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이데거 151013 본문
녹취:한윤범
20151013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7-하이데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하이데거 하는 데요, 이 사람은 1889년에 태어나서 1976년, 오래 살았지요. 독일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언급한 것은, 이 사람이 등장해서 그렇게 주목받는 이유는 과학이 너무 설쳐대는 거예요. 모든 나라의 교육과 분위기가 과학 일변도로 나가버리죠. 과학자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과학적이 아니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는.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가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는. 물론 누구나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닌 걸 알지요. 알지만 과학이란 게 하루아침에 온 게 아니거든요. 과학은 그동안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발전시키고, 발전시키고 스스로 자찬해서 위대하다고 여겼던 결과물이 과학이잖아요. 좋다고 해서 이제까지 키워왔는데 그 좋은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을 건조하게 만들었을 때에 누가 나서서 근본적으로 이게 문제라고 내세운 천재적인 사상가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하이데거가 등장한 겁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과 [시간과 존재]란 책을 통해서 전체 내막을 밝혀낸 거예요. 하이데거가 밝혀낸 그 내용에 대해서 누가 과연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없으니까 거의 진리요 정답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제시한 사상이 오늘날까지 진리라고 간주되니까 그것에 근거해서 성경해석이라든지 모든 인문학, 역사, 언어학, 기호학 등 모든 학문에 하이데거의 정확하게 만들어진 누가 봐도 일리가 있는 허점이 없는 그 정답을 자기 분야에 적용시키게 됐습니다. 하이데거가 유명한 사람이 된 거죠. 역사나 인류학이나 문화나 철학에서 물론이고. 특히 신학에서도 영향을 받아서 리꾀르, 불트만, 그 뒤의 신학자들 폴 틸리히, 칼 바르트, 전부 다 하이데거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하이데거가 인간 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집어냈는가? 그걸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행동을 잘못해서 삭막한 현실이 아니라는, 비윤리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인간들이 당연시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고방식을 존재로 본 거예요. 그래서 책 제목이 [존재와 시간]입니다. 시간은 사실은 크게 언급되지 않고 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은 존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내 눈앞에 있다. 있는데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내 눈에 띤다, 존재. 눈에 보인다. 거울 앞에 내가 존재하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하등에 이의를 걸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문제 될 게 없는데 내 앞에 사물이 있다, 물건이 있다, 카메라가 있다, 선풍기 있다는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이데거 외에는 아무도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어요.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중세 때는 존재를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본 거예요. 존재라는 것은 신에게 예속돼있다. 어떤 식으로? 피조물로 예속돼있다. 우리가 80인의 신학자들을 하면서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신은 보이지 않잖아요. 우리는 신에게 예속되었으면 신이 인간을 예속할 때 원리원칙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 원리원칙을 신과 인간 중간에 서서 그걸 독점해서 가르치는 집단이 있단 말이에요. 그게 교회지요. 그런데 그 교회를 권력자들이 앞장세우는 거예요. 자신의 권력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를 앞장세웠는데 신의 뜻, 운명적이니까 동양적으론 팔자지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팔자라고 고착화 돼버린 겁니다.
결국 정답은 신과 피조세계 사이에 중간을 쥐고 있는 교회와 귀족들이죠. 토지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 교회와 귀족들이 세상의 모든 질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농경시대이기에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유럽이 작은 종족으로 쪼개지고 종족들 사이에 경쟁이 유발되면서 중국처럼 통합된 나라가 아니라 쪼개진 나라니까 주변에 무역을 일으키고 무역을 하면서 이제는 중간계층에서 농사해서 재산을 축적했던 시대가 무역을 통해서 돈을 버는 시대가 되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한이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사람은 역시 돈 앞에는 힘이 없으니까 신분도 돈 있을 때 양반이지 돈 없으면 양반 취급 못 받잖아요. 그러면 상놈도 돈만 있으면 양반 대우 받는 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권력이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추상적이고 명예가 아니고 실제로 돈이 있어야 되고 돈의 기능은 뭐든지 구입할 수 있는 여유분을 말합니다. 어떤 예상 안 되는 경우라도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그걸 사자성어로 전지전능이라 하지요. 지상의 전지전능은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 돈을 중세 때는 중간에 귀족들과 교회가 갖고 있었지만(교회는 토지를 갖고 있었으니까) 근세로 넘어오면서 무역을 한 거예요. 무역을 하려면 과학과 기술이 발달돼야 돼요. 그리고 상품을 팔려면 호기심을 끌만한 신상이 나와야 되는데 신상은 과학과 기술의 축적이 돼야 되고 과학과 기술은 빈번한 전쟁을 통해서 전쟁무기를 통해서 발달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존재는 있다가 존재잖아요. 중세에는 신의 피조물로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한다는 것은 운명적이고 팔자에요. 내 눈앞에 있음이 하나에 대상이 되는 겁니다. 데카르트나 뉴턴 때부터 그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하겠지요. 분석하게 되면 왜 똑같은 물건을 만들면 안 될까? 물은 왜 흐를까? 그렇게 연구하고 탐구하다 보면 그 존재물 또는 대상물 안의 구조를 살피게 되지요. 그 구조를 살핀 과학적 업적이 21세기까지 와서 종합적인 게 에너지의 집합체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쌀 먹는다. 아주 간단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누가 줬든 상관없이 그 쌀 알갱이 속에는 탄수화물이란 단백질 집합체가 들어있는 거예요. 다르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양식 주셨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이 논리구조와 하나님(신)이 주셨는데 저 에너지를 내 것 만들면 나는 에너지 집합체가 되겠지요. 원자, 전자해도 다 에너지에요. 그걸 누가 요구하느냐가 중요해요. 그걸 사회가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사회의 부속품이 되는 거죠. 사회 일원으로서 사회가 요구하는 게 있어요. 사회는 너와 나를 합한 추상물에 사회지만 사회 안에 들어가면 너, 나, 그, 그런 것들의 집합체가 되는 거예요. 그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은 에너지를 원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이 사회에서 에너지원이 되는 겁니다. 에너지원을 바깥으로 내놓는 것을 노동이라 하지요.
