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7, 8강 (생명수) 본문
녹취:공은주
수원140501a-(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저는 창세기부터 죽 할 예정인데 언약 적으로. 그 전에 지금 4강을 거쳐서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되며,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며, 전체적인 것을 먼저 하려고 했습니다. 첫 째, 둘째, 셋째 지났고 오늘은 서론의 마지막 시간 네 번째 시간이에요. 오늘하고 난 뒤에는 제 생각에는 창세기를 할 예정인데 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겠습니다마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를 요 내용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또 늦게 오신 분도 있으니까 첫째, 둘째, 셋째를 복습하고 오늘 넷째를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레미야11장3절 말씀을 했거든요. 이제는 아이고, 목사님, 그만하세요. 지겹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짧게 할 테니까 11장3절에 보면, 이 언약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제가 이 말씀을 거론할 때에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언약 없는 하나님과 언약 있는 하나님을 구분했지요. 그림 그리는 것도 시간 아까워서 안 그리겠습니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냥 본성상 섬기는 신이고, 가짜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우상이라 하고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했다 했잖아요.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쓰는 용어를 한 것은 제가 예레미야11장3절에 언약의 말을 쫓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해서 언약이란 자체가 성경에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말을 했습니다.
언약이란 말을 생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약속으로 바꿀게요. 같은 뜻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오시면서 뭐를 들고 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약속을 가지고 왔을 때, 우리에게 약속을 풀어놓으면서 그 우리를 통해서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약속에 포함된 사람만 보따리 싸가지고 데려가면 그게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껌을 좋아하신다고 합시다. 껌을 좋아해서 질겅질겅 껌을 씹으시면서 하나님의 껌이니까 덩어리가 아주 큰 것으로 생각하고 껌을 씹고서 오셔가지고 사람들이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하니까 껌을 가지고 전부 다 몸에다 붙여놓고 예가 촌스럽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겅질겅 씹던 껌을 그 사람에게 붙여놓고 껌을 살살 잡아당기는 거예요. 이 껌은 안 떨어져요. 그러면 그 사람 몸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주님이 씹던 껌이 붙어서 그 주인이 잡아당기면 마치 낚시하듯이 작살 던져놓고 감으면 낚시되듯이 그 껌을 감아버리면 그게 약속의 완성된 상태가 되고 그 약속의 완성된 상태를 천국이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껌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한 거예요. 가인의 제사에서는 그냥 빌면 복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껌을 붙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 껌을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껌을 하나님의 약속 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붙어있기 때문에 언약의 완성된 상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언약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로마서8장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요, 라고 있지요. 갈라디아서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약속’이라고 했어요. 약속.
그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앞에 뭐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뭐로 보느냐 하면, 씨와 땅으로 보지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걸 생각해요. 자기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 약속이 씨와 땅이 아니고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것이 성령으로 바뀌었어요.
요한복음14장에서는 성령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처소’라고 해요. 처소. 처소니까 이건 공간개념이잖아요. 이게 뭔가 어떤 제약된 공간이죠. 그 처소 안에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그날에는 너희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는 같은 처소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된다고 이렇게 요한복음14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7장가면 예수님이 겟세마네기도 내용이 나와 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피와 땀이 됐다 해가지고 그것만 신경 쓰는데 우리도 악발이 같이 기도하면 응답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기도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주여, 저희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게 겟세마네기도의 요지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바로 선택된 그 자를 위해서 내가 기도합니다.” 라고 요한복음17장에 나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왜 중요한가 하면, 요한복음3장16절 때문에 중요한 말이 되어버렸어요.
요한복음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세상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진척이 되고 구체화되니까 요한복음17장6절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 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뽑아놓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요한복음3장만 들이대면서 전도하는데 그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포함된 그러니까 요한복음17장에서는 이렇게 조감도로 비춰보면서 세상을 사랑하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세상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기다려라 내가 간다. 자기 택한 백성이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위함인데 아버지 뜻은 뭐냐, 내게 주신 자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함으로서 이것은 사도 수준에서, 인간 수준에서의 전도와 선교가 모두가 의미가 없음이, 손 털어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인간이 하는 모든 전도, 선교, 교회 크게 키우기, 모든 어떤 시도나 노력이 의미 없는 거예요. 인간 수준에서.
사도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면 사도는 인간수준에서 전도, 선교하는 게 아니고 이미 완성했다는 택한 백성만 찾아간다는 주님의 수준에서 비로소 전도, 선교를 하는 거죠. 인간 수준에서는 전도, 선교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괜히 선교 전도했다고 그것가지고 닦달 낼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공들였는데 왜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위할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세상이 아니고 세상 중에 있는 내 백성, 그들에게만 껌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약속한, 아브라함의 언약이죠. 언약인데, 언약의 뜻은 뭐였습니까? 바로 준비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데서 살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건 저주받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없고 결정한다는 것은 오늘 강의하면서 요거하나 꼭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무 차별성. 인간 대 인간의 도토리 키 재기에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설교에서 언급한 게 있어요. “저 사람은 성질이 더러워서 성경이 나빠서 지옥가고 나는 성격이 좋아서 천국 간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어떤 차별성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와야 구원받고, 성령이 오게 되면 강도라 할지라도 창녀라 할지라도 구원받고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이 점잖다 할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 하면, 약속과 성령은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님 약속을 수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약속은 수정이 안돼요. “왜 수정이 안 됩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두 분만이 머리 맞대고 창세전에 결정했기 때문에 그 뒤에 태어난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여러분, 자식이 부모보고 “부모님, 왜 저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저는 왜 이렇게 들창코입니까?”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저는 왜 쌍꺼풀이 없어요?” 이런 거 따질 수 있습니까? 그걸 따질 수 없으니까 기껏 부모들이 하는 소리가 너도 나중에 부모 되면 알리라, 해서 노래가사에도 나와요. 부모 되면 알리라. 부모 돼도 몰라요. 과학에서는 DNA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DNA 때문에 그러면 나중에 왜 부모님은 병원에 가서 미리 DNA조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소송 들어올 수가 있어요. 생명과학이 발달하면 소송 들어옵니다. 미리 IQ170만들지 않았던 부모를 향하여 고소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답변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차이를 안 뒀잖아.” 그러니까 차이를 안 둔 거예요. 참 말 뉘앙스가 희한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차이 없이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왜 일방적으로 천국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왜 지옥가기로 결정했는가, 왜 차이를 두십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갑자기 말이 어려워졌지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모녀 두 분이 만약에 외식을 갔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장면, 따님께서는 짬뽕을 시키고 있는데 제3자인 제가 차타고 가다가 갑자기 내려가지고 “여기 탕수육 하나요!”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괜히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장면 먹을 것인가, 짬뽕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끼어들어가지고 탕수육 하나요!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만들어졌지 나를 위하여 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식이 부모보고 “어머니,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런 소리 할 때는 뭐냐 하면 ‘나는 날 위해서 살지 나는 부모 위해서 안삽니다.’ 생각할 거다 말이죠. 만약에 부모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런 반발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겠지요. “어머님, 어떻게 낳아졌던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어머니께서 “니는 영원토록 나의 나라에 살아라. 내가 만든 나라에 살아라.” 이렇게 되거든요. 따지고 보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부모가 만든 나라에 자식이 살거나, 아니면 자식이 따로 만든 나라에 부모를 모실 것이냐, 그 문제라니까요. 2000년 신학이 결국 그 문제에요.
