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9. 선지자의 할 일 (대하 25:14-16) 본문
이근호
39. 선지자의 할 일 (대하 25:14-16) 25:14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25: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나아가 가로되 저 백성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25:16 선지자가 오히려 말할 때에 왕이 이르되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가 그치며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지금도 쉴새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원칙으로 일하시는 이 시간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지난 시간에 아마샤라는 왕이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왕이여 힘으로 전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고 전쟁하시기 바랍니다. 북쪽 나라 사람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셨는데 그들을 다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적이 비록 더 많은 수의 군대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승리케 합니다."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아마샤 왕이 기특하게도 그 말을 곧이 들었습니다. 고용한 용병 10만 명을 돌려보내지요. 과연 하나님께서 아마샤와 함께 전쟁에 나가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자... 이쯤 했으면 이제 아마샤가 정신을 차리고, "야 하나님이 승리케 하셨구나.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14절에 보니, "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제 승리했으니까 더 이상 거칠 것도 없고 원하는 것을 채웠으니까 아쉬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또 한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왕이여 왜 우상들을 섬겼습니까? 왜 신들에게 기도합니까?" 이렇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16절에 보니 아마샤 왕이 하는 말이 "언제 내가 너에게 우리 일에 관여하라고 참모로 삼았느냐 너 만일 네 말을 안 그치면 나한테 맞는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선지자가 하는 말이 "승리는 하나님이 하셨는데 왜 왕은 그 승리는 하나님의 몫으로 영광 돌리지 아니하고 왜 우상에게 돌리는 마음으로 바뀌어졌습니까 그 이유를 대 보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뭐 하나님이 싫어졌다든지, 하나님을 잘 몰랐다든지, 내 마음이 교만했다든지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어쨌든 답변을 해야하는데 그 답변을 하지 않고 오히려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네가 누군데 감히 나에게 조언을 하느냐" 이렇게 나오더라 말입니다. 어떤 신자에게 불신자 아버지가 있는데 술도 먹고 절에도 간다고 합시다. "아버지여 왜 아버지는 하나님을 안 믿고 술을 드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아버지 답변이 "이차 저차 해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술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그 내용에 대해서 답변이 나와야 하는데 "네가 뭔가 감히 나에게 덤비냐?" 라는 식으로 답변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묻는 질문 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고 질문 고사하고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다"라는 거죠. 지금 아마샤 왕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자기가 하는 행동 이외에 그 어떤 간섭도 거부하겠다는 말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이 하나님보다 더 나은 면이 이런 저런 것도 있기에 우상을 대신 섬긴다는 것이 아니라 왕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우상을 골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내가 말을 조리 있게 못해서 상대방이 내 뜻을 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기 외에 다른 신은 없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결정한 거예요. 아마샤 왕에게 분명히 나름대로 신앙이 있는데 그 신앙의 내용이 다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여 신앙을 하고 있는 반면에 아마샤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자기를 믿는 것을 내용으로 한 신앙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없고 믿음 생활 안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믿는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 왔으면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되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결정이나 자기가 세운 교회나 자신의 행함을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핑계대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날 설득해 봐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지자가 만약 우리에게 와서 하는 말이 "아무개 집사님,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놓고서는 왜 당신은 우상을 섬깁니까?"라고 한다면 이 질문에 대해 만약 "예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좋아 보입니다."라고 답변을 했다면 일단 선지자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네가 뭔가 감히 나에게 잔소리하느냐"라고 나온다면 선지자 직 자체도 인정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마샤 왕이 이런 식으로 나왔습니다. 즉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의 주체자는 다름 아닌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아마샤 왕 내가 승리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마샤 왕에게 계속 나타났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원래 승리자와 패배자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이 이미 전쟁에서 승리자 편에 서지도 못하고 패배자로 전락될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예수 믿고 승리했다"고 말할 때 과연 이것이 승리일까요? 뭐가 승리이냐 하면,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나는 단지 덤으로 받았을 뿐입니다"라는 것까지 나가야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승리입니다. 그런데 흔히 교회에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역시 내가 믿음 좋기는 좋은 모양이구나 그렇지 내가 기도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지. 내가 기도 안 했으면 이런 성공은 있을 수도 없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 앞에 패배 당하고 있는 중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승리를 낚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 편에서 확인된 사람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 편에서 특별한 누구 하나를 왕에게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승리가 너에게도 승리인지 패배인지를 확인하려고 말입니다. "아마샤야, 네가 품고 있는 그 마음과 지금 너 앞에 나타난 선지자의 마음, 이 두 마음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되며 어느 마음이 과연 승리자의 마음인가"를 한 번 비교해 볼 것입니다. 지금 전쟁은 누구하고 전쟁했다고 생각됩니까? 