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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70303a 울산강의-레위기 3장 : 화목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3장에 화목제라는 나옵니다. 제사가 무엇이냐 할 때 제일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제사를 드리는 그 자체가 자신이 제사를 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첫걸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뭘 하라 하잖아요. 그 하라는 것에 말려들어서 하게 되면, 자기가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전혀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첫 번째 계기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성경말씀을 또 따로 실시하거든요. 성경말씀을 두고 인간 쪽에도 실시하고 하나님께서도 성경말씀을 지켰을 때 서로 나온 결과를 대조를 해봐요. 그래서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채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말씀을 이룬 것은 채택이 되고 인간이 한 것은 채택되지 않아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결국 우리한테 뭘 주느냐 하면, 우리가 버림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이 아예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하나님 거기 계세요. 추수해서 추수감사절 드리고 우리가 죄 지은 것 있으면 제물을 바칠 테니까 하나님께선 흠향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거기에 해당되는 방식이나 방법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할 테니까 정성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는 우리한테 일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정화수를 떠놓는다든지 신실한 양을 바친다든지 소를 바친다든지 인간들 사이에서 성의를 다했다는 어떤 방식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을 감동시킬 방식이라면 하나님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그냥 하나님 받으시면 될 텐데 그런 방식을 제치고 이것대로 하라고 법을 제시하면, 레위기 3장에서 화목제를 보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제사를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왜 다섯 가지로 나눠야 되는지 인간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인간들이 의논해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신라 화백제도처럼 좋은 의견이 있거든 내놓아보세요. 이 정도 하면 신도 감동할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이 생각해서 의논해서 만든 법령이 아니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려가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와버렸으니까 인간들의 생각은 여기에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려는 레위기 3장에 화목제에 인간들의 생각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아요.
이 말은 평소에 인간들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는 선언, 또는 결정 그런 내용이 성경책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예를 들어 내가 화목제 제사를 주는 것은, 너희들 마음에 들어있지 않은 의견을 여기에 담았으니까 네가 이것을 지켜봤다 하나님의 본 취지와 틀어진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자기가 그렸으면 여기에 소나무가 삐져나온 것은 이런 의미고, 태양을 그린 것은 이런 의미고. 자기가 그린 것이면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서 설명할 텐데 남이 그린, 어디 강아지가 있는가? 내가 그런 소리 낸 것 아닙니다. 내 휴대폰 아니죠.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내가 그리지 않았으니까 모르지요. 내가 그린 그림 아니에요. 나는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할 거란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안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조건들을 보니까 그 조건들이 어디서부터 어떤 취지로 줬는지 알아야 그 조건에 맞춰서 이것 때문에 이것 했지요. 드리겠습니다, 라고 착착 합이 맞아서 드려야 되는데 하라는 것만 있고,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요.
예를 들면 레위기 3장 17절에 보면,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돼있습니다. 이유 나옵니까? 이유가 안 나와 있어요. 피를 먹지 말라. 인간 쪽에선 왜요, 왜 먹으면 안 되는 돼요? 모른단 말이죠. 그 취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름과 피를 안 먹었으니까 구원해주세요. 이건 엉터리지요.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돈 좀 사랑하면 어떻습니까? 왜 안 되는 데요? 이유를 몰라요.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말자. 이게 말이 되겠어요? 십 원짜리가 길에 떨어졌어요. 돈을 사랑하지 말자. 안 줍겠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천 원짜리를 둡니다. 천 원 얼마나 한다고 돈을 사랑하지 않겠어. 1억짜리 수표 3장, 3억이 있어. 부도수표는 안 줍겠어요. 현찰 50억 놔둔다. 이건 남이 가져가면 안 돼. 내가 가져가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선교하는데 쓴다고 달랑 가져간단 말이죠. 왜 천 원짜리, 십 원짜리는 안 됩니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네가 지킨 것으로 네가 구원되지 않는다. 네가 성경에 대해서 이 정도는 순종했다는 것으론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성경 주십니까? 너 말고 다른 분이 다 지켰다. 누구 말입니까? 장차오실 분이 있어. 그럼 우리가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기다리면 안 돼. 네가 망한 상태에서 기다려야 돼. 그것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메시아가 백 번 왔다 갔다 해도 의미 모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언제 알았는가? 그들의 예수님께 맛있는 음식 대접할 때 안 게 아니에요. 그들의 바닥났을 때, 그들의 믿음이 몽땅 믿음이 아니라고 폭로될 때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때가 멀쩡한 오빠가 죽을 때에요. 그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왔을 때 멱살 쥐었습니다. “죽기 전에 오라고 제가 전갈 보냈어요, 안 보냈어요?” 보냈거든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오게 되면 이제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예수님 뜻은 그거에요. 네가 나한테 백날 대접해봐야 네가 진짜 나보다 더 사랑한 것 없어지면 멱살 쥘 수 있는 그런 본성에 이미 네 속에 있느니라. 그것이 발각될 그때 믿음이 뭔지 처음으로 아는 겁니다. 믿음이란 나와 무관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에 의해서 아직 안 죽은 나도 주께서는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옆에 계셔서 계속 살려내고 있다는 이 관계성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우리는 어떤 버릇이 있느냐 하면 내 쪽에서 자꾸 다가가는 버릇이 있어요. 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50미터, 40미터, 30미터 점점 접근해서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되려고 내 쪽에서 움직이게 돼요. [작은 권력]이란 제가 쓴 책 첫머리가 그런 게 나오지요. 태양이 멈춰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 했지요. 별이 왔을 때 우리는 지구가 여기 있고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처럼 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주님이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는 중심이었고 우리 인간들은 주님한테 끌려가듯이 뺑뺑 돌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한테 끌려간 거예요.
우리는 늘 내가 내 행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주님이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이 밧줄로 주님 쪽으로 당기고 있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 역할을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충만하지 않으면 잡음이 끼는 거예요. mbc 듣고 싶은데 채널을 잘못 맞추면 잡음 들리죠. 또렷하게 안 들리잖아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온갖 게 다 걱정 근심으로 다가와요. 사드 배치문제, 중국이 롯데상품 불매 운동도 걱정근심이 되고 롯데와 관계없으면서도. 촛불집회, 태극기집회, 온갖 뉴스 보고 다 걱정되고. 별 게 다 걱정되잖아요. 젊은 사람들 돈 번다고 바쁜데 나이 육십 넘어서 퇴직한 사람들 맨날 뉴스 보면서 태극기가 이기나, 촛불이 이기는지 온갖 것 걱정되고. 할 일 없으니까.