그런데 에너지원이 다 필요한 에너지일까요? 쓸모 있는 에너지는 따로 있지요. 아플 때 배관공 필요 없습니다. 배관공이 열심히 하는 건 인정해요. 그러나 내 몸이 다른 질의 에너지가 필요하지 하지 배관공 필요 없어요. 의사가 필요하지. 그 사회가 그런 걸 요구하기 때문에. 배관공 되는 기술은 6개월만 배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의사는 십년이상 걸리잖아요. 어느 것이 고품위의 에너지가 됩니까? 의사가 배관공보다 훨씬 더 고품위의 에너지가 갖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시집가도 영어하는 며느리가 낫다니까. 시어머니와 해외에 놀러갈 때 통역이 되니까. 그래서 영어 못하고 컴퓨터도 못하면 요새는 쓸데없는 인간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이데거 보기에 이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물질이 된 거죠. 그리고 물질이 된 것은 바로 우리가 속해 있는 정치, 사회가 과학으로만 유지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 사회가 원하는 에너지원으로 적응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고대에서는 존재에 대해서 통합적으로 전체적으로 이해했어요. 신이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는 과학의 대상체가 돼요. 어떤 에너지를 내놓을 수 있느냐? 그걸 요구받는 대상체. 이게 과연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해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하이데거가 최초로 해답을 내놓은 거예요.
어떤 해답은 내놨느냐? 기존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현존한다고 했는데 사물을 존재자라 해요. 인간도 존재자고. 모든 것이 시간으로 봐선 지속적으로 현존한다. 영원히 있는 그대로. 고대에서는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나 과학시대에 와서 존재는 영원히 그대로 가는 게 아니고 단편적이고 나한테 필요할 때만 존재로 인정하고 필요 없으면 인정하지 않지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물이 아닌데 현대는 인간을 사물적인 존재이기를 요구하고. 당신은 어떤 대안이 있느냐? 그게 궁금하죠.
하이데거는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존재는 고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존재는 늘 항상적이고 영원하고 현존하는 눈앞에 있는 걸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자기는 이런 존재 개념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눈앞에 있다, 거울 앞에 있다, 존재다. 그건 존재 아니다. 존재자다.
그러면 존재가 뭐냐를 알려면 존재자를 둘로 나눠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적인 존재자가 나오는데 숨어있는 은폐 돼있는 존재에서 연관돼있을 때 본래적인 존재자가 되지요. 거기에 대해서 반대로 비-본래적인 존재자가 있게 되지요. 이렇게 둘로 나눌 때 무슨 근거가 나누는지 궁금하지요.
비-본래적인 존재자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사는 삶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하이데거가 현대인의 얄팍한 삶을 비-본래적이라 하면 존재의 깊이가 없어요. 하이데거가 인용한 걸 보면, 얄팍하고 산만하고 모이면 잡담하고 말초적인 호기심만 따라가고 보다 새로운 자극에만 반응하고 또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는 것. 방금 한 용어, 얄팍하다, 산만하다, 잡담밖에 할 줄 모른다, 말초적 호기심과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고 그 자극에 식상해하고 지루해하고 새로운 자극을 또 찾아 헤매는 그것이 사람 만남의 잡담거리가 되는 이러한 비-본래적 모습을 한 마디로 깊이가 없다.
물 위의 기름처럼 항상 떠도는 삶이에요. 물은 깊어도 기름은 깊이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수면 위에 떠돌아다니죠. 그것도 형체도 없이 바람 따라 이렇게 저렇게 바뀌었다 하지요. 인간 존재가 이렇게 된 겁니다. 참 불쌍하지요. 불쌍해도 현대 정치, 사회가 그걸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몰아넣었으니까. 모든 것이 제한돼있고 모든 것이 연약할 수밖에 없는 힘에 굴복하고 현세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물 위의 기름처럼 잡담하다 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지요. 이게 비본래적인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하이데거는 비본재적 존재자를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본래적 존재자로 깊이를 가져야 돼요. 도대체 나라는 것이 누군지, 자기한테 질문하는 깊이 있는 존재자가 되려면 존재자 바닥에 궁극적인 근거가 존재가 있어요. 그 존재는 나타나지 않아요. 존재는 존재자를 드러낼 뿐이지, 그걸 개연, 게시라 하는데, 존재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본래적 존재자는 존재와 연결돼있거든요. 연결돼있는 것을 실존이라 해요.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은 홀로 있는 것이고, 하이데거의 실존은 궁극적인 존재와 연결돼있는 것을 말합니다. 실존이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느냐, 그 말이죠. 그러면 실존을 모르는 보통 인간들은 뭘 모른단 말입니까? 실제로 내가 누구냐에 관심도 없어요. 그저 새로운 자극을 위하여 떠돌아다니는 부유하는 삶이죠.
신상, 새로운 패션, 새로운 연예인 소식, 새로운 소비형태, 말초적이고 자극적이고 감각적이고 마약과 도박과 술과 담배, 성적인 유혹, 그런 것을 찾기 위한 힘을 추구하기 위해서 직장 다니고 그것을 위해서 영어 공부하고 컴퓨터 공부하고 열심히 세상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는 거예요. 결혼하고 애 낳고 하는 거예요. 결혼하고 애 낳고 취직하고 군에 가고 어떤 직업을 가져도 그게 실존 되지 못하고 그냥 부유하는 비-본래, 본래가 아니에요. 진짜 본래를 상실한 얄팍한 세상을 떠도는 기름 같은 존재로 살 뿐이다. 이 세상이.
그렇게 떠돌고 자극만 찾다보니까 거기서 통용되고 유행되는 행복이란 게 실제로 어떻습니까? 자기 유명세 떠는 것, 보다 짜릿한 맛있는 맛 집을 찾아가는 것, 티비에 나오는 삼시세끼 같은 것 보세요. 애완견, 반려견 바꾸기, 패션에 관한 문제, 두산이 이길까, 넥센이 이길까, 오늘밤에 결정 나는 것, 추신수 안타 세 개 쳤지만 벼랑 끝에 몰린 것 등에 관심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이 한 순간에 노동에서 오는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깊이에 관심 없어요. 나는 누구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가, 관심 없어요.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그러한 비-본래적인 존재자가 갖고 있는 그것이 무의식 세계에서는 공허와 허탈을 낳는다는 겁니다. 깊은 공허함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해결책이 없다는 겁니다. 그 공허함과 권태, 궁극적인 근거를 모르기 때문에 밀려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그것만 이야기하면 끝이에요. 하이데거가 거기서 희망을 줍니다. 그렇게 자극적이고 얄팍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비본래적 존재자에서 다시 본래적 존재자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희망이 있다는 거죠. 많은 철학가들이 많은 사상가들이 하이데거에서 듣고 싶은 것이 이제 시작되는 거예요. 인간이 이렇게 허탈하고 허무하고 그저 물질, 탐욕, 욕구, 쾌락, 자극적인 욕망, 그런 것들은 누구나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인간은 사물화 되고 돈밖에 모르고 기계인지 인간인지 분간 안 되는, 그 해결책이 궁금한 거예요.
그 해결책을 하이데거는 본래적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가능성이 있다 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허무한 내가 어떻게 나에게 조치하면 되느냐고 묻겠지요. 하이데거는 네가 너한테 실천하고 행동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은 이미 존재자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다르지요.