아마샤와 에돔이라는 나라와의 전쟁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에돔이라는 나라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가 난데없이 씩 끼어 들면서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낚아채겠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전개되는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하고 싸우나 하면 아마샤 왕하고 싸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상에서는 선지자하고 왕의 싸움으로 보이겠지만 말입니다. 아마샤 왕은 조금 전까지 에돔 군사하고 싸우다가 이제는 하나님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멱살 붙들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는 말이 "그래 한 번 해봅시다. 누가 이기는지 말입니다."라고 나선 겁니다. 이게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선지자가 그치며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즉 "너 맞는다?"라고 선지자가 나옵니다. "전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 졌어요"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적이 에돔 만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적이 아닙니까? 그 뒤에 아마샤가 교만해서 이런 객기를 부립니다. "내가 천하를 제패했으니까 이 차에 아예 북쪽 나라까지 쳐버려?" 하고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야 북쪽 왕이여 누가 센지 한 판 붙자" 이렇게 하니까 북쪽 나라 요아스 왕이 하는 말이 18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니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19절에 보면, "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 도다 네 궁에 편히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한창 주가가 올라있는 아마샤 왕이 이 말을 듣겠습니까. 이 경고를 듣지 않고 북쪽으로 쳐들어가는데 이 전쟁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합니다. 20절에 보니,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저희가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붙이려 하심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교만하고 건방졌던 아마샤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선지자들에게 대들었던 그 결과입니다. 선지자에게 대들었던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대들은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사 아마샤 왕으로 하여금 북쪽 나라 왕에게 패배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중요시합시다. 하나님이 이제는 아마샤에게 본 때를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아마샤의 건방의 도가 넘치도록 만들어 가지고 북쪽 나라에 부딪쳐서 처절하게 망가지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아마샤 왕은 22절에 보니 사로잡히게 되고 성전에 있던 보물들을 다 가져가 버리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도 볼모로 잡아 가버리게 하십니다. 그 때까지 아마샤 왕은 아직 죽지는 안 했는데 27-28절에 보면, "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 한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 열조와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언급해 주시기 위함입니까. 우리가 흔히 '하나님이 내 편이다 아니다'를 무엇으로 판가름 하고자 하면 '내 꿈이 현실화되면 하나님은 내 편이고 현실화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다'라는 기적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다'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깥을 살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꿈과 비젼대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살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봐야 합니까? "내가 얼마나 죄인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가"하는 것을 절감하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실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승리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내가 너무 하나님한테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내 힘으로도 살 수 있는데…"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고 또한 실패자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어려움이 생기면 사실 조바심이 나서 교회를 좀 더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나에게 재수 있다 없다'를 바깥 현상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측정하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걸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 와서면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꾸 바깥 현상만 꿈꾸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주시는데 정작 그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 구원에는 탈락해 버리는 비참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의 쪽에 한 번 서 봅시다. 16절을 다시 보면,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분명 눈 앞에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힘보다도 죽어도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힘을 더 의지하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더 느껴야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마가 쥐고 있는 세상의 무수한 권력과 부귀 영광, 그런 것들 앞에서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힘을 빼고 서 있는 자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비록 내 힘은 뺏지만 그러나 내 뒤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이 있다. 따라서 네가 가진 힘에 대해 나 기 안 죽는다"라는 마음입니다. 그런 당당함으로 나서는 자는 지금 자기의 용기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투지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본 받아라 고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나라가 아마샤 왕으로도 망하지 않는 것은 이런 선지자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반열에 성령을 통해서 참여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용히 살기를 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약올리면서 희긋희긋 나타나더라도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 졌다"는 것을 파악 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어나는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도와주고 안 도와 주고를 결정짓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게 하옵소서. 문제는 우리 마음인 줄 압니다. 하나님 계시기에 기뻤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겁이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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