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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하나님의 명령
2017년 7월 9일 본문 말씀: 신명기 26:16-19
(26:16)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26: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26: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26: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인간의 정신이란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즉 자기만의 ‘최종 정신’이고 싶어합니다.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악마의 요구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변화들은 바로 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있어야 함을 기대하게 됩니다. 자기만이 홀로 ‘정신’이기에 이 ‘정신’을 충족하기 위해서 나머지 것들을 물질적 대상체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평소에 대화없는 가정은, 마치 가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구끼리는 말을 건네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어느 가족이 다른 가족에서 말을 건네고 거기에 따라 다른 식구가 따라주면 명령한 그 가족만이 그 가정의 유일한 정신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족은 그 명령하는 자의 독자적 가치를 위하여 움직여야 하는 장기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기알로 돌변하는 이런 모습이 명령을 내리는 식구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적 대상체’입니다. 사람을 ‘물질적 대상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의 결과가 눈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실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내가 내리는 명령을 지키면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명령내리시는 하나님만이 홀로 ‘최고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령에 제대로 따랐는지 아니따랐는지 홀로 평가할 위치에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을 받은 인간들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자신이 행한 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는지 아니따랐는지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명령을 받는 자’가 ‘명령을 내린 자’로 둔갑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에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게 되면 신이 나서라도 계속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문제입니다. 말씀에 순종했다고 치고, 그렇게 해서 보배로운 하나님 백성이 된다고 자부하는 이런 관계에서 인간은 어느새 본인이 ‘절대 정신’을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여지없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대해도 원하는 결과를 생기지 아니하게 되면 사람은 지키게 됩니다.
이럴 때, 응답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기도 응답되었어”라고 일방적으로 우길 수도 있고, 또 너무 응답이 아니되니, 낙담해서 “나, 이제 기도 안할래. 기도해도 소용없어”라는 스스로 판단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즉 ‘보배같은 백성’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약속의 대가를 자신이 받았다고 우기고 다니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도’의 완성을 경유해서 다시 오늘 본문을 봐야 됩니다. 오늘 본문이 완성으로 인해 나타나신 참 ‘보배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신약에 최종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죽여라!”고 외치는 민중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민중은 자신을 ‘보배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합니다. 따라서 진정 참 ‘하나님 백성’의 본질은, 이들 반발하는 소리를 경유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 민중들과 민중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순종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십자가의 의미를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했음’으로 이해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반대하므로서 감추어진 십자가의 의미가 그들의 경유를 통해서 분명히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즉 율법을 주신 의미는, 사람들을 통치하고 덮치고 있는 그 저주의 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음’이 내용의 핵심으로 밝혀질 때만 십자가를 아는 게 됩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던져준 이 말씀들이 새로운 역사를 생산해 나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말씀 순종에 따른 응답’들은 모조리 가짜였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신을 위한 창세기, 자기를 위한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구원의 나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취지를 반대하는 성향을 품은 채 구원의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홀로 최고 정신으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자신의 ‘절대정신’을 우대하기 위해 부려야 될 ‘물질적 대상체’로 여기게 됩니다.
