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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 7:25-28 / 육신의 고난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7:25-28 / 육신의 고난

정인순 2015. 5. 24. 15:58

 

 

이근호

음성  동영상 유튜브

 

고린도전서 7:25-28     육신의 고난

 

혼자 사는 것이 같이 사는 것보다 여성에 있어서는 보다 편하다는 겁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다른 점입니다. 물론 여성은 이래나 저래나 남성보다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남성이 모르는 행복감을 여성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이점은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주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았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셈인데 그 이유는 세상 모든 변화가 예수님 계신 곳으로 쏠리고 빨려 들어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태풍의 눈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고난만 피하고 예수님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삶을 사려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 말씀을 적용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본인도 예수님로 쏠리는 태풍에 휩쓸리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는 고난이 없으나 영원한 고난을 받게 되면 본인으로서는 큰 손해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고난을 만들어서 유포시켜놓았습니다. 게다가 악마가 그 고난을 더욱 부추여줍니다. “이렇게 하면 고난이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다가 이도저도 안되니 나중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의 인생을 살아라. 네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즉 고난과 고생이 겹치니 사태 해결에 도움될까 봐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 충성했던 자들이 결국 자기 가치성으로 되돌아서는 이유는, 육신의 고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힘들면 정신적으로도 힘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육신이나 정신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이 행함이었던 게 문제가 됩니다. 신에게 줄 것 주고 정작 본인이 원하는 바를 받아내겠다는 심보로 교회에 출석한 것입니다.

 

교회가 사실은 그것을 상품화하여 고객 확보를 노리고 설립하고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는 죄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그 죄가 가만있지 않고 자꾸만 이리저리 쑤시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를 피하려다가 사태를 더 악화시키게 됩니다. 그 어떤 조치도 주님의 조치임을 알고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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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고난

2015년 5월 3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25-28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7: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7: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사도 바울은 ‘임박한 환난’을 언급하면서 뒤이어 결혼에 대해서 소극적 대응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헤어지자면 마음 아프게 생각할 것도 없이 놔주어라 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 헤어지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내어쫓는다든지 반대로 혼인생활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 모든 대응은 임박한 환난의 성격을 미리 아는 자들의 처신에 맞다 는 겁니다. 환난에 대해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이러다가 내 것 날아 가버리겠다”는 우려감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살 수 있는 조건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고 그것이 인생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씀은, 혼인으로 단단히 결속된 관계가 결코 환난 때에 버틸 수 있는 조건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혼인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가 환난 날에서 낱낱이 조각조각 나버립니다. 우정과 애정과 신뢰와 배려와 성실함과 친절함과 희생과 양보로버티든 인간 관계가 환난이 찾아오게 되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저주 퍼붓는 관계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뒤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육신 대 육신의 관계가 실은 죽음을 근거로 해서 유지되면 그 죽음의 힘이 외부로는 이기주의의 힘으로 발휘됩니다. 아무리 외부적으로 고상함을 내비쳐도 내부적으로는 오직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환난이란, 인간들이 스스로 힘으로 자기 행복을 사수하겠다는 모든 요건과 환경을 다 무산시켜 버리는 방식으로 찾아든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약속 자체 안에 이미 ‘환난’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1에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 14:13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는, 성도 아닌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식으로 살지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쉼을 얻는채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바깥에서 아무리 환난의 회오리 바람을 불어도 성도는 ‘주 안에서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아무리 나름대로 행복의 요건을 다 갖춘다 할지라도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 환난마저 복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쉼이 주어지는 것도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입니다.

속죄의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체 다른 성공사례를 요청하지를 않는 방식입니다. 성도의 어떤 경우라도 속죄의 능력은 무효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함을 보고서 그때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행함마저 ‘속죄의 능력’의 산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자꾸만 거룩해지는 행위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기 노력에 대한 결실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도됨은 성도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 속죄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진 결실물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실패나 모자람이란 없습니다.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 다 보고 난 뒤에 따라오는 상쾌함 같은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입니다. 바로 이런 속죄의 능력으로 탈락당한 자들의 발생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환난입니다.

느헤미야 시대 대, 유대인들은 인구의 10%를 예루살렘 경내에 거주시키면서 나머지 10의 9가 복받기를 원했습니다.(느헤미야 11:1-2) 이들은 성전과 예언자들의 예언한 계시를 연결시켰는데, 선지자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반드시 성전이 있는 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성취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올 메시야는 바로 이 성전개념 자체로서 오실 분이십니다. 성전이 성취된다는 말은 구약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모든 예언이 이미 그 분 안에 고스라니 다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게 되면, 요셉의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어진 인생이 아니라 말씀이 현실에 자리잡는 과정 속에 합류된 일생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환난’은 곧 애굽 전체가 심판받는 환난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최후의 환난은 이미 예수님의 몸 안에 함께 있습니다. 마치 팽이가 제자리에서 맹렬하게 돌면 주변에 회오리 바람이 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면서 7 교회를 손을 쥐게 되면 그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탈락된 나머지 인간 세계에 대해서 혹독한 징벌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정신적인 다툼입니다. 환난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물리적으로만 다가오지를 않았습니다. 우선은 정신적인 혼돈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마치 조선시대 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여타의 사회 체제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즉 조선인들은 평소에 자기 육신의 안락함 이외에는 최종적으로 다른 목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해서 평등을 외쳐버리면 그들은 자동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환난이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시는 겁니다. 환난은 벌써 시작된 혼돈의 얼룩입니다.

혼돈이란 창세전의 상태입니다. 즉 모든 있는 것들이 없든 시절입니다. 그 시절의 내용을 바닥에 깔고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예수님의 ‘자기 뜻’은 예수님의 일의 장애물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의 육신이 성도가 증거해야 될 복음의 장애물이 됩니다. 걸핏하면 자기 행복을 위한 공간과 요건으로 만들어버리는 성질을 육신이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당연히 파괴되어야 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마저 속죄의 능력을 위해 필수적인 순서라는 사실을 성도는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풍부하고 늘어나도 참된 성도 같으면, ‘십자가의 속죄 능력’에만 최종 마음 두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일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의미를 위해서 우리가 없는데서 태어났음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