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2:1-4) 구원 정신 본문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04강-히2장,1-4(구원,정신)-heb01072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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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정신 (히 2:1-4)
2001년 7월 22일 4강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지옥과 심판과 저주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주가 있고 심판이 분명히 있으니 우리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꼭 저주와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8:8-9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이 이처럼 이야기하실 때 그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환경과 배경을 고려해 보실 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니라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 놀란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6:22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려서부터 역사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는 숱하게 많은 위대하고 훌륭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순신, 을지문덕, 세종대왕 등 말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소크라테스나 동양에서 노자나 공자나 석가모니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요. 하지만 결국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모두 지옥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했던 거룩한 자들입니까.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이 땅에 떨어진 것에 경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진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참하게 십자가상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인류의 행복과 복지 증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들은 노력을 했고 아마 사도 바울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여러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너무나도 알고 있으면서 아주 단호하게 증거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저주받는다고 말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는 그것이 그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더라 이 말입니다.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이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가장 큰 방해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즉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시간에 교회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반대로 주를 사랑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즉 저주와 축복의 기준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 사랑을 누가 가장 가로막고 나서느냐 하면 바로 교회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다니고 있는 그 교회를 증거 해야 하는 사명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키워야 된다든지, 교회를 유지 시켜야겠다든지, 교회가 존재해야 된다든지,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 과연 그것이 우리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요? 그래서 교회가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복음이 가로막히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가 있어서 교회를 목회 해야 한다는 당연히 보이는 이 이유 때문에 복음은 사라질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양 열심히 교회 나오는 그것도 문제입니다. 여러분 교회 왔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잊어버리세요. 교회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복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만 생각하세요. 교회라는 굴레를 벗어버리세요. 예를 들면, 저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저 소나무가 우리를 구원합니까? 아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우리를 구원합니까? 아니지요. 교회 왔던 아니 왔던 복음만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본문을 보면 본문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 본문으로 교회를 어떻게 키울까 생각하면 오늘 본문은 전혀 이해되지 못합니다.
본문말씀 1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뭔가 의아한 느낌을 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열심히 종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정성을 다 쏟아 넣은 일을 따로 챙기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고, 양계하는 사람은 양계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도대로 자기가 신명을 바친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사도가 하는 말이,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던지 간에 다 무시하고 지금부터 제 말만 들어야 합니다. 만약 제 말을 듣지 아니하면 큰 물살에 떠내려가듯이 지옥으로 미끄러져 갑니다"하고 큰소리치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자기도 자기 인생이 있다면 우리도 우리 인생이 있고, 자기도 자기 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말은 다 옳고 우리가 한평생 다듬어 온 인생관은 다 엉터리이고, 무슨 이런 횡포가 다 있습니까. 너무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 사도, 자기가 하는 말을 등한히 여기면 지옥 가고 우리가 하는 말은 등한히 여겨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말 아닙니까. 이 얼마나 독선적인 발언입니까.
우리가 이런 점을 생각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심정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곧 같은 신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의 심정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같이 마구잡이로 그저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이 복음을 누가 믿겠느냐. 각자 자기 주관이 뚜렷한데 내가 한 말을 누구에게 먹여주겠는가 모두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니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그만인데 그래도 혹시나 자기가 평소에 생각한 것과 똑같다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그 사람이 믿는 자로 확인될 뿐이다"라는 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가 이런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와 같이 있을 수 없는 기적 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받을 때, "사도님, 저도 저의 환경이나 배경을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경우에만 이 본문 말씀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한 번 들어줄까? 그래도 내 세계는 포기 못해. 사도야 저쪽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에 저쪽 말만 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세계가 따로 있어"라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 본문 말씀이 도저히 받아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다시 봐야 합니다.
여러분, 노아 때 노아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남들이 갖고 있는 각자 각자의 사업에 대해서 다 인정해 주었습니까? 노아가 그들이 하는 자기 일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일했습니까? 그들이 벌린 사업이 잘되기 위해 독려했습니까? 격려나 축복을 해주었습니까? 노아는 그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는 일이 다 있지만 하나님은 그 환경을 너희들을 구원해주는 환경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기대하는 환경이나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의사는 의사라는 환경이 있고, 목사는 교회라는 환경을 가지게 되고, 교사는 학교라는 환경이 있습니다. 월급주어서 밥 먹게 해주니 얼마나 소중한 삶의 환경입니까.
