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하나님의 미움
음성 동영상
2013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4-17
(8: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8: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8: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서 노를 격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왜 이제 와서는 은혜를 베풀기로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은혜라는 배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은혜받는다 는 당사자를 입장에서 봐서는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제시된 것은 바로 법입니다. 이는 율법 없이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상대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나아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고 무엇을 좋아하시는 지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바라는 사실은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흔히들 은혜라고 한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받은 것이기에 누리면 된다는 여깁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누려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바로 그점을 하나님께서 대단히 대노하시고 미워하는 일이라는 사실 속에서 누려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법을 통해서 신과 접촉하는 것은 택한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기원후 200-900년에 걸쳐 현재 멕시코 지역에서 융성했던 마야 문명에서의 신과의 접촉은 40m 높이의 제단을 쌓아놓고 그 위에서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치므로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약 2만명의 포로들이 이 제단에 희생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도 그 시대에, 그 지역에 살았다면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시대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자기 시대의 문화관과 세계관에서 못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눈에 뜨이는 모든 사람들의 진리관이나 인생관은 곧 지금도 지배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신약 성도는 어떨까요? 신약 성도를 파악하기 위해 구약에 나오는 말씀 한 군데를 더 살펴봅시다. 시편 15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의 장막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달고 들어오는 이들로만 채워질 것입니다.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자는 천국에 들어올 수 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 말씀을 대한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나서게 되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시도하면서 필히 드러나는 것은, 자신을 선한 존재를 탈바꿈 시키는 작업도 같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개입되는 것은 인간들의 시간관입니다. 인간들은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흘러서 현재를 거쳐 미래쪽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여기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놓게 되면, 과거에 못 지킨 것은 앞으로 잘 지키면 상쇄가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나나, 오늘날의 나나 앞으로 미래의 나가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서 있는 나에게서 그런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체계가 나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 어떻게 되었던 그 시간조차도 여기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출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직 살아있어 죽지 않을 때까지 죄를 상쇄해줄 의를 양적으로 더 많아지게 할 여유가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이런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요한복음 1:15에 보면,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시간관으로서 포착되거나 저촉된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의 시간은 이처럼 과거-현재-미래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미움의 전개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9:11-13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단 사랑받거나 일단 미워하기로 작정되어 있다면 인간들의 시간 속에서 대상자가 어떻게 진행되든지 그 결정난 점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도리어 시간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처럼 보이게끔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침투하시므로서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만나고 충돌하는 그 지점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구약 때의 율법은 마음 밖에서 압박하는 지경이라면 신약에서 아예 마음 속까지 율법이 침투하여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율법을 제대로 지켜서 기어이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분투 노력하면 할수록 인간은 여전히 미진한 의로움이 항상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에 의한 절망은 말씀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 본문 말씀이나 시편 15편의 말씀을 아예 성도의 말씀 속에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께 미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더욱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절망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런 작업과 더불어, 인간이 미처 예상 못한 경우도 같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신비로운 소식입니다. 성도 본인과 사전에 의논한 적도 없이 일방적으로 성도의 모든 죄를 다 가져가서 ‘자신의 저주받음으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4-25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시간대가 모두 예수님의 피 희생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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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19강-슥8장14-17(하나님의 미움)1312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다루는 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서로 대하게 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먼저 ‘있다.’ ‘눈에 보인다.’ 라고 느끼고 그 다음에 우리가 뭘 느끼느냐 하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좋아할까, 미워할까, 그걸 또 생각을 하거든요.
생각을 하시는데 여기 시편 15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돈놀이하지 말라 이야기에요. 돈놀이 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잖아요. 솔로몬이고 뭐고 이런 거 사채업자 직업 다 넣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하는데 이거 어느 세월에 이거 언제 다 지킵니까? 그렇다고 이것을 안 지키려니 말씀이 여기 담겨있고 또 이거 안 지켰다고 뻔뻔스럽게 나서기도 뭐하고 지키려니까 엄두가 안 나고 감당이 안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거 안 지켜도 구원받을 수가 없는가, 찾다 보니까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 하니까 ‘야, 그거 괜찮네.’ 그러니까 이렇게 ‘그쪽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그 말씀, 그걸 구약이라 하는데, 옛날 언약, 그 언약과 신약의 언약의 차이를 몰라서 그래요. 구약에는 영장을 우리 코앞에 딱 댑니다. ‘변호사 선입권이 있으며 묵비권이 있습니다.’ 체포영장 받고 눈앞에 딱 대서 ‘당신을 체포합니다.’ 눈앞에 딱 오죠.
