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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10:1 / 막힘 / 170602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10:1 / 막힘 / 170602

정인순 2017. 6. 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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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a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막힘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0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제사장 위임식 한 내용이 나와 있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제사장이 왜 필요하냐? 구원이란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라면, “너, 너, 너 올라와.”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 거예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어떤 종교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질 않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지 종교에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 있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그렇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 때도 그렇고 구원에 관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계약에 준해서 일어지지 계약 없이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언약의 하나님, 계약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 모든 신은 인간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인간과 신이 있으면 좋은 게 좋다고 의논해서 바르게 살면 건져줄 게. 죄 많이 졌나? 지옥 보내줄 게. 그래서 불교는 아미타불은 극락을 관장하고 염라대왕은 지옥을 관장하는데 불교에서 지옥을 갈 때는 영원히 갇히는 곳이 아니에요. 죄 지었어도 특별사면이 될 수 있고 형기를 마치면 나올 수 있어요. 얼마나 희망이 있습니까. 고생 좀 하고 전과는 있겠지만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나올 수 없어요. 그것은 지옥이 인간을 겁주기 위해서 인간을 고생시키려고 만든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졌거든요.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 만들었고, 그 사랑이 사랑답게 그것이 놀랍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긍휼과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과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이게 피조물의 운명이에요.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나와 있지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토기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토기장이의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서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지옥 가는 사람은 이걸 안 믿지요. 왜냐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신을 생각할 때 우선 자기 행복을 챙기고 자기한테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은 누구? 이렇게 해서 믿거든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자기 잘 되게 해주면 믿을 용의 있다고 협상조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하고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과 이야기 안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시면서 늘 생각해야 될 것은, 구원이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그분의 일이라는 것.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거나 걱정한다는 것은 너무 주제넘은 일입니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인데 왜 우리가 걱정합니까? 시작도 주님이 하고 마감도 주님이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 살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인테리어 하는데 방은 이렇게 해주시고 아이들은 방엔 기린 그림 넣어주시고, 이렇게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세요. 모든 천국을 꾸미든지 지옥을 꾸미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꾸미지 인간을 위해서 꾸미지 않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고, 지옥도 마찬가지고. 지옥에 간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를 갈며 후회한다. 마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그런 후회를 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왜 그런 소릴 하는지. 이를 갊이 있음이라고 이야기한 그분이 바로 천국과 지옥의 주님 되신 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요. 인테리어 설계부터 모든 마감재까지 예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와 이야기가 돼있고요. 그래서 구원이란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지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뭔가 구원에 대해서 처음부터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난 시간에 레위기 9장에 위임식 했습니다. 위임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이 설정한 어떤 시스템이 있어요. 그 시스템이 제사장을 가운데 두고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제사장이 끼어들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세언약이란 제사장 언약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사장 보시고 건지시기 때문에 제사장 아닌 사람들이 일상생활하면 하는 행동은 그들의 구원받는데 일체 영향력을 행사하기 못합니다. 관여될 수 없어요. 압력으로 행사되지 않습니다. 착한 일했다고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제사장 보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걸 봐야 돼요. 제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걸 주목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뭘 할까요? 맨날 저한테 그런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하거든요. 이야기하고 난 뒤에도 계속 그런 질문이 들어와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꽂아놓은 거예요.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제사장을 꽂아놓았으면 왜 그랬겠어요? 제사장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평소에 네가 네 자신을 어떤지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이 꽂아놓은 제사장 주목하라는 겁니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불 뱀에 물렸지요. 그럴 때 하나님의 조치는 놋 뱀을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이야기는 여러분 아시잖아요. 놋 뱀을 쳐다보라 했잖아요. 왜 놋 뱀 만들라고 했겠어요? 놋 뱀으로 아픈 사람 긁어주면 낫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쳐다보라는 말은 시선을 거기에 두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뱀에 물렸다, 아프다, 하는 모든 원인과 결과의 의미는 그걸 함축해서 놋 뱀 쳐다보는 것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3장에 계속 주어지거든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보냈단 말이죠.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내가 이 땅에서 뭘 착하게 하고 말씀을 몇 개 지켰는지 보지 말고 예수님이 뭘 하셨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하란 말입니다. 예수님 하는 일에.

놋 뱀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보면서 그 사람들 참 고집 세지. 보라면 보면 되지. 아이고, 답답하기로. 그걸 보지 않아서 죽어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그럼 저는 이야기해요. 남의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 생각합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애들 도시락 챙기기 바쁘고 뉴스보고 스마트폰 들여다보기 바쁘지 언제 주님 생각합니까?

이걸 한 마디로 하면 말씀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 아니란 뜻이에요. 주님께선 반드시 신앙생활을 말씀으로 인도해요.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이 아니면, 모든 영역이 나의 행함이 투자되는 영역이거든요. 사람이 자기 세계란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어디까지 일했나, 그게 자기 세계에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 조그마한 텃밭을 가꾼다 합시다. 처음엔 자기 마당부터 시작해요. 그 다음에 슬슬 욕심이 납니다. 빈 터 없는지 봐요. 점점 자기 영토를 넓힙니다. 전에는 자기 집안에 상추, 배추만 생각하다가 다음엔 내가 가꾼 고추 모종, 상추 심어놨는데 밤중에 치매 걸린 할머니가 와서 망쳐놓지 않는가, 하고 슬그머니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만큼 걱정 범위가 넓어졌다는 말은, 그만큼 자기 행위가 거기에 투자된 거예요. 인간의 자기 인생이란 그 영역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가 신경 쓰고 관심 두는 그것이 자기 영역인데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말씀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레위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위임식 했단 말이죠. 말뚝 꽂듯이 꽂아놓은 겁니다. 놋 뱀처럼 꽂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것을 안 봐요. 괜히 지가 주눅 들어서 나쁜 짓했다고 벌벌 떨지 마세요. 그것은 마귀가 따라다니면서 잔소리꾼처럼 구는 거예요. 성경을 봤느냐? 기도했나? 헌금은 제 때 했고? 인색함으로 하진 않았나? 지난 주 수요일에 왜 참석 안 했느냐? 새벽기도 나갔느냐? 하여튼 마귀가 따라 다니는데 이게 귀신이 등짝에 붙은 거예요.

