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발산에서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17년 7월 23일 본문 말씀: 신명기 27:11-15
(27: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27: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27: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27: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에게는 그 해야 할 일이 자체적으로 개발하는데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따로 조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되도록 이끄십니다. 중심부에 자리잡으시고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반면에 이방민족은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은 본인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이방민족의 구성원들은 개별적인 의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결국에는 정작 본인들이 기대하는 개인적 삶이 보다 안전하고 풍족해지리라는 기대를 갖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우회적 방식으로 자기가 속한 사회를 이용하고자 하는 겁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으로 조성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내용과 관련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과 맞지 않는 시도나 의욕같은 것들이 이스라엘에게 발휘되면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조정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지시를 받고 한 일’과 그렇지 않고 ‘지시받고 하지 않는 일’의 차이는 결과적 감사로 나타나느냐 여부입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내용에 미리 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대를 무산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의 감사는 예상 외에 ‘선물’이라는 방식으로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지만 인간들이 ‘자신이 기대한 자아상’이라고 우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본인마저도 예상못하는 식으로 주님이 이끌어주심에 대해서 소급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서 두 개의 전면적인 난관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는 홍해요 다른 하나는 요단강입니다. 둘 다 전면적으로 ‘인간 거부’라는 하나님의 뜻을 본래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지었기에 천국에 올 수 없다를 자연적 조건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천국에 갈 수 없기’에 인간은 자기 몸으로 천국가는 시도를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러나 홍해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보다 세밀화된 내용이 요단강에서 추가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레위지파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레위지파에 종속되는 새로운 양상으로 언약이 구체화됨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바로 그러합니다. 12지파를 두 산에 모이게 하고서는 레위지파에 선창에 따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스라엘 12지파라는 형식으로 위치 배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내부적인 담겨 있는 언약적 구조를 보다 상세하게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축복을 선포할 지파가 6이요, 저주를 선포할 지파가 6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기능은, 단순히 그들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언약에 담긴 축복과 저주를 전달하게 확산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다른 이방민족들은, 자기가 나서서 지킨 그 실천성에 준해서 본인이 구원 여부가 정해지고고 믿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이런 식의 구원시도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본인들이 딛고 있는 그 자리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지를 살펴서 그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을 이스라엘이 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이 둘로만 나뉘어집니다.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 야곱의 정실부인 계통과 하녀 계통으로 대체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곧 야곱, 이전의 언약인 아브라함에게서도 흘러내려온 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와 하갈이라는 두 부인이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와 이들의 자식이 단지 당대의 구분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인류사를 확정짓는 두 개의 언약 노선의 본질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이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가 에발산, 곧 저주를 선포하는 산에 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맞은편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언약궤가 있는 맞은편 산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해야 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두 이질적인 요소가 하나의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상반된 본질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주는 바로 ‘저주산에 설치된 언약궤’라는 양식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을 ‘축복’에 입각하지 말고 ‘저주’에 입각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저주’와 ‘언약궤’를 먼저 바탕으로 하고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의제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나 말씀이나 성경이 ‘나의 사적 구원’을 성사시킬 의도로 적혀있는게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온 천지를 ‘저주로 덮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로 덮힌 그 안에 심지어 ‘언약궤’ 곧 ‘하나님의 이름’이 합류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조항을 양편 산에 포진된 12지파들에게 외치게 됩니다. 