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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 6강 (에스겔) 140417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언약으로 본 성경 흐름

5, 6강 (에스겔) 140417

정인순 2014. 5. 2. 10:48

음성5        음성6 

 

녹취:공은주

수원140417a-(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인데, 세 번째 강의는 그냥 가지 않고 첫 번째, 두 번째 반복합니다. 현대인들은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제가 또 감안을 해야 되거든요. 첫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예레미야11장3절에서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고 내용가지고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처음오신 분도 계시니까.

 

신이 있고 여기 인간이 있으면 이방인들은 그냥 인간의 신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미리 하신 분들은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방인들은 인간이 있고 자기를 만드신 신이 있으면 신에게 그냥 예배드리고 신을 섬기면 된다고 했지요. 이 제사를 무슨 제사라고 했지요? 가인의 제사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인간이 있고 이렇게 신이 있으면 하나님이 있으면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언약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게 이방인의 종교에서는 언약이 없고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11장 3절에 보면, 이 언약을 쫓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해서 갑자기 저주가 쏟아지지요. 저주 받으려고 신을 섬긴 건 아닌데 언약 앞에서 졸지에 인간은 저주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언약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자기 위치를 아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신에게 갔다 빈다고 해서 이게 있는데다가 추가적으로, 추가적으로 복을 더 따내는 것이 아니고 이 저주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거예요.

 

언약이 없었더라면, 나는 섬기는 대로 복 받고 좀 힘이 든다고 하면 쉬다가 또 다시 섬기면 기도하면 또 복 받고 그런 식으로 중립지대에 놓였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난 뒤에 언약을 모르는 자는,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저주의 대상으로 이미 간주하시고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들은 모르고 이스라엘사람만 특이하게 알게 된 거예요.

 

이 중간에 언약이라 하는 것은 제가 전에 언급했습니다. 이 언약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는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몰랐지요. 하나님 안에 있는 독생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게 하나님이지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은 독생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껏 상상한 그저 꾸며내는, 상상만 해대는, 그런 추상적인 신이었는데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날 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처럼 그건 신약의 이야기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이야기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이 우리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이 언약에 대해서 인간은 손댈 수 없다. 수정하거나 변경시키거나 협상의 대상이 대거나 타협하거나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요청은 언약을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이상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언약을 옛날 언약이라고 하고 이 언약이 그대로 신약에 가게 되면 새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포크레인 이야기를 했지요. 골리앗크레인, 울산이나 부산의 항구에 보면 아주 거대한 크레인이 있습니다. 울산 자동차회사도 중공업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일어난 모든 인간의 일을 언약이라는 크레인으로 해서 인간은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고 언약이 자체적으로 이동을 시켜서 새 언약으로 혜택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요 작업은 인간은 배제된 상태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사이에 체결된 언약이죠. 약속이죠. 약속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그 혜택을 입게 되어있어요. 가인의 제사는 성의를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내가 가진 것을 신에게 바치고 섬기고 애쓰고 노력하는 데서 어떤 기대한 것을 얻는 방식이 가인의 제사라면, 언약이 나오는 방식은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손을 떼어버리고 언약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대로 스스로 성취돼 나가면서 신약에 이미 완성을 주게 되고, 이 완성된 것이 우리에게 퍼부어 주게 되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 그런 시스템이 언약시스템입니다.

 

어떻게 낯설게 느껴집니까? 이게 맞는데, 이게 맞거든요. 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거죠.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했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전개라 하거든요. 하나님의 자기 전개. 스스로 자신을 전개시키면서 거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생산하는 것, 발생시키는 것 그 방식대로 하나님의 천국은 이루어나가시는 거예요. 천국을 이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언약 적 관점으로 봤을 때, 비로소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돼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했다 말이죠. 그러면 그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없다? 없다, 이거든요. 그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고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개시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굉장히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맞다고 하는 이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계시는 어떤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늘나라에요.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제가 목숨을 바칠 테니까 주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목숨을 거절합니다. 니가 죽더라도 나 있는 곳에 오지를 못한다. 왜냐 하면, 처소가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처소 마련되는 이야기를 사전에 왜 이야기 안했어요? 왜 베드로가 죽어서 주와 함께 하겠다는 그 때에 왜 거절하십니까? 애초부터 인간은 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애초부터 왜 안했지요?

 

그것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인간의 심성 속에 인간이 상상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이렇게 완전히 폭로 당함으로서 그 인간이 품고 있던 천국과 지옥과 실제로 하나님이 계획한 천국과 얼마나 다른가를 확연하게 드러내기까지 기다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기다려가지고 ‘아이고, 목숨까지 바치면 설마 들어가겠지.’ 하는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에요. 그런 건 없어요. 목숨 바친다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목숨 바쳐도 못 들어간다면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방식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 그러니 천국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있지도 않은 나라를 주님께서는 새롭게 만들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은 이래요. 내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면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이 따로 있을 거예요. 장소가. 여기 있는 장소는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과 천사가 함께 있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교회에서 평생토록 배워왔던 그 상식적인 천국입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처소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갈 수가 없는 곳. 그 처소의 중요성.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 속에는 처소의 중요성이 전혀 발생되지 않았어요. 전혀 이것은 생겨남이 없었습니다. 이 몸 주고서 저쪽 간다. 이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죽으면 가겠지.’ 장례식장의 설교보세요. 이 땅에서 죽으면 하늘나라 맨션아파트 있는데 아파트에서 산다는 그게 주종이잖아요. 장례식장에서 하는 부활의 동산에서 입관예배 할 때하는 설교내용이 그거다 말이죠. 그것은 이방종교에요. 이것은 언약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에 준한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저기서는 편히 쉬겠다는 욕구에 의한 조작된 천국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은 그런 이방나라적인 종교가 아니고 언약 자체 안에 천국이 들어있는데 그 언약 안에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인간은 애초부터 생각지도 못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들어가지도 못하는 나라를 분명히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들어가게 했을 때는 그것은 순전한 예수님의 업적이요, 예수님의 은혜요, 공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런 천국 앞에서, 언약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간단합니다. 못 들어가면 안가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문제에요. 뭔가 천국 가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굉장히 수상해요. 굉장히 수상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고난 받고 내가 내 죄를 깨닫는 이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 하나의 마일리지가 된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겁니다.

