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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9강 [십자가의 파급효과]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6여름(마태복음)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9강 [십자가의 파급효과]

정인순 2016. 8. 6. 17:22

 

 

제9강 (십자가의 파급효과) 녹취 - 정석훈 목사


 음성9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구원된 사람만 갖고 있는 인식이지 구원 받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인식자체도 가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된 후 뒤돌아 보면서 어디서 구원되었는지를 보니 십자가의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구원을 시도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이유도 없이 지옥가고 이유도 없이 천국 가는 하나님의 원칙이 깨져 버립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결정된 후 뒤돌아보니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구원 받지 못해 지옥 가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극히 어리석은 방식이 됩니다. 십자가 자체가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기에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도 없이 주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은 애초부터 주님이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그 마지막 카드에 대해서 이의를 건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처음 강의 시작할 때 우리가 인식의 관점을 정리해야 되고 시차적 관점(과거-현재-미래)을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미래-현재-과거). 온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별의 움직임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8강까지 마태복음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능력, 권한 밖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겠다는 시도 자체가 구원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구원된 사람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주의 일이기에 느긋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를 ‘하나의 상징’이라 했습니다.


상징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실체는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실체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상징적 관계로 엮여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전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입각해서 이 모든 자연세계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7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치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되겠지요.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그동안 우리는 내가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을 통해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필요도 없는 것들을 주님께서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수많은 기둥이 큰 판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공간 천국에서 우리가 산다고 할 때에 아래에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안정적이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께서 이 기둥들을 무너뜨립니다. 주님께서 무너뜨리는 것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안에서 안심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믿지 말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푸셔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기둥들을 무너뜨려 주십니다.


무너뜨려야 하는 기둥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성전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태복음 24장에서 작살내시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말은 성전에 종사하는 직업종교인들인 제사장이나 성경 가르치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 장로 집사들입니다. 그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성전이 무너지면서 성전을 유지 보수 개선하고 성전을 지탱하고 정신적 지주로서 이것을 붙들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파급시키는데 종사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성전이 무너집니다.


두 번째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24장 10-11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절대로 사람을 믿어 보증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절대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의지하거나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외롭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 누구 없소?’ 자꾸 찾지 마세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람마저 집단 매장지에 매장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집단 매장지입니다. 이 매장지의 특징은 시신이 있는 무덤입니다. 여기에 비해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 무덤은 시신이 없는 무덤입니다. 이것이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빈 무덤이 아닙니다. 주님이 집단적으로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조치하십니다. 우리도 역시 시신이 있는 무덤의 장소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습니다. 날씨가 35도 넘어가니 실감나지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애굽이라 하고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균질화, 규격화, 표준화 속에서 인간은 더욱 더 고립됩니다. 교재 2페이지에 2. 공포속의 체제에서 ‘규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개성이나 특색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규격화라 합니다. 여러분이 수련회를 마치고 생활공간으로 갑니다. 그 생활공간은 규격화된 공간입니다. 티면 안 됩니다. 티면 퇴사해야 됩니다. 철저하게 책상 스랍처럼 딱딱 맞추어진 그 위치에서 자기 일만하고 돈만 받아 챙기는 그런 체제입니다. 거기 가서 복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평균화, 균질화, 규격화라 합니다. 이것을 못 견디는 사람은 직장에서 튀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도 더러우면서 더러워서 일 못하겠다고 합니다.


교재 3페이지 첫줄을 보면 “평화는 불안 위에 세워지고, 전쟁은 공포에서 힘을 얻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한시적 평화입니다.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전쟁은 공포에서 힘을 얻는다는 말은 회사나 조직이 잘 되기 위해서는 과도한 긴장,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예 중 하나가 학생들 시험입니다. 계속 시험 친다고 몰아세워야 됩니다.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백의 대안학교 가야 합니다. 경쟁을 하기 싫으면 그런 곳에 가야 합니다. 힘을 길으려면 긴장이 있어야 하고 긴장은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성됩니다. 이번 프로젝트 따지 못하면 우리 회사 망한다는 공포분위기가 있어야 됩니다. 공포가운데 전쟁을 해서 힘을 만들어내는 세계가 산 밑에 있는 생활공간입니다.


