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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룻기2:17~20) 기업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룻기

(룻기2:17~20) 기업

정인순 2017. 6. 27. 09:40

http://www.woorich.net/~woorich/성경강해/룻기-1996/(05)기업(룻2,17-23).mp3

 

 

 

녹취:이남희

룻기 1996 (5)

이근호     

 

본문말씀: (룻기2:17~20) 기업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2: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2: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곧 생명이란 것을 전해야 될텐데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말씀을 통해서 환기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인생을 인간 된 이상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전부를 알아야 되고 인생 전체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인생의 전부와 전체를 모르게 되면 순간적인 괴로움이나 어려움 때문에 자기의 전부를 망쳐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의 전부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전부를 알고 인생에 대해 전부를 알게 되면 소소한 그러한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 하기 보다는 그것은 하나의 진정 전체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좋은 하나님의 기회라 이렇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보다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이렇게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살면서 작은 문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생을 넓게 전체를 볼 줄 아는 그러한 안목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누가 도와주느냐? 성경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 내용을 하나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이 계시다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1절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마지막도 마찬가지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이 노시는 분이 아니고 뭔가 계속 일을 하시는 분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 하죠. 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계시고 일을 하신다면 그걸 우리가 제대로 수용한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결과는 간단한 결과입니다. 뭡니까? 마음이 든든해야 되요. 마음이 든든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 분이 일하고 계신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든든하다. 이거면 되잖아요. 무엇 때문에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합니까? 여기 하영에 보면 파출소 옆에 파리바게뜨라는 빵집이 있어요.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 몇 번 빵 사러 가보면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거기 주인이 일도 하고 종업원은 하나 있는가 모르겠어요. 있는데, 내가 만약에 그 파리바게뜨의 종업원이라면 ‘어이구 여기서 가게를 어떻게 꾸미지?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지? 아이구 이거 돈 빌린 거 어떻게 갚지?’하는 쓸데없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겁니다. 왜? 주인이 있으니까. 주인도 같이 일하면 모든 세무 관계 그리고 가게 운영 하는 거, 빚 갚는 거, 물건 들여오는 거 주인이 알아서 처리하니까 그 종업원 된 입장에서는 마음 든든하다 이 말입니다. 나는 파리바게뜨 가도 은혜 받는데 우에 되가지고 교회 와서 은혜 못 받으니 나도 제과점이나 하나 할까요.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일하고 계시다 그걸로 늘 마음이 든든해야 됩니다. 뭔가 푸근해야 되고 안도감이 있어야 됩니다.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으리라. 그것 두 개만 해도 우리는 충분하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고 그리고 심판에 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 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예수 안 믿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너무 왔다 갔다 분주하게 설쳐대니까 고마 하나님 쳐다보다가 갑자기 땅을 쳐다보니까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지 멋대로 살아가니까 거기에 현혹되어 가지고 고마 마음이 뒤숭숭해지면서 폭풍치는 배를 탄 것처럼 울렁울렁 흔들리게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룻기라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은 어떤 일을 하는가 똑똑히 한 번 압시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돼요. 오늘 본문 17절에서 20절에 보면 거기에 세 명의 사람의 이름이 나오죠. 한 명은 룻이라는 사람인데 이 룻은 며느리입니다. 며느님. 그 다음에 나오미는 시어머니 되십니다. 그리고 보아스란 이 남자는 친척입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이 나와요. 세 사람이 나오는데 보아스는 등장을 잘 안 하고 룻이라는 며느리와 나오미란 시어머니하고 서로 마주 앉아서 다정스레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입니다.

