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2년 여름 수련회 1-2강의 본문
녹취:한윤범
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부터 끝 날까지 주께서 저희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참 뜻이 어떤 뜻인지를 다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도행전 16장 16절부터 18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이 본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말한 이야기가 아니고 귀신이 말한 이야기인데 귀신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나오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귀신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출이거든요. 탈출, 빼내가는 그런 건데 그러면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마귀 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구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이야기가 되죠. 살 수 없는, 살 필요도 없는, 살아서도 아무 가치 없는 세상에서 인간들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세상이 아무 가치 없다고 단정을 짓더라도 빼도 박도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들의 형편입니다. 유일하게 사도와 실라 이 사람들은 우리를 거뜬하게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빼낼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말은 마귀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 말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귀신이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을 인간들은 전혀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인간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경북 경산 지방의 최고 기온이 38.2도였습니다. 얼마나 덥습니까? 이거는 올해만 그런 게 아니고 내년되면 또 그래요. 2014년도 또 그럴걸요. 점점 온난화되어서 더 심해질 건데. 그러면 이 세상이 못 살겠다, 덥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을 버리고 나가긴 어딜 나가요? 나갈 데가 있어야지 나가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실라과 귀신은 말합니다. ‘구출 작업’에 관해서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갈 곳도 모르는데 상태에서 누구의 말만 듣고 따라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가를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덥더라도, 춥더라도 익히 아는 이 세상에 죽치고 있는 게 안심되지 만약에 이 세상을 벗어나서 불확실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 없는 짓으로 보입니다. 이 세상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 말이죠. 없는 거란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상상의 유토피아를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은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서 죽치고 살겠다는데 귀신이 앞장 서서 소개하는 이 사도들은 사람을 빼내서 다른 세계에 집어넣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귀신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다면 과연 구원이 되어서 따로 살게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할까요? 우리가 이 귀신 이야기가 거북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세상의 문제에만 몰두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편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강의를 귀신이 말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은 귀신만도 못한 영안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이 국회의원 됐다고 좋다고 하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 국회의원입니까?”라고 묻는 게 아니고, “당신도 탈출됐어요?” 이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국회의원 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귀신의 안목에서 보면 전혀 무의미한 짓이 되는 겁니다. 목사의 교회일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네 교회가 얼마나 크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 구원되었습니까?”를 묻는 겁니다.
고르기아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과 절대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답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며, ‘세상은 신이 창조했다.’ 절대적이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치 않아요. 절대적이지만 확실치 않는 게 있는 반면에
“2+3=5다.” 이것은 확실하죠.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2+3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이게 밥 먹여 줍니까? 배고픔을 해결해요? 사과장사하는 아줌마가 “사과 사세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줌마가 하는 말이, “2+3=5입니다. 2+3=5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과 팔립니까? 안 팔리죠. 분명히 2+3=5라는 게 사과 파는 아줌마가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그게 별 도움이 안 되잖아요. 자기 생활에. 깨놓고 이야기해서 사람들은 진리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밥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거잖아요.
흔히 중학생들 늘 이야기하는 게 수학이 어려우니까 수학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왜 이 수학을 해야 되느냐고 하지요.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하지요. 삼각함수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도움 안 되거든요. 농사짓는데 삼각함수 동원해서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돈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걸 많이 배워야 도리 필요가 뭐가 있느냐. 밥 먹여주면 배우겠는데 밥 먹여주는 것도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이 배우느냐 이 말이죠.
심훈의 [상록수]나 이육사의 시 해서 사과 하나라도 팔립니까? 그런데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 시가 나온다 말이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런 시 외워서 농사가 잘 되는 게 아닌데 그 시를 왜 외우는데.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나한테 당장 이익이 없는데 왜 외우느냐. 머리 좋은 것 시합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뭔가 절대적이기도 하고 확실한 게 없을까? 확실히 계시면서 절대적인. 그걸 고르기아스는 ‘신’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하든 뭘 하든 간에 그 주장은 귀신보다 더 못한 거예요. 귀신은 노골적으로 이 세상 접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더라는 그걸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면서 신을 이야기한다고요. 신을 이야기하면 신이 사는 세상도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이 있고 천국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세계마저 조작해 내어야 했답니다. 그럴사하게.
누메니우스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의 신은 하나로 되지 않고 세 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삼(3)신. 하나는 천지를 만든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이 세상 자체가 만들어진 자체도 그 안에 신이 작용해야 되고, 그 다음에 보이지 신이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똑같은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공장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요. 공장이 아니고 사람들에게는 얼굴 모습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에서 여러 가지 나왔으니까 여러 가지 솜씨를 부리는 신이 있어야 돼요. 데미우르고스라 해서 중재자란 뜻인데.
그러니까 신이 창조하시고 편안하게 모시는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만들어진 세상 속에 우리의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중간에 만들어진 신, 그래서 삼신이 있어줘야 그래야 세상은 모든 것을 적절하게 설명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귀신 말 듣기 전에 세상 사람의 아이디어에요.
지금 강의하는 방향이 뭐냐 하면, 신앙이니, 성령이니, 성경용어 안 따져도 사람이 갖고 있는 머리로, 아이디어로 얼마든지 삼위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거예요. 삼위일체도 만들어내고, 예수도 만들어내고, 성경도 만들어내고, 교회도 만들어내고. 이것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실력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제가 지금 언급해드리는 겁니다.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기를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면 안 되겠습니까? 믿음으로 천국 간다 하게 되면 그 때부터 ‘믿고’ '아니 믿고‘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끼리 의사소통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교육 정도에 따라 ’더 잘 아는 것‘, 곧 ’더 잘 믿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겁니다.
