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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이방민족에 대한 경고
2014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스가랴 9:1
(9: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일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작업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비롯해서 세상에 흩어져 있는 각양 민족들은 역사적으로나 지금 동시대적으로 온갖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많고 많은 신 중에서 어느 특정 신을 참된 신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모든 신을 허망한 우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독선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 신이란 현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존재의 당연함을 보장하고 보증하는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을 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이는 곧 자기 자신은 없어져도 그만이다는 주장에 해당됩니다. 과연 자기 자신은 죽어도 그만이다고 속 넓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속하고 나를 태어나게 한 이 민족은 다른 민족에 의해 속히 멸망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여호수아 2장에 기생 라합이 나옵니다. 이 여인과 그 가족은 자기가 사는 이 고장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바로 이 행함이 곧 믿음에 부합되는 행함이라고 신약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이처럼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든지 아니면 참된 행함에 근거한 믿음은 항상 자기 근거박탈을 당연시 하는데 기원합니다. 이는 곧 참된 신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 문제입니다.
즉 참된 신은 인간의 요구로부터 차단된 세계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접속을 시도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차단막을 확장시켜 도리어 신을 찾겠다는 요구를 계속 밀어내므로서 그 차단된 경계선을 뚜렷하게 부각될 뿐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27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참 하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직면할 수 있는 바는 곧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여지없이 깨어졌고 멸망당했고 그 어떤 희망마저 좌절당해야만 하는 민족 속에서 비로소 인간들이 아무리 접근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그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이사야 53:1-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즉 참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로부터 도저히 못 믿을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조치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신을 찾고자 하는 그 의도를 비켜가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이 비록 관념상 해답을 안다고 자부해도 그 해답에 이르는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보는 과정에서 그 해답에 부합되지 못하는 질문을 낳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이다”는 해답을 갖고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부터 도출되는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날 구원하시려고 어린양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셨구나”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어린양으로 구원하신 것은 이제부터 구원받은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어린양을 섬기기 위한 존재로 살기 위함이구나”입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5:15을 보면서 어느 쪽이 정답에 합한 옳은 질문인지를 파악합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바른 질문의 내용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맨처럼으로 다시 가져가면,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지”라는 그 의식 자체가 참된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산물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의 연속으로서 이스라엘 역사는 줄곧 장식되어오고 있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 대해서 아시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애굽은 이방민족이기에 하나님께서 벌주시고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편에 서 있는 자들이기에 구원하셨다”고 한다면 엄청난 오해입니다. 신명기 9:5-6에 보면, “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름하는 그 경계선이 점차 이스라엘 내부로 쏠리는 쏠림현상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발톱이 자라서 살점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면 수술해야 되듯이 이스라엘에서 자라나는 하나님의 구원원칙은 점차 이스라엘 내부로 침투되면서 결국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멸망케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출애굽기 7:3-5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편도 아니십니다. 오로지 예수님 편이십니다.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두 어린양을 주님되신다고 고백케 하시겠다는 것이 구원의 이유입니다. 이 원리가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외치는 바는 자신의 곤고함과 대비가 되는 예수님의 구원능력이었습니다.
이방민족인 아람나라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오를 다시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약한데서 도리어 예수님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에 일어나는 죄를 사용하여 주님의 용서만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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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21강-슥9장1(이방민족에 대한 경고)14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9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320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신이라는 것은 민족마다 다 있는 거예요. 여호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신도 있고 알라신도 있고 또 우리 조선 시대 때, 고려 시대 때 다 신이 있습니다. 한국 역사를 보게 되면 부여, 옥저, 이러한 고구려, 주몽 있던 시대에 각 부족들마다 제천 행사라는 게 있어서 고인돌, 이런 걸 통해서 또는 다른 행사도 있었어요. 박혁거세도 마찬가지고 중국도 마찬가지고. 모든 민족에는 다 신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중에 하나만 자기가 원하는데 자기가 선택해서 하면 될 문제를 왜 굳이 스가랴 9장 1절처럼 온 민족이 여호와를 알아야 된다.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리라.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만 신이고 다른 신은 허무한 가짜라고 내칠 수 있는 그 근거가 과연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왜 같은 민족인데 동등 되게 평등 되게 같이 이렇게 평가하지 않고 유독 여호와 하나님만 신이고 나머지는 유사 가짜 신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신이예요. 다른 신은 인간이 있으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이고 그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여호와께 간다? 그 중에 이게 차단 돼 있어요. 인간이 어떤 신을 만들려고 하면 자꾸만 여호와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말고 다른 이방신 쪽으로 이렇게 방향을 틀수밖에 없게 돼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 여호와! 라고 이야기했던 이스라엘도 그들이 믿었던 신들은 사실은 주변에 있는 신들 이예요. 포장과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전부 다 이방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예수! 하지만 그 예수 뜯어보면 사실은 이방 다른 종교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적인 희구와 기대, 그런 걸로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본래 여호와 본래 예수님한테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가 차단돼 있어요.