어떤 이야길 하느냐? 며느님 되시는 룻이 사발, 큰 사발 벼이삭을 가지고 왔어요. 벼이삭을 가져 오니까 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니 보리다. 보리 한 사발을 가져오니까 “어머니 드시옵소서. 많이 드시나이다” 해카면서 주니까 시어머니가 기특해 가지고 “야 야 너 이거 어디서 얻었지?” 이렇게 물어보죠. “제가 어느 날 밭에 가서 막 주웠잖아요” “밭주인이 가마 있드냐?” “많이 주워가라고 했어요” “아유 그 밭주인 하나님께 복이 있길 원하노라. 아유 밭주인 참 좋은 사람이네!” “그런데 어무이예?” “와?” “그런데 그 밭주인 이름이 보아스랍니다. 보아스” “보아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어허 그 사람 우리 친척 아이가? 그 사람은 장차 우리 가문을 대를 이을 사람이 되느니라” “우리 친척요?” “야야 니도 알다시피 내 남편 죽었지, 니 남편도 죽고 내 아들 둘 다 죽은 입장에서 이 처량하기 짝이 없고 팔자 센 이 집안에서 이 집안의 대를 잇고 이 집안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 속에 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사람이 그 친척 보아스니라” 그런 이야기를 지금 다정스럽게 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우리 한국 사람이 듣기에 낯설어 보이는 그러한 이야기를 시어머니가 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니까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 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남을 도와 줄 경우에는 생존에 보탬이 되는 경우에 보통 우리가 구제 한다 도움 된다 그렇게 이야기 하죠. 그런데 이 땅이 지금 살아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길까요? 되는 이야기 입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라면 갖다 줄까요, 산 사람에게 옷 없는 사람에게 겨울 옷 잠바 갖다 줄까요하면 이건 말이 되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도와주고 밀가루 한 푸대 보태주고 돈 주고 옷 주는 것은 하나의 사회복지 차원에서 구제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죽은 사람에게 무슨 재주로 도와줍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예? 죽은 사람에게 뭘 도와줘요? 죽은 사람 무덤 가서 아이구 아저씨하며 운다고 다시 살아납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아까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일 하신다 얘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자기의 약속을 던져놓고 그 던져진 앞장서서 던져진 약속을 성취하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하는 일은 막무가내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부선 호남선 철도 깔린 것처럼 기차라 하는 것은 철도 위에만 가게 되어 있지, 기차가 어디 뭐 아스팔트 위를 가고 논두렁 위를 가는 게 아니예요. 기차라 하는 것은 철도 위를 가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깔아놓은 그 약속 위에서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알지를 못해요. 아침에 10시 반에 성경공부 할 때 전도사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기 때문에 약속 아닌 것도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부동산 값 올라갑니다. 예수 믿으면 서울대 가서 공부 잘 합니다. 이런 건 성경 아무리 찾아봐도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는 서울 대학이란 이야기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고난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모든 게 형통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모든 일에 죽을 대도 아픔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살이 쪄서 얼굴이 퉁퉁하고 그래돼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믿음 데끼리죠. 그 믿음 데끼리가 이 땅에서 아무 짝도 소용없었어요. 믿음 데끼리였던 그 열 두 제자 전부 다 순교했습니다. 왜 이런 것을 안 가르칩니까? 한국교회가 왜? 한국교회는 총체적 오락이거든요. 노는 장소예요. 총체적 오락입니다.

제가 어느 대구 큰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두 시간 동안 집회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어요. 딱 강의시간 끝난 뒤에 한 여학생이 쫓아와 가지고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 한 이백 명 삼백 명 모이는데 딱 한 사람이 고맙다고 얘기했어요. 진정으로 저한테 고마워했어요. 칠판 갖다 놓고 그림 그려가면서 했어요. 못 알아들어요. 왜? 자기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것은 하나의 절실한 떼우기 위한 즐기는 시간이지 하나님하고 갖고 놀면서 혹시 하나님께 잘 해주면 복 안 받겠나 하는 상거래, 장사를 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에라 하나님 니도 먹은 게 있으면 내놓겠지 지가 양심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한 거예요. 오락이었어요. 하나님하고 장난쳤다 말이지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집에, 어떤 마을에 장례식을 하고 있습니다. “어이구 아버지 와 죽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와 죽입니까?” 하면서 울고 있다 말입니다. 제가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면서 기차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차 창밖을 보면요 거기에 충청도도 지나가고 뭐 이렇게 경기도도 지나가면서 거기에 마을들이 있어요. 유심히 가만히 보면 그 마을에 장례식을 하고 있는 마을도 가끔가다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생각해요. 그 집에 장례식이 열렸지만 기차는 그 장례식은 들다 보도 않고 그냥 막 스쳐지나 가는 거예요. 기차는. 이 괘씸한 기차, 이 못된 기차!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게 장례식 같으면 기차 세워 가지고 내려가 가지고 아이구 안 됐습니다. 이렇게 하고 쉬었다가 또 떠나야지 남의 장례식 죽어도 그거는 보도 안 하고. 기차는 기차니까. 그대로 쏜살같이 달리면서 봤단 말이지요. 바로 그게 하나님 이예요.

