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2:5-9) 죽으심을 맛보심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05강-히2장,5-9(죽으심을,맛보심)-heb010729.mp3
|
죽으심을 맛보심 (히 2:5-9)
2001년 7월 29일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기는커녕 자꾸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알고서 나오지만 실은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는 나름대로 숨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처럼 활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세우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감으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처럼 간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 오늘도 교회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걸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여름철이 되면 우리들이 사는 실내 공간이 다 공개됩니다. 더워서 문 닫고 있을 수 없는 거지요. 겨울철에 문 꼭 닫고 있을 때에는 몰랐던 내부가 더울 때는 남들에게 알려집니다.
아까 불렸던 찬송가 327장에서도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을 다 열어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여기서 '마음 문을 다 열어놓고 구주를 영접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인간들마다 자기 속내를 꼭 숨겨놓는 문들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예 내가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예수님과 관계해야 합니다. 아니, 아예 마음 문 자체를 폭파시켜 없애야 합니다. 나에게 내 교회 없다고 생각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음 문은 예수님에게는 쓸데없는 겁니다. 교회 와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이 뭘 원하고 계신지, 어떻게 만나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9절 끝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인간의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랍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우리들이 원하는 복이나 주시지 왜 자진해서 죽음을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사명은 타인의 죽음을 맛보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조차 맛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 방향으로 내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이런 인간들이 기피하는 그것을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본격화시키려고 하시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바를 놓치지 않고 건져내시는데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우리가 무슨 멋진 사명이라는 것을 또 내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사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제가 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저는 하나라고 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없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저는 기도원 같은 데서 찾습니다. 거기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큰 믿음을 소지하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괜찮은 내 믿음'을 따로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 의식은 사명 의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명이란 자신 것만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것을 나누어주는 겁니다. 뭐든지 챙긴다고, 그리고 자신 것이 된다고 해서 사람이 만족합니까?
자신의 것이라도 남이 필요하다면 선뜻 내어주는 것이 사명의식입니다. 현대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사명 의식은 사라지고 소유 의식만 잔뜩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난 것도 별로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더라도 상대방이 필요로 하면 선뜻 내어줄 수 있는 마음으로 공개되었을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 있는 사람입니다. 존재의 이유, 존재의 가치가 바로 사명 자체에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주시옵소서!"만을 외치면 되겠습니까. 있는 것이라고 남들이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사명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믿음'이라고 말해도 과연 참 믿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저 다른 집에 가구 들여놓듯이 자기 집의 가구로서 들여놓으려는 그것이 무슨 참 믿음이겠습니까. 있는 거라도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그 공개된 마음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심이 없는 삶입니다.
죽으심을 맛보겠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받은 사명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지요. 도리어 타인을 위한 내어줌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우리의 죽음을 맛보려 하십니까? 우리 성도들의 재주나 실력을 격려하고 잘 부추겨주면 우리가 알아서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저는 빌립보서를 잠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뭘 알았기에 무엇으로 자신의 인생 길을 결정짓겠다고 나섭니까?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 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을 다음과 같이 결정지었습니다. 즉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말입니다.
자...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아니 예수님만이 해내신 그 죽음의 맛보심을 통해서만 우리가 부활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6-7절에 보면,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죽음을 맛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왜 잠깐 동안이지만 왜 인간들이 천사보다 못하게 한 겁니까? 왜 지금은 천사같이 날개 짓하며 휘파람 부는 생활이 안되게 하시는 겁니까? 아니 더 나아가서 왜 예수님도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죽음의 맛보는 고통을 주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기 고통의 원인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그 죽음은 또한 인간의 죄와 연관시켜 나갑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쪼르르 쫓아와서 우리의 죽음부터 먼저 맛보게 하십니다. 그 쓰다 쓴 그 맛을 말입니다. 옆에서 누가 옆구리를 푹 쑤시면서 "예수님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금방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내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시편 8편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만으로 왜 사람이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한 지 그 이유가 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90편에 보면, 시편에서 말씀하신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90:7-10입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 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기에 보면, 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즉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죄라는 별게 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늘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실패하기 싫습니다. 저는 늘 강건해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하기 일 수입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타나 있는 인생이란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심각하게 보십니다. 그 결과로 인해 우리네들의 인생이란 비극적인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해 봤자 80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라는 것도 통해 내놓을 수 있는 자랑이라는 것이 기껏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 두 명과 더불어 열심히 삽니다. 물론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아직도 섭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남편을 왜 죽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선하면 선했지 내 남편은 왜 죽이십니까?"라는 갈등의 연속입니다. 이와 같은 섭섭함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려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선하심을 같이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가 시편 90편에 보니, 주님께서 우리의 은밀한 죄를, 우리도 미쳐 모르는 죄를 주님의 밝은 빛 앞에서 내세워보니 우리는 주의 분노로 고생해도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시편 90편에 이렇게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나와 있어도 바보 등신 같은 우리들은 이 사실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이것이 너의 실체이다. 이것의 본질이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죽어야 돼"라는 것입니다. "살고자하는 의지는 인정하지. 그것은 너의 고집이고 너의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그 의지는 너의 본질과 부합되지 않으니 불행의 씨앗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거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나옵니다. "좋습니다. 제가 죽어야 하는 죄인인 것을 자인합니다. 하지만 저도 고집 꽤나 있는 놈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죽이기 전에 제가 먼저 자진해서 죽겠습니다. 자살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반항의 극치를 드러냅니다. 방금 제가 말을 강하게 했지만 사실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내뱉는 말속에 이런 정신이 질퍽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죄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일부러 맛보려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나온 소리입니다.