이사야 53장에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이렇게 단정 짓고 나오시는 거예요.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라는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의 방패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방패를 가지고 이걸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밀리죠. 밀리니까 우리는 그 방패를 타넘고 밀어주신 주님 앞에 접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방패를 타넘을 것 같으면 방패 값도 못하는 거죠. ‘믿지 마. 믿지 마.’라고 죽죽 밀어내는 거예요.
시위 현장에서 의경들이 방패 가지고 시위대를 해산하듯이 방패 가지고 밀어제치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 대신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신들로 바꾸어가는 겁니다. 예수, 삼위일체, 모든 교리, 교회서 나오는 모든 신학 교리들이 납득이 되고 믿을 수 있는 신으로 다 대체된 거예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되면서 사람들은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서 그걸 반복해서 외우면 구원받는다고 그런 식으로 천주교에서도 가르쳤고 개신교도 그렇게 가르친 겁니다.
요즘 교회가 하는 일은 그거에요. 자기들 믿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반복해서 가르쳐서 ‘이거 믿습니까?’ 동의 구해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세례 주고 그 작업 하는 거예요.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 아닙니다. 원래 신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신은 인간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알아채지 못한다면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점은 뭐냐, 그게 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요. 여기서 우리가 한 템포 쉬어가야 되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을 믿어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보라’는 겁니다. 왜 그 안에 여호와가 들어있어요. 그 안에! 어떤 특정 나라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조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모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나라 빼놓고 이스라엘까지 관심 갈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역사 공부해야지, 이스라엘 역사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 자기 민족이면서도 남의 나라 역사 거기에 편입되기를 원했고 편입에 성공해서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유일하게 그 가족만 구원받았어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떤 뭔가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를 수집해서 ‘아,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접촉하십니다. 접촉하는 방법에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두 가지가 갈라지거든요. 어느 것이 몸통에 도달되는지는 해답을 먼저 받고 해답에서 우리가 그 해답을 기준으로 질문을 우리가 만들어 내버리면 반드시 두 개의 상반된 질문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말을 비비꼴 게 아니고 직접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해서 건져 낼 때 어린양 가지고 건져내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린양이 구원의 해답 맞습니다.
자, ‘어린양 해답 가지고 이런 해답이 나오게 한 질문을 두 개 이상 만들어 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는 어린양을 섬기기 위해서 구원되었습니다.’라는 정답은 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나를 건지기 위해서 어린양을 투입했다.’이러면 그건 정답이 아닌 거예요. 빨리 지나갔죠. 다시 할게요. 어린양이 해답인데 해답을 가지고 거꾸로 질문을 우리가 만들어 보는 겁니다. 만들어 보면서 자기 본색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어린양을 주신 것은 우리는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어린양을 위해서 산다. 어린양께 주라고 높이자.’ 이렇게 나오는 정답은 성령 받은 정답이고, 그냥 육신으로 그대로 된 것 같으면 ‘야, 구원받을 길 없지? 옳지 어린양 믿으면 되겠구나.’라고 자기 구원은 유지하면서 어린양을 하나의 수단으로 도입시키는 방법으로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잠시 잠간 다녀가는 쪽으로 어린양을 생각한다면 그건 정답이 아닌 겁니다. 그건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잘못된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애굽에서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았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답을 쥐고 있으면서도 잘못 질문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굽 나라는 나쁜 나라고 우리는 좋은 나라 맞죠?’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게 잘못 이예요. 그래서 신명기에서 이렇게 합니다. “너희들이 착해서 너희들이 의로워서 구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멸망해야 될 이방나라와 똑같이 자만심이고 이기심이고 교만하고 죄가 많고, 똑같은데 단지 너희들을 건져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의 재료가 되라고 너희들을 건져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명기 9장에서.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이 헌금하면 복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문 하는 자체가 ‘헌금하면 복 옵니까?’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이 해답인데 그 해답을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이 해답을 어떻게 굴리면 정작 내가 노리고 있는 복 받는 거, 내가 행복한 것, 내가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는데 이 예수를 어떻게 활용하면 될까,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천지 같은 경우는 성경공부 하거든요. 성경공부 열심히 하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목적은 뭐냐,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정답이 아닌 거예요. 그건 성령 안 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정답에 해당하는 질문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령을 받아서 하는데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여기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돼 있거든요. 다메섹을 지금 내전이 일으키고 있는 시리아입니다. 시리아 수도가 다메섹 이예요. 이 다메섹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 이예요. 대구에서 서울 가는 거리 북쪽에 이곳이 있다 말이죠. 여기에 말씀이 스가랴를 통해서 떨어졌어요.