자기 행함으로 투자한 영역에 붙어 있습니다. 네가 성경을 안 보더니만 상추 다 죽었잖아요. 네가 새벽기도 안 가니까 얘가 공부 못하잖아요. 그러면 다시 성적 올리려면 빡세게 성경 보고 기도하고 교회 봉사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마귀 들린 짓이에요. 차라리 부적을 붙여. 그럴 봐야 집안에 부적을 붙여요. 침대 옆에 베개에 집어넣든지. 그게 심리적으로 편하지 않아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구원은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 일이기 때문에 우리와 거래 안 합니다. 주님 보내신 제사장과 거래하지 우리완 거래를 안 해요. 천국을 가는 것도 우리 행함 보고 보내주는 게 아니고 주님이 꽂아놓은 제사장이 제대로 했는지에 따라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고 지옥에 보내는 결정을 그렇게 내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원의 일은 하나님 본인의 일이기 때문에. 창조도 하나님 일이고 구원도 하나님 일이고 시작도 중간도 마감도 하나님 일이에요.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마귀한테 속아 넘어갔습니까? 아예 속아 넘어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성경을 모르고 자꾸 자기 영역에서 벌벌 떠니까 한 번 떨 때마다 일곱 귀신, 두 번 떨면 열네 귀신이 들어오는데? 세 번 떨면 스물하나, 한 번 떨 때마다 귀신들 들어붙는 거예요. 친정 엄마 아프면 내가 교회에 잘못한 게 아닌가? 남편한테 잔소리 심하게 해서 벌 받는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마귀는 철저하게 내 구원은 내 행함으로 결정된다고 인식을 계속해서 주는 겁니다.

오늘 레위기 10장을 하는데 왜 9장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사장중심이라는 것, 하나님 약속 중심이라는 것. 하나님은 자기가 꽂아놓은 제사장과 의논하지 인간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이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제사장이란 부적이 있으니까 형편이 낫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왜? 그제사장이 10장 1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ㅢ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이 대목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제사장이 의논할 문제지 우리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사장과 관계해서 구원이 주어지고 지옥도 천국도 그렇게 만들어지는데 제사장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주목하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분명히 주목하라 했단 말이죠. 주목하면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면서 죽음의 의미를 심어주면서 비로소 살려냄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의 의미가 뭐냐? 그것은 죽음의 개입 없이는 의미 없어요. 도대체 우리는 왜 살려져야 되는가, 라는 말을 하려면 우리가 도대체 어떤 형편인지 먼저 주제파악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 살려낸다는 말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건 제사장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는 겁니다.

제사장이 죽었잖아요.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몰라요. 이웃 집 할아버지 죽고 이웃 집 늙은 할머니 죽는다고 죽음을 모르는 겁니다. 사람 늙으면 죽겠지. 그런 죽음이 아니에요. 그렇게 백날 죽어봐야 구원 안 됩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 늙어 죽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모르는 죽음을 알아야 구원과 관련된 죽음이란 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여러분이 십일조 안 하고 헌금 안 하면 망하고 죽습니다. 하면 교인들이 그 소리 듣고 무서워해요. 중간에 제사장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과 자기가 직접 거래하려고 생각한단 말이죠. 돈 안 바치면 내가 죽겠구나. 죽으면 지옥 가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마귀 짓이고 목사가 설교에서 이야기할 것은 내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꽂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설교해야 돼요.

불 뱀에 물려 죽는 것은 의미 없어요. 놋 뱀에 의미가 함축돼 있다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놋 뱀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결부시켜놨단 말입니다. 놋 뱀 쳐다보면 살듯이 나를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니고데모가 그 이야기 들을 때 뻔히 쳐다본단 말이죠. 봤는데 뭘 별 것 없네, 이럴 수 있거든요.

주님께서 예수님 보라는 것은 키가 얼마고 인물이 누굴 닮았는지 보라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존재와 행하신과 이적과 말씀이 어디로 집결되는가 보라.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어느 지점에서 그랬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뤘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은 숨겨놓은 하나님만의 아이디어가 십자가로 다 이뤘다는 그 말로 완전히 까발려지고 공개된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말씀 지키려고 한 것은 뭐냐? 헛짓한 거죠. 마귀 짓한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교회에서 십일조하고 봉사한 것은 뭐냐? 헛짓한 거죠. 마귀 짓이죠.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온다고요. 십자가에 누가 달렸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에 당신이 달렸어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말 할 것 같아서 저는 안 달렸어요. 베드로 당신이? 나도 안 달렸어요. 사도 요한 당신? 나도 안 달렸어요. 세례요한? 목 달아났지 십자가에 안 달렸어요. 그럼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 말을 왜 했겠어요?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 안 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와 상대하지 않아요. 자기 영역에서 한 행함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수능 만점 받았다고 주께서 특별히 봐주는 것 있어요? 그런 것 없어요. 인물 좀 반반하다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 인물도 나이 들면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형상에 불과해서 파도치면 싹 쓸려가고 모래알갱이만 남아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이 평생 무슨 짓했는지 몰라. 텃밭 상추 가꾼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구원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꾸 자기 행함을 생각하지 말고 놋 뱀 쳐다보듯이 주님만 쳐다보고 주님만 자랑하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이걸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게 되면 참 쉽다 하거든요. 믿는 사람 입장에서 안 믿는 사람을 보면, 참 쉬운 걸 무슨 고집이 세서 이것도 못하느냐, 이렇게 돼요.

레위기 10장에 들어가서 대제사장은 아론이고 밑에 아들이 네 명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잡과 아비후, 첫째와 둘째 아들이고 죽고 난 뒤에 셋째, 넷째 아들이 제사장 되는데, 출애굽기 6장 23절에 보면, “아론이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제바를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이렇게 돼있어요.

출애굽기 6장 16절에 보면,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연치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로부터 죽은 나답과 아비후까지 4대입니다. 레위의 아들이 세 명인데 그중에 하나 고핫이고 고핫의 아들이 아므람이고 아므람의 아론이고 아론의 아들이 나답과 아비후가 돼요.

