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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룻기2:1~7) 새로운 족보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룻기

(룻기2:1~7) 새로운 족보

정인순 2017. 6. 27. 09:39

http://www.woorich.net/~woorich/성경강해/룻기-1996/(04)새로운족보(룻2,1-7).mp3

 

 

 

녹취:이남희

룻기 1996 (4)

이근호     

 

본문말씀: (룻기2:1~7) 새로운 족보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찌어다 하매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2: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넓은 바다를 향하여 배를 저어가는 우리의 인생, 어느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 오늘도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 인생들은 실패라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지요. 그래서 실패 없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같이 실패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매사가 다 성공,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라고 자꾸 느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두하고 거기 나를 붙잡으려 하지 마시고 실패를 모르는 우리 하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실패 많은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실패가 없는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변화에 대해서 충격 받는 다든지 그런 것에서 탈피하는 것이 믿음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잘 될 것이란 기대를 안 했기 때문에 자기가 실패한다 할지라도 실패 없으신 하나님을 여전히 쳐다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신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성공이 늘 살아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실패와 상관없이 계속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작업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것을 찬양하고 거기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 이것이 바로 믿음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이 이렇게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옛날에 주신 약속을 가지고 구약이라고 하고 새로 주신 약속을 신약이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옛날 주신 그 약속은 뭐로 이루어졌느냐하면 인간보고 자꾸만 해보라고 명령과 지시로 내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명령하고 지시하고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벌써부터 주무시는데 나 우짜란 말입니까? 이따 한 5분 뒤에 다시 할까요? 그러니 교회 오기 전까지는 한 숨 주무셔야 됩니다. 구약 성경은 인간보고 뭘 한 번 해보라고 지시 명령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십계명과 여러 가지 계명이 있는데 해보세요. 해보는데 그 모든 것이 뭐로 드러나느냐 하면 ‘죄’로 드러났습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통해서 자기의 본심이 다 들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본심을 이렇게 묶다 보니까 그것이 죄의 꽃다발 이었어요. 인간 속에 죄만 들어있다 하는 것을 구약성경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뭐냐? ‘너희한테는 기대 안 건다 해봤자 죄니까. 그러니까 내가 은혜로 선물로 영생을 줄게’ 이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한 번 해 봐라 되는가 이것을 테스트하고 시험하는 기간이라면 신약성경은 그런 시험을 다 거쳐가지고 해보니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고 해보니까 오히려 죄만 드러나더라 그것을 다 아는 그러한 판국에 있어서 또 여러분보고 뭐 지키지 않아요. 하나님 주신 은혜만 잘 간직해라. 하나님 주신 선물만 잘 관리해라 그런 겁니다. 그걸 가지고 신약 성경에는 뭐라 그러냐 하면 ‘사랑하라 또는 찬양하라 또는 감사하라 전도하라’ 그런 걸로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주신 사랑이나 잘 관리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너 재주 발휘해 봐라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의 행함이라 하는 것은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그런 말씀 있지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도 형제를 사랑하라’ 그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서로 용서하라’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처럼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뭘 행해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잘했다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에서도 철저하게 받아드려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아무 것도 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 받을수록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 영생을 공짜로 주신 값없이 주신 그 생명수에 대해서 그 가치에 대해서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값없이 주는 생명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값없이 주는 생명수는 돈 주고 사는 생명수 아닙니다. 자기의 노동력을 대체해서 얻는 생명수가 아니예요. 그렇게 가르치면 전부 이단입니다. 생명수는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위를 통해서 얻겠다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입니다. 구약시대. 인간이 벌써 안 된다는 갓을 겪고 난 그런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에서 예수님 새 언약,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 하는 그 의미를 아시겠지요? 우리 살과 우리 피가 아닙니다. 우리 살과 우리의 노력도 아니고 우리의 땀도 아니고 우리의 지식도 아닙니다. 주님의 지식이고 주님의 땀이고 주님의 노력입니다.