구약은 체포영장이 만약에 형사가 집에 왔다 하면 도망가면 되거든요. 안 잡히면 완전범죄 되니까 안 잡히고 도망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은 그 영장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마음속까지 집어넣어버렸어요. 십계명이 돌 판으로 돼 있잖아요. 돌 판으로 돼 있으면 어떤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돌 판 없는 곳에는 십계명이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신약에는 십계명보다 더한 계명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쳐들어오게 되면 이거는 출렁출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 안에서 체포영장이 뛰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대로 안 살면 너는 죽어.‘ 이런 뜻 이예요.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며”라고 뒤에 줄줄이 나오는 이러한 계명과 율례들이 그냥 누가 어디 가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내부 속에서 이게 출렁거린다면 우리로서는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게 결국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방식으로 이 말씀들이 지켜지고 쓰여 지는 방도로서 이미 우리가 구원받은 상태에 돌입되게 되는 겁니다. 주머니에다 동전을 많이 넣어보세요. 넣어놓고 뛰어보세요. 특히 츄리닝 같이 주머니가 사선으로 돼 있으면 나중에 한바탕 뛰고 나면 동전 반은 다 떨어져있죠.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네가 지켜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조깅하며 뛰면서 “여호와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며 여호와의 성산, 천국에 갈 사람이 누구냐.”하고 뛰면서 줄줄줄 이것이 바깥으로 주의 복음이 동전처럼 쏟아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쓰여 지는 거예요.
여러분, 삭개오란 사람 알죠? 삭개오란 사람을 하나의 추억으로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돈만 알다가 예수님 오신다는 것이 어디 쇼하는 것일 줄 알고 구경하러 갔는데 키 큰 사람이 있어서 자기는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시선이 마주쳐서 구원받은 사람, 시선이 마주쳐서 구원받은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이 삭개오가 사람 바뀌어진 것은 그냥 잠시 시선 한번 마주쳤는데 구원받은 거예요. 그때부터 삭개오는 주의 종으로 쓰여 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약 오늘 본문 스가랴를 하는데 스가랴 본문 뜻은 이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징벌했는데 이제는 내가 징벌을 바꾸었다. ‘네가 이런, 이런 일을 행하면 내가 징벌하지 않을게.‘라고 한 거예요.
15절에 보면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이렇게 해놓고 앞에 15절에 보니까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은혜 베풀기를 뜻하였나니”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라 하는 것은 그냥 주는 걸로 은혜인데, 여기 오늘 본문에서 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미워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 자체를 은혜 받은 걸로 여겨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무엇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런 일을 하면 ‘아! 주께서 미워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싫어하는 게 이러이러한 거구나.‘ 라고 아는 사람은 구원받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요. 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어르신이 뭐를 싫어하고 뭐를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패밀리, 같은 식구의 같은 천국 식구로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이거 오늘 본문 스가랴 8장 이거 안 해도 되겠네요.’라고 저한테 묻고 싶어서 근질근질하죠. 행하고 싶어도 행할 방법이 없고 행할 여건도 능력도 우리한테는 없어요.
우리가 구약 시대 같은 경우,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구약 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고 이방민족과의 종교적인 차이성, 종교적인 형식상 차이점을 만들어 줬습니다. 그 종교적인 형식상 차이점이 구약 시대기 때문에 이거는 고고학을 아무리 발굴해도 제대로 그걸 다 이렇게 제대로 정립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유카탄 반도라고 현재 멕시코인데요. 에쿠아도르 그 동네인데 그 동네를 옛날에 기원후 AD 200~900년 사이에 문명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야문명입니다. 그 마야문명이 40미터짜리 피라밋을 여러 개 만들어놓고 거기서 뭘 했느냐 하면 우리가 섬기는 태양신은 사람이 심장과 피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심장과 피를 좋아해서 만약에 심장과 피를 안 주게 되면 가뭄이 들어서 나라가 망하게 돼 있습니다.
원래 마야문명은 편서풍 때문에 가물어서 망한 제국 이예요. 모든 제국은 기후 때문에 다 망해요. 하지만 그 당시는 기상위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신에게 잘해야 풍년 들고 농사 잘 짓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서 2만 명 포로의 그 심장과 피를 매일같이 그 제단에 인신공양 했습니다. 참 끔찍하죠. 2만 명이나 되는 심장과 피를 효과 보려고.