화목제물의 취지를 나와 연계하지 말고 장차오실 메시아와 연결시켜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면 화목제물 안에 어떤 취지가 담겨있는가? 우리는 제사 드려도 구원되지 못하는구나. 오히려 제사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직 발각되지 않은 죄가 발각되는구나, 라는 것을 알고 죄인의 입장에서 화목제물의 뜻에 따라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야 될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화목제 제사를 받은 이스라엘의 처지입니다.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시내 산이 있고 높이는 2206미터 정도. 이게 거룩한 곳과 지상에 있는 백성들과 분리가 돼있어요. 이것을 소속이라 합니다. 네가 지상에 소속돼 있느냐, 아니면 거룩한 곳에 소속돼 있느냐? 지금은 떨어져있지요. 고맙게도 거룩한 곳에 소속된 모세가 다리를 놓게 돼있습니다. 내려와요. 거룩한 곳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 계명이 모세와 같이 오게 되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따로 마련해야 돼요. 이 중심자리가 성막, 성소가 있는 자리가 돼요. 위, 아래로 구분된 것이 모세가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평지에서 중심 공간과 주변 공간으로 분리가 되는 겁니다.
분리가 되면서 여기에 지키는 경비가 필요하지요. 이걸 레위지파가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레위기에서 레위지파가 경비를 선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경계선상을 위해서 화목제, 속죄제, 번제가 들어있는 겁니다. 인간이 그냥 넘어오면 안 되고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를 거쳐야 이 안에 있는 하나님과 소통이 되는 거예요.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두 다리 있겠다, 차로 몇 분 안 걸리거든요. 그냥 걸어서 이 구역을 침범해서 가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걸어서 가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이 성의를 다해서 만난다는 말은, 인간의 그 몸은 소용없다 이 말이에요. 주님 만나는 데 소용없어요.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고 훼방하고 방해가 됩니다. 왜? 인간은 자기 육이 마지막 사랑의 대상입니다.
인간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경적으로 답변할 수 있어요. 그게 육이라고 답변 돼요. 그럼 네 육 말고 사랑하는 게 뭐냐? 자식입니다. 그게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청한 게 있지요. 그게 제사의 원형입니다. 양 바쳤습니까, 소 바쳤습니까? 사람 바쳤습니다. 이 말은 네가 진짜 네 자식을 좋아하면서 양 바쳐서 때울 생각 말라는 뜻입니다. 내 자식 지켜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기는 싫고, 양이나 바쳐서 이것 먹고 떨어지세요.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그게 인간들이 천국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왜 내 자식을 사랑하느냐? 내 몸의 확대거든요. 내 몸을 잡아당겨 보세요. 인간의 불멸은 자식 생산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식이 많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요새 생물학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의 dna를 이미 다 할당하고 장렬하게 죽으면 되니까. 자식한테 자기 dna를 퍼뜨리고 죽으면 나는 자식 속에 살아있으니까.
생식세포 안에 염색체가 있고 염색체는 세포핵 안에 들어있습니다. 세포핵 안에서 이중 분열해서 생식세포는 두 번 분열로 끝나고 모든 체세포는 계속해서 어른 될 때까지 성장한다고 생물학에서는 그렇게 밝혀내고 있어요. 그 염색체를 뜯어보면 dna가 꼬여있어요. 복제가 준비돼있습니다. 복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판은 없다는 뜻이에요. 그저 베긴 걸 베끼고 베긴 걸 베끼는 겁니다. 그 최초의 dna, 과학은 찾아내지 못합니다. 기껏 찾아낸 게 원숭이? 아니에요.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담입니다. 아담의 dna니까 주님께선 뭘 보느냐 하면, 인간은 숫자로 단 한 명밖에 없어요. 한 명의 가지들, 한 명에서 새끼 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딱 한 명이에요. 너 못 온다.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 그렇게 상대하는 취지가 처음에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한 이야기가, 레위기에서는 모세한테 이야기하고, 모세가 알아들었던 창세기 이야기를 모세가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은, 아 그 이야기. 뭔 뜻인지 알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죄 지어서 우리도 죽게 되는 그 이야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죠,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적으로 알아들어도 그건 알아들은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추방시킨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인간 구원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그런 경험 없겠지만, 어떤 남자 둘이 친구로 갑니다. 뒤에서 경찰이 따라오고 있어요. 경찰이 거기 서세요, 하고 호루라기 부니까 겁나서 둘 다 도망갔어요.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은 경찰이 자길 잡으러 온 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자길 잡으러 온 게 아니고 사기 친 친구를 잡으러 온 거예요.
하나님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게 아니고 말씀은 미래의 아담이 있어요. 지금 구닥다리 아담 말고 마지막 아담, 새 아담, 두 번째 아담, 그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창세기, 레위기 이야기를 그분을 향하여 주신 거예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말씀이 내가 새삼 지켜서 원한 맺힌 생명나무를 따먹는 방법으로 성경말씀 줬다고 엉뚱하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란 게 전부 오해덩어리에요. 거룩한 강단에 올라가지 마라. 거룩한 강단이라고 누가 지어냈습니까? 여기는 거룩한 성전이다. 그것 누가 지어낸 거예요? 전부 다 오햅니다. 마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고 구원받고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 살면서 복을 받는 줄 사람들은 오해하는 거예요.
그 오해를 퍼뜨리는 교회가 크게 되는 이유가, 전부 다 똑같은 정신병자, 전부 다 착각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착각적인 말을 해줘야 그 사람들의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 맞춰 설교하면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그 교회에 가보면 그런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횡 해요.
