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신명기 29:14-17 / 언약의 효력 본문
언약의 효력
녹취;송민선 156강-신 29장 14 – 17절(언약의 효력 )1710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9장 14 – 17절입니다. 구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이니, 우리가 애굽 땅에서 어떻게 거하였었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며,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언약을 이야기 하면서 언약이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언약이 만들어 낸 것을 어려운 말로 ‘실제’라고 이야기 하고, 언약이 만들어 낸 것 이전의 것을 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현실. 인간만의 세계죠.
그런데 언약이 침투했습니다. 침투하면서 언약이 가만있었던 것이 아니라, 침투하면서 뭔가 생산한 게 있어요. 그들을 자신들은 언약의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은 육적으로 부모 있어서 만들어진 자식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새로운 백성들로 여기 모였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언약 때문에 너희들이 있잖아.”
너희들이 있고, 너희들이 필요해서 언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낯선 너희들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하나님이 언약을 앞장 세워서 이 땅에 기이한 실제 세계, 숨어 있는 실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아침에 잠깐 언급했는데, 그 대목을 제가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절에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참 듣는 이방인 기분 나빠요. 듣는 이방인들은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줄창 24시간 신경 쓰고, 관심 두고, 온몸을 던져서 인생을 살면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있어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루만 하는 게 아닙니다. 누적된 것. 앞으로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서 축적할 것, 미래까지 다 연금 넣는 것, 펀드 넣는 것, 다~여기에 포함 됩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에요. 근데 이 이야기를 이방인들에게 하게 되면 이렇게 말해요.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뭐가 잘못 인데?” 잘 못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게 실제가 아니고 현실이에요. 현실을 누가 부정합니까? 우리도 현실 속에 살고 있으면서. 노아의 홍수가 나기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이게 뭐가 나쁩니까? 뭐가 나빠요?
장가가서 아기 낳고 하는 거, 이게 뭐가 나빠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다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방이라는 테두리를 쳐버리는 겁니다. 테두리. 이방이라는 테두리를 져 버리니까 성경을 보는 이방인들이, “아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 라고 물을 때,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언약이 있잖아.” 언약이라는 테두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 사람들은 지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끝. 그게 전부라는 거예요. 그게 전부인데 그거 말고 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언약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방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언약이 어째서, 언약이 뭐? 그게 등장한 다고 뭐가 달라져?”
여기서 노아의 언약이 동원 됩니다. 노아의 언약이, 그 당시에 필요치 않는 걸 만들었어요. 방주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방주라는 걸 만들서 그 당시에는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필요치 않는 겁니다.
방주가 필요한 것은 어떤 위치냐 하면은 비가 오고 난 뒤, 시점이 비가 오고 난 뒤에 “야, 이거 보다 더 중요한 건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외치듯이 “방주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외칠 것을 미리 앞당겨서 노아는 알게 되었는데, 그건 노아의 솜씨나, 아이디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뭐냐 하면, 현실 속에 살면서 실제 속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낚시줄이죠. 낚시줄. 딱~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이중 프레임이죠. 다중 현실이라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눈, 코, 입 있다고, 다 인간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시는 겁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정한 거 아닙니다. 언약이 정한 거예요. 언약 백성, 마지막 때 언약. “나는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하나님의 열두 지파, 십사만 사천 - 신천지 방식 아니죠. 언약이 있는 사람. 새 언약의 완성. 그것이 마지막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 이 이야기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일관된 겁니다.
“성경보지 말자, 성경 무시하자” 하면 제가 입 닫죠. “현실 만 따지자, 인간들의 세계” 인간들의 현실만 따지면 지금 박근혜 구속 문제가 있고, 지금 기아하고 두산하고 야구 코리아리그 마지막 결과 남았고요, 시카고클럽스와 류현진이 있는 다저스팀, 젊은 사람들 지금 거기에 신경 바짝 세웁니다.
그게 다예요. 하루하루 눈에 보이는 데로 사는 것. 뉴스 나오는 데로 살고, MBC 파업하고, ‘도둑놈 도둑님’ 드라마 중단되고, KBS파업 빠지고, 복면가왕 안한지 한 달 넘었고, 지금 그런 게 문제꺼리예요. 그런 게.
