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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중국강의 제4강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중국강의 제4강

정인순 2014. 3. 15. 20:24

201403 중국강의 제4강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4   

 

녹취:한윤범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해석의 중심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성경신학이 한 30년 전에 발전하면서 도널드 거스리, 리델보스, 게르하르트 보스, 화란개혁주의 계통에서 조직신학적인 교리신학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성경이 성경으로 말하게 하는 방법은 뭘까? 성경 속에서 교인들이 헤엄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것은 교회를 마치 법률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눈으로 직접 성경을 보게 하는 방법이 어떨까?

 

보게 했을 때 전체적으로 요약이 되지 않을 때에 특정 교리, 특정 교단이 진리화 되면서 논리적 싸움이 되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죽어버린다는 염려 때문에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을 말하게 하는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됐어요. 그동안은 성경이 말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고 각 교단의 교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그냥 구절로 동원된 일꾼처럼 임의로 뽑아서 일방적으로 주장한 셈이 돼버렸어요.

 

따라서 성경 자체에서 말하는 방법은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그것은 문맥을 통해서 파악해야 되고, 프리셉트지요. 단어 의미는 가장 넓은 범위에서 살필 때 깊은 의미가 나오고, 그 문맥을 따라서 더 나가게 되면 성경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일관된 구체적인 계획이 뭐냐? 하나님 나라라는 거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사야에서 예언 되고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되는 임마누엘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것,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그럴 때 모든 하나님의 일은 마감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할 것 같으면 쫓아내지나 말지 이제 와서 인간이 뭘 새롭게 알았다고 해서 그 인간을 다시 포용하고 그동안 헤어져서 미안하다고 이제는 받아주겠다는 정당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죠.

 

바리새인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물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진짜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제일 먼저 접촉된 사람은 유대인이었어요.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아니고. 오신다고 예언된 그분은 막상 왔을 때 잠입한 그 동네가 텅텅 빈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학수고대했던 단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그들의 경건함과 메시아가 만났으니까 아마 굉장히 서로 반갑다고 얼싸안고 좋게 끝날 줄 알았는데 웬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심지어 예수님이 뽑아놓은 열두 제자들마저 저쪽의 권세가 무서워서 예수님으로부터 다 도망가고, “나는 저 사람과 모르는 관계입니다. 자꾸 엮지 마세요. 골치 아픕니다.”라고 예수님이 가까기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았어요.

 

베드로 장모를 낫게 했지요, 베드로한테는 물위를 걷게 했지요, 오병이어의 그 떡 먹었지요, 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냈지요. 특히 물위를 걸은 특이한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경험이 아니거든요. 베드로가 물만 보면 환장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세계에 뛰어드는 자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관찰자, 차라리 구경꾼으로 있는 것이 편하지 예수님의 현장에 뛰어들게 되면 뒷감당이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까이 할 수도 없어요. 멀찍이 서서 박수를 칠 수는 있는데 찬양한다고 노래 부를 수는 있는데 저하고 상관하지 말고 믿음 좋은 사람과 상대하세요. 주님이 갑자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면, 마음 준비가 안 됐습니다. 저한테 많은 요구를 하지 마세요. 열두 제자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혜택을 받는 것은 고마운데 주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끔찍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 가지 기어이 놓치지 않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열두 제자나 그 당시 사람들이 구약을 보면서 내린 한결 같은 결론이 뭐냐? 하나님 나라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모든 마무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를 딱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어디에? 언제? 천국에 대해서는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는 고생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는 것은 안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는 그런 정도라면 이것은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좋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골인 지점이라면 긴긴 마라톤을 마다할리 없다는 거예요. 일곱 번 쓰러지면 여덟 번 일어나면 되니까. 잠언에 나오는 말씀처럼.