이제부터 그 은혜의 내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3:11-17에 보면,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이가 벌리시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런 설교를 요단강에서 할 때, 이 때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 당신은 죄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죄를 씻어 달라고 저에게 오시는 겁니까?" 하고 세례 주기를 주저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내가 씻을 죄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신 짊어지고 갈 내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면서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 개인의 세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이야말로 과연 함께 우리 죄를 씻을 분이라는 겁니다. 이 세례 받음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을 살게 되십니다. 즉 우리의 죽음을 맛보기 위함입니다. 왜요? 우리를 죽음을 통과시켜 부활의 나라에 이르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아까 소개한 사도 바울의 인생관을 보면서, 왜 그는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맛보고 가신 죽음의 길, 이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가는 길이 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기억치 않는데 우리도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은 잠깐 동안 고생시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고생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깐입니다. 잠깐을 못 견딥니까! 잠깐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됩시다. 목욕탕의 사우나도 잠깐입니다. 과거는 잊어버리고 비록 힘들지만 먼저 우리의 죽음을 맛보신 그 죽음의 쓴맛을 우리도 용감하게 맛볼 수 있다는 기쁨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것이 실제며 현실입니까? 그렇다면 그동안 헛되고 헛된 것으로 우리가 심한 마음 고생했다는 것을 깊이 알게 하시고 용감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 죽으심을 맛보심(히2:5-9)
------------------------------------- (히 2: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히 2: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저는 교회에 숨겠습니다 !!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기는커녕, 자꾸만 뒤로 주춤주춤 하면서 물러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알고 나오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나름대로 자기가 숨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처럼 활용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세우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교회로 도망을 친다는 말이죠.
* 인간 : 제가 지난주에 교회에 갔습니다. * 주님 : 그래서? * 인간 : 아니, 제가 교회에 갔다니깐요? * 주님 : 아니, 그래서? * 인간 : 그냥 그렇다는 말이죠. * 주님 : 그냥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감으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된 것처럼 간주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제가 오늘도 교회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적절한 예를 하나 들겠는데, 여름철이 되면 우리들이 사는 실내공간이 전부 다 공개가 됩니다. 왜냐하면, 더워서 문을 닫고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바람이 들어오고, 또한 이웃들도 기웃거리면서 다 보게 됩니다. 겨울철에 문을 꼭 닫고 있을 때는 몰랐던 그 내부가, 그것이 더울 때는 남들에게 다 알려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울철의 집처럼 꼭꼭 닫혀진 교회를 원하지 않는데, 마치 여름철에 문을 열듯이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다 열라고 하십니다. 어디로 도망치거나 숨지 말라는 겁니다. 교회는 없다고 여기고,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공개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죠.