요즘 우리교회 수요일에 저와 제 아내 둘이서 예배드립니다. 오랫동안 생중계 본 사람 중에 눈치 챈 사람 있어요. 한 눈치 하는 광주에 계신 분은 교인 하나도 없지요 하고. 처음에 아무도 없을 때 평소처럼 한다는 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연기력이 안 받쳐주니까. 한양대 연극영화과 정도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것도 혼자 하는데 심지어 제 아내가 어디 가면 혼자 했거든요. 그게 편하고 이제 누가 올까 겁이 나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면 콤비 입어도 괜찮거든요. 아래위 따로따로 입고. 누가 오게 되면 차려 입고.
사람들이 레위기를 보면서도 인간의 육,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최후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행동해서 누굴 건져야 돼요? 나를 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네 몸 필요 없다고 하니까 필요 없는데 말씀을 왜 줬습니까? 히브리서 10장 말씀처럼 네 몸 말고 주께서 따로 준비한 그 몸, 이렇게 되니까 그럼 날 구원할 것도 아닌데 성경 볼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이 자기 일 같으면 관심 갖고 신경 쓸 텐데 이게 내가 지킬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킬 말씀이라면, 그럼 나는? 나는 안 하련다. 나한테 이익이 안 돌아오는데 왜 하느냐. 주님께서 네가 이걸 지키고 난 뒤에 이익이고 손해고 논하지 말씀 자체 취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지킨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레위기 3장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 라고 하는 그 이유를 모르는데 그 이유의 힌트가 나와요. 레위기 7장 11절부터 봅시다. 35절까지 화목제물에 대해서 언급해놨어요. 화목제물이 이중이에요. 3장 전체와 7장 11절에서 35절까지 화목제물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다 할 겁니다.
레위기 7장 25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희생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여러분, 뭔가 혈육이 중간에 끊어진다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면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끝부분이 단절됐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란 뜻이에요. 끊어진 것을 화목제물에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취지를 알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화목제물에서 제사 드리는 당사자마저 제사 드려서 구원되지 못할 인간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네가 드리는 제사가 오히려 너한테 호소하는 그걸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결혼식 하는데 주례자가 말합니다. “이게 선언하노니, 신랑한테 묻습니다. 신랑은 이 여자를 몇 년 살고 버릴 겁니까?” 이렇게 묻는단 말이죠. “신부는 잘 들으세요. 이 남자를 몇 년 살고 갈라설 겁니까?” 그건 결혼식에서 할 소리가 아니지요. 그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아플 때나 괴로울 때 이 남자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하잖아요. 부부 사이에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고문입니다. 버릴 만하면 버려야지. 그건 지옥 같은 거죠. 버려야 될 시점에선 버려야지 왜 안 버리지 말라고 해요. 네가 전에 결혼식 할 때 안 버리겠다고 했잖아. 바로 그것이 이혼사유가 되는 거예요.
왜 이 화목제물을 예수님이 가져가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백날 해봐라. 언젠가는 이 화목제물을 예수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너희가 율법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코스를 준비해봤으니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사 너희로 하여금 믿는 자에게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화목제물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으로 화목제를 볼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고집이 있어서 저는 그렇게 봤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화목제물 드리는 당사자가 화목제물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나는 드려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취지로 드렸느냐 이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제사를 백날 드려봐야 가다가 제사가 하늘나라 가다가 거부당하고, 가다가 거부당해요. 제사장은 늘 죽습니다. 죽고 그 다음 차례 바통 넘겨봐야 또 실패하고 실패의 연속이에요. 실패의 연속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지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니까 존재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라 명령, 또는 하지 말라는 법령이 주어집니다. 인간은 그 법령을 통해서 자기 존재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존재가 진짜 살아있는 인정받는 존재라면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곳에 들어올 수 있어야 되는데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들어오지 말라 하거든요. 너희는 이곳까지 오고 성막에 들어오는 것은 레위인에게 넘겨야 돼요. 더 이상 못 들어와요.
이 말은 비존재입니다. 존재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이 안에 영역을 설치한 거예요.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은 살아 있잖아요. 존재하고 있잖아요. 레위인들 있잖아. 그 사람들은 왜 봐주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기름과 피를 자기 몸에 범벅이 되게 만들어요. 오른쪽 귀뿌리, 오른쪽 발목, 오른쪽은 인간이 행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왼손잡이를 장애자로 봤어요. 왼손잡이는 안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오른쪽을 치중하는 이유가, 나중에 예수님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오른편에서 일하는 그것과 연계시키기 위해서 제사장 오른쪽에 피와 기름을 바릅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내 육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끝난 문제입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올시다. 장차오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할 것을 우리는 그냥 미리 앞당겨서 피와 기름을 처발라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감히 죽어도 갈 수 없는 이 자리가 오히려 살아있다고 우기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자리에 합류하면서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한테 개기고 달려들고 원망한 것은 자기가 살았다고 여긴 거예요. 죽은 건 오빠지 자긴 안 죽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반대로 뒤집어야 됩니다. 오빠는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이고 마르다, 마리아는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죽어 있는 상태에요. 예수님께서는 방향이 있어요. 죽은 자로 하여금 나사로처럼 산 자로 만드는 방향이 있는데 마르다, 마리아는 방향을 모르고 자기 존재 쪽으로 예수님과 손잡고 악수하고 주님 내 편 돼달라고 바짓가랑이 붙잡는 식이에요. 그게 마음에 안 드니까 원망하고 그런 거예요. 신앙이란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거죠.
사람이 죽어있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있지요.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르려고 했는데, 요즘 같으면 그때 전화가 온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예수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장례 치루고 가겠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그래 네가 효자 노릇하고 빛과 소금 역할 해야 복음이 잘 전달되지.”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세상에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실 수 없어요. 상상도 못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장례식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장례식 할 사람 있잖아. 너는 죽은 자 속에 안 속하잖아요. 너는 나와 방향을 같이 한다는 말은, 산 자와 관계 맺었다면 왜 죽은 자를 신경 쓰고 하느냐 말이죠.
지난 수요일에 기도제목을 낸 게 뭐냐 하면, 사람에게 대우 받으려고 하지 말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괴로움, 근심걱정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남의 시선이 나를 주시하고 있어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남의 요구에 맞춰서 살아간다고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암 걸리고. 뭐 차키 차 안에 넣을 수도 있는 문제지. 내 찬데 니가 와. 자식이 농땡이 부릴 수도 있지, 뭐. 참 이게 안 되지요. 이게 참 힘들어요.