열 두 제자 뽑아났더니만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도망가고 말았어요. 그들에게 교육시키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시킨 것은 뭐냐 ‘너희들이 교육 받는다고 인간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완전히 보여준 하나의 계시입니다. 성령이 와야 되고 예수님의 영이 와야 되고 모든 것이 은혜로 움직인다. 그러한 새로운 시절이 되었다. 그 새 시대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영생을 얻지, 그 영생을 받지 못해서 자기가 행함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과 어떤 기대를 걸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옛날 시대에 사는 시대착오적인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내세울게 뭐가 있겠냐 하겠지만 사실 내세울 것 없어요. 아예 내세우려 하지 마세요. 내세우려 한다는 자체가 뭔가 께름직한 거예요. 심보가 좀 이상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내가 자랑하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자랑 한다’ 네! 십자가 자랑 한다. 이 못난 인간을 위해서 그 잘난 분이 돌아가셨단다라는 그 십자가. 그 십자가를 나는 내세운다. 그럼 십자가를 내세울 때마다 무엇을 근거로 한 겁니까? 무엇을 인정한다는 것 입니까? ‘나는 못난이’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내세울 때 마다 그래도 나는 영생 얻었네.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영생 얻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 통에든지 또는 가정에서 마을에서 우리가 내세울 것은 우리의 상식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만 내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인 것입니다. 약속.

지금 우리 성도는요 전투 중에 있습니다. 오늘 날 교인들이 가장 잘 잊어버리는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지금 뭔가 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지금은 휴전하고 있는 줄 착각을 하고 있어요. 누구하고 전투하느냐? 마귀와 전투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이긴다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오해해 가지고 또 간질병 환자나 또는 정신이상자나 또는 개 거품 무는 사람에게 십자가, 승용 차 앞에 있는 십자가 떼어 가지고 저 교회 지붕 위의 십자가 떼 가지고 이 드라큐라야 물러가라 그것으로 이긴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제 말은 십자가로 이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마귀는 세상을 장악하고 있거든요. 그 마귀가 자꾸 뭐로 무기 삼느냐 하면 힘과 권력과 재산과 재물과 잘남과 똑똑함 그런 것을 무기로 삼는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그래, 너 잘났다. 나는 못났다. 이게 무기다 이 말입니다. 너 잘났어? 그럼 나도 잘났어! 이리 되어 버리면 그것은 마귀한테 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는 동시에 지는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이 된다고. 그 사람은 한평생 마귀의 종이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잘 나오다가 돈 잘 버니까 돈의 노예가 되어서 교회 안 나오는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것은 바로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돈의 노예가 된 거예요. 제가 아까 쭉 얘기해서 이 땅에 약속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약속이고 그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약속이 되지도 못하고 영생 주지도 못하는 돈의 노예가 된 것은 뭐냐? 돈이 자기를 공격해서 돈이 이긴 것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가 돈을 왕창 벌어서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을 하나만 만들어보자 하는 그러한 욕심 때문에 스스로 마귀의 종으로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물어보면 교회 자꾸 나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묻는데 지금 자신이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전투 중에 있어요. 싸움을 하고 있어요. 싸움을. 인민군한테 항복하면 너 왜 인민군한테 항복하냐 그러면 인민군 되어서 밥 먹고 살면 안 되냐? 하는 똑같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전투 중에, 싸움 중에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우리가 사용하면 안 됩니다. 지금 세상은 악에 푹 빠져 있어요. 돈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돈에 빠져있는 그런 채로 하나님을 믿으라 하니까 뭐가 사라지냐 하면은 갑자기 마귀가 사라지는 거예요. 마귀가 없어지는 거예요. 아이고, 놔두소! 세상 사람들 같이 돈 벌려고 애쓰는데 그 사람이 뭐가 나쁩니까? 네, 뭐 사는 게 나쁘지요. 놔 두세요 고만.

제가 연대 어떤 강의를 하는데 강의 도중에 그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어떤 영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어떤 여학생에게 공격을 받았어요. “목사님, 목사님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목사 뒤에 왜 ‘님’자를 안 붙입니까?” 왜 목사 뒤에 님 자를 안 붙이냐 그런 것 때문에 공격을 받았어요. 여러분 성경에 ‘마귀님’이란 말은 없어요. 마귀에다 님 자가 안 붙는 법입니다. 왜? 우리 성이기 때문에. 그걸 그 여학생이 모르고 있어요. 그 여학생은 머릿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참한 교회 하나 만들어 보자 그런 욕심이 딱 들어있는 거예요. 참한 교회. 훌륭한 목사님 모시고 참한 교회 하나 해보자. 그게 뭐냐 하면 뭔가 내세울 것이, 내가 있는 위치에서 내세울만한 자랑거리 하나 만들어보자.

