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중국강의 제2강 본문
201403 중국강의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처음 시간에는 역사적 해석법이라는 것은 인간인 이상은 절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괜찮아서 훌륭해서 이러면 반드시 후배에게 전달하기 마련이고 양육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선배 목사님이 이것으로 은혜 받았다는데 누가 토를 달아. 우리는 그것을 본 받아서 그분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식은 되지만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시대에 사람들도 또 구원해야 되니까 이 시대 형편에 맞도록 각색한다든지 내용은 달라지지 않지만 모양새는 더 맛있게 한다든지 이런 것은 유동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보통 그렇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다 바뀌지요.
아까 제가 바뀐 예를 들었지요. 성경무오설 지금 없고. 미국 개신교 신앙고백서에 예정론 다 수정돼있고 성경무오설 수정 다 돼있어요. 그러면 신앙고백서라는 게 왜 있느냐? 제가 지금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천주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일반 교인들이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 눈에 보이는 교회 질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질서를 세운 거예요. 그걸 실체론적 교회론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국가 경영, 국가 행정에서 실체론적 국가론에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국가라 하면,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대학 캠퍼스. 대학이 있다. 대학이 어디 있는데? 대학 가보면 대학이 없어요. 교수 있고, 교직원 있고, 학생 있고, 캠퍼스 있지만 대학은 없잖아요. 그걸 보편논리라 하는데. 세퍼트 있고, 발발이 있지만 개는 없어요. 그런 것들을 모아서 추상적 개념 하나를 따로 만들면 개가 되는 거예요. 철학에 보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데 사람은 없어요. 그런 것들 모아서 추후적으로 말해서 사람이라고 하자 이런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가면 예배당 건물 있고, 사람 있지 교회는 없는 거예요.
국가가 만약에 실체로 없으면 사람들은 국가를 편리하게 이용하지만 예를 들어 도둑 들면 잡아달라고 하지만 세금 내라고 하면 도망쳐서 미국으로 이민 갈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 보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해 처먹는 거예요. 국가가 됐든 뭐가 됐든. 그러면 전쟁할 때 누가 지키는데? 희생? 없잖아요. 미쳤다고 희생해요.
그래서 실체론적 국가라 할 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법을 만드는 겁니다. 그냥 법을 만들면 아무 소용없어요. 반드시 상벌제로 만들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누가 상을 주고, 누가 벌을 주느냐가 문제가 등장하거든요. 지금 국가가 실체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고 했지요. 천주교에서 교회를 만들 때 법이 있는 거예요.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그 당시에는 귀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헌법상 국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천주교에서는 법을 하나님에게로 돌렸습니다. 그 밑에 예수 있고, 그 밑에 바로 교황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과 교황의 이 꼬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동방교회 또는 개신교가 돼버려요. 그리스정교회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마테란 공의회에서 성경무오설이 아니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천주교 이야기가 아니고 개신교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신교에서 당회장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로 와버렸을 경우에 이것은 당회장 목사 자기가 교주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한 게 아니고 실체론적 교회로 바뀌기 위한 법의 최종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싫더라도 하나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 돼야 돼요. 그러면 각자가 교주가 너무 많잖아요. 그걸 방지하는 대책이 교단을 만들었어요. 교회는 당회를 만들어서 의회 제도를 채택한 겁니다. 목사출신의 회원과 장로출신의 회원으로 저울의 균형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두 개의 수레로 서로 견제하는 방식으로 실체적인 교회를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개신교에서 유형교회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총회를 무형교회라 합니다. 무형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의 집합이에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게 144,000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항상 문제 있어요. 유형교회를 안 거치고 무형교회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루터는 안 그랬는데 칼빈은 유형교회를 거치지 아니하면 무형교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어요.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뭐냐? 치리입니다. 치리는 징벌을 가하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거예요. 천주교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개신교가 닮아가고 있으니까. 실체적 교회에서 치리를 누가 하느냐 할 때 처음에는 목사만 한다고 했어요. 시간이 역사적으로 흐르면서 반발이 생기니까 목사와 장로가 한다고 했습니다. 투표를 하게 되면 숫자가 많으니까 장로 쪽의 의견이 채택이 될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서 당회를 열 되 당회장이 거부권을 갖는 방식을 채용하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일반 동호회 회의할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리 장로들이 뭘 해도 당회장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법을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법이 성경에 근거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성경책이 하나님의 계시에요. 물론 지금 신학은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흔적이나 유품이 있으면 그것도 계시에 포함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발언 같은 것,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편지가 발견되면 예를 들면 도마복음 같은 게 나오면 그것도 계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을 때 교인들에게 혼란만 가중하고 교인들이 빠져나갈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교인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 힘이 중요하니까. 보수적인 의견을 채택하고 자기 의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정략적, 정치적 조치를 융통성 있게 해야 돼요. 그걸 목회라는 이름으로 하지요.