왜 자꾸 하나님을 나의 사건에 결부를 시키려고 접합을 시키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이 자기 비서 입니까? 쫄다구 입니까? 종입니까? 뭐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예요,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예요. 저 정신과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Blindness deny라고 해서 시각상실증세.  이게 정신병 중에서 어떤 두뇌가 약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인데 이게 뭐냐 하면 증세가 시각 자체 상실, 장님을 말하는 게 아니고 보기는 보는데 판단을 못하는 그런 증세예요. 예를 들면 어떤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물어요. “지금 내가 멘 넥타이가 푸른 색 입니까? 도대체 어떤  무늬입니까?” 환자한테 물어보니까 환자가 가만히 보더니 “푸른 바탕에 빨간 무늬 넥타이를 하셨어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사는 넥타이를 안 멨어요. 그러니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넥타이 메지도 않은 의사한테 넥타이 어떤 색이냐 물으니까 자기가 지금 평소에 생각했던 거짓된 그런 관념의 넥타이를 가지고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다? 천만의 말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아요. 다만 교회라는 친목단체에서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하면 잘 어울리고 재미나게 한 순간 교회에서 보내겠느냐 그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라 하는 개념이 우상 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 가운데 누가 어떤 식으로 하면 복 받았느냐? 나도 그런 식으로 하면 복 받겠지 하며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물론 목사들이 만들어 내요. 그 거짓 하나님을. 그러니 목사들이 천당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래요. 그러니 누가 천당 가겠어요.

기독교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생존할 뿐 아니라 죽은 자에게도 은혜 붓는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까지 포괄하고 서로 얼싸 안고 감사하는 종교예요. 살아있을 때 어떻게 복 받느냐가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영생 가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 만나는 게 복 이예요. 살아 있을 때 어떻게 복 받느냐하면 자본주의 법칙에서는요, 이 교회 나오지 말고 이 시간도 밭 매면서 농사지어야 되고 장사해야 됩니다. 그게 돈 더 벌어요. 헌금하지 말고 그 돈 가지고 재투자하면 돈 더 벌어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자본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독교를 거부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까지 얼싸 안고 그것을 영생으로 극복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게 뭐냐? 그걸 약속이라 해요, 약속!

처음에 창세기3장을 보면요 남자 여자가, 아담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에 하나님께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리라 그래 되어 있어요. 이건 약속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그 약속은 그 약속을 기차가 지나가는 그 작은 마을에 장례식 하는 사람들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야, 우리 아버지 죽어도 예수 믿으면 다시 살겠 구나’ 그걸 알고 있어야 될텐데 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안 내려봤으니 모르겠고. 어쨌든 간에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약속은, 기차는 늘 지나갑니다.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싸운다.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기는데 이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여자의 이름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생명’으로 바뀝니다. 색맹이 아니고 ‘생명, life, 영원한 생명, 영생’ 그게 생명에 여자의 이름이 하와로 바뀌어요. 그런데 창세기 그 앞에 보면 남자도 흙인데 흙으로 돌아가라 되어 있어요. 죽음입니다. 남자는 죽지만 이상하게 여자 이름은 생명이다. 이거 뭐를 우리한테 말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뭔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도 다시 여자의 후손 생명이라는 그대로 생명나무를 다시 따먹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나무 과실이 네 꺼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었어요. 못 따먹고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자기 스스로 못 따먹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약속 줘 놓고는 생명이나 이런 것을 거론 하더라 이 말이죠.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아하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만 생명이 있구나. 맞아, 우리는 죽는 거야. 죽는 것은 사실이야. 맞아. 항상 우리는 장례식 치를 준비를 해야 돼. 하지만 참된 기독교 안에 참된 복음 안에는 생명이 있는 거야.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야’ 그래서 약속 안에 들어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 판사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훌륭한 세상의 국회의원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명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들도 늦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록 모든 재산이 다 잘리겠지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 약속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을 넘어섭니다. 제가 다시 볼께요. 17절부터 봅시다.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쭉 이야기가 나와 가지고 보아스가 줬습니다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러분 우리 같으면요 어이구, 하나님도 참 너무하다. 우에 남편 죽이고 아들 죽이고 이런 짓 안 해도 되는데 세상에 이제는 우리가 거지가 됐구나! 아이구 하나님도 참 무자비하시지 어떻게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냐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이 시어머니와 룻은 자기의 현재 있는 입장을 뭐로 봅니까? 하나님 주신 복으로 간주 하더라 이 말입니다.