왜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하냐 하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비존재를 의식해야 되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를 반기고 끌어당기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분은 없어. 이미 돌아가신 분이야, 라고 하신 분이 우리의 있음보다 더 확실하게 있는 분이거든요. 우리의 있음이라 해봐야 집안이나 치우고 돈이나 벌 뿐이지 그분은 우리한테 없는 분이지만 지금도 해와 달, 별을 운행하시고 우리 발걸음을 세시잖아요. 우리 머리카락을 세시고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하시고 참새도 키우시고 들풀도 키우시잖아요.
여러분 들풀을 보면서 아빠, 저 들풀은 왜 저렇게 크는데? 의미가 뭐야?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공부나 해라. 시험에 안 나오는 걸 왜 묻는데. 우리는 모르지요. 내가 있기 전에 해가 왜 있고 별은 왜 먼저 떠 있느냐? 별이 그 자리에 뜨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빵점 맞았으면서 지는 지한테 백 점이라는 거예요. 주께서 시험문제 낼 때 제76번, 해와 달과 별이 존재하는 이유를 대라. 그건 풀 수가 없지요. 삼각함수, 미적분은 잘 풀어도 김정남 아니 김철이란 사람이 죽은 이유를 대라. 압니까?
모르는 게 있다는 말은 나한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몇 발자국 걸어가게 되면 모르는 것 천지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만큼 살아왔습니다. 누가 살려줬게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 겁니다. 우리는 누가 살려주신지 모르잖아요. 성령께서 밧줄로 꽁꽁 묶어서 잡아당기면 주님이 살려주고 있구나. 그것도 피 묻은 밧줄이죠. 주께서 계속 용서하시면서 살려주는 거예요. 그 용서하심을 분해해보니까 그 안에 화목제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화목제물이 레위기 3장과 7장에 있어요. 우린 지금 그걸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성경 덮어도 그만이네요,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지키는 이것을 우리가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증인되지 아니하고 주의 증인되도록 주께서 취하신 조치의 일환으로 거기에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은, 사실은 네 존재의 증인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제사법에서 시간 요소를 뺍시다. 그러면 제사법은 영원한 정지가 되는 겁니다. 이걸 수요일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자성어로 ‘동작 그만’이죠. 천사 둘이 소돔과 고모라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천사가 보기에는 동결된 동작들이에요. 뭘 해도 동작 그만이에요. <별에서 온 그대>란 드라마를 보면 남자주인공의 행동을 돋보이기 위해서 다른 동작들은 스톱이 되지요. 요새 카메라 기법에 그런 게 있잖아요. 주인공만 부각시키고 나머진 스톱시키는 게 있어요.
스톱워치처럼 시간 요소를 빼버리면 영원한 화목제가 됩니다. 그럼 우린 뭐냐? 제단에 불타는 화목제물 앞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축구를 하든 기차를 타든 영화를 보든 잠을 자든 일을 하든 농사를 짓든 간에 우린 스톱이 돼버려요. 그 자체가 화목제물과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주 안에는 시간이 정지돼있지만 바깥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나름대로 되게 바빠요. 노아 입장에서는 그들의 아무리 분주하고 바빠도 동일한 속성이에요. 제자리 뛰기란 말이 있지요. 전혀 자기한테 보탬이 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는 모습이잖아요. 제자리에서 뛰는 거예요.
북에 물을 뿌리고 북을 쳐보세요. 그러면 물방울들은 북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해와 달, 별 아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지 돈벌이하는 것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여행을 가보세요. 백날 가봤자 같은 북 위에서 물방울 튀는 것밖에 안 돼요. 그리스 지중해 가서 햇빛과 하얀 지붕 구경해도 갈 곳이 없어요. 최백호가 불렀잖아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백날 다녀보세요. 갈 곳 없어요. 거기가 거기에요. 갇혀있는 겁니다. 시간이 동결된 거예요. 우리 인생이란 따로 자기 인생의 역사와 여정, 그거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화목제는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자칫하면 화목제 드리는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첫 번째 3장 3절을 봅시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과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7장 30절도 봅시다. “여호와의 화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제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이 대목을 찾으라 했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두 개의 단어, 기름이죠. 화목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름으로 표시하는 거예요. 기름은 먹지 말라. 기름은 단 위에서 태워버려요. 그러면 뭐냐 하면, 희생 짐승을 응축해버리는 겁니다. 희생 가축과 예수 그리스도의 연관성에서 응축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면 기름이 나온다는 말이죠. 너희들이 눌러 봐. 기름 나오지? 그런 뜻이 아니고 화목제물 누가 내리는 겁니까? 하나님의 취지에 맞도록 거기에 특수한 단어를 삽입해서 지시했잖아요. 하나님이 지정해준 단어가 가축 중에서 기름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름과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장 9절에 보면, 신약성경 353페이지. 우리가 많이 알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것, 왜 기름 부어야 되느냐? 우리는 모르죠. 그런데 성경에서 그걸 알려준다는 거죠.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기름의 의미가 뭐냐 하면, 동류보다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튀게 했다. 차원을 달리 하셨다. 차원을 달리하게 되면 여타의 인간은 차원이 다른 기름 부은 자에 종속됩니다. 소속이 돼요. 이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을 가리켜요. 히브리서에서는 이미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하나님께선 중보자로 보지요. 중보자는 하나님과 새로운 인간과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파견된 아들이 중보자에요.
제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란 말을 의도적으로 안 합니다. 하나님과 새롭게 만들어진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메시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 같으면 모든 인간이 다 구원받아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리고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람만 따로 뽑아내는 그 작업을 화목제물에 담아서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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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3b 울산강의-레위기 3장 : 화목제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기름부음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보통 인간과 또 다른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새로운 초월적인 인간 존재를 따로 마련하시고 그것을 사람들이 착안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화목제사라는 법 안에 그 요소를 담아두셨습니다. 담아둔 기름은 제단에서 불태워집니다. 피는 뿌려지고.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정한 죽음에는 그 누구도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갈 때,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목숨 내놓겠습니다, 할 때 네 목숨 더럽다. 인간이 내놓은 목숨 더러워요. 안 받습니다. 여러분 순교하지 마세요. 괜히 고물 내놨다가 소용없는 짓하고 있어요.