문제는 이겁니다. 치리할 때 성경에서 누가 치리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 같은 경우에, 누가 교회에서 범죄 하거든 두세 증인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두세 증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아니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기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돈으로 새신자 만들어서 표를 늘일 경우에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교회끼리 축구 시합하는데 축구 잘하는 절에서 데려와서 승리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 역사적 해석법에 다 나와요. 치리에 참여하는 교인은 적어도 일년 동안 교회에 나온 세례교인에 한한다고 돼요. 그 법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출석교인 2/3 이상의 찬성으로 장립집사가 된다는 법이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어디에 나와요? 안 나오거든요. 안 나오는 이야기가 왜 삽입되었는가? 중간에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이게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헬라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니에요. 천국은 민주주의 제도가 살아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하는 말이, 이 세상은 다 한계가 있는 세상이니까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다고 보자. 그래서 필요-악이라고 해요. 이것은 옳은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쩔 수 없는 것, 진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대대로 해보니까 그나마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서 계속 실체적 교회를 위해서 법들이 추가되고 추가된 겁니다. 10%로 하면 개나 소나 다 되니까 2/3로 하자. 어떤 교회는 그걸 반대해서 100% 찬성이 아니면 안 되게 돼있어요. 100% 찬성은 진리가 아니고 신라시대 때 화백제도에요.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옛날에 다 나왔던 제도입니다. 전도서 말씀대로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전부 다 나왔던 제도에요. 그러면 강사의 뜻은 뭡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필요악도 소용없다면 뭐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말씀은 바로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를 더 죄 짓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 의에 복종하는 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요. 자기 의에 충실하게 마일리지 쌓이듯이 날마다 성화되고 착해서 점점 착해지면 그걸로 됐다 싶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차버린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로써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보편화된 세계에서 누가 그걸 지적하겠느냐 말이죠. 안 착해서 문제지 착한 게 뭐가 문제 되고 오히려 장려될 문제지.
거룩하라,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거룩한즉 너희도 거룩하라고 분명히 문장으로 나와 있단 말이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새 형상을 입으라. 이제는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고 빛에 속한 자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명령이지요.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그걸 즉각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명령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미 인간에 말씀이 들어왔을 때 성령 받기 전에는 법을 못 지켰지만 성령 받은 뒤에는 온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이제는 성령의 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진짜로 제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사도바울이 권면과 지시와 명령을 내렸다는 거예요. 근데 이상스럽게 왜 그 말을 거론하면 거론할수록 점점 더 십자가가 퇴색되고 십자가가 점점 멀어져가지요. 마치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 대전, 대구 갈 때 지나가는 간이역들은 멀어지잖아요.
역사적 해석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역사적 해석법에서 나온 결과들, 성과만 갖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의 역사적 해석법은 그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네 속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흐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담아버리면 예수님의 일이 인간의 시간의식 속에 깔립니다.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승천하신다는 과거-현재-미래로 겸해서 같이 포개지게 돼요.
그러면 현재 십자가는 이미 과거가 돼버리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이 문제가 돼버려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자기는 몰랐었어요. 십오 년 전이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사는 거예요.