그러면 양편 산에 있는 모든 지파들은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아멘”이라는 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조차도 자기네들의 개인적 욕구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즉 ‘나는 ∼하다’는 할 필요가 없는 식으로 우리 인간은 평소에 살아가고 있음을 이스라엘만큼 알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 자기 미래를 개척한다고 여기지만, 성도만큼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음을 고백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라는 것은 필히 축복과 저주로 나뉘어지는 현상을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나 저주가 나오는 그 출처는 오직 ‘저주를 몸소 당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희생당하시는 하나님 주변에,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이지를 알리기 위해 집합된 단체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생활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미래상을 자신이 조정해 나가는 삶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주님의 복음의 절대적 기준점을 알리기 위한 삶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나를 위한 숙제가 아님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미아
143강-신 27장 11-15절(에발산)1707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7장 11-15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할을 하라는 숙제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에게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돼!”라는 그 과제를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하나님의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예측대로, 예상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불행스럽게 생각하는데,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불행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영광스럽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이방인들은 자기 의 앞일, 본인이 해야 될 일을 스스로 개발해 내야 될 부담이 있지만, 하나님 것은 집어넣어 준 대로 그냥 받아주면 되니까, 그 역할만 하면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그런 직분을 맡았다 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직분이 오늘날 신약의 성도에게 고스란히 이렇게 이어져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인생 문제나 미래를 개척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 오늘도 저에게 무슨 숙제를 맡기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있을 텐데,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과 ‘주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판정 내리는가, 주님의 지시에 따르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내 뜻대로 안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가 나오면 이거는 성령께서 하신 일이고, 주님의 지시대로 했는데 뭔가 자기 뜻하고 맞지 않아서 불만이 나온다면, 그것은 은근히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이용했다는 자기의 본색이 그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늘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성도는 늘 감사로, 감사로 이어지면서 미리 당겨서 하는 천국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천국생활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것인데, 천국생활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 면류관을 반납하는 생활, 예수님께 자기 인생을 도로 드리고 바치는 생활, 이게 천국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나라는 인생을 이렇게 만드셨잖아요.” 하고, 주님한테 소환당하고 주님한테 늘 드리면 되는 거죠. 하루를 사시고 난 뒤에 주님 앞에 드리면 돼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잠을 잘 때 절벽에서 손을 떼라 했습니다. 누구라고 말은 안 했습니다만, 누구의 이야기를 은근슬쩍 했거든요. 고생은 많이 했는데 잠을 잘 자더라는, 뭐 그런 분이 계세요. 잠을 잘 때만큼은 절벽에서 손을 떼요. 절벽에서 손을 떼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겠죠. 죽으라고 잠자는 거예요.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어두컴컴하거든 제발 그냥 죽으세요. 드라마 보지 말고. 뭐 남 이야기하면 곤란하니까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만.
어두컴컴하면, “아, 오늘 하루 다 했으니까 내일 목숨은 주님한테 일임하고 그냥 죽자.” 죽으라고 하는데 잠이 안 온다면, 그건 덜 죽어서 그래요. 매일같이 죽으면 되는 거예요. 아무 걱정근심 버리고 그냥 놓으면 돼요. “내일 뭐 하지? 내일 누구 만나지?”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벽에서 손을 떼세요. 그러면 중력에 의해서 완전히 박살이 날 거예요. 박살나라고 잠을 잘 자게 하시는 겁니다. 죽는 마당에 박살이 나든 관계가 없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철저하게 자기만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자연에서 두 가지의 길로 나누어집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났는데, 이방민족은 자연에서 문화를 만들어내요. 문화를. 그거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그렇게 했던 겁니다. 퉁소 부는 자의 조상, 철기 만드는 자의 조상, 쭉 가인의 후예들이 붙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이 나와요. 하나님의 약속이 나와요. 문화와 언약, 이 둘이 붙는다면 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해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어요. 진리가 없습니다. 이 자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으로 마감되는 의미가 없어요. 인간의 모든 철학이나 모든 학문에 있어서는 마감되는 의미는 없습니다. 이걸로 모든 의미는 끝이라고 스톱이 돼야 되는데 그게 안 돼요.
반드시 인간은 “그 커튼 뒤에 뭐가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또 들춰보게 되어 있어요. 우사인 볼트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세계 육상 100미터 대회 챔피언인데, 그 사람의 기록이 9,95인데, 대단한 기록이죠. 마라톤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은 기록을 세우게 되면 일단 잘했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참 잘했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그게 전부가 아니지? 그지? 기록은 깨어지라고 있는 거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지? 이번에는 한 9,42로 당겨 보시죠?” 세계 마라톤 신기록이 2시간 3분 38초인데, 그 다음에 사람들이 대번에 하는 말이 “2시간대의 벽은 과연 깨트릴 수 없을까?”라고 해요.