목사에게 있어 노회라든지 총회라든지 환경이 마치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이 있기 때문이고 교회는 이 지옥에서 구원하는데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복음뿐입니다. 노아 때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노아는 깡그리 그들의 환경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노아 자기 입장에 서서 방주만 주창했습니다. 바로 이런 심정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구원했느냐가 오늘 본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3-4절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우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적 안에서 구원의 방식을 맛보았습니까? 저는 이 시간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하나를 뽑아서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기적을 같이 생각해 보시다. 거기 나오는 23-27에 보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기적을 베푸시는데 그 기적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죄 많은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같이 넓은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고 배가 뒤집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함께 물에 빠져 죽게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에 배 밑에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니 이번에는 예수님이 되레 제자들을 보고 꾸짖습니다. "왜 그토록 믿음이 없이 두려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바다보고 잔잔 하라고 명령하니까 그 명령대로 바다가 조용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구원이란 배 위에서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과 전혀 상관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바다 기적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들어있고 동시에 분주하고 최선을 다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같이 들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식을 이 기적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무시던 예수님이 도리어 열심히 일한 제자들을 나무래도 꾸짖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제대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믿음이 뭡니까? 교회 안에서 충성, 봉사하는 것, 헌금 많이 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이란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 즉 의사라는 환경, 교사라는 환경, 공무원이나 사업하는 환경을 인정치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혀 다른 환경을 더 확실한 환경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무언가 하면 주님과 함께 하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풍랑이는 환경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태는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없다고 꾸중들을 만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꾸중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이미 바뀐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내려고 내가 바르게 사는 것으로 구원을 이끌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방식을 말하고자 보여주신 기적과 표적 안에서 우리의 이런 정신자세는 책망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바뀐 환경이 우리에게 구원을 거저 주시는 겁니다.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바로 믿는 자입니다. 그 후에 제자들은 "저 분이 과연 누구신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조금 전까지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가 기대한 바로 인해 두려워했던 바다의 풍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흔히 교회나 집회에 가서 제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목사님, 우리가 예수 믿고 영접해서 중생 했는데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어떻게 하며 살면 됩니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는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예수 안 믿는 자는 죄만 짓고 예수 믿는 자는 죄를 안 짓습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성경의 십계명에는 분명히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 믿고 난 후라도 인간은 보는 것마다 다 탐을 내게 됩니다. "왜 우리는 저 교회보다 크지 않는 거야? 왜 우리 교회는 헌금이 적게 나오는가? 왜 우리 교회에서 운영되는 버스가 없는가?" 등등의 탐욕을 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런 탐심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든 아니 믿든 상관없이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도 받아들이고 있느냐 않느냐 와 관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크신 사죄의 은총을 새로운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 후에는 "예수님이 관연 누구시기에?"에 관심 두게 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1:16-19에 보면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크심', '풍성하심',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즉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주님의 구원의 자비를 더욱 더 날이 갈수록 크게 아는 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십자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상이, 이토록 깊고 넓은 죄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니!"하고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쪽에서 몸부림친다고 해서 배가 안정되고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라는 환경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만 듣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예상하고 있는 환경이 따로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골칫거리입니다. 믿음은 조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환경이 새롭게 주어졌음을 조용한 가운데 믿는 것입니다.
끝으로 잘 아는 예를 들겠습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사랑 할 때, 그 자식이 성공을 했다고 사랑하고 출세에 실패를 했든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성경에 탕자 이야기가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런 조건을 묻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경계가 없다는 것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기적과 천사의 말씀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대한 환경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 주신 환경을 애써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자신이 행한 열심히 인해 자신이 구원되리라는 착각을 하지 않게 해주시고 세상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 구원 정신(히 2:1-4) -------------------------------------------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히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복음과 저주 !!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배경으로 무엇이 등장하느냐 하면, 지옥과 심판과 저주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이런 식으로 저주가 있고 심판이 분명히 있으니, 너희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고 말이죠.