보세요.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 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십자가 진 사람은 양쪽에 있었던 강도 둘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삼종 세트에요. 그런데 만약에 사도바울이라는 이름 숨기고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아저씨,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혹시 예루살렘에서 달렸던 그 강도?” 이렇게 묻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게 상징이다, 유비다 하는 것은 나중에 핑계 삼아 하는 이야기하고 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과장법으로 쓴 게 아니고 진짜 실체로 이야기한다면 진짜 십자가 옆에 사도바울이 꼬마가 되서 있던가 해야 돼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이 사는 거예요. 그리고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어디 있는데? 이미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에요. 대전에서 대구 가려면 이미 작은 역은 스쳐지나갔다니까요. 그것은 뒤돌아 볼 필요 없어요. 십자가는 과거 이야기니까.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 시대에 놓여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과 같이 승천할 그것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기억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이제는 내가 할 것은 새 생명 따라서 성령 따라서 살면 되고.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면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성령 받았는데 예수님 재림할 때 깜빡 졸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온다고 힌트를 주는가요? 문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기름 준비한 여인들과 열 명 중 아무도 깬 사람이 없었어요. 다 주무셨어요. 그런데 에베소서에 그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깨어있으라. 새벽 2:30에 도적 같이 와버리면 깨어있으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도둑놈이 미리 알려주고 오면 도둑이 아니에요. 친구지. 도적 같이 오려면 몰래 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몰래 왔을 때 몇 초 후에 깨어있을 때를 깨어있는 범주에 넣어줄 것이라는 문제가 발생돼요.
일단 도적 같이 오는 것이 성립해야 되고, 깨어있는 조건이 다 만족하려면 일단 도둑이 왔다고 할 때 깨어주지 아니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야 된다 이 말이죠. 그 힌트가 요한계시록이든 어느 구석에 박혀있어야 되는데 그 구석에 박힌 것을 캐내어주는 것이 천지, 천지, 신천지란 말이지요. 왜 사람들이 신천지에 빠지는데요?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까 빠지는 거예요.
일반교인들은 신앙은 관심 없어요. 주님은 재림하신다는 데 깨어있으라는 데 어떤 정보를 미리 입수하면 무사히 144,000에 들어가서 천국에 가느냐? 지금 요점은 그거에요. 예정론이고 다 치우고 내가 구원받고 우리 가정이 구원받아야 되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지금 오시더라도 구원이 됩니까? 그걸 제시하라니까 이 설교자들아. 다른 소리하지 말고 그걸 내밀라니까. 그러면 기존 교회 목사들은 너무 들어가지 말고 상투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이 가르치는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이단에 속하는 것이고, 보태지고 빼지도 말고. 마지막 때에 이단이 등장할 때는 이단이 보좌에 앉아서 적그리스도고.
지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그것 말고 우리 교단이 이단인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제시해주면 신천지고 구천지고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고객만족을 해줘야 장사가 될 게 아니에요. 고객이 뭘 듣기를 원하는데? 그걸 왜 간파를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몇 초 뒤에 오고 그 타이밍 어떻게 합니까? 바로 신천지는 통일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통일교는 흔히 말하는 알레고리라고 하는 거예요. 유비설교를 하는데 알레고리가 가관입니다. 알레고리는 1920년대 평양의 이용도 부흥사가 원조였고 그 설교를 모든 한국교회 부흥사들이 베꼈고. 거기에 나오는 알레고리 설교를 하니까 이게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효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더란 말이죠.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고 성경도 읽을 시간도 없는 일반교인들에게 그야말로 맨날 보리밥 먹다가 맛있는 뷔페 요리로 다양하게 해서 “여러분, 원하는 게 뭡니까?” “구원입니다.” “어떤 구원입니까?” “승천할 때 내 가족들, 내 자식들 앉혀서 이 땅에서 못 다 누린 호사를 천국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일 단계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것 챙기고 헌금내고 자기 볼 일 보고 다음주에 또 오고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에요. 조작한 게 아닙니다. 우리 동네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제가 따지니까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저한테 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성경의 중심은 로마서 11장에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의 중심은 구원받는 겁니다.” 일반 평교인이에요. 신천지를 접했습니다. 신천지는 처음이고 끝이고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구원론입니다. 구원론을 채워주면 목회 되고 구원론만 벗어나면, 신론이 어떻고, 예수님이고 뭐고 구원론만 제공하면 교인들은 대만족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돌아갑니다.