맘 문을 다 열어놓고 ♬
아까 불렸던 찬송가 327장에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을 다 열어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음 문을 다 열어놓고 구주를 영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은, 그러니 인간들마다 자기 마음을 꼭꼭 숨겨놓는 문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그런 짓을 용납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아예 자기가 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예 마음 문 자체를 완전히 폭파시켜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에게 내 교회는 없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마음의 문은 예수님에게는 쓸데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난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어떻게 만나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머리카락이 보일까봐 꼭꼭 숨는, 그런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당한데,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9절 끝에 보면 나오죠.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여기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인간의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뷔페에 가서 음식을 맛보는 것은 몰라도, 하필이면 왜 죽음을 맛보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런데 왜 자기의 죽음이 아닌 남의 죽음을 맛보려고 하시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복이나 잘 주시면 되는데, 왜 자진해서 죽음을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타인의 죽음을 맛보는데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죽음은 고사하고, 자신의 죽음조차 맛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 방향으로 내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사명은 이런 인간들이 기피하는 것을, 그것을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본격화시키려는, 즉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이 놓치고 있는 바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건져내시는데 있다는 겁니다.
사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제가 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왜 우리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하나라고 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사명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사명이 없으면 권태로움이 !!
저는 사명이 없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기도원에서 발견합니다. 거기에 가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믿음을 소지하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이시여, 믿음을 주세요. 괜찮은 나의 믿음을 주세요” 라는 것인데, 즉 괜찮은 자기 믿음을 따로 가지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받아서 챙긴다고 해서 자기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닌데, 이러한 소유 의식은 사명 의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명은 자기의 것을 내놓는 것인데, 자신의 것만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것을 나누어주는 겁니다. 즉 “믿습니다.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해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면, 물론 그럴 리도 없지만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당장에 자기 자랑에 들어갑니다. “나는 기도원에 가서 믿음을 받았다. 너는 없지? 그러니 나는 너보다 믿음이 좋잖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들에게는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믿음조차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불안하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나님,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기입니까? 저에게도 믿음을 주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사명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요. “너도 가졌냐? 나도 가졌다. 그러면 누구의 믿음이 더 큰지 우리 내기를 할까?” 라고 하는, 마치 아이들이 구슬 따먹기를 하듯이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무슨 사명을 가진 자의 삶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비록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지만, 자기의 것을 남들에게 내어놓을 때, 마치 여름철에 문을 열듯이 말이죠. 그럴 때 사람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존재의 가치가 바로 사명 자체에 있는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주여, 주옵소서” 라는 것만 외치면 되겠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사명감이 없기 때문인데, 자기가 조금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가지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믿음’ 이라고 해도 그게 참 믿음인지 의심스러운데, 그저 자기 집에 가구를 들여놓으려는 것인데 불과하다면, 그게 무슨 참 믿음이냐는 말이죠.
그러니 존재의 이유가, 물론 어떤 가수는 연인을 사랑하는 것에서 찾기도 하는데, ‘존재의 이유’ 라고 말이죠. 엄청난 히트를 쳤는데,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존재의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는, 자기의 근육이나 뼈도 다 가지고 가라는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왜 권태로운고 하니, 그게 바로 사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교회에서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누가 더 사명감이 있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경쟁을 시킵니다. 즉 “니는 전도를 몇 명이나 했노? 3명이라고? 나는 4명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명은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필요하면 가지고 가세요” 라고 하는 공개된 마음이고, 그래서 만약에 누군가가 자기 옆에 붙으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그게 사랑이면 사랑을, 또한 지식이면 지식을, 그렇게 공급하고 나누어주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의 점심시간에 보면, 각자 집에서 음식들을 해서 오는데, 계란말이도 있고 시금치무침도 있고 말이죠. 물론 “불고기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매주일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이게 뭐야?” 라고 할 수도 있는데(ㅋㅋ), 그렇게 서로 같이 나누어먹는 재미가, 그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가 아니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심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심을 맛보겠다는 것이 곧 아버지에게 받은 사명인데, 그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재롱잔치를 보시면 되는데, 왜 우리의 죽음을 맛보려고 하시냐는 말이죠. 하필이면 왜 그게 예수님의 사명이냐는 겁니다. 우리의 재주나 실력을 격려하고 잘 부추겨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알아서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데 말이죠.
여기서 저는 빌립보서를 잠시 소개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천국으로 가신 사도바울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준비된 부활의 세계 !!