인간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위해서 만든 나라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결정 놓은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 것이냐 그 문제입니다. 들어가서 살 문제 같으면요, 군소리하지 마세요. 군소리하면 그 나라 데모 일어납니다. 시위합니다. 이 복잡한 성경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잖아요. 결국 문제가 뭐냐 하면, 나만의 따로 영광 받는 다른 세계를 내가 궁시렁 궁시렁하면서 자꾸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그걸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거예요. 마귀 사탄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4장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너희가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신이 너희로 하여금 그 눈을 감기게 했다는 거예요. 눈 떠라. 주님이 부모라면, 부모의 나라에 들어가 살지 너가 영광 받는 이름이 영광 받는 니 세계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철저하게 마마보이 되어야 됩니다. 마마 걸, 마마보이. 마마보이, 마마 걸 할수록 사랑받아요.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애가 물에 빠져죽던지 이왕 죽은 애가 죽었다고 확인할 차원일 뿐이에요. 망대에서 떨어져서 18명 죽을 때에 “니, 살았다고 좋아하지? 회개치 않으면 다 같이 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가 토 달면 안돼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토 달면 안돼요. “왜 이 컵이 녹색입니까? 빨간 컵 안 가지고 오고.” 주신 사람 마음대로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내 애가 죽든 살던 간에 주신 분이 만든 거지 나만의 세계에 왜 손대십니까?” 이렇게 하게 되면 천국 가는 자세가 아니에요.
천국은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나라고, 내 것 따로 챙겨가지고 어디 천국 가서 부동산중개업할 일 있습니까? 따로 부스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지가 딴 살림 차릴 일이 아니잖아요. 천국은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천국 사는 생활을 지금부터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어떻게 하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저 분들이 천국 가는 삶을 보이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삶이 아니고 지금 당장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그 삶의 자세가 천국에서 통용되는 삶이냐를 그걸 주시하면서 그쪽으로 말씀을 증거 해야 돼요. 그 쪽으로. “집사님,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어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이 말했지요. 예수님, 우리 중에 하늘나라가면 누가 높겠느냐 할 때, 주님 마음이 이래요. 니가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느냐, 천국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느냐 말이죠. 차라리 어린아이 데려가죠. 있는 것 전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천국 가는 자세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은 누가 높으냐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게 있다. 뭡니까? 내가 마시는 쓴잔을 너희들이 마셔야 된다. 아이고, 씁니다. 안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빼지 말라.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야 돼요. 그게 천국생활이에요.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가니까.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이래도 니가 감사하느냐, 저래도 감사히 받느냐하는 그것이 되게 되면 그 환란가운데서 소망의 나라 ‘아! 천국은 뭐든지 감사할 것밖에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야기한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8장에 보면, 빌립과 내시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기억나십니까? 그때 제가 한 것은 뭐냐, 성경해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알겠는데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데 구멍이 있어야 되거든요. 구멍 뚫고 들어와서 확 퍼지게 하면 된다 말이죠. 태백시 장성에 석탄 공사 있지요. 구멍 아무나 팝니까? 구멍 갱도 먼저 뚫고 옆으로 퍼져서 무려 지하1Km가가지고 지금도 파내고 있어요. 고 성경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그 뚫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어떤 분이 질문한 걸 가지고 십자가마을에 올렸어요. 질의와 저의 답변하는 제목으로. 성경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하기를 에스겔23장에 거기 창녀가 나오는데 창녀로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나오지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을 비유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내 인생과 똑 같으냐 하면서 질문한 거예요. 나는 남자를 데게 좋아했는데 차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는 앗수르같은 남자다. 너무나 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다가 완전히 소 뒷발 차듯이 차여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직도 나는 결혼도 안하고 임신도 한 적 없고 애도 없는데 성경에 보니까 니가 애를 불속에 집어넣는 우상숭배를 했다는데 왜 다른 건 다 적용되는데 나는 애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애를 우상으로 불 속에 내놨다고 하십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질문 자체가 굉장히 순박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QT를 해도 어떻게 성경문자대로 현실을 그대로 봤느냐 말이죠. 자기는 그게 천사가 와서 가르쳤다고 해요. 천사님이 와서 가르쳤다고 하는 거예요. 질문 자체를 그대로 올려놨으니까. 그래서 내가 답변을 했지요. 성경해석을 할 때에 사적으로 1:1로 맞아주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성경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답변했거든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불태운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그 당시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잘사는 것에 대해서 현혹되었고 마음이 빼앗겼고 그것이 삶의 목표였고 목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같으면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이게 지금 목적이 된 거예요. 빨리 돈 벌어서 호주로 이주 갈 생각을 하고 미국 갈 생각을 하고 유럽에 살 생각을 하고 성경을 해석을 할 때,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녀 짓을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멸망된 시점에서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회구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은 창녀 짓했다. 왜? 앗수르, 바벨론 이처럼 멋있고 정력 좋은 남자를 찾았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어떻든 간에 결과가 너무 너무 잘사니까 잘살고 여유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고 여호와 다 버리고 여호와 섬겨도 껍데기는 완전히 저 쪽 잘사는 나라 종교로서 다 바뀌어버린 거예요. 솔로몬부터 이미 그랬으니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거 유지입니다. 내거 유지. 더 나아가서 확장입니다. 이 공식이면 끝나는 거예요.