 

내가 헌신하고 내가 순교하고 내가 선교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충성하고, 교회 봉사하고, 목사 말 잘 듣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이게 모여져서 하나의 쿠폰, 도장 찍듯이 그래서 짬뽕 하나 맛있게 얻어먹듯이 뭔가 마일리지를 쌓는 그런 식의 천국을 언약 없이는 그렇게 끄집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이걸 누구 탓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면 이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린애가 엄마를 사랑해요?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엄마를 이용하지요. 태어날 때부터. 엄마 말을 잘 들을 경우에 뒤에 나오는 반대급부가 있는 겁니다. 맛있는 거 사준다든지 장난감 원하는 것을 사준다든지 그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거예요. 그러니 어른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의 기초거든요. 핵심입니다. 어린아이는 쾌락에 의해서 주체가 형성된다. 이게 프로이드,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가장 명제가 뭐냐 하면, 어린아이는 쾌락을 통해서 자아를 구축한다.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자기 주체성을 형성하는 거예요. 쾌락을 통해서. 이익이냐, 손해냐, 이게 기독교 종교까지 확산되는 겁니다.

 

이익이라면 기도까지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익이라면 십일조까지, 헌금도 아낌없이 하겠습니다. 그게 이미 어릴 때부터 자기 쾌락이라는 것, 자기이익이라는 것을 이미 바람 넣은 풍선처럼 확장된 거예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안가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안가면 되는 거예요. 그럼 안가면 어디 가는가, 안가면 지옥 가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이 너무 슬프지 않느냐, 한 번 들어가면 못 빠져나온다는데 10년 살고 나올 희망이 없어요. 들어갔으면 끝나거든요.

 

그렇게 될 때, 나한테 너무 손해가 아닌가, 나로서는 내가 나한테 어떤 나의 인생에 대해서 내가 손대어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절망적인 것이 아닌가, 내 인생 내 건데 내 것을 내가 손을 대어야 되고 손 댄 만큼 효과를 봐야 되는데 애초부터 효과를 잘라버리면 지금 내가 시도하는 것이 의미 없이 되고 절망적일 때 뭔가 붙잡고 의지하고 믿고 열심내고 할 수 있는 어떤 기댈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사전에 잘라버리면 나 어떡하라고? 라고 이렇게 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가지고 만들어낸 창세기3장입니다. 우리가 창세기3장을 백독 만 독을 읽어도 우리는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제가 안가면 돼요. 이것이 창세기3장이 그대로 가시화된 겁니다. 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내가 차단시켰다 말이죠. 차단시켰음을 내가 수용을 할 때 또는 창세기6장에서 보면 너희들이 육신이 됨으로 내 신이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창세기6장3절의 말씀. 너희들은 육신이 되기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너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그런 성경말씀 그대로 수용했을 때에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의 가시화’가 돼요.

 

내가 그동안 말씀을 지켜서 내 쾌락에 만족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자체가 말씀 그대로 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해야 되고 흔쾌히 수용해야 돼요. 전에 이걸 스폰지라 했습니다. 스폰지는 물에 들어가면 스폰지가 저항할 수 없어요. 흠뻑 물에 젖지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말씀에 흠뻑 젖었다는 생각을 왜 이런 발상을 그동안 못했을까요?

 

이게 우리 자아가 돌멩이가 돼서 그래요. 돌멩이가 되니까 내가 슈퍼에서 내 바구니에 내가 원하는 말씀만 골라 넣는 거예요. 원하는 말씀만. 기도얼마하고, 필요한 말씀, 니가 복을 얻으리라, 그런 거 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니가 창고에 넘치도록, 그런 거 뽑아내고, 뭔가 내 쾌락에 만족하는 내가 요구하고 있는 그걸 바구니에 담았는데 내가 말씀을 지킬 경우에만 말씀이 나한테 실현됐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이것은 말씀이 없는 거거든요. 없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존재의 바탕을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아예 바탕자체를 주님으로부터 시작해버리자 이 말이에요. 아파트에 가면 화장실 앞에 보면 털실로 짠 발판 같은 게 놓여있지요. 화장실 있고 그 앞에 발판이 있어서 발 씻고 나와서 대충 닦으라고 있잖아요. 이 발판을 말씀의 발판에 얹어버리고 우리를 여기다가 세웁시다. 발판에다가. 내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내가 두 발을 딛고 사는 그 자리가 주께서 깔아놓은 말씀에 방석이라고 깔자 이 말이죠.

 