신약에서 성령에 의해서 순교란 것은 죽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챙겨서 버리는 의미죠. 새 차 주니까 헌 차 버릴 때 이웃이, “아까워라. 그 좋은 차를 버리다니.” 옆 사람은 내용을 몰라서 그렇지 자기는 기분 좋아서 버리는 거예요. 생명이 있기에 버리는 겁니다. 버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버리는 게 아니에요. 들어온 생명이 기존의 목숨을 버리라고 촉구하고 버리도록 조치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건 주님께서 나한테 자꾸 나가라는 거예요. 갖다 버려, 갖다 버려, 갖다 버리란 말이야. 그래서 성도의 평생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디 가서 내 목숨 버리느냐? 그것 찾는 중이에요. 성경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성경말씀은 어떻게 지키는 게 아니고 어떻게 지켜지느냐 하면 목숨을 버리는 식으로 모든 말씀을 적용시키게 되면 그것이 이미 우리가 생명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말씀 지키는 게 됩니다. 내 목숨을 버리는 쪽으로.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돼있죠. 그러면 술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고 대번 이렇게 나가죠.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술이 센지 소주 두 병 먹어도 안 취하니까 두 병까지는 됩니까? 취하지 말라 했으니까 안 취하는 정도로 먹어도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것 같아. 저처럼. 이런 사람은 술 먹은 사람 근처도 가지 말아야 되고.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데 성경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술을 네가 먹고 싶어서 다 먹어도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합당한 게 된다는 겁니다. 왜? 죽으려고 술 마신 거니까. 성경말씀은 내가 살기 위해서 이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죽으려면 어떤 말씀을 지키면 죽습니까, 하면 그 말씀 근처에 가지전에 이미 지킨 게 돼요. 이것 지키다가 죽으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술을 됫병으로 먹게 되면 옆 사람이, “너 그러다 죽는다.” “그래 나 죽어 마땅해.” 이게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오늘 이것 먹고 죽자. 말씀을 지킬 때 항상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제단에서 기름을 태운다는 말은 기존의 혈육과 인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아예 안 받는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단에서 불에 타 죽고 죽음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화목제물의 정체성이 이 죽음을 통해서 반대로 인간 쪽으로 덮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습니다.
내가 영생 줄 테니까 받을래, 말래 하는 식으로 주시는 게 아니고, “아버지, 여기 죽은 사람 하나 있는데요?” “생명 줘라.” 이런 방식으로 주시는 거예요. 우린 멀쩡히 살아있는데. 여기 죽은 사람 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미 저쪽을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음껏 성령의 충만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화목제물 드리면서 인간 쪽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죽었어.”
제단에서 태우는 기름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제물에서 나오지요. 화목제물에서 제물의 용도가 여러 가지인데 서원하거나 자원할 때는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요. 서원과 자원에 차이가 있어요. 서원은, 내가 반드시 이렇게 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드리는 것이고, 자원은 어떤 목표와 목적 없이 즐거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서원과 자원의 용도로 제물을 바칠 때는 암컷과 수컷이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암컷, 수컷 다 할 수 있어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화목제 이전에 번제, 속죄제, 속건제 거쳐서 왔기 때문에 여기선 일종에 파티, 앞에서 이미 제사를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와 헌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리가 돼있기 때문에 서원하다, 자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발성,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성에 의해서 뭔가 하고 싶다, 뭔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 네 속에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이것 드릴 테니까 내 뜻대로 해주세요, 가 아니고 네가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사실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일깨워준 거예요.
예를 들어서 공무원 하다가 때려치우고 촌에 들어가서 돼지 키운다. 그럴 때 돼지 키우면 수입이 얼만지 계산하고 자원하는 것, 이건 화목제 아닙니다. 원인이 자기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식당내고, 치킨 집 내고, 이발소 하고 할 때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목사를 부릅니다. 가게 열었으니까 기도 좀 해달라고. 그게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자원제, 서원제 쯤 돼 보이는데 그건 아주 얍삽한 짓이에요. 차 샀다고 안수 기도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건 자기 포부가 있어서 문제에요. 포부는 자기의 소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너무 살았어. 펄펄 살았어.
자원제, 서원제는 뭐냐 하면, 공무원하다 촌에 가서 돼지 치면 전에는 주께서 공무원 일시키다가 이제는 돼지 키우는 일시키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게 바로 자원제입니다. 돼지 키워서 얼마 남고 수출하고 이게 아니고. 전에는 공무원하다 죽이다가 이제는 남은여생을 돼지 키우다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죽어도 괜찮으니까. 목숨 둘이면 귀찮잖아요. 하나를 버리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꿀릴 것 없고, 두려울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갖다 버리는 거예요.
그게 번제였고, 그 다음에 소제, 속죄제, 속건제 되는 겁니다. 자원제, 서원제 드리는 이것이 주님이 구원해주신 결과로 하게 되면 제물에서 기름이 나오는 거죠. 그 기름을 드리게 되는데 그러면 다른 제물과의 차이는 뭐냐 하면, 화목제 드리면서 뭘 아울러 생각하느냐? 제사장 몫을 챙기고 그 다음에 너희도 먹어라. 이 말은 뭐냐? “나도 먹을게.” 하나님 자신도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파티라고 한 거예요. “내가 주는 음식을 너도 맛보게 해줄게.” 그 전에는 음식을 일반 제물을 화목제물 외에는 일체 맛을 볼 수 없어요. 드리게 되면 제사장이 먹었는데 제사장이 맛있는 것 그냥 먹는 게 아니에요. 제사 드리고 난 뒤에 먹게 돼있어요. 속건제나 속죄제.
그것이 응식, 하나님의 음식, 하나님의 식량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먹는 음식의 맛을 동일한 미각으로 먹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걸 맛있게 잡수시는구나, 하면서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그게 뭐냐? 숯불갈비, 불탄 것. 하나님은 죽음의 맛을 기쁘게 잡수시는 거예요. 죽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맛있게 먹질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게 우기는 것은 죄 때문에 착하고 있거든요. 그 착각, 오류는 안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었다 치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안 받아요. 죽은 놈이 죽었다고 했다고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려준 흠 없는 아무 죄도 없는 내 아들이 흘린 그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예요. 그걸 먹는 식으로 제사제도의 제물에 규칙으로 조항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만 받는다. 또는 레위기 식으로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음식만 먹는다. 번제 같으면 숯불로 한 거죠. 하나님이 흠향하는 양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방식이 드는 제사 거제. 흔드는 제사 요제. 거제, 요제의 특징은 몽땅 다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너희들은 손대지 마.