내 건 여기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있다. 유지해야 돼! 그 다음에 아내는 유지 쪽으로 남편은 확장 쪽으로. “아니야, 세상에 나가봐라.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 많은 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내가 일 들어갈 테니까 앞으로 아파트 평소 넓은 데로 옮기자. 차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애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게 유지와 확장이에요. 그러면 유지와 확장이 아주 잘된 곳에 사람들을 인생의 모델로 삼는 겁니다. 이미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자기 목적은 정해져 있지요. 사람은 목적 없이는 권태로워서 못 살아요. 목적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사람의 소망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소망을 만들어내야 되고 절대로 그 소망은 이루어지면 안돼요. 왜냐 하면, 소망이 조금씩, 조금씩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소망이 마무리되면 허탈에 빠져요. 그러니까 소망은 계속 조작해서 만들어내야 돼요. 이번에 소치동계 올림픽 할 때, 이상화선수가 스케이트 타잖아요. 중계 방송하는 카메라 어떻습니까? 이상화선수보다 항상 조금씩 앞서가서 달리지요. 카메라가. 카메라가 자동적으로 앞서 달려가면서 찍잖아요. 그게 소망이에요. 소망은 나를 유인하는 유인책이지 우리가 달성용이 아닙니다. 하나 목적 끝나면 새로운 목적을 또 만들어내요. “엄마, 나 요번에 전교에서 10등 했어.” “그래, 5등까지 끌어 댕겨.” “5등 했어.” “2등 되어야 돼.” “요번에 승진했어.” “부장되어야 돼” 계속 끌어당긴다 말이죠.
그걸 누가 잘하는가, 그걸 앗수르가 잘하는 거예요. 이방나라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건 앗수르만 잘하기 때문에 앗수르 같은 교회에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계속해서 연초에 신년예배 드리면서 계속 목적을 하고 교회 자체가 계속 비전과 비전을 유발해내야 돼요. 프로젝트를 만든다고요. 올해는 600명. 3년 내에 1000명 만들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짓기, 주차장 넓히기, 여러분들이 아낌없이 헌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우리가 뭔가 께름칙 않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나 회사나 자기 자신의 가정이나 앗수르에 물들은 걸 가지고 창녀라고 합니다. 그걸 가지고 창기라고 하는 거예요. 감사함이 없어요. 감사함이 없다니까요. 사람이 현재 현상유지하면 감사할 줄 알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돈 많은 부자들이 행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돈 노리고 사돈의 팔촌 다와 가지고 갈아먹을 가능성이 많아요. 좀 뭔가 맞벌이 하게 되면 뜯는 사람도 더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맞벌이 안하게 되면 주부가 놀게 되면 주위에서 또 찾는 사람이 많아요. 심심하니까 놀자 해가지고 찾는 사람이 또 많아요. 이 세상 자체가 잘되는 것에 대해서 타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날마다 바꿔치게 하면서 우리는 뭔가 내 욕망이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거예요.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인데, 인간들은 뭡니까? 주님 이용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낮은 곳에 가야 천국으로 빠지는 개구멍이 거기 있거든요. 개구멍이. 높은 곳에는 출구가 없어요. 마귀가 기다리고 있어요. 염라대왕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빌립보서2장 이야기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니까 주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잖아요. 빌립보서3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든 간에 십자가로 간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의 공식인데 사람들은 반대로 나가요. 집안 거덜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두고 사시라 이 말입니다.
남이 잘되고 남이 승진하고 부자 되더라도 그건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니라. 물론 주는 돈까지 거부하지 마시고요, 또 잘사는 걸 가지고 죄악된 거라 그럴 필요 없는데 잘산다는 것이 소유의 넉넉함에 잘사는 것이 아니고 생명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보고 사는 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놓지요. 안개가 끼어서 시야가 확보가 안 돼. 누가 잘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화가 치밀고요. “주님은 뭐하시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하여튼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요.
성경에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최소 교회는 두 명입니다. 충분해요. 주님이 계시느냐가 관건이지 5천명이 있어도 주님 없으면 그건 교회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앗수르 같은 교회, 바벨론 같은 교회를 원하는 거예요. 그걸 목표로 하고 있고 또 목적으로 하고 있고. 마귀가 누구를 무서워하는 줄 알아요? 십자가 보고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오천명, 육천명 쓰레기 같은 인간들 겁나지도 않아요. 단 하나라도 자기가 돌아온 탕자라고 여기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해요. 주님의 껌이 붙어있는 사람, 주님이 늘 잡아당기는 사람을 늘 무서워해요.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11장38절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세상이 감당치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둘째 날 한 것은 뭐냐, 십자가로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멍을 파서 십자가로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니 계획 아니고 벌써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만의 확정된 그 계획이었고 너희들 있는 곳에 찾아온 것은 그 계획에 참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니 권리 있다고 주장하지 마라, 우리는 따질 권리조차 우리한테 없고 그냥 우리는 결과물로 하나님의 약속의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물로 오늘도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면서 이 자체가 하나의 결과물로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했습니다. 에스겔3장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니가 이 말씀을 먹어라. 그러면 니 입에는 굉장히 달 것이다. 좋지요. 니 배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다? 쓰디쓸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달면 끝까지 달아야지. 처음에는 달고 끝에는 쓰고. 무슨 이상한 한약을 집어넣었는데? “말씀이 왜 그렇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괜찮은데 너는 말씀 듣고 구원 받고 줬는데 주변 세상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죠.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게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로 인도해요. 고난의 길로 가게 만들어요. 지금 말씀 전하는데 가만두지 않잖아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정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참 좋은데, 이상하게 왜 성경내용에 대해서는 삐딱하게 보느냐, 모든 걸 매사를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느냐, 많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거예요. 십자가 자체가 부정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십자가 언급할 때는 반드시 나오는 게 있어요. ~~가 아니요, 가 먼저 앞서 나와요. 뭐가 아니요. “~~가 아니요 ~~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내가 너희를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항상 무엇 무엇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여러분, 외롭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천국 갈 때까지 재미있게 삽시다.” 이게 아니고 무엇 무엇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교회가 아니요,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순교한 이유가 있지요. 긍정적이었으면 순교했겠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리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란 작자가 이상한 소리해도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니까 우리가 손대지 말라.” 라고 할 정도로 그만큼 마음이 넓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공부 보세요. 놀라울 정도로 삶이 성화된 삶이에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거기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와요. 소위 대자대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리 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가장 자비롭고 경건한 것에 최종 주자, 제일 앞선 선봉주자가 누구냐, 바리새인이에요.
나머지 사람은 바리새인 저 뒷자리에 줄줄이 서야 돼요. 지금도 유대교에는 유대교에 대한 해석 책이나 유대교에 대한 성경 해석 책이 있거든요. 미드라쉬 그리고 탈무드라는 유명한 게 있지요. 탈무드 책에 봐도 그 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항상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먼저 사랑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녹녹히 녹아져있고 그것이 예수님 이전부터 이미 그런 것이 역사가 되어있다 말이죠.