이때는 마치 불교 같아요. 불교는 내가 열심히 도를 닦아야 부처가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부처의 마음은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다만 개안, 눈만 뜨면 자기한테 있음을 부처임을 파악한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에요. 뭘 개안하느냐? 존재자는 존재에서 개연된 것 또는 게시된 것, 존재라는 진리가 바깥으로 드러난 결과물로써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가 존재에게 게시, 개안은 불교식이고 하이데거는 게시라 했는데 우리말로 열려있다.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열려있다. 숨어있는 것, 조개 입을 활짝 벌리듯이. 존재가 열려있는 것에서 존재자가 나왔으니까. 따라서 비-본래적인 존재자는 존재와 연결만 한다면 다시 본래적인 존재자가 되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하이데거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 존재에 어떻게 접근해 갈 수 있는지 궁금하겠지요. 하이데거는 존재가가 게시돼있는 현장을 먼저 소개합니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라고 이야기해요. 용어는 어렵게 보이지만 설명하면 무지무지 쉬운 거예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비-본래적 존재자, 본래적 존재자였잖아요. 그런데 존재 입장에서는 그냥 조개 입 벌리듯이 주는 게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존재자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걸 존재와 연관해서 볼 때 현존재라 하는데, 보통 하이데거는 존재자라고 할 때 물건까지 합해서 존재자라 해요. 그런데 세계-내-존재를 인간이라고 합니다.
물병은 왜 안 되느냐? 물병은 세계가 없어요. 물고기는 세계가 없습니다. 물고기는 바다가 세계지요. 아니요. 바다가 있더라도 물고기는 바다에서 존재의 본래 뜻을 구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인간은 이 세계라는 용기, 그릇 속에 담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서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적응하기도 하고. 말이 좋아 적응이지 사실은 굴복이죠. 태풍이 푼다? 숨을 줄 알고. 밤이 됐다? 잠잘 줄 알고. 하지만 잠만 자는 게 아니고 횃불 만들어서 밤에도 활동할 줄 알고.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이 세계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굴복할 줄도 알고. 이걸 서로서로 속했다고 해서 공통으로 속했다, 그걸 세계와 인간을 공속관계라 이야기해요. 서로서로에 예속돼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을 변화할 줄도 아는 존재자가 인간이다. 세계-내-존재.
변화할 때 어떤 식으로 변화하느냐? 하이데거는 인간은, 인간이라 하지 말고 현존재라 합시다. 왜 인간이란 말을 잘 안 쓰느냐 하면, 인간이라 했을 때는 현재 눈에 보이는 존재와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이잖아요. 현존재는 숨어있는 존재와 연관시켜서 인간이라고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에 현존재라 하는 겁니다. 현존재란 인간이라 생각하면 되고 하이데거는 의도적으로 인간이란 말보다 현존재란 말을 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기존 철학에서 인간이란 서로 너, 나란 대상이 되잖아요. 그런데 현존재는 대상이 아니라니까요. 존재가 입을 벌려서 게시한 거라니까. 흔히 성경에서 말한 신의 계시, 존재가 게시한 것이 현존재란 말이에요.
게시할 때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무엇과 공속 돼있다? 세계와 더불어 변하는 그런 상태에 있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고 물으면 안 돼요.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그렇게 묻고 싶다는 것은 기존의 철학이고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존재가 그것을 개시했다는 거예요. 제 취지가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기존의 철학에서는 나한테 무엇이 유리하느냐? 항상 자기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하이데거에서는 자기로부터 출발하면 안 돼요. 왜? 인간은 없고 현존재로 바뀌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신 의미가 내 의미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 나에게 무슨 의미라고 말하지 말고 이 세상 의미와 내 의미를 같이 표현할 의미를 존재가 그걸 표현해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하이데거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거예요. 돌아가는 상황, 분위기가 지금 하나님의 주권적 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철학적 용어를 동원해서 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이 그 뒤에 불트만이나 신학자들에게 그렇게 영향이 파급된 겁니다. 가다머나 이런 데서. 들어보니까 이해되시죠. 그전까지는 누구 중심이라고요? 나 중심이잖아요. 세상아, 나를 위해서 나한테 정복당하라. 창세기 1장 28절, 다스리고 정복하라. 중세철학부터 그렇게 해왔다는 거죠. 사실은 근세에 와서 특히 심화된 과학이 발달되면서.
아까 강의한 것 다시 해봅시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존재는 눈앞에 있는 대상체로 봤다. 그게 탈이 난 거예요. 전에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회기 때문에 운명적 사회고, 그 계급에 평생토록 질서 체제 안에서 갇혀 살아야 되고, 모든 진리는 교회가 독점했고 교회는 그 당시 권력자가 쥐고 있었다. 이런 사회였잖아요. 그런데 근대사회가 되면서 눈앞에 있는 대상체를 분석하게 됐지요.
분석하는 시도가 귀족이 아니고 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중간층에서 보다 나은 상품 개발과 전쟁을 치루기 위한 기술에 힘쓰다 보니까 기술에 필요한 원리와 법칙들을 자연을 우리한테 유리한 분석의 대상이 된 거죠. 심지어 그 분석의 대상에 본인도 포함되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고 원자, 전자가 있고 원자, 전자는 에너지의 결합체다. 그냥 내가 에너지 결합체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 사회에서 만든 시장에서 나를 어떻게 봅니까? 너는 어떤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지 그걸 요구받는 그런 현대자본주의사회가 됐다 이 말이에요. 그런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이 진리가 돼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물체고 사물이 된 거죠. 사물이 된 인간은 결국 자극과 쾌락과 욕망과 새로운 자극을 향하여 돈 벌고. 돈 버는 이유가 새로운 자극을 찾기 위해서 자기의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서 그걸 만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인지 동물인지 물체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사회를 한탄만 할 게 아니고 원인을 규명해야 된다는 게 하이데거의 철학입니다. 여러분, 하이데거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 논리를 아시겠지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현존재까지 이야기했어요. 현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세계-내-존재하는 거예요. 세계-내-존재는 무엇과 구분해야 되느냐 하면, 내-세계적 존재와 구분이 되는 겁니다. 하이데거의 용어니까 어렵더라고 이해하세요. 제가 지어낸 게 아니니까. 세계-내-존재는 인간을 말하지요. 내-세계적 존재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사물체를 말합니다. 짐승, 물건, 해, 달. 왜 그렇게 구분되느냐? 아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기에 맞는 세상을 새롭게 구성하는 식으로 살아가지만 새나 물고기는 주어진 대로 그냥 있지요. 중간에 변하지 않잖아요. 어려운 게 있으면 주위에서 찾게 되지요. 그러나 에너지의 변화지 입 벌리고 있는 조개, 존재 자체의 숨겨진 계시의 게시는 아니란 말이죠. 이것까지 뭔 뜻이진 아시겠지요. 이제 남은 문제 해봅시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도구로 보는 거예요. 나한테 필요한 게 뭘까? 내 자체를 도구로 했을 때 어떤 유용성이 있는가? 둘 다 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한테 필요한 게 뭐냐? 목이 마르다. 물이 필요하겠지요. 못을 박는다. 망치가 필요하겠지요. 망치는 하이데거가 든 사례 중에 들어가요. 신발이 있다. 고흐의 신발을 보고 하이데거는 해석하기를 저것은 힘든 노동의 산물이다.
