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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1. 이스라엘의 횡포와 저지 (대하 28: 8-1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하

41. 이스라엘의 횡포와 저지 (대하 28: 8-15)

정인순 2017. 5. 2. 11:48

 

 

이근호

41. 이스라엘의 횡포와 저지 (대하 28: 8-15)

 

28:8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28:9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저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를 진노하신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28:10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를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28:11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가 형제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28:12 에브라임 자손의 두목 몇사람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일어나서 전장에서 돌아오는 자를 막으며

28:13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 들이지 못하리라 너희의 경영하는 일이 우리로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하매

28:14 이에 병기를 가진 사람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28:15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이 만고의 진리 줄로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활동하고 출렁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사는 우리 박사동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불쑥 우리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국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느 동네, 어느 나라 사람을 먼저 구원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을 만날 때 무턱대고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건질 때 나름대로 원리 원칙을 가지고 만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그 다음에 오늘날 신약 시대에 우리 박사 땅에 사는 우리를 하나님이 다루실 때 어떻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두 시대를 서로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 여호와 섬겼는것 내가 알 필요가 뭐가 있나. 나만 예수 믿고 천당가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내 하나님 내가 갖는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도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어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대목입니다. 뜻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거부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다 나라가 범죄를 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못된 짓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자... 여기서부터 상당히 중요한 일이 나오는데요 그 벌을 누구를 통해서 내리시는가 하면, 유다 나라보다 덜 훌륭하고 도리어 더 악한 북쪽 이스라엘 나라한테 시켜서 실시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까요? 더 쉬운 예로서, 어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벌받을 짓을 했다고 합시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저주는 없습니다. 사랑의 채찍은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그 가정을 괴롭게 하시는가 하면 더 모범적으로 신앙 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을 욕하고 다니는 불도가 심한 가정을 통해서 기독교 가정을 징벌하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에게 이런 하소연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매사에 잘 풀리고 예수 믿는 저희들은 왜 만사가 안 풀려나갑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그것도 왜 불교신자를 통해서 기독교 신자가 욕 얻어먹게 합니까?" 우리가 만약 성경도 안보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런 오해한 점이나 우리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보고 있는 점을 수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실 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그 이유만 잘 알고 계신다면 앞으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아하, 하나님께서 정말 한결같으신 분이구나"하고 더욱 더 하나님에게 더 신뢰성을 갖게 됩니다. 왜 신앙 나라 유다 나라가 잘못했는데 왜 신앙이 없는 나라로 하여금 덤벼들게 하는가요? 지난 시간에 아하스 왕의 군사 12만 명 죽었다고 했지요. 참 많이도 죽었습니다. 8절에 보니 죽은 군사말고 따로 노예로 팔려 가는 사람이 20만 명입니다. 북쪽 나라 사람이 남쪽 나라 사람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고 빼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승리에 도취되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렇지 이 남쪽 나라 사람들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너희들의 우리들의 노예가 되어도 마땅해.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9절에 보니 북쪽 나라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오뎃이었습니다.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저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를 진노하신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이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10절에 보니 다음과 같이 중요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를 삼고자 생각하는 도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함이 없느냐"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북쪽 군사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착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더 악한 저 남쪽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우리가 부려먹게 하셨는 게 분명하다"하고 기분 좋게 오는데 오뎃 선지자가 딱 가로막고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왜 너희 형제들을 왜 끌고 오고 있느냐?"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범죄 함이 없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 참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북쪽 나라도 범죄하고 남쪽 나라도 범죄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북쪽 나라는 가만히 두고 남쪽 나라만을 징벌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겁니까? 남쪽 나라가 재수가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남쪽 나라를 더욱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려 버려 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는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그냥 '내어 버려 두는' 것입니다. "네 마음대로 한번 살아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내려버려 두시는 쪽에 서고 싶습니까 아니면 일일이 간섭하시는 쪽에 서고 싶습니까?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만 징계를 하고 징계를 하지 않는 자는 사생자라 곧 내놓은 자식이라는 겁니다. 부모님들이 남의 아이들 담배 피우고 나쁜 짓 해도 내어버려 두잖아요. "저희 집에 부모 있는데 내가 왜 간섭해"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나쁜 짓 하면 부모가 남들로부터 욕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네 죽고 내 죽자'하는 식으로 달려들어 죽자고 팹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친아버지가 제 자식이 잘못 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는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말로만 형식으로만 아버지,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아버지이시는 겁니까? 우리 가정에서도 잘못된 자식이 용납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늘 나라에서 어떻게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담긴 뜻은 이렇습니다. 선지자의 눈으로 볼 때에 포로잡고 의기양양하게 오는 북쪽 나라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도리어 포로 잡혀 고생스럽게 끌려오는 남쪽 나라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고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잡은 쪽이 오히려 잡힌 쪽 사람에게 배워야 합니다. 선생님한테 매 안 맞는 학생이 선생님한테 매맞는 학생에도 오히려 한 수 배워야 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때려 주세요"이렇게 나와야 참 신앙을 아는 자입니다. 교회 나오는 가정 중에서 가정 불화가 일어나 이혼을 했다 할 때에, 옆에서 "아이고 고소하다. 분명 하나님에게 순종 안 해서 저주가 떨어진 거야"하고 놀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가정도 맞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뭐 별 겁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라고 오는 본문이 기록된 것입니다.