“네가 믿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너, 여기에 대해서 알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공부를 적게 했어.” “그러면 공부를 하면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아는 것으로 가게 된다면 구태여 믿음으로 할 필요 없이 실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고, 없는 사람도 공부만 좀, 노력만 하고 시간만 주어지게 되면 실력 없는데서 있는 데로 발전하게 되니까 구태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상태에 돌입되게 되면 얼마나 편하냐 말이죠. 또한 전에 교육을 많이 받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라면 구태어 새삼스럽게 ‘믿음 여부’를 안 따져도 상관없이 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중장년 되시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중학교 때 배웠던 물리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든지, 지리책에 나오는 도시이름이나 나라이름 기억합니까? 잘 기억 못하죠. 다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고 농사짓고, 사업한다고 잊어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중학생이 하는 말이, “아버지, 현재 올림픽 열리는 나라의 수도이름을 압니까?” “몰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애야 그건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잠간 잊어버린 거야.” “아니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아니야.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신문 보면 런던에서 하고 있네. 영국의 수도는 런던, 그러니까 다시 알 수 있는 기회만 부여받으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논리입니까.
교재, 3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봅시다. [5세기 말엽 교회는 다음과 같이 신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소위 ‘아타나시우스신조’다.] 여기 초반에 서론부분을 봅시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공교회의 신앙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것 없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곧 지옥에 갈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는 것이 몇 개의 문장에 대한 동의로 결정지울 수 있다는 것이 서기 5세기 말엽에 로마교회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한 일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극장에 갈 때 여자직원이 앞에서 표를 받지요. 표 받으면 입장시켜주고 표 안 받으면 입장 안 시키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나온 직원이 나와서 묻기를 방금 보았던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보여주면서 “동의하시고 인정하십니까?”라고 묻고 동의한다면 천국가고, 동의 못하면 지옥 가는 겁니까? 정말 구원이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악마도 귀신도 이 방식에 동의해서 사도 바울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신조를 외울 때 더듬거리면 구원도 불확실해지는 겁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공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한 하나님과 일체 안에 삼위를 경배한다. 격위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질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는 성부의 한 격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격위가 계시며, 성령의 또 다른 격위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모두 하나이다. 그 영광이 동등이며 그 존귀가 함께 영원하다.]라는 글자를 외우시면 구원받습니다. 그 당시 공교회에서.
여러분 과연 천국, 지옥 보내는 그런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5세기경에 이것이 모든 교회라면 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실시를 했고 이 기준에 의해서 심사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어느 누구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나서고 있는 겁니다.
아는 것은 반복되는 심화학습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숭이라도 한 문장 할 때마다 바나나 하나 주면 15년 만에 다 외워요. 아이큐 40밖에 안 되는 원숭이라도 다 외웁니다. 군에서 기합을 받으면 사병규칙 열 가지도 일주일 만에 다 외워요. 그렇게 외우기 싫어하는 농사짓다 온 사람도 다 외우게 돼있습니다. 군에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걸 외운다는 게 아니고 그 내용을 알고 고백해야 합격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겠지요. 여러분 인간이 ‘안다’는 것은 너무나도 주관적입니다. 내가 뭘 안다는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현대수학과 현대과학에서 밝혀냈습니다. 사실은 ‘내가 안다는 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제 말은 ‘안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환경 따라서 그 시대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아는 것과 고려시대에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는 것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때 아는 것과 지금 아는 것이 다 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뭘 압니까? 이순신 장군이 삼위일체 압니까? 모르죠. 이순신 장군에게 삼위일체 이야기하면 그분이 압니까? 머리 좋으니까 외우기는 잘 외우겠는데 삼위일체가 뭔지 알겠어요? 신학자도 삼위일체가 뭔지 모른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해 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고 있거나 결과적이 틀린 게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외운다,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도 그 의미와 ‘안다 것’은 본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유령이 깔려있습니다. 그 유령은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아주체성을 수립할 때마다 그곳에 쏠려서 그 사람만이 은밀하게 간직하고 싶은 의미를 담는데 유용할 뿐입니다. 마치 금속 속의 자유전자의 이동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자유전자’는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것은 한 곳에 의미가 박혀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표현, 즉 기표에서 기표로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있을 때 의미와 둘이 모였을 때 의미가 달라지고, 세 개 모이면 또 달라지고, 위치 바꿔도 또 달라지고, 모든 게 다 달라져요.
예를 들면, 남자라는 게 뭔 뜻입니까? 남자란 여자가 아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팻말을 붙이면 졸지에 ‘남자화장실’이 됩니다. 빨강색이 파랑색을 만나 횡단보도에 나타나게 되면 교통 신호체계가 됩니다. 즉 “건너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언어라 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 사람이 자기만 갖고 있는 의미를 남한테 떠벌이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눈이 오네.”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눈 오는 것이 기쁜 것처럼 내 말을 듣는 네도 나의 기쁨에 동참해다오”라는 뜻입니다. 곧 명령어가 되는 겁니다. 이 명령어의 기반에서 무슨 울림과 외침이 터져나올까? 그것은 바로 영어로 “Help me!"입니다. ”날 도와주오“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뭔가 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해주고 내가 뭘 요구하든지 너는 내 요구를 들어줄 책임이 있다고 외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언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들아, 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다오!”라는 뜻입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돌보는데 갑자기 맞벌이 갔던 며느리가 들어왔다. “오늘 많이 덥지. 얼마나 더운데 애가 땀띠가 막 나려고 한다.” 이건 뭔 뜻일까요? “힘들어 못 키우겠다. 좀 데려가라.” 그런 뜻입니다. 언어에는 유령이 있어서 그 유령은 포착되지 않아요. 잡히지 않아요. 의미를 안다는 것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 이런 문장을 제출한 권력체에 복종하면 네 목숨은 내가 유용성 있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서 없어져라!“는 명령 같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귀신은 탈출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사울 바울과 실라하는 말은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 줄 몰라요. “저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밥 먹고 사는구나”고 여깁니다. 진정 탈출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다면 떠나야 할 기존의 세계와 도착해야 될 이 두 세계를 보여주고서는 “너희들 어느 나라 갈래?”라는 식으로 신이 제안해야 옳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 나라를 보여주지 않은 입장에서 뭔가 탈출하라 하니까 기껏 나온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 천정만 튀다가 내려오는 거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처럼 천장만 튕기다가 도로 내려와서 이 땅에 거룩을 모토로 해서 정치적인 단체를 만든 것이 곧 교회입니다. 아무도 탈출한 적도 없으면서 저희끼리 탈출하려고 시도해보겠다고 그냥 모여든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서 반복적으로 삼위일체를 비롯해서 온갖 교리를 배웁니다. 아타나시우스신앙교리를 배우고, 십자가 복음은 이런 것이다는 것도 배웁니다.
