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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62:12 / 거룩한 백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62:12 / 거룩한 백성

정인순 2013. 11. 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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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백성
2008년 11월 12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62:12

(사 62: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람은 늘 자기를 해석하면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특정 무리에 해석을 가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이다고 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자신이 해석하는 해석을 내놓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석하시는 그 해석을 내놓아야 합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늘 해석 당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 해석 앞에서 자기 해석을 버려야 하고 부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거룩한 백성’이다는 해석 말고 또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자, 이 두 가지 해석이 연결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네 상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이라는 개념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훌륭하다’, ‘완벽하다’, ‘완전하다’, ‘흠이 없다’, ‘깨끗하다’라는 의미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러주니 이는 곧 자신이 ‘훌륭하고, 완벽하고, 완전하고. 흠이나 오류가 없는’ 그런 사람인 줄 압니다.

이렇게 되면 ‘구속 받아야 된다’는 개념은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언급하시는 ‘거룩한 백성’이란 ‘구속되어야 될 백성’에게 한 것입니다. 즉 어렵게 말씀 드리자면, ‘거룩한 백성’ 이 전에도 어느 정도 ‘거룩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면 이는 전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의미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거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구속될 입장이 못 되는 자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형편없는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속이 뭡니까? 구출을 의미합니다.

구출이란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자를 외부로 강제로 빼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구출될 자는 자신이 구출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조차 어리둥절하게 모르고 있어야 합니다. TV 프로그램에 보면, 저능자로서 평생토록 남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하게 부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신이 구출되어야 하는지 조차 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가련한 자에게 언론과 법적인 조치가 취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출작전입니다. 자력으로는 도저히 성사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소위 하나님 백성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떤 것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알리시고 하시는 ‘거룩’의 개념을 제대로 전달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매일매일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다지고 또 다지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과 관련해서 두 가지 의미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 의미에 다른 하나는 사회적 의미입니다. 개인적인 의미란, 혼자 자신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고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적 의미란 자신의 과연 누구냐 하는 정체는 자신이 놓여 있는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로 정립되어서 형성된 의미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한에서 북한에 대해 욕을 하던 자가 북으로 납치되어 가서는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북쪽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다보니 어느새 그것이 자신의 제 2의 본성처럼 장착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럴 경우에 ‘나’라는 인간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나가 되는 겁니다.

또한 예를 들면, 어릴 때, 즐겨 놀던 어느 저수지가 그 때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경치 좋은 곳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세계 여러 곳을 돌아보기도 하고 세월이 많이 흘러서 다시 그 저수지를 방문했다면 어릴 때 그 감정이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릴 때 자신이 주장했던 바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어릴 때와 다른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왜 유다 나라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야 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잘못된 ‘거룩’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즉 자신들이 죄에서 ‘구속’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 상태가 됨을 알지 못하고 자기네들 나름대로 율법을 통한 자아 정체성을 다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잠재되어 있던 선입견에서 나온 거룩 개념으로 하나님의 거룩에 맞추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일부러 하나님을 속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마치 노예 생활을 하는 저능자처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짓조차 모르면서 그저 생각하고 싶은대로 사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잡혀 가게 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영적 의미의 정체성입니다. 즉 인간은 개인적 의미의 정체성과 사회적 의미의 정체성 그 자체로부터 구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전혀 하나님의 거룩됨을 모르고 곡해하게 됩니다.

7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고 하나님께서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지명이나 공간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꼭 사람 대하듯이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그 공간에 무슨 사건이 터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수행한 그 어떤 위인이 나타나서 반드시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대로 성취시키고야 만다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구원이 임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이 구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나 주도권이 결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형편없이 오해와 곡해 속에 있었던 자도 우리에 이런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당신이 구원받는데 있어 무엇을 했습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구원이 저에게 임했을 뿐입니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나를 위한 거룩은 사라지고 주님의 공로만이 기초가 되는 거룩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