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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사기 19:1-6 / 12토막 난 첩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사기

사사기 19:1-6 / 12토막 난 첩

정인순 2013. 10. 4. 11:37

이근호

35강-삿19장1-6(12토막난첩)-jdg080622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35강-삿19장1-6(12토막난첩)-jdg08062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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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토막 난 첩

 

2008년 6월 22일

 

본문 말씀: 사사기 19:1-6

 

 

(삿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삿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달의 날을 보내매』

(삿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삿 19:4)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를 머물리매 그가 삼 일을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삿 19:5) 『나흘 만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어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그대의 길을 행하라』

(삿 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오늘 이야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왕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에브라임에 살고 있던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에 친정이 있었던 여자를 첩으로 맞이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첩이 다른 남자와 사귀어서 그만 친정이 있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넉 달이나 기거하고 말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모든 것을 용납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처갓집으로 가게 됩니다. 자기 딸에서 문제가 있음을 안 장인어른이 그 사위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하겠습니까. 또한 같은 남자로서 자기 여자의 부정한 것을 용서해 주기가 참으로 힘든다는 사실을 알았겠지요들. 그래서 장인어른은 그 사위를 계속 붙잡아두면서 진정 자기 딸을 용서했는지 표정을 살피고 싶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사위 입장에서도 장인의 마음을 안심시킬 필요도 있었습니다. 성급하게 호의를 뿌리치고 자기 아내를 데리고 와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자신의 진심이 처갓집에 신뢰를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장인과 사위는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수납했음을 서로가 인정해 줄 때까지 계속해서 머물수록 밖에 없었습니다.

 

 

넉달하고도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장인은 사위를 놔주지를 않습니다. 다시 행실 나쁜 자기 딸을 다시 사위곁으로 보낸다는 것이 안심이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5일째 되었을 때 겨우, 사위는 장인의 호의어린 대접에서 억지로 벗어나는 자기 집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발을 너무 늦게 한 고로 그만 기브아라는 동네에서 해가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기브아라는 고장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이 나그네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기브아 동네에서 어슬렁 거릴 때에 그 위험성을 이미 아는 한 노인장께서 이 나그네의 몸을 자기 집으로 들여서 숨겨주었습니다. 이로서 무사히 그 밤을 보내는가 싶더니만 마침 레위사람 부부가 나타난 것을 알아 동네 불량배들이 그 남자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노인장 집에 닥쳤습니다.

 

 

지금 이 땅에 왕이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치안이 무질서한 때였습니다. 그저 각자의 신앙적 양심에 호소해서 겨우 버티는 시절인데 그 신앙적 양심이라는 여지없이 천시받고 무력하게 된 시대의 광경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량배들은 그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마치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천사를 간음하고자 한 그 동네 불량배가 같습니다. 노인장은 레위인의 신분을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힘은 없었습니다. 왕이 없던 시절에 힘을 가진 자가 활개치는 세상이었습니다.

 

 

약한 자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관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불의가 힘만 가지면 진리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오늘날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서 돈이 말을 하는 시대입니다. 신앙적 양심이든지, 신앙적 정의로움은 사람들에게 모멸만 받게 될 뿐입니다. 돈이 미끼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빌어붙어야 되는 시대입니다.

 

 

옳고 그름이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없고 돈이 생기는 식으로 옳고 그름이 판정되는 시대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정 왕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판정내리고 자신이 결정내리고 자신이 결행하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이런 불의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인 의로움을 지킨다는 것은 소외당할 공산이 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인과 노인은 약자입니다. 무차별 공격을 받지만 누구 하나 그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밀어낼 힘을 보태주지를 못합니다. 노인은 자기 희생으로 나옵니다. 자기 딸과 그리고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뇌물로 주어서 레위인에게 피해가지 않게 합니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다가 새벽에 이르러서는 그만 그 레위인의 아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본질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왕이 없던 시절이라 효과적으로 악을 처단하는 기관이 따로 없는 판국에 레위인은 이 극악무도한 사태를 전체 이스라엘에 알려서 공론화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신의 처의 시신을 12토막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전체 지파에게 보내었습니다. 알리는 방식이 참으로 과격합니다.

 

 

하지만 이 과격한 처리방식은 베냐민 지역에서 일어난 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왕이 없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이 그 깊은 곳까지 까발려진 것입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우선 기준이 필요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이래서는 안된다 달라져야 한다는 그 기준은 바로 출애굽 정신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은 물론 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속에 수용했습니다. 즉 구원이 있기에, 구원의 능력이 마음 속으로 작용하기에 그들은 홍해 바다 가에서 마음껏 하나님께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하나님 최고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진정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느냐 아니 보이느냐가 전혀 문제되지를 않았습니다. 모두들 마음 속에 감사와감격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왕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로 이어져버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흔히들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어디서 구원받았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물론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 죄냐 하는 겁니다. 진정한 죄는 개인에게 불리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봐서 들추어지는 죄가 죄입니다. 즉 인간에게 죄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이런 불상사들이 일어나는 것은 진정 성도가 남 탓하기 전에 자신의 무서운 죄로부터 용서받은 감격과 감사를 얼마나 많이 품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사로운 복수심 말고 진정한 복수는 하나님께서 맡기고 우리는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