레위의 아버지가 바로 야곱입니다. 열두 아들 가운데 들어있으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이런 게 참 어려운데 하나님이 인간과 상대 안 한다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은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나님이 상대할 사람은 직접 만들어서 이 땅에 출생하게 해요.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언약과 관련된 사람을 이 땅에 생산해냅니다. 만들어낸 경로가 구약성서입니다.

구약은 크로마뇽인이 어떻고 지구역사가 어떻고 그걸 이야기하는 게 구약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이야기에요. 언약이 주어졌고 언약에 필요한 사람은 순서대로 인물들이 드러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언약 안에서 찾아보면 된다. 이게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인류역사를 다 찾아내려 하고 아담 이전엔 어떤 인간이 있었습니까? 유인원이 어떻고 네안데르탈인이 어떻고 그런 과학이야기를 찾으려하고 지구, 달은 어떻게 생성됐고 태양의 나이는 얼마고 안드로메다는 어떻고. 안드로메다를 성경에서 왜 찾아요?

구약은 옛날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양은 언제 만들어졌고, 하늘의 별 숫자가 궁금하잖아요. 그 궁금한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 바깥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인지 아닌지는 선악과 따먹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무지하면 죄가 되고 죄 값은 사망,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의 별이 몇 개인지 관심 있지요. 그럼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겠지요. 물이 떨어지면 위치에너지가 변해서 터빈을 돌려서 전기가 생산되는데 어떻게 하면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에디슨, 그것을 죄라고 하는 거예요.

온실에 세균이 많아서 양파가 창고에서 며칠 만에 20%가 썩어요. 그걸 안 썩도록 세균을 멸균하려고 태양이 타는 원리, 플라즈마 원리인데 플라즈마 원리를 장치화해서 이온화시켜 세균을 없앴다. 그걸 한 자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걸어 다니려고 하니 힘드니까 자동차를 만들었다. 자동차 발명하는데 신경 쓰는 걸 죄라고 합니다. 왜? 언약 밖의 이야기기 때문에. 그걸 구상한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죄인입니다. 교인 수 더 불려야 되겠다.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죄란 자기 행함을 투자한 영역, 언약과 상관없는 영역에 신경 쓰는 걸 죄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평생 죄 짓고 살라고 이 땅에 주신 거예요. 이게 죄라고 해서 안 지으려고 하지 마세요. 왜 그래야 되느냐? 마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이 재료가 언약이 빛을 봅니다. 십자가가 빛이 나요. 복음이 되게 간단하죠. 우리의 할 일은 죄 짓는 것.

왜?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는 의사가 필요 없어요. 천국 가면 병든 자들, 죄인들 다 모아놨어요. 지옥 가면 잘난 척하는 사람들 다 들어가 있어요. 교회 다닌 사람들 다 지옥 가요. 가만있어도 지옥 가고 이왕에 빨리 가려면 교회 가면 갈 수 있어요. 대한예수교장로회 거기에 다 모아져 있어요.

“왜 저를 이렇게 살려내십니까?”라는 고백을 사도 바울이 했던 고백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말은 내가 원치 않았는데 주께서 먼저 찾아와서 건져줬다는 겁니다. 구원이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의 일이기 때문에 그냥 와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나는 나 나름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말씀 지키고 율법에 흠이 없고 완전한 자로 자처하고 싶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건지고 난 뒤엔 그런 것을 안 하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이 나오더라도 배설물로 빼는 거예요. 평생 죄 짓고 죄 빼내고 죄 짓고 빼내고. 죄 생산하고 빼내고. 집에 텃밭 가꿔놓고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고. 돈 벌어놓고 사기 당해 다 날아가고. 자식 키워놓고 자식이 지 잘났다고 다 튀어나가고.


인생이란 해체과정이에요. 그런데 해체가 되어야 창조를 알지요. 해체가 없으면 평생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예요. 내가 태어난 것도 내가 알아서 태어난 것처럼 착각하게 돼요. 그러나 인생은 내 원대로 안 된다는 것을 주님의 손길이 안 닿으면 평생토록 나는 내 뜻대로 됐다고 자랑할 거란 말이죠. 주님이 손대서 뭔가 쥐포 찢듯이 모든 걸 찢어버려요.

찢게 하니까 임시 제목이지만 이게 적당할 것 같아요. 막히는 것,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내 뜻대로 안 되고 막혀야 돼요. 레위기 9장에서 제사장 세울 때 사람들은 좋아했어요. 이제는 제사장 있으니 걱정 없다. 10장에 넘어오면 제사장이 죽었는데요? 그러면 조금 전에 위임식 한 건 뭐예요? 죽으라고 위임식 한 거예요. 위임식 하고 죽고 말았어요. 나답과 아비후의 역할은 죽는 역할이에요.

우리 생각으론 죽이지 말고 삼진아웃제도 있듯이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드렸으면, 제사장 되는 게 힘들잖아요. 제사장 옷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되면 그 옷 다른 사람이 못 입거든요. 옷 지은 게 아까워서라도 조심해라. 앞으론 정신 차리고. 이렇게 해도 되는데 명하지 않은 불을 담았다고 불이 나와서 삼키매 죽었어요.

그러면 죽었다고 애통하지 말고 하나님과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사이에서 뭔가 새로운 진리가 있어요. 진리의 내용이 있다고요. 이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밝혀지는 진리 값이 있는 거예요. 안 죽었으면 모를 진리 내용이 나온다고. 그 진리 내용이 6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형 죽었다고 슬퍼서 옷 찢지 말라. 만약에 그런다면 내가 널 죽을 거야.

그럼 하나님의 명령을 세트로 맞춰봅시다. 다른 불을 사용했다고 즉사했다. 즉사한 걸 보고 안타깝다고 울었다. 울면 죽어, 너. 지금 이 이야기를 모세와 아론이 해요. 큰 삼촌과 아버지가 이야기한단 말이죠. 아론이 셋째, 넷째 아들한테 당부하는 겁니다. 이게 인공지능이지 아버지에요? 자기 아들 죽었는데 이렇게 냉혹할 수 있습니까? 비정한 아버지. 남의 자식 죽은 것도 아니고 자기 아들 죽었는데 노란리본을 달지 않을뿐더러 울면 죽는다고 살아있는 아들들에게 당부하는 냉혹한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마음씨에요?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리 값이 뭔지 조합해보면,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미 원래부터 죽은 자란 뜻이에요. 원래 죽은 잔데 인간이 마귀 들려서 울산에 살고 있다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건 네가 누군지 모르지? 알려줘? 나답과 아비후가 죽어버렸어요. 아이고, 어쩌나. 어쩌라니? 너도 마찬가지야.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고 너는 살았다고 착각하는데 너도 마찬가지야.