바리새인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구제했고 우리는 이레에 금식했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왜 했는지 알아요?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 돕자고 내는 겁니다. 그 십일조를.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누가복음18장에서 그 바리새인 어떻게 됐어요? 지옥 갔어요. 그리고 천국 간 사람은 주여,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세리는 니가 의인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기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이 다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본인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그들은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중립지대에 있어야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도 말씀에 주는 취지가 살아나요. “야, 똑바로 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야, 똑바로 해. 니가 만약 똑바로 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 줄 거야.” 이 말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이 아직 죄인 자리나 의인자리까지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그 뜻이겠지요.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분류되고 악인도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도 될 수 있다는 그러한 중립지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바리새인은 해석할 때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미 처음부터 죄 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요한복음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죄에 매인 적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그러니까 느그 애비가 사탄이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라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도 대화가 안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대화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이 와야 이런 취지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출발점을 중립지역에 놓지 마시고 아예 죄인으로 놔버리면 이해 안 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참 달지요. 단데, 그 달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단가 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나와서 세상한테 시달릴 때, 그 시달리니까 말씀 포기할까요? 힘드니까 이제는 예수 없다고 할까요? 내 자식이 진도 앞바다에 창원 바다에 섭씨10도에 빠졌으니까 이제부터 하나님 믿지 말까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라는 밀양이라는 영화 테마입니다. 자기 아들을 납치해서 죽였던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전도하기 전에 회개하니까 전도로서 복수하려고 하다가 그게 실패로 끝나니까 여자주인공 전도연이가 하나님은 없다.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내가 어떤 뜻을 담고 기도해도 절대로 그 뜻에 장단맞춰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돼요. 그렇다면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손에 쥐는 하나님을 원했던 겁니다. 내 손에 쥐이는 하나님. 아까 자식이 부모 집으로 가면 델 텐데 자식이 자기 집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부모를 자기 집에 모셔서 쥐려고 하는 그런 심보를 우리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에스겔 본문을 언급한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달달하고 맛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감사해야 된다는 그 취지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오늘 네 번째 말씀은 에스겔37장12,13절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 다음에 22절,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요 대목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강의 내용이 저로서는 무척 쉬웠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할 강의내용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당히 난해한 내용입니다. 어떤 데서 난해한가 하면, 에스겔37장 12절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리라 할 때,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이게 오늘 네 번째 강의의 핵심내용입니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강냉이 죽 끓일 때 처음에 강냉이 들어가지요? 알맹이가 들어가요. 옥수수죽에 알맹이를 집어넣습니다. 물 넣고 센 불에 끓이면 알맹이가 어떻게 돼요? 다 뭉그러져서 알맹이가 없어지지요. 호박죽도 마찬가지고 없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개인적 입장에서 “저, 어때요?” “왠 이런 일이?” “저 어떻게 구원될까요? 지옥 갈까요? 알려주세요.” 항상 개인문제에서 출발하잖아요. 그걸 죽으로 녹여버리면 개인이 사라져요. 이 사실을 기독교 역사가운데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 사실을.
자크엘룰이라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격분해서 L'homme et l'argent(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에서 나온 책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시작! 일본 말로 요이 땅! 하거든요. 시작할 때부터 벌써 복음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초대교회부터. 사도바울이후에 교회 시작하면서 이미 복음은 날아가 버렸어요. 자크렐룰은 그 책에서 말하기를 왜 교회에서 복음이 날아가 버렸는가 하면, 진리가 날아갔느냐 하면,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본 거예요. 교회가 힘의 맛을 본 거예요.
그 당시의 초대교회 때는 로마나라 아닙니까. 로마나라는 네 번째 짐승이에요. 다니엘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이에요.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 두 번째 짐승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사 바사, 세 번째는 바사를 공격했던 헬라BC313년, 그 다음에 그 헬라를 쳐 부신 것이 BC163년경에 로마에요. 바벨론 다음에 바사, 헬라, 로마.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짐승이란 표현을 안 썼을까요? 그 전에는 뭐가 있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렵더라도 어차피 우리의 강의는 어려워질 것이니까 미리 맛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건재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만 상관을 해요. 관계를 했습니다. 아직 이방인들은 놓아버리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그냥 묵인하신다. 사도행전1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방나라가 어떤 신을 섬기든 하나님은 묵인했으나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를 보내서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모든 민족, 민족이라 할 것 없이 모든 민족의 제한 없이 마지막 심판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심판해버리겠다는 것이 사도행전17장에 사도바울이 아덴 설교하는 가운데 그게 나와요.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 건재했던 그 시점과 그 후를 나누어서 발하는 겁니다. 현실이.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여할 때는 이방나라는 어떻게 놓든 관계있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을 해서 저주받아서 없애버렸어요. 없애버리면 나라는 없어지지만, 뭐는 남아있습니까? 나라는 없지만, 뭐는 연속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연속되어야 되겠지요.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이 질문은 이미 벌써 끝났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남편 술 끊는가’ 벌써 이 문제도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님은 지금 사적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다 떼어내 버려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잘 믿는 우리 언약의 하나님이셨던 그 언약 공동체를 없애버려요. 이 땅에서 이 지상에서 날아가 버려요. 없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데 언약에 의하면, 언약에서 한 나라를 만들어요. 그런데 언약은 나라를 만든다는 약속은 있는데 이게 구체화 된 게 없지요. 왜? 있는 나라가 멸망했으니까. 그러면 이 나라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언약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겁니까?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요. 어떻습니까? 역사에 있는 이스라엘을 한 번 실험을 해봤는데 이게 안 되니까 역사에서 사라졌지요.
역사에서 사라지면, 언약은 살아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언약마저 “아이고, 나 인간 때문에 일이 안되네.”이런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너희들이 못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실하게 이루어지잖아요. 그 이루어진다는 것은 뭘 초월한다? 역사를 초월하잖아요. 역사를 초월하면서 그 때 등장한 용어가 뭐냐, 짐승이라는 묵시적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왜 바벨론부터의 짐승이냐, 그 전날에 모압, 암몬, 이런 나라가 있는데 왜 그건 짐승이 아니고 왜 바벨론부터를 첫 번째 짐승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짐승이 등장했다는 이 말은, 사람보고 짐승이란 말은 기분 나쁜데 느브갓네살 보고 짐승이라 이야기했다 말이죠. 내가 보기에는 아저씨인데, 아저씨가 왜 짐승입니까? 짐승이라 하는 것은 소, 돼지, 가축 이런 것이 짐승이지. 하이애나 같은 거 있잖아요. 먹이 찾아 헤매는 하이애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킬로만자로에서 볼까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하를 말하고, 땅에서 온 짐승 같으면 개나 돼지나 하이애나지만, 이 짐승이 어디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올라온다고요.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바다와 육지의 가름은 이것은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셋째 날에 뭐했습니까? 땅과 바다를 분리했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창조이전에 숨겨진 비밀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드디어 배후에 숨겨진 아우라가 피어난다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마치 소설 쓰는 느낌 드는데. 소설이 아닙니다. 마치 세월호 침몰하고 난 뒤에 귀신들이 진도근처에서 피어오르는 그 느낌이 든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역사만 인정되는, 눈에 보이는 역사와 이순신장군, 강감찬 장군만 인정되는, 이 세상에서 짐승의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짐승의 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건 상상도 못한 거죠.
