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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신명기 29:10-13 / 언약 앞에 집합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29:10-13 / 언약 앞에 집합

정인순 2017. 10. 15. 16:37

 

 

언약 앞에 집합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17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신명기 29:10-13

(29:10)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29:11)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29:12)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예하여

(29: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사람은 수많은 사람은 만나고 겪습니다. 마치 전자기기 뒤쪽에 있는 배선같습니다. 하지만 그 배선들이 모여서 한결같은 화면을 인간들은 바깥을 향하여 보이게 됩니다. 그 어떤 경우를 당하나 하나같은 풍경을 보입니다. 모든 이가 다 그러합니다. 그 화면은 바로 ‘자기 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존재들을 아무리 한 곳에 집결시켜서 달라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많이 모였다’라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절대로 변화되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오직 이 개념만 적용하면 정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어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서 마치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오해한 가정이 있었으니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 가정입니다. 평소에 엄청 예수님을 섬기고 자타공인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과연 이들은 자기 의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자기 의만 챙기는 이 세상 공식을 어디에다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합니다. 즉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가족은 나름대로 예수님 앞에서 사는 가정이라고 여겼습니다. 결코 자기네들 만큼은 ‘자기 의’로 산다고 생각을 추호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오빠 나사로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합니다. 동생들이 다급해서 예수님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오빠가 아프니까 빨리 조치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사랑했으니 주님께서 그만한 배려를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마르다 가정은 자신들이 자기 의만 생각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몰랐습니다.

이는 곧 아무리 예수님 발 앞에서 살아도 결코 언약에 원하는 ‘언약 앞에 집결’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자기 고집 그대로, 자기 생각 그대로 누구 앞에서 나서도 자기 의는 죽지 않고 멀쩡하게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생각이 예수님 생각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은 막상 예수님께서 나타났을 때 드러납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죽기 전에 와 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이 죽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은 평소에 마르다, 마리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엉터리 생각이 인간들의 ‘ 자기 의’의 내용을 채웁니다.

예수님 일부러 죽고 난 뒤에 갑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사고방식을 고치기 위함입니다. 즉 오빠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 마리아가 감히 생각 못한 사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우선이 아니라 사건이 우선입니다. 인간 위주의 의식을 사건 위주의 의식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건을 가지고 언약을 전달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나는 6년 전에 배를 탔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라는 문장과 “내가 배를 탔다가 물에 빠진 사건이 있은 지 벌써 6년이 되었다”는 문장의 차이입니다. (내가 배을 탔다가 물에 빠진 사건)을 문법에서 ‘명사구’라고 합니다. 한 덩어리로 다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의 숫자가 몇 명인가를 따지지 않고 모두 한 덩어리로 취급합니다. 개인들이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을 고려해서 한 덩어리로 다루는 게 아닙니다. 그 모든 요소를 무시해버립니다. 모든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불신으로 산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언약 앞에 부름받아 나와도 언약이 각 개인에게 들어갈 자리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발생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모두 ‘자기 의로움, 자기 자랑거리’로 한데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생각을 포기하거나 취소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 행위를 가동시키는 추진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언약 앞으로 불러 모은다는 것은 인간들이 예상 못할 다른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한데 묶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6: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어 모은 것이 아니면 시시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신의 애씀과 지혜와 노고의 결과물을 최고로 쳐줍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이나 사건을 통해서 ‘자기 의로움과 잘남’이 극대화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가 애쓴 것이 아닌 그 앞에 집결되기를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기 잘남을 기념하는 기념물 앞에만 마음과 정신이 쏠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즉 ‘하나님의 의’를 이런 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값’이 지닌 채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 내부에 성도의 정성이나 하나님의 정성이냐 놓고 치열한 경쟁과 다툼이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그 값이 값되게 하고 싶어합니다.

그 값은 마치 ‘사망보험’ 같은 겁니다. 사망보험은 수령자가 죽지 않는다면 당사자에게 단 한푼이라도 가지 않는 그런 보험입니다. 십자가라는 값이 그런 겁니다. 십자가 이용해서 살려는 자에게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되지를 않습니다. 십자가의 일은 ‘사건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게 사건입니다. 모세 본인이 십자가 사건에 말려든 겁니다. 즉 하나님의 ‘사망보험 작전’에 성도들이 말려듭니다. 이 값을 값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양보없이 인간의 자기 의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의 죽음 사건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인간들은 살아 있는 한 ‘자기 의’에 분주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살아있는 한 그 ‘자기 의’를 용납지 않고 죽이십니다.