하나님이 제사장을 준 것은, 모든 인간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죽은 자란 겁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진 모습이고 그것이 진리 값이에요.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과 안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해서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이 어떤지 보게 하는 거예요.

교회 가서 김 집사, 박 집사와 비교하라는 게 아니고 돈 많이 벌었다는 장로와 비교하는 게 아니고  바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왜? 구원은 예수님 일이고 우리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말려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합류되시기 바랍니다. 독단적으로 내 구원이 따로 나오면 안 돼요.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만약에 구원에 신경 쓴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나는 마땅히 천국 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이 돼버립니다.

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죽어서 좋은데 가기를 원하고 그 소원 들어주옵소서. 그건 달 보고 빌고 부처 보고 비세요. 성경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이게 구약이라니까요. 언약이에요, 약속이에요. 인간은 빼놓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 땅에 꽂아준 하나님이 생산해낸 선택된 백성과 관련돼있습니다. 그것이 야곱이었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가 레위고 레위의 사대 손이 나답과 아비후인데 그들의 역할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그걸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평소에 말기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그래서 하나님 살아계시다. 상당히 믿음 좋아 보이는 느낌 들지요. 죽을 뻔했는데 살려줬으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받았다. 그것만 기적입니까? 우리가 죽은 인간인데 오늘 하루 살았잖아요. 오늘 6월 2일인데 아직까지 살아 있잖아요. 이건 기적 아닙니까? 참새를 기르시는 것이 기적이라면 지금 우릴 기르시잖아요. 기적 맞잖아요.

그런데 내가 사는 것이 내 인생에 투자해서 애쓰고 용 써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모르고 가상세계 속에 빠진 겁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 가능한 가상세계, 예수님 없다고 여기면서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어 만들어낸 가상세계에 빠져있는 거예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꾸 막혀요. 예상대로 안 되고 툭툭 막힙니다. 막히게 함으로 자기가 누군지 말씀 앞에 돌아보는 계기와 기회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겁니다.

안 막히면 어떻게 되느냐? 안 막히면 인간은 내일의 일, 모레의 일, 앞으로의 일을 너무 많이 생각해요. 장래 일에. 어떤 분이 저한테 상담하기로 제가 이렇게 했어요. 걱정스런 일로 묻기에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기대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흐릿하게 합니다. 지금 감사해야 되지 감사를 많이 모아서 그때 감사할 생각하지 마세요. 하루하루 쪼개서 감사해야 되지 이번 일만 성사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그런 건 허장강이고. 미래에 뭔가 설정해놓고 거기에 대해 빡세게 기도하고 그것 되면 못 다한 감사할게요. 그런 식으로 주께 거래나 흥정하면 안 돼요. 자기 주제파악을 해야지요.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역할 했잖아요. 그들이 장차올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매일 죽어요. 그건 이런 뜻입니다. 이걸 십자가의 단회성이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단 한 번 돌아가셨어요. 갈라디아서에서 돌아가시고 한 오년인가 십년 후에 십자가 사건 다 정리됐는데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널 꾀더냐, 라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겁니다.

단회적인 것을 성령은 계속 우려먹어요.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으로 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그 세계는 지상의 시간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지상의 시간은 세월이 흘러가지만 십자가 안의 세계는 흘러가는 세월이 없어요. 확정됐으면 그대로 고정돼버립니다. 왜냐하면 묵시세계는 시간이 주장하는 시간이 좌우하는 세계가 아니고 사건이 지배하는 사건이 전부를 장악하는 세계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계속 유효한 효과가 등장하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지상에는 과거에 일어난 것을 계속 우려먹으면 나중에 시들해져서 효과 다 떨어져요. 리모컨도 하다보면 고장 나잖아요. 십자가란 새로운 묵시세계는 그 자체로 완료가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내가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나니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안에 주님과 함께 들어있습니다. 창문으로 십자가 바깥을 보는 겁니다. 죽은 인간들. 그런데 저쪽에서 사도를 보게 되면, 저 사람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 같아. 서로가 달리 보는 구분지어 보는 그러한 형국이 일어나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제가 신기라는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란 것임이 믿어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그 주님의 일이라는 게 이 땅에 나타날 때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될 이유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언약 입장에서는 그게 죄가 된다는 것, 내가 어떤 착한 짓을 하고 희생하고 마음을 낮추고 백날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의 언약으로 다 죄가 된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고,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모든 일이 신기한 일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10분 쉬어야 돼요.

 


20170602b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막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자기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때 죽는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주력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말해 놓고 거기에 위반사항이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시한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고 무엇을 위해서 제시한 말이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죽어야 마땅한데 꾸역꾸역 살려내시는구나. 이걸 느끼게 하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하나님이여, 이것 할 테니까 구원해주세요, 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아예 개입해버리면 나는 배역을 맡은 셈이 되고 역할을 맡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배역을 맡기 때문에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인생의 여정은 내가 원해서 이 길로 온 게 아니고 주께서 최적화된 주님을 증거 하는데 이 땅에 만들어낸 그 이후에 가장 최적화된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dna 유전자, 출생한 가정환경, 가족관계, 북한에 있다가 공산당이 싫다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그 안에 같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가장 최적화된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이렇게 주의 일을 한다는 것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너는 몰라.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얼마나 거룩한 분인 걸 너희는 몰라. 배역을 맡은 나는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개무시해도 주님이 개입한 성도는 주님에 대해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게 되지요. 이걸 쉽게 말해서 신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린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3~4억 하는 스포츠카를 타고 시속 200킬로로 빼는 거예요. 저도 얼마 전에 광주에서 대구 오면서 시속 220으로 달려본 경험이 있어요. 우리교회 교인 중에 남편이 차를 빨리 모는 게 취미가 돼서 보통 천천히 가면 180 정도고. 상당히 운전하는 그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해요. 그런데 고급차 탔으니까 신나지요. 주님이 차에 태우면 주님은 자기 살아온 인생을 고수하게 돼요. 그러면 주님은 좋지만 주님 차에 동승한 우리는 바들바들 떨지요. 주님 가신 길을 가니까. 주님 가신 길 신나는 길, 십자가의 길로 동승하니까 떠는 거예요.