예술작품이란 숨어있는 존재가 계시의 게시를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이 세상과 만나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세상에 대해서 나한테 유리하도록 도구화시키는 동시에 이런 재주가 있으니 자신을 사용하라고 세상을 향하여 도구화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예요. 도구화의 목적이 뭐냐?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이데거는 그걸 자기실현으로 본 거예요. 이걸 비본래적 존재자라고 할 수 있지요. 세상을 도구로 보고 상대방을 도구로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기실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분명히 이런 내용도 존재에서 나온 것 맞아요. 세계-내-존재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이 존재의 다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유명하게 됐고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란 말을 듣는 이유가 지금부터 나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상대방을 자기한테 필요한 도구로만 여기는 세계-내-존재에서 숨겨진 그런 것을 통해서 진짜 존재가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 있어요. 크게 쓸게요. ‘죽음’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이 요지에요.
백날 남을 이용했다. 또 이용당하라고 직장 다니고 돈을 벌었다.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죽잖아요. 죽음이란 말이죠. 존재는 있음이잖아요. 죽음은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지요. 하이데거 생각에 있다는 것은 방향이 있는데 있는 것이라 한들 결국 없는 쪽으로 가버릴 때 존재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너는 무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무에서 유가 됐다는 겁니다.
무에서 유가 되었으면 현재 있음, 존재자의 의미는 뭡니까? 결국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자가 있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세계-내-존재. 이런 것에 대해서 돌이나 해나 달은 눈치 못 채지만 인간은 눈치 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현존재, 숨어있는 존재가 아니고 나타난 존재니까 현존재에요. 존재를 대변해주는 물이나 해나 달이 아니고 인간만이 존재의 본래 뜻을 대변해주고 나타낼 수 있어서 현존재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이해되는데 하이데거 당신 말대로 과학과 기술에 찌든 삶을 살지 말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다는데 지금 그 이야기는 안 나왔잖아. 우리는 죽는다, 모든 것이 나밖에 모른다는 것밖에 안 했지 어떻게 인간이 달라야 된다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죠. 아까 가능성이 있다고 희망을 줬잖아요. 글쎄 그 가능성이 뭐냐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이데거에 대해서 그걸 듣고 싶은 거예요. [존재와 시간]이란 책에서. 아직 시간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어요. 죽음 이야기 나오고 나중에 시간 이야기 언급돼요.
그게 ‘죽음의 선취’에요. 이게 핵심이에요. 이걸 몰트만은 십자가의 선취라고 본 거예요. 하이데거에서 그대로 따온 거예요. 불트만도 마찬가지고. 죽음의 선취란 장차 죽는다는 것은 현존재, 현존재를 인간이라고 했지요. 물병 말고 인간만이 뭘 할 수 있다? 죽음을 선취, 죽음을 미리 알 수 있다니까요.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이 인간으로 바뀔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비-본래적 존재에서는 죽음이란 것을 앞당겨 생각할 줄 모르고 도망치지 바빴어요. 그걸 하이데거는 도피라고 했는데 하나의 도피로 보고 하나의 재앙으로 보는 거예요. 나의 실패다. 그리고 그 죽음을 자기라는 영역에(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 그걸 외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거예요. 안 일어나도 되는데 재주 없이 일어난 걸 죽음이라고 본 겁니다. 세월호 사건 같은 게 대표적이잖아요.
아버지가 죽는 게 낫습니까, 아들이 일찍 죽는 게 낫습니까? 그거야 늙은 사람이 죽는 게 낫지요. 그런데 젊은 사람이 죽으면 뭐로 봅니까?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본 거예요. 그 말은 원래 현존재 내부에는 죽음이란 게 없었는데 예상 밖에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그렇게 된 거예요. 이건희 딸도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소식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팠겠어요.
하이데거는 그렇데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음이, “에이, 재수 없어.” 재수 없어서 일어난 사건으로 간주하지 말고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내적 사건으로 간주해야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내적 사건으로 일어나야 된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현재로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미래를 현재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미래, 현재 따로 있고 현재, 미래 따로 있고 과거, 현재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현재가 미래 되고 과거가 현재가 된다는 말이거든요.
자꾸 죽음을 미래 사건으로 보잖아요. 현재 사건에 죽음을 둬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은 기존의 시간 개념에서 끌어온 게 아니고 죽음을 내적 사건으로 만들면서 덩달아 죽음에 근거해서 시간 개념을 달리 봐야 우리가 본래적 깊이 있는 실존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나올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아직 안 죽었는데 어떻게 죽음을 미리 체험하느냐? 이게 문제라고 따지겠지요. 그 따짐에 대해서 하이데거가 준비한 용어가 있어요. 장차 올 죽음이 선취가 되면 우리에게 이게 와요. 불안이에요. 슬슬 실존적인 냄새가 나지요.
불안, 이게 왜 죽음이냐 하면, 아까 강의한 것 다시 해봅시다. 존재는 최종적으로 주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유가 아니고 무라 했지요. 그런데 과학과 기술은 현재 무를 상대할 수 없어요. 있는 걸 상대하잖아요. 옛날 고대인은 폭풍을 상대하지 못했지요. 과학이 발달하니까 건방져서 태풍까지는 안 되지만 폭풍은 저지해요. 원자폭탄 터뜨려서 진로를 바꾸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잖아요. 비가 안 오면 인공강우를 만들어서 비 오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과학과 기술이 얼마나 우쭐되겠습니까. 옛날에는 무에, 신에 속한 영역이 이제는 인간의 손에 있다 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런 걸 해결해도 인간 속에 있는 불안은 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무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존재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해결책이 없어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풍요하고 돈 많고 잘 살고 귀족처럼 살아도 인간의 불안 문제는 과학과 기술로 해결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바보다. 인간은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과학과 기술아, 너무 나대지 마라. 너희는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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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7-하이데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불안이란 양상으로 고지가 됩니다. 고지란 알려준다는 뜻이거든요. 하이데거가 고지란 말을 쓴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죽음이 아니고 뭔가 살아있는 힘이 있는 질서체제처럼 느껴진다, 괴물처럼 느껴진다. 죽음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 그래서 죽음은 자연적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 관한 사건이에요.