그래서 느브갓네살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대해서 모든 역사는 실제에 있는 바벨론나라에요. 실제로 그 나라에 있었어요. 지금 북한이 있고 필리핀이 있는 것처럼. 실제 나라가 바벨론이거든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짐승과 관련된 나라라는 거예요. 바벨론.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이쪽이 묵시가 돼버리면, 묵시가 된 상태에서 이젠 짐승에 대한 공격이, 짐승에 대한 공격을 하려면, 인간은 짐승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증명되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줬을 때, 나름대로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지켜봐야 율법이 완성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로마서 3장, 4장, 5장, 6장, 7장이 뭡니까?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확실하게 됐습니다. ‘아! 어떤 인간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십계명 지키려고 덤벼들다가는 십계명 앞에서 더욱 더 죄인 됨을 더욱 더 노출시킬 수밖에 없구나!’ 그 이유가 뭐냐, 너희들은 사단 밑에 짐승 밑에 예속돼 있는 거예요.
신약의 내용은 이거에요. ‘너희들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왜? 짐승이 너희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누구에게 시험받아요? 성령께서 일부러 광야에 보내가지고 누구한테 시험받습니까? 마귀한테 3번 시험받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마귀의 시험에 안 겪게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겨낸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고 예수님 빼놓고 그 모든 인간들은 마귀가 누르는 그 압력을 그 힘에 대해서 지배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구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자기 힘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죄가 더욱 더 증강하고 더욱 더 힘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자기가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어있는 게 인간이에요.
따라서 여기서 개인으로 어떻게 개인적인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개인적인 시도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러면 약속대로 천국은 이루어지는데, 그 천국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개인은 손들고 저 구원해 달라면 구원해 줍니까? 이미 실패로 끝났음이 확정됐는데.
이거 하나만 하고 10분 쉽시다.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와 버리면 그 사람은 그게 하나의 율법이 되어버려요. “내가 몇 월 몇일 날 예수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파에요. 구원파는 뭡니까? 개인구원이에요. 그야말로 이단이에요. 이스라엘이 했던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구원파도 마찬가지라면 나머지 모든 교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이 시작부터가 이 언약 계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이 짐승이 있는 시대에는. 그런 질문이 용납이 안 되거든요. 질문 자체가 용납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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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140501b-(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얇은 베니아판(합판)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우리 머리위에 이렇게 있습니다. 이리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저 구원될까요? 안 될까요?” 옆 사람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합격이에요? 불합격이에요? 천국에.” 다른 사람은 “설마 저는 지옥 보내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할 때, 위에서 합판이 내려오면 합판은 넓고 개인전체에게 한꺼번에 떨어지거든요. 베니아판이 뭐냐 하면, 구원의 조직체에요. 성경에서는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내려와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자체가 뭐냐 하면,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빈자리가 그냥 내려오지요. 이미 구원에 있는 구조가 내려온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구원이란 개념은 이 구원과 안 맞게 되어있어요. 안 맞는 게 뭐냐 하면, 그럼 당신은 안 맞는 증거는 있느냐, 있습니다. 안 맞는 증거가 뭐냐 하면, 처음 이스라엘 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너왔고 애굽에서 탈출이 성공할 수 있었잖아요.
자, 그러면 제가 어린양의 피를 언급했는데, 이게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없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나라 히브리인들밖에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애굽에서 고생합니다. 어떻게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험한데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여호와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는 조상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할 때에 그렇게 요구할 때에 그들 머릿속에 어린양의 피라는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을 때, 모세가 오기 전에 그들의 머릿속에 고생하는 히브리인들 속에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되는데.’ 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지요. 그러니까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하나님, 우리 가정 구원해 주세요.” 뭐 해달라는 것과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의 진짜 준비된 천국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가 너무나 이 세상이 고생되니까 남자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되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하면서 남자한테 지배받는 그런 저주를 받았으니까 너무나 사는 게 힘드니까 힘든 것을 모면해 보자. 힘들면 불행하고, 불행은 눈물 나고, 눈물 나면 괴롭고, 그렇게 괴롭게 하다가 나중에는 죽으니까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제가 가슴이 아팠어요. “이래 살다가 내가 고생하다가 죽겠다.” 고 짧은 멘트에 굉장히 제가 실감나는 감명을 받았어요. 그게 당신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 다 그렇다고요. 고생만 하다가 인생 끝나는 거예요. 언젠가는 고생이 면해지겠지~ 언젠간 고생이 면해지겠다고 그렇게 희망은 품고 있지만, 막상 살아보면 고생뿐이에요. only 고생. 오직 고생뿐이라니까요. 고생 좀 덜하다 싶으면 온 몸이 삭신이 쑤시면서 안 아픈 데가 없고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뭔가 자신이 파괴되어 간다는 걸 느끼지요. 왜냐 하면, 젊은 날을 기억하니까. 이놈의 기억이 문제라. 잘났을 때, 멋있을 때를 기억하니까 지금과 비교가 되니까 그만큼 자괴감이 더 커지는 거예요.
너무나 예쁜 여자하고 살다가 사별을 하거나 이혼을 해놓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결혼을 하려하면 반드시 찾는 것이 전번보다 더 예쁜 거나 더 나은 사람 찾지 못생긴 여자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혼자 살면 혼자 살지. 전처가 너무 예쁘면 그 다음 후처는 괴롭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에 포함이 돼버렸어요. 애를 잃고 난 뒤에 애가 뛰노는 거 보면 미치고 환장할 거예요. ‘내 애가 살아있었으면 물에 안 빠졌으면 이 나이 때면 이렇게 뛰어놀 텐데.’ 지금 그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생각하니까 안 보이는 곳에 가야되는데 안 보이는 데가 있습니까? 다 TV있는데.