그 다음 달에 수입이 2500, 그 다음엔 3600 오고, 땅 사서 던져놓았는데 열 배 오르고. 우리는 벌벌 떨어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시험 치면 백점, 수능 0.1%, 외손자 하나가 아이큐 180, 영재발굴단에 나오고. 수학이 좋다 하고. 속도 너무 나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딸이 둘 있는데 하나는 독일 남자와 결혼하고 또 하나는 우간다 남자와 결혼하고. 내 뜻대로 안 돼요. 막혀버려요. 공부해서 공무원 됐는데 남자친구가 인디음악 한다는데 밥 먹고 살겠습니까? 아들이 연기한다고 딸 준 부모는 가슴이 덜컹하죠. 연극해서 돈 얼마나 법니까? 뒤에서 빗자루 질하다 본 일 다 보는데.

왜 인생이 이렇게 막히느냐 말이죠. 이것은 괜찮은 인생을 내가 만들어서 갖다 바치는 식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 식으론 절대 구원 못 받아요. 주님께서 동승해야 돼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누추한 내 인생에 동승하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 쓸데없는 자라는 고백이 나와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공부를 잘해도 쓸데없고, 대학교수가 되도 쓸데없고, 100억짜리 갑부가 되도 쓸데없고, 사장이 되도 쓸데없고, 외무부장관 되도 쓸데없고, 청문회 해도 쓸데없고. 국무총리도 쓸데없고, 대통령 되도 쓸데없고. 항상 남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쓸데없는 자가 되는 겁니다. 쓸데없는 자가 돼야 목을 쥐고 마음대로 흔들 수가 있어요. 목을 쥐고 흔드는 것이 만화영화에 그 비슷한 게 나와요. <치킨 런>이라는 게 있어요. 닭인데 성질나면 위아래로 흔들지요. 주께서는 치킨 런처럼 우리를 흔드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 가정에서 흔들기가 벌어진 거예요. 여기 레위기 10장 초반부터 죽음에 대해서 무려 네 가지나 언급하고 있어요. 첫째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지요. 두 번째는 아까 봤던 6절,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라. 네가 형 죽었다고 슬퍼서 옷 찢으면 나한테 죽는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진노가 온 회중에 덮쳐서 제사장 죽으면 다 죽는 거예요. 이건 총리책임제에요. 나라 살림 못하면 내각이 총 사퇴하는 것처럼 제사장이 잘못 되면 백성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다 죽어야 돼요.

이것은 이유가 있어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십계명 들고 내려오는데 그때 언약대상자는 모세 딱 한 명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언약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내려오는데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찬양하는데 애굽에서 섬기던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여호와 이름 부르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죄가 뭐냐? 언약 밖에 있는 게 죄죠.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안 죽이기기 위해서 사전에 언약 판을 깨버립니다. 애써서 들고 온 하나님이 주신 귀한 언약 판을 백성들 살리기 위해서 깨버려요. 언약 없던 시절로 돌아가요.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약속합니다. 내가 저 백성들 진멸해야 하나님다운데 네가 그렇게 기도하니까 조건이 있다. 이제는 모세 말을 따르는 자는 살고 모세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고.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모세 시키는 대로 삼천 명이 죽었어요. 형제가 형제를 죽였습니다. 그런 집구석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개입 안 하면 이런 사단 안 납니다.

중국산 라이터로 하든지 성냥불로 하든지 향냄새만 피우면 되지 않느냐? 이건 언약 바깥의 이야기에요.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언약이 없으면 구원도 천국도 없고 하나님이 함께 있음도 없어요. 정말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있으려면 하나님의 언약 방식이 그 안에 내주해야 돼요. 그러려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시돼야 돼요.

하나님이 언약을 실시하기 위해서 장소가 일단 죽음으로 터를 깔아놓는데 그 깔아놓은 터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장렬하게 희생된 겁니다. 제사장이 죽었대. 왜? 향로불로 바꿔서 했다고 죽었단다. 그런 무서운 분이 우리와 함께 있네. 글쎄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안 죽게 되었대. 왜? 제사장끼리 조치를 잘해서. 어떻게 조치했는데? 그것은 바로 세 번째, 네 번째가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옷을 찢지 않았기 때문에 둘 죽은 것으로 마감이 됐어요. 회막 문 앞에 있는 진 밖의 사람들한테는 진노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산 밑에 촌락에 막 덮칠 판인데 그걸 제사장이 막은 겁니다. 아론이 막은 거예요. 어떻게 막았습니까? 인간적인 죽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의 실효성, 언약의 무서움, 그것을 살리는 방편으로 하나님이 죽음 사건을 일으켰다는 그 취지를 앎으로써 그들은 살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 죽일 때는 현재 살아있다는 모든 인간은 실상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그 취지가 살아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 영생이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그 취지를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온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있는 걸 신약에선 성령이 임했다 하거든요.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사람을 그다지 겁내지 않아요. 이걸 더 확장해서 말하면, 자기 미래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그다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장래에 대해서 겁내지 않는다는 말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제가 시카고에서 누구 자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이 그걸 못 마땅하게 여겼다는데.

우연히 차가 와서 박아서 죽었다. 저는 이걸 자살로 보지 않아요. 그냥 교통사고로 죽은 거죠. 그런데 제가 말한 자살은 준비 작업을 본인 손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차분하게. 자살하는 준비 작업을 차분하게 하면서 그걸 저는 성령이 시킨 일이라고 도저히 믿지 못하겠어요. 성령께서 시켰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말입니다. 악령이 시키면 시켰지. 그런데 전에 복음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의 자살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나로선 납득이 안 돼요. 에이 죽자 해서 홧김에 죽는 건 이해되는데 그게 아니고 치밀한 준비 작업이 있다는 것, 제 정신에. 그것까지 성령이 하셨다는 그 말에 저는 동의가 안 되네요. 아무리 그 전에 복음을 많이 전했다 할지라도.