‘물질’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기만이 홀로 ‘정신’이기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8:30-32에 보면, 이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정신계’는 이미 악마와 주님에 의해서 접수되고 있습니다. 귀신은 무저갱에 있다가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용도로 세상에서 다니다가 아무나 그 사람의 물질적 신체에 들어가서 아지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마치 ‘최고 정신’으로 행세해도 되는 존재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실은 악마의 흉내를 답습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는 ‘최고 정신’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확정됩니다. 마귀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체들의 가치를 비교해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파티를 벌립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봐도 부자가 거지 나사로 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있을 때,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아쉬었습니다. 즉 그의 물질적 대상체로의 가치는 물 한 방울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부자는 이 땅에 살면서 귀신의 ‘물질적 대상체’이면서 독자적 가치관이라는 ‘최고 정신’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 살면서도 다른 공간, 즉 예수님이 ‘최고 정신’으로 계시는 그 공간에서 확정된 물질적 대상체였습니다. 이로서 사람의 가치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정신이 되시는 그 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나사로에게 있어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 신세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귀한 아바타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말씀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미아
141강-신 26장 16-19절(하나님의 명령)1707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6장 16-19절입니다. 구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방금 읽었던 이야기는 모세가 하는 이야기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전달받는 우리는 그냥 텅텅 비어있는 공백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창세기 1장을 우리가 써요. 세상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해서 있어야 마땅함, 이런 스토리를 가지고 드라마를 써갑니다. 내가 쓰는 창세기하고 주님이 쓰는 창세기하고 충돌이 되고, 내가 주장하는 신명기하고 주님이 주장하는 신명기하고, 이게 차이가 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신명기의 말씀의 이 모든 완성은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결과가 드러났어요.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리고 모세 및 인간들은 산 밑에 있고. 이 지상에 있고. 중간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근데 신약에 오게 되면 중간에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중간에 중보자가 딱 들어섭니다. 들어서서, 인터셉트intercept, 가로채버려요. 너희들이 생각한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는 결국은 너희들 자신의 변명조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한 소재로만 잘못되게 사용된 거예요.
이제부터 이야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도를 이야기할 때, 그 도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런 보배로운 결과들을 주신다고 합니다. 또 이런 결과들을 주신다고 할 때에 그 결과를 우리들은 목격하고 싶어 해요. 말씀대로 살았더니만 이러한 실적을, 업적을, 또는 결과물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그렇게 연관시키고 싶은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할 보람이 생기기 때문에 그래요. 편의점 아르바이트 했는데 돈 안 줘 보세요. 그러면 그거 하겠어요? 안 되잖아요?
뭔가 하나님의 일을 했으면 하나님 쪽에서 주신 것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충성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근데 그게 점점 더 없어지고 확연하게 손에 안 잡힐 때, ‘아이고, 하나님 말씀 지키나 안 지키나 별 소용이 없네.’ 그렇게 돼버려요. 지금 남북통일이 되게 해달라고 그동안 기도를 얼마나 해왔습니까? 수 십 년간 해왔잖아요. 뭔가 북한이 개과천선하는 조짐이 보이면 더욱더 기도하고 싶은데, 남북통일 조짐은 안 보이고 핵폭탄, 미사일 발사만 자꾸 생기니까. 이거 뭐 기도 제목을 바꿔야 되나, 아니면 기도장소를 기도원으로 옮겨야 되나, 하죠.
우리 쪽에서, 뭔가 내 쪽에서 수정을 해서 그때그때마다 실적이 나는, 관련이 있는 그런 하나님의 도, 진리를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미 줬습니다. 이미 줬어요. 줬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지를 않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어려운 공식이 나와요. 공식이 뭐냐 하면 “정신은 물질적 대상을 원한다.”라는 겁니다. 내가 초월적인 존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나 빼놓고는 전부 다 물질적 대상체가 돼야 돼요. 물질적 대상체. 이래가지고는 무슨 소리인줄 모르겠죠.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자기가 신입니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주시하고 편만하게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신이에요.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되는가, 하고 살피는 겁니다.
이걸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하는데, “보자~ 보자~”하는 겁니다. 우리 외손녀한테 배웠어요. “어디 한 번 보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대상화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아, 내가 기도했더니만 저런 응답이 오니까 나는 초월적인 존재에 도달했구나.’하고 확인하는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도를 지킬 때, “하나님, 이거 지키면 이거 주시겠습니까?”하고 자꾸 살피는 버릇이 있었어요. 살피는 버릇이. 뭘 하나 기도하면 응답이 딱 되고, 또 기도하면 응답이 되고.
근데 응답이 된 게 뭐냐 하면 나의 초월됨을 증명해주는 대상체, 물질적 대상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대상이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왜 물질적이라고 붙이는 이유가 뭐냐,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오직 자기만 홀로 마음껏 자유를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남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자기가 관리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면 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도 나를 관리하면 안 돼요. 나는 그게 싫어요. 이유도 없이 싫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되어야 하고, 남한테 간섭받거나 지시받는 것은 싫어요.