이로서 ‘자기 의’가 지적받는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값을 실감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자기 의를 과시하도록 그냥 방치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55강-신 29장 10 - 13절(언약 앞에 집결 )

1710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9장 10 -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오늘 너희 곧 너희의 두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방식을 언약 앞에 세우게 합니다. 이 말은 인간 중심에서, 인간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이동하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이동하니까 자꾸 개인들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어요. 개개인적으로.

어디 한데 집결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개개인적으로 말씀 세계에 들어가려는 그런 경향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면 개인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살아있는 셈이 되어 버려요. 옛날 국민학교 때 소풍가거나 수학여행 가게 되면 전부다 한데, 분명히 선생님께서 보통 수학여행가면, 국민학교 5학년 때 경주 같은 데 많이 갔거든요, 근데 경주 모일 때 꼭 새벽에 모여요. “새벽 5시에 대성국민학교 앞에 모여라” 하시면 모이는 데, 꼭 있는 집안들이 학교 안모이고, “직접 갈게요.” 합니다. 얄미워 죽겠어요.

모이면 같이 모여 가면 되는 데, 꼭 있는 집 아이들이 아버지가 차로 어느 지점까지 데려 간답니다. 개인 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군에서도 있고 꼭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모여서 같이 간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데, “목적지 알려주면 내가 알아서 따로 갈게.” 이렇게 돼버리면 “가는 도중에 나는 니들하고 안 논다.” 이렇게 돼버리잖아요.

그래서 집결한다는 게 오늘 본문에서 중요해요.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여러 이야기 있지만 거기 끝에 보면,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 앞에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지 그 앞에 하나로 모이는 겁니다.

하나로 모이게 되면 이것은 뭣을 뜻하느냐 하면, 니가 어디서 물을 긷든 나무를 패든 이런건 일체 말씀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니가 직업이 어떠하든,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니 재산이 얼마든,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말씀 앞에서는 그런 것을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것을 말씀은 따지지 않습니다.

그럼 이 말은 뭐냐, 말씀은 모든 것을, 니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던 간에 묻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새로 시작하는 방법은 말씀이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씀이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 방법.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것 뒤에 오는 말이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했거든요. 그 대목이 저는 두고두고 생각해도 감사해요. 전부다 제 갈 길로 갔어요. 여덟 사람 같으면 여덟 길로 간 거예요. 각자 제 취향대로 제 직업대로 다 흩어졌는데, 주님께서는 제 갈 길로 간 양들을 오직 자기 쪽으로 다 모아요.

자기 쪽으로. 그 모으는 방법이 뭐겠어요. 그 사람들 자기 직업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열두 제자가 직업이 하나가 아니에요. 고기잡이 부터해서 다 다르다고 봐야 해요. 직업가지고, 열둘이 다 하나의 직업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 모으시잖아요. 자, 여기서 뭣으로 모았냐는 겁니다. 그거야 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모았지요. 그러면 그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모았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모을 때에 주님께서 그 점을 계속 제자들에게 각인 시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 갔을 때 제가 높은 자리 앉습니까?” 뭐, 이렇게 할 때에 그런 것들을 무산 시키는 방법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 와가지고 “너희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고 이야기 하지요.

이 어린아이를 데려온 이유가 뭐냐 하면, 어린아이는 자기 것이 없어요. 어린아이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잖아요. 그냥 누가 살려준 데로 살죠. 이게 천국의 모양새입니다. 일찍 시작한 천국의 모양새예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부모의 자리고, 주님의 자리란 말이죠.

낮에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바꿉시다. 불신으로 구원받는다고. 불신앙으로 구원받으니 구원받기가 얼마나 쉬운지. “믿습니다!” 이런 거 할 필요 없어요. “제 믿음 개코입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저 믿음 없어요.”하는 말이 뭐냐 하면 “손들어!”하면 손 들면 되는 거예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하잖아요.

그냥 손들고 오면 되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그런 것 쥐고, 들려고 하지 말고 버리면 되요. 그렇게 먼저 주님 앞에 손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3장 4절에 모세입니다. 모세가 자기 직업이 있었어요.

