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2년 여름 십자가 마을 수련회 교재[복음이냐 교리냐] 본문
[ 2012년 여름 십자가 마을 수련회 교재 ]
천국 가기
- 복음이냐 교리냐 -
주제 말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Ⅰ 서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을 독려하기 위해서 클레르몽 공의회(서기 1095년 11월)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1.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
2. 질병 등 불가피한 이유로 참가하기 힘든 자는 다른 사람의 참가에 필요한 비용, 즉 의복이나 무기를 구할 돈을 헌금할 것.
3.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참전자가 남기고 가는 자산은 로마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책임지고 감시해서 귀국할 때까지 보전한다.
4. 십자가 참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산을 팔아야 하는 경우, 또는 그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는 경우는,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책임지고 감시한다.
5. 십자군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자기가 속한 교구의 사제에게 신청하고 허가를 받은 후, 십자가에 서약하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다.
6. 십자가에 서약한 후에도 출발하지 않거나, 혹은 출발했어도 도중에 일찌감치 돌아와 버리는 자는 곧바로 파문에 처한다.
- 『십자가 이야기 Ⅰ』 시오노 나나미 저 문학동네(파주: 2011) pp 31-32. -
이 주장은 지금도 활동하는 천국과는 상관없으며 단지 교리적으로 하자 없다고 자부하고 나온 발언이다. 즉 교리로서는 잘못이 없어도 천국과는 거리가 먼 경우를 교회사는 계속 뱉아내고 있다. 어째서 교회역사가 복음과는 상관없어도 교리에 저촉이 안 되면 이단이 아니라고 우길 수가 있는가? 그것은 교리(敎理)라는 것이 구성해낸 그 바탕이 ‘권력화된 단체’로서 활동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라는 곳이 완벽하게 죄가 전혀 없는 자만 집결한다는 소식을 접한 자들이 이 이론에 부합하기 위해 지상에서 현실적으로 무슨 노력을 해왔던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義)’가 되기 위해 어떤 실천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던가?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어떠한 삶의 자세를 견지해야만 하느냐고 믿어왔던가? 이런 실천방안들이 집대성된 것이 오늘날 교회 내의 역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분류작업은 고려하지 못했다. 분류 기준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세상에서 세력과 권세 키우기에 급급한 것이다. 이는 교회가, 교회 존립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되어 있는 바다. 마치 일반 회사가 회사 존립 그 자체가 사업 목적인 것과 같은 발상으로 그동안 버텨왔다. 그런데 이런 교회 존립이 곧 천국으로부터 배제의 대표적 표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반(反)-천국의 대항마로 구체화된 것이 교회다. 구약에서 ‘멸망받을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멸망의 요인을 품고 존립한다. 그 내부에서 실시되는 행정들과 사도 바울의 복음에서 외치는 바는 늘 정반대로 부딪치고 있다. 소위 ‘현실과 이론’의 차이에서 빚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천국 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의 묶음’을 말하고, 여기서 말하는 이론이란 ‘사도 바울이 외치는 복음을 말한다.