제가 하박국 3:17-18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 보면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하고 외양간에 소하고 반드시 병행될 필요성이 없다는 겁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사랑은 변함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외양간의 소가 없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날 버렸다고 여기지 말란 말입니다. 밭에 소출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날 지옥 보내시는 모양이다 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밭의 소출이나 우리의 양보고 내 인생을 걸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너의 영원한 기쁨의 원천은 구원의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본문이 항상 성경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조그만 일만 벌어지면, "하나님이 날 미워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날 저주하시는구나"하고 오해들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은 저주받지만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 하나님이 축복 중에 있구나 하고 여기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아, 저것은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보고 하는 일어난 일이다"라고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사기 6: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여기 보면,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믿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 미디안 나라는 하나님을 안 믿는 나라입니다. 자... 하나님이 계시고 이 두 나라가 붙었다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누가 이겨야 말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나라가 이겨야 하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는 져야 마땅하지요.

이 본문에 보니 반대로 미디안 나라가 이기고 이스라엘이 지더라 이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했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눈에 보이는 현상 가지고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지레 짐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을 보세요. 우리가 평소에 "이상하다, 이상하다"라는 여기는 것에 대한 해답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의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상식 밖의 이런 일이 항시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을 바꾸느냐? 하박국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지만 오늘 본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14-15절에 보니, "이에 병기를 가진 사람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누가 승리한 것입니까? 처음에는 북쪽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야, 우리가 유다 나라를 이겨서 그 사람들을 포로 20만 명을 얻었으니 이는 우리가 이런 승리를 가져도 마땅하기 때문에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이다"라고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오뎃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짜 뜻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야, 우리가 이래서는 되겠는가 저들이 무슨 우리보다 죄를 더 지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학대받는 것이 아니구나. 저들이 죄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학대라면 저들 못지 않게 죄를 지은 우리들도 역시 같이 학대를 받아야 한다. 자..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자. 어떻게 실행하느냐.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자 벌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더라도 사랑은 우리가 하자. 하나님께서 전쟁에 승리케 하신 우리에게 선지자를 일부러 보내신 것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면서 그 20만 명이라는 포로에게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고 치료해서 그들을 자기 소유의 노예로 삼지 않고 도로 고향 앞으로 돌려보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날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그 증거가 무어냐? 바로 마땅히 죽어야 될 것은 우리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때려야 될 저주의 막대기를 예수님의 손과 발에다 내리시고 그 대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일관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십니다. 늘 변함 없는 이 사랑이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아니면 엉뚱한 생각에 잠겨서 세상 현상에 놀아나는 그런 생활을 하는지 자신을 점검합시다. 내가 정말 믿는 자인지,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항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석하는 저희들이 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진정 어떠한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지, 하나님이 하시는 손길은 어떤 사랑의 손길인지 우리가 자주 자주 잊어버리고 잃어버립니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을 남에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