그것은 목동 이었죠. 양을 치는 사람인데, 떨기나무가 불이 붙었어요. 뭐가 있는지 가까이 가보니까 거기에서 주님께서 나타났습니다. “모세야”라고 부르지요. 그럴 때 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그 뒤에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이 그대로 나옵니다. 6절에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자 이제부터 본건 적으로 설교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상당히 어려워요. 지금 분명히 떨기나무 앞에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 모세 있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 있고 모세 두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작 내미는 것은 모세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모세가 원하는 거 시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론해 버려요.

그러면 그 자리에 누구를 불러와야 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불러와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없고, 이삭도 없고, 야곱도 없는 데, 그 후손들은 모세보고 아브라함 언급하고, 이삭 언급하고, 야곱 언급한다는 거죠. 이거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말씀 적일 때 어떻게 하시는 가, 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잘 이해 안 되죠. 그래서 이해 되게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6년 전에 배를 탔다. 그런데 물에 빠졌다.’ 여러분 무슨 의미인지 알겠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6년 전에 배를 탔는데, 그 때 물에 빠졌었다.’ 대략 상황 나오죠? 근데, 똑 같은 말인데 이렇게 해 보겠습니다. ‘내가 물에 빠진 사건은 6년 전에 일이었다.’ 내용 상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게 뭐냐 하면 ‘내가 물에 빠진 사건’ 이라는 ‘사건’을 집어넣었어요. 제가. ‘내가 물에 빠진 사건은 6년 전에 일이었다.’에서 ‘내가 물에 빠진 사건’을 괄호를 쳐버리면 이걸 문법에서는 ‘명사구’라고 합니다. 명사구. 쉽게 말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된 거예요. 덩어리 돼 가지고 하나의 사건을 설명 할 때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너는 어떻게 된 거야?”가 내가 사건을 유발한 것이 아니고 사건이 나를 덮쳤는데, 6년 전에 물에 빠진 사건에, 나는 거기에 하나의 사건을 드러내는 일부로써 나는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때 물도 있었고, 배도 있었는데, 나도 있었다’가 되는 거죠. 어쨌든 간에 ‘사건이 사건 되기 위해서 나는 걸려들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을 이렇게 살면 어떨까요? ‘나는 사람을 죽였다’ 이러면 그 앙금이 평생을 찡그리면서 살아야 되요. 심지어 완전범죄로 안 잡혔다 하더라도. ‘나는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였어.’ 하면서. 그런데, 좀, 뻔뻔 합시다. ‘나는 6년 전에 사람 죽인 적이 있다’로. ‘난 그 사건에 말려들었어. 내 잘못 아니야. 사건 중심 이야, 나는 사건에 말려들었어. 내가 떨기나무 불 펴 놓고 하나님 오라고 한 거 아니야, 하나님이 자기 사건 이루기 위한 것에 나는 그냥 말려들었어.’ 왜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못 살아가느냐 이 말이죠. 왜.

그건 아직까지도 개인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지금 인생을 지가 망치고 있습니다. 자기 스토리, 자기 소설은 폐기처분 하세요. ‘이거는 내 인생입니다’ 하지 마세요. 언제쯤 우리가 ‘이것은 아브라함의 사건입니다.’라는 말로 언제쯤 바꿀까요? ‘이것은 이삭의 사건이고 야곱의 사건입니다’라고 바꿔야 돼요. “목사님, 세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그러면 하나로 바꾸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 사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이 마지막 때에 증거 하기 위해서 사건이 나에게 덮쳤고, 나의 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십자가 사건은 이런 식으로 내용이 되어있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해서, 민들레의 하나의 홀씨처럼 날아가서 어디를 가도 그 지점이 십자가 사건이 유발 되도록 그렇게 유발된 겁니다. 인천 살건 경주 살건 마찬가지죠.