이론은 듣고서는 곧장 잊어버린다. 실익이 못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원한다. 세례증이라든지, 머리 위에 뿌려진 차가운 세례수에 대한 느낌이라든지, 입 안을 잠시 고였다고 목구멍으로 금새 사라진 포도즙의 새콤함이 자아의 천국 확정됨과 관련 있기를 원한다. 게다가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과 교회 1년 행사 스케줄과 교회 건축물이 품고 있는 서구 중세풍의 그림이나 디자인들이 자신의 ‘천국 가기’를 도와주는 고귀한 분위기이라는 감히 부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다른 세계에 진입된 자임이 교회의 그런 특이함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속임수라면? 진짜 천국활동을 훼방하는 유혹들이라면 과연 이것들을 부정할 용의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호기심 삼아 혹은 흥밋거리 삼아 이런 종교 쇼를 가끔씩 싶어 하지는 않는가? 혹시 예상 밖의 행운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 내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동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 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중을 선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쉬지 않고 분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쳤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셔야 했다. 이것이 분류 작업의 유일무이한 기준이라면 인간들의 구원 염원 자체가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구원을 가로 막으시는 하나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표현해도 같은 말이다. “너희들이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내려고 하는가?”(갈 3:3)
Ⅱ 본론
1. 교리의 내부 짜임새
인간들이 익히 아는 신관념(=종교성)과 성경의 내용과 연결 짓기 위해서 이미 인간 정신계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이 동원되어 교리라는 것은 편성하게 된다. ‘신(神)’을 언어적으로 규정시켜 놓게 되면 어떤 효과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종교화된 정치적 집단을 만들 수가 있다. 신의 보호가 ‘교회’ 형식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신이란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궁극적인 방안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버티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매 맞고 멸망당했다. 신은 곧 ‘하나(1)’다. 이 양보할 수 없는 하나(1)를 돋아내기 위해 둘과 셋의 아이디어는 경유로서만 역할을 하고서는 곧장 철회되어야 했는데 이 논리적 작업을 재료로서 성경구절들이 동원된다. 어쨌든 하나(1)를 살리기 위한 둘(2)과 셋(3) 개념을 도입할 때, 필연적 1,2,3을 넘어서는 초월적 하나(1)의식 불러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초월되기 이전의 하나(1)와의 초월된 이후의 하나(1)의 관계가 둘(2)이 있어야 성립되기에 이 둘(2)을 철회시키고 하나(1)로 돌려놓는 작업에 있어 합당한 논리를 위해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단어 안에는 모든 것을 하나(1)의 자리를 되돌려놓기 위해 잠재되어 있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고 우길 수밖에 없다. 하나(1)로 모아져서 최종 정리되는 의식의 흐름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지적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이것저것 균형 잡아 안다고 해서 앎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믿음’이다. 앎의 끝 대목에서는 앎의 능력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믿음의 영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믿습니다. 일방적으로!” 이 주장을 달리 말해서 “나는 나의 믿음을 믿을 뿐입니다.”는 말이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교회만를 믿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사실을 경험하고 안다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믿는 것은 결국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의 존재 방식이 예수님의 말씀 활동과 충돌될 수 있다는 사실에 중요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라는 용어가 실제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재적 작업을 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교회가 스스로 교회답게 되기 위해 정리되어야 될 것과 인간들이 정리할 것도 없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만드시는 교회와의 차이점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유념해야 했다. 인간들의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인됨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5세기 말엽,(AD 420-450) 교회는 다음과 같이 신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소위 ‘아다나시우스 신조’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공교회의 신앙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것 없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공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한 하나님과 일체 안에 삼위를 경배한다. 격위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질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는 성부의 한 격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격위가 계시며, 성령의 또 다른 격위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모두 하나이다. 그 영광이 동등이며 그 존귀가 함께 영원하다.
성부가 바로 이같으며, 성자가 이와 같고, 성령이 또한 이와 같다. 성부가 지음 받지 아니했고, 성자가 지음 받지 아니했고, 성령이 또한 지음 받지 아니했다. 성부가 불가형언이며, 성자가 불가형언이며, 성령이 불가형언이다. 성부가 영원하며, 성자가 영원하며, 성령이 또한 영원하다. 그러나 세 영원들이 아니고 한 영원이다. 이와 같이 세 불가형언들이 아니고, 세 비피조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비피조이며, 하나의 불가형언이다. 이와 같이 성부가 전능하시며, 성령이 또한 전능하시다. 그러나 세 전능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전능이다. 이와 같이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성부가 주님이시고, 성령이 또한 주님이시다. 그러나 세 주님들이 아니고, 한 주님이시다.
이는 우리가 기독교적인 참된 신앙 양심으로 이같이 믿지 않을 수 없다. 각 격위가 친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주님이시다. 보편교회 공교리가 다음과 같이 말함을 금한다: ‘삼신들이 계시거나 세 주님들이 계신다는 것.’
성부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조성되거나 지음 받지 아니했고, 나지 아니하셨다. 성자는 조성되지 않고 지음 받지 아니하셨고, 오직 성부에게서 나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지음 받았거나 나지 아니하셨고, 오직 나오신다. 그러므로 한 아버지가 계시고, 세 아버지들이 아니다. 한 아들이고, 세 아들들이 아니며, 한 성령이고 세 성령들이 아니다. 이 삼위 안에 누구도 앞서지 않고 뒤지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보다 크거나 낮은 분이 안 계신다. 그러나 전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같이 동등이다. 따라서 이미 고백한 것 같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고백한다: 삼위 안의 일체, 일체 안의 삼위께서 경배를 받을지니라.”