그러니까 사는 거 자체가 트라우마, 정신적인 상처를 다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었으면 천국을 그리워하겠어요? 그래서 다 천국 갈 것 같으면 십자가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어요. 괴로우면 구원받으리라, 이런 공식이 있으면 돼요. “괴로우냐?” “예” “그럼 죽어서 어디 가고 싶은데?” 사람들은 “좋은데요.” “보내줄게.”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어떤 공식도 필요 없고 방정식도 필요 없고 괴로움만큼 그만큼 더 상상을 하게 되는 그 세계. “그것만 하면 구원해 줄게.” 하는 우리는 편하게 그런 세계만 상상하고 있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복속을 받게 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힘은 주체를 만들어내요. 힘은 아까 말씀한 자아를 만들어내요. 힘이 있는 곳에. 무슨 말이냐 하면, 힘이 없으면 자아가 생각나지를 않아요. 힘이 있음으로서 여기서 반발하고 반항함으로서 주체가 느껴지는 겁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으면 전부 다 그럭저럭 살아가요. 가정에서 누구하나 도둑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거기서 도둑하고 싸워서 이겨서 그 도둑을 파출소에 신고했을 때에 그 때부터 식구들은 아버지를 와! 하고 아버지의 주체가 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느냐 하면, 힘이 있고 힘에 저항함으로서 비로소 주체는 주체 값을 하면서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지금 성도님 직장에 다니시잖아요. 그게 힘입니다. 그 힘이 있음으로서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버틸 때에 비로소 자기가 자아다운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여러분을 핍박하지 않고 누구나 여러분을 칭찬할 때, 사람은 내가 누군 줄 도대체 몰라요. 붕 떠버려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뭔가 헤엄을 치되 진공에서 헤엄을 치면 헤엄치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물에 빠뜨렸을 때는 악착같이 헤엄치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가 느끼게 되어있어요. 자아가 느껴진다니까요. 자극이 없으면 자아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미안합니다만, 현실이 그래요.
누가 나를 공격하고 쥐어뜯고 이렇게 해줘야 돼요. 누가 공격을 해줘야 되고 누가 자꾸 옆에서 시련을 줄 때, 나는 비로소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하고 자기 자아가 다시 부각이 되는 겁니다. 고요해 보세요. 이것은 공동묘지지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이 아니고 반대로 힘이 없는 권태다.’ 사람이 권태로우면 사람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 80넘은 노인네들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사는 거 보세요. 행복합니까? 노인정해서 지하철도 공짜지요. 뭐든지 반값이지요. 하고 싶은 대로. “야, 야, 용돈 없다.” 전화만 하면 재각 와가지고 부모한테 탁탁 드려가지고 그놈의 유산 때문에 찾아오지요.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부모한테 행복하십니까? 물어보세요. 내가 사는 게 귀신이지 이게 무슨 사는 거냐, 사람은 부딪기고 뭔가 저항할 때, 주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하나님의 원수를 배치를 해놔요.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한다는 것은 마귀는 알고 있는데 누구는 몰랐느냐, 애굽인도 모르고 바로왕도 모르고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몰라요. 왜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때는, 그 약속에는 사람들은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빨리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천천히 할 건데,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아이디어가 애굽에 있던, 고생했던 사람들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몰랐다는 말은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백날 고생 실컷 해도 고생했다고 구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하나님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한의 교회에요. 한. 한 풀러 온 교회가 한국교회에요. 그래서 부흥된 거예요. 그렇게 맺힌 한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니거든요. 한을 달래서 교회가 부흥됐어요.
실제로 출애굽은 한 맺혀서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거예요. 어린양의 피로.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왜 애굽을 통해서 왜 그리 핍박을 했는가, 애굽 바로왕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을 핍박을 하니까 히브리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아가 발생돼요. 자아가 발생되면서 그 자아가 얼마나 문제성 있는 자아인지 본인들도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가 지금 받는 것이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본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지켜보실 분 아니지요? 어떻게 와서 사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마치 구원받는 것이 자기 권리가 되는 양. 그러한 정당한, 자기 있는 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모세를 보내니까 모세가 왔으니까 하나님이 구원하러 왔는지 알았지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하나님하고 의논하기를 “아직도 멀었어. 아직도 자기의 자아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몰라. 더 밝혀내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욱 더 모세가 오고 난 뒤에 바로에 대한 학대정책이 더욱 더 강화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바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의 소원은 뭐냐 하면, 애굽을 떠나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일단 순서를 정합시다. 일 단계: 자아는 없다. 2단계: 자아발생 3단계: 발생된 자아 구원.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내장돼 있었던 겁니다.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라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문제, 하나님이라는 영광, 하나님이라는 문제는 먼저 하나님보다 뭐가 우선입니까? 이 자아가 우선이었어요. 나를 구원하라 이 말이에요. 이게 출애굽기32장에 나오지요.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 가고 단 뒤에 밑에 있는 아론과 사람들은 금가락지 빼서 뭘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누구 위해 만들었습니까? 자기를 위한 하나님, 이것을 확연하게 굳혀줘야 됩니다. “고상하고 추상적인 관념적인 그런 신학적인 것은 다 때려치우고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이 말이야.” 라고 요구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뭘 만나게 하십니까? 어린양의 죽음을 만나게 하지요. 그럼 어린양의 죽음이니까 어린양은 어린양의 나름대로 뭐가 돼요? 주체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는 주체가 죽게 되었고, 너무 힘들게 되었으니까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요청했는데 막상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에 대해서 관여 말고 우리 주체를 덮어요. 우리 주체 말고 다른 주체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우리 주체를 덮어씌우는 새로운 주체를 들고 오신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분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누가 독점합니까? 나의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내 구원 없어요. 애초부터 내 구원은 성립이 안 될 요소기 때문에 내 구원은 없고, 누구 구원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 구원이에요. 오늘 핵심이 이겁니다.
