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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후서 10:1-4 / 영의 싸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10:1-4 / 영의 싸움

정인순 2017. 7. 9. 15:07

 

 

고린도후서 10:1-4     영의 싸움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싸우며 피곤합니다. 그래서 안 싸우려고 합니다. 승리감이 주는 쾌감도 신나지만 그 과정이 미리 생각해보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적게 고생하고 적게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삶의 요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 내막을 살펴보면, 고생은 남이 하고 자신들의 그 노고의 대가없이 즐기고 싶어합니다.


 

고생한 자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생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도둑질하듯이 그 영광을 가로채는 식으로 행복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도처에 불합리합니다. 노력한 만큼 정당한 열매가 돌아오지를 않고 그 과정에서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달라붙습니다.


 

따라서 싸우기 싫어도 내게 돌아올 몫이라는 건지기 위해 원치 않는 싸움을 벌려야합니다. 그리고 고요한 살고 싶어도 사방에서 벌어지는 이해관계에 어떤 식으로 의견을 제시해야하며 그로 인해 공격의 표적으로 말려들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생은 연속적인 싸움을 늘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을 성경에서는 ‘육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자기 것, 곧 자신이 애써서 가져야 마땅한 바로 그것을 내 것으로 무사히 가져오고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이 벌리고 있는 싸움은 ‘내 것’ 혹은 ‘내가 노동한 것’과 상관없는 것들을 위해 목숨 바쳐가며 시도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무기가 다릅니다.


 

이 영적 싸움의 무기는 에베소서 6:14-18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사도의 이런 무기 장착은 결국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 곧 세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너희는 이미 죽었어!”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싸움이 영적 싸움입니다.

 


영의 싸움

2017년 7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0:1-4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0: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나서서 새삼스럽게 일을 벌린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소개한 복음을 통해서 볼 때, 애시당초 이 세상은 ‘저주의 마당’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실의 공개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이듯이 사도를 적대시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의 윤리/도덕적 관점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거꾸로 지적질합니다. 이는 곧 이들이 전혀 복음을 이해 못하고 있는 증거합니다. 사도는 강경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자기처럼 성령받은 자가 있다면 당연히 온화된 관계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도를 적대시하는 이 방식을 통해서 이 세상의 진실과 본질은 도리어 노골화됩니다. 즉 이 세상이 왜 원천적으로 저주받아 합당한가 라는 점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대하는 반응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보다 절망적인 것은 이 운명을 세상이 나서서 개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저주에서 벗어날 묘책과 방안들을 고려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거나 나름대로 반듯하게 살아서 그 알 수 없는 초월자로부터 지적을 받더라도 어느 정도 할 말을 하겠다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의하면, 바로 그런 아이디어나 시도가 곧 저주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8에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이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마당에서 이 세상에 그 어느 인간도 저주받지 않을 자격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소급 적용시켜보면 근방 드러날 사항입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름대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간다 할지라도 그 단란함을 유지한 채 단체로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저주성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 사건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사건을 끌고 들어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란 의외로 이 육의 세계에서 생생한 ‘육의 모습’으로 중계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창세기 3장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대지(大地)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이 이 대지로 내려가는 가족을 따로 이 지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의 이름이 ‘생명’입니다. 반면 아담의 이름은 ‘흙’입니다. ‘흙’이라는 죽음의 물질성과 ‘생명의 물질성’이 부부가 되어 이 지상에서 움직입니다. 이게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성격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을 이 실제적인 인간 세계에서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인간들이 우기는 ‘영의 세계’란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환상은, 본인을 잃지 않겠다는 집념의 소산입니다. 즉 본인 속에서 욕망이 춤추고 있고, 현 세상은 자신의 욕구에 충족되지 않으니 못내 아쉽고 슬프고 괴롭고 속상하고 우울하고, 불만스러고 서럽습니다.

이러한 실제 환경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도 순화시켜 견딜만 한 것으로 전환해서 소유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인간을 통해 환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꿈의 공통점은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평소에, 꿈꾸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인양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만을 위한 역사와 스토리와 드라마를 형성해서 환상의 내용으로 채우게 됩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이 문제가 있다는 점은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나라의 존재가 우선시되는 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구성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주변 환경과 지나온 과거사를 통일하는 의식으로 미래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그 역사의 영속성을 끊고 쪼개버리고 그 안에 작용하고 있었던 저주성을 발췌해내십니다. 즉 이스라엘 내부를 장악하고 작용하는 그 괴물이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애초부터 ‘저주의 세계’임을 증명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망해버린 그 이스라엘의 속성이 오늘날 현대에서도 멈추지 않고 반복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기획하고 구상하는 것은 바로 ‘지옥 구상’입니다. 저주를 유발한 자기만의 세계를 설립하는 겁니다. 치과에서 임플란트가 할 수 있는 조건은 잇몸이 튼튼해야 하는 겁니다.

이 튼튼한 잇몸에다 인공치아를 박아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잇몸이 이미 저주받은 상태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세상이 애초에 저주받은 세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매사가 이 땅을 잇몸으로 생각해서 자꾸만 뿌리를 깊숙이 내리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그 어떤 시도를 한다할지라도 이 세상이 뿜어내는 저주성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는 창조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멈추지 않는 관통하는 노선이 깔려 있습니다. 일종에 역사를 관통하는 짚라인입니다. 짚라인Zipline은 양 편의 나무 또는 지주대 사이로 튼튼한 와이어를 설치하고 탑승자와 연결된 트롤리(trolley, 일종의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어 빠른 속도로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이동하여 스릴과 함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야외레포츠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 역사의 방향에서 우리 인간은 라디오 진공관처럼 소를 증폭시키는 앰프 역할하는 전극관과 같은 위상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끊임없이 이 세상에 담고 있는 저주성을 소리쳐 바깥으로 발산하고 있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라인이 죽음을 짊어지고, 저주를 짊어지고 생생하고 세상에 나타난 저주의 짚라인입니다. 따라서 자기 위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나중에’ 죽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과(科)에 속한 자들입니다.

교회란 머리의 존재와 더불어 같이 동반해서 등장되어 있습니다. 어물전에 문어에 머리만 사지는 않을 겁니다. 머리 있는 곳에 몸도 같이 있게 마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특정 장소나 시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