백날 배우면 뭐합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데 말입니다. 교회에서 식사당번 봉사하다가 누가 싫은 소리라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교회에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배우면 뭐합니까? 십자가 알고, 언약을 알아도 가장 인식과 행동이 나오는 근본적인 바탕은 “날 도와줘요”입니다. 그저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예수님 계시다’보다 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로 느끼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살려니까 외롭고 심심하니 교회에 나가서 정 나누고 재미있잖아요.
이러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이게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 역사를 통해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신앙 선배가 아니라 교회 선배들이 작성한 ‘아타나시우스 신조’ 같은 것들과 비슷한 것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단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교회입니다”가 통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겠습니까? 자기부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이 도로 자기 긍정을 세울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은 자기 부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자기 부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신학교 세워서 학생들에게 바른 교육시켜 말씀을 바로 가르쳐서 앞으로 전 세계에서 바른 교회가 세우도록 계획을 잡고 일을 추진했건만 신학생이 한 명도 없게 되자 가정적으로 부인과 논쟁이 격해지면서 부모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서 비-진리가 아닌 겁니다. 단 한 명의 신학생이 없더라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면 그만인 겁니다. 하지만 신학교 세우면서 은행에서 돈을 무리하게 빌린 것은 뭔가 노렸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 도와줘요”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겠다는 모든 교리와 말씀도 그 바탕에 ‘날 도와주세요’가 깔려 있다면, 다시 말해서 “날 도와주어야 돼”가 깔려있다면 그 목사는 그가 다르치는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그 목사의 부인은 노골적으로 “헬프 미”를 외친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위주이기에 두 사람이 모였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철학에서 뭔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주님은 어떻게 일하시고. 좋은 건 신학과 철학에서 다 담겨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때문에 피해 입은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신학을 하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피해를 봤다는 소리를 신학자가 과연 하겠습니까? 내가 목사 노릇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피해를 본다고 소리를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신학박사와 철학박사가 예수님 목조르면서 얻어낸 학위라고 누가 감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은 삼위일체와 각가지 교리와 신조를 고백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피해보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피해자로 왔다는 말은, 피해자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가해자라도 등장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가해자를 추적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결국 전체 아담, 모든 인간이 다 연루돼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추적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죽이는데 전부다 가담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죽는데 제가 가해자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분이고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끝까지 자신을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라는 거예요. 엮여지지를 못했어요. 엮여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오직 최후로 남는 심보는 “세상이여 나를 도와주오”입니다. 곧 “예수여, 당신이 진정 메시아라면 당장 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 가도록 해다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구원자로 믿어줄게”라고 나오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사는 숱한 선배들을 행한 것들을 나열해보여주게 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언어와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제작해서 사람들을 그 속으로 통과 시켰어요. 이것 외우면 통과, 못 외우면 탈락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학습,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문장을 만들어낸 그 주최 측의 권력에 고개 숙이고 복종하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 권력체가 외우라고 하는 것을 외우게 되면 “우리 모두는 이걸 고백했습니다. 이로서 우리들은 한 형제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소위 ‘교회 공동체’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했던 공동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의’입니다. 이 나라는 문장 외워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그 어떤 몸부림을 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분류된 모든 구격이나 교단들의 경계선들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즉 우리 개개인에서 뭔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헬프 미”를 외치기 위해 달라붙은 그 언어와 단어들이 용납 받지 못하는 세계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쏠리는 나라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귀신이 알려준 대로 바울과 실라는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외치는 자입니다. ‘ 그 나라와 그 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될 나라임을 전제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나라와 이 의’는 떨어져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표 뒤에 풀처럼 뭔가 들어붙어있어 우리 힘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떨어지지 않는 죄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전략입니다.
죄인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 때는 개과천선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반성하고 회개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 죄를 아는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죄인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죄가 떨어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더 이상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를 못하게 말입니다. 살만큼 가치있는 것은 본인이 아님을 확실히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구원하겠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은 어느새 바라새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자신을 죄인 만들기 위해 필히 인간은 그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는 의인으로 자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죄인 만들기’ 나설 만큼 의로운 자들은 구원받는다는 엉터리 원칙이 세워집니다. “교회에서 도 닦으라”라는 구호에 해당됩니다.