만약 그런 작용이 없다고 하면, 구원 자체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주와 심판이 분명히 있으니, 여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꼭 저주와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8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이처럼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환경과 배경을 고려해 보실 때, “너희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복음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
제가 성경을 보면서 매우 놀란 구절이 있는데, 그게 곧 고린도전서 16장 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주’ 라는 것은 예수님인데,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다 저주를 받는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어려서부터 역사를 배우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숱하게 많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을지문덕, 세종대왕, 이순신 등등 말이죠. 저는 꼽으면 자동으로 이 세 사람인데(ㅋㅋ), 그리고 서양에서도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있고, 동양에서도 노자나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모두가 다 지옥에 가는데,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했던 자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에도 인류의 행복과 복지증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한 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을 너무나 알고 있으면서도 사도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증거했는데,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 즉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 외에는 없어요. 즉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물이 곧 교회 !!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이 있는데, 그것이 곧 교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설교시간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런데 복음이 아닌 교회를 전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교회가 큰 방해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은, 그 반대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주를 사랑하면 축복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즉 저주와 축복의 기준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누가 가장 가로막고 나서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교회의 존재라는 말이죠.
자기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다니고 있는 그 교회를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강요받고 있는데, 교회를 키워야 된다든지,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겠다든지, 교회가 존재해야 된다든지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말씀을 전하면, 과연 그게 우리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줄까요? 심판에서 면제를 받게 해줄까요? 그것을 듣고 죽으면 오늘밤에 낙원에 갈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복음이 가로막히는 시대가 되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게 외부에서 교묘하게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목사가 있어서 교회를 목회를 해야한다는 그 당연히 보이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복음은 사라질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지도 못하면서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죄를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천국에 가는 양이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죠.
교회를 잊어버리세요 !!
여러분, 교회에 왔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잊어버리세요. 교회는 없다고 생각을 하세요. 여러분에게 복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되었는데,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것만 생각하세요. 교회라는 굴레를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저기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러면 저기에 소나무가 있다는 것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전혀 아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가 있다는 것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아니지요. 교회에 왔던 말던 간에 오직 복음만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관점을 가지고서, “이 본문으로 교회를 어떻게 유지할까? 키울까?” 라고 생각하면, 오늘 본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제가 읽어보겠는데, 1절입니다.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뭔가 의아한 느낌을 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열심히 종사하는 일이 있는데, 즉 자신의 명예와 정성을 다 쏟아 넣은 일을 따로 챙기고 있다는 겁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사람은 고기를 잡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을 하고 말이죠. 그리고 사도바울은 사도대로 자기가 신명을 바친 일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지옥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
그런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던지 간에 모두 무시하고 지금부터 제 말만 들어야 합니다. 만약에 제 말을 듣지 아니하면 큰 물살에 떠내려가듯이 지옥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라고 큰소리치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 이야기냐는 겁니다.
사도의 자기 인생이 있다면 우리도 우리 인생이 있고, 자기도 자기 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런데 자기 말은 다 옳고, 우리가 나름 한 평생을 다듬어온 인생관은 모두 다 엉터리라고 한다면, 무슨 이런 횡포가 다 있느냐는 겁니다. 너무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당연하게 “그래, 자기가 사도라고 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등한히 여기면 지옥에 가고, 우리가 하는 말은 등한히 여겨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독선적인 발언이냐는 겁니다. 남을 무시하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제가 가정해서 만들어본 것인데, 우리가 이런 점을 생각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심정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곧 같은 신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이죠. 사도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그 심정은, “제발 좀 믿어주세요. 제 말이 맞습니다” 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모으려고 나오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각자의 나름대로 살아온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다들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끌어 모은다고 해서 모아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복음은 확인시키는 것 !!