이것은 교회에 온 교인들이 산상설교나 말씀을 보면서 “막살아서는 안 돼. 말씀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막살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고 칩시다. 성경대로 지킨다고 칩시다. 성경대로 나는 이웃을 사랑했다고 하게 되면, 그걸로 자기의 사랑의 의미가 마감이 되는 겁니까? 아니죠. “아니,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 거야.”라고 해요.
“3만원만 내면 우간다 애들 한 달 식사비가 충당이 됩니다.” 동대구역에 가면 막 그런 게 붙어있다고요. 그런 곳에 안 냈으면 좋겠는데. “한 달 3만원(또는 1만원)만 내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광고를 해요. 그러면 그걸 했다고 칩시다. 그렇게 유니세프나 뭐 그런 단체에 돈을 보냈다고 칩시다. 마음이 기쁠까요? 아니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이게 내가 하는 선행이 다일까? 내가 기껏 3만원 내는 걸로 멈춰서 되겠어? 더 받쳐야 되겠지?” 이래 되죠.
만약에 낯선 사람한테 자기 신장 하나를 떼 줬다고 칩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신장 떼기 직전까지 갔는데 뭐 말려서 못 했지만. 신장을 떼 준다고 하니까 말렸어요. 떼지 말라고. 그런데 지금 와서 제가 생각해보니까, 만약에 신장을 떼 줬다면 그걸로 나의 착함은 끝난 거예요? 결코 아니에요. 요한일서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목숨 한 번 바쳐보시렵니까? 그러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헛 살아왔는데? 남 좋은 일 시킨다고 내가 평생 동안 애지중지하면서 알뜰살뜰 저축하면서 살아온 게, 그게 다 날아가는데요? 소용없잖아요? 아침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동질성을 확보한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주님의 사랑은 이질적인데 그걸 동질성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전혀 이질적이에요. 전혀 예수님 닮지도 않았어요. 예수님 같지도 않아요. 어둠에 속했습니다. 이건 범죄자에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이것을 의인 만들기 위해서는 필히 그 죄인을 이쪽에서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인은 기꺼이 자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동의해야 되고요. 자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내가 나름대로 말씀 지키겠습니다. 막살지 않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런 구시렁구시렁 대는 소리는 입을 다물어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라는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을 준 것은 “그 입 다물어!”거든요. “그 입 다물어! 어디서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지킨다고 설쳐대느냐? 입 다물어라. 너는 처음부터 못 지키게 돼있어. 너는 어떻게 지켜도 그건 막사는 거야.” 그게 바로 성경말씀이 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나의 존재가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집단화를 시켜버립니다. 나를 위한 쟁반들이 아니고 여러 명을 모아놓은 하나의 쟁반, 그 자리, 한 쟁반 위에 여러 가지 과일을 담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의 쟁반에 있어요. 하나의 쟁반 위에 여러 명들, 사 십 만 명을 데리고 다닙니다.
그 쟁반이 뭐냐, 문설주에 피를 발랐던 어린양의 취지가 하나의 쟁반을 이룹니다. 문설주에 발랐던 그 어린양의 피, 그게 양이 아니에요. 그 양을 쪼개면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양 안에서 죽었던 그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그 이름이 나중에는 사람으로 변신돼요.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내가 바르게 사는 것이 그게 신앙이 아니에요. 내 발 밑에 누가 나를 받치고 있느냐, 자기 존재의 근원을 늘 살피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이 왜 안 되는 줄 알아요? 왜 신앙생활을 못하는 줄 압니까? 본인이 하려고 설치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나서서, 그 나선 설침을 통해서 본인이 구원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쟁반 자체가 죄가 의로 바뀌는, 일종의 공장, 죄를 의로 바꾸는, 철커덕 철커덕 하고 생산품이 나오듯이, 죄를 의로, 죄를 의로...늘 짓는 죄가 늘 하나님의 의로 생산되는 그 공장이 우리의 발을 받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쳐다볼 줄 아는 게, 바로 그 관계가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할 일은 뭐냐, 도대체 우리 발밑에서 무슨 일이 있기에 우리의 죄가 의로 바뀌느냐, 이제 그것을 살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라고 되어 있죠. 요단을 건널 때가 지난주인데, 벌써 한 주 확 지나가버리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요단강이 갑자기 홍수가 난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홍수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제가 오늘 주일학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적정인원이 차면 문을 닫아요. 문을 닫아야 위로 가든지 내려가든지 할 게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요단강 이전에 홍해를 통해서 문을 딱 닫아버리면 문 밖에 있는 애굽 군대가 물속에 다 빠지게 되어 있고, 엘리베이터에 안에 있는 이스라엘만 무사히 홍해를 건너오게 되어 있습니다. 택한 백성만 건지고 나머지기는 전부 다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택한 백성을 모도는(모으다의 옛말)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커버넌트covenant,약속이에요. 언약이 딱 되어 있어요.