금식기도 일을 맞아서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죄인이다 할 때 예수님은 술 잡수러 가셨어요. 가시면서 하는 말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죄인입니다.”하면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나는 죄인이고 구원받고 싶어하니까 헬프 미”를 외치는 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 스스로 꾸며낸 주장입니다. 진정한 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야 지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은혜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란 기껏 현재 짓고 있는 죄를 되풀이 지을 수 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의 개입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능력이 개입되면 죄와 선의 판가름은 인간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지 의인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짓는 죄는 참된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죄는 결코 의로움으로 돌아설 수 없는 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제가 술 끊은 지 10년 됐지만 오늘 기분 나빠서 한 잔했습니다. 그래서 죄지었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건 죄지은 게 아니에요. 나는 술 안 먹을 수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술을 먹었다면 그것은 그 다음에 술 안 먹는 의로움도 가능하다는 소리 밖에 안됩니다. 참된 죄는 나 스스로 죄를 다룰 수 없고 죄가 나를 다루고 있음에서 나온 죄를 말합니다.
진짜 죄짓는 것은, 내가 전혀 의인 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다가올 때 나타나는 죄입니다. 자식이 시험에 합격해서 기분 좋아서 속으로 웃으면서 “아니야 교만한 것은 죄야. 참아야 돼.” 하면서도 자기 기분 정리하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자기를 상대로 장난치는 거예요.
진짜 죄짓는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건져주지 아니하면 전혀 구원이 안 되는 상태, 그게 죄짓는 상태에요. 쉽게 말해서 보통 우리 일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일상적으로 살면 되는데 갑자기 회개하고 반성하고, “주여 죄인입니다.” 그것 죄 아니거든요. 그거는 괜히 폼재보는 거거든요.
죄냐, 아니냐는 우리가 판정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판정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판정을 내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죄인이면서 의인 행세했구나.” 판정을 내리시면 그것이 예수님이 완성 때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 발각당한 죄입니다. 발각시킬 뿐만 아니고 그 죄인은 주께서 100% 알아서 의인으로 바꿔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면류관까지 주 앞에 바칩니다. “미쳤어, 미쳤어. 이런 것 왜 쓰고 있어.” 하면서 하는 말이, “주여, 제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디즈니 만화에 보면 있잖아요. 그냥 시커먼 쇠도끼가 있는데 산신령이 와서 손을 대니까 신비로운 음악이 들리면서 금으로 변하듯이 예수님께서 오시게 되면 전부다 의인으로 변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손 안 대면 지가 여기서 착한 일해야 되고, 번짐처럼 자꾸 번져나가야 돼요. 그 선의 영역을 넓히는데 상당히 공들여야 되고 애먹죠. 새로운 아이디어도 필요하고요.
이런 것을 바리새인 선배들, 교회 선배들이 다 해왔어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언어를 어떤 문장이나 삼위일체나 성경의 어떤 구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구원 자체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 귀신은 알고 있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빼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과정을 이렇게 설교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겠는가.”(갈 3:3)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게 되고, 십자가를 앞장세우면 우리는 하나님 안목에서 죄가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나면서 이거는 반성이나 그런 여유도 없이 그냥 죄인이에요. 그 죄인은 어떤 죄인이냐 하면, 의인되기 위한 재료로서 일단 만들어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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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 밑에서 열째 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사도바울의 면죄보다 죄를 용서해주는 방식에 사람들이 구미가 당기면서 어떤 감동을 받는다든지 호감이 간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헛수고한 겁니다.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동방교회나 천주교에서 앞에다 성수를 축성이라 하죠. 뿌리는 것. 1톤 트럭 앞에도 뿌리고, 돼지 앞에도 뿌리고, 가게 문 앞에도 뿌리고. 아가씨들이 개업했다고 춤추면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신부가 와서 뿌리고. 귀신 나가라는 말이거든요.
여러분, 귀신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보낸 분들입니다. 그걸 나가라 하면 어떻게 돼요.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만 골라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아니면 말고. 왜 그래요. 오늘 낮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지금 메시아는 오디션 봐야 돼요. 마음에 드는 메시아가 나중에 우승하고 차 한 대 타고. 일주일마다 한 사람씩 떨어뜨리고. 이런 판국이에요.
면죄방식을 왜 자꾸 집어넣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면죄는 모르고 뭐는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소문에 소문이 나서 단골이 되어 교회가 이뤄지고 권력단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면죄 방식을 빼봅시다. 면죄방식 없는 하나님의 사죄 방식, 용서 방식 없는 용서를 해버립시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교회가 제시하는 사죄 방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AD 500년경부터 면죄 방식이 ‘전례(典禮)’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세너는 그리스식 ‘마가 전례’와 ‘콥트-에디오피아 전례’가 도입됩니다. 안디옥에서는 ‘야고보 전혜’와 ‘요한 크리스토무스 전례’가 도입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진틴 전례’와 ‘아르메니아 전례’가 교회에서 사용되고, 로마에서는 ‘로마 전례’가 보급됩니다. 그런데 이 전례라는 사죄 방식이 구약에서 그 아이디어를 차용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구약의 모든 내용은 이미 십자가 안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구약을 한약재라 합시다. 이 좋은 한약재를 다리면서 인삼도 넣고, 당귀도 넣고 짜니까 십자가 피가 나왔잖아요. 즉 십자가 사건 안에 구약의 모든 의미가 그 안에 다 담겨있는 거예요.
면죄, 속죄하는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짠 피에서만 나와요. 다른 건 어설퍼서 안 돼요. 소 잡고, 양 잡고 해봐야 그건 어설퍼서 면죄 안 돼요. 제사장 복장 걸치고 선무당처럼 날뛰어봐야 안 돼요. 오직 예수님의 피 안에서 되는데 그걸 마지막 언약 완성, 새 언약이라 해서 언약으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고 해서 끝난 문제란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면죄방식에 관심 있다는 그것을 포착해서 교회를 구약의 형식으로 인테리어를 다 바꾸었어요. 구약 인테리어로. 제사장도 제사장 복장을, 정통이라고 우기는 동방교회는 성직자들이 수염까지 기릅니다. 키에프 공국이라 해서 현재 러시아 되기 전의 나링빈다. 키에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입니다. 모스크바로 옮긴 것이 1300년경이거든요.
