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5강 [팽창하는 미래] 본문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5강 [팽창하는 미래]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오용익
마태복음 12장을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삭을 제자들이 먹는데 안식일에 먹었습니다. 이삭을 먹는 이것을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생활공간이라. 생활공간에서 예수님의 개입이 과연 어떤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일상에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우리 일상이 달라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갑자기 이삭이 더 맛있어 진다든지, 조미료가 더 첨가 된다든지, 조금 먹을 뿐인데도 배가 부른다든지,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우리 생활공간에서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대리변호가 일어납니다. 생활공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욕구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덤벼들기 마련이거든요. 앞 뒤 안 가리도 덤벼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육신은 이 땅에서 땅에 있는 것을 먹게 되어 있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정신으로 커버하기가 곤란해요. 먹고 싶고, 즐기고 싶고, 마시고 싶은데 ‘이것은 정신적으로 하면 안 돼.’ 이렇게 억압을 한다고 해서 말소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을 두 번 세 번 참다가 나중에 폭발해 버리면 더 많이 먹게 돼요.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는 목사님께서 주일날 금식을 합니다.
주일날 금식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설교를 하는데 점심때는 아침 굶은 것 곱빼기로 잡숴요. 뭐냐 하면, 얼마나 설교하면서 참았겠습니까? ‘빨리 끝내고 곱빼기 먹으련다. 고추장 듬뿍 얹고 참기름 쳐서 콩나물 비벼서 마구 먹어야지.’그래서 항상 뚱뚱 하셨어요. 뚱뚱한채로 걸어 다녔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래서 생활공간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자기 탓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근원을 몰라서 그래요. 이것은 욕구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제발 작작 먹어. 그렇게 하면 배가 나온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잔소리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편식하지 말고 좀 골라먹어. 골고루 영양을 취해야지.” 예수님이 영양사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실제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대리변론, 대리변호입니다. 조달호변호사지요. 대리로 변호해주는 거예요. 대리변호를 통해서 뭘 얻느냐 하면, 대리변호 이후에, 즉 생활공간에서 율법에 대한 죄가 유발되고 있고 여기서 예수님이 나서서 값없이 무료로 대리변론을 해서 생활공간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얻게 하는 재인으로서 예수님이 개입합니다.
이 공식은 참 중요한 공식인데 ‘주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좋겠다.’ 할 때 그 오시는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대리변론이라니까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를 고소하리오.” 그 정죄와 고소에 대해서 대리변론을 해 주시는 거예요. 주님 하시는 일에 좀 혼동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내 소원 들어준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우리의 환경은 생활공간이고 이 생활공간은 내 육신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감내한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것들로 계속해서 욕망을 부추기게 되어 있어요.
대리변론이 있다는 말은 단독으로 뭘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단독으로 자기변명,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식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혼자 살지 왜 예수님 믿고 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리변론자로 계시고 우리를 고소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데 그 좋은 변호사를 그냥 놔두고 어디에 써먹을 거예요? 그 좋은 변호사를 놔두고.
그리고 인간의 욕구라 하는 것은 탐내기 마련이고, 십계명에 위반하기 마련이고, 마음속으로 절제가 안 되는 것은 뻔히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개입은 곧 변호사의 개입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지요. 안식일에 먹은 것은 제자들이 먹었는데 변호하시는 것은 누가 변호하신다? 예수님이 나서서 “누가 내 사람 건드려?” 이렇게 변론해 주시는 겁니다.
“물으려면 나한테 물어.” 이게 아까 이야기한 안식일법의 중간가로채기에서 “이 법은 내가 알아서 지키고 그 효과는 나와 동행하는 사람의 효과로 전가된다.” 이런 법칙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믿어야 되는 것이 이미 이 땅에서의 천국의 실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12장 5절부터 13장에 예수님의 천국비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 마태복음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 12장도 마찬가지지만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 이야기를 할 때 비유에 대응되는 구체적인 인물들이 없어요. 농부가 나왔다. 농부가 밭을 가는데 툭, 하고 소리가 났다. 뭔가 보니 보물이 있더라. 얼른 보물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면서 땅 주인에게 가서 그 땅을 샀다. 거기서 농부는 누구며 그 보물은 누구냐, 라고 물을 때 사람들이 자꾸 일대일 대응을 하고 싶어 해요.