그걸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 그 이야기 하려고, 정치 이야기 하려고 오늘 모였습니까? 아니잖아요. 언약은 있는 사람을 가지고 상대로 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자체적으로 생산해 냅니다. 사람을 만들어요. 언약이 사람을 만들어요. 그러면 어떻게 만드는 가.
여러분들이 보통 식당에 가게 되면 홀은 아로마 향이 흘러요. 그리고 식탁이 반짝반짝 광택이 납니다. 밑에 깨끗해요. 그리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 흐르면서 정숙이 느껴집니다. 아주 우아한 실내가 형성 됩니다.
주방에 들어가 보세요.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볶고, 찢고, 칼 들고 흔들고. 이 세상. 이 세상이 고요한 것은 주방이 분주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방에서는 피가 튑니다.
노아 홍수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겠다. 단 조건이 있다. 피. 내가 노아가 드린 그 제물을 받음으로써 니가 더러운 인간이지만, 날 때부터 악한 것만 생각하지만, 나는 무지개를 띠워가지고, 무지개의 약속을 위해서 너희들에게 정기적으로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겠다.” 하신 거예요. 지금 영천에 농사 잘 됩니다. 영천 사람들 예수 안 믿어도 농사 잘 되요.
왜 그러냐? 이 무지개가 홀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홀. 카페의 홀. 식당의 홀을 장식하거든요.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잘 나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 주방으로 안내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신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일은 여전히 조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한 번 돌아가 봅시다. 이제부터 어려워지는데 그냥 쉽게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9장에 보게 되면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세우는 것은, 자 우리가 지금 노아 때라고 상상하면 돼요, 무서운 홍수, 홍수 직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홍수 직전에 너희는 살았다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은혜를 입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에 살지만 미래까지 연결된 사람으로서, 은혜로 파견 근무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그 다음이 중요해요,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다닙니다. 데리고 다니면 여기에, “애굽 땅에서 어떻게 나라를 통과했는지 알리라”라고 되어있지요. ‘통과’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통과하게 되면 고요했던 이방나라가 복잡하게 되어 버립니다.
고요했던 이방나라가 복잡하게, 평온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걸로 끝이던 이방나라가, 그걸로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고 했던 거기에, 무슨 난리도 아닌, 뭐 중간에 뭐 써레질 하는 것처럼 뒤집어 놓는 거예요.
말썽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쟁기질을 하게 되면 흙이 표면에 있다가 갈아 버리면 안쪽에 있는 흙이 바깥으로 튀어 나오죠. 성도가 이렇게 지나가게 되면 그 현장에 인간들이 덮어 놓으려고 했던 본질이 바깥으로 노출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계모임도 분위기 어색해 지죠, 노래방에 가서 유행가 불러야 될 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그런 노래 불러서 전부다 무거운 짐 지고 집에 가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덮어도 될 일을 노출을 시켜 버립니다.
이거는 성도가 일부러 약 올리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전도라는 갑 질을 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 현장을 언약 위주로 재편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에 그런 운명을 우리가 지니고 그런 임무와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 남에게 돋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잘 난체 하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뭐 여기까지는 별로 어려운 것도 없네요. 그 다음에 보면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여기 우상이라는 말이 나와요.
남들 보기에는, 이스라엘 보기에는 우상이지만, 그들 보기에는 우상이 아니고 진실 된 살아 있는 신을 믿는 겁니다. 신을 믿으면 다른 신을 존중해 줄지를 알아야 하는 데, 이 언약은 다른 신에 대한 일체의 존중 같은 게 없습니다.
그 신들을 전부다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여기는 거죠. 파주 공동체 이야기 한 것처럼 주님께서 그 일 하려고 하나님이 땅에 오신 게 아니거든요. 십자가 지려고 온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그걸 노출 시켜야 되는 데 그들이 하는 것은 지금 교회 만들기 하고 있고 공동체 만들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뒤집어지지 않아요. 그렇고 그런 종교 사업이 돼버립니다. 어떤 큰 교회에 복음을 아는 언약 사람이 들어간다. 이건 말썽꾸러기죠. 와서 막 밀어 냅니다. 제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좋은 게 좋잖아. 교회가 평화로워야지.”라고 하면서.