 

기어이 상처 안으면서 천국, 천국, 주께서 이루는 목적이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이 오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잠시잠간 고생하는 것, 큰 이득이 있는데 사소한 것에 내가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천국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닙니다. 도널드 거스리고 뭐 리델보스고, 게르하르트 보스고, 오스카 쿨만이고, C. H. 다드, 무천년설, 다 하나님나라 이야기했거든요. 그것 다 하나님 일 아닙니다. 성경을 그렇게 일관되게 묶을 수 없어요.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묻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어느 곳과 어느 때를 묻는 것으로 봐서 주님께서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해서 분명히 너희 안이라는 장소를 이야기했는데 그 장소를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공간에다 천국을 기다렸다는 자신의 문제점이 노출되고 말았던 겁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그 때와 시간의 조합은 주님이 이야기하는 천국과는 상관없이 상상과 망상에 지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하는 목적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그냥 하늘나라 오면서 이것이라고 외친 게 아니고 같이 바리새인과 합류가 된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를 기다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하늘나라를 기다린 사람에게 그것이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천국을 기다린 사람에게 그게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것, 천국 기다리기 위해서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날 정도로 그 희망과 꿈, 그것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내고 들어가겠다는 그러한 미래에 대한 열망 속에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식을 지옥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옥으로 만들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네가 천국을 기다릴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기에요. 천국을 기다리겠다는 배후에 어두운 세력이 충동질했기 때문에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고 그 천국은 우리가 가야 될 나라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런 제안을 인간에게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넘볼 걸 넘봐야지. 인간은 인간 나라에 살아야지 남의 나라에 왜 들어가는데? 지가 들어갈 권리가 있습니까? 선악과 따먹었다는 자체가 죄인데 무슨 죄인이 거룩한 나라에 갑니까? 섞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천국을 기다린 자체가 천국 못 갈 존재의 가장 확실한 이유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말씀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천국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을 때가 된 사람에게, “할아버지, 천국 갈래요? 지옥 갈래요?” 길은 둘밖에 없습니다. 제삼의 길은 없어요. 노인정에 가서 다 물어보세요. “지옥.” 글쎄요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같기도 하고. 대부분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천국 가고 싶다고.

 

그래서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생각했던 그 세상과 주님이 섞임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1장 1절부터 새롭게 해석돼야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거든요. 천지에 포함되니까.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게 같은 말일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사람은 어떻게 읽느냐 하면,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고 하고, 이게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노림수가 있어요. 꿍꿍이가 있다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면 지옥도 만들었겠지요.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지옥에 넣는다 할지라도 군소리 하지 마라. 왜? 천지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지옥이고 천국이고 내가 만들었으니까.

 