제가 왜 자살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개입해서 주님과 일에 관련된 죽음이 있어요. 본인이 안 죽어도 주께서 알아서 죽이거든요. 골프 치다 주는 사람도 있고 잠자다 꿈꾸다 죽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산에서 빙판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는 사람도 있고. 죽어도 주님이 죽여야지 내가 나를 왜 죽입니까. 성질 급해서 그래요. 조금 기다려 봐요. 죽이길 겁니다. 역할 맡아서 죽이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 역할 맡아서 한 거예요. 이 본문 보면서 나답과 아비후는 나쁜 놈이라고 지목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럴 권한이나 자격이 안 됩니다. 어차피 엘르아살과 이다말도 죽어요. 하지만 역할이 다르고 배역이 달라요. 그래서 불이 나왔는데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레위기 9장 24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지금 백성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위임식 하는 제물을 다 태웠단 말이죠. 놀랬어요. 놀랬다는 말은 하나님이 존재함을 실존해 있음을 알려줬잖아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 다음 날 와서 불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겁니까? 그걸 주의해야 돼요. 불이 나타난 걸 통해서 하나님이 실존한 것을 안다할지라도 그 다음에 불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을 믿어야지요.

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맨날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기적을 보이란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부정적으로 묘사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이래서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이 정도로 개판이니 계시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엉망이고 죄 짓고 개판이니까 주님이 함께 계시다고 이야기해요.

주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평생 짓게 하는 겁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도 주어졌어요. 내가 선을 원하지만 내 속에 다른 뭔가 있어서 날마다 나로 하여금 죄로 사로잡아오는 거예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나올 고백이에요. 성령 안 받으면 그런 고백 안 나옵니다.

성령 받았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참 착하다, 천심이다, 마음이 천사라고 해도 본인은 본인을 알아요. 내가 어떤 착한 일이 있더라도 그걸 자랑하고 뽐내려고 하는 이기주의적 자기 위주의 욕심으로 사용하려는 다른 악이 같이 나온다는 것, 선이 있는 곳에 더 센 악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걸 통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내가. 내가 참 그냥 혼자 둬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합니다. 이걸 제가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거예요.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이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을 찬양한다고 돼있어요. 이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거예요. 주님이 있다, 주님이 이렇게 해줬다고 긍정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고 내가 뭘 해도 죄래, 부정적으로 나와 함께 있고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을 고백한단 말이죠.

그걸 지금 레위기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레위기 10장은 뭐냐? 이스라엘 전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것도 위임식 한 날 그 밤에. 위임식 했다고 제사장 끝난 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제사장을 주목해야 돼요. 제사장 집단에서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제사장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까 한 이야기를 하면 모세가 십계명 판을 깨버렸습니다. 삼천 명 죽고 난 뒤에 약속했습니다. 모세 말 들으면 살고 모세 말 안 들으면 죽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돌 판을 만들어요. 글자 안 써진 돌 판을 들고 다시 하나님 만나러 갑니다. 어떤 사람은 시내 산 아홉 번 갔다, 일곱 번 갔다고 하는데 의미 있게 간 것은 세 번 내지 네 번밖에 안 돼요.

빈 돌 판에 주께서 글씨를 새겨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 일은 백성들과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모세와 상대해요. 모세는 두 명이 아니고 한 명입니다. 모세율법에 의해서 한 명인데 모세 뒤에 모세언약을 하는 배역을 맡은 자가, 아론언약이란 말은 없어요. 모세언약의 더 깊이 있는 내용을 형 아론이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 제도, 아론의 자식들이 제사장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제사장은 언제 사라지느냐 하면, 모세언약이 사라지는 날 하나의 세트로 돼있는 아론의 제사장도 같이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모세가 언제 날아갔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모세는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유다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나와요. 그럼 처음부터 유다로 나오지 왜 레위지파를 거쳐서 모세율법이 우리를 구원한 것처럼 착오를 일으키게 만드느냐?

이게 스크린 작전인데 축구장에 골대가 있어요. 여기서 반칙을 했어요. 이때 유명한 메시란 사람이 공을 찹니다. 그런데 앞에 상대방 선수들의 비워주고 차라는 게 아니에요. 스크린을 짜요. 그런데 놀랍게도 상대편도 스크린을 같이 짜요. 아군과 적군이 섞여서 스크린 짜요. 앞에 장벽이 있으니까 메시가 어디로 차는지 몰라요. 앞에 너무 가려서. 그래서 찰 때 빨리 빠져줘야 돼요. 앞이 훤히 보이도록. 이 작전이 레위지파란 말이죠. 앞에 공차는 게 유다지파고. 너무 쉽게 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레위지파는 모세와 관련돼있어요. 모세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행함이 없으면 찝찝해. 기도 안 하면 찝찝하고, 성경 안 보면 찝찝하고, 교회 안 나가면 찝찝하고. 이래서 구원 되겠나, 하고 뭔가 찝찝해요. 거기에다 모세율법은 만약이 지키지 못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저주받는 항목을 보게 되면 끔찍합니다. 온갖 전염병은 다 들어오고, 맨날 전쟁에서 도망가고, 자식들 다 죽고, 농사는 가뭄 들어서 바짝 말라버리고. 한재에 전염병, 자식은 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이혼하고 아이 죽고 온갖 것 다 있어요. 생존에 연연하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는 그런 인식이 있는 인간으로선 말씀 안 지키려야 안 지킬 수 없어요.

반대로 지키게 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오래 살고 자식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고. 온갖 좋은 건 다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입장은 이래요. 좋은 것도 좋지만 아예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고 둘 다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내 능력 역량대로 인생 살만큼 살고 싶은데 갑자기 언약이 쳐들어오니까 이건 빼도 박도 못해요. 어느 쪽 할래? 축복할래, 저주할래? 낑낑 거리면서 저주 안 받을래요. 해봐라. 해보니까 십계명 다 걸려요. 헉헉거리면서.