여기서 일단 우상이라고 내리는 결론은 뭐냐, ‘우상을 들추어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상이, 하나님이 싸우시는 우상을 들추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실제가 현실에게 공격을 하고 현실은 거기에서 수비에 들어가고 방어에 나섭니다.
하여튼 뭔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수비하고 방어하면 이단이라고 보면 돼요. 특징이 주님은 공격하는 쪽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나와요. 11장 12절에 보면 “천국은 침노 당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공격하고 이 세상은 거기에 대해서 가짜 천국가지고 방어하는 중입니다.
실재는 현실을 공격하고 현실은 거기에 대해 방어하고, 방어하면서 이 세상은 실제를 현실에서 밀어내려 하고, 추방하려 하고, 쫓아내려 하고, reject-거절하려 하고, 계속 그렇게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잠시 한 번 쉬어 갑시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가 제 3자 입장에서 조용하게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해 보면 뭐가 결정나야하냐면 ‘나 어느 것 믿어야 돼?’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 성경에,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그런 이야기 있데.’ 이런 게 아니고, ‘지금 나는 어느 것을 믿어야 돼?’ 어느 걸. 뒤집는 걸 실제로 믿어야 되는지. 아니면 그렇고 그런 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벌고, 그런 거를 의지하고, 목표로 삼고, 그걸 믿어야 되느냐는 겁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 듣는 식으로 하면 안돼요. 우리한테 하는 이야기예요. 여기 써있는 언약이 우리에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이 실제 세계냐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늘 생각해도 교인들에게는 그게 신뢰가 안가요. 실컷 들어 놓고 믿기는 뭘 믿느냐 하면 현실을 믿어 버려요. 실컷 들어 놓고. “참고로 하겠습니다.” 이러고는 곧장 현실을 믿어 버려요.
복음 듣는 게 꼭 에프킬러 같아요. 금방 다 날아갔어. 돌아서면 그 냄새까지 다 날아가 버렸어요. ‘아, 성경이 그런 내용이구나. 끝.’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그게 실제입니다. 제가 옛날에 좋아했던 영화가 인디아나존스3인데, 제가 1부터 5까지 다 봤거든요, 그런데 인디아나존스3에서 언약궤가 나와요.
그 언약궤 마지막 장면에 너무 감사했고 감동 받았습니다. 언약궤가 비정하고 비열한 못된 독일군들이 언약궤를 찾아내 가지고 그 언약궤를 들추잖아요. 근데 사무엘상에 보면 그걸 들추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요.
들춰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그들은 옛날 구닥다리 전설이고 지금 그 독일군들은 과학적 세계가 현실세계예요. “내가 들춘다는데 니가 왜 말이 많아?”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그것을 들춥니다.
들추니까, 뭐가 신나느냐하면 그래픽으로 나오는데, 머리부터 뭐가 날라가느냐 하면 제복 입은 독일군들이 머리부터 모래가루가 돼요. 언약궤를 들추는 순간 악마얼굴을 한 천사가 나타나 가지고 언약궤 들여다보고 있는 그 날카로운 독일 나치들을 장교부터 군인까지 모두 모래로 만들어 버려요. 머리부터 발목까지 그리고 나중에 발목도 날라가버려요.
“어디를 들여다 봐!” 이게 바로 현실을 이기는 실제 세계예요. 현실을 이기는 실제 세계. 눈에 보이는 세상 끝장나고 보이지 않는 주께서 재림하며 등장하는 그 세계입니다. 모든 인간은 불속에서 다 날라가 버립니다.
그 영화 보면서 막 박수치고 해리슨포드랑 악수하고 싶고 그랬어요. 그 장면이 바로 사무엘상 6장 7 – 8절에 나오는데 빨리 지나갑니다. 언약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 - 아벡 - 아스돗 - 가드 - 에그론 - 벧세메스 - 길르앗여아림, 그렇게 있다가 사무엘하 6장에 가면 예루살렘에 비로소 입성하게 되어 있어요.