그 보물은 성도고 그 농부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보물을 발견하고서 킥킥킥킥킥, 혼자 좋다고 하게 되면 그것이 하늘나라 완성이다? 그거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첫 번째 비유에서 씨뿌리는 농부는 누구며, 밭은 누구며, 두 번째는 누구며, 세 번째는 누구며, 네 번째는 누구며, 이러다가 교회 네 파로 갈라져서 싸움합니다. 새누리 당, 민주당, 국민의 당, 이런 식으로.
결국은 열매 없는 것은 잘린다. 너는 열매 없잖아. 잘려라. 예수님의 비유는 구체적인 인물대응을 포기해 줘야 돼요.쉽게 말해서 인물 없이 설명하는 것이 천국이다. 그래서 얼마나 어렵겠어요. 13장을 미리 보게 되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11절에 ‘천국의 비밀’이라고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비유로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런 복잡한 것은 결론적으로 미리 알려 드리면 간편하겠지요?
인물들에 의해서 천국을 설명할 때는 뭘 로 하느냐 하면, 시간 층의 배치로서 설명이 돼요.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인간은 빠지고 시간 층의 배치. 시간층의 배치라고 한다면 시간층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둘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층이 두 개인데 그 두 개의 시간층을 배치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삐어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면 시간층의 배치인데 어느 시간과 어느 시간인가?
한쪽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점점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간층과 두 번째 시간층은 뭐냐 하면, 미래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에 대한 공격으로 진행되는 층, 이것이 또 하나의 층입니다. 미래의 횡포, 미래의 폭주, 저는 이시간의 강의 제목을 ‘미래의 팽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미래의 팽창’이라고 정했습니다만 이 두 개의 시간층에서 여기에 인간을 개입시켜 버리면 인간은 두 개의 시간층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아직 되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감각을 갖는 것은 인간의 권한과 능력 밖의 일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예상하는데 그 예상조차도 과거에 있던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게 되어 있어요. 데이터 가운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것이 아마도 옳은 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간에 관해서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보충적인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의 시간을 선으로 이야기한다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현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가까이 있는 과거와 더 먼 과거, 또 더 먼 과거가 현재 밑의 지하층, 지질층을 이뤄요. 과거a, 과거b, 과거c, 과거d……,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과거는 잊고 현실에 충실하자.’ 하지만 길 가다 동창생을 만났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아, 동창생이구나.’ 이것은 가까운 과거가 아니고 뒤에 있는 과거가 불현 듯, 마치 석유가 뿜어져 나오듯이 솟구쳐 나와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현재 지하에 수많은 과거들이 나의 의식층을 이루면서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게 시간의식이에요. 이 시간의식은 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간’에서 나옵니다. 훗설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 뒤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줬는데 그게 뭐냐 하면, 현재라는 것은 현재라는 그 껍데기만 현재가 아니고 밑에 있는 이 층, 과거의 데이터가 영향을 주는 겁니다.
영향을 주게 되면 우리 몸은 영향을 받아서 어느새 습관화 되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 형은 잡채를 안 먹는다고 했어요. 왜? 어릴 때 잡채 먹다가 목에 걸린 경험이 있어서 잡채를 안 먹습니다. 잡채만 보게 되면 헉, 해요. 몸에 각인되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전체가 다 뭔가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은 사실은 껍데기는 세포껍질이지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기억의 순차적인 지층, 고고학에서 말하는 그 기억의 지층이 꽉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것이 누적이 되면 ‘나는 이상하게 저 사람은 이유도 없이 싫더라.’ 혹은 ‘나는 저 사람은 이유도 없이 호감이 가더라.’이것이 호불 간에 결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만날 때도 ‘저 여자는 엄마를 닮아서 호감이 간다.’ 혹은 ‘저 남자를 보니 옛날 술만 먹으면 엄마를 패던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 도저히 트라우마 때문에 못 사귀겠다.’ 모든 일이 몸에 각인된 습관들이 과거의 영향을 받아서 현재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거가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미래까지 내려가요.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예상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상상으로서 자기의 미래를 예상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더 불쌍한 것은 오지도 않을 미래가지고 과거에 근거해서 벌벌 떤다든지 미리 울게 된다든지, 미리 피하게 된다든지, 도망치게 된다든지, 이렇게 생활환경이 복잡해요. 이 전체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이런 시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를 변호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시간에 눌려 있는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확실한 미래상을 가지시고 그걸……, 우리는 침투 못해요.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로 요만큼도 못나갑니다. 조금도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분이에요. W라는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의 베개 밑에 권총이 있는 것까지 다 알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만화 봤거든.” 만화 보니까 베개 밑에 권총을 준비해 놓은 것이 다 나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미리 봤거든요. 어디서? 자기 아버지가 만화작가니까, 미리 훔쳐봤으니까. 만화의 세계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불확실성이지만 예수님이 내 뱉는 그것은 이미 시간이 완료된 상태에서 현재에 들이닥치게 되면, 과거에서 올라오는 모든 불안과 걱정을 전부 다 삼켜 버립니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룸의 덩어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돼요. 그래서 그 정도 돼야 변호할 만한 자격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그걸 알거든요. 마귀가 양심적으로 어떤 죄를 지적할 때는 그 죄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우는 사자와 같이 미래의 지옥으로 기어이 데려가기 위해서 우우우, 울부짖으면서, 오늘도 먹이를 찾아 해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해매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알아요. 마귀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라고 물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를 멸하러 오신 것 맞지요?”