그 언약이 다시 요단강에 있을 때는 내용이 확대됩니다. 내용이 세분화돼요. 홍해는 물 다 열어놓고 건너가죠. 요단강은 뭐냐 하면 아무도 건너가지 못한다고 막아놓고, 그 다음에 제사장이 하는 기능이 뭐냐, 어린양을 매일같이 잡아야 돼요. 그 어린양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간다, 약속의 땅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사장이 먼저 시범적으로 홍수가 넘치는 요단강 물 한복판에 딱 서야 돼요.
서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저 제사장이 하는 그 기능 덕분에 우리는 천국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제사장 중심으로 전환시키고,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하는, 그 용도가 바로 요단강과 홍해의 차이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그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뭐냐, 그 일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레위인이 다시 부각이 되는데, 14절에 보면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절에,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이걸 오늘날 교회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오해를 해요. “목사님, 말씀만 주이소. 우리가 지켜서 천당 가겠습니다.”이래 나오거든요. 근데 개인적인 실천으로 구원받는 것은 애초에 구약부터도 없고 신약에도 없어요. 누가 해줘야 해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빠지고, 레위인들이 되는 분들이 해줘야 해요.
그 레위인으로 오신 분이 바로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뭔가 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게 되죠. 그 동조하는 지파가 원래 열 두 지파인데, 열 두 지파를 임의로 여섯 지파와 여섯 지파로 나누고 있습니다. 여기 12절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시므온, 레위, 서열이 2등, 3등입니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이 네 지파의 엄마는, 야곱의 정실부인이에요. 야곱은 정실부인이 둘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첩이 둘이 되고요. 정실부인은 레아와 라헬, 이 두 사람이 정실부인이고. 그 다음에 실바와 빌하. 실바는 레아한테 속한 여종이고 빌하는 라헬한테 속한 여종인데, 실바와 빌하는 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네 명의 여인들로부터 열 두 명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이번 수련회 때 할 건데요. 열왕기상에서 어떤 왕을 언급할 때는 그의 어머니는 누구였다가 들어가요. 이스라엘 왕들은 그런 게 없고 유다 왕들에게는 그런 특징이 있어요. “그의 어머니는 누구였더라.” 이게 뭐냐 하면 수요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압니다. 어머니의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식이 나와요. 어머니가 하늘에 속한 어머니냐, 아니면 땅에 속한 어머니냐.
여자가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하갈이 있는데 이것은 땅에 속한 여인이에요. 그리고 사라는 하늘에 속한 여인입니다. 그 두 여인에게서 두 개의 언약이 나옵니다. 두 개의 노선이 나와요. 두 개의 체인이 나오죠. 방금 제가 한 이런 이야기는 “목사님, 말씀만 하이소. 지켜서 구원받겠습니다.”라는 이것과 전혀 동떨어진 거예요. 전혀 상관없어요.
“당신은 어느 소속이요?” 제가 지금 소속을 언급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 테니까 죽어서 좋은 데 가게 해달라는, 그런 불교식이 아니에요. 당신의 소속은 어디냐? 소속이? 지금 소속이 하늘에 속했느냐, 아니면 땅에 속했느냐를 묻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누가 대신 다 해주는 거고, 땅에 속한 사람은 자기 인생을 본인이 알아서 해야 돼요. 본인이 알아서 자기 미래를 개척하렵니까? 아니면 누가 알아서 해주시기를 바라시렵니까? 둘 중에 알아서 골라잡으세요. 둘 중에 알아서.