그런데 화목제를 드린 그 날 다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둘째 날, 셋째 날까지 음식을 남겨놓으면 안 됩니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화목제 안에 의미가 굉장히 많아요. 암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파티 의미니까 제사 끝, 제사 완료됨, 그런 뜻이기 때문에 뭐든지 같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암수 관계없어요. 다 식사용이니까.
그런데 화목제 제물은 7장 15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 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절에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 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그린 자에게도 예물답지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그러니까 제사가 언제 끝나느냐 하면 먹은 것까지 제대로 먹어야 제사가 끝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이런 뜻이 있어요. 그날에 먹는다는 말은, 성경에서 하루와 하루 사이에는 저녁이 끼어있습니다. 이 스케줄은 인간이 정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창조 원리원칙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요, 둘째 날이요 이렇게 되잖아요. 첫째 날, 둘째 날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 안식일의 완성까지는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123456 이 시간은 안식, 또는 완성에 종속된 시간이에요. 123456 이렇게 된 것은 종속된 시간을 1과 2, 2에서 3 이걸 끊어줘야 돼요. 끊어줄 때 7일째 완성이 되지만 첫째 날 되고, 저녁이 되고 하는 이것이 바탕이 같은 원리로 깔려있습니다. 피조물은 일체 창조세계에 대해서 자기 하루치 밖으로 벗어날 권한이나 내일을 기대할 자격이 없어요. 오늘 창조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고, 내일, 모레 창조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완성과 연계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날 걱정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만 한 것이 아니고 창조한 것을 이끄시는데 그 목적이 완성을 향하여 다 필요에 의해서 집결해서 끌어주고 있어요. 지금도 끌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분은 창조주밖에 일 안 합니다. 다른 사람은 일이라는 움직이는 벨트에 얹혀서 이동할 뿐이죠.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직업을 선택한다, 배우자를 선택한다 하는데 사실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철이 없어 모르는데 주님께서 배우자 선택할 때 몇 명을 내미는 식이에요. 선 볼 때 보자마자 저쪽에서 날 잡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주어진 모든 것이 남들 보기에는 별로라고 하는데 그 사람한테는 저 여자 아니면 안 된다고 설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무관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의 활동까지.
피조물은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주와 관련돼 움직이게 돼있어요. 그런데 마귀는 창조주와 관련성을 극구 부인하고 너의 미래는 네가 하기 나름이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너의 미래는 찬란하게 펼쳐진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교육받아 온 거예요. 양육 받았고. 이번엔 제대로 하란 말이야, 라고 꾸중을 듣고.
공무원 시험 두 번 실패했는데 세 번째 됐다. 떨어졌을 때 기분과 세 번째 공무원 합격했을 때 기분이 전혀 달라요. 공무원만 되면 하늘을 날 것 같지요. 막상 돼보세요. 주어진 업무 때문에 이것 말고 개인 사업하면 안 될까? 합격 된지 육 개월도 안 돼서 공무원 월급 얼마 안 되는데 다른 것 해서 돈 벌면 안 되나. 그러지 말고 진득하니 붙어있으라고 이야기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으면 미리 예상한 것은 전부 헛방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이틀, 사흘을 예상하는데 막상 그때 되면 예상 못한 예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시간, 날짜는 끊어집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화목제에서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구분된 시간까지 화목제에 개입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거예요. 하루는 사건입니다. 하루치 산다는 것,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주께서 하루치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폭이 좁아요. 서원은 자기 목표가 있어요. 하루치를 늘입니다. 그럼 이틀이 돼요. 오늘 서원하지 않잖아요. 내일, 미래는 이렇게 하겠다고 서원해서 제사 드려요. 그러면 하루를 더 늘여줍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에요. 그 다음에 사흘째 한다는 것은 김치냉장고입니다. 두고두고 먹어야지, 이것은 광야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딱 이틀 치만 허락됐어요. 평시에는 그날 먹어야 되고 안식일 앞에 두고서는 이틀 치 줘서 먹게 하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광야에서 양육 받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에요. 하루만 살다가 죽으란 말이 아니고, 네가 사는 것은 너를 위해서 생명이 부지되고 있는 게 아니고 창조주를 위해서 오늘도 하루 꾸역꾸역 너의 원함과 상관없이 계속 살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이어져가는 것은 우리의 소원입니까? 주님이 스스로 결정한 자기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걸 화목제 드리면서 그 취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드려야 돼요. 그냥 시키는 대로 안 먹었습니다. 잘했지요. 이건 화목제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레위기 3장을 다시 봅시다. 화목제물 머리에 안수하게 돼있습니다. 2절에.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누가 안수하느냐? 여기서 안수하는 것은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게 돼있지요. 제사장은 잡는 건데. 여기서 내가 양에 안수한다. 이걸 요새 실습하려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강아지 붙들고 하면 돼요. 그것도 사랑하는 강아지, 비실비실한 강아지 말고 침대에서 같이 자는 강아지에 안수하는 거예요. 안수하면서 나의 운명을 너한테 넘기니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그것은 주님께 맡겨진 나의 운명과 동일하다. 이렇게 안수하는 거예요.
안수한 제물을 제사장한테 가져가지요. 그러면 이 강아지 예쁘네. 하고 키워야지, 하는 게 아니고 제사장은 킬러지요. 죽인단 말이죠. 요새 힐링이라 하잖아요. 최고의 힐링은 킬링입니다. 내 정신을 치료해야 되겠다. 최고의 치료방법은 자기 생각 안 하는 게 최고에요. 내가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겨져야 돼요. 안수는 존재를 평생 붙들던 내가 드디어 주께서 일으킨 사건 속으로 나를 넘겨버린 겁니다.