이런 하나님 못 믿겠어요,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네가 사대까지 저주받는다. 자기 때문에 후손이 피해 본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지요. 그러니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저주 아래 있게 함이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큰소리 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죄를 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 율법에 예수님이 같이 참여하는 거예요. 우리만 당하는 저주를 죄 없으신 분이 저주를 받음으로서 이제는 죄 없으신 분이 동창생이 돼버렸네. 이젠 믿을 것은 주님만 믿어야 돼요. 나는 못 하지만 주님은 다 해내셨다는 다 이뤄냈다는 사실만 의지할 뿐이에요. 이제는 내가 뭘 했다고 나를 주목하는 게 아니고 주님만 주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내 자랑 못하도록 지금의 여러분 인생을 허락하신 겁니다. 지금 형편에서 어떤 것도 내가 나 된 것은 내 행함을 내 인생에 투자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을 못하도록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못하도록 한다고 안 할 우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막히는 거예요. 잘 나가다가 턱턱 막히는 겁니다. 인생이. 예측 못할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 되면 또 기다릴 거예요. 이게 아닌데. 이건 내가 생각한 게 아닌데. 예측 안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늘 감사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내일 되면 주께서 무슨 재주로 날 놀랠지. 또 무슨 일로 날 깜짝 놀라게 만들까.

주님께선 우리에게 개입하신 이유가 있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악기 연주자가 연주하지 않을 때도 악기 연주할 능력이 있지요. 악기 연주할 때만 연주하고 연주 끝나고 난 뒤에 내가 뭘 할지 모르는 그런 건 아니잖아요. 건축가가 집을 짓지 않더라도 건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게 바로 악마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렇게 봐요. 지금은 안 하지만 나이 들면 교회 잘 다닐 거야. 마치 그럴 자질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되면 예수님 빼놓고 하나님과 자신과 직접 거래하는 셈이 돼버려요. 주님 시켜주이소. 이건 육십 돼서 하고 이건 한 달 뒤에 해야지. 자꾸 미루고 해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그러나 예수님을 꽂아준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한 것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 한 것만 받아요.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힌테 죽음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붙들고 단도리를 해야 돼요. 저 어릴 때 그런 것 많이 봤어요.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매 들고 죽인다고 할 때 엄마 역할은 뭐냐 하면, 때리려는 아이를 커버해요. 앞으론 잘한답니다, 다시 안 그런다고 해, 하고 등짝을 대주죠. 사실은 사전에 연습을 한 거죠. 때리는 척하고. 아내가 남편한테 시켜요. 그래야 아버지로서 가오가 사니까.

하나님은 때리고 예수님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고 죄 없다고 의인이라고 품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생각나게끔 그러한 사태가 우리 인생에 말씀으로 개입하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 그룹에서 해야 될 일이고 그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뜻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에요.

이걸 정리하면 결국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이스라엘 내에서는 계속해서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에서 나중에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까지 연결하기 전까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동물 제물 희생에서 지금 레위기 10장에서 제사장이 죽어요. 동물에서 인격화 됩니다. 인격화가 나중에 십자가에 그냥 보통 인간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습니다. 이것이 언약 안에만 들어있기 때문에 언약 밖에는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동물 잡아서 죄 용서되는 게 아닙니다. 동물 희생이 제사장 희생을 통해서 장차오실 예수님과 사전에 연결돼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동물 희생으론 안 되니까 예수님을 보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미리 보낼 사전 준비 작업으로 어린 양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요단 강가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이라 했습니까? 어린 양이라 했지요. 그리고 예수 십자가, 연관 있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여기서만 나와요. 사람의 행함에서 나온 게 아니고 예수 믿고 헌금 드리고 그런데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게 아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와요.

그러면 이 희생을 반복해야 되지요. 반복할 때 아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있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앞에 얼굴 내밀고 있다, 이렇게 와야 됩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어떻게 표현한다 했습니까? 부정적으로. 그 부정적이 뭡니까? 주님이 함께 있어서 내 자랑을 못하는 하는, 나는 내 인생 내가 투자하고 노력해서 고생고생해서 이만큼 일궜다는 자기 인생인 것처럼 자랑질 못하게 만듭니다. 그동안 신앙 생활한다고 애 많이 썼는데 어지간히 절제 많이 했고 그만큼 참은 게 있어서 이 정도로 신앙생활 한다는 식으로 자기 신앙을 자랑 못하게 합니다.

자식 넷 잘 키우고 빌딩이라도 갖게 된 것은 그동안 장로하면서 감사헌금 많이 해서 그렇다는 그런 자랑은 마귀가 그런 짓합니다. 내가 외국에서 신학박사 딴 것은 주의 은혜다. 그런 것은 마귀가 그런 짓하는 거예요. 신학박사가 죄인이다. 이건 성령 받은 사람이나. 그냥 죄인이죠. 진짜 주 안에서 죄인이라고 할 뿐입니다. 박사학위 딴 것도 죄니까. 언약은 주님만 하시죠. 우리는 언약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언약의 혜택만 받을 뿐이죠.

내 새끼 때리지 말라고 커버해주는 것은 주님만 하시지 엄마 붙든다고 덜 맞고 이런 것 없어요. 주님이 커버해주는 거예요. 모든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죄를 옮겨버려요. 영구 없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죄가 없어요. 죄 어디 있나? 없네. 주님 혼자 놀고 있어요. 죄 많은데 어디 있지? 없어졌네. 아이고, 예쁜 것.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원래 사랑하는 관계는 그래요. 일방적으로 사랑을 저쪽에 투사해버립니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다니까요. 백내장수술해도 예쁘고. 주께서 그렇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기뻐함을 입었다는 그 증거만 찾으면 돼요. 매일매일 살면서. 주께서 무슨 짓거리를 했는데 이것도 예쁘게 보시는가, 그 증거만 찾으면 그게 뭐냐?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란 말이죠.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반드시 죽음 사건, 희생 사건이 반복되면서 주님이 우리 안에 개입된 걸 알 때 우리는 산 제물이 돼요. 우리 몸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했는데 우리가 제물로 취급당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귀한 제물로 보죠.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성전이 되면서 제물로 보죠.