각 가정은 멀리서보면 정겹지만 가까이서 보면 지옥입니다. 절대 남의 가정 부러워 마세요. 성냥팔이 소녀 동화 있잖아요.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성냥팔이 소녀는 추위에 떨고 있지만 어느 집안 가정은 따듯한 곳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준비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성냥 그으면서 엄마 만나러 가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때에만 있는 이벤트일 뿐입니다. 그 집이나 추운겨울 눈길에 얼어 죽는 소녀나 마찬가지입니다. 동화자체가 공포스럽고 경쟁에 내몰리는 세계에서 어릴 때의 낭만이 약간의 위로가 될까 하여 우리는 자꾸 어릴 때의 동화 같은 신화를 찾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그런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봐 주지 않습니다. 살 처분 합니다.


세 번째는 20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종교적인 습관과 관행을 믿는 것은 가짭니다. 사람의 반복적인 행위는 습관을 낳게 되고, 그 습관은 자신의 윤리체계가 되고 내면화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가치로 울렁거리면서 남이 뭐라고 하면 ‘내가 이정도야!’ 라고 하면서 되받아 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다 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구원자를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마나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는 순간 그 사람을 거짓 선지자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희팔에게 투자할 때 안 믿었습니까?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중국에서 고미술화 들어오는데 이것을 빼낼 수 없는데 빼내어 팔면 열배 받는다고 하는 것을 믿어 많은 부자들이 투자했습니다. 이건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남의 주머니 속의 것을 빼먹으려면 사기 치지 않고 빼낼 수가 없습니다. 교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 반복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성화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해서 계속해서 급수를 높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어서는 안 될 무너질 기둥입니다.


다섯 번째는 과학적인 대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24장29절입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천하없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해와 달과 별들도 무너집니다. 다 무너집니다. 과학이란 절대시간과 절대 공간에서 나왔습니다. 칸트가 철학적으로 이것을 정립했습니다. 절대시간은 우주의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일초의 길이, 일분의 길이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절대 좌표 위에서의 절대 시간관입니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 깨어집니다. 빛의 속도에 따라서 늙어가는 속도가 다릅니다. 이것을 이야기할 때 과학이지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시계를 높은 산 위에 올려놓으면 산위의 시계는 중력에 의해 산 아래보다 시간이 늦어집니다. 차이가 미미해서 잘 모르지만 사실 이것을 통해 이 세상은 중심이 없고 중심이 있다면 빛의 속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현재에는 빛의 속도조차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오십년 동안 과학은 눈곱만큼의 발전도 없습니다. 기능과 기술은 발전되었지만 과학은 발전된 것이 없습니다. 과학의 종말이요 과학의 끝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기자기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일 뿐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가 믿었던 것도 결국은 다 무너지게 됩니다. 과학을 진리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 둘 다 믿지 마세요. 창조론은 진화론의 일부입니다. 창조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됩니까?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철학적 신을 발견하는 것이지 어리석고 미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 위쪽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안쪽에 예수님이 계셔서 남들 보기에 어리석은 모습으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과학적 틀 자체가 무너진다는 미래적 안목이 없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자가 예수님을 믿는 모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과학자체가 진리가 아니요 이것도 죄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십자가를 믿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시간이 깨어져 버립니다. 43-44절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특정 시점적 시간이 깨어집니다. 특정 시점을 기다리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막살면 되는데 주님이 오실 것인데, 징후를 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특정시간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시간속의 한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믿어 봤자 한계선만 확장될 뿐이지 한계선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어떻게 시간을 벗어나요? 철학자 샤르트르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은 시간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입니까?’라고 묻는 자체가 시간 안에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 공간, 성전, 관행, 교회, 인간 다 무너뜨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권력’입니다.