더 간단히 이야기 합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얻어먹고 산 것도 복이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나 교회 와서 신학 배웠다. 신학대학 나오고 신학 배웠다. 나 교회 와서 목사님 설교 들었다. 약속? 약속 알지 뭐.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거 누가 모르나? 우리가 너무나 쉽게 생각하면 예수 믿고 천당 가지 뭐 하는 그것이 다 아는 걸로 약속을 다 아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 보아스나 룻의 이런 심정으로 얼마나 우리가 깊숙이 마음을 낮추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정말 우리가 모든 팔자 다 빌어먹고 거지발싸개로 양말을 대신하고 모든 것 주워 가지고 얻어먹을 정도로 겨우 연명하는 그런 생활에서 ‘어이고 이거 웬 이삭이고! 이것은 주의 복이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이 세상 전부 보다도 하나님 주신 약속 안의 영생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간증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간증해도 좋아요. 아, 저 사람의 관심은 이 세상에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영생 얻는 것이 목적이구나 간증해도 좋다 이 말입니다.

왜? 세상의 출세를 목적으로 한다면 아마 자기 처지를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겠어요? ‘하나님, 우리 교회 장로님은 저리 잘 사는데 나는 그 장로님보다 믿음 더 좋은데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얼마나 남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겠습니까? ‘내가 새벽기도 연속으로 40일 나왔는데 이 복도 안 주고’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그러니 하늘나라 영생을 사모 한다 이 말은 나한테 무엇이 없는 가를 먼저 파악해야 됩니다. 돈도 있고 자식도 있고 모든 것이 있지만, 나한테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생명나무 과실이 없다. 그런데 이 생명나무 과실이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줘도 안 바꿀 정도로 귀한 것이다. 특히 그 생명나무 과실은 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다. 내 죄를 씻으신 주님의 피 안에 들어있다. 이것을 알 때 이 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날 이 교회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이야기 해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상처가 된다면 신자 아니라고 간주해 주셔도 좋습니다. 모든 것을 마귀한테 다 빼앗겨도 괜찮아요, 여러분. 생명나무만 있다면 원상복구 되면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새로 다 채워지고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일합니까? 다 살자고 일하는 거 아닙니까?
생명 길어야 될 거 아닙니까? 생명나무 과실주면 될 것 아닙니까? 왜 그 귀한 것을 세상의 허잘한 것 보다 더 약화시키고 그걸 모독합니까? 바로 이것은 바로 나오미 같은 그런 심령이 있지 않기 때문에 룻 같은 그런 심령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다시 한 번 제가 정리해서 제가 말씀드린다면 “야야 니 뭐 주워 왔노?” “이삭 주워 왔습니다” “아이고 이 각설이 집안도 뭔가 횡재한 게 있네. 누가 이만큼 주드노? 누가 이만큼 줍도록 허용 하드노?” “보아스입니다” “아이구 보아스 그 사람 이 불쌍하고 희망 없고 낙 없는 우리한테 이런 복을 주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겨냥해 봅시다. 거기에 귀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귀한 것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중요한 것, 20절에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단순히 보아스란 사람이 구제 차원에서 어려운 사람 돌봐주는 차원에서 도와 줬다면 생존자의 차원, 이것밖에 없는데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푼다’ 아니, 사망한 자에게 은혜 줘봤자 이미 죽은 놈인데 죽은 놈 몸 만지기로 찔러봐야 아야 합니까? 어데요!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푼다, 사망한 자에게 은혜라는 게 뭘까요? 사망한 자에게 낙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시 되살아 나는 거, 부활 되는 거, 영생 얻는 거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지금 나오미가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 왜 그런가, 그것 좀 어려운데, 어렵더라도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여러분, 잠이 오시더라도 조금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업을 무른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잇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잇는다는 사실 그런 뜻도 됩니다만, ‘갚아주고 되찾아 온다’ 그런 뜻입니다. 갚아주고 되찾아 주는 사람이예요.