이 작업을 침례교에 있던 구원파도 시도했고 신천지도 같은 계통으로 온 겁니다. 따라서 신천지나 구원파나 이런 데로 가지 않게 하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더 간편한 구원론을 제공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나 신천지나 전부 구원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론에 빠져있으면, 이것은 창세기 3장 21절이지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문을 활짝 열어놨습니까? 너희들 나중에 정신 차리거든 오라고 했습니까? 생명나무 가는 길을 동쪽을 막았지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화염검으로 막아놨잖아요. 하나님이 어디 갈굴 게 없어서 지렁이만도 못한 인간을 갈구요. 좀 하나님이 대승적으로 마음을 열어서 불쌍한 것, 철도 없는 것 하고 용납하면 되잖아요. 갈굴 게 없어서 마귀나 갈구지. 갈구려면 인간을 만들지나 말지. 선악과 하나, 하나님 비품 하나 건드렸다고 추방하는 건 이해돼요. 고생 좀 해봐라. 하나님 것 건드리면 혼나는 것 알지? 이러면 이해되는데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거쳐서 영광을 얻으면 그만큼 감사가 넘친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아예 오지 말라고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하는 강한 의지는 뭐냐 이 말이지요.
신약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만 원하십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지요. 기존 피조물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만 건져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은 손들고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게 설득용입니까? 아줌마, 아저씨 설득하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이성에 호소하는 겁니까? 저 정이 많지요, 참 사랑 많은 메시아지요? 그렇게 대하는 겁니까? 쌀쌀 맞은 메시아에요. 싫으면 말고. 이런 식이에요. 전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구원론의 입장을 종교적으로 따지면 확실합니다. 불교는 자력구원이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받는 게 확실해요. 불교는 자기가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고, 기독교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선물로 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인간의 시간 의식 속에 집어넣어서 이게 몇 년 전부터 외우면 재림할 때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외웠는데 올 때 긴장 되어서 잊어버려서 고백 못하면 더듬거리다가 구원 못 받는 경우가 있잖아요.
고백하십니까? 손들고 나오세요. 고백할 때는 말이 나와야 되고 말은 기억 속에 해마에서 끄집어내서 말로 고백한단 말이죠. 그래서 예레미야에 보면 그 때 새 언약 때는 하나님의 신이 말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우리 속에 새겨 넣는 겁니다. 마치 컴퓨터 칩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컴퓨터 칩이 우리 안에 내장이 돼있으면,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인 믿음으로 구원하잖아요.
이게 만약에 맞는다면, 제 말이 맞는다면, 성령이 와서 심은 칩을 내 행함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그 문제가 생겨요. 내가 심었으면 내가 끄집어내요. 성령이 말씀을 심어줬으면 주도권이 성령에 있고 말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종속될 뿐이지 내가 끄집어낼 수 없지요. 그러면 그 말씀에 대한 위반, 또는 어김이 성립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성령이 와서 말씀이 퍼지는데 박하사탕을 깨물면 입안이 화 하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사라지느냐 말이죠. 말씀과 성령이 있는 이상은 성령이 박하사탕처럼 껌의 향기처럼 퍼졌다면 이걸 내가 인위적으로 흩어버릴 수 있고 제거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말씀을 지키라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이것은 지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미 내장된 문제인데 말씀을 어긴다고 어기고 싶은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말씀 되게 퍼지거든요.
그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있단 말이지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할 때 사람 속에 사도바울이 포함됩니다. 사도바울 개인의 의견이라고 샌더스란 신학자가 주장하고, 그 주장을 총신, 장신 젊은 신학자들이 주장하거든요. 물론 그 교수가 제가 총신 있을 때는 없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미리 그런 인간이 등장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아. 내가 말할 때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거기까지는 우리가 용납되지요.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사도바울의 말한 것이 다 계시란 말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말 가운데서 성령이 조정해서 성경계시 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지요. 역사를 누가 말립니까? 성령이 하는 일을 누가 말려요? 당사자가 말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하듯이 말씀이 지킨다 하는 것이 결국 이것은 헛말이 될 수밖에 없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나오잖아요. 이 말씀을 내가 지키라고 하는데 성질 급한 말씀이 먼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내장된 칩처럼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은행에 간다든지 아내가 돈을 셀 때 또는 다른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질 때 자연적으로 뭐가 발생되겠습니까? “저 돈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데.”라고 하는데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나의 행동과 따로 독자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말씀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다면 그 둘 사이에 회개가 생겨나겠지요.