그렇게 옮기고 난 뒤에 로마 가톨릭에서 파견한 사절단 목 쳐서 죽이고 우리 러시아의 종교는 러시아가 우두머리라 해서 따로 러시아 슬라브 종교 만들어서 남쪽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유고슬라비아부터 해서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쭉 내려오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 밑에 가면 마케도니아,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영토 전쟁에서 교리, 종교라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단체로 몽땅 가입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만약에 지금 북한에 선교한다면 개인을 선교할 필요 없어요. 집단으로 선교하면 됩니다. 즉 최고 지도자가 예수 믿으면 북한은 전부 기독교 교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이 집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종교 뒤에는 국가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국가교회’와 ‘교회국가’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교황이 하나의 대통령이 되어서 황제가 되어서 지배하는 그런 교회를 교회국가라 합니다. 국가교회는 아예 나라 전체가 교회로 운영되는 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러시아 같은 경우에 국가교회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밑에 있는 이슬람교 나라 다 마찬가지에요. 터키도 마찬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 전부다 국가이슬람교가 되겠죠.
사람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권력적 환경이 강제로 개인을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 종교권에 운명이 맡겨지게 됩니다. 광고에 보면 피로가 짐이 되어서 어깨 위에 있는 것 본 적 있지요.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대통령이 무서운 거예요.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회사 취직하면 예수 믿는 사장님, 회장님이 무서운 거예요. 회장님 따라서 종교가 바뀌는 거예요. 만약에 대통령이 소망교회 가면 소망교회로 교회 바꿔야 출세하듯이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당회장 목사가 무서운 법입니다.
사람은 혼자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겁주고 지배하는 세력에 묶여서 삽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체적인 안정과 생계의 보장을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를 지배할 세력에 속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 있어요. 불교 집안에서 교회 간다? 이것은 자칫하면 호적 파는 일이 생깁니다. 기독교 집안의 아이로 태어나는 모태신앙을 갖고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아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깨 위에 짊어진 무거운 짐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짐입니다.
아버지, 엄마 따라 교회 갔다가 아버지가 장로라 해서 억지로 학생회 회장되고 신앙 있는 티를 내다가 고3이 되었다고 핑계로 교회 안 나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이제 종교는 내가 선택합니다, 아버지.”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됩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국가에 매여 있고, 집안에 매여 있습니다. 지금부터 학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무실 분은 주무세요.
요한복음 1장에 로고스란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기독교 이전에 이미 그리스 세계에서 쓰여졌습니다. 이태리가 장화 비슷하게 돼있어요. 여기에 크레타 섬이 있습니다. 유럽문명의 발상지가 됩니다. 이 밑에 아가야, 위에는 마케도니아라는 지방인데 지금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는 따로 있어요. 이 지방에 중요한 도시는 데살로니가라 해서 현재 그리스 두 번째 도시고, 아가야, 아테네는 제일 큰 도시고. 여기 보스포러스 해협이라 해서 흑해에서 내려오는 해협이고 여기가 터키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탄불이라는데가 있어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옛날 이름이 있어요. 칼케돈 여기 있고. 키프러스 섬, 곧 사이프러스라는 섬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 섬에도 전도 했습니다.
로고스란 말은 바로 이 지도에 나와 있는 지역에서 사용한 언어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창안한 그러한 언어와 개념들이 구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 받는 이쪽 지역의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이방인 교회에다 구약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개념을 고스란히 담아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담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를 새롭게 개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이 언어를 개발하면서 동원되는 사상이 바로 로고스 사상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모으다’, ‘집합하다’ 그런 뜻도 있지만 나중에 이성. 혹은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숨어있는 게 드러나는 계시 같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성(理性), 말. 또 그런 것을 포괄적으로 말해서 ‘질서’라고 할 수 있지요. 로고스란 말이 구약성경에는 없는 말이란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이라고 번역에서 구약의 모든 것들을 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와플 있죠. 와플을 자를 때 듬성듬성 자르고 그 한 조각을 단어라고 한다면 이 단어 하나가 포함하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에요. 이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입니다. 옛날에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생산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어 사용도 지금 생각하면 해괴망측해요. 만약에 식물, 동물을 분류할 때 새끼를 배면 포유류고, 물에서 뭍으로 왔다 갔다 하면 양서류고, 지금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옛날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보면 동물 분류법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로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주인 없는 개, 인어(人魚), 전설상의 동물, 미세한 붓으로 그려낼 수 있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 같은 동물 등등으로 분류됩니다. 밑에는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시절이 있어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옛날 시인들 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도 문학가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물체는 좌표로서, 점으로 표현한다. x, y 좌표라 해서 그 지점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간개념입니다. 이런 내용은 17, 18세기 때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다고 여겼던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다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는 게 아니에요. 공간이 곡률에 따라 휘어져있습니다. 빛이 곡률 따라 날아오고 있어요. 공간 자체가 휘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이 공간과 더불어 같이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간관에서 우주 그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의 과거를 되풀이할 수도 있고, 혹은 현재 우리가 이미 지나간 어떤 우주 공간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뒤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면, 길이 두 갈래 있는데 차가 시속 100킬로로 달립니다. 북쪽으로 달리죠. 그런데 이 차가 샛길로 100킬로로 달립니다. 그런데 북쪽과는 점점 더 멀어지죠. 아무리 달려도 이 차는 북쪽에 가까운데 이 차는 북쪽에 느리게 접근해나간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시간과 공간은 결합돼있어서 공간적 속도로 인하여 시간적 속도가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밝혀집니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낮 12시 정각에 식사를 했다고 해봅시다. 식사를 끝나고 난 뒤에 “다음 날 이 자리에서 점심시간에 식사 합시다”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다음 날까지 식당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음 날 열두 시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그 다음 날 그 자리에 찾아왔어요. 과연 둘이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 같으냐 이 말입니다. 같이 않습니다. 달라져 있습니다. 설친 만큼 시간이 빼앗겨서 시간이 정작 12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관련된 공식은 이러합니다.