선수는 선수끼리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들이 자기를 영원한 지옥의 유황불에 보내기 위해서 확정짓고 난 뒤에 찾아왔다는 것,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무덤에 있던 그 마귀는 그렇게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은, “조용히 해! 발설하지 마.” 합니다.
우리는 바보 같아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바보냐 하면, 악이다, 나쁘다, 못됐다, 하는 것을 구체적인 권력체, 질서체를 가지고 자꾸 그걸 악마라고 대응시킵니다. 히틀러는 악마다. 나폴레옹은 악마다. 교황은 666이다. 자기가 666이면서.적그리스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것은 미래를 이미 확정짓고 난 뒤에 소급해서 적그리스도가 뭔가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층을 이렇게 깔아버려요. 둘 다 깔아버리면 여기서 “인간들은 여기서 나가 놀아.” 하고 우리를 내 보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을 대입하거나 시간 속에서 뭘 손질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12장 20절을 봅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이게 바로 미래의 확실성입니다.
18절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우리에게는 아직 심판이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예수 안에서는 이미 성령하고 이야기가 끝난 바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심판이 완료된 상태에서 과거에 있는 모든 것에 심판을 퍼부어 버립니다.현재라는 것도 미래입장에서는 과거가 되지요.
쉽게 말해서 과거에 얽매여서 살 것인가? 말을 더 간단하게 해서 아픈 과거에 대해서 네가 아직도 연연하고 그걸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냐? 아니면 이미 대리변호가 완료된 상태인 주님의 약속 속에서 살 것이냐를 주님은 요구하는 겁니다.그런데 그걸 요구함을 받더라도 우리가 그걸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는 보장되지 않기에 기존 시간층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대신에,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성령께서 여기에 개입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인간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인간의 대리대표자는 인자가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선수는 선수끼리 논다고요. 프로는 프로끼리 놀아야지 아마추어가 거기에 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나 설교를 하면서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사세요.”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앞에 ‘막’이라는 글자를 넣어서 “막 사세요.”
막사세요, 라고 하니까 그때서야 알아먹어요. 막 사세요. 그냥 막 사세요. 이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구원문제, 우리의 대리변호에 대해서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요청할 문제도 아닙니다. 일은 이미 벌어졌어요. 선수들끼리 비행기에서 공중전 벌어지고 있는데 지상에서 새총 쏜다고 해서 비행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해봐야 드론도 안 떨어지겠다.떨어지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생활공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코앞에 있는 빨래거리, 살림살이, 돈 벌어서 양식사는 것, 이 생활공간에 얽매여 있는 입장에 있어요. 안 그래요? 다들 그렇지요. 여러분은 수련회 마치고 또 밥 먹고 살아야 됩니다. 생활공간에 대해서는 우리의 욕망은 차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생활공간 자체가 두 자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온 몸에 와 닿는 현실은 생활공간이에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묻기를, “북한 핵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애들의 생활공간은 ‘방학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방학숙제는 적었으면 좋겠다.’ 그게 생활공간이에요. 나중에 그 애가 커서 나이 한 70이 되고 유엔총장 되거든 그때는 묻든지 해야지 애들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 사는 주부한테, 남중국해 문제, 필리핀과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것은 전문가도 아닌 주부한테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여자라도 전문가가 따로 있어요. 정치외교전공한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에게나 물어야 됩니다. 생활공간이 뭐냐 하면, 어떻게 고등어를 냄새 안 피우면서 구울 수 있는지, 그런 프라이팬이 요새 나왔는데 그런 것을 인터넷 뒤져서 정보를 찾는 그것이 생활공간이에요. 생활공간은 그냥 현실에 충실할 뿐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고 예수님은 미래에 충실하고. 죽이 잘 맞는 거예요. 미래의 확실성은 주님이 보장하고 우리는 현재에 있으면서 날마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벌벌 떨고 있고.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한계에요. 주님께서 뻔히 알아요. 우리보고 돈 내놔라, 밥 내놔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정을 뻔히 아는데 뭘 더 내놓겠어요. 