반면에 주어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면 책임져야지요. 사랑의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나한테 이야기합니까? 잘만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힌트를 뭔가 희망을 어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누설하기 위해서 너한테만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거든.” 그 말 뒤에 따라 나오는 말이, 그러니까 이 말은 너한테 해주는 것은 특별히 천국에 넣어주겠다는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이 땅에 살 때 편하게 살게 하고 지금부터 좋은 관계를 맺어서 천국 가서도 좋은 관계로 삽시다.”라는 나의 기대에 하나님이 호응할 것이라고 인간이 주어 자리에 있는 거예요. ‘주어+술어’잖아요.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나’가 부각이 되지요. 여기는 뭐가 부각이 됩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이에요. 같은 말을 주어 자리와 술어 자리를 의도적으로 바꾸는 이유는, 바로 똑같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웠던 유대인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을 죽어 버린 거예요. 잠언에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천지가 창조되니까. 지혜에 의해서. 지혜 되신 분을 죽여 버렸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본문을 보면서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왜 인간은 창조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능력이 내장돼있는가? 그 능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 나온 힘마저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말이냐, 아니냐? 그러니까 사탄을 하나님이 창조한 게 맞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했다면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런데 지옥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무책임한 깡패 같은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놓고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자기가 뱀 만들어서 유혹해놓고, 선악과 없으면 되는데 있더라도 철조망 쳐서 출입 못하게 되면 되는데 괜히 보암직도 먹음직도 해서 저절로 충동적으로 따먹게 하고 따먹었다고 닦달내시고. 성경해석이 원활하게 뚫리지 않아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걸 알지요. 알면 말려야지. 왜 뒤늦게 보험처리하십니까? 죽이려고 할 때 멈추라고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져주신다. 사랑이 많기 때문에. 산타클로스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 틀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하나님한테 큰 실망을 했을 경우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열두 번도 더 찍힐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고 내가 싫어했던 부처가 도와 줄 때, 차 타려고 하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교인은 그냥 지나가고, 침례교인도 그냥 지나가는데 지나가는 여호와증인이 도와줄 때, 내가 강도 만났을 때 우리교회 교인도 지나가고, 아는 목사도 지나가는데 신천지가 도와주고, 통일교, 여호와증인이 도와줄 때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무도 안 도와줄 때 나는 도움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인 것을 한 번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마치 신은 마땅히 나를 도와줘야 신다운 분이라고 생각한 것이 엄청난 망상이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선입관에서 나온 내가 조작한 신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포이에르 바하는 그걸 지적한 거예요. 신이란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술어와 주어 부분을 바꿔놔요. 항상 인간은 신을 믿으면서 주어부분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이러한 인간들이 선입관은 비단 성경해석뿐만 아니고 일반사회, 과학에서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별 보신 적이 있지요. 별자리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별은 별자리를 제시한 적이 없어요. 뭐 곰 별자리, 북두칠성, 전혀 제시한 적 없습니다. 별은 다같이 보고 있는 별자리가 민족마다 다 달라요. 별자리라는 게 어디서 나온 거예요? 여기에 만약에 복잡한 벽지가 있다고 합시다. 벽지를 20분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면 거기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 얼굴 다 보입니다. 윤곽이 자기 마음대로 변별 지으면서 다 나와요. 그걸 게슈탈트 심리학이라고 해요.

 

인간의 두뇌는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이미 익히 하는 정보를 토대로 동일한 패턴을 찾아내면서 자기의 의식을 스스로 소유하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그냥 육신이 있는 게 아니고 몸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아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동안 아는 것들을 총동원해서 이 자리에서 하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바닷가에 왔는데 헤어진 첫사랑이 생각나네. 그 바닷가에 안 왔으면 육체가 이동하지 않았으면 그 모양새가 안 나타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거예요. 자아는 뭐냐? 과거 덩어리, 기억 덩어리가 인간입니다.

 

제가 쓴 글에 이런 게 있어요. 나무라는 게 없어요. 나이테 덩어리에요. 나이테가 뭐냐? 시간의 흔적들의 덩어리에요. 나름대로 나이테는 나무의 기억들이에요. 인간은 세포로 돼있거든요. 세포 내에는 시간이 흐르는 흔적들의 집합체가 세포입니다. 인간은 60조 개의 세포로 돼있고 그 세포의 엮어짐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무의식이 90%고, 의식이 10%거든요. 프로이드 이후에 그게 발견된 거예요. 인간의 어떤 말을 할 때 90%의 무의식이 동원 되고 10%의 의식이 동원되어서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만 90%의 무의식이, “너 옛날에 돈 떼어먹은 적 있잖아. 참고 있다.” 이걸 윤리에 의해서 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자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주체는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경에서 자아, 주체라는 것은 반드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로소 언약 안에서 자아, 주체라고 인정하는 것만 자아, 주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육체로 보고 때로는 육으로 보고 육신으로 보는 겁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에서는 인간을 삼분설로 나눴어요. 육과 혼과 영. 그래서 워치만 니, 지방교회에서는 이중 중생설이 있습니다. 일단 육에서 혼으로 점프하고 혼에서 영으로 점프, 두 번 거듭나지요. 두 번 점프해야 됩니다. 그게 삼분설이라는 겁니다. 오리겐에서 나오는데. 삼분설이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피카르라는 철학자는 삼분설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세부분으로 돼있다. 첫 번째는 동물적인 부분인데 인간은 충동적으로 자기밖에 모르고 동물인지 짐승인지 막가파로 살아가는 것. 이걸 신경학에서는 시상하부에 있는 파충류의 두뇌가 있어요.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동물적인 것. 그 다음에 나온 게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요소. 동물적인 요소에서 양심적인 요소로 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돼요. 교육은 당근과 채찍이 있습니다. 아기 태어나면 두뇌가 29세까지 계속 자라나요. 그 말은 29세 전까지는 두뇌가 완성되지 않았어요. 인간이 덜 됐어요. 그 다음은 내리막길입니다. 죽은 가수 김광석 말이 맞아요. [서른 즈음에] 노랫말처럼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맞아요. 이제는 주어진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채우는 것밖에 없어요.