2. 아래 그림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교회가 자체적인 보존을 위해 복음을 인위적으로 변경시켜야만 했던 그 현황을 보여준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인식을 만드는 그 틀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들의 인식이란 주변 상황에 대해서 자아라는 현재 몸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바깥 세계를 늘 재구성 마련인데 자기 존재에 도움 되고 변명으로 식으로 나타난다. 인간들은 항상 이런 시도를 긍정하므로서 자신이 결국 신(神)처럼 살아야 될 절대적 존재임이 확인하고 외부로 발현하려 든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나는 신이다”(겔 28:2)
- 『그리스도교』 한스 큉 저 분도출판사(왜관:2010) 표지그림 -
2. ‘바울의 복음’
(1)우주론
심판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주는 만들어졌다. 우주는 멸망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10-12)
이 심판을 통해 주님의 주되심이 나타난다. 즉 주되심을 위해 반드시 심판행위가 실시된다는 말이고 그 실시의 대상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다. 그래서 피조 세계 속에는 주님에 대한 ‘심판 요청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필히 자체적으로도 심판이 유발되어야 한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 4:10-11)
쉽게 말해서, 땅은 주님으로부터 심판받기 위해 요동치는 하는 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땅 속 마그마가 들끓는 것처럼. 그것도 매일같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 요동의 원인을 ‘인간(아담)이 지은 죄’로 보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는 우주 운명과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죄로서. (이점에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실패한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과학적 탐구성이 본원적 죄에서 나온 것임을 모른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나타난 복음’을 통해서 자죄를 알고 그 어떤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여기서 ‘죄’란 자기만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죄를 의미한다. 죄는 사적인 것으로 끊어낼 수 없다. 인간은 홀로 죄 지을 수가 없다. 모든 죄는 집단 속에서 생성되어 개인적으로 배당받는다. 모든 사적인 죄는 집단 죄로 모아져야 하고 이로서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미리 보여준 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 시스템이다.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그 주변에 벌어지는 자연 세계의 변동 상황은 ‘주님을 위한 우주’임을 미리 보여주는 장치이다. (출 4장, 7장-12장의 10가지 재앙들/계 6장, 8장, 16장)
(2)인간론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인간론이다. 즉 죽음의 의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졌다. “정녕 죽으리라”(창 2:17) 인간은 죽기 위해서 나타나야 했다. 달리 표현해서 ‘죽음의 열매가 곧 인간이다’ 죽음은 꼭 인간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죄의 배후 인물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인격화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인격화가 전 우주에 새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영과 영의 대결에서의 승리하신 인격에 대한 기념물로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인간을 살리려고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하신다. 살고자 하는 자와 죽고자 하는 자의 전쟁터로서 인류의 역사가 마련되었고 거기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인간은 산 자 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실은 죽은 자인 것이다.(고후 5:14)
죽은 자이면서 산 자로 행세했다는 것은 악마의 충복이면서도 실은 절대적인 신적 존재로 행세하며 산다는 말이다. 유일하게 산 자는 예수님뿐이다. 이 산 자의 ‘살려주심’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인간은 마음껏 살려고 하는 몸부림을 평생 보여주므로서 저주와 심판의 진수를 평생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시 70:9-11)
인간의 몸은 새 세상과 옛 세상의 접경지점이다.
(3) 그리스도론
모든 이에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나타나신 인간이다. 인간들의 모든 종교 행위나 해석에 대해서 역시 걸림돌이 되는 존재시다. 그리고 종교단체로부터 종교적인 판단을 받고 사형 당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려면 그 최후의 취지로부터 거꾸로 의미를 끄집어내면서 추적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의 어떤 종교심이 예수님을 보고 살해의지를 갖지 아니하면 안 되게 했던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통하는 논리 방식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는 올무, 즉 ‘자기 의(義)’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인간 속에서 발동이 되는 ‘자기 의’ 속성은 그리스도를 대하면서도 그 그리스도를 자신 속에 담겨있는 ‘자기 의’의 모델로 삼아 자신의 의(義)도 그리스도 의처럼 되어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발작을 보이게 된다. 걸림돌을 어떻게든 제거시켜놓고 걸림돌이 제거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예수 닮기’에 매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기 의(義)’의 본격적인 발현이다. 기어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복종을 모른다. 단지 복종하는 척하면서 수시로 눈치를 보면서 자기 만이 영원히 즐길 ‘나만의 의(義)’를 따로 장만하고자 한다.