마태복음25장40절 보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는 없는 개념인데 주님께서 발굴해서 찾아낸 개념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본인도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권력)’ 이것은 내가 자신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발굴하는 노력과 애씀에 의해서 나타난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붙이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절대로 자아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평생 나는 나 자신만 믿어 왔는데 그것이 모두 죄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믿기 때문에 ‘나는 똑똑하다, 지혜롭다, 알만큼 알아서 천국 간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짓거리였다는 것이 이미 구원받은 후 십자가 앞에서 재확인 되는 겁니다. 구원을 틀어막은 자가 나 자신이고 주님을 죽인 공모자가 우리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아를 모시고 노는 것이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부터 모든 신학의 지성소를 가보면 ‘나는 복음을 믿었다’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경배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믿었는지 좋은 것은 다 가져 옵니다. 십자가 복음, 언약 나오는데 항상 자신을 의식하면서 하는 이것이 이단입니다.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지성소에 모시고 자기 종교에서 최후에 남을 신자로서 자신이 신이 되고 자신이 마지막 남은 신도가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형식을 띤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큰 소리 칩니다. 불교가 기독교를 향하여 ‘형제여!’라고 합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불교인도 형제라 합니다. 숨겨진, 은익적,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착하게 살면 한 형제로 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요 그 진리의 내용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길은 여러 갈래라는 겁니다. 그러니 꼭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인류는 하나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we are the world.’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결국은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그 방식을 30년 40년 동안, 목사하면서 장로하면서,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잉태한 것은 내가 곧 신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냅니다.


마지막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깨부숩니까? 자기를 눕혀 놓고 짓밟으면 됩니까? 그러면 밟는 나와 밟혀 장열하게 죽는 두 개의 자아가 여전히 생생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데 그 기억을 무슨 수로 지울까요?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요? 내가 나를 조져서 나를 만든 두 개의 자아를 지성소에 안치를 할 건데 무슨 수로 그것을 없앱니까? 폭파시킬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로부터 현재, 현재로부터 미래로 가는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속에 제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 다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가 구원받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주님의 움직임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명되는, 주님이 친히 발굴했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 합류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들은 이야기 합니다. 분명 ‘나’가 있습니다. ‘나’가 있지만 항상 나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어느 때에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어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저는 생활공간에서 균질화, 규격화, 등질화 된 세상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돈 벌고 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제가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이럴 때 주님께서는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신자지.’ 여기에 대해 십자가 앞에서 ‘내가 한 것은 나를 위해 급급하게 살 뿐이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구원에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마태복음 25장 말씀과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 봉사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를 ‘주님의 작품’이요 ‘주님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사람의 지성소에는 본인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규명할 주님만 계실 따름입니다. 이런 자가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을 경배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모든 힘은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17장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유일한 권세는 영생 받을 자들을 발췌하고 뽑아내는데 소비되는 권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 즉 마귀나 이방인들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도 예수님 자신을 주라고 섬길 자를 죄의 권세에서 뽑아내는데 소모되는 권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극히 작은 권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절대로 내가 구원받는데 도입 될 것이 아님을 본인들이 자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내가 주님 믿는 믿음조차 내가 구원 얻는데 도움되는 권세처럼 작용해 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권세를 가로막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결론은 네 자입니다.