어디가도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되는 거예요. 이제 경주 사니까 원자력 발전 건설한다고 데모하고 하는 그런 거 중시하지 말고요. 그건 십자가 사건이 아니겠죠. 왜냐하면 아브라함한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 들으면 이해는 되지만 기분은 살짝 나빠요.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요일에도 이야기 했지만 에서가 화를 낸 것은 ‘내 인생인데, 내 인생, 내가 장자인데.’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나는 누구의 시다바리였습니다. 내 인생인데 내가 결정 못하고, 내 인생인데 내 운명인데 내가 정리하지 못하고, 남 부각시키고, 남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보조역할이었다는 것이 하나의 분노로 그리고 극한 울분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대든 이유가 거기 있어요. 따로 독립해서 사탄, 악마의 인생을 따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인류가 다 말려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탄의 분신들, 아담의 분신들이 하나같이 특징이 뭐냐 하면 한 장소에 모이기를 싫어합니다. 꼭 학교 교정에 모여서 수학여행가도 꼭 따로 가요. 따로 가고 싶어 해요. 꼴보기 싫은 사람 있어가지고. 각자 개인플레이 하는 겁니다.

그걸 육의 열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보면. 분당을 좋아하고, 당 짓기를 좋아하고, 전부다 개인플레이죠, 자기밖에 모르고. 문제는 이겁니다. 문제만 알았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요. 문제는 출발이 주님께서 각자 사는 곳에서, 말씀에 보면, 나무패는 자, 물 긷는 자, 아이들, 아내, 어떤 사람들도 다 한 곳에 모이라 했단 말이죠.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각자각자 자기 자리에서 무슨 생각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파악을 해 줘야 돼요. 이 모였다는 그 이야기만 하면 안 되고 ‘여러분들은 각자 집에서,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아갑니까?’하고 제가 여러분에게 속으로 묻는 겁니다. 그 물음에 대해선 제가 지난 금요일에 의존교회에서 언급을 했어요.

이걸 전자제품 뒤에 배선이라고 제가 표현했습니다. 선이 굉장히 복잡해요. 무지무지하게 복잡해요. 그런데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온갖 사람 많이 만나고, 온갖 일 다 당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기억으로 전부 다 자리 잡는다면 그 배선이 전자제품 배선을 훨씬 능가합니다. 굉장히 얽히고설켜있어요.

그런데 그 복잡한 배선이, 의존교회의 예를 다시 들게 되면, 티비 브라운관의 복잡한 반도체의 배선들도 결국 티비의 화면을 보면 하나의 장면으로 나와요. 주사가 돼서, 딱 쏘고, 하나의 장면이 나오는 데, 그 하나의 장면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목사도 만났고, 신부도 만났고, 부처도 만났고, 절에도 가고, 또 많은 권력이 있는 자, 없는 자, 많이 만났지만, 누구를 만나든, 치과도 가고, 내과도 가고, 요양병원에 가고, 등산을 가고, 어디를 가도 한결 같아요.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라는, 내가 주인공 되는 사건, 마귀적 사건, 악마적 사건, 그것만 달랑 보여 줍니다. 이미 물 긷는 자, 나무패는 자, 각자의 직업이 그냥 곱게 인생 살지 않습니다. 내 하는 행위가 나에게 직결 됩니다. 그 직결될 때 연결고리가 뭐냐 하면 ‘자기 의’예요.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또 기분 나빠요. ‘니가 뭐 했다고 나와 같은 의인이야’하면서. 우리의 의가 아니고 나의 의예요. 나의 의. 나의 의로움입니다. 자기 의.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온 말씀이거든요. “자기 의 때문에 주의 의를 복종 치 아니한다”고 했어요. 주님의 은혜, 주님의 의가 아무리 와도 뭔가 적이 있어요. 가로막는 게 있은데 가만 따져보면 그 복음이 와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자기 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의존교회 강의 할 때 이랬어요. 사람이 십자가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는 공짜로 줬기 때문에 그래요. 공짜로. 공짜로 준 것은 그다지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배선에, 내가 만나 모든 것에 공짜로 온 것은, 날아가도 아깝지 만 별로 안 좋아해요.

진짜 내 의가 되기 위해서 꿍쳐 논 모든 것은 내가 힘들여서, 애써서, 달성하고자, 악을 써 가면서 얻고자 했던 그것이 얻어 질 때는 이거는 천하보다 귀한 것,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이 안에 들어 있어요. 왜, 그 안에 자기의 모든 일생과 자기의 수고와 애씀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누구를 만났든, 수천 명을 만났어도 마지막 모으는 것은 내 힘으로 얻었던 것만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걸 믿습니다. 심지어 교회 가서 예수를 믿어도,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내 의가 예수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백날 교회 한데 모으고 놀러 수학여행 같이 가도 따로 놉니다.