그러면 나의 육체는 여기서 스물 스물 뭐가 기어 올라옵니까?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이 스물 스물 기어 올라오지요. 날마다 말씀이 기어 올라오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전체가 말씀에 점령당하잖아요. 말씀에 점령당하게 되면 죽으나 사나 우리가 누구의 것이 된다? 주의 것이 되잖아요. 내가 여기 있음 자체가 자꾸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내가 여기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느냐를 제가 여러분께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시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굳이 말씀을 지킬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말이죠. 축복. 무슨 축복? 내 잘남? 내 자랑거리? 내 위신? 내 체면? 아니에요. 말씀이 이 만큼 대단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인으로서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백부장이 믿었던 게 그거잖아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백부장 중대장입니다. 그 사람이 조직신학 공부 안했어요. 어떻게 그걸 알았지요? 예수님도 놀랬어요.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천국에서 다 기어 나와! 다 나와! 너는 못가! 백부장 너 들어가! 니가 들어가! 왜냐 하면, 그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한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래서 첫째는 천국 들어가지 말자는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말씀 지키지 말자에요. 말씀을 지키려고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니까 주님은 없고 집착과 아주 집념에 깡깡 뭉친 나만 거울 앞에 보이는 거예요. 내 모습만. 기도하면서도 내 기도하는 자세가 상상되는 거예요. 기도하고 앉으면서도 ‘기도 지금 몇 시간째야. 20분 째네. 오늘 기도 발 되네.’ 기도 잘되는 자기 자신을 그리면서 그걸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안 해도 구원받는데 왜 그리 용을 썼을까. 그걸 저는 ‘도 닦기’다. 도 닦기 역사는 교회사에 보면 아주 오래됐어요. 수도원들 왜 그리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어요. 왜냐 하면, 교회사에 보면 그게 순례길이거든요. 그게 요새말로 올레길. 뭐냐 하면, 걷기 운동하는 길인 동시에 순례함으로서 그 순례 길에 성자들이 고생했던 그 명소에다가 지금은 그게 하나의 여행소가 되었지만, 그걸 죽 다니면서 거기에 수도사가 있어서 설교하게 되면 적절하게 헌금도 드리고 그래서 수도원이 유지가 되고 그랬어요.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랬다 말이죠. 신학 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신학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중에서 츠빙글리라는 사람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보통 취직을 했으면 그 수도원에 의해서 “아이고, 순례하는 것이 복됩니다. 순례하게 되면 당신뿐만 아니고 먼저 죽었던 당신 친척도 연옥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츠빙글리가 순례자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여러분, 순례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지 아무리 노력한다고 예정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그 소문이 그 수도원에 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져버렸어요. 오다가 다시 돌아갔거든요. 그러니까 수도원장이 약이 올라서 해임시켰어요. 니하고 같이 일 못하겠다고. 츠빙글리가 바로 개혁주의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개혁주의가 종교가 된 게 뭐냐, 개신교라는 겁니다. 개신교 들어본 적 있습니까? 기독교를 개신교라 하지요. 루터, 칼빈 이렇게 개신교라 하거든요. 그러면 개신교라 하는 것은 뭔가 반대자인데 뭘 반대한 거예요? 도대체. 요즘 와서 개신교가 뭘 반대한 겁니까? 뭘 반대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칫하면 교회가 업체가 돼요. 업소가 돼요. 이것 보세요. 맥추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이거 뭡니까? 이게 기념일이에요? 하늘나라에 기념일이 있습니까? 이 기념일은 교인들은 그걸 눈치 못 채지만, 장로와 목사들은 알아요.

 

이 기념일이 뭐냐 하면, 봉투 나눠주고 돈 빼는 날이에요. 푼돈 말고 목돈가지고 오라는 그 날이에요. 예수를 상업화해서 하는 게 도대체 개신교가 뭘 한 거예요? 츠빙글리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면죄부라 하는 것은 구원에 도움 안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 개신교의 후예들이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지금까지 첫 째 시간에 언약을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언약이란 말을 하기 전부터 사실은 저주받은 자였다는 거예요. 따라서 계속 저주받으라는 겁니다. 저주 받다가 새 언약이 와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의로 바뀔 때, 너희는 무상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오늘밤에 낙원에 가리라. 무상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예레미야나 엘리야나 모세는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없었는데 그럼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오실 분을 본 거예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오실 예수님을 보고 만나서 좋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엘리야, 모세도 마찬가지로 변화산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빨리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지 않으면 내 죄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고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천국은 예수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과 한통속이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별로라고 하면 천국 못 갈 사람이에요.

 

이 땅에서 예수 외에는 귀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느끼는 사람만 결국은 죽어서도 주의 것이고 살아서도 주의 것이고 주의 나라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양쪽에 돈 보따리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껏 제시한 게 뭐냐, 마지막 기적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병 고침도 아니고 귀신 쫓음도 아니었어요. 마지막 기적이 뭐냐, 요나의 기적이거든요. 요나의 기적이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이 십자가에 죽고 인간이 해결되지 않는 구원에 대해서 본인이 대표자로 나서서 대신해서 아버지하고 단판지어서 이루어냈다는 그 사실이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요한복음19장에서. 다 이루었단 말이죠. 다 이루었다는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리요.

 

“주님, 기도는 하루에 몇 분해야 됩니까?” 다 이루었다니까요. 다. “주정헌금은 1000원으로 할까요? 2000원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제일 낮은 게 1000원이고 좀 많으면 어떻게 할까요?” 다 이루었다니까요. 다. “예배 집회가 일주일에 열 몇 번이고 중요한 것은 세 번인데, 교회 한 주일에 몇 번가면 됩니까?” 아이~ 다 이루었다는데.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사람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 쪽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따로 있어야 뭔가 안심이 되겠다는 발상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 예배당 교육관 주차장 넓히는데 적어도 장례집사는 얼마를 해야 됩니까?” 주께서 응답하기를 다 이룬 거예요. 니가 교회인데 무슨 주차장을 너희 집에 주차장 없어요? 니가 교회고 남편이 교인이고. 보세요. 남편 교인이고 애들 교인이고 자기 교인 같으면 교인 수 몇 명이에요? 4명이잖아요. 4명 같으면 벌써 교회인데. 두 세 사람도 나와함께 있다는데 벌써 4명이나 되니 숫자가 많네. 자기 집에 주차장 있으면 그게 교회 주차장이에요. 자기 집에 피아노 있으면 그게 교회 피아노라니까요. 자기 집에 아침마다 식사하면 그거 성만찬이고. 자기 집에 커튼 새로 바꿨으면 교회 커튼 새로 바꾼 거 돼요. 다 이루었다니까. 다. 도대체 말길을 못 알아들어요. 말길을. 제가 경상도 말을 해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눈에 나타나서 키1m78Cm 에다가 몸무게 76Kg으로 나타나면 참 좋겠는데. 양복입고. 문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는 사실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짱거리는 거예요. 그저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나의 구원의 훼방자요, 최대의 방해자는 누구냐, 본인입니다. 선교하러 가가지고 선교의 제일 방해자는 누구냐 하면, 선교하는 본인이 선교를 가로막습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다가 ‘시선’이란 영화를 썼잖아요. 개봉하자마자 봤어요. 아침8시30분에 갔어요. 아침 8시50분에 조조 봤거든요. 줄거리 다 올려놨습니다. 시선이라는 영화, 단기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장호감독이. 19년 만에 개과천선했어요. 술 먹고 방탕하다가 뒤늦게 예수 믿어가지고 내놓은 영화가 시선입니다. 필리핀 선교 이야기입니다. 이슬람반군 만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제가 평하기를 다 이룬 입장에서 내가 순교를 하나, 아니면 배교를 하나, 그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하루, 하루 살면서 배교 안한 적이 없습니다. 왜 배교를 하느냐 하면 자, 이것은 일부러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 햇빛비치잖아요. 분명히 마태복음6장에 보세요. 그 햇빛하나도 그 햇빛이 있는 게 아니고 선인과 악인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햇빛 비치고 단비주시고 사계절주시고 특히 공기주시고 특히 내 심장은 어제 밤에 내가 심장 뛰라고 소리도 안했는데 그걸 자율신경계라 하거든요. 자율신경은 신장을 관장해서 뛰게 했다 말이죠. 그렇게 뛰게 했는데 아침에 눈떠서 지금까지 나오는 TV이야기가 진도이야기입니다. 사람 죽었다는 이야기. 애 죽었다는 이야기. 안산 고등학교 2학년 자체가 통째로 다 날아가게 됐어요. 그 이야기라.