막 국수? 아닙니다. 막 메밀? 아닙니다. 막 사세요. 이미 구원을 넘어온 자들에게는 ‘막 사세요.’라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막 살고 있고, 막 살게 되고, 결국 막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복음이냐, 십자가가 복음이지’라고 하면서 그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결국 막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왜? 권세는 다른 곳에서 발휘되고 투입되고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타인과 경쟁합니다. 경쟁한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고 요청한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느냐?’ 말은 노골적으로 하지 않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고착해 되고 단단해 지고 차돌처럼 숨 못 쉴 정도가 됩니다.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이 하면 혹시 나를 욕하지 않을까? 여기에 비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바리새인과의 관계는 1과 1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 삼자가 등장합니다. 2가 아니라 3의 관계입니다. 여인은 2의 관계에서 최종 판결나는 것이 아니고 3의 관계에서 판결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둘 사이에 개입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2냐 3이냐를 묻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시선을 의식해야 되고 늘 신경 써야 할 타자는 어디 있느냐?”를 묻습니다. 여인이 속 시원하게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들은 모두 애굽이요 바벨론인 예루살렘에서 살처분 되어야 할 2인자이지 제 3 자가 아닙니다. 제 3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명을 믿고 자신의 과학적 인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훼방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 은혜로 개입하셔서 나도 너를 칠 수 있지만 십자가의 작품, 십자가의 결과물이 되기 위해서 너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너 스스로가 재료가 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여인은 순회재판에서 이미 합격 통지를 받습니다. 본고사 아닌 수시에 합격했습니다. 지금 느긋하게 놀고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자만이 이 모든 혜택이 주님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였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백성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건져 내시는 권세가 도달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느긋함이 행사되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이러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25장 44절에서 지옥 가는 자들이 대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27장 39-43절에 나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기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한 말과 동일합니다. 이들이 얼마나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명석한 판단입니까? 왜 사람이 자기를 꺾을 수 없고 자기를 부정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따지고 따져서, 탐색하고 탐색하여 요모조모 살펴보아도 예수라는 작자는 분명히 실패자라는 것이 명확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와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진 찍고 카메라가 와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자입니다. 남은 구원한다고 큰 소리 치면서 정작 본인은 세상 권세조차 못 이겨 맥없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밑천이 다 드러난 것이 되잖아요. 열두 제자 데리고 오천 명, 칠 천명 먹일 때는 나라도 구할 것 같이 느껴졌는데 마지막 도달점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 사람 죽었데. 그 사람 아니었어? 아니었네. 난 괜히 뭔가 되는 줄 알았는데. 죽었데.’


마지막이 결혼해서 잘 살았다고 하면 드라마가 되는데 주인공이 죽었다고 하면 인기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그 마지막이 무엇으로 끝납니까? ‘우린 십자가 피로 천국 갑니다.’라고 하면 ‘너 얼굴 꼬라지 보니 옛날보다 못하네. 결국 죽잖아. 백날 그 소리 해 봐도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해.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안 믿어. 부활 그런 것 없어. 그냥 당신은 죽어’ 라고 할 겁니다. 그럴 때 ‘아니 나는 안 죽어. 나는 부활 될 거야’ 하는 자들은 신천지요 안산홍입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실질적인 성과를 보고 싶어 했으면 ‘우리 집단에 오시면 안 죽습니다.’라는 것으로 사람을 유인하겠습니까?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거기에 안 속아 넘어가는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삽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우리 속에 이렇게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늘 테스트용으로 우리 주변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속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거기에 젖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목회해서 수천 명이 모이고, 미국도 몇 달간 갔다 오고 할 때 남들 보기에는 주의 종이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겠지요. 그것들은 교인들이 모르는 헛짓거린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이것은 같이 잠을 자는 식구도 몰라요. 삼십년 오십년 목회하고 한국에서 대표적인 목사가 된다 할지라도 신자 아닙니다. 제가 이들이 신자 아님에 오천 원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회를 당장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알아서 목회 해보려는 사람은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리인 복음을 아니 주께서 팍팍 도와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극히 합리적이고 사실적이고 통계적으로 실적이 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권세자’는 극히 소수입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저는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말에 예수님 외에 모두가 동의합니다. ‘남은 구원한다고 큰 소리 쳐놓고 본인 꼬라지는 좋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저 사람 안 믿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절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인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나는 현재 이스라엘이 핵폭탄 보유하고 견고하게 버티게 만든 뭔지 모르는 미지의 X 라는 추상적인 초월적 관념을 인정한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이스라엘 나라라는 실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 사람이 김일성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믿음으로서 북한이 아직도 결속되고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나라, 금강산, 백두산 등 눈에 보이는 실적을 근거로 믿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소비자입니다. 광고해 봐라.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화장품 샘플 나눠 주듯이 체험 마켓팅입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무슨 수로 돌파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태복음 27장 42절에 한 표 던져놓고 ‘그게 아닌 것 같다.’라고 하면 성도입니다. 그냥 성도라고 큰 소리 치지 마시고 그쪽에 한번 가보는 겁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합니다. 누가 천국에 가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해놓고 발을 빼면서 그건 아니네. 하는 모습이 성도입니다. 한 번 거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옛날 사람이다. 손에 잡히는 세포 덩어리만이 진리다. 진리는 이것밖에 없다.’로 가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나오는 희롱과 조롱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화살처럼 쏟아진다는 사실을 감안하시고, 그렇게 쏟아지게 하는 권세마저 진짜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한, 마지막 다슬기를 물속에서 건지시는 그 권세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인내를 테스터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정말 답답하다. 제발 부탁이다. 그냥 조용하게 교회 다녀라. 세례 받고 성찬에 참석하고 천당 가면 된다.’고 말하는 그들은 극히 이성적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돈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나온다고 돈 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주시는데 죽을 때까지만 주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백세까지 주시지 않습니다.


