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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후서 10:5-8 / 세상의 모든 이론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0:5-8 / 세상의 모든 이론

정인순 2017. 7. 16. 15:25

 

 

고린도후서 10:5-8   세상의 모든 이론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내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내가 알아서 챙긴다. 그 누구로부터도 강요받지 않는다” 오늘날 이러한 정신으로 현대인들은 살아갑니다.


 

즉 자신이 서 있는 그 위치에서 창조의 비밀로 캐내고 우주의 지식도 캐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직 ‘나를 위한 앎’만 소유하면 된다는 겁니다.


 

구태여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필요한 지식과 필요치 않는 지식의 구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짓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부터 호출 당하기 위한 후보감으로 진열장 속에서 대기되어야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예수를 어떻게, 언제 활용할 것인가라는 인간들의 관심사에 따라 정해지게 마련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어 있는 ‘심판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종 부리듯이 부리기만 하면 바보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 쪽에서 예수님을 좋게 생각해준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인간들의 죄성을 종교를 통해서 발췌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마음껏 모독하고, 마음껏 무시하는 그 배후 정신에는, 체계적으로 조직적인 인간들만의 세계관이 우호적이고 공통적인 견해들로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즉 사람과 사람들 끼리는 전혀 충돌되지 않는 그 사상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게 한 그 정신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노출하도록 유도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종교, 과학, 예술, 정치 그 어떤 방면에서는 ‘인간을 위함’이라는 요소를 빠트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은 실은 ‘단일이론’입니다. 즉 “인간을 위하지 않는 주장은 이 우주에서 사라져라!”입니다.


 

일찍부터 악마는 영적 전쟁을 예수님의 복음을 상대로 벌리고 온 것입니다. 인간들을 앞장 세워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

2017년 7월 2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0:5-8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사도가 복음과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벌’도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벌’을 받는다고 소리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큰 무례함이며 상대는 필히 화내게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사도는 상대와 사귈 마음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주’나 ‘벌’을 언급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나 ‘벌’을 빼버리고 하나님이나 예수나 복음이나 십자가를 전하게 되면 이는, ‘우리 인간들 끼리 잘해보자’는 제스처가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이론을 호출하고 있습니다.

즉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를 있는 대로 다 들통 내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만 달라 챙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유도되어서 등장되는 ‘인간의 모든 이론’도 아울러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수고, 깨고, 밟고, 작살내어야 될 대상이 무엇인지 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의 삶은 혈육 울타리부터 시작합니다. 가족이 둥지가 됩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가족으로 귀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익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관행적이고 관습적이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 윤리의 대변인으로 대외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 집안은 이처럼 뼈대 있는 집안이다. 우리 집안은 이처럼 건전하고 훌륭한 집안이다”라는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관계있는 집안식구나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자신들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 집안의 윤리, 도덕에 얼마나 부합되게 반듯하게 살아가는지 지켜봅니다.

이러한 가족 중심의 관습들이 뭉쳐서 ‘가족형 국가’가 만들어집니다. 소위 ‘민족’이라는 이념이 이런 겁니다. 이 민족의 우두머리는 ‘자애로운 어버이’ 같아야 합니다. 마치 집안에도 어른이 있듯이 우리 국민 모두의 어른인 그런 자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줄곧 자라오면서 장착된 정서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 세계사에 물결에 휩싸이다보면 이런 인간미 넘치는 민족이라는 모선을 버티고 낼 원리로 미흡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소위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과학, 기술이 소박한 윤리와 도덕체계를 흔들어대기 시작합니다. 에너지 개발방식으로 인하여 정치체계가 경제구조에 준해서 바뀌게 됩니다.

이제는 ‘착한 민족’이 우선이 아니라 ‘잘 사는 민족’이 우선이 되고 이는 곧 이 범세계적으로 ‘노동적 성향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가적 성향의 국가’가 되기 위해 총력을 기울리게 됩니다. 인류사에서 농업이 정착되면서, ‘일하는 계층’과 ‘놀고 먹는 계층’이 생겼습니다. 종이나 노예나 농노들의 계층과 관료나 왕이나 종교인들의 계층으로 구분되는 겁니다.

자연성이 농후한 노예 계층과 ‘문화성’이 농후한 지도층으로 나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자연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류사는 이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이론’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개선해 내갈 여지를 자꾸만 늘이는데서 생긴 겁니다. 그 누구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스스로 힘을 갖고 그 힘으로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그런 인간상으로 개량을 멈추지 않겠다는 포부가 과학, 기술면에 충만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끼리 ‘동질성’을 맞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그것은 ‘사랑’, 혹은 ‘이웃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결코 타인과 자신이 한 마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도 계층과 계급이 조성되기 마련입니다. 기계를 다룰 수만 있어도 사람 대접받던 시절에서 이제는 지식이 있어야 사람 대접받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먼저 인공지능에게 복종하느냐에 따라 계층이 정해지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기계를 만들고부터 인간들은 도리어 기계 의존적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기계없이 불편했던 것이 지난 시절이었다면 이제는 기계에 자진해서 복종하고픈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즉 인간이 기계보다 하위 계급이 된 것입니다. 모든 궁금한 것과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은 ‘스스로 학습하여 자존하는’ 인공지능에게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인간을 모방했던 기계가 이제는 인간들이 기계를 모방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이 지경된 겁니까? 그것은 인간을 ‘분할할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일부를 변경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자신의 원천을 모르기에 이런 발상이 나온 겁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되고 방사능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본인은 이 방사능 앞에서 평등합니다. 이처럼 아담의 자존들인 인간은 그 어떤 인물이든 상관없이 아담의 죄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평등합니다. 즉 저주와 벌 앞에서 평등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죽음 속에서 새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의 탄생을 말합니다. 소위 살려고 하는 모든 인류의 문화활동 한 가운데 십자가를 꽂아버리는 겁니다. “모두 나와서 벌받아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 나와서 자신을 개선할 생각 말고 차라리 주님에게 “저를 총 쏴 죽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이 죽어 있다고 믿으면 인간들이 살아 돌아다니지만, 주님의 살아나면 성도에게는 매일같이 반복해서 죽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라고 해서 불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마치 우리 자신을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없는 망발입니까?

누가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여지없이 박살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8:12에 보면, ‘집단적 울부짖음’을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바로 이 내용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변의 세계에 철저하게 우리가 속고 산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