 

이유는 한가지에요. “신이시여, 왜 죽입니까?”에요. 주의 답변은 뭔 줄 알아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아까 그 그림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이 발판을 잃어버린 거예요. 발판을 잃어버리고, 발판을 빼버리고, 애를 어릴 때부터 과외 시켜가지고 조기 유학 보내서 영어까지 배워가지고 안산 단원고등하고 입학시켰는데 왜 이제 와서 죽이느냐 이리 되거든요. 어릴 때부터 하나, 하나 부부의 정성과 그것도 안산에 가면 유명한 동산교회 있어요. 동산교회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이 애를 고등학교 2학년으로 키워 놨다 말이죠. 왜 죽이십니까? 지금 뭘 빼버렸어요. 이 지금 모든 과정이 그 자체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말씀덩어리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말씀덩어리가 아니고 내 자식, 내 육신의 분신덩어리로 본 거예요. 내 육신의 확장. 연장선. 내 분신으로 본 거에요. 정말 아들이고 딸이고 한꺼번에 죽으면 진짜 어떤 의미에서는 유월절 같은 느낌이 들지요. 이 세상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이 개입안한 사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죽을 때, 신이 개입했느냐, 안 했느냐, 따지는데 왜 평소에 그 애가 공부 잘하고 아무 사고 없이 “엄마, 나 학교 갔다 왔어.”라고 할 때, 왜 하나님의 개입을 생각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숨만 쉬면 눈만 뜨면 우리는 배교자에요. 그리고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주께서 너 같은 죄인을 용서하러 왔다 할 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용서받을 죄인으로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용서가 하루라도 용서가 사라진 적이 없고 죽을 때까지 용서가 계속 되는 거예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 근거가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유효기간이 영원합니다. 천국 가서도 십자가고 창세전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십자가고. 십자가의 용서는 유효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시작도 다 이루었고 끝도 다 이루었고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 애 죽었다고 좋다고 춤이나 출까요? 어떻게 할까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잖아요. 죽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주께서 익히 아시고 하는 말이 “그들이 안 죽고 있는 너희들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뭔가 일이 꼬이고 무너지게 되면, 분명히, 분명히 저 애들은 뭔가 일찍 죽을만한 죄가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인간에게서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감안한 거예요.

 

안 죽은 내 애는 죽은 애보다 더 착합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항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아! 이래서 내가 십자가로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구나!’ 그걸 그대로 알고 증거하고 살면 돼요. 그게 우리의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 안하나 우리는 상관없이 그저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편하게 삽시다. 그저 이것, 저것 순교 하나 안하나 배교하나 관계없이 의미 없어요.

 

우리가 지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조금 더 지식을 많이 쌓으면 우리 자신이 내세울 게 없는 의로울 수 없는 소자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점점 많이 알게 됩니다. 처음 교회 나왔을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을 욕하지만 성경을 좀 더 깊이 알고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면 내가 돌로 남을 칠 수 없는 돌을 던져 남을 때릴 수 없는 죄 없는 자가 아님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게 첫 째 시간이고 두 번째 시간에 한 게 뭐냐 하면, 사도행전8장의 이야기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도행전8장의 내시 이야기. 빌립집사 만난 거 기억나세요? 이게 두 번째였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연히 성령께서 빌립집사와 내시가 만났는데, 내시가 어떤 대목을 봤느냐 하면, 이사야53장을 펼쳤어요. 펼치고 하는 말이 이사야53장의 내용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어떤 사람이 아무 죄도 없는데 왜 그 분이 고난 받지요?” “분명히 메시아는 죄가 없을 건데 죄 없는 메시아가 왜 이렇게 고난 받고 채찍을 맞는 죽음의 자리에 왜 가지요?” 먼저 펴놓고 물었고 빌립집사는 그것부터 시작해서 성경전체를 확 뚫어버렸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제가 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의 전체를 뚫어줘야 그게 성령의 해석이라는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송 장로라고 있어요. 신사도 운동으로 한창 지금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사람은 성령을 이렇게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고 성령을 뭐냐 하면, 초대교회의 이적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이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나한테 오라. 내가 병고쳐줄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도 중요한데 예수님의 그 모든 기적의 최고 기적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였고요.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는 니가 나와 함께 죽게 된다는 것이 이게 너에게 해당될 최고의 기적이라는 겁니다. 니가 나와 함께 죽고 나와 더불어 살게 됐다는 이것이 최고의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홍해라는 기적, 여러분, 홍해라는 기적이 뭐냐 하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 속에 간 거지요. 그러니까 죽음 속으로 간 거죠. 최고의 기적은 뭐냐 하면, 내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신 그 기적, 그것이 최고로 자랑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건너왔습니다.”그 기적, 살아있는 인간이 더 살고 싶어서 사는 것에 애착을 느끼면서 “낫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그건 아예 홍해 가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요. 진짜 홍해바다를 건너온 사람 같으면 병 낫게 해달라는 그 본성은 나와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건 나와 있거든요. 아프니까 낫게 해달라는 기도하면서 기도 가운데 응답을 받게 될 거예요.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기껏 죽어 없어질 내 목숨하고 바꾸다니 주의 그 귀한 피를 내 하나 살겠다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내 이익만 생각하는 내 쾌락만 생각하는 이 못된 것’ 하고 자기를 회개하라고 내가 이런 점에서 또 죄인이구나! 하는 걸 깨닫는 그러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강의는 뭐냐 하면, 바로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십자가 중심으로 전체를 해석하면 된다. 왜? 성령께서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서 해석문제에 대해서는 이제는 그 기초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면 돼요.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그게 두 번째고.