28장에 드디어 부활이 나옵니다. 부활에 대한 한 단어만 쓰면 부활 의미의 전부입니다. 부활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러워하지 말라’입니다. 삼성의 7조 수익을 부러워하지 말라. 누가 판사, 검사 되었다고 부러워하지 말라. 누가 출세하고 승진했다고 부러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마저 이겨서 살아 있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지경 속을 보듯이 사람들이 이런 것 때문에 혼이 다 빼앗겼구나를 보는 그 느긋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련회 마치고 산에서 내려가면 이것 하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 부러움 때문에 감사가 날아가 버립니다. 범사에 대한 감사가 다 날아갑니다. 주님은 감사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감사하고 싶어도 탐심이 장난이 아닙니다.


집단매장지에 필마로 돌아다니면서 왜 부러워하지요?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면서 왜 부러워합니까? 우리가 이미 십자가의 파급효과인 부활의 영, 성령을 받았으면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나온 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머리 잘 나온 것은 인물이 되기 때문에 머리가 잘 나온 겁니다. 인물이 안 되면 머리 잘 나올 리가 없습니다.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해요. 그런데 머리 잘 나왔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것 아닙니다. 머리 잘 나온 채로 집단매장지에 묻혀 버립니다.


교재에 보면 통합세계, 통일체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등장합니다. 규격화, 이 규격화된 통일체에서 빠져나가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죽었고 부활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적이라도 죄 될 만한 곳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아요. 나이트클럽에 가지 마시고 구경만 하세요. ‘아하 사람들이 저것을 좋아하는구나! 저것에 환장하는구나! 축구에 환장하고, 야구에 환장하고, 골프에 환장하는구나!’ 당구 칠 때 천장이 온통 당구공이 굴러다니는 곳으로 보이고, 천장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장으로 보이는 그러한 권세 속에 우리는 지극히 작은 권세자로 그런 것을 평생 누리고 살아 왔음에도 정작 주님께서 우리를 규정하실 때에는 ‘지극히 작은 자여 네가 나에게 이만큼 해주었다’고 하십니다. 정말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한 모든 것이 네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었다. 너는 실체가 아닌 상징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체로서 너를 평생 부려 먹었다.” 이렇게 주님은 주님의 권세를 우리에게 소비하시고 소모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 보았습니다. 무슨 책인지 몰랐고 그냥 고전 중 하나인줄 알았습니다. 그냥 문자에 갇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허상인 것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위해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남을 도리어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