자랑거리 뭐냐? OO교회, OO선교단체라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우리의 자랑거리는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 십자가 이외에 자기 다니는 교회를 자랑한다든지 자기 목사를 자랑한다든지 자기 직위를 자랑한다든지 그런 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내세우는 무기에 불과한 거예요. 이제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습니까? 꼭 예를 들어야 이해한다니까요.

오늘 본문 성경에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하나님은 성공이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성공밖에 없어요. 성공을 하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것을 죽여 버리고 그 죽은 것을 살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럼 여기 엘리멜렉 가정은 지금 죽은 가정 이예요. 가장이 죽었습니다. 남편도 죽고 시아버지도 죽었어요. 룻 입장에서 볼 때 두 아들 다, 삼촌도 죽고 자기 남편도 죽고 시아버지도 죽었습니다. 남은 것은 여자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핏줄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실패였습니다. 실패했는데, 그렇게 하신 것이 누구냐? 지난시간 제가 얘기 했던 것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일은 실패가 없어요. 성공밖에 없습니다. 그 성공하는 과정 하나가 죽이는 작업입니다. 죽이는 작업. 왜?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오늘 본문 1절을 봅시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이미 우리는 엘리멜렉이 죽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 죽은 이야기, 죽은 엘리멜렉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물론 사람은 죽었어요. 사람은 죽었지만 엘리멜렉이라는 그 이름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남아 있는 이유는 뭡니까? 엘리멜렉이 죽었으면 그걸 끝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많이들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셨으면 우리는 끝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름이 남아 있어요. 그 이름의 남은 것을 다시 살리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특기는 살리는 겁니다. 죽이는 것은 우리의 주특기고. 우리 죄로 죽는 것은 우리의 주특기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장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 가지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도중에서는 먼저 죽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넞저 있어야 돼요. 죽는다 하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모든 것들이 가치가 있어 보이죠. 그러니 만약에 내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공중분해 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나도 사라지고,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없는데 이 세상 모든 것이 있으나 마나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시고 제일 싫어하시는 거예요. 자, 죽는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없어져버리니까 사람 사는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 되어 가지고 모든 것이 허무가 되어 버립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내가 죽어버리는데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제일 무서워하면서 하나의 현실이고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실패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은 성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 알지요? 하지만 실패했다고 당황하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으로 여겨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예요. 내가 실패해야 하나님은 성공하는 겁니다.

내가 자꾸 성공하게 되고 내가 사는 가치가있게 되면 그것은 내 가치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죽어가고 있고 깨지고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그 위대함은, 그 솜씨는 점점 더 하나님의 솜씨는 발휘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희망이 점점 부풀어 갑니다. 그거예요 바로!

오늘 본문 2장1절에서 엘리멜렉의 친척 중에서 엘리멜렉은 죽은 사람인데 불구하고 엘리멜렉 이름이 자꾸 거론되는 거 보니까 엘리멜렉은 비록 죽었지만 엘리멜렉 가문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소생 한다 그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스리는가?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은 하나님은 사람을 안 죽이고 용서시켜서 족보를 만들면 될텐데 그 사람을 죽이고 난 뒤에 엉뚱한 사람을 집어넣어서 그 가문을 다시 회생을 시키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기존의 족보와 혈통은 이것은 마땅히 죽어야 될 혈통이지만 하나님이 새로 집어넣어서 새롭게 창조한 혈통은 영생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러한 혈통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 들어 온 내 죽은 자리에 새로 들어 온 그 분을 우리가 믿고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그 작업이 상당히 어렵지요? 나는 죽이고 빈자리에 누구 하나 집어넣어서 그 집어넣어진 그 분에 의해서 죽은 우리도 같이 사는 그 작전이 하나님의 작전이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는가 모르겠다...