정미소나 방앗간에 가면 파쇄기 있지요. 고추를 고춧가루 만들 때 고추를 집어넣으면 다 부셔지잖아요. 앞으론 그렇게 하지 말고 고추에 안수해서 파쇄해서 가루로 되어 나오는 걸 목격해보세요. 그 방앗간이 성막이에요.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내가 사건 속에 들어가면 그 사건의 주인공은 딱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지 더 이상 내가 주인공 되는 건 끝나 버립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굉장히 궁금한 게 있을 거예요. 교회 다닌 지 육 개월 뒤에 합니까, 일 년 뒤에 하면 됩니까? 이것은 제가 방금 이야기한 사건의 취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사건은 늘 터지게 돼있어요. 서원제나 자원제는 필요할 때마다 사건화 되어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언제 화목제 같은 취지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화목제다운 사건이 우리 인생에 일어납니다. 터지게 돼있어요. 소제도 번제도 마찬가지지만. 나라는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자식은 어떻고, 남편은 어떻고, 아내는 어떻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방앗간에 와 있잖아? 주님이 주도한 사건에 말려들었잖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화목제라는 기계에 걸려들어서 주님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양식이 돼요. 주님의 산 제물이 됐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갖다 바치기만 했는데 산 제물이 되게 하시는 모든 과정과 절차는 주님에 의해서 그걸 사건화 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만약에 2017년 2월 6일이라 합시다. 2월 6일에 이런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2월 7일부터 3월 2일, 3일 걱정 하나도 안 됩니다. 왜냐? 이미 사건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때 되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돼요. 3월 3일에 곗돈 타는 것도 몰라요. 3월 10일에 새마을금고 적금만기 된 것도 몰라요. 그런데 만약에 2월 6일에 사건 됐다고 하는데 갑자기 3월 5일에 새마을금고 적금만기가 걱정이 된다면 그 날까지 안 죽은 나의 존재의 시간이 돼버려요. 그러면 사건 속에 들어가다가 발 빼고 존재의 바다에 다시 나온 게 됩니다. 곗돈 타고 3월 10일에 사건 해야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건이라는 게 인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성도는 이런 사건이 수시로 터집니다. 예를 들어서 4월에 공무원 시험 치는 아들이 있는데 되면 좋겠는데 안 될 경우에 학원비 계속 대줘야 되나? 낙담해서 죽겠다고 이불 뒤집어쓰게 되면 가게라도 하나 차려줘야 되나? 또 됐다고 치면 원서를 서울로 내서 방을 얻어줘야 되는데 방값 걱정이 되고. 이런 걱정하는 것은 자기가 주도적인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사건이 되면 아들이 시험 되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고, 떨어져도 사건이고. 그건 되고, 안 되고 발걸음 세시는 게 내가 아니라 공무원시험이 문제가 아니고 내일까지 내 딸이 목숨이 부지되는지 안 되는지 오늘밤에 잠자기 바쁜데 그건 내 선에서 떠난 일이 돼버려요. 만약에 내 선에서 떠난 일이 안 되면 범사에 감사가 안 됩니다. 걱정만 누적이 돼요. 수학에서 적분처럼 쌓이고 쌓여버려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존재가 돼버리면 이렇게 돼요. 우리 딸 공무원시험 합격하면 그때 감사드릴게요. 그게 무슨 서원이고 자원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 자식은 주님의 자식이 아니고 내 딸이 되면서 딸자식이란 나를 기쁘게 만드는 정신적인 양식이 돼요. 주님의 양식이 아니고 나를 위한 딸이 된다니까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 인생 보람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딸이 되니까 그 딸의 주인은 내가 되고 창조주도 아닌 내가 딸의 창조주 역할을 해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화목제 드리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사건화 되지 못하고 존재화 되어서 하나님, 서원제 드렸으니까 제 소원 뭔지 아시지요? 속히 이뤄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제사 드릴 경우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 앞에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은근히 자기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채워주시면 좋겠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지, 하면서 제사 드렸겠습니까.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이 법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발각시키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자기 행복을 위해서 준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걸 다 지키고 우리는 못 지킨 죄인인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전제를 깔았잖아요. 이제 좀 감이 오지요.
사람이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여전히 존재 차원에 있지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화목제 드릴 테니까 복 주세요. 이런 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내 말에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 이렇게 돼있지요. 순종하고 안 하고는 본인이 검사하고 본인이 측정하고 본인이 심사하고 본인이 채점해요. 그런데 그 결과가 이스라엘 멸망이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됐는가? 바로 무서운 불 앞에서 살고자 한 게 문제였습니다. 존재를 불에 태우면 사건이 되거든요.
그럼 불에 태우려면 보일러실이나 사우나 들어가든지 해야 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있잖아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알려주게 되면 우리가 까부는 것도 우리다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처리해주십니다. 까불어봐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를 주께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 뛰게 한 까불기, 촐랑대기가 돼버려요. 십자가를 위한 촐랑대기, 그것도 많이 촐랑대기, 정신없이 촐랑대기. 눈만 뜨면 오늘 계획은, 내일 계획은, 오늘 목표는, 내일 목표는, 오늘 이것 달성하기, 내일은 저것 달성하기. 눈만 뜨면 그 생각합니다. 밑바닥에는 화목제의 사건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그 위에서 내가 잘되는 쪽으로 하나님과 협상에 나서고 타협에 나서죠.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마지막에 홍수가 난다 하지요. 그 이야기 들어보세요. 홍수에 나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하지요. 홍수가 언제 나지요? 오늘 강의 중에 제일 길게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은, 항상 홍수를 전제로 하고 그 모습을 본다는 거예요. 그 모습이 바위 위에 있는지, 모래 위에 있는지 늘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시간 요소를 빼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홍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네가 어떻게 인생을 살든지 간에 홍수가 일어났다고 치고, 이것도 사건이거든요. 이건 하나님만 알고 있는 거예요. 그 홍수 사건에서 너는 어떻게 참여되고 있는지 보는 식으로 너의 촐랑대는 인생을 내가 두고 볼 거야.