쉽게 말해서 남이 시키는 대로, 거기에 따라가는 대상체로서 내가 되기 싫은 겁니다. 하지만 나 빼놓고 남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흔히 이런 말이 있잖아요. 집안의 분위기가 삭막하고 이게 가족인지 분간이 안 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가구끼리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고 가구에요. 말을 안 할 때는 가구에요. 가구끼리는 말을 건네지 않잖아요. 그냥 그 위치에 놓여 있기만 하면 돼요. 그 위치에.
애는 문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있으면 되고, 남편은 리모컨 들고 tv앞에만 있으면 되고, 아내는 자기 할 일만 하면 되고. 평소에 아무 대화가 하지 않으면 서로가 가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 리모컨 그만 만지작거리고 이것 좀 도와주소.”하고 말을 건넬 때, “아이고, 그럼 도와줘야지.”하고 내 말에 남편이 움직일 때, 그 순간 나는 이 가정에서 홀로 초월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이 가정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장기판에서 장기알이 지시한대로 움직이듯이. 내 게임에 내가 홀로 주인공이 되고, 나머지기는 내 게임대로 놀아나는 장기알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신명기의 이 말씀을 보면서 “내 말을 들으라 그러면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할 때에,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은, “그러한 조짐과 징조를 내가 원하는 방식에서 딱딱 챙겨주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말라고 해도 듣겠습니다.”라는 것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아까 정답을 내렸어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이미 줬어요.
그 줬다는 것이 뭐냐, 신약성경에 보면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라고 주께서는 그렇게 해놓고는, 막상 그 결과가 뭐냐,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리라고 했거든요. 문제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성령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언제 성령 달라고 했던가요? 내가 이정도로 대단한 존재고 신앙인이며, 내가 이정도로 천국 가는 사람인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서 남들이 나를 믿음 좋다고 부러워하는 그런 존재를 원했지, 언제 성령 달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성령을 몰라가지고, “아, 성령 주신다는 것은 전에 받은 것보다도 더 초월적인 인간으로, 나만 독보적으로 인간이 되는데 더욱더 도움이 된다는 이 말이죠?”라고 잘못 오해하고 있는데, 성령은 그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사라지게 하는 것이 성령이에요. 오늘 본문 신명기 말씀에, 네가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걸 미완료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신약에 오면 이게 미완료가 아니고 완료가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근데 우리가 이 말씀을 다 지킨 예수님의 어디를 봐서 다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재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줍니까?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주께서 응답을 해주십니까? 어디를 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완성한 겁니까? 노선이, 마치 우리와 다른 노선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혔을 때에 제자들은 도망갔죠. 모든 대중들은 이구동성으로, 참 어떻게 마음이 하나가 돼도 그렇게 하나가 될 수가 있는지. 투표해도 백퍼센트 나올 거예요. 예수님을 죽여라! 손가락 거꾸로 해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한통속이고 마음이 하나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라!
다시 말해서 저 예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절대로 채워주지 않을 존재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확인을 했다가 되는 겁니다. 확인 한 거예요. 신명기의 오늘 말씀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 천국 갈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거는 예수님이 보여줬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대로 모든 말씀을 다 지켜서, 아까 이야기한 물질적 대상체로서 우리 앞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근데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닌 거예요. 그 당시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특히 가룟 유다한테는 절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닌 거예요.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어요. 사람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지 않았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을 붙이면 안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뭐예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채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잖아요.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주님은 사랑이라고 말해놓고 전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못 들은 척하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귀를 막아버리고, 시편에 보면 얼굴을 돌린다고 했어요. 에스겔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얼굴을 돌렸다.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니가 기도를 한 내용도 니가 모른다는 거예요.