 

세 번째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거든요. 에스겔 3장1~3절 보겠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을 벌리고 먹으라,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하지요. 시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 뭐냐 하면, 입을 크게 벌리면 채우리라 하는 게 있지요.

 

사람은 입을 벌리는 것을 기도하는 행위로 보고 기도의 목적을 목표를 높게 가지면 다 이루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될 것이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3장에서의 입을 벌리고 먹는 것은 뭐였습니까?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바로 말씀이 니속에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말씀이. 니는 뭘 먹어라? 빵 먹어라? 충무로 김밥 먹어라? 이게 아니고 말씀을 먹으라. 말씀을 먹으면 안에 말씀이 들어가면 걸어 다니면 뭐가 출렁거리겠습니까? 말씀 먹었으니까. 성도가 출렁 출렁 걷지요. 뭐가? 말씀이 출렁 출렁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먹을 때는 굉장히 달지만, 일단 먹고 난 뒤에는 속이 쓰린 거예요. 위궤양입니까? 소화불량 일으킨 거예요? 그 쓴 이유가 뒤에 보면 나옵니다. 길게 나오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래요. 니가 말씀을 먹고 니가 먹은 말씀을 이제 뱉게 되면 아무도 그야말로 너의 말을 믿지 않고 너를 핍박할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에스겔이 이 말씀 받은 시점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점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했어요.

 

자, 여러분이 다 아시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안다고 치고 제가 일방적으로 정답을 대게요.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해서 망했습니다. 맞지요? 언약을 위반해서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스라엘 편이었습니까? 언약 편이었습니까? 언약 편이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율법 언약을 받았을 때, 어떤 오해를 유발시켰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줬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주객이 바뀐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건지시려고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같은 이스라엘, 같은 인간들끼리 그것에 대해서 동조 안할 사람이 없어요. 왜? 인간은 애초부터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나 사랑했는데 더구나 하나님마저 내가 나 사랑하는 사랑에다가 참여하니까 세상에 이런 좋으신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에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언약 피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언약 위반했다고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망해버렸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되게 좋아했어요. 성전만 짓기만 했습니까? 성전 짓고 난 뒤에 누가 들어왔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누구든지 여기서 아프고 전쟁에 패배하고 가뭄 들고, 죄 지었거든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면 너희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그들은 어디에 집착했느냐 하면, 성전만 집착한 거예요. 그 성전 집착이 지금의 유대인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의 6일 전쟁이 왜 싸웠는지 알아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그 헤롯성전을 자기가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쟁을 일으킨 거예요.

 

자금은 4등분 되어있지만, 안가 봐도 알아요. 책에 보면 나오니까. 예루살렘시민의 호적 등기를 보면 4등분 되어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못 박아 죽게 된 요인이 어디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그냥 촌에서 돌아다니면 안 죽었어요. 뭘 했습니까? 성전에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성전에서 성전을 모독했을 때, 그들의 핵심 엔진부분이 깨진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깬 겁니다.

 

요새 교회에서 예수님 욕해도 별로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 교회를 부정해 버리면 그것은 단박 이단 됩니다. 이 교회가 수십년 기도로 세운 교회를 니가 부정해! 이리 되는데. 교회부정하면 난리나지요. 신천지가 예수님 이야기해서 욕먹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자기 것으로 등기이전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눈에 보이는 거 우리가 치중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눈에 보이잖아요. 성전은 눈에 보이잖아요. 성전은 눈에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걸 헐라고 했다 말이죠. 46년간 지었지만, 내가 그걸 몇 일만에 짓겠다?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 성전, 하나님이 분명히 영원토록 준다는 그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그 성전에 있는 성전이 홀라당 불나고요, 거기에 있는 집기와 거기에 있는 제기들, 제사할 때 기구들은, 솔로몬의 모든 기구들은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바벨론에 전부 다 강탈당해서 거기에 다 모여졌어요. 그 때 뭐가 불탔는가 하면, 언약궤도 같이 불타버렸어요. 하여튼 홀라당 다 탔어요. 성전이 없습니다.

 

성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연결고리가 없다는 거예요. 망한 거예요. 폭삭 망한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될 어떤 루트도 없는 겁니다. 구원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성전은 어디서 찾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영속성이 어떻게 보장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라고 하는, 에스겔을 인자라고 했거든요. 사람의 아들. 인자야, 라고 부르면서 니가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성전 아니고요,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이제는 없어진 성전을 대체할 성전으로 이제는 점차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마지막 대목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물이 나오는 최후의 성전의 설계도가 에스겔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에스겔은 끝나지요. 기존의 성전을 대체하는 거예요. 그럼 기존의 성전은 뭐가 안 나온다? 생명수가 안 나온다. 생명수가 안 나오지요. 그런데 신약의 성전 특징이 뭐냐 하면, 몇 층이냐? 몇 억짜리냐가 아니라 뭐가 나와야 돼요? 생명수가 나오지요.

 

그러면 사마리아여인에게 뭐가 왔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끊임없이 뭐가 나오지요? 목마르지 않는 샘터, 우물이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마리아여인이 바로 뭐가 되느냐, 진짜 성전이 되는 겁니다. 고 과정 중에 뭐냐 하면, 바로 예레미야,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어야 되고 그 말씀이 바깥으로 구체화될 때, 왜 성전은 망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에스겔에 나오는 말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사람들은 절래, 절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 나오는 말씀은 뭐냐 하면, 너희는 망해도 싸다. 너희는 저주받고 심판받아도 마땅해! 라는 그 말씀을 에스겔이 입으로 먹고 바깥으로 지금 토해낸 겁니다.