 

따라서 그 아이 주변에서 하나의 자립적인 개체로 키워야 돼요. 교육심리학에 나오거든요. 그때는 인간의 도덕적인 어떻게 발달하느냐? 더불어서 인간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그걸 파악해야 거기에 합당한 교육지침이 내려지기 때문에. 아이들 가르칠 때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할 것인지가 나와요. 특히 피아제 이론과 존 듀이의 이론이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 모든 교육학으로 진입했습니다. 목표는 자아성에 충실한 건전한 시민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자아나 주체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흙에 가까워요. 갈수록 죄를 더 짓는데 그 죄를 너무나 교묘하게 위장하면서 죄를 지어요. 경건해 보이는 죄, 거룩해 보이는 죄, 성화를 많이 한 죄, 마일리지 많이 쌓은 죄, 그래서 다른 사람은 한 수 아래로 내려보는 것으로 재미를 느끼는 죄.

 

사도바울에 있어서 인간론은 언약적 관계를 말합니다. 언약적 관계가 돼있으면 영, 언약적 관계가 끊어진 것은 육.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에요. 육으로 나타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는 말이고, 구약에서는 언약이 영의 자리에 들어가요. 왜냐하면 성령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 완성이 될 때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세례 줄 분으로 주로써 승격될 때 주 되심을 선포하는 입장에서 주 되심을 증거해줘야 될 보혜사로써 성령이 오게 돼있어요.

 

여러분이 신학 교수한테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교수님,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되지 아브라함 오고 난 뒤에 예수님 오십니까?” 학교 안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이 걱정되신다면 신학이 왜 필요해요. 그냥 예수님 보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은 왜 보내고, 이삭 보내고, 절차가 복잡하냐 말이지요. 중보자 바로 와서 십자가 다 이루었다고 하면 될 텐데 괜히 이스라엘 뽑아서 실패케 하고 고생 실컷 하게 만들고 다윗이 쫓기게 만들고. 일종의 낭비? 구원 에너지의 낭비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신학 교수한테 물어보세요. 답변하는가. 강의 방해하지 마시고. 방해가 아니고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이야기해보세요. 답변 못합니다. 왜 답변을 못하느냐 하면, 주어 자리에 인간이 가 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는데 왜 주님이 늦게 오십니까,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대전강의에서 한 수련회 교재에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일찍 왔고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늦게 오신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나라와 더불어서 심판이 개시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못하고 하나님 오신다니까 천국 가지고 우리 구원하려고만 왔지 화투패의 뒷면을 못 본 거예요. 화투를 덮어놓고 보면 똑같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주인공이거든요. 나쁜 면은 감추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다는 앞면을 내세운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질문이 뭐냐?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지 마시고 바로 십자가로 구원하시면 되는데 왜 그동안 그런 일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바로 너희들이 기피하는 지옥 안에서 천국이 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기 치신 게 아니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면서 세례 요한은 도끼 이야기를 합니까? 다독거리면서 이야기해야지 갑자기 도끼 이야기는 왜 나오고, 타작마당을 불사른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아직도 기억나는데 제가 옛날에 전도사로 있을 때에 주님께서 독사의 새끼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니까 아주 성화 오래하신 집사님이, 우리 주님은 그런 이야기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분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저주는 예수님한테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와 두 번째는 예수님이 욕설을 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찾아봤어요. 했어요. 주님이 저주를 안 받았다고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와요. 율법의 저주를 받은 사람. 왜 화투짝이 보이면 뒤집느냐 이 말이죠.