“그래, 이 복음을 누가 믿겠느냐? 각자 자기 주관이 뚜렷한데, 내가 한 말이 누구에게 먹혀들겠는가? 모두가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니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그만인데, 그래도 혹시나 평소에 생각한 것이 똑같은 사람이 생기면, 그런 사람이 바로 믿는 자로 확인될 뿐이다” 라고 하는, 그런 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하, 여기에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구나!” 라는 것인데, 물론 거의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가 나와 같이 기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아서 나서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한 번 배워볼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주여, 저는 정말로 주님의 말씀과 복음이 그립습니다. 다른 것은 이제 모두가 다 싫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본문을 사도의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일도 바쁘지만 한 번 들어줄까? 사도니까 저쪽 이야기를 하지 싶은데, 내 쪽은 따로 있어. 내 세계는 포기하지를 못해” 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의 교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사람은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지식을 들은 것에 불과한데, 그러니 그것은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을 뿐 !!
여러분, 노아 때 노아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남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하는 일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었습니까? 그들이 하는 일들이 잘되라고 독려를 해주었습니까? 노아가 그렇게 그들의 일에 대해서 격려나 축복을 해주었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는데, 즉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 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각자의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구원의 배경으로 전혀 인정해주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기대한 것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환경을 깡그리 다 무시하고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죠.
사도가 바로 그러한데, 즉 “너희들이 처한 환경을 나는 완전하게 무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을 주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의사라는 환경이 참 대단하고, 교사라는 환경은 좋은데, 월급이 또박또박 나오고, 또 나중에 노후에는 연금도 제법 넉넉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굶어서 죽을 걱정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런 환경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노회라든지 총회라는 환경이 마치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옥이 있기 때문인데, 교회는 이 지옥에서 구원을 하는데는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복음뿐인데,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기에 말이죠.
노아 때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하나님과 노아는 깡그리 그들의 환경을 모두 무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노아는 자기 입장에 서서 방주만을 이야기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 노아와 같은 심정으로 성경말씀을 봐야한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즉 “사도야, 너의 분야가 있고 나의 분야가 따로 있는데, 어떻게 너의 생각만 옳다고 하는가?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지옥으로 떠내려간다’ 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라고 말이죠. 그런 반발이 생길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게 지극히 당연한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더라는 겁니다. “내가 그래도 사업을 하는 회사의 대표이사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말씀이고 복음인데, 그게 최우선적입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물론 그야말로 기적인데 말이죠.
그런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봐야하는데, 오늘 본문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내가 전한 말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구원을 하셨는지가 포함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식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히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표적들과 기사들로서 !!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 인간을 구원했는가?” 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들어있다고 했는데, 4절에 보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을 증거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지? 금시초문인데?” 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언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적과 그 구원의 방식을 맛보았다는 겁니까? 성경이 거짓일 리는 없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하나를 뽑아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기적인데, 23절에서 27절입니다.
(마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을 베푸시는데, 그런데 그 기적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죄가 많은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지, 그것을 기적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전달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적이 과연 그것을 담아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와 같이 넓은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고 그만 배가 뒤집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함께 물에 빠져 죽게되었는데, 그러니 제자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그 시간에 배 밑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그래도 제자들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답답해서 예수님을 깨웠는데, “예수님,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풍랑이 일어서 배가 그만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잠에서 깨어나서는 도리어 제자들을 보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왜 그토록 믿음도 없이 두려워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바다를 보고 “바다야, 잔잔해!” 라고 명령을 하니까, 그 명령대로 바다가 그만 조용해졌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은 제자들처럼 배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즉 우리가 주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한 일을 하는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너희들은 몰라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하나님은 기적과 표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원하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물론 우리는 그것을 몰라요. 제가 방금 마태복음 8장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함께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거기에 담겨있는 함축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거기에는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들어있고, 또한 동시에 분주하고 최선을 다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같이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이 제자들을 야단치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의 행동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닌데, 주무시는 예수님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깨웠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보고 야단을 치셨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이 제대로 설명되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 그리고 헌금을 많이 게 믿음입니까? 목사를 섬기는 게 믿음입니까? 과연 믿음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바뀐 환경을, 더 확실한 환경으로 !!