실로 - 에벤에셀 - 아벡 - 아스돗 - 가드 - 에그론 - 벧세메스 – 길르앗여아림, 이러한 절차를 사무엘상 1장에서 7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데, 그 지명의 의미가 뭐냐 하면 언약궤가 가만있으면 다른 사람은 현실이에요, 실제가 아니고. 현실이에요.
농사짓고 자기 식구끼리 웃으면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저 바깥에서 내 안으로 온다고 인문학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문제는 이거예요. 그럼 불행한 것은 지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겁니까?
내가 하기 나름으로 언제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럼 불행은 지가 일을 잘못해서 불행한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 세상이? 날 때부터 못사는 데 태어났고, 날 때부터 턱에 종양 올라오는 데, 날 때부터 못 배웠는데 어떻게 합니까? 날 때부터 술 해서는 안 되고, 담배해서는 안 되고, 도박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가정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가정이에요.
저도 위대하신 삼촌께서 남자는 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해가지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을 데려다 술을 먹여서, 나는 남자는 술을 먹어야 남자가 되는 줄 알았어요. 다 토하고...난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왜? 배운 한계가, 그 프레임이, 그 테두리가 그 세계예요. 실제 세계, 언약 세계를 몰랐어요.
나는 그 때 이방인이었어요. 끔찍한 이방인, 은혜를 모르는 이방인, 내세를 모르는 이방인, 불심판 이후에 생명책이 있는 것도 모르는 이방인,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그 골로새서 1장 16절을 몰랐던 이방인이었어요.
남들 따라가면 되고, 류현진이 따라가면 되고, 남들 출세한 거 따라가면 되는, 우병우처럼 천재되면 되고, 그게 다인 줄 알았죠. 그게. 노벨 문학상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인간은 거기서 질문이 뭐냐,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의 명분이 중요하냐 아니면 아버지 죽은 것이 중요 하냐’하는 그 대목이 나와요.
그 작가는 중요한 문제를 묻습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명분이 뭡니까? 여러분 직업이 뭐냐? 그놈의 집사, 장로, 목사 이게 뭔데? 그게 여러분 전부 입니까?
그래서 내가 평을 해 놨잖아요. 내가 하는 일이 내 기본 원천을 갉아 먹어도 언제까지 그걸 허락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내가 하는 일이 뭐길래? 내 기본 원천 의미까지 다 날라가 버리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명분이 뭐냐? 그 명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악한 변수들이 그것 때문에 악함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위장하는 그런 희생을 치렀습니까? 나 오늘 이만큼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가족을 버렸습니까? 안중근, 이봉창.
자기가 한다는 그 명분 때문에, 자기 하는 일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눈물 흘렸습니까? 지만 장사 잘되면 그만이고, 자기 잘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근원적인 죄는 십자가 앞에서 처음부터, 날 때부터 죄인이라면 제발 죄를 좀 지세요. 아, 참, 이런 복음 아는데 30년 걸렸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아이가 종지를 깨도 나무라면서 엄마는 단지 깨도 가만히 있다는.
얼마나 자기 위주입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술 팔면 나쁜 거고 꽃 팔면 천사인 줄 알고 있어요. 술 팔든 꽃 팔든 그건 인간의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소유로 살아요. 그러나 주방에 있는 그 사람을, 주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인물들을 레스토랑 홀로 집어넣는 것이 바로 언약의 침노예요. 침투고 급습이에요.
“조용하게 사니 죽어서 어디 좋은데 가는 줄 알았지? 이런 낯선 인간들 도 있다.” 이런 인간 있는 줄 니들이 생각이라도 해봤냐는 거죠.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겁내고 있는 거예요.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주가 뭔데 나를 이렇게 두렵게 하고 겁내게 합니까? 나를 이렇게 내가 원치 않는 무서운 길로 몰아넣습니까?” 니 혼자 가는 게 아니고 언약궤가 함께 가고 있다는 겁니다. 언약궤가 아까 실로에서 에벤에셀로 옮길 때 자율운행이었습니다.