“주여,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모델을 바깥에서 찾습니까? 자기 내부에서 찾을 수가 있지요. 자기 내부에서 찾으려면 구원론이어야 되겠어요, 아니면 나에게 성령을 집어넣어준 그분의 의견, 그분의 뜻이 우선되는 겁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뭘 지킨다는 구원의 욕구가 우선입니까? 그 욕구와 상관없이 나에게 성령 받아야 된다고 집어넣어주신 그분의 취지가 우선되는 겁니까? 그분의 취지가 우선되지요. 그분이 누구십니까?
여기서 동방신학,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믿었던 동방정교회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통해서 오지 않아요. 성령은 성부에서 직접 오는 거예요. 성령은 두 종류에요. 성령은 성부에서 오는 성령과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오는 성령이 따로 있어요. 개혁주의는 로마 천주교 계통이기 때문에 성부로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을 반대하는 거예요.
어떤 취지에서 반대하느냐 하면, 어느 집에 냉장고가 한 대가 왔어요. 퇴근한 남편이, “냉장고 왜 있지?”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폐가 있어요. “이것은 장인어른이 주셨고, 장모님이 주셨어.” 이렇게 되면 냉장고가 두 대가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장인어른의 명을 받아서 장모님을 통해서 냉장고를 줬어.” 그러면 이해가 되지요. 바로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그런 식으로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동방교회에서는, 당신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모른다고 했어요.
삼위일체에서는 상호협력이라는 게 있어요.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가 주장하는 유명한 이론이 있어요. 성부, 성자, 성령은 어떤 일을 벌였을 때 공동작업으로 하는 걸로 돼있습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모두 다 동일하게 찬양과 영광을 받기 때문에. 트리니티신학이란 명칭이 삼위일체신학이잖아요. 삼위일체에서는 어떤 누구도 서열화 시키면 이단이고, 독자적으로 하면 이단이고. 항상 균형 맞춰서 성부, 성자, 성령 동일하게 시어머니가 세분인 거예요. 세 분 다 섬겨야 돼요. 그걸 만약에 한쪽으로 추리면 안 돼. 추리면 이단 되는 거예요.
왜 이단이냐? 역사적 해석법에 의하면 삼위일체가 교리과정에서 아닌 이단들을 추려내는 과정 자체가 신의 개입으로써 아주 경건한 개입으로써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던 아리우스 같은 그런 인간들을 정통으로 인정하려할 뻔했는데 아타나시우스란 정말 하나님이 준비한 성령의 사람에 의해서 삼위일체가 제대로 된 모양새가 갖추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천주교회가. 천주교회가 삼위일체를 인정합니다. 천주교가 이단인가요? 삼위일체 인정하는데 사도신경 다 외우는데.
하여튼 자기 교단 빼놓고 다 이단이라. 누구든지 자기를 욕하면 다 이단이고 자기를 찬성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돼요.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나의 신학을 인정해주면 형제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형제가 아니에요.