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되는지, 그 기본조차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안 되어 있으면 우리를 버릴 거예요? 아니에요. 전혀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인간을, 우리를 건사해서 데려갈 거예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와서 우리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걸 이제 바꿔치기, 교체를 하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어 있느냐 하면, 알 수 없는 그 누구의 물질적 대상체가 돼요. 주님이 우리를 갖고 노는 장난감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인형이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내가 나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본때를 보이려고 설칩니다. 근데 성령께서 와서 내가 초월자라고, 신이라고 설치는 그것을 누구와 자꾸 엮이게 만들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물질적 대상체로서 우리를 새롭게 매일같이 세워버립니다. “너같이 못난 인간도 나로 인하여 지금 천국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늘 내세워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후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행함도 없이 의로운 존재가 돼버려요. 의로운 존재.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오늘 괜히 물질적 대상체를 끄집어내가지고 어렵게 됐는데, 그러면 이걸 좀 쉽게 생각하겠습니다. 물질적 대상체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홀로 가치 있는 것을 물질적 대상체 라고 하는 겁니다. 홀로 가치 있는 것. 이 땅에서는 향수 한 병과 맹물 한 병 중에서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느냐, 향수 한 병이 맹물 한 병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인생을 맹물처럼 살라고 하면, 이건 욕하는 거예요. “니는 이 땅에서 남들이 찾는 귀한 향수가 되어라!” 이건 칭찬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나사로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를 들면서, 극히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딱 비교를 시켜버립니다. 대조적인데 같이 놓아버려요. 어느 것이 귀하냐고 묻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파티를 열어요. 그런데 이 거지는 구석에 떨어진 떡이나 주워 먹고 개한테 무시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를 든 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자에다가 가치를 둔다는 이 말이죠. 가치를 두고, 부자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죽었어요. 역전되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지옥에서 물 한 병에 얼마죠? 지옥에서 향수 한 병 하고 물 한 병 하고 어느 것이 더 비싸게 먹힐까요? 그렇게 개무시 했던 물병을 없어 못 팔아요. 지옥에서는 없어 못 팔아요. 거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가야 될 나라를 앞당겨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부자와 차원이 다릅니다. 부자는 뭣도 모르고 살아요. 뭣도 모르고.
이걸 가지고 인간의 자리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영토가 그리스도 안이냐, 그리스도 밖이냐를 통해서 그 사람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여기서 더 어려운 문제로 나가봅시다. 부자는 거지나사로를 별로 안 중요하게 봐요. 꼴 보기 싫어해요. 하나의 물질적 대상체로 본 겁니다. 거지나사로를 볼 때마다 자기가 불편해해요. 왜냐하면 자기는 다치면 안 되니까.
그런데 제가 성경 한 구절을 읽어드릴 테니까, 이게 얼마나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이야기인지를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청년에게 찾아와서 하신 말씀입니다. 30절, “예수께서 내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절에 보니까,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이래 되어 있어요. 귀신들의 특징이 뭐냐, 갈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면서 아무 물질적 대상체에 들어가서 사는 존재가 귀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을 알려면 귀신이 활동하고 있고 악마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이 이 세상이라는 것을, 아울러 이걸 생각해줘야 오늘 본문이 이해가 돼요. 귀신도 없고, 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죠. “이 말씀 지켜라!” “이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지키라고 하면 지킬 수 있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선악과 따먹어놓고 이미 인간은 망가졌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정신으로 보고, 주님께서는 늘 말씀을 지킴으로 정신이라고 우기는 그 교만함을 물질로 바꾸는 작업을 해버려요. 또 새로운 율법을 줘요. 이게 참 어려운데요. 주께서 광야에 백성들을 데려가는데, 뭐 하나 이루어지면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인양 착각할 거예요. 그런데 또 새로운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이거는 누구한테 쫓기고 있고, 누구한테 벌벌 떨고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그게 누구인지 몰라요.
사실은 마귀죠. 귀신인데, 귀신한테 사로잡혀서 죽을까봐 벌벌 떨면서도 뭐 하나 이루어지면 하나님 백성인줄 착각하다가, 다시 어떤 일이 일어나니까 자기는 귀신한테 놀아나는 물질적 대상체로 변해버린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볼 때에 남한테 거지되기 보다는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부자라는 물질될래? 안 그러면 거지라는 물질될래?” “나는 부자!” 자기 가치를 물질로 환원해서 표상한다, 표현한다, 그 말입니다.