내놓으면 낸 것 생색낸다고 30배달라고 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일이 어떻게 되는가? 먼저 마태복음 12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자, 설명 들어갑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아직까지 미래에는 도달되지 않는 그 기존의 시간층에서는 어떻게 되고?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미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성령이 오시는 그 확실한 그 작업에 대해서 인정하지 못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지금? 아니요. 성령이 올 때. 갑자기 어려워져버렸지요. 지금 너 믿을래, 성령 믿을래, 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성령이 오지를 않았어요. 성령은 예수님에게만 독점적으로 오신 거예요. 성령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오고 그 다음부터는 성령세례가 이방인에게 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못 얻는다는 것은, 이 말씀을 할 때의 지금이 아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때 성령을 훼방하게 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이 시간층에서 미래에서 완전히 현재를 갉아먹고 과거를 묵사발 내는 이 시간층으로 열차를 갈아타지 못하면 사하심을, 그것도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명하기 위해서 생활공간부터 먼저 이야기를 했고 대리공간부터 먼저 언급을 한 겁니다.
우리는 생활공간에서 못 벗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중간에 괄호를 쳐서 대리변호를 하셔셔 “내 사람이다.정죄하지 마.” 이런 식으로 대리변호를 하시고, 그 다음에 선수는 선수끼리 싸운다고요.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옛날에 이 바닥에 들어올 그 때 많은 부흥사들에게 공통적으로 이 본문을 들어온 내용은 이거였습니다.
사람에게 죄 짓는 것은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이것을 뭘 로 해석하느냐 하면,그냥 보통사람에게 죄 짓는 것은 용서를 받지만 방언하는 사람에게 대들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런 해석들을 들어왔었어요. 기가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그 사람들은 방언이 뭔지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때부터 방언해서 자기 방어기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 건드리기만 해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해.’ 그걸 자기의 훈장처럼 차기 위해서 방언하려고 열광을 하는 겁니다.
방언이 잘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교습소에 가서 그걸 몸에 익히는 학습을 받아요. 랄랄라, 룰룰루, 새벽기도, 여러 가지 학습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빠른 혀놀림, 어눌한 혀놀림, 그것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해 보는 겁니다.그래서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오면서 하도 답답해서 우리 동료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저 단양 구인사도 방언하더라.” 진짜에요. 태고종 본산인 구인사도 방언 가르치고 방언합니다. 방언은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 혀는 짧지 이게 한꺼번에 좁은 출입구로 나가다 보니까 말이 섞이는 것이 방언입니다. 빨리는 이야기해야겠고 유입속도는 빠른데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서의 속도는 늦고, 거기서 엉켜서 못 알아들을 소리로 나오는 거예요. 32절을 봅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자가 어디까지 인자인가 하면, 주가 되기까지 인자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인자로 계시는 겁니다. 지금은 두 층이 확정되지 않은 층이기 때문에 그냥 미래의 시간층을 깔아놓은 거예요.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시간층이 있는 상태에서. 이 미래는 누가 주도하는가? 인자가 주도해요. 예수님이 아니고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 인자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인자는 반드시 성령의 지도와 지시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주가 되시기 때문에 역전이 되어서 친히 성령을 가지고 “누구 세례 줘. 그리고 누구한테 찾아가.누구를 충만케 해. 또 저쪽 귀신에게 가서 꼼짝말라고 해.” 이렇게 되지만 주가 되시기 전에 인자는 세례 받고 난 뒤에 성령에 의해서 주도권을 받아줘야, 기도할 때도 성령으로 기도하고, 십자가에 곱게 죽는 것도 성령으로 하고, 심지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도 예수님의 자기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데서 살아났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요새 서문시장에서 한 근에 얼마씩 하는지 모르겠어요.그리스도의 영이 근에 얼마 나갑니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 괜찮은 성령 돈을 몇 푼주면 살 수 있는지를 물었던 거예요. 돈 주고 못 사지요. 돈 주고 못산다는 말은 이 생활공간에서 무슨 뜻이냐 하면,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살 수 없는 생활공간은 마지막 때에 쓸데없는 공간입니다. 80, 90년을 살아봐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세월만 세월아, 내월아, 하고 그 세월만 갉아먹고 있는 거예요.