바로 그것이 누구냐? 바로 3절에 봅시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입니다. 우연히. 그러나 우연히라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작전을 거기서 벌린거죠.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를 만났다 이 말이죠. 이 우연히 하는 것이 사람을 살립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 있었을 때 롯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연히 천사를 만나서 천사를 대접하고 이래 되가지고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런 가정이 됩니다. 여기서도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했습니다. 여기서 ‘엘리멜렉 친족’이니까 엘리멜렉은 죽었지만 그 친족에 들러붙어서 엘리멜렉의 가정은 하나님에 의해서  회생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기서 암시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잠깐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 룻기4장 마지막 보면, 룻기 4장17절부터 22절까지, ‘17.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18.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족보가 왜 나오느냐 하면 뒤에 ‘다윗을 낳았더라’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이 족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누구 때문에 이 족보가 이어지느냐 이것은 모압 소녀, 모압 여인 룻 때문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모압 여인 룻이 왜 동원되는가? 그것은 원래 족보인 엘리멜렉과 그리고 그 아들 둘이 다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리에 이 룻이라는 모압 여인 룻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압 여인 룻이 들어가서 생긴 족보가 어떤 족보냐? 그것은 다윗이란 왕인데 그 왕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윗은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면 된다. ‘하나님의 의’ 이 세상에는 아까도 제가 얘기 했지만 악밖에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행동은 죄악밖에 없습니다. 의라는 것이 없어요. 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죽음에서 영생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전에 전에, 그 윗대 할아버지, 할아버지 , 할아버지 그 윗대에 엘리멜렉 시대에 모압 여인 룻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오미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죽은 가정인데 다시 영생을 얻는 가정이 되었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거예요.

그 윗대 윗대부터 계속해서. 그러니까 어떤 족보가 생겼느냐 하면 안동 권씨, 경주 이씨도 있지만 어떤 그의 족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가 담긴 족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담긴 족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족보입니다. 그것이 룻의 족보이고 엘리멜렉의 족보고.

제가 설교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엘리멜렉의 족보는요 ‘의’가 없어요. 악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족보를 죽였습니다. 아버지 죽이고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끝났습니까? 아니요.
그럼 뭡니까? 모압 여인 룻을 집어넣어가지고 그 가정을 다시 살립니다. 다시 살릴 때 뭐가 들어가느냐? 지금까지 없던 하나님의 의가 하늘나라의 영생의 의가 그 안에 쏘옥 집어 들어가는 겁니다. 나쁜 피 빼내고 좋은 피 집어넣는다 이 말입니다. 주사기로 나쁜 피 확 빼내고, 나쁜 생명 빼내고 좋은 생명 집어넣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 작업을 합니까? 하나님이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남자들 다 죽이고. 남자들이 없는 입장에서 괜찮은 남자를 접합을 시켜가지고 그 괜찮은 남자에 의해서 밑에 후손이 덩달아 괜찮은 사람 되어서 천당 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말해도 무지무지 복잡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여 놓고 다시 살린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왜 죽이느냐? 우리는 악밖에 없기 때문에 죽이고 살리는데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우리를 살린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8장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아까 자랑할 때 뭐 자랑하라 했습니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그랬지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만 자랑하면 되는 겁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죄밖에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어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을 다시 설명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결코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살과 피 입니까? 왜 우리 살과 우리 피는 왜 안 됩니까? 이것은 나쁜 피거든요. 미운 생명이고 저주받을 생명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생명 우리 피 뽑아내고 그 자리에다 주님의 생명, 주님의 피 집어넣는 겁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그것은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구약 때는 뭐냐? 구약 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리에 누굴 집어넣느냐? 룻이라는 이방 여자하고 보아스라는 괜찮은 엘리멜렉의 친족하고 둘이 합궁을 시키고 만나게 합니다. 만나게 해서 엉터리 같은 엘리멜렉 가정이 거기에 이렇게 싸악 빨려 들어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할 때 원래 엘리멜렉의 가문인 여자가 룻인데 며느리인데 며느리 아니고 그 다음에 누가 되는고 하면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보아스는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괜찮은 친족인데 어느 정도 괜찮은가 4절에 봅시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보아스라는 사람이 하나님만, 여호와만 생각하고 하늘나라만 생각하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라 이겁니다. 죽은 엘리멜렉 같이 조금 어렵다 해가지고 즉시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건 천 날 만 날 하나님의 축복만 생각하고 옆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라 말이지요. 그런 괜찮은 사람이 죽은 엘리멜렉을 대신해서 누구하고 혼인합니까? 모압 여자 룻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엘리멜렉 가정은 그 며느리 하나 잘 만나가지고 덕분에 그 보아스의 괜찮은 족보에 포함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의의 가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누가 살았나 누가 죽었냐가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것을 알아채야 성경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정말 우리 현재를 실패하게 만들고 죽이게 만듦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는 자신를 보지 말고 더듬지 말고 실패 없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쳐다보라고 성경을 그런 식으로 기록한 거예요.

