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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66:3-5 / 거짓 제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66:3-5 / 거짓 제사

정인순 2013. 11. 6. 15:55

179강-사66장,3-4,(거짓제사)-isa0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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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제사

2009년 2월 11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66:3-5

 

(사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개역)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 66:5, 개역)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거룩이란 양보가 없습니다. 거룩을 유발하는 제사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자리에 가면서도 따로 세상 즐거울거리에 싱글벙글한다면 이는 제사라는 죽음의 자리에 대한 모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소를 잡아드리는 것은 곧 살인함이요, 어린양을 바치는 것은 돼지 피를 바치는 것이고 분향함은 우상에게 찬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입장에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입장에서 제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이 방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얼마나 엉뚱한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가를 알리기 위해 하나님쪽에서 도리어 유혹거리를 만들어서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주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거룩한 본질에 관심없는 자들이 하나님이 조성해주신 유혹을 선택하게 되는데 덥썩 물었던 그 유혹이 나중에는 무서움 공포로 들이닥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솔직하게 제사를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세상 즐거움에만 탐닉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자신의 거룩으로 이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커버할 수 있는 거룩과 의와 선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다리를 걸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오직 ‘피’로만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뇌물 받듯이 귀한 예물을 받고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 생산은 오직 ‘피’로만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피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새롭게 개입하시는 거룩이란 ‘고정된 사물이나 형체가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씻음‘ 그 자체가 거룩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이 아무리 해도 개입될 수 없는 거룩입니다. 인간의 모방이 애초부터 차단되어지는 거룩입니다.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하는 사항은 바로, 어떻게 피가 ‘죄 씻음’을 가능케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죄 씻음이 가능하려면 먼저 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약속과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최초의 인류 사이의 사건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부터보면 성경은 인류의 번식에 대해서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그 숱하게 많이 번식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창세기 4장이라는 관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약속으로 확립되어 있고, 이 약속이 실제 인류 사회에서 구체화되는 것은 반드시 창세기 4장에 나서는 사건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나다.

 

즉 죄라는 것은 사람이 홀로 아무리 신 앞에서 자신이 죄라고 인정해봤지 소용없습니다. 실제적으로 질이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가운데서 밝혀집니다. 그것이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등장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하면서 아무리 자신은 전적 죄인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자백하고 고백해도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아주시면 그의 고백도 다 헛것이 되고, 그는 반드시 그 솟구치는 분노를 어디론가 처붓게 되어 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 충돌에서 피가 발생됩니다. 모든 인간은 피해자, 가해자 이 두 가지 역할 외에 다른 역할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을 ‘제사’라는 형식에 담았습니다. 일반인들의 거룩은 자기를 위한 거룩일 뿐입니다. 즉 비록 거룩을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그것마저 자기 몸을 위한 거룩, 자기의 가치를 치장하기 위한 거룩으로 소비시켜 버립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룩이란 생산해낸 양만큼 넉넉하게 소비시킬 위지에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생각해도 완전치 않음을 압니다. 즉 죄가 늘 일어난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발생되는 죄는 자체적으로 거룩과 의와 선을 생산해서 그것으로 충당하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적으로 해석한 거룩 개념입니다. 바로 이 거룩 개념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피해자로 자처해서 나서시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어떤 거룩을 생산하면 되는지를 알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 3자를 소개합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끝에 보면, 이 성령님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영‘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로부터 피해입은 분의 영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오게 되면 참된 거룩이란 인간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주시는 그 행위가 곧 거룩임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며는 제물은 인간에 의해서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질 때만 그 죽음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내지를 못하는 거룩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악과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제사를 통하고서는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룟 유다나 사람들에 의해서 죽으신 것으로 알지만 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을 죽였고, 또한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선에게 직접 만드신 거룩만이 진정 죄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죄를 물을려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제사에 참여시키십니다. 과연 자기를 위한 제사인지 아니면 자신을 죽이는 제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사의 본질 안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시선만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 제사를 바라보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 즐거움을 따로 챙겨두고 제사 드리려 오는 것은 살인같은 무서운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답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사죄에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죄를 필요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유사 거룩과 가짜 거룩 때문에 예수님께서 희생되어야 했음을 증거케 하십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 즐거움, 우리가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야말로 돼지 피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같이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두 마음을 품지 말도록 아예 우리가 죽은 자임을 늘 자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