노인정에 가 보세요. 저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안 됩니다만. 노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세월만 갉아먹고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어떤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사는 대로 살래.” 사는 대로 사는데, “그러면 선생님의 미래는?” “과거도 다 잊어버렸는데 무스 미래까지?” “기차를 갈아타지 못하셨군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몰라도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생활공간에서 못 헤어납니다. 욕구와 욕망 때문에. 그럴 때 대리변호 들어옵니다. 대리변호 들어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확정된, 확실성이 보장되는 성령에 의해서 인자가 이 시대에 대표적으로 미래에서 주어지는 카펫을 깔아버려요. 미래는 과거에서 오는 것과 정면충돌하면서 과거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심판해버립니다.
어느 정도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이유는, 심판을 마감할 때까지 성령의 부림을 받는 인자가 그 작업을 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는, “너는 빠져 있어. 너는 생활공간뿐이야. 너는 돈 버는 생각밖에 못해.”이렇게 빠져 있어야 되고 “빠져 있으면 누가 해주는데?”
그게 12장 28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어떤 방식인가? 그 방식이 나와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결국 우리는 뭐냐? 우리는 세간살이고, 우리는 그 세간살이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그 시간층에서 우리는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서 인자로 오셔서 담 타넘고 와서 잠자고 있는 부부를, 이건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가미된 거예요, 그 잠든 주인부부를 몰래 꼼짝 못하게 해놓고, “귀금속 어디 있어?”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음음음!” “어디 있어?” “음!” “알았어.”
가서 쌀뒤주단지 안에 있는 귀금속 챙겨서 “수구해!” 다시 담을 타넘어 왔을 때 한 사람 건졌다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만들어 가시는, 상당히 황망한,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 밖의 도둑놈에 의해서 구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의 한 사람을 건진 거예요. 주께서 친히 와서.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주님과 함께 가다보니까, 가면서 가끔 뒤돌아보니까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고 현재 때문에 멍들고 미래 때문에 불안한 그 시간의 노선에서 이미 확정된, 이미 구원이 완료된 그 시간노선으로 뒤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현상을 느낍니다. 누구한테만? 성령에 이끌림 받은 사람한테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과거의 이런 잘못이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기가 주님을 배신하고 잘못된 길로 간 것, 그래야 하늘나라 가서 자기자랑을 안하도록 주께서 아예 깔끔하게 모든 것을 정리해 주셨잖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수는 누구끼리 한다? 선수끼리 하는 거예요.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악마를 이기고 악마에 예속되어 있기에 못 빠져나오는 우리를 데리고 나왔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성령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장차 성령님은 누가 보내는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이루었음을 근거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성령이 오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구원에 대해서 더 추가될 행함은 일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일체 남아 있지 않아요. 십일조고 뭐가 일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미래에서 십일조와 아무상관 없이 십자가로만 구원했습니다. 이것을 기존에 있는 이 세상에서는 못 믿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어리석고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거예요. 미련하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성령 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라 했어요.
사도바울이 그것만 이야기했어요. 다른 것은 이야기 안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다. 다른 능력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능력, 대리변론만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십일조를 미리 봅시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이요. 제가 그 본문을 읽어드릴테니까 뭔가 좀 차이난다는 것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을 용서하지 말라.” 방금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뭐냐 하면, 의와 신과 인이고 저것들은 뭐냐 하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했다는 그 외식을 너희들은 방치하거나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 위선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게 헬라어본문 해석입니다.