여러분, 정답으로는 누가 알아서 대신 해주면 고맙겠다고 이런 생각을 하시겠죠. 실제로 우리의 육체의 행동은, 누구 믿다가는 큰 코 다칠 일이 있나, 아이고 답답해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제일 속 편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제일 속 편하지, 누구 믿는다 하다가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안 해주면 쪼다가 되는데요. 만약에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건데,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어떻게 합니까?
“에이, 괜히 믿었다.” 그렇게 후회하기 전부터 자기가 자기 일을 알아서 하지?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겁니다. 이게 우리한테는 속 편하게 납득이 돼요. 이게 굉장히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모든 인간은 타고 난 게 뭐냐 하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게 타고 났어요. 이건 못 고칩니다. 이건 박살나야 고쳐요. 박살나야.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이거는 본처 레아의 자식이고, 그 다음에 요셉과 베냐민은 라헬의 자식이고. 둘 다 정실부인입니다. 정실부인이기 때문에 축복산에 서야 합니다. 축복산. 13절에 보면,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그러니까 두 가지 노선 가운데 또 한 가지 노선은 뭐냐 하면 땅에 속한 노선으로 저주받은 노선이거든요. 저주받은 이거는 종년, 종년의 자식들이에요. 종년의 자식들이 원래 4명(갓, 아셀, 단, 납달리)밖에 없어요. 그래서 추가해서 들어가요. 르우벤과 스불론은 원래 레아의 자식인데, 여섯 명 숫자 맞추기 위해서 두 명 들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갓, 아셀은 실바의 자식이고, 단과 납달리는 빌하의 자식입니다. 빌하 배후에는 라헬이 있고, 실바 배후에는 레아가 있어요. 자식 열둘을 낳는데 경쟁적으로 낳았다 이 말이죠. 자식을 많이 낳아야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하는 이런 질투성에 의해서, 그냥 인간적인 면에 의해서 이렇게 낳은 거예요. 이렇게 낳았을 때 사람들은, 이 자식 열 두 명하고 내 구원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말하죠. 이제부터 관계가 있어요.
뭐가 관계가 있느냐 하면 산이 에발산과 그리심산, 두 개가 있습니다. 제가 안 가봤습니다만, 뭐, 에발산 높이가 881m의 산이며, 에발산은 그리심산과 마주보는 높이 940m의 산입니다. 그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여기에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밖에 없어요. 쟁반의 출처가 하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근데 지금 두 패로 갈라졌다 이 말이죠.
그럼 두 패로 갈라졌으니까, 축복산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그냥 느끼기에, “목사님 축복산에 있는 사람들은 참 좋겠습니까? 천국에 가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맞은편에 있는 저주산에 있는 사람들은, 종의자식들은 저주를 받아서 얼마나 싫겠습니까? 안 됐다. 야들아! 우리는 천국 가고 니들은 지옥 간다.”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언약궤가 있는 산은 축복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산 밑에 딱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뭐가 축복인가 하면, 자기 자신을 축복하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상대방을 향하여 축복해주는 기능을 해야 될 자들이 바로 축복산에 있는 기능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저쪽을 향하여 축복을 선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긴 숟가락이 있는 이유는 남을 떠먹이라고 숟가락을 길게 해놨다고. 불교에 나오는지, 하여튼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먹을 때는 이게 안 돼요. 남 떠먹일 때 돼요. 뭐, 어떤 천국 가면 숟가락이 다 길대요. 자기 먹으라고 한 게 아니고 남 먹이라고 한 거예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이 축복산에 설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대신 해주기 때문에 내가 나선다는 자체가 그 대신해주심에 훼방이 되고 방해가 될 뿐이에요. 내 신앙의 방해자가 누구냐 하면, 잘해보려고 하는 내가 방해자가 되는 겁니다. 의지하면 될 것을, 믿음이 있어야 의지하지. 믿을 건 내 주먹뿐인데 뭘 의지해요?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자기가 수완을 부리는 겁니다.