우주공간에까지 시공간의 지평 범위를 확대시키면, 우주 비행기 타고 다음날 나타나니 프런트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앉아 있고 우주 비행기를 타고 빛의 속도로 여행한 사람은 그냥 그대로인 겁니다. 이게 지어낸 것이 아니고, 이걸 믿자가 아닙니다. 믿든 아니 믿던 세상의 시공간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진척이 되니까 뒤늦게 우리는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에요. 내가 일의 주체가 아니니까.
이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는 거예요. 제가 사기 치는 게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꽃이 피어 있다고 칩시다.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시간에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그 동일한 시간에 남자가 핸드폰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있단 말이죠. 그것을 이렇게 나란히 깔아봅시다. 동시대에 일어난 일들이 나란히 포진되어 있습니다. 나란히 세워보는 겁니다. 이 사건들은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덩어리 속에서 한 단면을 잘라낸 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 전체를 식빵 덩어리가 여기면 칼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주 멀리 떨어진 어떤 우주인이 빠른 속도로 달아나게 되면 그 공간적 속도로 인하여 그 우주인은 자기 쪽에서 새로운 현실 단면을 자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주인이 보여주는 그 동시적 단면 속에는 지구인에게는 이미 과거에 속하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사가 저쪽의 시작과 같은 시대에 속해버립니다. 우리의 고려시대 이야기가 저 안드로메다에서 어떤 사람은 같은 시대로 보고 있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허블 망원경이 접수하는 모든 현장 사진은 어떤 것은 10년, 20년 전에 있었던 그 시간대가 지금 접수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보다 빠른 게 있다면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이미 이뤘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5절에 보면,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끼리 통하는 시간 층이 따로 있고 우리가 아직까지 합류되지 않는 시간 층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묵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세례요한은 섞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네가 믿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믿지 못하고 알기를 원하죠. 알아버린 것은 안 믿기 때문에 대체물로 아는 거예요. 즉 믿는 게 아니고 아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믿는 건 뭐냐? 내가 믿고자 하는 모든 것은 기껏 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는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재가 믿는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안 믿기 때문에 믿음 티를 내기 위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죄에 불과하다는 것이 발각된 것, 그 발각되게 하시는 주님의 일관성 있는 주님의 현재의 작업이 바로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짧게 이야기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가 됩니다. 즉 내가 만들어 나가는 나가 주님이 만들어 나는 나와 늘 충돌을 일으켜서 주님의 계획이 이기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란 필히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그 내용이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행함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 뜻이란 말이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귀신 말대로 본인은 이미 영적 세계에 빠져 나가 속해있으면서 “나처럼 영적 세계에 갈 사람, 혹시 누구 있어요?” 하는 식으로 이방 말로서 전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권력에 의탁한 사람은 예수님의 안목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상의 역사적 권력체, 국가라는 권력, 민족이라는 권력, 그 권력체 안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아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로고스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말했지만 쉽게 말해서 ‘질서 잡기’입니다. 질서 잡는다고 했는데 원래 질서 잡혀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도 도시에는 질서 잡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촌에 가거나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세계는 결코 인간에 의해서 질서 잡혀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변덕스러워요. 이걸 헬라어로 뮈토스라 해요. 곧 신화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고. 뮈토스는 신화입니다. 곧 ‘신화의 세계’입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과학과 철학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방정식 하나를 적어볼게요.
이것은 ‘믿으라’를 요구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믿던 아니 믿던 이런 식으로 우주가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태양 옆으로 빛이 올 때 태양의 중력으로 인하여, 곧 태양이 질량을 가지고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휘어짐으로 빛도 그 휘어짐을 따라 날아온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상대성 원리와 시장 한복판에서 채소 파는 아줌마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지금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팔아서 애 공부시키는 아줌마가 상대성원리와 무슨 관계있으며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신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내고 싶습니다. 즉 “삼위일체와 붕어빵 파는 노점상의 관계는?” 과연 관계가 있을까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주가 이런 식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손댈 수 없듯이 내가 내 자식 위해서 떡볶이 파는 것은 누가 와서 손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냥 할 뿐이에요. 이런 점에서 인간은 우주를 그렇게 쏘옥 빼닮았어요.
뮈토스, 즉 신화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주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변덕을 신의 변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신과 인간이 교류가 가능한 이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로고스’ 개념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신의 움직임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기에 같은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주가 화를 내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우주 변화의 일부를 담당하는 신이 화를 낸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인간도 우주질서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싸움질하는 신이 있고, 망치 들고 설치는 신이 있고. 신은 변덕스럽고, 욕심쟁이 신이 있고, 바람기 많은 신도 있고, 인간하고 연애하는 신도 있고 그 자식을 낳는 신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뮈토스, 곧 신화(神話)의 세계입니다.