신천지에서 나온 천지일보에서 저한테 한 질문 중에 하나가 이거에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질문이 아주 간편하고 명료한 질문을 해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딱 듣고 싶은 이야기, 누가 가라지고 누가 알곡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답변은, 신천지는 알곡이고 신천지 외에는 다 가라지라는 답변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질문을 바꿨어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냐고 개인이 알곡과 가라지로 연결될 수 없고 예수님이 알곡을 어떻게 만드시고 예수님이 어떻게 가라지를 만드시느냐고 질문을 해줘야 됩니다. 누가가 되면 구원론이 돼버리고 예수님이 하셨다면 그리스도론이 돼버려요. 항상 구원론의 모든 난맥은 그리스도에서 나왔거든요. 왜 그리스도에서 나왔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상대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생명나무 길을 차단해버렸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상대해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창세전에 의견 된 그것을 역사를 깔아놓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줘야 우리는 이 관계에 진입이 돼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율법을 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받았고 신명기 28장에 보면,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만약에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홍해를 건너온 우리에게는 충분하게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잠재능력이 있다고 주께서 인정한 이후에나 그 명령을 줘야 앞뒤가 합당하게 맞는 말이란 말이죠. 쉐마, 뭔 뜻입니까? 내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야 영광이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영광이 안 되고 내 백성 아니라는 그 조건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조건을 지킬 만한 여력이 우리에게 장착돼있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이야기라고 본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도록 하는데 그 저주받는 이유가 뭐냐? 지킬 수 있다는 그것이 바로 저주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역사적 해석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왜냐? 역사적 해석은 시간의식 속에 말씀이 들어와서 주무르고 조지고 하는 것이 내 시간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과거, 잊어도 좋아.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 그 다음에 기다릴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입력된 정보는 십자가는 과거로 기억하고, 재림은 미래로 기다리면 되고, 현재는 새 생명 가운데서 말씀을 실천화시켜서 성령의 온전한 열매를 맺으면 누가 봐도 나는 성도 맞는다고 박수 쳐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맞추어서 성경해석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성경해석은 숙제가 되지요.
이것까지는 지켰는데 돈을 사랑하는 것은 좀 미루었다. 올해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극복해볼까? 이렇게 되면 거기서 단계가 발생돼요. 단계가 발생되면, 단계 위에 당회장 목사가 있고 단계 초보에는 초신자가 있지요. 중간에 바로 먼저 된 자들이 끼어있어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원리를 여기에 적용시키면 안 되는 겁니다. 먼저 되면 어디 가야 돼요? 저 끝에 가야 돼요. 바리새인에게 너희들은 항상 제일 높은 자리에서 인사 받는다고 했다고요. 그 말씀을 기억하면 전부 다 낮은 자리에 가야 돼요. 그럼 낮은 자리에 다 모여 있어요. 낮은 자리에서 높은 체하는 사람들. 겸손의 대결, 누가 겸손한지 시합을 벌이는 교만한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 다 율법화 돼버렸어요.
겸손의 법이 되는 문제가 다른 게 아니고 모델이 따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교회에서는 ◯집사님이 신앙 제일 좋아. 제가 아까 히브리서 11장의 성도들이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외에는 모델이 없어요. 자기도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그 일을 예상한 게 아니고 성령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길을 갔거든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어요? 너는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라고 했지요. 만약에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란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지요. 원치 않는 길을 자기가 결정하면 안 돼요.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결정한 자기가 원한 길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제 취지를.
고난 받으라고 해서 자기가 고난 받으면 그건 고난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자기가 선택한 고난 중에 하나에요. 그건 주의 순종이 아니고. 가만있어 보자. 내가 어떻게 고생길이 없을까? 집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차라리 나 혼자 기도원에 갈까. 이것은 자기가 결정한 거예요. 자기가 그래야만 뭔가 거룩해 보이고 좁은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주님의 고난을 본받은 것처럼 보이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수작입니다. 그것은 남을 속이는 짓입니다. 자기 소설 쓰는 거예요.
그 소설이 어디서 나왔는가? 모델케이스가 있어요. 고난 받는 사람, 울지 마 톰즈, 아마존에 고생한 것, 손양원 목사. 이미 모델케이스가 있어요.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뽑아서 그 정도해서 존경받는다면 나는 그보다 더 세게 하면 40일 금식기도, 나는 42일째. 전부 다 모델이 있어요. 그러나 신앙에는 두 번 다시 홍해는 없습니다. 요단강 건너왔습니다. 그 다음에 요단강 없습니다. 언약궤 불타버렸어요. 모세 놋뱀 불타버렸습니다. 기드온이 입던 옷 에봇, 그것 우상이었어요.
네가 아무리 믿음 좋더라도 오늘 되면 그게 너한테 우상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를 경유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제 은혜 받았더라도 은혜 받은 걸 기억하는 그 순간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자신이 우상이 돼버려요. 그것은 자기 부인을 빙자한 새로운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법이 그런 것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역사적 해석법의 허점은 바로 아무리 겸손을 떨어도 겸손한 만큼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싶은 충동을 인간의 본성상 지울 길이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