구원은 누구만 구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구원해요. 인간은 구원 요구할 입장도 안 되고 자격도 안 됩니다.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쫓겨난 취지를 살린다면 구원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돼요. 주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시고 자기 아들 다시 건져내심으로서 거기에 콩고물 묻히듯이 묻혀서 나온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 바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주체가 자아라고 했지요. 그 자아는 뭔가 다른 자아에 의해서 덮여질 자아로서 건짐 받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몸이 우선이고 몸이 만들어낸 이미지가지고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정신분석학자나 또는 생리학자들이 밝혀냈는데 아기가 6개월 이전에는 자아가 없어요. 엄마 몸과 자기 몸이 엄마 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엄마가 장에 가변 아기는 울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가게 되면 내가 떠난 게 되기 때문에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엄마가 만약에 아빠한테 야단맞으면 아기는 울어요. 왜? 엄마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엄마가 꾸중 들으면 자기가 꾸중 듣는 것이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6개월 이후에 2살, 3살, 4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엄마자아 따로 있고, 내 자아 따로 있다. 그걸 가지고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하여튼 이것은 성경에 관계없으니까 그냥 들어나 두세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몸부터 먼저 있지 자아는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애가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남들이 볼 때는 자궁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탯줄은 끊어졌지만 절대로 정신적으로는 끊어지지 않았어요. 엄마 품속에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 28세까지요. 이 두뇌가 독립적인 두뇌로서 28세까지 자라나고 보통 19세쯤 되면 드디어 독립할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데 자라나기는 28세까지 자라나요. 어쨌든 간에 그 전까지는 의존적입니다.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무지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흔히 사랑하잖아요. 사랑은 뭐냐 하면, 엄마하고 한몸된 그 기억을 두고 사랑이라 해요. 엄마의 몸에서 하나로 있다가 떨어져 나오거든요. 사람은 19세까지 계속 떨어져나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떨어졌다고 하지만. 이게 떨어지게 되면 엄마 몸 있고, 아기 몸 있는 게 아니고, 엄마 몸 전체가 아기에게 퍼져있는 거예요. 이게 출산하면서 떨어져 나오거든요. 떨어져 나오면 엄마 몸 이만큼에다가 점선으로 자기는 일부 상실한 거예요. 떨어져 나오면서 상실해요. 두 살, 세 살 되면서 상실 폭이 점점 떨어지잖아요. 그 상실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엄마와 옛날에 함께 있었던 그 정서를 그대로 요청할 때, 그걸 요청하는 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상실된 원래 내 몸을 매워 달라고 요청하는 게 사랑이에요. “당신, 나 사랑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엄마한테 받은 사랑을 당신이 줄 수 있어?” 그런 뜻이에요. 처음에 남편이 결혼해가지고 “아이고, 이 미역국이 이상해.” “왜 이상해? 내가 해주는 맛이 싫어?” “우리 엄마는 맛있게 하던데 당신은...” 보세요. 엄마 찾잖아요. 엄마의 맛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어요. 기본이 엄마 거고 당신은 엄마에게 맞추기만 하라는 말이죠. 니 솜씨부리지 말고. 내 입맛은 엄마 입맛이지 니 입맛에 맞추면 안 돼. 그러다가 잔소리 몇 번 듣고 바가지 긁고 하면 알아서 감사합니다! 하면 입맛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중에 십년 살면 “엄마는 요새 음식을 영 못해. 당신 음식이 최고야!” 이리 나온다 말이죠. “당신, 음식이 최고야.” 그러니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미 상주되어 있는 정신세계에요.
그러니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독자적으로 개인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다 들었던 풍얼 이고 다 들었던 정서와 감정을 그냥 수입해서 그냥 조립해 나온 거예요. 그게 꿈입니다. 도대체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둘 다 꿈인데. 인간이 사람을 너무 고상하게 만들어놨어요. 이 세상 자체가. 뭔가 독자적인데, 독자적인 것은 없습니다. 젊은 16살 애가 물에 빠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팍 쏟아지는 것, 누가 울라고 했습니까? 누가 아프게 했습니까? 왜 눈물이 납니까? 누가 돌로 나를 때리면 돌이 날아와서 때리니까 피부조직이 상처니까 거기에 신경조직이 그대로 있으니까 내가 아야! 를 느끼니까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이것은 이해되잖아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누가 나보고 욕을 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잖아요. 욕이 실체가 있습니까? 욕이 기어이 돌멩이가 되어서 나를 때렸습니까?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누가 목 졸라서 자살했습니까? 세상은 싫어. 약 먹고 죽었잖아요. 누가 당신의 육체를 힘들게 했는데? 아무도 해롭게 한 게 없어요. 그런데 우울하다. 왜? 몰라. 이미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신은 본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한 지붕 세 가족이라. 같은 지붕에 있다가 자기는 그걸 못 느꼈지요. 왜냐 하면, 나는 나다. 매일 자기는 나는 나다! 하는데 절대로 인간은 나는 나가 아니에요. 나는 나가 아니고 남한테 빚져있고 남한테 지금 놀아나고 있어요. 뭔가 다른 정신에 놀아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악마의 정신’이라고 해요.
악마가 퍼트려준 유포한 스캔들에 허무맹랑한 낭설에 이미 우리는 푹 빠져가지고 몸이고 뭐고 돈이고 다 갔다 바쳤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걸 가지고 죄가 왕 노릇한다고 해요. 죄가 왕 노릇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죄라는 베니아판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물려서 살고 있습니다. 나요? 베니아판이에요. 누가? 죄라는 베니아판이 내 육신을 이렇게 조작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 다시 봅시다. 애굽에 살던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애굽인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히브리인들이 있었지요. 그 때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히브리인이에요. 히브리인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애굽을 형성합니다. 애굽의 정신이 양쪽 다 지배하고 있어요.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과연 출애굽 했을까요? 정신적으로? 맨날 돌아가자는 거예요. 맨날.
몸은 나왔는데 마음은 기껏 아는 것은 애굽 이외에는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요. 아는 게 없어요. 우리가 천사를 이해합니까? 천사를 이해 못해요. 만약에 내가 어떤 프로야구팀을 LG를 응원한다. LG를 응원해가지고 LG하고SK하고 응원을 하는데, LG가 마지막 9회 말에 끝나기 전에 5점차로 이겼다. 이번엔 LG가 이겼다 했는데 9회 말에 투수가 엉뚱한데 던지더니만 5점차로 극복해서 SK가 이기면 내가 야구선수도 아니고 내가 서울가지고 않고 중계방송을 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도대체 내 정신은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LG라는 그 팀이 내 정신을 줬다, 폈다, 가지고 놀았잖아요. 그 LG배후에 누가 있어요? 나는 LG응원해야 될 몸으로서 지금 부림을 당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세요. 무슨 출애굽이 돼요.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내려놔서 천국 만드는 게 천국이 그런 곳이에요? 주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우리 정신세계에다가 드릴로 구멍을 뚫었어요. 이걸 구멍이라고 하게 되고 이걸 철학에서는 공백이라고 해요. 텅텅 비어있는. 철학용어입니다. 공백이라는 것은 수학에서는 공집합이라고 합니다. 텅텅 비어있는 것.