자기 의가 있는 한, 그걸 못 버리죠. 그러면 주님의 조치가 필요한데, 이 시간 주님의 조치가 어떻게 되는가하는 그게 제일 중요한데요. 주님의 조치가 고린도전서 6장 25절에 나옵니다. 요새는 설교 듣는 것도 피곤해 하니까 내가 알아서 감안을 해줘야 돼요. 내가 읽을 게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냥 줬으니’가 아니라 뭐라고 했냐면 ‘값으로 산 것이 됐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 했거든요. 거기에다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사망 보험금을 집어넣읍시다. 사망보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죽어야 효력을 나타내요. 죽어야. 주님께서 사망보험금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 돈 못 받습니다.

내가 자기의가 있는 이상은 구원의 은혜고, 뭐고 못 받아요. 없습니다. 물론 동반해서 그렇지요. 주께서 십자가 은혜를 주게 되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니 의는 이제 죽었어.” 이런 뜻이거든요. “내가 설사 너를 졸음 운전자에게 받혀서 터널에서 죽게 한다 할지라도 너는 끽 소리 하지 마.” 이게 보험계약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그런 계약 할 리가 없죠.

그러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보험계약을 그렇게 맺었습니다. “너를 죽는 걸 통해서 내 값만 빛나게 하겠다.”는 주님의 자기 욕심이에요. 하나님의 자기 욕심입니다. 우리 욕심 같으면 그런데 근처도 못갑니다. ‘니 사업 망하게 돼도 내 값은 기어이 찾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잘 못 걸려든 거예요. 우리야 물론 그런 주님을 원하지는 않죠. 자기 의를, 내 자기 의를 박수쳐 주는 그런 여호와, 그런 하나님, 그런 삼위일체, 그런 예수를 찾았는데, 정작 성령이 와서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 다음이 무슨 말이냐 하면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뭐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교회 나오면서 착각들을 하신 거예요. ‘나는 6년 전에 물에 빠졌다.’ 그거 아닙니다. 이거는 일방적이에요. “나는 너를 6년 전에 물에 빠트린 내가 벌써 6년이 지났다.” 이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값으로 준 것을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집어넣은 그 사망보험 그 값이 나보다 더 중요해요.

왜?, 하나의 사건이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그렇게 다뤘습니다. 너가 중요하지 않고 너의 하나님이 중요해요. 쉽게 말해서 어떤 집이 있는 데, 임금님이 거지로 변장했어요. 어떤 임금님이. 임금님이 변장해가지고 “하룻밤 묵어가도 됩니까?” 하니까 너무 허름해서 불쌍해가지고 “예, 저 안채에 주무세요.” 근데 아침이 딱 되니까 포졸이 수백 명이 와가지고 집을 뺑 둘러쌌어요. 뭐 남한산성도 아니고. 싹 둘러쌌어요. “임금님, 그만 노를 거두시고 어서 궁궐에 드시옵소서.” 하는 거죠. 주인은 뭐 허름한 손님이 왔는데, 웬 신하들이 아침에 보니까 절을 하고 있단 말이죠. ‘도대체 내가 어떤 손님을 거둬들인 거야?’ 가만 보니까, 임금님을 거둬들인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이 허름한 우리 안에 아브라함이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들어왔어요. 일방적 사건을 유발 시킨 겁니다. 내가 원하는 사건 말고. 나는 나의 잘남밖에 몰라요. 머리가 나빠서, 나는 내 잘난 거 자랑 질 하는 것밖에 모르는 데, 주께서 그냥 쑥 들어와 버리니까 졸지에 나도 하나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겁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값이 레위기 1장 9절에 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며,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로 삼을지니” 여러분 지금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죠? 어디하나 제물 잡는 제사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지금 이 원칙으로 우리를 잡아요.

