁니다. 요령껏 해 봤자 하나님이 그거 안쳐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붙여주시는 것으로 하는데 그 붙이시는 내용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일단 우리의 모든 능력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할 수 있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대목을 해석해서 포함시킨 문장을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해도 소용없고, 담대해도 소용없고, 내가 너를 떨 수밖에 없는 그들을 너의 앞에 붙일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 자신의 재주와 솜씨와 신앙의 연조와 그동안 모아 놓은 신앙의 노하우를 몽땅 포기하라.”이런 내용입니다. 이 말은 “이번 일은 너희 일이 아니고 하나님인 내가 나타날,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을 느끼도록, 체득하도록 일부러 그 일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동행하면서 내가 중요해서 동행하는 게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분이 중요하기에 내가 거기에 들러리로, 하나의 더빙하는 성우로 같이 붙어 있다는 이 구조, 이 선후간의 관계 구조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 인생을 그런 식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본문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 내용을 실제로 우리보고 하라 하면“그래도 너무 떨면, 너무 심하게 밀면 안 됩니다. 진짜 쓰러집니다.”이렇게 나오잖아요.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민들레를 보세요. 민들레는 온 몸으로 우주와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의 민들레가. 그 말은 뭐냐 하면 바퀴벌레도 그렇고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에요. 민들레, 바퀴벌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민들레와 바퀴벌레를 기르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과 한번 비교해 보고 한번 대조해 보라는 말이죠. 민들레는 그냥 맡기잖아요. 참새도 그냥 맡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우리를 독수리 날개에 위에 업어서라고 나옵니다. 독수리 날개 면적이 40만 명을 다 업을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5병 2어로 떡을 떼는데 떡을 계속 나눠 줍니다. 떡 나눠주기 전에 주님이 먼저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줘라”했습니다. “열두제자 너희가 알아서 5천명을 한번 먹여 봐라.”



이게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주께서 하시는 것은 우리보고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제발 못한다고 생각하고 내게 기대라는 그 말이죠. 어렵게 이야기 할게요. 주님을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아예 내 품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란 말이죠. 품안으로. 우리 외손녀가 잘난 체하고 뭐든지 지 맘대로 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계십니까?”하면서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리려고 하면 무서워한다고요. 기껏 문 두드리는 소리도 겁나가지고 얼른 엄마 품에 안기거든요. 이게 주님의 방법이란 말이죠.  “이제 저 혼자 살 수 있습니다. 집에 통장이 한 오십 개 되니까 어지간하면 삽니다.”하다가 뭔가가 통장 50개를 아무짝에 쓸모없게 만들어요.‘김정은 또 핵실험’이런 거. 통장 50개가 소용없어요. 은행 문 닫아 버리면 돈 다 날라가 버리니까.



주님 품에 안김으로 말미암아 내 일, 내 인생 자체가 없어요. 없는 거 가지고 왜 벌벌 떠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품에 안아 놓고 합니다. “떨지 마. 너의 것은 원래 없었어. 너의 인생 원래 없었어. 저 키 큰 적들 무서워하지 마. 그거 일부러 내 품안으로 들어오게 유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너 혼자 서면 겁낼 수밖에 없는 적들을 일부러 붙인 거야.” 인생 살다가 예상 밖에 일들이 벌어지면 ‘어떡하지..’라고 하잖아요. ‘어떡하지’ 할 때 바로 앞에 있는 내 인생, 그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시작한 일은 주님이 해결하실 거예요. 그 해결 방법이 뭐냐 하면 지금 그 일만 해결하면 안 돼요. 그 일 해결하면 그 일이 내 일이 돼요. 뒤 돌아봐서 살아온 모든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인데 나는 그냥 더빙으로 덧 붙여 온 거예요. 그냥 중계방송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인도 했습니다. 얘가 시험에 또 떨어지게 했습니다. 나는 또 이쪽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어금니야, 지금 얼마만큼 아프니? 많이 아파? 많이 아프답니다.”하면서 중계방송 하고 있어요. 자기 인생을 마치 타인처럼, 내 인생 아닌 남의 인생처럼. 남의 인생 맞잖아요. 주님의 인생이죠. 내 인생 아니니까.



주님의 인생을 우리는 더빙이나 하면 되는 거예요. 쫄지 말고. 떨지 말고. 그게 바로 6절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7절에 봅시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이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 절대로 우리는 마음을 강하게 할 수가 없고 담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품안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의 일에 나설 수 없는 그런 작은 마음, 새 같은 마음, 뭔가 나 하나 스스로 처리해서 밥 하나 먹고 살수도 없는 그 정도로 나약하고 허약한 존재인 것을 우리는 실감해야 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런 일을 할 때에 주님 품안에 있으면 되느냐. 우리가 주님 품안에 있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또 바깥에 쪼르륵 달려 나갑니다. 불러 낼 때 주님께서 그냥 불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섭지?”하는 것이 아니고, “너 죄 지었다.”라고 해요. 왜냐하면 구약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그 블랙홀에는 피가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주님께서 존재로 인도를 하지만 이게 마무리 해답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의 피로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든든하니까 오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구약이고, 신약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갔던 그 피 안으로 오게 되면 너는 어떤 죄를 지어도 의인이 되고, 만약 네가 혼자서 의롭게 되려고 하면 어떤 의를 행해도 그것은 지옥 갈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피 용서와 긍휼을 알라고 우리로 하여금 깜짝 깜짝 놀랄 일들이 자꾸 일어나죠. 그럼 이렇게 물으시겠죠.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교회를 가야 됩니까? 뭐 어디로 가야 됩니까?” 그냥 여러분 사시는 데로 살게 되면 여러분들이 뭔가 자꾸 내 힘으로 살수있겠다는 자만과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고요한 시간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실 거예요. 고요한 시간을 허락하게 되면 거기서 순회하는 게 아니고 직선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20대 이렇게 고생했더니만 이제 나이가 이만큼 되어서 내가 호강을 하는 구나.’젊을 때 시어머니, 시누이, 그 다섯 명 여섯 명 되는 사람 다 섬기니까, 이게 천심이거든요. ‘이 나이 되어서 아무 걱정 없이 복을 누리는 구나.’라고 하면서 우리는 자꾸 이렇게 혼자 있으면 직선이 되어 버려요. 순회가 안 되고.



직선이 될 때에 주님께서는 난감한 일을 줘버려요. 난감하게 되면 우리는 반항합니다. “제가 뭐 어쨌다고 이런 일을 주십니까?”라고 할 때, ‘아, 이게 바로 내 속에 있는 죄구나.’하는 겁니다. 이 죄 때문에 우리는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에게 쫄았고,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절대 행복한 사람 없습니다 -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그리고 나보다 힘센 사람을 두려워했고, 겁냈고.  혼자 바깥에 있으니까, 혼자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피 안에 들어오면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 배치해 두는 이유가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늘 붙여주는 그러한 경우를 당할 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죄를 지고 간 어린 양과 함께 동행 하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힘만 있으면 죄, 의 생각하지 않고 넉끈히 살 것 같은 그런 본성을 지닌 저희들입니다. 그런데 잘 나갈 때, 다 자기가 잘 나서 잘 나가고 못되면 남 탓으로 여겼던 우리, 이제는 피 안에서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