 

세 번째 시간에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지금 인자라는 에스겔에게 이런 현상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먹게 되면 이제는 주변상황이 내가 먹은 말씀으로 인하여 주변상황이 적당한 반응들을 나타내요.

 

그 반응들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가 나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롭게 달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걸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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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140417b-(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에스겔 이야기입니다. 입에 먹으니 그게 내 입에는 달고 꿀 같더라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뒤에 보면 속에서는 속이 뒤틀리니까 쓰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이유가 나와 있어요. 이유가 뭐냐 7절에 보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완전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뭐냐 하면, “에스겔아!” “예” “말씀 받았지?” “받았습니다.”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룰루랄라 신나게 가는데 이미 하나님은 알고 있어요. 네 말을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는 이 방법이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익히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에스겔에게 말씀 줘가지고 꼭 안 듣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래요. 에스겔이 인자의 대행자기 때문에 그래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앞당겨서 메시아에 가는 고난의 길을 앞당겨서 보여줘야 되거든요.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보여준다 했지요.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보여줄게.” 하십니다. 반갑지요. 그 말만 들으면 되게 반가워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 땅에 오신데. 합류한데. 봐야지. 봐야지.” 굉장히 보고 싶어 하는데 막상 품속의 독생자를 나타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라고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게 이사야53장에 흠모할 게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다 외면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사람들이 좋아했잖아요.” “좋아 했었었지요.” 왜? 오병이어를 했으니까. 보리떡5개, 물고기2마리가지고 배불러할 때,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어요.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 얼굴보고 왔습니까? 예수님 누군 줄 알고 따라온 겁니까? 그들이 채울 것을 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이미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런 것 같으면 내가 주의 기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로 저는 채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미 인간들이 자기 쪽에서 먼저 그걸 만들어낸 거예요. “이런 거미 망에 걸리기만 해봐라. 나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겠어.” 하나님이 믿는 조건을 내 쪽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이런 저런 조건을 먼저 제시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해주신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제가 확실히 믿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한 거예요.

 

제가 영화 ‘시선’이란 글을 쓰면서 그런 것을 감안했거든요. 하나님은 흥정하지 않습니다. 사람가지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거 해주면 살려줄게.” 라든지 “살려 줄 테니 이거 하라.” 흥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존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게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에스겔3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골짜기에 가니까 바짝 마른 해골이 있었고 그 해골에 대해서 인자 에스겔을 같이 동참을 시킵니다. 묻습니다. “인자야?” “예”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하는 질문에 답변에 대해서 에스겔이 답변하지 말고 에스겔이 어떻게 답변해야 된다는 것을 에스겔에게 알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은 그 답변을 자기가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넘깁니까? “주께서 하실 겁니다.”하고 넘겼지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아심을 넘겼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보이던 안 보이던 주님이 보이는 나보다 더 생생하게 계신분이 주님이라는 겁니다. 내가 나의 문제를 넘길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내가 여기 존재함으로서, 그걸 존재한다는 증거가 바로 내가 넘길 분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무엇이다, 가 아니라 누가 나를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주체의 자리에, 주인의 자리에, 주어의 자리에 내가 빠지고 주어의 자리에 긴 공백으로 남겨두고 이 공백의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 때문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살아가는 겁니다. 물어봅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위치를 묻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지, 주님 뒤에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베드로가 제대로 말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께서 아십니다. 개척교회하면서 이만큼 어렵고 힘들고 교인이 없고 그리고 이러다간 온 부부가 굶어죽겠다는 것을 뒤에다가 뭐만 붙이면 돼요? 주께서 아십니다, 를 붙이면 된다니까요. 부자 되게 해 달라, 소리 하지 말고, 안산의 애들 한 학년 다 날아가는데 “주께서 익히 아시고 벌이신 일이십니다.” 요 위치만 바꾸면 되는데. 위치만 바꾸면 간단한 문제에요.

 

에스겔로 하여금 말씀을 먹게 한 이유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백성이라는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여, 보여주시옵소서.” “인자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 보여주시옵소서.” “지금 내 종들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보고 믿겠습니다.” “내 종들의 말을 들으라.” 계속 이 고집, 이 둘의 고집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25장에 보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입을 걸 주었느니라. 우리들이 언제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예수 믿는 이 작은 어린아이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복된 자들아, 너희는 양의 자리에 오른편에 가거라.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그렇게 고생하는데 안 도와줬습니까? 이 소자한테 안 한 것이 곧 나에게 안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요? 주님의 소자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요. 그들 가운데 함께 있는데. 주님은 지금도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우리로 다 느끼게 하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소경이 아니게 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12사도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12사도가 전부 다 순교 당했지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로마에 분명히 간다고 언급했을 때, 자기는 편안히 로마에 가는 줄 알았어요. 도중에 폭풍이 일어나서 죽을 뻔한다는 것은 전에 그런 이야기 없었어요. 니가 반드시 로마나라 앞에서 왕 앞에서 네가 서야 된다. 분명히 언급했지 도중에 니가 고생할 것이다. 도중에 니가 폭풍을 만날 것이다. 그런 생각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로마 가는데 티켓 끊어 가는 게 아니고 가다가 죄수의 몸으로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폭풍 맞아 배가 뒤집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폭풍이 왔을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걱정하니 말아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서리라. 염려하지 말라 네 곁에 내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도바울에게만 이야기하고 같이 배 탄 사람한테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다른 사람은 주님이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런 다른 사람은 누구만 쳐다보겠습니까? 사도바울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조치를 취해가지고 그들이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다 살았지요.

 

아마 요번에 진도에 배빠지면서 우리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는 음성을 들을 학생도 있을 것이고 그런 성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배제 못하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마르다 마리아가 제일 크게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는 살았고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뒤바뀐 사고방식이었습니까? 오빠는 안 죽었고 오빠가 죽었다고 여기는 본인이 죽은 존재였던 거예요.