하이데거 모르는 사람은 뭡니까? 살다보면 죽겠지. 이것은 죽음은 부록이라. 보통 사람에게 있음이 주고 죽음은 나중에 사는 힘이 빠지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마치 공룡의 꼬리 부분이 죽음이고 덩치는 뭡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밥 먹고 사는 게 다잖아요.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요. 죽음이 풍선에 바람을 불면 그게 사는 게 돼요.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면 죽음을 선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자신의 근거를 모르는 비-본래적 존재자가 됩니다.
아까 이야기한 왜 비-본래적 자아, 자극에 헤매고 욕망에 설치고 새로운 자극을 향하여 잡담으로 인생 다 보내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거든. 그렇다고만 하면 안 되고 왜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와야 돼요. 그 이유는 세계-내-존재를 내-세계적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나중 사건으로 미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죽음을 나중 사건으로 미루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누굴 위한 세상입니까? 아까 인간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자기실현을 위해 존재하지요. 그럼 이 세상은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나를 위한 존재, 나를 위해 필요한 도구로 존재하지요. 그러다 갑자기 죽으니까 아쉽죠. 그래서 울잖아요. 하이데거는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네가 왜 불안하지? 눈앞에 네 것 있고 해라.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지 이유를 대라. 왜 공허한 이유를 대라. 공허한 이유를 몰라요. 나 있고 세상 있으면 이론상 자충족적이다. 자기 충족적이다. 그걸로 됐다.
엄마가 시장 갔다고 얘가 울고 있습니다. 엄마가 오게 되면 뚝 그치지요. 엄마의 젖만 있으면 되고 엄마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그 얘를 충분히 인간성의 절정으로 봅니까, 아직 인간 덜 된 것으로 봅니까? 인간 덜 된 것으로 봐요. 어린아이니까 꼭 물체 같아. 그저 물고기 같아. 물 없으면 허덕거리다가 물주면 됐어요. 주변의 세계란 것이 자기실현, 자기충족을 위해서 족하다. 이거는 인간이 아니고 물질입니다. 물질덩어리에요.
그런데 아까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세상을 바꾼다고 했지요. 바꾸면서 뭐가 발생되지요? 불안과 공허가 생기는 거죠. 그 불안과 공허가 어디서 오는지 이 세상에 있을 것 다 있는데 왜 불안하지요? 서울대학 가고 싶다고 해서 서울대학 갔고 사법고시 합격했는데 왜 불안하지요? 죽는다는 문제는 피하면 되니까. 죽을 때는 보약 먹고 링거 꼽고 피하면 되니까. 나중에 오니겠지, 꼬리부분이니까. 하이데거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꼬리 부분이 아니고 중심부분에 죽음이 나를 만든 거예요.
죽음이 나를 있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지요. 불안은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면서 여기서 아까 궁금했던 가능성이란 게 뭐냐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이 나를 만들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음 위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비로소 존재자의 의미가 찾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시간이 나와요. 책 제목이 [존재와 시간]이죠. 시간은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현재를 의미한다는 것은 기존의 도구적이고 비본래적 실존이 균열, 금이 간 거예요. 화산에 금이 가면서 마그마 나오잖아요. 하이데거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존재 인간이 순간적이고 공허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현존재가 아니고 거기서 단독자가 된다는 거예요. 단독자는 키르케고르가 먼저 쓴 용어인데 단독자가 되면 거기서 창조적 세계가 새롭게 열리게 돼있습니다.
어떻게? 쪼개진 단편적인 것이 아니고 세상 전체가 한꺼번에 인간이란 말을 안 한다고 했지요. 현존재라 했지요. 단편적이 아니고 전체적인 존재가 현존재를 통해서 솟구쳐 오르겠지요. 그러면 본인은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겁니다. 쪼개진 단편을 보는 게 아니고 세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현존재에 매달리는 게 아니고 존재 자체가 그대로 나한테 오게 되면, 이걸 현존재에서 현재라고 이야기에요. 시간으로 말하는 나라는 존재, 나는 현재가 돼요. 현재가 되면 누가 주인공이내? 전에 있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지금이 나를 매일같이 새롭게, 새롭게 매일같이 생산해내고 창조해 낸 결실물이 지금 나의 신체요 몸뚱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창조적으로 현재를 형성한다.
그러면 창조적으로 형성하면 이게 지속적인 게 아니에요. 고대인들은 현재를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지속한다는데 나를 볼 때 내가 지속적인 게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지요. 매일같이 굿모닝입니다. 매일같이 뷰티풀 선데이. 자기를 볼 때 매일같이 아름답고 감사하게 되고 새로운 한 날과 새로운 몸을 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나오지요. 고맙습니다, 죽음이여. 굉장히 역설적이잖아요.
세상의 죽음은 도피 대상입니다. 죽으면 안 돼. 이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죠. 죽음은 재수 없어. 우리 가정에 누가 죽었다면, 재수 없어. 도망쳐야 돼. 결국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죽음과는 멀찍이 떨어져야 돼. 공동묘지 근처 가면 안 돼. 귀신 나와. 이렇게 되면 세상은 자아실현을 위해서 등쳐먹고 이용만 하게 되며 죽음이 부활이 돼서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죽음을 하이데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근성이라고 하지 않고 엄습이라고 해요. 근성과 엄습의 차이를 압니까? 근성이란 일종에 습관 같아서 내 안에 내재된 버틸 수 있는 것, “나, 근성 있지.” 불안이란 예측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근성으로 이겨낼 수 있지요. 일곱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마음 준비가 된 것은 근성이고, 여덟 번째 일어날 줄 알았는데 더 망했을 때는 엄습이고. 뭔가 불안이 온다고 해서 불안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예측한 불안은 불안도 아니라는 거예요.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건 불안도 아니에요.
하이데거의 불안은 미래에서 부딪칠 정말 낯선 죽음을 현재에 미리 존재의 조개가 입이 열리면서 우리에게 계시되어 엄습할 때만 아는 거예요. 엄습이 되면 더 이상 자아실현을 위해서 사는 자체가 불안을 위발했고 이것이 내가 헛된 공상적인 상상의 엉터리 나를 나라고 착각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엉터리 존재의 특징이 뭐냐? 계속 지속을 요구한다는 거예요. 지속을 엄습을 통해서 쪼개야 돼요. 분열돼야 돼요. 분열되면 매일, 매일이 새 날이 되면서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그 날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박 목사님 그렇게 살아갑니까? 지속입니까, 파편적입니까? 하루하루. 이럴 때 그 인간은 깊이 있는 인간입니다.