딱 깨놓고 말해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 가운데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뭡니까? 걱정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는 뭔가 쓰잘 데 없는 엘리멜렉 이예요. 우리는 돈만 밝히는 사람입니다. 남한테 으시 될 거리만 자꾸 찾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 앞에 헐레벌떡 하면서 죽음 앞에 고개숙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 자신들을 자꾸 바라보니까 우리 속에서 근심이 나오고 걱정이 나오고 염려가 나오고 초조가 나오고 불안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실패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패하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 속에 또 하나의 성공자가 성공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란 거예요. 주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잘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예요. 여기 지금 괜찮은 보아스와 그 못난 집안 며느리 룻하고 어떻게 매치가 되고 만나게 되는 건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룻기 2, 3, 4장 줄줄이 나와 있습니다.

(중간부분 잠시 녹음이 끊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망은 누구한테 들어갑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착한 나오미 남편은 왜 죽였노? 어이구 나는 하나님 미워, 하나님 싫어. 어이구 나는 하나님보다 룻이 더 착해. 나는 하나님보다 나오미가 더 훌륭해. 자칫하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교회에서 예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생전 안 나오고 어느 권사 훌륭합니다. 어느 집사 보세요. 며느리  잘 챙기죠? 룻 같아요.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칭찬하는 그래서 경쟁 붙여 가지고 교회 성장하려는 그러한 한국교회 이단으로 그렇게 빠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제가 얼마 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의 친구가 교회를 안 나간 답니다. 그래서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요. “잘 있나?” “너는 잘 있나? 남편은 뭐 하노?” 이렇게 동창끼리 물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내 남편 죽었다는 거예요. 아이구 참 듣는 사람이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래서 뭐 교회다녀라, 어떤 친구가 자기 보고 교회다니라 하고 자신의 동창 가운데도 동차의 남편이 목사로 있다 해가지고 예수믿고 사람들 이런 얘기 하는데, 그 남편 죽은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부처도 믿고 하나님도 믿었다 이 말이죠. 내가 한평생 살면서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하나님도 믿고 부처도 믿고 다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 이 말이예요. 그런 사람이 교회 왔다고 이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합시다. 강단에서 설교를 뭐라고 설교합니까? 당신이 실패하는 순간이 하나님이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그런 이야기 하는 이외에는 다른 이야기는 할 수가 없어요. 당신 남편이 죽는 순간에 진짜 남편인 예수님이 보여 져야 될 그런 순간이다. 우리는 자꾸 마귀에 속해 가지고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자존심을 돋우는 곳에다가 자꾸 뭔가 무기를 던집니다. 자기는 마땅히 실패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실패 안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뭐든 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경북 주어(?)에 보면 712호란 차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다 내 탓이오’, 평화방송 사이클이 끝나고 언제 들으니 ‘다 내 탓이오’하는 말이 천주교에서 그 붙여 놨는데 내가 붙인 거 아니지만. 그러니 사람 탓은요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하는데 룻의 입장, 나오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와! 진짜 하나님은 나를 죽임으로서 진짜 하나님 됨을 나타냈구나. 그걸 알아야 될텐데 자기 실패한 것, 자기 남편 죽은 것 그런 것만 원망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 언제가야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언제가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실패해도 지금 하나님은 일 잘 하고 있습니다. 잘 진행되고 있어요.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너가 언제까지 자존심 내세우나 두고 보자’ 지금 벼루고 있습니다. 그 자존심 깨어지는 날 우리는 공짜로 주신 영생의 그 맛과 공짜로 주신 생명수의 그 참 시원한 맛을 그 때 비로소 계속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충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은 여러분의 남편을 대신하는 분이고 여러분의 자식을 대신하는 분이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과 재산을 대신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바로 영생이고 부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잘 되기를 믿고 있는 그런 이중인격자인 것을 고백합니다. 내가 실패한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는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 하늘을 향하여 얼마나 퍼부어 댔습니까? 그런 고집 세고 교만하고 자존심 센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지금도 예수님을 나타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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