 

그래서 입장을 너희입장 생각하지 말고 죽은 오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안 죽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이미 죽은 존재고 죽은 존재지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나에게 적용하지 말고 이미 죽은 나에게 적용시키면, 그 말씀해석이 다 깨끗하게 정리가 돼요. 내가 죽었는데 이 말씀 주셨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씀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이삭도 살아있지요. 야곱도 살아있지요. 아브라함 품에 누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엘리야, 모세 다 거기 가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조상의 선배들이 다 가있다 말이죠.

 

지금부터 현실 이야기하는데, 현실문제 때문에 우리는 내 중심의 현실을 현실이라 보고 예수님이 있는 중심을 현실로 안 보는 경향 때문에 그러한 혼선이 일어나는 겁니다. 혼동이 일어나가지고 이 현실에 하나님이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현실문제에 대해서 에스겔 본문가지고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렵게 설명하더라도 반가운 것은 우리 송 목사님께서 풀이해준다니까 제가 안심 푹 놓고 하겠습니다. 현실문제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시루떡 아시죠? 시루떡이 있는데, 시루떡이 2층입니다. 1층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현실로 봐요. 이걸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부터 발생된 세계, 그걸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두 살 때, 한 살 때 기억은 포함되지 않아요. 내가 정신 차리고 내가 누군 줄 아는 그 때부터 계산한 현실, 그러니까 이 현실은 편집된 현실이고 조작된 기억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까 차타고 오는데 나무가 있지요. 혹시 그 나뭇잎이 몇 개인지 헤아려본 적 있습니까? 저 앞에 나무가 있네. 나무 잎사귀 세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그럼 나무가 있는지 잎사귀가 있는지 기억 없지요. 왜냐 하면, 내 중심의 현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보면 가로수 심어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현실을 다 포용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하나님의 현실을.

 

가로수 심어놓은 이유를 모르면서도 우리는 현실을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현실. 욥기에 보면, 욥이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왜 착한 저에게 고난을 내리십니까?” 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가 올 리가 있습니까? 황무지는 채소와 시금치를 키우지 않는데. 우리는 내가 농사를 지었을 때만 비가 와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는 깊은 계곡에 황무지에 비가 온다는 것은 그건 낭비요, 그건 허비처럼 느껴지잖아요. 욥은 그걸 압니까? 모릅니까?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모르지요. 모르면서 뭐라고 우기는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저한테 아픔을 주십니까?” 하는 거예요. 욥의 현실은 안 아파야 된다는 현실을 갖춰놓으니까 갑자기 고난이 날아오니까 이 화살은 왜 저한테 꽂힙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이런 겁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네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니가 항상 당황스럽고 모르는 사건만 사태만 일어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2층에서 찌르고 내려오는 겁니다.

 

찔러 놓으면 여기 홍해사건, 홍해사건이 모세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지요. 모세가 홍해가 갈라질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모세가 몰랐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뭐라 했는가 하면, 가만히 있어봐! 불평하지 마! 가만히 있어. 모세는 지금 뒤에서 말 타고 애굽 군사 따라옵니다. 가만히 있어. 뭔가 있을 거야. 홍해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보세요. 요단강 들어섰을 때에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요단강이 갈라질 걸로 생각했지요.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졌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지켜봐도 요단강은 어떻습니까? 안 갈라졌지요. 안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건너갈 때, 여호수아가 아무리 봐도 안 갈라지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 다음에 홍해 침투했지요. 이번에는 뭐가 침투합니까? 바로 요단강 침투 나오지요. 자, 여리고성 봅시다. 여리고성이 강대합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진다는 그것이 여호수아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와르르 무너졌어요. 또 침투하지요. 우리가 하나의 현실을 여기서 뭐냐 하면 파열, 찢어짐 또는 깨어짐 또는 불연속성 안 그러면 우리의 계획이 무산됨. 요걸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현실 속에 진짜 현실을 담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를 되풀이하고 반복시키는 방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걸 베드로 식으로 이야기하면 니가 원치 않는 길을 띠 띠고, 띠 띤다는 말은 니가 알아서 간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가는데 그 강제로 가는 길을 베드로가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베드로가 순교하겠다고 나서도 그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순교를 하더라도 니가 모르는 방식으로 순교하게 하셔요.

 

곱게 자다가 또는 베드로가 당구 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에요. 순교한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제가 자학하지 말라고 했지요. 자학하거나 재산 바치고 그런 짓하지 말라고 했지요. 아줌마들이 마사지해가지고 “어, 시원하다.” 마사지 받으면서 순교할 수가 있어요. 하여튼 우리가 예상한 10가지 같으면 11번째 예상 못할 방식으로 현실을 우리에게 쏙 쑤셔 넣는 거예요.

 

쑤셔 넣을 때, 우리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 현실 바깥에서 나의 현실을 변화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돼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는 아주 이런 심한 말까지 했어요. 여러분들이 간음한다고 해서 그게 간음죄가 성립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어려운 걸 알아서 송 목사님이 설명해 주셔야 돼요. 왜 간음죄가 간음이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간음하면서 이걸 본인이 간음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간음하고 있는 거야.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내 아내 몰래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이미 아는 순간 그것은 간통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하고 동업을 안 해요. “주여, 제가 간통을 했으니까 제 죄를 회개하옵소서.” 하면 주님께서 “니 무슨 죄 지었어?” “제가 간통합니다.” “니가 간통을 제대로 알고 간통하는 거야. 그거 간통 아니야. 니가 도대체 뭔 줄 알고 니가 니 마음대로 그렇게 간통이라고 규정을 해.” 다윗이 간음을 했잖아요. 간음을 해놓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여겨가지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자부를 한 거예요. 죄 지었다고 여긴 겁니다.