간단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것이 없어요. 십일조라는 것이 명사가 아니고 십일조 행함이거든요. 십일조 행함에 대해서 “버리지 말라.” 하는 원뜻이 뭐냐? 헬라어본문에서 “메 아페이나이, mh afienai”라고 하는데 ‘아페이나이’는 용서라는 뜻이에요. ‘메’는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의 뜻이에요. “너희들은 왜 의와 인과 신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박하와 회향과 근채(채소)의 십일조를 가지고 십일조를 했다는 그 위선덩어리를 왜 방치하고 묵인하고 방관하느냐?”그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의와 신이 있는데 왜 그 위선을 방관해?”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누가복음도 같은 뜻이에요.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 여기서 이것이라는 것은 뒤쪽에 나온 것을 받는 거예요. 이것이라 할 때 이것은 의와 인과 신을 말하는 것이고 저것은 앞에 있는 것을 받는 겁니다. 지시하는 정관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라. 십일조를 가지고 무슨 양수겸장, 장기 두는 겁니까? 그게 원천적으로 없어요. 2천년동안 속았어요. 이제는 말한다. 생각해 보세요. 의와 신도 행하고, 그 다음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행하게 되면 두 행함이 동일한 행함이 아니고 두 종류의 행함이 되잖아요. 두 종류의 행함이 되면 어느 쪽이 강조되는지는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둘 다 강조할 수가 없어요. 한쪽에 의미를 두고 한쪽에 덜 의미를 두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마음속으로 의와 신에 의미를 둘까요, “십일조 냈습니다.” 여기에 의미를 두겠어요? 실제로 냈다는 그 자랑질에 의미를 두겠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것이 없어요. 의와 인과 신을 진짜 안다면 왜 십분의 일을 냈다는 그것 가지고 위세 떨고 “십일조 했잖아요.”하는 그 위선덩어리를 왜 용서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용서를 하지 말아야 되지.
자연스럽게 이 문맥이 흘러가요. 마태복음 23장이, 바리새인들이 현찰 삼키고 자기 배를 채우는 그 본문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니까요. ‘십일조(apodekaτευω)’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니고 십일조를 드리다, 하는 뜻의 동사입니다. 십일조라는 덩어리를 행하라는 자체가 없어요. 십일조가 동사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동사가 되어버리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 이야기는 의와 인과 신, 벌써 했잖아요. 마음 드리고 또 마음 드리고,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어요. 말이 성립이 안돼요. 마음 드리고 또 마음 드리고. 참 이거 기가 찹닏. 다시 13장으로 돌아갑시다. 마귀로 하여금 한국교회나 세계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게 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성경까지 이렇게 잘못 번역시켜서 하게 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평소 생활공간에서 십일조를 하면서 얼마나 미세한 떨림이 있었습니까? “생활비 없어도 꼭 내야 됩니까? 갑근세 떼고 내는 겁니까, 아니면 보태서 내는 겁니까? 집 팔고 전세대비 내야 됩니까? 전세에서 이윤 남긴 그것의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 겁니까? 십일조 반 떼서 다른 교회에 십일조 내면 다른 목장에 내는 것이 됩니까? 선교회비와 건축헌금까지 합치면 십일조 금액이 되는데 그것으로 그만 퉁 칩시다.” 이런 온갖, 의와 인과 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마음도 같이 벌벌 떨고 있어요.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미래에는 십일조가 없습니다. 미래에 가는 기차로 바꿔 타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했는지 묻지도 않아요. 우리가 받는 상은 우리가 행해서 받는 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을 아무 행함도 없이 그냥 누리는 겁니다. 급이 달라요. 신랑이 대단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단지 신부라는 포지션 때문에, 위치 때문에 신랑의 격에 맞도록 우리는 아무것도 안한 우리가 화려한 웨딩드레스에 보석에 난리도 아닙니다.
이것은 신부가 예뻐서가 아니라 같이 살 신랑이 너무나 대단하게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이것이 바로 미래에서 현재로 내려온 성령이라는 이름의 기차입니다. 십일조를 이야기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더 이상 성경 볼 마음이 안 들지요. 그게 얼마나 목에 걸린 계륵 같은 것이었습니까? 복음공부 아무리 해도 속으로는 ‘그래도 목사님 내야 됩니까?’ 맨날 이런 것이 올라오고,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한 번도 이런 것이 시원하게 내려간 적이 없잖아요. 지금 나 혼자 너무 오버하는 느낌인데요.