뭐냐 하면, 우리가 애굽으로 꽉 차있는 것에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 구멍을 뚫어버리면 바람이 어떻게 됩니까? 낯선 바람이 구멍을 뚫고 나오지요. 우리는 꽉 차있는데 이 세상으로 꽉 차있는데 어느 한 구석에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치 최백호가 불렀던 ‘낭만을 위하여’ 가사가 있거든요. 어느 한 곳에 비어있는. 가사 알지요? 여러분. 이 나이에 낭만이 있으랴마는, 뭔가 한 곳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지요. 내 것은 아닌데 분명히 내 것으로 채울 수 없고 내 것으로 마저 채울 수 없는 텅 빈 상태. 그것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다가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나는 나머지 몸으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산다? 행복하게 살아야 돼!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고 우리 가족, 내 새끼 너무 너무 잘 되어야 돼! 출세해야 되고 나는 교육 잘 시켜야 되고 잘 키워야 돼!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뭔가 한 쪽에 텅 비어있는 느낌, 누가 와서 드릴로 지금도 구멍을 뚫어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아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붕 뜬 상태로 만드는 것. 그게 뭐냐, 살아야겠다고 하는 나의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로부터 놀림을 받고 지배를 당하는데 “너는 죽어도 이미 너는 살은 거야.” 라는 소식이 들어올 때, 내가 굳이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마귀의 놀림 상대가 되었는가, 참 부끄럽고 미안하고 정말 그동안 속아 넘어가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그래요.
이미 살았는데 내 식으로 나를 또 살려야 된다는 그것이 이 세상 정신에 젖어있는 거예요. LG가 8:0으로 져도 그게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하신 일이 되거든요. 한국 팀이 일본에 가서 5:0으로 져도 그것 때문에 술 먹고 하지 마세요. 짜증낼 필요 없이 ‘주께서 그렇게 공 넣게 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거든요. 왜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 우리 몸속으로 하나의 정신을 불어넣을 때, 그게 성령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주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붕 뜨면서 나중에 완전히 파쇄, 산산조각 내버려요.
뭔가 들여놓고 빵! 하고 터트려버리면 다이너마이트 집어넣고 하나, 둘, 셋 빵! 터지면 전체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헝겊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그동안 이 정신, 저 정신 어떤 철학 정신, 모험 정신 해가지고 대충 말도 안 되게 얼기설기 대충 우리의 껍데기를 이렇게 이어붙인 거예요. 헝겊 조각 공예품, 퀼트라고 합니까? 헝겊 같은 넝마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주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유지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제가 구분해 보겠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넝마 같은 정신이라 했지요. 자, 지금까지 이거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뭐냐, 우리의 몸은 누가 준 거예요? 육신, 이건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꾸 넝마 같은 정신이 주님의 일을 자꾸 방해하지요. 이게 마귀에서 왔기 때문에. 이 이미지가 자꾸 방해하니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걷어내라, 말이죠. 넝마 같은 이것을. 제가 말함은 성경대로 하는 게 좋겠지요. 누가 너희를 속이거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이 이야기에요. 누가 너희를 사기 치거든 그래, 차라리 사기 당해버려라. “나는 사기 안 당해야 돼! 나는 똑똑하니까 나는 돈이 아까워.” 이게 바로 넝마 같은 정신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더 이야기해볼까요. 고린도전시11장, 누가 아내 있거든 아내 없는 자같이 하고 누가 돈이 있거든 돈도 다 소용없는 것처럼. 다 쓰지 않는 것처럼, 쓰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라. 왜? 세상 흔적은 지나기 때문에. 만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이잖아요. 모자를 이렇게 쓴다든지 옷을 입고 있으면 뒤에서 고양이가 잡아먹으려고 오잖아요. 그러면 놀래가지고 미키마우스가 몸이 확 빠져나오면서 그 순간 몸은 모자와 같이 옵니까? 공중에 붕 떠 있습니까? 몸이 너무 빨리 빠져나오다 보니까 모자부터 몸하고 그 현장에 그냥 붕 떠있지요. 만화에 보면 바퀴가 빙빙 돌아가고 먼지 일으키고 확 빠져나가면서. 고양이는 기다려라 하면서 오잖아요.
몸은 주님께서 어린양의 죽음으로 동참시키면서 손목잡고 몸을 확 빼내면 뭐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비로소 넝마 같은 정신세계가 애굽에서 배웠던 세계가 그냥 공중에 붕 떠있지요. 미련 끊어버려라.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으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며, 내가 얼마나 착한 존재며, 얼마나 성실하게 자기를 관리했다, 이런 것을 실천했다 하지 말고 그랬기 때문에 일곱귀신도 오는 거예요. 니한테 의롭고, 착하고.
“이 더러운 몸아, 세리와 창기 같은 몸아” 하고 몸만 쥐고 가지고 오게 되면 이것은 마귀가 마음 놓고 짓밟던 놔더라,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몸은 빠져나오면서 이 몸은 뭐냐,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여, 제가 감히 얼굴을 못 들고 저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니가 바로 의인이다.” 하시는 겁니다. 출애굽은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몸둥아리, 알맹이 원래 죄 짓게 했던 몸이 얼마나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몸이냐, 그것을 까발려주면서 발가벗은 몸만 달랑 빼고 내빼는 거예요.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간음하고 잡히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을 때, 주님께서 “너 간음했지? 용서해줄게.” 이게 아니고 간음한 현장에서 그 여자를 용서하지요. 그 다음에 다윗이 밧세바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밧세바하고 다시 결혼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은 아무리 포장과 치장을 해도 주님보시기에 그 몸은 어린양의 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그 죄 덩어리라 하는 사실을 육신이 있는 육신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의 영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로서 대체의 몸으로서 어린양이라는 주체가, 자아가 나라는 이 몸에 대체함으로서, 그걸 대신 죽으심으로서, 대신 용서함으로서, 우리를 같이 구원하는 거죠. 그런 하늘나라에 죄인들만 모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공로는 누가 받습니까? 그 죄인들을 자기 피로 씻어주신 주님만 공로 받는 그 상태가 천국입니다.
문제는 바로 넝마 같은 우리 정신세계, 이게 애굽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훅! 성령께서 빼낼 때, 우리는 죄의 몸에서 얼마나 나를 건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동원했느냐 함을 우리 눈으로 다시 쳐다보면서 감사해야 되지요. 이렇게 빼낼 때, 너와 내가 할 것 없이 다 같은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 차이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차이가 없는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눈이 어떻고 발이 어떻고 코는 어떻습니까? 전부 다 한 성령을 마셔서 모두 다 육신으로서 그냥 맨몸으로 뽑혀져 나온 입장에서 니 자랑, 내 자랑할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 교회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알곡 아닌 거 덮어 세워봐야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우리도 마땅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면서 되새기고 그게 우리의 진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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