‘예수 의(義) 따라잡기’는 교회사 내내 실시되어 왔다. 지금도 매주 진행된다. “우리 성직자들이 시킨 대로 하시면 여러분들도 예수처럼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학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교회 없이는 구원도 없는 법입니다.”고 대중들을 설득하면서 교회는 지탱해 왔다. 그렇게 되니 교회에서 교인들은 자기 의를 버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값어치를 질적으로 증강시키기 위해서 온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부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義)’ 생산을 위한 원료로 투입되어 갈아 뭉개진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기 의(義)’도 갈아엎어진다. 죄인으로 더욱 드러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욱 더 넘치느니라”(롬 5:20)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님의 현존은 ‘예수 안’으로 표현된다. ‘예수 안’에 들어 있지 않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는 인간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 ‘예수 밖’에는 저주와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이다 는 말이다. 이는 복음이란 ‘인간 안’과 대비를 시키는 방식으로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 안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인간 안에서 아우르게 되는 세계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인간의 의한, 인간을 위한 세계관 만을 그려내기 마련이다. 심지어 ‘인간 안’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과 악마마저 다 인간 안에 담겨서 표현된다. 이것이 현대판 우상이다. 바로 이점을 공략하는 것이 ‘예수 안’, 곧 ‘십자가 안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4)구원론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개입시켜서 설명한다. 율법 도입으로 인하여 구약 이스라엘이 구조가 자연적으로 복음 안에 조성된다.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오해했으며 결국 어떤 식으로 율법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롬 2:23-25)
즉 ‘율법 지키는 자’가 ‘율법으로 인하여’ ‘율법을 못 지키는 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 이스라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오기 전에는 모든 인간들은 마치 본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정도로 단단히 신앙적 준비가 되었다고 장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도리어 화가 나서 십자가에서 눈 돌이고 “우리에게 율법을 다오. 그것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겠다”고 외치는 본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든 선교단체, 모든 교회가 다 이런 식의 학습 교재로 만들어 버틴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8-19)
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인간을 향하여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도 율법에 대해서는 저주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즉 저주를 피해서 받는 구원은 없다. 말씀으로 인한 저주가 늘 유발되는 그 현장에서 ‘율법 없이 되는 구원’이 늘 이루어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5)성령론
영은 선물이다. 긍휼을 내리신다는 증거로 주시는 것이기에 은혜로만 받아지게 되어 있다. 은혜가 아니라 삯으로 여겨진다면 성령 안 받은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기적인 능력 소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인간 행함에 대해 ‘부정’으로 찾아오시는 ‘어떤 분’으로 그 실체가 받아지게 된다. 즉 “누구십니까? 나의 행함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부정하시는 당신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기계적인 능력 소지가 아니라면 그 관계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자기 능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는 않는 법이다. 왜냐하면 사랑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 곧 선물로 받은 선물이 아니다. 지속적인 존재 집착이다. 성령님이 가져다 주는 선물은 종합선물이다. 그 안에 성도의 운명, 전부가 담겨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따라서 성령님은 늘 새 것으로서의 교체를 촉구하신다. 탄식하시면서.(롬 8:26)
이 탄식이 사랑이다. 속에서 탄식 소리 들어가면서 나오는 성도의 삶이 곧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삶이다.(엡 5:22-24) 사랑받았으면 더 이상 다른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육체를 위한 삶은 썩어질 것만 얻게 된다.(갈 6:7) 선교나 목회나 구제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랑은 직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근거를 둔 ‘정죄함이 없음’으로 고백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Ⅲ 결론
교회란, 인간이 붙잡을 수 없는 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관리대상이 아니다 는 말이다. 교회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있는 식으로 늘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도’의 교회됨을 늘 새롭게 지정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성도가 교회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늘 다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늘 교회이기에 늘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도의 눈 앞에서는 늘 교회만을 생각하는 유사-성도들이 눈에 들어오고 어느새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핍박을 받게 된다. 그들은 교회 일에 종사함을 통해서 형제 됨을 확인하자고 덤벼든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다음과 같이 외칠 수밖에 없다. “십자가 피 앞에서 자기 부인이 되는지를 통해서 합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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