13장에 들어가 봅시다. 좀 남아 있는 12장 39절 먼저 봅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시간층이 두 개의 시간층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오고 미래는 불확실해서 벌벌 떠는 이것, 이쪽은 죽든 살든, 울고 불든, 이미 과거는 확정된 신분을 가지고 유람하듯이 폐허가 된 도성을 말 타고 돌아보듯이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두 시간층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건너올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죽고 산 사람만이 이쪽 기차, 성령의 기차를 타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이야기 했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목사님, 성령 받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지요. 제가 대신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떤 달라 졌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늘나라로 달려간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죽는 뜻이라면 성령에 의해서 죽게 하소서. 성령을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정이 돼요. 자기부정이 된다는 말은, 이게 마음에 관한 문제지 돈을 교회나 기도원에 바치는 이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사시면서 옛날에는 집에 한 40억이 있어서 그 돈을 의지했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40억이 있어도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부인이 되는 거예요.
돈 처리 문제는 자기부인 상태에는 처리될 대상조차 안 되는 겁니다. 부동산 해놓았거든 팔지 마시고 그냥 간직하게 되면 나중에 값이 오를 수가 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받아 챙겨야지 뭘 어쩌겠어요? 아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벌써 잊었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뭘 한다고요? 대리변호를 해요. “제가 돈만 밝혔습니다.” 밝혔어도 대리변호사가 안 밝혔으면 된 거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이름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요. 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이 아니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되는 거예요. 전혀 달라질 것이 없이 그냥 막 사시면 돼요. 이미 제가 이야기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요. 이미 막살고 있으니까요.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이 기차를갈아타는데 있어서, 이미 갈아탄 경우에 어느 브릿지, 어느 다리를 건너왔는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아하, 십자가를 건너왔지.’
남들 보기에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나한테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4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돈보다 귀한 것을 받았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부인을 하라고 하면서 그 나 중의 말이 뭐냐 하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12장 4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예수님! 밖에 동생들이 와 계신데요.”라고 할 때 그 동생들과 모친을 현장에서 참 부끄럽게 만들어요.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대리변호입니다. 대리변호인데 사람들은 대리변호를 모르고, 예수 믿었으니 이제 독자적으로 하나님형상을 이뤄보겠다고, 독자적으로 착하게 해보겠다고 해봐야 그것은 마귀의 밥이 되는 겁니다. 13장에 들어갑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비유에서는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개인주체는 없습니다. 그냥 시간과 시간의 연결고리, 그 틈 사이에서만 천국이 나오는 겁니다.
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묻지 마세요.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누구십니까, 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쪽 기차에서 이쪽 기차로 올라타게 되면, 전에 있던 기차에서는 ‘저건 내 자리인데.’라는 나의 자리라는 것이 아예 없어요.
나의 자리가 없고 그 자리는 전부 다 주님이 예약해준 자리고, 주님께서 솎아서 넣어주는 자리가 주님의 은혜로 그냥 배당받는, 할당받는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당겨서 ‘저기 창가자리 풍경 구경하기 좋은데.’ 이렇게 미리 내다보지 마세요. 요나의 기적, 십자가를 건너올 때부터 모든 인간의 자기기대성은 이미 함몰되고 죽어버렸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마음대로 자리가 배치가 되고 구성이 되는 겁니다. 어떠한 직업을 가지든, 어떤 입장에 있든지 그들을 한데 묶는 것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의 십자가로 묶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미리 이야기하는 것은, 괜히 비유를 보고 염려하거나 걱정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어요.
내가 만약 말씀을 들었는데 존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씨앗을 물어가게 되고, 그래서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나쁜 밭으로 분류가 되어서 “너 탈락” 이렇게 되면 어쩌나, 다음에 기회가 주어져서 정신 바짝 차려서 잘하려고 했는데 생활의 어려움이 와서 잠시 교회 두 번 빠졌더니 그 다음에 “너는 탈락” 이러면 이 모든 말씀이 대체 일본의 파친코처럼 장애요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 장애요소들을 다 피하고 정말 좋은 밭이 되기에는 우리의 생활공간이 너무 힘들어요. 자기가 제임스 본드도 아니면서 무슨 액션을 한다고 라스베가스를 다 뒤집어놓고 말이지요. 영화 안보신분들은 잘 모르지요. 대단한 영웅도 아닌 게 어떻게 이 난관을 다 피합니까? 파친코 아세요? 땅 당기면 사다리 타듯이 죽죽 내려오잖아요.
모든 장애요소를 다 피해서 기어이 성공한다. 이거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한테 맡겨야 되는가? 전문가 선수에게 맡겨놓으세요. 십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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