 

다윗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죄가 된 겁니다.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가 임신한 그 DNA를 조작하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DNA이면서 남편 DNA로 우리아 DNA 로 집어넣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살인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나단이 와가지고 딱 지적하니까 내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나는 죄를 지을 때만 죄라고 오인한 거예요. 죄라고 여긴 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그게 자기의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음의 위협이 무서워요. “니 죽인다!” 이게 무서워요. 죽음 직전이 무섭지 죽음은 안 무섭다 이 말이죠. 지금 진도의 애가 빠졌을 때에 애는 지금 물이 들어온다는 것이 일상의 일입니다. 누가 무서우냐 하면, 그 엄마가 무서운 거예요. 애는 지금 죽는지 안 죽는지 몰라요. 물이 들어왔을 뿐이고. 죽을 수도 있겠네. 지금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가 할 게 뭘까? 물을 퍼낼까? 지금 구명조끼입고 뛰어 내릴까? 요 일상의 선택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무서워해요. 내 자식 죽을까봐.

 

마귀는 죽음의 위협가지고 위협해요. “니, 죽는다!” 하는 죽는다 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나의 자의식 속에 섞이게 만들어서 협박을 해요. 내가 죽으면 그만인데 우리는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아까 이야기한 내가 주어자리에 죽는다고 마귀가 이렇게 조작해 버려요. 주께서 죽이면 괜찮은데 우리는 죽을 때 그리 죽지 않고 내가 죽으니까 무서운 거예요. 내가 죽으니까.

 

암에 걸리면 무서운 게 아니고 아침에 찬거리 없어서 무서워요. 우리는 남편 월급이 적어서 죽어요. 왜냐 하면, 애 못 키울까봐 죽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일상이 죽음이고 막상 죽으면 안 무서운데. 늘 마귀가 죽기가 무서워하므로 종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15절에. 마귀가 항상 “니, 그러면 죽는데이. 죽는데이” 자꾸 죽음 자체를 가지고 협박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우리 인생 속에 아예 DNA처럼 완전 박혀있어요. 육체 속에.

 

그러니 막상 지하철에 섰는데, 누가 술 먹은 사람이 넘어졌다. 그러면 누구나 거기 있으면요, 계단에 뛰어들어서 사람 구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만약에 멀리 있는 제 아내가 봤다면 아내는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막상 취객을 건져내고 지금 전동차 들어오고 하는 나로서는 내가 해야 될 일만 생각되지 바치면 아프고 아프면 죽어. 이런 생각은 들지를 않아요.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취객해가지고 올리고 왔을 뿐이에요. MBC에서 와가지고 “아이구, 어떻게 그런 귀한 일을?” “그게 무슨 귀한 일? 나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진짜에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은 제삼자가 볼 때는 상상하거든요. 상상할 때, ‘내가 만약에 저 사람처럼 가면 전동차가 오게 되면 그럼 내 가족은? 식구는? 우리 딸은 아직도 시집 안 갔는데. 안되지, 안되지, 바보같이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이렇게 뭔가 생각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준 무서움이 마구 들끓고 난리 나요.

 

지금 에스겔을 할 때 주의 명령은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이 니 주인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해요. “너는 해봤자 아무도 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가 말씀을 전해야 될 이유가 그들이 현실이 뭔지를 몰라요. 왜? 인자 에스겔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죄가 없어요. 돌 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남으로서 어느 인간도 돌 들고 칠 의인은 없다는 것이 판명된 거예요.

 

사람이 간음을 해도 간음죄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자기가 한 간음죄에 대해서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간통을 하면서도 자기가 반성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순순한 간음죄가 성립이 안돼요. 왜? 내 잘못을 누가 안다? 내가 알면서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 내가 감당이 안돼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 아시지요? 주님 제가 이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줄 아시죠?” 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여지들이 많아요. 내가 애를 때리면서 “주님이여, 이것은 내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고 사랑의 매인 것을 주께서 아시지요?” 하면서 자기는 가면 쓰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반성이 뒤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이여, 요번 일만 하고 난 뒤에 헌금을 곱빼기로 해드리겠습니다.” “이거하고 난 뒤에 제가 선교하겠습니다.” “요번 일만 허락해 주시면 제가 교회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일 년 동안 출석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을 들이밀면서 제가 선을 놓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일이 나쁘다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다른 사람은 모를 거예요. 하지만 저는 요 짓이 나쁘다는 것을 아니까 요 안다는 요 착함만큼은 제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리 나와요. 임 재범씨가 부르는 그 가사에도 나와요. ‘고해’라는 가사에 보면 나와요. 어찌합니까? 있지요. 어떻게 할까요? 뭘?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바로 조건부 아닙니까?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그게 임재범의 노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하루 눈뜨면 하는 일이 그겁니다. 안산의 애들만 살려준다면 제가 요번에 안산동산교회에 가가지고 헌금하겠습니다. 그동안 일년치 못했던 십일조 우리 애만 살려준다면 한꺼번에 다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은 흥정이나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잘난 체를 끝까지 포기 안한다는 것, 인간이 육신이 있는 한 절대로 자기 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인자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봐라, 너희들을 대표한 내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은 사실은 이미 너희들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예수 내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들 이야기라고 믿는다면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왜? 예수님만 높이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이 맞습니다. 면류관 전부다 벗어서 반납할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예수님만 주라고 찬양할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과 한 통속으로 한 팀의 가족일수가 있는 겁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말씀을 먹은 것은 그 사람들이 자꾸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니까 새삼스럽게 후차적으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에스겔을 보내가지고 인자를 보내가지고 초라한 행세, 알 수 없는 이상한 행세를 하는 그런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에스겔을 미워하도록 만듭니다.

 

지금은 그 사명을 말씀 받은 우리가 그 사명을 지금 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독한지. 매일 반성하는 게 매일 교회 가서 회개하는 게 그게 죄에요. 회개할 것도 없고 반성할 것도 없고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용서받으면서 감사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령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변명, 변명 또 변명, 핑계 또 핑계 24시간 스케줄이 변명과 핑계와 자기 잘남을 움켜쥐는 그런 삶이라는 사실을 육신이 살아가면서 늘 느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셨기에 저희들 십자가 앞에 세웠사오니 십자가의 용서가 유효하게 주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