그 다음에 제가 걱정돼서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을 능력이 자체적으로 소지한 것처럼 생각하시면 여러분이 마귀한테 쫓기게 됩니다. 전에는 기도하면 병도 낫더니만 요샌 기도해도 병도 안 낫고 방언도 안 터지고 신앙이 맛이 갔구나. 연습해, 훈련해. 자꾸 이런 유혹을 받게 돼요. 밧데리 좀 채울까? 기도원에 가서 주여, 쌍둥이처럼 집 사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내려오면서 밧데리 95% 충전됐다 하고. 사흘 지나면 25%로 내려가고. 어디 방전 됐나? 또 채워야 되고. 마귀가 맨날 그런 짓시킨다니까. 금요철야기도 가는 사람들 이유가 뭔데요? 습관화됐어요.

습관화는 뉴턴의 관성이 법칙이라고 하는 거예요. 뉴턴의 관성의 법칙이란 뭐냐 하면, 로켓이 먼 목성이나 화성에 갈 때 많은 연료를 싣고 가려면 얼마나 커야 되겠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대기권만 벗어날 힘만 있으면 그때부터 우주는 진공상태기 때문에 가만있어도 방향만 맞추면 알아서 목성까지 간단 말이죠. 그처럼 사람이 신앙이 없으니까 그 허접함을 종교 능력으로 채우는 겁니다.

어떻게 채우느냐? 옆에 김 집사, 박 집사 보니까 기도하는데 5분, 10분해도 방언 터지고 막 나오거든요. 그야말로 빅데이터에요. 기도할 용어들이 많이 누적이 돼있어요. 얼마나 연습했으면 그랬습니까. 금요일에 커피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기도를 5분 동안 하나? 너도 해봐. 처음엔 안 되지만 자꾸 해보면 기도의 달인이 되는 겁니다. 푹 쑤시면 기도 나오고 나와요. 설교, 강의도 마찬가지에요. 설교, 강의 잘한다고 그 목사 성도 아닙니다. 일종에 재주지요. 숙달된 재주지요. 여러분도 직업 다 치우고 유투브 보고 설교 흉내 내면 잘할 수 있습니다. 기도 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모든 종교적 시도가 막힘 앞에 다 헛수고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 좋다고 과시하려는 모든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고 막힐 때 막히도록 해주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것 없이는 성도 아니지요. 부정적으로 표현된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부정적으로 묘사됨으로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 한쪽은 세리. 누가 구원받았겠어요? 누가 봐도 바리새인이죠. 남을 토색하지 않았으니까 놀라운 사실은 간음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세리는 고갤 못 들고 죄인이라 할 때 죄인이라 한 사람이 천국 갈지 누가 알았습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우리 생각과 반대로 왔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 생각과 반대인 악마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사고방식이 반대로 됐기 때문이 주님이 건지는 방식도 반대로 건지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은 주장하기를 간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간음 안 하고 지옥 간 거예요. 병신 같이 간음도 못하고 지옥 가고. 참 내. 그리고 십일조 했다는 거예요. 십일조 하고 지옥 가고, 간음 안 하고 지옥 가고, 남의 것 도적질 안 하고 지옥 가고. 쪼다도 그런 쪼다. 이쪽은 다 해보고 천국 가고. 무슨 십일조를 했겠어요.

충격입니다. 복음은 충격이에요. 내가 그동안 알았던 게 전부 다 마귀가 지옥 보내려고 심어준 사고방식들이에요. 그런데 그게 관성 때문에 모태신앙,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 안 하면 당장이라도 진짜 저주받을까봐 벌벌 떠는 거예요. 물론 그것 안 하면 당장이라도 공부 못하고 부도나고 집에 불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저주가 아니에요. 오히려 저주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주께서 주신 합당한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네가 가진 것 때문에 벌벌 떠니 가진 것 빼앗아버린다. 전에는 저주로 해석했는데 이젠 축복으로 해석해라.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으면 반대 사고방식을 못 가진다는 겁니다.

끝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사장들 역할은 장차오실 예수님과 관련돼있어요.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립니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제사 지내기에 하나님께 용서받는다는 거예요. 말은 쉬워요. 하지만 제사드릴 때 제사장들은 얼마나 겁나지 압니까? 불을 잘못 드리면 당장이라도 불이 자신을 삼키는 굉장히 위험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무시무시한 직업이에요. 조금만 삐딱하면 죽을 수 있는 거예요. 그 심정을 백성들은 모르는 거예요. 얼마나 위험한지.

복음을 아는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시간 때우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무서운 거예요. 복음 아닌 다른 것 전하면. 조금이라도 인간이 행함을 전하면 이거는 주께서 가만두지 않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세상적인 목적을 기대케 한다든지 조금이라도 세상적인 부귀영화에 목표를 은근히 두게 만드는 그런 설교를 내뱉으면 사탄의 종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교회 부흥된다든지 이렇게 하시면 복 받는다든지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될 목사에요.

결혼식장에 가면 그런 목사 많습니다. 기도하는 목사, 결혼식 설교하는 목사 레퍼토리가 뻔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가기가 곤혹스러워요. 그래서 어떤 분은 점심부터 먼저 챙기기도 하는데. 만약에 밥 먹고 난 뒤에 그런 소리 들으면 소화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절대로 예식 마치기 전에 점심 안 먹습니다. 그 이야기가 복 받습니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목사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되지요. 지가 하나님 아니잖아요. 주께서 적합하게 배역을 줄 거예요. 자식이 없으면 없는 배역을 맡은 것이고, 아프면 아픈 역할을 맡은 거예요. 아프다가 낫는 역할이면 그렇게 되고. 소경됐다가 눈 뜬 것처럼 그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죠.

그러나 복은 내가 얼마나 꿀리지 않고 가졌느냐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실존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복이에요. 주님이 나와 함께 있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증인 되게,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이것이 복입니다. 왜? 일찍 당겨서 살아가는 천국의 생활이 바로 성도기 때문에.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이미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온 몸으로 체득돼야 됩니다. 그건 희생이에요. 주님을 위한 희생.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 잘 되기 위해서 혹시 예수 믿진 않았습니까?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인 것을 자인하고 그런 인간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있으니 천국이요 복인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