저는 이런 마야문명의 그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만약에 내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종교는 바로 ‘우리 신은 심장과 피를 좋아한다. 누구 포로 잡아다가 사람들의 심장을 꺼내어서 그냥 바쳐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복 받는다.’라는 그 당시 문화와 세계관에 우린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는 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시대의 자식 이예요. 그걸 이 껍데기를 벗겨야 되는 거예요. 문제는. 벗겨야 되는데 물론 우리가 벗길 수는 없고 이걸 벗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아들의 모습으로, 독생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침투해 버렸어요. 마치 별에서 온 그대처럼. 김수현이처럼. 그냥 이 속에 침투해 버린 거예요.
침투할 때 마야제단에 오신 것이 아니고 어디 왔느냐 하면 우리 마음에다 독생자가 오시는 방향으로 신약성경이 전개가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진짜 하나님이 말씀 못 지켜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미워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미움 받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거예요. 무엇이 미워하는지를 모르는 그런 시대에.
그러면 껍데기를 벗겨야죠. 양파 벗기듯이 벗겨내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할 때는 어떤 점에서 우리하고 차이가 나느냐 하면 시간이 없어요. 주님이 올 때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 선 것은” 말이 됩니까? 누가 성경이 쉽다고 이야기했습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 선 것은” 하여튼 교인들 보면 어려운 건 다 빼놓고 쉬운 것만 지켜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 선 것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미 시간의 틀이 깨져 버려요. 예수님 만났던 어떤 신하가 ‘예수님이여, 제 아들을 낫게 해달라.’ 고 할 때 ‘그래, 집에 가봐라. 아들이 나았다.’라고 해서 가보니까 아들이 과연 멀쩡하게 나았어요. ‘네가 언제 나았지?’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때 말씀하신 그 순간에 이미 공간을 넘어서서 애는 병이 나았어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시간과 관계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사건으로, 별똥별처럼 하나의 유성처럼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소나기처럼. 하나의 사건의 소낙비가 내리거든요. 사건, 사건이 모든 구석에 뛰어드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없다는 말은 뭐냐, 그럼 인간에게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인간 시간은 쪼개져야 되거든요. 쪼개지면 신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시간이란 게 뭐냐 하면 그것을 뭐로 하느냐 하면 사랑과 미움으로 이야기해요. 사랑과 미움으로!
제가 예를 들게요. 로마서 9장의 예를 들었어요.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았고,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하나님에게 미움 받기로 작정하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일단 태어나고 하는 짓보고 ‘내가 사랑해 줄게.’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너 하는 짓보고 그 다음 것은 네가 착하게 하면 내가 구원해 주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이건 우리 시간대고. 인간의 시간대가 되게 되면 우리는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나쁜 일을 많이 했잖아요. 그러면 나쁜 일의 양을 측정해서 나쁜 일이 만약 50이라면 그 나쁜 일을 깨닫고 난 뒤에 예수 믿고 52를 해버리면 52-50=2 여분의 착한 일 2개가 남아요. 그러면 그것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완전히 복식 부기에요. 차변 대변 나눠서 단기 순이익 뽑아내는 식 이예요. 선과 악을 저울에 달아서 어느 쪽이 옳으냐. 지금도 법원에 가면 저울이 조각돼 있답니다. 천칭이 있어서 악이 많으면 벌 받고 선이 조금 더 많으면 천국 가고. 인간은 기껏 그거밖에 못해요.
그래서 젊을 때 교회 못가면 나이 많아서 교회 다니면, 만약에 젊을 때 교회 안 간 것이 40이라면 50대에 교회 가면 90까지 살아서 가면 다 상쇄되잖아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교회 늦게 와서 미안해서 헌금 1000원 더 내고, 성가대 몇 번 참석 못하면 그 다음에 성가대 참석해서 자기가 불고기 내고, 이러한 기껏 하는 것이 인간의 시간 때문에 전후 따져서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하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사랑받기로 돼 있어.’ 이게 하나님의 시간관 이예요. 그것이 인간의 시간관과 드디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피라밋에다 제단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그 만남의 장소를 제단이 우리 마음을 제단으로 여겨서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충돌 지점으로 내 마음을 활용하시고 사용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 누구냐” 할 때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쭉~ 깔아놔요. 여기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할 때 “정직하게 행하며” 할 때 이제부터 설교 짧게 이야기하면서도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정직하게 행하며”라고 할 때 정직하게 행했다고 하는 그 순간에 정직하지 않고 정직할 수 없는 새로운 요소가 정직하게 행하는 그 현장에서 새롭게 등장하게 돼 있습니다. 어렵죠?