그러면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이렇게 돼 있어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경계선 만들기입니다. 경계 만들기.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을 구분 짓는 경계선, 울타리를 만드는 거예요. 만들면서 그 울타리가 이동해요. 경계선이 고정된 게 아니고 이동해요. 이동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자꾸만 죄를 짓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이제는 믿을 게 못 돼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나라 돼 버립니다.
그러면 경계선이 처음에는 애굽에서 나올 때는 이스라엘 쪽에 여호와 계시고 저쪽 이스라엘 맞은편에는 여호와 없는 것이 되는데 이스라엘 자체가 죄를 범하다 보니까 이방인과 이스라엘, 자기 백성과 남의 백성을 가르는 경계선이 이스라엘 내부로 파고들어 와요.
윤 덕기 집사님이 오늘 못 온 것은 발톱이 파고 들어갔죠. 이제는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경계선에 파고들어 와서 같은 이스라엘 내에도 이방적인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점점 더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수술해야 돼요. 그 틈 속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진짜 여호와의 모습이 고난 받는 모습으로 핍박받는 모습으로 분출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십자가에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를 안 좋아하는 겁니다. 교회 큰 걸 좋아해요. 덩치 큰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우리끼리, 맨날 우리교회라. 우리끼리, 우리교회, 우리끼리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지방교회도 마찬가지고 웟츠만 리 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떤 단체 어떤 교단이 되면 자기들끼리만 정단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이단이고, 자기들끼리, 자기들 끼리에요.
하지만 그거는 십자가가 그 살을 파고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들끼리가 한 편이 될 수 있습니까? 나부터도 나 위주인데 어떻게 예수님 편에 따로 모여서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경계선 만들기, 이 점을 위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출애굽기 7장에 보세요. 찾지 마세요. 오후 되면 찾는 것도 잠 올까 싶어서 겁나요.
거기에 모세가 애굽에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 미리 앞으로 될 일을 미리 다 이야기해줘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가 절대로 히브리 백성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때려서 결국에는 그들이 내 백성을 내놓으면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예리하게 구분하면서 그러한 경계선을 유발시킨 그 작용이 뭐냐 하면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다 같이 여호와가 진짜 신인 것을 알게 함이라.’ 그게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은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의 보충 물로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듣기 굉장히 낯설어 보이는 우리가 뭔가 생각도 못한 언약을 앞장세워서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을 톡! 깨보니까 어린양의 죽음이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산 사람이 ‘나 하나님의 언약 하겠습니다.’라고 손들고 나올 사람이 없어요. 왜냐 하면 어느 누구도 살고 싶지 죽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 하나 죽어서 남 살리겠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나 하나님께 버림받을 테니까 나대신 다른 사람 살리세요.’라고 나올 위인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신이라 하는 것은 항상 내 편이 될 때만 우리는 신이라고 호칭을 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나한테 잘할 때, 남 말고 나한테 잘할 때 우리는 그 신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경배할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날 버린 남자를 왜 사랑합니까?