 

왜 그런가? 자기의 구원의 희망, 여망, 자기를 주어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이여 그런 건 잊어버리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서 구원받을게요.” 이렇게 나가고 싶은 자기 구원 욕구가 먼저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 몰라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만들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내놓은 해석이 뭡니까? 오직 하나님나라만 기다린 그 사람들이에요. 모든 성경해석이 하나님 나라만 기다렸다고. 임마누엘만 기다렸어요. 주께서 거론한 모든 것이 그들이 치중하고 집중하고 있던 계명들 사용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서 내 배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그 말은, 이미 에스겔 42장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세상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분명히 솔로몬 성전, 모세율법에 보면 성전에서 물 나온다는 말은 없어요. 성전을 연못 위에 지었습니까? 물이 왜 나와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성전은 원래 물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물이 나온다면 장화 신어야 돼요. 물 빼고 일해야 돼요. 철벅철벅 일 못해요.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일하지 말란 뜻이에요. 제사장, 레위인들 일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 물이 나와서 젖히는 곳마다 모든 물고기가 살아나는 거예요. 안수기도가 아닙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이에요.

 

그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라고 말하면 그게 반칙이 되는 거예요.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오시는 것도 아니에요. 어디에, 언제라는 것은 우리들이 하늘나라를 기다릴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아를 구축하면서 동원되는 나의 존재를 구축하는 속성의 요소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몇 살이며, 언제 있으며,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시간과 공간 개념을 찾아와요. 찾아와서 노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은 빈 터에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고 지적하시면서 지적된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천국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그러면 우리를 쓰레기지요. 쓰레기 돼야 돼요. 쓰레기 모아서 천국 이루는 겁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죄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자리에요. 힌놈의 골짜기에요. 거기에 은 삼십 개가 던져집니다. 은 삼십 개가 사람의 값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종이 소한테 받힐 때에 소도 주인의 재산이고 종도 주인의 재산이에요. 일종에 가재도구에요. 둘 다 돈으로 측량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돈으로 때우는 게 아니에요. 가재도구고 물체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이 가능해요. 사람들은 소 죽었다고 사람 죽은 것과 같이 취급 안 하고 자기가 사람이고 노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받은 [노예12년] 제가 그걸 봤어요.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예를 받으면 상해죄가 아니에요. 그냥 수선비에요. 수선비로 은 삼십 개를 주라는 출애굽기 21장 32절 그 말씀이 왜 있는가? 바로 너희들이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지정된 그 자리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리로 삼겠다는 거예요. 해석해보라는 거예요. 눈치 챌 수 있으면 눈치채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를 위한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신? 천국?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해요. 성경으로.

 

언제 오십니까? 어디에 오십니까? 여호와증인, 그리고 세대주의, 그리고 신천지, 하여튼 이단이라는 이단 전부 다 한결 같이 목회 성공에 아주 크게 기여한 논쟁이 바로 주께서 언제 오시는가? 대구에 유명한 동부교회 지금은 죽었지만 김덕신 목사, 서울에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그들이 설교시간에 한 말은 주께서 몇 년 후에 오시는가?

 

1998년 10월 18일에 이장림이 온다고 해서 흰 소복 많이 팔렸어요. 아줌마들 흰 옷 입고 왔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지요. 한국의 큰 교회 목사들 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날짜 이야기했는데. 시대가 보니까 어두운 시대고, 짐승이 설치는 시대기 때문에 이것은 대충 맞는가 싶어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분위기는 잡을 수 있다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버린 거예요. 이장림이 너무 노골적으로 하니까 쑥 들어가 버린 거예요. 뒤로 빠진 거예요.