믿음이란 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 즉 의사라는 환경, 교사라는 환경, 공무원이나 사업하는 환경, 그런 환경을 인정치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혀 다른 환경을 더 확실한 환경으로 간주하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즉 환경이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 환경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눈에는 풍랑이 이는 환경만 보이는데, 그러니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환경만 환경이란 말이죠.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고 꾸중을 듣는데, 물론 우리도 꾸중들어야 하고 말이죠. 제자들이나 우리는 환경이 이미 바뀐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열심을 내고, 자기가 바르게 살면, 바로 그것이 구원인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는,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그게 아니라, 바뀐 환경이 구원을 공짜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방적으로 바뀐 환경이 우리에게 구원을 그냥 주시는 겁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자라는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바다가 잔잔해졌는데, 그러자 그 이후에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대체 저분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무섭게 출렁거리던 바다도 잠잠케 하신 분이 과연 누구이냐는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조금 전까지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까? “바다야, 좀 잠잠해져라” 라는 것에 관심을 두다가, 즉 자기들이 처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것이 바뀌었으면 하고,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가,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염려했던 환경을 일시에 바꾸어버리는 그분에게 말이죠.
목사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제가 설교나 강의를 하고 나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목사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서 중생을 했는데, 이제부터 무엇을 하며 살고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다운 삶이냐는 말이죠.
여러분, 예수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살아가는 것은 다들 똑같아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만 죄를 짓고 예수를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죄를 짓는데, 또한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말이죠. 십계명에는 분명히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를 믿고 난 이후라도 인간은 보는 것마다 다 탐을 내게 된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저 교회보다도 크지 않아? 왜 우리 교회는 헌금이 적게 나와? 왜 우리 교회에는 운영하는 버스가 없어?” 라고 하면서 욕심을 낸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떻게 저렇게 착하지? 밥까지 다 퍼주고 말이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탐심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를 믿든 아니 믿든 상관없이 인간은 죄를 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무엇인가요? 그 차이점은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도 받아들이고 있는가? 않는가?”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여, 제가 이렇게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해주시다니, 그 정도로 주님의 은혜가 대단한 것이군요. 이렇게 저의 죄를 구석구석까지 다 씻어주는군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새로운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분이 과연 누구시기에?” 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1장 16절에서 19입니다.
(엡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게 무슨 뜻인지 감이 옵니까? ‘지극히 크심’, ‘풍성하심’,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 이라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즉 날이 가면 갈수록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주님의 구원과 그 자비하심을 더욱 더 크게 아는 것, 그게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바다라는 환경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만 듣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바다가 잠잠해지는가?”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나의 죄까지도 다 용서가 되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도대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깊고 넓은 죄까지라도 모두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감탄하고 또한 감사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우리 쪽에서 몸부림친다고 해서 배가 안정되고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예상하는 환경이 따로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골칫거리인데, 그게 올무가 된다는 겁니다. 목사라는 환경, 장로라는 환경, 개척교회라는 환경, 그러한 환경을 무시하라는 말이죠. 환경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 우리를 살린다는 겁니다.
그게 기쁜 소식인데, 거기에는 주님의 풍성하신 사랑이 들어있는데, 용서하심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면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우리가 이렇게 죄 용서를 받는가?” 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 인해서 환경이 새롭게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죠.
ENDLESS LOVE !!
끝으로 잘 아는 예를 들겠습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사랑할 때, 그 자식이 성공을 했다고 해서 사랑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미워하지 않지요? 자식이 열 명이 있어도, 그런 것으로 인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역시 그러하십니다. 성경에 탕자 이야기가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런 조건을 묻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자식을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경계가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왕 교회에 나온 것, 그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살아가자는 겁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풍성하고 대단한지를 깨달으면서 말이죠.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이 다가올 때,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받아들이게 되는 줄 압니다. 그게 바로 기적인데,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교회이고 우리의 욕심인 줄 압니다. 그게 우리가 기대하는 환경인 줄로 압니다. 그러니 오직 복음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다 벗어버리고,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서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8 오후 7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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