우연히 잠이 안 와서 TV를 틀어보니까 고등학교 나와서 7년 동안이나 직업도 없이 돌아다니는 아가씨를 어떤 남자가 사귀었는데 여자가 고등학교 나와서 직업도 없으니까 남자가 비전이 없다고 여자를 차버렸어요. 요새는 아가씨 노는 게 결혼 준비 기간 아닙니까? 내 나이가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알고 있는데, 요새는 남자 보기에 여자가 직업도 없고 돈 못 벌면 비전이 없다고 차버려요. 그 여자가 프로야구 리포트 해서 아나운서 되고 난 뒤에는 지금 와서 그 남자가 전화 와서 ‘다시 사귈래?‘ 하고 나왔어요. 그래서 그 여자가 TV에서 손가락질 하면서 ’너 나한테 연락하지 마.‘ 라고 세 바퀴에서 얘기했어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자기가 믿게 돼 있지, 자기를 버린 신을 좋다고 믿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모든 사람으로 다 버림받으라고 보낸 거예요. 모든 사람이 어느 인간도 예수님이 좋아서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보내신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못 믿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제 밤에 제가 컴퓨터를 하는데 컴퓨터는 아무리 해도 저한테는 어려운데 컴퓨터에서 설교 음성을 듣고 동영상을 보는데 갑자기 동영상은 뜨는데 음성이 안 나와요. 컴퓨터 자체에서 음성이 깨지나 싶어서 컴퓨터 끄고 다시 들어가니까 컴퓨터 자체는 음성이 나오는데 동영상을 틀고 음성만 하면 설교고 뭐고 아무것도 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아! 이거 또 컴퓨터 기사 불러서 출장비 줘야 되는가, 걱정하고 있다가 내 힘을 해보겠다고 해서 ‘ 안 들려요.’ 검색해서 하다가 알아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M이라는 영어 단어를 치니까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죠. 그래서 M을 치니까 소리가 안 들리고 ‘음소거‘라 하는데 M을 다시 치니까 소리가 다 들려요. 그걸 알고 난 뒤에 기뻐한 게 아니라 제가 화가 나요. 이걸 왜 컴퓨터 만든 사람이 그 M이라는 숫자를 왜 숨겨놔서 그걸 쳐야 들리도록 왜 그렇게 했느냐 말이죠. 그걸 안 쳐도 나오도록 해야지, 자기들만 알고 있고 O도 아니고 P도 아니고 M을 쳐야 모든 동영상에서 소리가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P치면 나옵니까? F치면 되겠어요? J치면 나와요? 우리는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선택할 권한이 나한테 있다고 본 겁니다. 왜 내가 사랑하고 내 외에는 사랑하지 않는 경계선을 내가 만들기 때문에. 해답은 내가 만들고 결정도 내가 하고 우선 내가 사는 쪽으로 먼저 챙겨놓고 그 다음에 문제거든요. 그래서 나 위하라고, 나 좋아라고, 신이고 뭐고 예수고 다 설정했기 때문에 나머지 경계선은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따로 숨겨놓은 M자가 있을 줄이야.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 같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자주 하는 질문 보니까 답변이 나와 있어요. ‘M을 치세요.’ 그래서 그걸 보고 다시 M을 치니까 ‘아, M을 깔아놨구나.‘ 그런데 나중에 컴퓨터 만든 사람이 다음에 O쳐야 나오는지 바꾸면 나도 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본래의 자리가, 사람은 구원받으면 구원받는 자기 자신을 신봉하게 돼 있습니다. ‘나 구원받았다.’라고 자기 자랑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거는 본래의 자리가 아니거든요.
창조의 본래의 자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했어요. 오늘 저녁 때 이것부터 시작할 겁니다.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창조했어요. 이거 바꿔줘야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창조했어요. 하나님, 신이 창조했다 하면 누구나 다 알아요. ‘신이시여, 날 만들었죠? 나 책임지세요.’ 다 알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것은 33살 먹은 청년입니다. 누가 부처가 만들었다 하면 우리가 얼마나 화나겠어요? 마오메트가 천지를 창조했다 하면 얼마나 화나겠어요? 그런데 기독교는 감히 용감하게 말합니다. 바로 내가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내가 만든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하면서 애굽에게 내가 징벌을 내릴 테니, 징벌을 내리면 야, 이건 천지를 만든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었구나. 그동안 천지를 만들었다고 여겼던 그 하나님이 오히려 진짜 만드신 분을 핍박하는 요인이 되었구나, 그러한 원인 제공자가 되었구나. 내가 바로 누가 만들은 지도 모르면서 신이 만들었다는 그것 때문에 진짜 만드신 분을 내가 미워하고 핍박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잘난 체 하며 살아왔구나. 그 경계선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0장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너 구원도 아니고 애굽나라 파괴됐다는 것도 자랑 질 하지 말고 그 과정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번에 나오면 안 됩니다. 요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단번에 출애굽 해버리면 하나님이 마치 내 편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되심의 의미인데요. 제가 예를 하나 들 테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넓은 공간에 의자가 한 개 달랑 있다. 그렇다면 그 의자가 한 개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의자에다 다른 의자를 딱 놓게 되면 거기서 이쪽 의자는 이쪽 의자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옆에 있는지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고만고만한 존재가 인간들입니다. 인간들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존재 의미를 몰라요.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심지어 왜 죽어야 하는지, 그걸 몰라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나는 부모가 먼저 있어서 태어나고 부모는 돌아가셨습니다. 부모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 됐죠? 이제 더 이상 질문 없죠?’라고 한다면 ‘잠간만요. 그 부모님은 왜 죽습니까?’ 그러면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낳고 죽은 부모가 당신이 있다는 것만 이야기하고 그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당신이 미처 모른다면 당신을 낳은 것 때문에 죽는 겁니까? 아니면 당신을 낳은 것과 당신을 낳는 것과 죽는 것과 관련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답변을 못해요.