거울을 보세요. 거기에 물질이 있잖아요. 남들 앞에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거지나사로가 되고 싶어서 옷 차려입고 나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하고, 따라서 인간에게 돈이 사라지면 자기도 사라지는 겁니다. 돈이라는 물질이 사라지면 나라는 인간도, 신도, 물질적 대상체로 변해가지고 같이 죽고 싶어요. 번개탄 피워놓고. 번개탄이 그렇게 활용될 줄 몰랐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몰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신약까지 가요. 몰고 가면서 영혼을 탈곡시킵니다. 여러분 탈곡기 알죠? 벼, 보리 등의 껍질을 깔 때 쓰는 농기구. 계속해서 영혼을 탈곡시켜가지고, 니가 아무리 신이 되고 싶어도 니는 하나의 물건처럼, 사물처럼, 물체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물체의 특징은 독자적이라는 겁니다. 독자적이라서 누가 건드리면 건드림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 홀로 유일한 정신이고, 예수님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에요. 죽어도. 이제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물질적 대상체는, 이거는 목 베임 당해도 그 영혼은 주님의 영혼으로서 다시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부활입니다. 니 속에 죽어도 다시 사는 영혼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다시 살리라.
몸이라는 물질적 대상체, 몸이 요구하는 몸의 욕구 때문에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습니다. 뭐 귀가 잘 안 들리고, 귓속에서 소리가 나고, 온 관절이 안 아픈데 없고, 하루에 휴대폰을 스무 번도 더 잃어버리고, 점점 정신없고, 휴대폰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휴대폰이 어디에 있느냐고 찾고요. 휴대폰이 냉장고에 들어가 있고, 무슨 일 하려고 했다가 누구하고 이야기하다보면 다 잊어버리고 있고요. 육신도 자기조절을 못해요. 본인이 그렇게 자랑하던 그 정신, 주의 뜻에 의해서 탈곡됩니다. 점점 더 나이 80, 90이 넘어가면 제 정신이 아니에요. 자식보고 말 높이고 하여튼 희한해요. 제가 지금 관찰하고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도를 지킵니까? 뭐가 온유하고 화평합니까? 사랑과 자비, 양선? 남의 이야기에요. 나의 가치를 물질적 돈 가지고 이미 가치를 정해놨으면, 이거는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들어온 겁니다. 마귀가 우리 속에 돌아와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니가 인기가 있어야 인간이다. 온 천하를 얻고 싶지 않으냐? 노력하면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 맨날 평생을 마귀한테 시달려왔습니다.
따라서 이거는 영적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지키는 것이 내가 아니라, 우리 배후에 영적인 싸움이 있고 영적 배후가 있는데, 우리는 지키고 싶어도 악마 때문에 못 지켜요.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고 한 이유는 “니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그 저주, 무서운 그 마귀를 내가 이겼잖아.” 십자가에서 이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며?”라고 하지 말고, 그 “예수 믿으면”에다가 신명기 26장 16-19절을 집어넣어버리세요. 어떤 예수님이냐? 내가 못한 것을 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믿죠. 그 앞에서 나는 될 수가 없는 그것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왜 내가 될 수가 없느냐 하면 주님의 목표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몰라요. 내가 무엇을 원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나한테 무엇이 필요한지를 주님은 아시는데 나는 몰라요.
그래서 항상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목표 방향 틀기를, 매일같이 방향을 틀어주십니다. 우리 뜻이 안 되게 하심으로써. “이쪽이야! 이쪽!” 그걸 네비게이션이라고 하거든요. 계속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라고. 부자, 그거 지옥 가도록 놔둬! 이제 오늘 설교를 끝내면서 제가 한 말씀 해드리겠습니다. 제발 저주받는 행각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저주 쪽으로 가는 그것을 왜 부러워하십니까? 저주 쪽으로 가는 것을? 그렇게 저주받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었습니까? 저주받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게 되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저주고, 그리스도가 누군지 성령을 통해서 아는 사람한테는 영생이라는 이거부터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서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노력하는 것이 모델이 있기 때문이고, 사실은 그 모델이 저주받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부러워했습니까? 우리 가정은 언제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느냐고 노렸습니까? 주여, 이미 다 이루어진 것, 십자가에서 진정 우리가 원해야 될 것을 주께서 다 이루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