우리가 돈까스 재료라는 겁니다. 우리가 음식 재료예요. 우리는 잡채하고 시금치하고 막 섞이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와께는 향기로운 냄새니라.” 주께서 정말 맛있다고 이야기하시네요. 데쳐먹고, 구워먹고, 삶아 먹으면서. 우리 인생을 내가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하나님 마음대로 가지고 가서 데쳐먹고, 삶아먹고, 이거하지 말고, 소 키우지 말고, 딴 거 하고, 이렇게 계속 하나님 맘대로 하면서 “아이고 맛있다, 아이고 맛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자진해서 하나님의 음식이 되지 못 합니다까? 왜 우리는 자진해서 주께 맛있게 드리는 음식이 되지 못합니까? 왜 내가 맛있는 내 인생 따로 꾸리려고 하는 겁니까? 따로 놀기 때문에 그래요. 참 따로 놉니다.

제가 방금 레위기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이야기 했죠. 왜 자꾸 성경이야기 하느냐 하면 성경 전체가, 또 값으로 산 고리도전서이야기 했잖아요, 성경 전체가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왜?, 말씀은 한 덩어리니까. 말씀이 한 덩어리란 말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봐도 우리는 한 덩어리예요.

왜?, 각자각자 자기 의밖에 몰라요. 자기 잘남, 자기 과시욕, “나 잘났다, 니 보다 내가 더 잘났어.” 그런 거 의식하면서 교회 나와요. 여기도 한통속이고 주님도 한 마음이에요. 하나님께서, 도대체 우리는 정말 말 안 들어요, 결국은 주께서 예수님 보내셔서 전쟁을 벌이고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승자의 전리품으로 우리에게 값으로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달라 한적 없어요. 우리는 내 식대로 살고 싶어요. 근데 불쑥 들어온 게 뭐냐, 사망보험금이 들어옵니다. “니가 죽을 때 효력이 난다”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주일학교에서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에게 대접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이야기입니다, 오빠가 시름시름 죽은 것도 아니고 죽어가고 있어요. 마르다가 급해가지고 전갈 보내서 빨리 예수님을 모셔오라 했어요. 마르다 생각은 이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과 관련된 게 뭐냐 하면, 독자적으로 자기를 위한 사건을 따로 생각한 겁니다. ‘나는 6년 전에 머리 빠졌다’ 항상 내가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뭐냐 하면, 이거는 말씀이에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사건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다 말려들게 한 거예요. 일부러 팔짱끼고 안가셨습니다. 일부러. 왜?, 고따구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병든 것을 낫게 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상 이놈의 인간을 고쳐야 될 거 아닙니까? 왜? 그게 자기 의고 자기 생각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걸 주님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부러 애간장을 태우는 거예요. 안갑니다. 죽고 난 뒤에 주님 멱살 쥐지요. “아이고 이 야속한 오빠, 주님을 오빠라고 하면 안 되지만, 이 야속한 분이시여, 그만큼 대접을 받았으면 조그마한 우리 소원은 들어주어야하는데 죽고 난 뒤에 판 끝나고 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걸 뜯어 고치는 겁니다. 그 마르다 마리아 우리가 탓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거 아닙니까? 살아있는 나를 더 살리려고 교회 온 거 아니에요? 사망 보험금 한 푼도 못 받습니다. 더 중요한 건 사망보험금의 그 값이에요. 값을 값대로 그냥 뜯어내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껍데기예요.

나사로 죽였습니다. 난리 났습니다.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이럴 줄 몰랐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가보자” 돌문 열고, 냄새 났고, 다른 사람들 기겁했고, 죽은 지 나흘 됐으니 냄새에 기겁했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끄집어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지금까지 “예수님” 하면서 자기 가정 챙겼습니다. 한곳에 모이질 안았어요.

예수님 앞에 말씀은 듣는 데, 예수 앞에 나온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내 사건 가지고 예수님 추가 하려고 했습니다. 잘못입니다. 내 사건은 주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부활 사건을 위해서 여러분, 우리들이 소모되어가고 있고, 주께서 초청한 겁니다. 이제는 나에게 맛있는 음식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향기로운 냄새 되시는 음식, 주께서 드리시는 음식이라면, 주께서 이끄시는 데로 항상 십자가만 보이는 쪽으로 인도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곳에 모이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각자 지 고집 있고, 자존심 있고, 위신 체면 다 챙기고, 자기 의 챙기고 그렇게 쓸데없이 살았습니다. 주여 그 허접한 사건마저 십자가만 돋보이고, 십자가 피 값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