여기에 보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나라, 부활의 나라에, 다시는 아픈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사기군도 없고 나쁜 놈도 없는, 그런 부활의 세계를 우리에게 공짜로 넘겨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본질을, 즉 우리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는데, 주님이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만이 해내신 죽음의 맛보심을 통해서, 즉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부활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9절 끝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택한 자’를 의미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히 2: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이게 참 어려운 내용인데, 쉽게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그런데 지금은 엄청 고생을 하신다는 겁니다. 학생 때는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고, 어른이 되면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루종일 노동을 해야하고, 그리고 나이가 들면 몸도 아프고 말이죠. 살아가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천사처럼 하늘을 날아다닐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런데 왜 잠깐 동안이지만 인간들이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느냐는 것인데, 왜 지금은 천사처럼 날개로 하늘을 날고 휘파람을 부는 생활을 못하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왜 예수님도 천사보다도 못하게 하시고, 죽음을 맛보는 그런 고통을 주시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너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너희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자기가 왜 죽는지, 그 원인도 모르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이 왜 죽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안다고 하면, 그래서 방금 빌립보서 2장을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우리가 그 죽음의 이유를 알았다고 하면, 이제는 예수님의 세계, 부활의 세계, 영생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예수님의 그 세계를 쫓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가 죽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미래도 역시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해서 우리의 죽음부터 먼저 맛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쓰디쓴 맛을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다른 것은 놔두고 왜 먼저 우리의 죽음부터 맛보시는고 하니까, 그것은 우리를 죽이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차피 죽어가는 인생인데 말이죠. 그러한 죽음의 인생에서 우리의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죽음을 먼저 맛보았다는 겁니다.
근호야, 내가 너의 죽음을 맛본다 !!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마음의 문을 폭파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교회도 없다고 여기고 말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죽음을 맛본다” 라고, 즉 “근호야, 내가 너의 죽음을 맛본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니, 저의 입술을 맛보든지 하면 되는데(ㅋㅋ), 하필이면 저의 죽음을 맛보십니까?” 라고 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쳐다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과 부활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 때문에, 그래서 내가 영생과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만사를 제쳐주고 나의 죽음을 맛보시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나의 본질을 제대로 밝혀주시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아하,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나의 죽음을 미리 맛보신 분 !!
그래서 옆에서 누군가가 옆구리를 쑤시면서 “예수님이 누구야?”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즉시로 튀어나와야만 하는데, “나의 죽음을 맛본 분이야!” 라고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야?” 라고 하면, “나에게 복을 주는 분이야!” 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미리 맛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어서 부활과 영생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맛보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를,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시편 8편에서 따온 것인데, 4절에서 6절입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그런데 이 구절만으로는 왜 사람이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한지가, 그 이유가 나타나있지 않은데, 시편 90편에 보면 그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5절에서 10절입니다.
(시 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시 90: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인생관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매우 심각하게 보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지요. 그래서 “하나님, 저는 죽기 싫습니다. 늘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실패하기 싫습니다. 저는 늘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하나님, 왜 제 남편을 !!
이것은 제 아내에게 들은 것인데, 어떤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자식 두 명과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교회도 다니고,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도 안다는 말이죠. 그래도 섭섭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남편을 죽게 하셨는가?” 라는 겁니다. 아직까지 결혼도 시키지 못한 자식이 두 명이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 아주머니는 무슨 마음에는 항상 그 밑에 깔려있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선하면 선한 것이지 제 남편은 왜 죽이십니까?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살아서 저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저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라고 하는, 그런 갈등의 연속이라는 말이죠.
물론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남편이 죽은 것이지만, 아마 이런 섭섭함이나 불만이 여러분에게도 다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여기 시편 90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특히 8절에 보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은밀한 죄를, 우리도 미쳐 모르는 죄를 주님의 밝은 빛 앞에서 내세워보니까, 우리는 주의 분노로 고생해도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우리의 수명은 강건해봐야 겨우 80인데, 그리고 그 자랑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말이죠.
너희들은 죽는 것이 당연해 !!