이 시간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과거-현재-미래, 기존의 세계-내-존재자들이 알고 있던 그런 시간이 아니고 바로 죽음을 선취해서 나온 현재. 인간이 시간을 느끼는 게 아니고 시간이 그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현존재를 새롭게 만들 때 그 사람은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현재만 사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제 죽으나 내일 죽으나 현재만 사는 거죠. 그건 역사가 아니고 묵시가 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 비역사적 방식으로 존재를 규명한 것이 전기 사상이에요. 후기사상은 비역사적 방식이 아니고 역사과정 자체가 결정적인 거죠. 이제부터 후기사상입니다. 제가 쓴 용어에 의하면 묵시적이죠. 현재만 있으니까. 죽음을 앞당겨서 죽음이 만들어낸 거죠. 이것을 불트만한테 걸려드니까 하이데거의 사상은 십자가의 반복이죠. 십자가가 선취하는 거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십자가는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늘 반복이 되지요.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십자가 사상을 철학적 용어로 바꾼 거예요. 존재라고. 기존의 사람들은 존재가 숨어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존재,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내가 죽어서 천국 가려면 예수도 믿어야 되고 십자가도 믿어야 되지요.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거는 비-본래적이죠. 왜냐하면 자기 자아실현하기 위해서 천국 간다는 자기실현을 위해서 세계 내 움직였던 예수님이 죽었던 세계 내 사건 있잖아요. 그걸 자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이 이해했는지 자꾸 묻고 싶어요. 그래야 그 다음 진도가 돼요.
왜 신학자들이 하이데거를 좋아하는지 알겠지요. 성경에서 해석이 안 되고 논리가 연결 안 되는 걸 하이데거 철학으로 논리가 다 연결돼요. 어떻게 연결된다고요? 존재는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일 뿐이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건 어디서 나왔다? 숨어있는 존재에서 나온 존재자일 뿐이라고 돼있지요.
그걸 신학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내가 여기 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다고 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안 보이지요. 그러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존재에서 만들어진 우리가 존재자이기 때문에 존재자의 의미는 존재의 의미를 듬뿍 담을 때면 그 사람은 본래적 존재가 돼요. 만약에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본래 원초적인 창조주를 잊어버리면 인간은 그냥 자극적이고 쾌락적이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오늘도 새로운 만족을 찾아다니는 떠도는 부유하는 기름 같은 존재밖에 안 된다.
그런데 기름 같은 존재자지만 사람들은 줄곧 그것으로 사는 이유는 뭐냐?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거울 보면 자기만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거리에 나가면 상대방이 보이기 때문에. 내가 보이고 상대방이 보이고 그것이 내가 다룰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어디서 왔는지 묻지를 않아요. 왜? 깊이가 없으니까. 일단은 보이니까 보이는 나를 어떻게 만족시키느냐고 하니까 얄팍한 존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얄팍한 내가 얄팍한 나에게 어떻게 변화시켜서 존재의 깊이를 아는가? 그거는 실패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실패지만 가능성이 있다. 뭐가? 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는 건 나도 압니다. 아니야. 네가 있음을 본체로 보고 죽음을 하나의 부록으로 본 게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고 십자가를 부록으로 본 것이 문제라는 거죠.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복음이잖아요. 그 십자가를 내가 있는 중심 자리에 박아버려야 돼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게 성도의 양심이라 했지요. 성도가 아닌 자의 양심은 뭐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2장 15절 말씀처럼, 비겁하게 변명하고 고소하고 고소해도 도 변명하고. 이렇게 한 평생 다 보낸다고 했잖아요. 성도의 양심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찾아와요? 주님께서 심령 한 복판을 공격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자의 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만들고 있는 거예요. 식은 붕어빵보다 만들고 있는 붕어빵이 맛있잖아요. 주님께서 지금 놀고 계신 게 아니고 천국을 만들고 있어요. 우리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천국 만드는 거예요. 그걸 말씀대로 만든다고 하는 거예요. 하이데거의 말씀해석이 또 나옵니다. 이해되는가 싶어서 제가 자꾸 연관시켜서 이해를 돕는 거예요.
이게 전기사상이라고 했잖아요. 전기 사상은 비역사적이라면 후기사상은 역사적이라 했지요. 그래서 나온 책이 존재와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에요. 역사적으로 한다면 하이데거도 결국 존재하다가 다시 세상적으로 나갔다고 오해하지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역사는 그런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줄곧 지속되는 역사가 아니에요. 뭘 말하느냐? 묵시가 뚫고 나오는 겁니다.
여기가 세상이라면 밑에 존재가 있거든요. 존재가 뚫고 나오면 현재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BC5세기에 뚫고 나오면 BC5세기 현재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 AD2세기에 뚫고 나오면 AD2세기 현재가 되겠지요. 19세기에 뚫고 나오면 존재가 되겠지요. 하이데거는 이걸 기본 기분. 기분이란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진리라고 할 때 오래 갈 것 같지요. 뉴턴의 만유인력이 진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와서 상대성원리로 바뀌었잖아요. 진리가 자꾸 바뀌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진리라 하지 않고 근본 기분이라고 해요. 그냥 기분이라 하면 각 사람이 다르니까 그 시대를 아우르는 기분을 근본 기분이라고 하이데거만 쓰는 특수용어지요.
하나에 예를 들면 고대철학에서 그 시대의 진리가 뭐냐 하면, 피지스, 요새 말로 물질적인, 물리적인 것. 물리학을 physics라 하지요. 지금은 마음 따로 물질 따로 있잖아요. 옛날에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기본 물질을 피지스라 합니다. 그걸 하이데거는 그 당시의 근본 기분이라 하는 거예요. 모든 기분은 기분이기 때문에 앞에 붙는 게 뭐냐? 어떻게 전 세계를 빛으로 된 물질로 보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닙니다. 마음, 양심까지 합쳐서 포함시킨 개념이에요. 그게 경이로워서 그래요. 쉬운 말로 놀라워라. 고대인들은 세상을 경이롭게 본 거예요. 그게 그 당시 근본 기분입니다.
그래서 후기사상에서 시간과 존재에서 말하는 현재라는 것은 보통 말하는 역사가 아니고 묵시가 뚫고 나온 거예요. 그걸 나열한 것이 후기사상이라고 보면 돼요. 전기사상을 부정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근대과학에서 기분은 판단이 들어가요. 처음에는 경이롭다 했지요. 데카르트 이후에 회의와 의심의 기분. 같은 뜻이에요. 그런가하여 의심하는 것. 의심과 회의의 기분에 지배받는 이 시대가 근대과학시대에요.