내가 쇼핑에 나서는 것은 평소에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 푸는 것은 쇼핑이고 홈 쇼핑이 최고야.‘ 라고 보통 어떤 여자 분들은 그렇게 해요. 우리교회하고는 상관없고 ’역시 쇼핑하는 건 스트레스 푸는데 최고야.‘ 그렇게 하니까 집사님도 밥 먹고 살지만. 그런데 쇼핑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쇼핑 하면서 스트레스가 있어요. 그건 쇼핑하기 전에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아! 쇼핑하면서 뭔가 미진한 게 남아있는 게 있어요. 아니야, 이것보다 신가라, 이것보다 더 유행하는 거, 미장원에 가봐야 머리가 맘에 안 든다는 것을 미장원에 가야 알 수 있어요. 집에서 보고 드라마에서 보고 전 지현처럼 해달라고 백날 해봐도 그거는 자기 상상이고 미장원 에 가봐야 바탕 자체가 전 지현이를 못 따라간다는 사실을 그때 가봐야 아는 거예요.
성경공부 백날 해봤자 성경공부 속에서 성경공부 따라갈 수 없는 그 미진한 게 나와요. 라캉이란 학자는 이걸 남성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남성은 항상 모든 것을 절제하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다 제거되지 못한 미진한 것은 남아 있다 했어요. 그러면 여성은 뭐냐, 이게 아주 우리의 윤리적 도덕적 심보와 딱 맞는데요. 그럼 여성은 뭐냐, 그러면 그것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아무리 지키고 율법 지키고 십계명 다 지킨다 하면 그 지켰기 때문에 못 지킨 십계명 요소들이 점점 더 크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게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갈수록 낭패다.’ 사람이 설칠수록 절망합니다. 설쳐댈수록 절망해요. 착한 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부담이 더 커져요. ‘고지가 바로 저긴데.’ 등산에 미친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올라가면 되는 줄 알지, 이제는 에베레스트 산소통 없이 올라가야 되고, 이제는 산소통도 안 돼요. 이제는 거꾸로 올라가야 되고 눈 감고 올라가야 되고 온갖 짓 다 해야 돼요. 그래도 뭔가 계속 미진한 게 있어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뭐가 있는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게 있다면, 여성은 뭐냐, 나타나지 않은데 나타나는 게 여성이라는 겁니다. 라캉이란 학자는 말하기를 여자는 없다고 했어요. 왜 여자가 없느냐 하면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는 마이너스(-)남자기 때문에 여자는 아니고 마이너스 남자인데, 마이너스 남자를 보는 순간 거기서 남자이기 때문에 미처 몰랐던 여성성이 새롭게 거기서 창조된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어렵다 했죠? 나도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잡아먹어도 나오는 게 또 있어요. 뭔가 여성은 마치 늘 나의 우상처럼, 다가서서는 안 되는, 다가설 수도 없을 뿐더러 절대로 다가서서는 안 되는 그 미진한 것이 여전히 그 신비로운 백설 공주가 여전히 또 남아있어요. 백성공부와 결혼해 보세요. 시시하지, 그런데 시시한데 백설 공주와 결혼한 순간 다른 왕궁의 백설 공주를 또 찾게 돼 있다니까. ‘아니야, 아니야, 이 여자 아니야, 분명히 이 여자 말고 진짜 여성 같은 여자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라고 계속 찾는 겁니다. 그것은 남자,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남성성, 여성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하고 만났다. 남편을 만나면 남자를 알 것이다. 아니에요. 남편 만나고 난 뒤에 왜 장 동건이가 잘 생겼는지를 비로소 알고 왜 김 수현이를 찾고 왜 만남의 횡단보도에 찾아가는지, 왜 젝스키스인지 나이가 50이 넘은 아줌마들이 엑스오에 왜 거기 빠지는지, 뭔가, 다시 말해서 그 아이돌에 빠지는 것은 당신이 좋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말 이예요. ‘왜 당신이 공연히 나타나서 왜 나를 흔들어 놓습니까?’ 그런 뜻 이예요.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언제 순간을 사랑이라 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사라질 때 그게 사랑 이예요. 사랑하는 자기가 느껴질 때는 이미 그건 사랑 아닙니다. 그건 욕정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진정한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대 앞에 작아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대 앞에 아예 생각이 안 나야 돼요. 그대만 있다면 내 대신 그대만 살아준다면 나는 꺼져져도 괜찮은 그게 사랑 이예요. 참 여러분, 언제 적 이야깁니까? 우리 몸이 그 사랑을 기억해요. 이게 한때 추억으로 남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아무리 지켜도 결국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게 만들어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만들어버립니다. 로마서 7장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양하리로다“ 내가 당신을 이용하면 구원받겠다, 가 아니라 율법대로 못 지키니까 어디 못 지키면서 천당 갈 수 없을까, 오직 예수를 믿어야지,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그대여 왜 나타났습니까?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상의 없이 왜 모든 죄를 대신 용서하기로 십자가 피를 졌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저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 당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일체 죄가 없는 상태로 왜 저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면서 찾아왔습니까?’ 이거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신비로움으로 늘 찾아오는 거예요.