제가 한 주마다 늘 문방구에 가요. 주보 복사하기 위해서 여지없이 가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도 갈 거예요. 문방구에 가게 되면 어릴 적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는 문방구가 자기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없는 것이 없어요. 그럼 우리의 신은 문방구 주인이 우리의 신입니까? 지금 교회 교인들에게 신이라는 의미는 뭐냐, 문방구 주인 같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제공하는 신, 문방구. 신=문방구. 그게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신은 껍데기만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집어넣은 거죠. 그것을 제가 가락강의에서는 쓰레기통이라고 했어요. 쓰레기통 하나님. 하나님 이거 주셔야 돼요. 애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건강하고....그러니까 자기가 되고 싶은 쓰레기를 잔뜩 모아놓으니까, 그게 뭐냐 쓰레기통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죄를 의로 바꾸기 위해서, 자기 몸을 대신 죄인을 위해서 바친 겁니다. 죄인을 위해서. 죄인을 위해서 몸을 드리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에요.
근데 여기서 제가 자꾸 뜸을 들이는 이유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교회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근데 목사님, 우리도 남을 위해서 목숨 바쳐야 구원됩니까?”라는 말도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할까봐 제가 겁이 나요. 제가. 제가 겁이 나요. 어린애의 특징은 뭐냐 주는 대로 고맙게 받는다는 것이 어린애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어린애 같지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요.
남을 위해서 도울 생각 말고, 너나 잘하세요. 너나. 남을 돕든 뭐하든 그 계획은 본인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다보면 그렇게 결과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거예요.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혹시 그런 일이 있거든, 남들이 아이고, 당신 때문에 살았다고 하는 그런 일이 있거든, 제발 그때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나는 원하는 대로 살지, 남을 도와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남 도와줄 정도로 나 자신에게 여유로운 존재가 아니에요. 그렇게 착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그런 인간들이에요. 뭘 남 도와줘요? 주께서 떠밀었죠.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을 “내가~~했다.”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배고파서 내가 밥 먹었을 뿐이지, 더위라는 것이 있어서 옷을 벗었고, 춥기 때문에 옷을 입었을 뿐이지. 내가 옷 입었다, 내가 밥 먹었다, 내가 옷 벗었다, 라고 자꾸 앞에다가 ‘나’를 걸치지 마세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언약대로 일어날 일들입니다. 결과가 우리의 모습이지, 내가 시동 거는 일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참, 농부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제가 또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이 농사짓는 이유는, 이제 정답을 하도 많이 들어서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을 거예요. 할 짓 없어서 농사짓는 거예요. 그게. 내가 장사를 하는 이유는, 그거 말고는 할 게 없어서 그래요. 내가 교사고 공무원 하는 이유는, 그거 외에는 할 게 없어서 그래요. 맞죠? 딱히 그거 외에는 할 게 없어요. 내가 취직을 안 한 이유는, 할 게 없어서.....,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네가 하는 일을 접고, 네가 어느 노선에 속했느냐. 그럼 저주받은 노선은 뭘 하느냐, 저주받은 노선은 저쪽 상대방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발밑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해요. 그 행사, 이벤트가 여기에 나옵니다. 14절, 15절에,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면 “아멘!” 16절에,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러니까 축복은 없어요. 축복은 아예 없다니까요. 저주 때문에, 그 저주산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으니까 축복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저주에요. “그 저주받을 자가 우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되는 거예요. 17절에,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걸 빨리 하면 랩이 돼요. 힙합이 돼요.
18절,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절,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절,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절,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절,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절,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절,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절,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절,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여기에 ‘아멘’이 몇 가지 나오느냐면, 15절부터 26절까지 열두 가지에요. 축복은 없습니다. 저주가 방출되는 그 입장이 우리에요. 우리는 걸어 다니면서 저주를 내뿜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이닥치니까, 그 저주가 늘 언약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복으로 바뀐, 그들이 바로 홍해를 통과하고 요단강을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접시, 쟁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잘 살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된 건방짐인 것을, 엉터리인 것을, 우리가 진작 알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