오전에도 어려운데 오후에도 만만치 않죠. 성경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을 낳은 죄 때문에 부모가 죽었다고 돼 있어요. 성경 레위기에. 아! 이런 게 성경에 나오거든요. ‘아이구, 나만 있으면 되지 부모 죽든 말든 나는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해답을 지연시켜 놓은 거예요.
그런데 율법, 하나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에이, 몰라도 돼.’하고 일방적으로 미뤄 놓은 그 질문을 되묻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네 부모가 왜 죽은 줄 아느냐? 너 낳은 죄 때문에 죽었어. 너도 죽어.’ ‘뭣 때문에?’ ‘네가 낳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문제까지 전부 다 성경에서 다루게 되는 겁니다. 다루게 되면 성경의 진짜 해답에서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얘야 문제 삼지 말자.’ 하는데 여기에 우리하고 인간이면서 다른 예수님을 여기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보내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의미가 생깁니다. 의자가 하나 있을 때는 앞에 있으나 뒤에 있으나 앞뒤도 성립 안 되는데, 추가된 의자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둘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발생됩니다. 이 의자는 이 의자 옆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앞에 있는가.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에 등장하면 내 인생에 관여함으로써 왜 죽는지, 어떻게 사는지, 왜 우리는 이렇게 우리는 우리밖에 모르는지, 하나님과 어떤 사이인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박 터지듯이 와르르 해답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곁을 떠나버리면 그 자체가 해답 없는 존재가 돼 버립니다. 그러면 경계선이 없어요. 경계선이 없으면 진리가 거기서 안 나오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록 타락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에게 벌준다고 이방인이 망한다. 오늘 본문 같으면 시리아, 아람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스가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너를 망하게 했다. 따라서 둘 다 망하는 입장에서 누가 망하게 했던가, 제 3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내라고 스가랴 9장 1절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그 경계선을 뚜렷하게 하는 거예요.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지금 나는 로마서 7장에 의하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분명히 나는 나이고 싶은데 이 내가 하나님 법에 어긋나고 자꾸 위배해요. 그럴 때 사도바울처럼 ‘오 주여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그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옵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구원받습니까?’ 제가 착하지 말라 했죠? 우리는 죄를 지어야 된다 했죠? 왜냐 하면 이미 죄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죄 지으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누가, 누가 이 죄를 누가 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용서받는 것보다 더 귀한 게 없음을 늘 느끼게 하는 그 작업을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날 말씀 드렸잖아요.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이 어떤 잘나고 국회의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서 받으면 그건 땡 잡은 거고, 용서 안 받으면 그건 살아도 소용없는 인간인 겁니다. 그 용서가 용서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닦달내시고 나를 멱살 쥐고 흔드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웃으면서 흔들립시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흔들려야 돼요. 저를 가만두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스가랴께서 이스라엘에게 멱살 쥐고 흔들기 위해서 아람나라가 멸망할 때 그들도 여호와 알고 이젠 너도 그걸 통해서 여호와 알 때가 되었느니라. 라고 이 말씀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갈라지면서 주어졌듯이 오늘날 우리의 심령도 갈라집니다. 참, 왜 사는지, 왜 죽는지, 그거 몰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왠지 우리는 그것이 궁금해지고 해답이 얻어지고 십자가가 알아지고 이 모든 것이 주께서 이미 구원받은 증거라고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