의심과 회의의 기분에 속해요. 근대인간은 주체사상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규정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내가 의미를 줘야 돼요. 꽃이라 하매 꽃이 되었다. 규정을 하다보니까 판단을 해야 돼요. 판단하기 위해서 무규정에서 규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의심과 회의를 하게 되는데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힘밖에 없어요. 그 시대를 계몽의 시대라 합니다. 계몽은 깨우침, 깨어남. 예를 들어서 선진국 앞에서 아프리카는 덜 계몽된 거고 깨어있는 것은 유럽이죠. 그렇게 비교하면 쉽지요.
계몽의 시대에서 나온 게 뭐냐? 이념이 나와요. 진보 이념. 이제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다. 더 발전하자, 진보하자. 진보하지 회사는 무너지고 진보한 회사는 되는 거예요. 진보한 치킨 집은 되고 진보하지 않은 치킨 집은 망하고. 모든 게 경쟁이에요. 비교. 그래서 제가 설교에서 싸움에서 돈이 생긴다 했잖아요. 싸워야 돈이 되는 거예요.
진보하는 목적이 뭐냐? 각각의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에 세상은 수단이 되는 겁니다. 당신 어떻게 살아요? 우리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친절하게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 욕구충족의 끝은 자아실현. 아줌마끼리 말하면서, 아파트 샀다면서?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에요. 차 바꿨다며? 왜 바꿨습니까?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죠. 넓은 아파트가 안전하니까. 좋은 동네로 이사해야 해. 가난한 동네는 불안해. 좋은 동네에는 순찰차가 자주 다녀요. 그래서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에요. 돈 벌어서 좋은 동네로 이사 가야 돼요. 청담동 간다고? 아이고, 좋겠다.
이게 계몽이에요. 계몽하기 위해서 분석해야 돼요. 분석하기 위해서 만족하면 안 돼요. 의심해야 돼요. 회의해야 되고. 배신당하는 것보다 배신하는 게 쉬워요. 그렇지요. 쉬운 쪽을 선택해요. 그래서 그걸 한 마디로 약았다고 해요. 약지 않으면 못 사는 세계.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이라고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기분이라 하는 겁니다.
이건 비-본래적이죠. 하이데거는 이걸 경이로움, 놀라움, 이 세상 노을 보고 놀라고 아침 해 뜨는 걸 보고 눈물 흘리고. 그런 것도 있어요. 오페라 가수 소리 듣고 울지요. 그리고 열심히 신에게 기도했더니만 한 골 넣었을 때, 또는 9회 말 역전되었을 때 울잖아요. 너무 좋아서.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좋아서 울지요. 신이여, 감사합니다. 아직 경이가 남아있지요.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경이로만 돌아가서는 안 되고, 뭐로 가야 되느냐 하면, 경이의 기분으로는 옛날로 돌아가니까 안 되고 경외의 기분. 현재 의심에서 경외. 경이는 어떤 뜻입니까? 대자연이 숭고하다고 하잖아요. 숭고하지만 나는 안 변했지요. 그냥 숭고한 걸 감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경외는 뭡니까? 내가 신 앞에 굴복하지요. 경외는 이미 자기 무릎 꿇은 상태잖아요. 모세야 신발 벗어라. 이건 경이가 아닙니다. 떨기나무에 불 붙었네. 이건 경이로운데 거기서 목소리 들리니까 경이에서 경외로 바뀌잖아요.
여러분 중세미술에는 원근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것은 마귀적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눈으로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봐야 되고, 그래서 중세에서는 시각보다 청각이 발달됐어요. 쉐마! 들으라! 들어서 실천하는 것이지 네가 자꾸 보려고 하지 마. 거기는 마귀가 우상화 되어 끼어든다. 그래서 동방교회가 신상 만드니까 서방교회에서 아주 싫어했어요. 눈으로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들어야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무슨 주파수로, 개소리? 아니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 신의 소리로 듣는 거죠. 신앙생활을 그렇게 한 겁니다. 경외의 기분은 내가 무릎 꿇어야 될 대상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의심에서 경외로 어떻게 바뀌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빨간 걸로 쓸게요. 의심에서 경외로 바뀔 때는 경악해야 된다. 경악하지 아니하면 겸손하지 않다는 거죠.
이래 보니까 하이데거가 철학자잖아요. 특히 천주교 신학자들의 하이데거를 굉장히 좋아해요. 어떻습니까? 들어보니까 철학자 같아요, 신학자 같아요? 그냥 경이롭다, 숭고하다고 하면 칸트거든요. 철학자지만 경외한다는 것은 경이가 아니고 구체적인 어떤 분에게 무릎을 꿇는 거잖아요. 하늘에서 경외한다. 이건 말이 안 돼요. 뭔가 하늘을 만드신 분이 있다는 걸 경외하잖아요. 그리고 겸손이에요.
결국 불트만에 오게 되면,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게 경악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경악이 되는 거예요. 안 그래도 그 당시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고 신학자들 싫어하는데 하이데거가 철학적으로 신학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복음을 다 이야기해주니까 신학자들이 참 편하게 되었지요. 하이데거철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용어를 집어넣으면 완전히 복음이 돼버린 거예요. 하이데거를 안 좋아할 수 없지요. 성경해석에서 영향을 안 받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은 물론이고 신학 쪽에서도 유명한 인사 되었습니다.