고린도전서 3장에 하나님의 상급이야기 나올 때 그리스도 의로 짓지 않은 것은 다 불에 태운다 하지요. 우리 같으면 불에 태우지 말고 짓지 말라고 할 텐데 불에 태운다고 하시면서 계속 그걸 방치하시고 그냥 지켜보시잖아요. 그건 거기에 의미를 둔 게 아니라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 반석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됩니까? 마지막 때에 그런 게 아니고 2050년까지 살아도 만약에 2월 6일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걱정이 안 된다니까요. 그럼 2월 7일 되면 걱정 없네요. 2월 6일까지는 그래요. 2월 7일 돼서 아침에 눈을 떴잖아요. 또 촐랑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은 뭘 해야 되고, 또 촐랑대요.
촐랑대봤자 노을 지고 해 넘어가면 본의 아니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티비 보다가 사망에 이릅니다. 잠이라는 사망에 이르면 의식을 잃어버리죠. 아침 여섯 시 쯤 되면 다시 깨납니다. 또 촐랑대고. 하루하루 그날 걱정은 그날 하도록 주께서 하루 단위로 끊어놓으신 거예요. 하루하루가 우리 보기에는 인생이지만 사건입니다. 그 사건과 사건의 구슬을 이으면 그게 주께서 만든 내 인생이 돼요. 주께서 인도하신 내 인생, 주께서 피 묻은 밧줄로 잡아당긴 내 인생.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살까요? 그냥 사세요. 그냥. 어차피 내가 원해서 내가 결정한 것은 주께서 몇 가지 골라잡아 내민 거예요. 이것 할래? 이걸 할래? 울산에 사는 소시민에게 내일 3월 4일에 목성 위성 언제 만들 거야? 이런 계획 안 줍니다. 그건 미국 나사 기술자한테 주께서 맡긴 거예요. 사드 문제 어떻게? 사드 문제를 여기 사는 평범한 교사한데 그런 문제를 냅니까. 우리는 주께서 맡긴 일종의 주님의 서원제, 자원제가 되니까 맡겨진 대로 그냥 살면 돼요. 살면서 촐랑대고 까불면 돼요.
촐랑대고 까불다가 성령이 안 와서 사건화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사건화 안 되면 지옥 가는 것도 사건이니까 결국 사건화 돼요.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네가 죽는다는 자체가 이미 사건이 된 상태에서 우린 죽음이란 사건을 향하여 지금도 질주하고 있어요. 돌진하고 있어요. 머리 처박고 있어요. 브레이크 없는 벤츠 타고 시속 200킬로로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자기 연출에 몰입하다보니까 자기는 마치 50년 더 살고 미래가 더 살아야 될 시간이 남아있는 것처럼 착각하지요. 그러다 음주 운전하던 차에 받혀서 역주행하는 차에 받혀서 집안에 부모 자식 다 있는데 지는 먼저 하늘나라 가고. 그제야 사건이다, 이럴래요? 이번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다. 인간에게 불행이란 말을 붙이지 마세요.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에요. 오히려 구원받을 것만 다행이지 나머진 불행입니다.
오죽했으면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바쳐야 될 제물입니다. 이 말은 늘 죽음으로 주 앞에 드려야 마땅한 죄 많은 제물이에요. 내 존재밖에 모르는 것을 화목제물 되신 주님께서 안 거둬도 되는데 거둬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말씀을 다 지켰음을 알려주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의 간격이 그 순간에는 좁혀집니다. 같은 사건 안이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나니, 했지요.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세상은 내게서 못 박히고.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나는 매일같이 그리스도 사건 안에 놓여있다. 내가 하는 것이 내 일로 보이나?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렇다면 화목제물에서 어떤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 7장 21절에 보면, 부정한 사람은 화목제물을 먹을 수 없다고 돼있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아무 물건이든지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라라”
자기 백성에서 끊어진다 했는데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항상 육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혈통을 그리스도와 연계해서 만들어냅니다. 이게 언약적 혈통인데 만약에 부정한 것을 먹으면 언약에서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내 자식 아니란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려면 부정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하지요. 부정한 짓이다, 아니다. 이걸 누구한테 검사 받아야 되지요? 자기 행동의 최종 검사를 본인이 하잖아요. 부정한 인간이 자기 행동을 부정하다고 나쁘게 하던, 좋게 하던, 회개하던, 까불던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화목제물을 드릴 수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었네요? 천만에 말씀. 인간은 뭘 해도 부정하다며?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제사장들.
제사장은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은 농사지으면서 무슨 짓을 해도 자기 죄 알고 양 들고 와서 바치면 돼요. 그러나 제사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행동만 삐끗해도 즉사에요. 그냥 죽어요. 그 자체가 사건화 됐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은 다 죽어야 되는데 누구 때문에 사느냐 하면, 거룩한 제사장 나라에요. 제사장이 계속해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줍니다. 아침저녁마다. 일 년 단위로 용서해줘요.
그렇게 용서해줄 것 같으면 부정한 자는 왜 있느냐? 오히려 반대로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이 말씀이 있어줘야 평소에 내가 하는 행동이 제사장 없어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보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나는 이제 예수 없이도 나름대로 의롭다는 소리를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듣고 복음을 알면 알수록 예수 외에는 이 세상에 귀한 분은 없네, 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건화에서는 늘 유지돼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사건화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늘 생각하는 게 아니고 엉망진창, 엉망진창이라고 해서 자꾸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막 살라고 해서 교도소 가는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 중심으로 사는 것, 모든 걸 자기 좋으라고 사는 본성, 이게 막 사는 거예요. 기도를 해도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 막 사는 거고, 헌금을 해도 30배, 60배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는, 내 가정 잘 되기 바라는 이게 막 사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막 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화목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국 화목제는 주께서 파티를 열어서 내가 준 음식 먹어보니 맛있지? 맛있습니다. 사건 안에서 먹어보니 어때? 사건 되니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을 유지하는 게 화목제에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화목제를 언급합니다. 신약성경 392페이지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돼있지요. 이게 뭐냐? 그 뒤에 보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 됐다 했잖아요. 아들을 보냈다고 했잖아요. 화목제물 되려면 필수코스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이것이 항상 전제돼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뿐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화목제물이 아니고 주님이 화목제물인 것을 주님의 취지가 이제는 우리의 취지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서 매일같이 주님의 사건 안에 놓여 사는 그 감사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