여러분,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렇게 시편 90편에 이렇게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나와있어도,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생로병사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니, 더욱 더 힘이 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즉 “이것이 너희의 실체이다. 이것의 본질이다. 너는 죽어야 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살고자하는 의지는 내가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것은 너의 고집이고, 너의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그 의지는 너의 본질과 부합되지 않으니 불행의 씨앗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좋습니다. 제가 죽어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도 고집이 꽤나 있는 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죽이기 전에 제가 먼저 자진해서 죽겠습니다. 자살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기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를 용납하기 않기에 당연히 우리를 사망으로 몰아넣으시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고집에 못지 않게 오기를 부리는데,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반항의 극치를 드러내고 만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말을 조금 심하게 했지만,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내뱉는 말속에 이런 정신이 그야말로 질퍽하게 깔려있는데, “그만 ‘칵’ 죽어버리란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죄인데, 우리의 죽음을 일부러 맛보려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나오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지도 않은 고집, 이런 발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부터 그 은혜의 내막을 소개해 드리겠는데,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17절입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마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
지금 세례요한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이가 벌이시는 최후의 심판 날이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그분이 자기 타작마당을 만들어놓고, 알곡은 모아서 곡간 안으로 들이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세례요한이 이런 설교를 요단강에서 하고 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물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은 죄도 없으신 분인데 어떻게 죄를 씻어달라고 저에게 오시는 겁니까? 당신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인데, 그러니 이리로 오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세례주기를 주저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씻을 죄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신 짊어지고 가야하는데, 내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이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니 이것은 나와 함께 하는 모든 백성을 죄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라. 그렇게 해서 의를 이루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데,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있는 분이 함께 우리의 운명에, 즉 우리의 죽음에 함께 참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분을 믿는 자들은 함께 죄도 사라질 수 있는데, 그 당사자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분이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내가 대신해서 지고 간다 !!
말이 조금 복잡해서 죄송한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당겨와서 자기가 대신해서 다 지시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즉 “너희들이 고생할 것은 내가 십자가에 올라가서 다 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의 길이다” 라는 것이고, “예수님이 당해야하는 고통이 아니라, 너희들이 당해야하는 고통이다” 라는 것이고, “예수님이 다 이룬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다 이룬 것이다” 라는 것이고,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부활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것은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길이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 히브리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은 잠깐 동안 고생시킨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고생해도, 우리가 다들 힘들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깐’ 이라는 것인데, 그 잠깐을 견디지 못합니까?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
흔히 의사들이 하는 말이, “우리 인간에게 좋은 것은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는 겁니다” 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라고 기억을 주셨는데, 그렇게 잊어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또 들추어내느냐는 겁니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자들이 제일 괴로운 게 무엇인고 하니, 여자들이 과거를 자꾸만 들추어내는 것인데, 잊어버릴 만하면 씹고, 잊어버릴 만하면 또 씹는다는 겁니다(ㅋㅋ).
하나님께서 왜 기억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왜 잊어버리게 하십니까? 하나님조차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여기 13절에 보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진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짜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만이 앞의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좇아간다는 겁니다.
‘크릭’ 이라는 유명한 생화학자가 1953년에 ‘DNA’를 발견했는데, 그래서 노벨상도 받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DNA’를 발견하고 ‘게놈’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아인쉬타인보다도 더 위대하다” 라고 하면, 그렇게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고 까분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유명한 발견을 해놓고도, 그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인간의 의식문제에,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는데 몰두하니까,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하는 겁니다. 에디슨은 무려 3천 가지를 발명했는데,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발명해나갔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가 과거에 잘 했을 수 있는데, 개척교회를 10개나 했을 수도 있고, 또한 설교를 감동적으로 매우 잘 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것을 다 공개하고 나누어주는 자세로 살아야가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의 자신감 !!
왜 그렇습니까? 부활에 대해서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미리 맛보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공개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미리 자기의 죽음을 맛보았기에 말이죠. 그러니 ‘잠깐’ 이라는 이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인데, 어차피 잠깐이니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잠깐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힘든 목욕탕의 사우나도 잠깐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죠. 과거는 잊어버리고, 비록 힘들지만 먼저 우리의 죽음을 맛보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도 그 죽음의 쓴맛을 용감하게 맛볼 수 있다는, 그런 기쁨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활의 세계에 속한 자라는 말이죠.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왜 맛보았겠습니까? “야야,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는 거야. 그러니 너도 걱정하지 말고 너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너의 죽음을 맛보면서, 타인의 죽음에 넉넉하게 동참하면서 살아봐라. 나는 이렇게 죽어서도 다시 부활했잖아. 이제 그 다음차례는 바로 너다. 너도 죽지만 부활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세계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것이 실제이고 현실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동안 잠깐의 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던 것이 다 헛되고 헛된 것으로서, 우리가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는 그런 시험에 들지 않고, 용감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9 오후 6시에 마침. - 녹취 구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히브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히 2:14-18) 죽음에서의 구원 (0) | 2010.09.05 |
|---|---|
| (히 2:10-13) 형제 (0) | 2010.09.05 |
| (히 2:1-4) 구원 정신 (0) | 2010.09.05 |
| (히 1:10-14) 하나님의 원수와 구원 (0) | 2010.09.05 |
| (히 1:5-9) 아들에게 입 맞추라 (0) | 2010.09.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