이게 어디서 나오냐 하면 레위기 25장25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혜로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땅을 인구 수 대로 골고루 나누어 주었어요. 갑자기 하나님의 역사지요. 하나님의 어떤 작용을 통해서 그 집안에 남자가 죽는다든지 아니면 그 집의 남편이 어디 바깥에 전쟁하다가 사망한다든지 아들을 못 낳는다든지 해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남자가 그 가정에 없다 이 말 이예요. 그러면 농사짓는 가정에 남자의 노동력이 아주 핵심인데 모든 걸 차지하는데 남자가 없으니까 그 집안이 갑자기 몰락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또 여자 혼자 있으면 옆에 또 남자들이 집적거려 가지고 그 어떻게 하든지 그 모든 재산을 다 사기 쳐서 빼앗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이 여러 번 반복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갑자기 그 여자는 재산을 다 날려가지고 못 먹고 살아서 천상 남의 종노릇해야 돼요.
갑자기 자유인이, 종이 아닌 사람이 남의 종이 되어 가지고 팔려가서 밥 얻어먹고 일해주고 그 집안에서 하인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 농토를 잃어버려서- 그러한 상태에 놓이는 겁니다.

그런 상태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남자를 다 없애서 그런 건데, 누가 남자를 없앤 겁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그 집안의 남자를 없애고 아들을 못 놓게 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그 집안을 폭삭 망하게 하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자체가 땅이 없기 때문에 종노릇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 가지고 약속의 땅을 제공해 줬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사랑이거든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가운데서 어려운 가정을 만들어 내고 여자만 달랑 남는 가정을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그 사회 속에서 반복하고 재현하고 전면적으로 실시하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실시하라고.

졸지마세요. 제발 좀 졸지마세요. 제가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조시는 분위해 다시 재방송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생명이 있지요. 그런데 그 약속이 뭐냐 하면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공짜로 끄집어내 주신 그 사랑이라구요. 사랑. 사랑 안에,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의 영생, 생명나무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아, 나 목사님 나는 하나님 사랑 받은 적 없습니다” 아이구, 왜 받은 게 없습니까? 마음이 지금 교만스러워서 그렇지! 마음을 낮춰 봐요. 거지발싸개처럼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서 누가 밥 하나 줘도 아이구 이거 하나님의 은혜다 복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 보세요. 모든 것이 사랑이지요. 그 분한테는 바로 죽고 나서도 영생도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그 사랑을 어떻게 발휘했느냐? 가까운 친척이 여자만 달랑 남은 그 불쌍한 가정을 위해서 대신 돈을 가지고 “아줌마 아이고 이거 저 식사 좀 하십니까?” “사돈의 팔촌 왔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안 갚아줘서 지금 식모노릇하고 있습니까?” “아이고 7천6백 만원을 안 갚아서...” “빚이 그리 돼요? 아이고 그래요? 제가 무라 줄께요” “아이고 고마우셔라” “그리고 무라 주고 그 땅 다시 찾아오세요” “아이고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통해서 사돈팔촌을 통해서 나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안에, 약속의 구덩이 안에 계속...” (녹음이 잠시 끊겼습니다)

‘아, 이렇게 거지발싸개 같은 나에게 이게 웬 사랑이고! 맞아! 이 사랑은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낼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사랑이지. 그 사랑에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지. 그러니까 생존한 자 뿐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죽었던 사람에게도 부활의 생명이 주어지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오미가 룻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20절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하나님의 약속 분위기로 계속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 왜 만들어 나갑니까? 그 약속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갑니까?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몰고 가서 죽은 자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 죽은 자 모두에게 영생을 제공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 하는 것,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약속대로 일 하시는데 마음이 든든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마음이 든든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차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음을 낮춥시다. 마음을 비웁시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이 거지였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거지라는 입장에서 새로 출발합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때 단지 사람이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도와준다고 믿읍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나무까지 공짜로 주신다는 그 약속까지 우리가 믿읍시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전부를 알게 되고 제가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인생 전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말고 생존하는 자나 그리고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를 내리는 여호와 인 것을 우리가 좀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관계도 없는 저희들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원수 된 자고 죄인 된 자고 하나님 앞에 죄만 짓는 아무 것도 아닌 참 거지같은 인간을 위해서 귀한 살과 피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십자가의 피를 봄으로서 생명을, 은혜를 주신, 죽은 자에게도 희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더욱 더 찬양하고 마음 든든하게 모실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