그 신비로움의 자리는 뭐냐, 내가 곤고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거예요. 내가 처절할 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도저히 내가 감당 못할 여전히 미진한 것이 남아있을 때, 그리고 우리는 따라가다가 숨이 헉헉 차서 자포자기 할 때, 그때 비로소 주께서는 슬그머니 그 신비로움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돼 있습니다.
한때 기업에서 우리사주라는 게 있었어요. 노사문제 해결책 중에 하나가 자기 다니는 회사의 주식을 사는 겁니다. 20%를 직원들 우선주로 하는 거예요. 그때 사원들은 나라의 정책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정책을 용납한 기업주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했습니다. 그런데 반 토막 났어요. 그 우리가 산 우리 주가. 그렇게 고마워했던 거, 그래서 이제 노동자도 살겠다 싶었는데 그게 유동성 자금으로 주식을 발행하다 보니까 이게 정작 본게임에서 주식 값이 오르지 않으니까 오르기는커녕 반 토막 나서 자기 회사 주식 사서 망해버렸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이라는 게 우리는 아까 시편 15편 오늘 말씀 같은 경우에는 ‘야, 이걸 지켜야지, 재판을 행하고 진실을 행하고 우리가 공의를 행하고 거짓 맹세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살아야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할 거야.’ 우리는 요 말씀만 지키면 된다고 하는데 실제는 그 말씀의 바닥이 회사 다니면서 우리 사주 사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이 모든 말씀의 범주 안에 포함이 돼 있어요. 따로 어떻게 착함이다. 따로 어떻게 선함이다. 이웃을 어떻게 봉사해야지, 맨날 구제해야지, 이렇게 착한 항목을 만들어서 한다고 그게 지키는 게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일상대로 살아가는 그 가운데서 모든 사생활에 이미 주의 말씀이 침투해서 뭔가 바르게 해보려는데 이게 안 돼요.
그러니까 내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이미 신앙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정말 신앙생활 시작한 사람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내 뜻은 계속 피어나고 있고. 우리 교회 ..역사 보세요. 내 뜻대로 된 게 있던가요? never, never,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고 절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만 증거 할 뿐 이예요.
그런데 만약에 지금 교인이 2000명 와서 예배당 세우고 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좁아서 여기서 이사 가야 합니다. 이사 가서 희망에 부푼 가슴을 안고 이 짓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교회 짓는 게 착한 일이 돼 버려요. 교회 다니는 게 착한 일이 되고. 우리는 항상 쇼핑하는 것처럼, 도박하는 것처럼,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뭔가 미진한 것으로 우리는 갈급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일을 발생시키는 그 자리에서만 ‘이제 내가 미워하는 게 뭔지 알았지?’ 네가 말씀을 지켜서 네 의로움을 유지하겠다는 그 심보. 물론 악마가 준 심보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한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이 신약에서 그게 밝혀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에서 미처 몰랐던 거 십자가를 통해서 다 드러난 줄 압니다. 세리와 창녀가 천국에 간다는 이 놀라운 이야기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는 창기 아닙니다. 나는 도둑 아닙니다.’라고 으스대는 모든 것이 다 부끄러워지도록 날마다 주께서 그 사랑이, 우리를 잊어버리는 그 사랑이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