모든 민족에는 신화가 기본으로 다 깔려있어요. 8세기 멕시코에 마야라는 문명이 있는데 데 거기는 처녀를 잡아다가 제단에서 잡아버렸어요. 시집 안 간 처녀를 잡고 어린 아이를 잡아 피라미드 제단에서 잡아 태양신에게 바치게 되는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냐 하면 오직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란, 신과 소통하는 공동체를 유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신의 노여움으로 멸망한다는 겁니다. 옛날 신화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이나 인도나 파키스탄 그런 동네에 가게 되면, 누이동생이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한테 수치를 당하면 그 성폭행범을 잡아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더럽혔다고 집안의 오빠들이 그 누이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즉 신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여인은 희생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권력 아래서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신화의 세계에서의 인간성입니다. 인간 세계의 권력의 끝은 자연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우주의 일부로서 자연이 번개 치면 그때는 같이 울어야 되고, 화도 내야 되고, 자연이 고요하면 찬양해서 제물도 드려야 되고, 자연 따라서 온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한의학사상도 이와같은 사상입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겁니다.
이것이 뮈토스 세계인데 우리는 지금 로고스 세계로 진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 단어 하나에 이런 긴 역사가 있어요. 로고스가 등장한다는 시점은 신화의 세게에서 이성의 세계로 변모할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이성의 칼로 자연세계를 잘라 질서잡기에 나서는 시기입니다. 프로타고라스의 말대로 ‘인간이 곧 만물의 척도’가 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교리나 신학 모든 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세계에 로고스가 개입해서 질서잡기에 나선 그 이성의 시기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성이란 나한테 이익 되는 것과 아니되는 것을 기준으로 이성적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유용성(有用性)’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 작업을 하는 이유가 모든 것은 유용성 때문입니다.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건데 이걸 ‘선’, 착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집안에 시집 안 간 딸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엄마가 골치가 아파져요. 딸은 나이 서른이 차면 시집을 가는 역할을 해줘야 되는데 딸이 시집을 안 가니까 얼마에게는 이게 선이 아니고 악으로 보이는 거예요. 결국 선과 악은 뭡니까? “너는 왜 네 할 일 안 하고 시집 안 가고 있느냐?” 딸은 말합니다. “시집은 혼자 갑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다음부터 다툼이 시작되죠.
유용성 자체가 선이 된다는 말은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자연은 우리에게 선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변덕스러워서 폭풍도 치고, 비도 안 오고, 가뭄도 드니까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유용한 질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성으로 ,우리의 로고스로 자르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적인 이익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개인에게 자유를 주면 자신만이 욕심을 채우려고 무질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뭔가 통제가 필요합니다. 강력한 국가적 통제에 의해서 최고의 선을 달성하자는 것이 플라톤이 제시한 국가론압니다.
국가는 전체 다수의 선을 위해서 개인에게 역할과 책임을 맡겨야 하고 그래서 보다 선한 사람은 정치적 엘리트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야 마땅하고, 좀 멍청한 사람은 밑바닥에 앉아서 똑똑한 윗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 안전하며 어중간한 사람은 중간 쯤에 해당되는 일에 종사해서 전체적으로 혼돈하고 통제가 안 되는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선하게 버티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가체제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최고선을 지향하는 국가 시스템에 도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법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다수의 선(善)을 구현하기 위해서랍니다.
똑똑한 사람이 왕이 되고, 철학자가 왕이 되어서 되는 이유는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것이 합당한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가에 속하는 개인들은 똑똑한 통치자에 의해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교육 실시가 전체 선을 이룰 수 있는 방도가 되는 이유는 모든 인간 속에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즉 인간에게는 누구나 로고스가 있거든요. 신이 인간 만들 때 로고스를 집어넣었어요. 그 로고스는 아이큐 낮은 사람, 무식한 사람, 게으른 사람은 사전에 몰랐다가 교육을 받게 되면, 비로소 자극을 받아서 잠자던 로고스가 깨어나면서 “그렇구나. 이거구나.”하면서 비로소 전체적인 선에 봉사할 수 있는 자기 책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고 이러면 전체적인 국가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를 헤치는 죄가 됩니다.
그래서 옛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 3:10) 북한에 세 번 다녀오신 분이 이야기하는데 북한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북한은 쓰레기장이다.”고 말입니다. 평양 시내를 왔다 갔다하는 그 사람들 전부다 연출하는 거예요. 혹시 관광객 사진 찍을까 왔다 갔다하는 거예요. 아파트 바로 뒤에서 허물어져가는 아파트죠. 그게 뭐냐 하면, 현 상황에서 북한체제의 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김일성을 숭배해야 된다는 이것은 유용성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에 거부하는 것 같으면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수용소에 보내든지 해서 사정없이 잘라버려요.
여러분, 국가라는 것이 이처럼 뭔가 개개인의 몸에는 맞지 않는 억제 체제입니다. 지금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은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있느냐고 이런 고생시키느냐고 할 거예요. 그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과감하게 국가를 위해서 자기 한 몸 던지겠다고 해병대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논개 같은 심정으로 이 몸 바쳐서 나라 살리겠다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서 최고 온도 37도 올라가는데……. 엄마는 걱정도 안 되는 모양이라.
도대체 국가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집어넣고 머리 깎고, 전화 못하게 핸드폰 뺏고.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절대적인 선을 위해서 너는 네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 어차피 나라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널 뽑아서 세워야 된다.” 이게 똑똑한 로고스, 인간의 이성인 겁니다.
그러면 이성이라 하지 않고 뮈토스, 신화세계로 돌아가면 편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실험해보세요. 일단 도시를 떠나보세요. 뒤늦게 귀농하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귀농해서 도시에서 벌던 돈이 그만큼 벌리겠습니까?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성적 놀이를 스스로 포기하는 걸 말합니다. 질서체제를 버리고 혼돈스럽게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들이 원하는 기대치에 부응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도시민의 욕망을 접어야 합니다. 욕망의 세상에서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은 그 질서로 인해 ‘나의 자리’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인다는 말입니다. 숱하게 실패하고 숱하게 시험을 떨어지면서 사람은 서서히 서열화된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모든 게 시험이고 모든 게 경쟁입니다. 거기서 또 타인이 요구하는 업무가 주어져요. 이 모든 것이 로고스 안에서 이성적으로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로고스가 만들어준 질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나의 피난처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산성은 로고스입니다. 국가가 나의 로고스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국가 없이는 불안정해서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쯤해서 로고스가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성경을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에서의 하나님, 곧 요한복음에 나오는 로고스라는 말씀은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뮈토스도 아니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로고스도 아닙니다. 로고스를 치고 혹은 로고스 사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그런 로고스로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 죄 때문에 대신 죽은 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에요. 무엇이 죄일까요?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거든요. 죄가 나를 죄 짓게 만드니까.
