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63:1-6 / 붉은 의복 본문
167강-사63장,1-6,(붉은의복)-isa0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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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의복
2008년 11월 19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63:1-6
(사 63: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사 63: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사 63: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사 63: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 63: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사 63: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 인간이 관여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관점을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나름대로 다른 관점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참 하나님을 섬기거나 메시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하나님과 메시아를 섬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아도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는 일이란 기껏 주시는대로 넙죽넙죽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황송해하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추수 이야기를 끄집어 내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일이란 뭘까요? 추수는 순전히 예수님 홀로 하시고 제자들이란 뒤따라 다니면서 줍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참으로 쉽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쉬운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가요?
그것은 여전히 자기 기준, 자기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택배 회사 직원이 초인종 누르고 공짜 선물이라면서 넣어준 그 실체가 만약에 온통 피로 물든 옷을 입은 인물이라면 우리는 심적 부담이 되어서 거절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이라든지, 심판, 저주, 피 같은 용어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담기를 거부합니다. 나의 이미지와 안 맞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돈, 축복, 사랑, 부흥, 결혼 같은 용어는 좋아합니다. 자기 취향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대로 그냥 넙죽 받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검열에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결국 하나님 혼자만이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의 해석에 하나님께서 동조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문을 왈칵 열고 들어올 때는, 자기 세상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복음에 고지식한 목사가 말하기를, “참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찾아오셨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두 번 다시 그 교회를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세상 나라처럼 부강하고 번영하는 나라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었다면 다른 이방나라를 얼마든지 크게 부강시켜서 하나님의 자기 명예와 이름을 드날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오직 ‘거룩’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나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거룩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을 보이지 않았을 때는 가차없이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멸망 작업 자체가 곧 거룩을 표출한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의 출현 이전에 거룩하지 않는 나라가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이 있을 때, 이스라엘 나라는 아예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애굽 나라를 향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 비로소 그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노고로 나라가 이룩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만 이스라엘이 탄생했습니다. 애굽 나라를 맹렬한 분노로 치는 가운데서 ‘어린양 중심’의 나라가 출현된 것입니다.
그 원리는 거룩 작업이 실시되는 현장에서 지속됩니다. 메시아의 옷이 온통 붉게 물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고 유일한 관점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은 포도 알갱이 하나하나로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생산하시고자 합니다. 포도주가 생산되려면 포도 알갱이가 사정없이 으깨져야 합니다. 사정없이 말입니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같은 것은 고려할 처지도 못됩니다.
오직 질 좋은 포도주를 위하여 그들은 혹독한 파멸만 주어질 뿐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을 묘사하면서 ‘음란’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적인 개념을 동원해서 세상을 묘사했을까요? 그것은 한 번 맛본 세상 쾌락은 마치 성적인 유혹과 같아서 아무리 발바둥쳐도 자력으로 헤어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음란이란 자기네들 끼리 탐닉해서 더 이상 다른 즐거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상태를 야기합니다. 자석처럼 자동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어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음란성은 하나님의 입장과 거룩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세상을 음녀로 간주해서 유혹의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이사야 62장에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부로 세우시고 자신은 이스라엘의 신랑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작업은 자기 신부를 맞아들이는 혼인잔치와 더불어 자기 신부가 아닌 자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퍼붓는 작업이 병행되어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9:9에 보면,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고 되어 있고, 그 다음 15절에 보면,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자력으로 세상의 음란성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란 세상 성공과 번영과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음란한 세상의 일부가 되어 포도 알갱이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사랑을 위해 세상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 자격을 얻은 것은 오직 ‘어린양’의 희생덕분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음란성과 이 음란성을 사정없이 짓이겨버리면 하나님의 분노를 믿는 신자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을 짓밟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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