 

나중에 이장림한테 물어봤어요. 당신 그때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 사람들이 요구하데요. 핑계치고는 간단해요. 목사가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줘야지. 너는 믿었나? 내가 그걸 왜 믿어. 말도 안 되는 걸 왜 믿어. 사람들이 요구하니까 다니엘 70이레로 계산해서 내밀었어요. 지금도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사람치고 70이레 계산 안 하는 사람 없어요. 7*7=49, 490년. 성전에 훼파할 때가 언젠지 계산해서. 토정비결 보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도대체. 그때와 그 시가 언제입니까? 다른 소리는 듣기 싫다는 거예요. 그때와 그 시에 주께서 재림하는데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감람산. 어디 나오는가? 스가랴. 그러면 그 날은 언제입니까? 가만있어 보자. 요한계시록 들여다보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제자들이 한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하여튼 제자들은 안 돼. 그렇게 이야기해도 감을 못 잡아. 주여, 그때가 언제입니까? 왜 인간들은 그때와 그 장소를 원하느냐 하면, 지금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나란 주체거든요. 그런데 주체가 있습니까? 없어요. 거울 보면 주체 나옵니까? 아니에요. 내 몸이 있을 뿐이에요. 주님은 주체를 만든 게 아니고 몸을 만들었어요. 몸의 아우라가 주체에요.

 

제가 아까 사랑이 반했다고 했지요. 어떤 분이 이근호 목사의 신학은 십자가뿐이다. 십자가 그 다음에 뭔데?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지요. 사랑해봤습니까? 사랑하는데 그 다음을 물으면 귀싸대기 맞습니다. 사랑이 끝이에요. 반한 게 끝이에요.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하고 있는데 더 없나?” “뭘?” 사랑하니까 명품 프라다 하나 사달라는 말입니까? 그게 사랑입니까? 열두 제자가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했지요. 받은 게 사랑인데 사랑 받고 난 뒤에 또 달라는 것은 사랑이 영 시답지 않다는 말이거든요. 사랑은 일단 챙기고 용서 받아야 되니까. 챙겼으니까 내놔라. 뭐? 뭐?

 

십자가는 뭐냐 하면, 주님의 목숨입니다. 아들이 죽어야 될 자리에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물에 빠졌을 때 딸이 엄마한테 “엄마, 그게 다에요?” 그럼 뭘 해야 돼요? 엄마 죽으면 내 공납금 어떻게 되느냐고 하는 게 죽은 엄마한테 할 소리에요? 줄 것 다 줬는데.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어요? 당신 솜씨 보여주면 메시아라고 인정해줄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 바로 그들의 기대한 것을 하나님이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복을 줄 것이라고 함께 한 세트로 주는 그런 기적을 원했을 때 그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내가 이야기할 것은 요나의 기적, 십자가밖에 없다. 네가 버림 받아야 될 진짜 모습을 내가 대신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너의 모습을 보여줄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가져가셔서 우리 대신 아버지 앞에 설 때에 그 주님 당한 버림받은 그게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가 하시는 그 일의 우리가 재료로써 우리가 육체로써 왔고 육체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서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도록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리고 철조망 쳐서 선악과 따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마음껏 따먹도록 해요. 그래서 인간은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은 뱀과 더불어 있을 때 인간의 존재 이유가 나오는데 그 존재 이유는 인간 자체로서 멈춰서는 해답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게 나오지요.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창세전에 성도가 예수 안에서 피 흘림을 위해서 인간은 있어야 된다는 것.

 

주어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언약의 완성이고 그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친히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심이라. 그리스도가 주어 자리가 아니고 왜 자꾸 어느새 보면 내 나름대로의 주어 자리가 생성돼있어요.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별이 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별자리는 인간이 정해요. 왜 정합니까? 하나님 좋으라고 정합니까? 별자리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에요? 나니까. 별자리를 보고 내 앞의 미래를 보지요. 점성술이지요. 세상에 인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나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있다는 것을 주께서 일부러 허락하신 거예요. 마음껏 까불어라. 나는 너희들이 가기 싫어하는 제일 밑바닥에서 천국을 만들리라.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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