교재 2페이지 봅시다. 하이데거가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중간에 보면, [진리 역시 결국 그 자체로 동일한 것, 불변적 것, 영원한 것을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즉 하이데거의 경우 어떤 것이 A, 그것이 다른 것, B로 드러나는 걸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우 진리는 A를 바로 A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 다음에 그 밑에, 밑에. [해석이란 개념도 어떤 것을 A를 바로 A로 전달하는 행위는 틀림없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동일성은 물론이지만 그런 A를 전달하는데 해석이란 것은 하나의 역사적이고 가변적 인간 세계에 전달하는 것이 해석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이 아니고 후기사상을 말합니다. 후기사상이 그때그때마다 계시가 되어 등장한다고 했지요. 계시, 나타난다. 은폐된 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나면서 비-은닉이 돼요. 비-은닉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숨어있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하이데거가 쓸 때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리 나타나도 은닉된 것을 주안점으로 해서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나타나면
십자가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활동한다고 하면, 신학자들은 뭐로 봅니까? 사도 바울을 이렇게 했다고 하잖아요. 자꾸 나타난 사도 바울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자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숨어있는 십자가를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에 말씀이 나타났다고 할 때 나타난 문자로 해석하면 안 되고 영으로 해석하란 말이죠. 말씀 안에 누가 계신다는 뜻이에요. 하이데거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그렇다면 어떤 A를 바로 A로 표현하는 뜻은 무엇일까? 변화 내포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철학에서 이념이라 한다.] 이념이란 순수형식을 말하는데 형식은 구체적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을 순수형식이라 해요. 내용이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역사에 따라서 이념이 근본 기분에 따라서 그 진리가 그 이념의 내용이 채워지겠지요. 그게 바로 그 시대에 합당한 해석이 된다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해석학을 펼치는 겁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걸 개혁주의라 하는 거예요. 내가 보니 이해를 못하시는데 차분히 말씀드릴게요. 루터가 해석했잖아요. 루터 해석을 가져오는 게 개혁주의 아니라고 오늘날 개혁주의가 말하는 거예요. 루터는 루터 시대의 해석이 있을 거고. 들어보면 하이데거 철학이라니까. 후기철학. 오늘날은 오늘날의 삶에 적합한 해석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진리는 날마다 개혁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지금 개혁주의 신학에 속한 교수들이 다 그런 이야기한다고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진리가 확정됐다는 말이에요,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에요?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고 최종 진리는 뭡니까? 갈 때까지 가봐야 된다는 거예요. 완전 강남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그래서 내가 개혁주의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거예요. 그들의 아무리 공부해도 하이데거를 못 벗어나요. 방금 이야기한 하이데거 해석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이데거 공부 왜 했는데? 하이데거 공부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복음과 관계성에서 하이데거가 과연 복음인지 따지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우리 십자가마을이 욕 얻어먹는 다른 말로 바꿔볼까요? 너만 진리가? 너만 목사가? 너만 성령 받았나? 그게 이 말이에요. 개혁주의든 하이데거든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이든 그들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진리를 알면 나를 구원할까? 이겁니다.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어요. 그때그때 그 시대의 근본 기분을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하이데거만 해도 유명세 떨 만하지요. 죽음을 선취한다는 말이 얼마나 고상한 말입니까. 십자가 언급하니까. 개혁주의학회 교수들 하는 말이 십자가 복음을 오늘날 현대적으로 적용해야 된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 복음을 알아서 그들을 구원시켜야 된다고 하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①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셔서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
②그 은혜에 추가해서 죄 용서하는 십자가 은혜까지 주셨다. 1번, 2번에 모든 교회가 속해서 그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워도 틀리지 않다고 장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됐다고 했지요. 제가 진짜 복음 세 번째를 이야기했잖아요. 1번, 2번이 아니라고 세 번째가 있다고.
세 번째가 바로 말씀이 직접 나타났을 때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람들은 경악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 죽인 것을 내가 받아들여서 구원받고자 했던 이 시도, 정작 주님 나타나게 되면 그분을 자기 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인간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로부터 또는 세계-내-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하이데거에 의하면 도구적 존재자에요.
하이데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하이데거를 공부한 것은 기존의 모든 신학이 하이데거 범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제가 밝혀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해석이란 언어가 자체적으로 일어나도록 존재에서 계시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텍스트는 존재가 스스로 나오는 처소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래서 인간은 언어의 창시자가 아니라 존재의 부름에 대한 응답자다. 하이데거가 후기철학에서 그런 이야기해요. 존재의 부름이란 응답자가 인간인데 언어로 응답받는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 텍스트를 통해서 은폐된 존재가 사건화 되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언어적 사건으로 찾아와서 존재로 되돌아가는 이것이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여기서 끝내면 안 되겠지요. 복음을 이야기했잖아요. 항상 우리 강의를 그렇습니다. 들어보면 다 일리 있잖아요. 그러나 복음이냐고 했을 때 과연 복음입니까? 하이데거의 문제점은 첫 번째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과연 복음이 가능성을 언급합니까, 불가능성을 언급합니까? 가능성을 언급하면 현존재, 인간 존재가 긍정돼요.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추방할 때 조금만 고생해라. 찾아갈게. 그런 식으로 추방한 게 아니거든요. 아예 추방했잖아요. 새로운 피조물은 기존의 것을 염두에 둔 피조물이 아니고 쫓겨난 인간이 원형이 아닙니다.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그 범주가 인간이 끼어들지 않아요. 아담은 끼어들지 않습니다. 아담은 단지 상징으로서만 끼어들지 아담 자체는 끼어들지 않아요. 아담은 무늬라니까. 무슨 무늬? 예수님의 무늬가 되는 거예요.
복음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만 살아있어 활동하는 게 복음이에요. 내가 어떻게 이용하는가? 그건 복음 아닙니다. 모든 일이 주님 홀로 이루는 게 복음이에요. 우리는 복음의 보디가드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볼까, 하는 것은 복음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여, 내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건 복음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게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주님의 정의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가능성이 있으면 안 돼요.
주의 말씀 속에 있잖아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것은 가능성을 언급한 거예요, 불가능성을 강조한 거예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우리 가운데 누가 높으냐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쓴 잔이 마셔야 한다고 할 때 쓴 잔이 뭡니까? 쓴 잔을 예수님이 먼저 마셨지요. 포도주가 쓴 잔입니까? 포도주 마시고 싶어 하겠다. 술 취하려고.
쓴 잔은 주님도 주춤했습니다. 아버지께 어떻게 안 마시는 방법 없느냐고 물었잖아요.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자아라고 했고, 예수님의 자아는 하나님의 언약의 주체를 위해서 예수님 자아를 바꿔치기 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할 수 있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 자아가 언약 안에서 새롭게 구성될 주님의 주체로 바꿔집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누구나 가능성 됩니까? 가능성 되는 게 아니죠. 오히려 불가능성을 고백하는 거죠. 뭘 해도 안 되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하이데거는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십자가 복음과 원수입니다. 십자가는 보면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고 오직 마음으로도 안 되고.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안 돼요.
제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목회한다고 유명 인사됐다는 거예요. 제가 그분한테 이야기했어요. 목회를 왜 합니까? 목회 할 사람이 그렇게 없던가요? 목사가 목회하는 것은 죄라는 걸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진짜 목회는 누가 합니까? 주님이 혼자 하시잖아요. 살아계시니까. 주님의 목회가 시원찮습니까, 부실해요, 오류가 많습니까,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있어요? 목회를 주님 혼자 잘하고 있는 왜 우리가 목회를 해야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목회 실패자로 부름 받아서 진짜 목회는 주님만 하셨다고 증거하라고 목회자 된 거예요. 주님만 증거하면 돼요. 우리 성도는. 이게 복음이에요. 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신학이라고 해서 어떻게든 사람을 달래고 꽤서 교회라는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온갖 고상하다는 십자가, 복음, 언약, 다 동원해서 하이데거처럼 불가능하지만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현혹하잖아요. 주님이 성령 준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꼬시지 마세요. 교회 오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옵니다. 왜? 주님이 복음적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이게 주님의 목회와 우리 목회의 차이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도 하이데거철학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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