나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드는 체계와 그 시스템, 그 중에 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단체로서 세상적인 로고스 시스템을 갖추면서 그동안 2000년 역사로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신조,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적 로고스 관점을 가지고 권력체로서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악마의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이성은 바로 이 로고스 체제에 길들여있고 우리는 그것 없이는 구원이고 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의 지상 삶을 보세요. 무엇과 싸우고 투쟁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살해를 주모한 자들이 누구인가를 보세요.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거대 종교단체입니다. 그 종교 단체가 품고 있는 로고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구원도 따내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천국은 로고스의 세계,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신학이 세 파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로마파,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 하나는 안디옥파, 곧 동방파입니다. 이탈리아에 로마파 있고, 여기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파 있고, 시리아 쪽, 곧 여기에는 안디옥파가 있어요. 이 동방파가 나중에 476년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이 되는 겁니다. 비잔틴 제국이라고 합니다. 서방은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프랑크 왕국이 세워지고 그 프랑크 왕국은 지금의 프랑스인 서프랑크,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항가리인 동프랑크와 지금의 남 독일과 스위와 오스트리아인 중프랑크로 나뉘어집니다. 이 때 조약이 메르센 조약입니다.(870년)
고대 교회에서는 힘없는 예루살렘파가 있는데 126년에 로마가 와서 쿰란공동체고 다 파괴할 때에 같이 파괴당하고 말았습니다. 흔히 에비온파라고 알려진 이 파는 구약성경이 기본으로 하고 복음은 부록입니다. 지금도 에비온파들이 있어요. 산상설교가 최고로 여기고 사도 바울은 부록이라고 여깁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부터 출발해서 사도 바울 거쳐서 다시 산상설교로 돌아와야 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산상설교 지키려했는데 믿음이 모자라서 못 지킨 것을 사도 바울 로마서 가서 믿음 얻어서 이젠 산상설교를 제대로 지켜서 이 땅에 하나의 천국을 이뤄보자는 주의입니다. 신칸트파입니다. 하르낙이라는 종교사가가 이쪽에 속합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다 버려놨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롬 4장) 그리고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거저 받은 은혜로 구원받는데 이러한 법칙은 율법에 관한 법칙이 아니고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예수님의 진짜(?) 뜻인 산상보훈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뭘 버려놨느냐 하면, 이 로고스 세계를 버려놨어요. 로고스 세계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이성세계. 이성세계의 극단적인 모습이 국가. 국가 없이는 우리는 죽는다는 그 생각,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교회의 체제와 전통을 세워나가겠다는 마음을 버려놓은 것은 맞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교회 없이는 살지만 국가 없이는 못 산다”고 말입니다. 교회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 신부는 아주 솔직한 편이죠.
그것은 국가를 사랑함이 아니라 이미 국가 형태가 되어버린 이 가톨릭 자체가 구원받게 하는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투로 말한 겁니다. 가톨릭의 황제가 교황이죠. 그러니까 교황 말 좀 잘 들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교황 계급 밑에 그 다음 단계가 추기경이 있고, 추기경 밑에 주교가 있고, 주교 밑에 사제가 있고, 사제 밑에 부제가 있고 그래요. 그걸 제일 먼저 거론한 사람이 로마에 클레멘트 또는 클레멘스란 사람입니다.
군대에서 대장 없이는 안 되는 것처럼 교회는 주교가 대장이라고 했어요. 모든 성도가 다 장군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키프리안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교회란 가견적인 정통 기독교의 최종 상태라고 했습니다. 주교 없는 교회가 없고, 교회 없는 구원이 없으니 주교 말 안들으면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교가 교인들에게 언어로 된 문장을 나열하겠지요. 그 문장을 주교 말대로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교의 권력에, 로고스 권력에 복종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복종할 때 주교가,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확정해 줄 것이고 이렇게 확정받으므로서 말미암아 로고스적 이상체, 즉 국가형태의 교회 안에 적재적소에 자기 자리를 한 자리 차지하면 그 단체는 그대로 이동해서 천국에 자리로 확정된다고 그렇게 로고스적인 질서 사고방식을 옛날부터 선배들이 해왔습니다.
한스 큉이 ‘패러다임’(인식체제)을 도입해서 교회사를 정리한 이유는 기존의 교회는 권련단체고 자기민족과 국가를 로고스로 국가단체의 최고의 극대적인 선을 옹호하기 위해서 하수인 격으로 교회를 이용한 것뿐이지 이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뜻에서 이렇게 도표를 만든 겁니다. 각 시대마다, 국가마다, 종족마다 유리한 대로 자기 민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교회도 그런 조직체로 재편하고 개편하고 온 겁니다. 나름대로 자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민족의 역사와 함께 교회역사도 같이 따라왔고.
미국선교사의 역사를 위해서 한국은 감리교역사, 장로교역사가 따로 마련돼야 돼요. 이들은 ‘정통개혁주의’라는 말을 거론하면서 이 정통개혁주의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옛날 선배들이 했던 권력형 교회를 그대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면죄방식’을 형식을 동원해서 로고스에 입각한 구원체를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이중삼중 계속해서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짓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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