이건 뭐 테슬라 나오기 전에 이게 먼저 나왔어요. 이거는 저절로 움직여요. 저절로. 가는 곳 마다 완전히 죽음을 유발해 버립니다. 근원적인 죽음이에요. “살았냐? 언약의 입장에서는 이건 너에게 저주야. 산 게 아니고 언약 입장에서는 죽은 거야.”
“날 들여다 봐? 다 죽어버려.” 따라서 언약궤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기적에 속합니다. 언약궤와 함께 살아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언약궤가 순환을 시켜서 언약궤에 의해서 순환된 새로운 백성들을 생산하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해당되고, 그 언약궤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은 언약궤에서 완전히 다 저주 받는 방식을 주께서 채택하신 겁니다.
자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어떤 할머니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길에 올라가다가 쳐 박혔습니다. 그러면 짐이 문제입니까? 수레가 문제입니까? 이거는 짐이 무거워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성도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 뭐냐 하면, 언약을 짊어 졌어요.
그러면 우리는 언약을 끄는 소, 또는 수레에 불과합니다. 언약은 자율 운행이에요. 나는 나 나름대로의 현실세계에 있다 보니까 고집이 또 있어요. 나의 고집과 언약만 증거 하기를 원하는 실제 세계의 주님과 이게 마찰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주님의 희한한 고백이 나중에 사도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오늘날 언약의 사람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이거 생각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 언약의 사람에게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을 제가 청년 때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청년 때는 또 꼼수가 통하거든요. 아, 내가 원하는 거 있는데 지금 당장 달라하면 염치가 없으니까 그 나라 의를 구하고 난 뒤에 와서 ‘주세요’라고 하면 되겠다는 꼼수를 썼어요.
근데 그 나라 의를 구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때는 대구 서일교회 다녔거든요. 서일 교회에 충성하게 되면 그게 하나님 일이 되니까 새벽 4시부터 출근해 가지고 11시까지 전도사도 아닌데 그만큼 봉사 많이 했어요. 다 했어요. 다 했어. 그 때 누구도 만났지만.
다 하고 난 뒤에 ‘취직시켜 주세요, 빨리 결혼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요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아무도 저지한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언약을 모르니. 내가, 수레가 수레의 뜻을 포기를 못한 거예요. 언약이 뭔지도 몰랐어요.
언약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줄 알고, 주고받기 인줄 알았어요. 그것이 사탄의 속임수였어요. 그게 거짓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의를 구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재 나에게 안준다는 것이 아니고 줘요, 주는데 그것이 복음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돌아 서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복음과 연관된 거예요. 그런데 복음과 연관 되려면 방해물이 있어요. 바로 내 뜻이 방해물이 되는 거예요. 주님도 한 고집하시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줘 놓고 거기서 우리 입을 막아 버리는 겁니다.
내가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맥아지를 쥐고 잡아 땡겨버립니다. 치워버리시면서 “봐라, 너한테 준 것이 너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나라 의를 위해 줬는데 니가 자꾸 그 앞에서 얼쩡거리잖아.” “주여, 내가 주님께 드린 사랑은 어떻게 됩니까?”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박살내 버릴까. 주님의 사랑이 내가 주님을 사랑했던 그 비축된 사랑을 전부다 박살 내 버려요.
“머리 좀 비켜라” 하시면서.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주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한한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의를 짊어지고 “나는 세상에 빚진 자입니다”라고 자기 혼자만 아는 소리를 해 가면서, 주께서 수레를 굴리듯이 로마까지 가서, “소원이 뭐냐?”라고 주께서 물으시니까 단박에 “제발 제가 고만 좀 방해하도록 저를 좀 데려가 주세요! 주여!”
있어봤자 또 매일같이 주님 앞에 얼쩡거릴 거니까 제발 점점 소실되어서 그 독일 군병들처럼 점점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언약궤만 나타나게. 주께 그렇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습니다. 오늘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누구 부러워하지 말고 언약궤 가는 곳에는 현실을 공격하는, 침노하는 주님의 실제 세계 속에 우리가 이미 참여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가 한 희생을, 십자가 희생을 사람들은 도외시합니다. 심지어 우리마저 도외시 했습니다. 주께서 고맙게도 그걸 외면치 아니하시고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 의보다 더 우세함을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발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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